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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이 비쳐 보일 만큼 선명한 문장

등록일 2023-01-30 18:58 게재일 2023-01-3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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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글쓰기
조지 오웰

조지 오웰(George Orwell·1903~1950)의 글은 선명하다. 그의 문장을 읽고 있자면, 쓸데없는 감상 같은 것에 빠질 일은 절대로 없다. 문장이 짧고 간결하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글쓰기를 가르칠 때, 무조건 긴 문장보다는 짧은 문장을 쓰라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길고 느려터진 사유를 다루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나 하는 소리다. 생각이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지면 문장도 당연히 길게 늘어지게 마련이다. 길고 복잡한 사유를 짧은 문장에 담아낼 도리는 없다. 조지 오웰은 보통 짧은 문장을 쓰지만, 그것은 보통 자신의 눈에 들어온 대상을 그려낼 때다. 당연히 좀 더 고도의 복잡한 사유를 문장으로 바꿀 때는 문장도 길어진다. 그럴 때조차 그의 문장은 선명하다. 선명하기 이를 데 없다.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인으로서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정치적 입장만큼이나 조지 오웰의 글쓰기는 읽는 사람을 한없이 차갑게 만든다.

조지 오웰은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글을 써냈다. 영국 이튼 스쿨 출신의 엘리트였던 그는 식민지 버마의 경찰, 교사, 중고서점의 주인, 반파시즘 연대의 혁명가, 잡지 편집자 등의 수많은 직업을 거치면서 자신이 경험하고 사유했던 일들과 읽었던 책들에 대해 써냈다. 소설 ‘동물농장’과 ‘1984’, 혹은 ‘버마시절’의 작가로 조지 오웰이 기억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글쓰기의 본령은 그가 이렇게 숨 쉬듯 써냈던 에세이와 서평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조지 오웰의 글을 읽고 있으면, 처음에는 그가 토해내는 경험들과 마주하게 된다. 잘 훈련된 기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듯한 생생한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다. 도시빈민들과 부랑자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고, 식민지에서의 부당한 차별의 목소리들이 귀에 들리고, 자신이 쏠 수밖에 없었던 코끼리의 살로 파고드는 고통이 느껴진다. 이 압도적인 경험들은 그것을 기록하는 사진이나 영상이 아니라 바로 조지 오웰의 글쓰기로 재현된다. 글쓰기에 그림을 그려내듯 쓴다는 ‘묘사’라는 방법도 있지만, 그의 글쓰기에서 일으켜지는 감각은 단순히 그가 ‘묘사’의 기술에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다. 본래 글은 감각을 전달할 수 없는 추상화된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회화나 영화가 감각을 앞세워 의미를 뒤로 끌고 온다면, 글쓰기는 반대로 의미를 앞세워, 감각을 그 뒤로 끌고 온다. 조지 오웰의 글쓰기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란 글쓰기의 기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가진 경험에서 비롯된 생생한 생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에 한정해서 만큼은 글쓰기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웰은 자신의 경험에서 보았던 것, 들었던 것, 피부에 닿았던 것을 언어로 바꾸어 의미로 만들고, 독자로 하여금 감각하게 한다. 그렇게 그의 글쓰기를 읽는 사람은 작가와 거리를 유지하며 자기 자신을 비춰볼 공간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감각이 지나간 자리에는 감정이 남는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글쓰기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독자들이 해묵은 감정을 짜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감정이입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불필요한 감정을 짜낸다. 굳이 위험을 상상하고, 굳이 복수를 상상한다. 그럴 만큼의 원한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모두 그렇게 자극적인 감정을 이끌어 내는 기술에 능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글 속에서 감정은 가장 마지막 순간에, 상당히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찾아온다. 그의 글쓰기는 이를 데 없이 선명하지만, 그 감정은 복잡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그 감정은 바로 독자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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