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란 마치 공기 같아 그 변화라든가 그것이 주는 미묘한 느낌은 항상 감각 안에 포착되는 것은 아니다. 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어린 시절, 앞만 보고 살아가는 와중에는 전혀 그 변화를 자각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살아가기도 바쁜 와중에 그 찬찬한 변화까지 눈과 귀에 담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좀 더 들게 되면, 유독 계절이 새삼스러워지는 순간이 오게 된다. 나뭇가지 끝에 보송거리는 조그만 솜털이 눈에 보이거나, 살갗에 달라붙는 수분 가득한 공기가 계절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럴 때면, 어린 시절 뭐가 좋은지 몰랐던 시의 한 구절도 입에서 마치 노래 가사처럼 맴돈다.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같은 시처럼. 예전에는 일제에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는 이육사 시인의 삶이 시보다 먼저 들어왔다면, 이제는 청포도가 익어갔다던 그의 고향이 먼저 떠오른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꽃이 뭐가 좋은지, 알알이 박히는 열매들이 뭐가 좋은지도 모르고 살다가, 문득 그 계절이 고향처럼 다가온 것이리라.
코로나가 던진 충격 이후, 마스크에 갇혀 서로를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서서히 마스크를 벗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동안 마치 어떤 계절도 존재하지 않는 듯, 아무런 시간을 느낄 수 없었던 기간을 지나니 사람들의 마스크가 아니라 그들이 입고 있는 옷에서 계절을 느낀다. 긴 옷에서 짧은 옷으로 사람들의 옷차림은 아직 뒤죽박죽이지만, 그 변화가 계절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목련과 개나리, 진달래 등으로 찾아온 봄을 지나 여름이 되면, 세상은 온통 초록색 투성이가 된다. 산이나 계곡에서 이 초록색을 질리도록 봐두지 않으면 여름은 끝나지 않는다. 다양한 명도와 채도를 가진 초록색들을 눈에 담아두고, 풋풋함을 지나 거의 날것의 냄새까지 나는 덥고 습한 열기 속에서 시원함을 뿜어내고 있는 숲속의 공기를 마음껏 숨 쉬지 않으면 여름은 끝나지 않는다. 여름이라는 계절은 그렇게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이제 인간은 여름에는 에어컨으로, 겨울에는 난방으로, 실내에만 있으면 더 이상 계절에 영향 받지 않는, 덥고 춥기가 일정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얼마 안 있으면, 계절의 영향 같은 것은 전혀 느끼기 어려운 시대로 접어들게 될지도 모른다. 계절의 감각이란 문학 작품의 한 구절에나 존재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계절에 인생을 비유하고, 계절의 감각 속에 감정을 담아내는 일 따위는 한없이 낡은 무언가가 될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는 그러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으니, 지나친 걱정만은 아니리라.
하지만, 그래도 눈앞만 바라보는 삶에서 잠시 벗어나서, 큰 길 옆에 나 있는 작은 길로 나가면, 그곳에는 언제나 숲이 있고, 나무가 있고, 물이 흐른다. 문을 열고 나가면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이 서로의 옷깃을 스쳐가는 소리, 말소리가 들린다. 축축하면서도 치열한 여름의 공기가 느껴진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더 편리해져도,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이 더 이상 여름의 열기가 아니라 디지털 네트워크 속 무언가로 바뀌어가도, 저기 인간 세계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 자연의 이름을 하고 있는 것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곳에는 숲이 있고, 소리가 있고, 신선한 냄새가 있다.
가끔은 눈 앞에 있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어 자연이라는 책을 보고, 계절이 보여주는 감각을 찬찬히 느껴보면 어떨까. 그러면 분명 그곳에 예전 우리를 들뜨게 했던 여름의 감각이 우리를 한결같이 부르고 있을 것이다. 오랜 기간동안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의 바람이 불어오게 될지도 모른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