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여름이 되었다. 짤막했던 봄은 어디론가 길가에 수북히 떨어진 꽃들과 함께 지나가 버리고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잠깐씩 느껴지던 냉기조차 사라져 후덥지근한 땀이 느껴질 때쯤이 되었다. 계절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인간됨을 확인하는 의례인 것만 같아 가끔은 노력을 기울여 계절의 변화를 느끼려 애쓴다. 계절이 바뀌면 기후도 바뀌고 그속에서 숨쉬는 인간도 바뀌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발전시켜온 기술들은 계절을 거슬러 여전하고 항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준다. 당연히 에어컨디셔너나 냉장고가 없는 여름을 생각하기 어렵고, 또 그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이 실물 세계가 아니라 디지털 네트워크의 세계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계절의 변화에는 점점 더 둔감해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라는 계절의 감각은 그런 의미에서는 인간의 기술적 변화를 거스른다.
낡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여름은 여름이고, 겨울은 겨울이다. 여름이라면 티셔츠 안 쪽에 남는 후텁지근한 땀내가 좋고, 겨울이라면 꼭 닫은 문을 열었을 때 어는 듯한 추위와 함께 밀려 들어오는 겨울의 냄새가 좋다. 여름밤에는 차오르는 땀을 씻어주는 밤의 바람이 좋고, 겨울밤이라면 두터운 이불이 몸을 감싸 들어오는 느낌이 좋은 것이다. 더위를 피하고, 추위를 피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계절에 담긴 의미를 만들어내고 기억 속에 각인된다.
그렇게 해마다 여름이면, 우리는 피서나 납량을 위한 특별한 무언가를 하곤 한다. 계곡이나 바다를 찾아가는 것도, 시원한 것이나 보양을 위한 것을 먹는 것도 그 노력 중 하나일 것이다. 이미 낡은 신문이나 잡지의 납량 특집 역시 더위를 피하기 위한 노력에 해당한다.
물론, 초여름 더위를 피해 무언가를 읽거나 보면서 더위를 피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공포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오싹함이란 대상에 대한 무서움으로 인해 긴장하는 것일 뿐, 실제로 추위를 느끼거나 더위를 가시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늘하고 차가운 생각이 더위로 달궈진 신체를 시원하게 만든다는 납량의 상상력은 순진한 착각이지만 낭만적이다. 한낮의 열기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 상황이라면, 귀신이나 유령, 그밖의 불가사의한 존재에 의해 위협받는 공포가 잠시 멈춘 머릿속 관심을 딴 데로 돌려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까닭에, 살짝 더위가 찾아온 초여름에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공포소설을 골라서 읽곤 한다.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도 좋고, 스티븐 킹의 소설도 좋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위험이 일으키는 서스펜스는 독자의 마음을 죄어, 순간이나마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초여름에는 흡혈귀가 등장하는 브램 스토커의‘드라큘라’(1897)를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이미 흡혈귀의 대명사처럼 자리매김한 드라큘라 백작의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은 조너선 하커라는 변호사가 드라큘라의 의뢰를 받아 그의 성으로 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그의 성에 오자마자 자신이 그 성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성에 가둬둔 드라큘라 백작은 400년 전에 죽은 아내가 환생한 존재인 조너선의 약혼녀 미나를 찾아 런던으로 오게 되고 미나의 친구인 루시의 목을 물어 흡혈귀로 만든다. 이 소설은 조너선의 일기와 미나의 편지 등의 형식을 띠고 있어 내용을 이해하고 공포의 순간까지 들어가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한번 드라큘라의 존재가 각인되고 피를 향한 그의 욕망에 걸린 인간들의 마음이 손에 잡히는 순간, 초여름의 밤은 오싹하니 소름이 돋는다. 그렇게 여름밤은 지나갈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