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복수의 시대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자기가 겪었던 부당한 상처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결국 복수하고야 마는 이야기가 넘쳐 나고 있다.
어느새 드라마 ‘더글로리’가 다루는 복수는 우리 모두의 욕망이 되었다. 일찍이 이청준은 소설 ‘벌레이야기’에서 복수와 용서의 역설을 다뤘고, 이창동 감독은 ‘밀양’에서 이를 곱씹었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에 대한 영화 3부작을 통해 복수라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행위에 대해 이성적이고 지적인 성찰을 행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복수의 서사는 좀 더 직접적으로 욕망을 자극한다. 나도 모르게 손을 꾹 쥐고 몰입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복수를 꿈꾸어야 만큼 실제적으로 비인간적인 폭력이나 부당한 대우를 당했던 것은 아닐 테니까, 그 복수에 대한 감정은 우리가 이야기를 볼 때 늘 그러하듯 상상적인 감정이입에 해당한다. 철학자 니체가 말했던 르상티망(ressentiment), 즉 약자가 강자에게 갖기 마련인 정의롭지 못한 세계에 대한 시기심이나 질투 같은 원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이러한 원한의 감정은 노예의 것이고, 이를 통해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우리는 인간이라면 사회 속에서 누구나 겪기 마련인 질투나 원한, 열등감 등을 통해 나도 모르게 복수의 서사에 빠져들고 만다.
사실, 원한과 복수에 얽혀 있는 이야기는 인류가 생겨나면서 동시에 나타났다고 해도 좋을, 어쩌면 인류의 유전자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과 인간이 얽혀 살아가는 과정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과정이고, 그 속에서 저질러지는 폭력과 증오는 누군가의 기억에 씻을 수 없는 공포를 만들어낸다. 실제로는 전혀 불가능하지만 이야기로나마 시원하게 복수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 그것이 인류가 만들어낸 복수 이야기의 요체이다.
16세기 말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에서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클라우디스에게 복수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살아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지만, 알렉상드르 뒤마가 1844년에 쓴 작품 ‘몽테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에서 에드몽 당테스는 자신을 배신하고 모함해서 감옥에 가둔 자신의 친구들에게 불같은 복수를 행한다. 프랑스 작가로 가장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어 가장 많이 읽힌 신문 연재 소설을 썼던 알렉상드르 뒤마는 언론 미디어가 발달해 점차 고양되기 시작했던 당대 독자들의 욕망을 예민하게 파악하여 머뭇거림이나 망설임을 남기지 않는 훌륭한 복수극의 고전을 남겼던 것이다.
이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보여준 복수의 플롯은 그것이 지금 쏟아져 나오는 이른바 복수의 전형이 되었다. 14년 간 감옥에 갇혀 복수심을 키워왔던 당테스는 감옥 안에서 ‘미친 신부’인 파리아를 만나 원수에 대한 진상과 복수를 위한 지식을 배우고, 그의 시체 가방에 숨어 탈출한다. 그리고 복수에 필요한 재산을 형성하고 백작의 지위를 산다. 그리고 프랑스에 돌아와 이제는 적이 된 옛 친구들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는 것이다.
당테스가 행했던 복수는 배신자들이 갖고 있는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돈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는 이들에게는 경제적 파탄의 복수를, 명예를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부정의 폭로를 통해 명예를 타락시키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도록 하는 복수를, 그리고 법을 왜곡한 이에게는 재판정에서 그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복수를 행한다. 세상에 대해 그릇된 마음과 폭력으로 대하는 이들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복수란 얼마나 상쾌한가. 복수의 실현가능성이나 효용이나 부작용 같은 걱정은 접어두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에만 마음을 써볼까 한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상상은 그렇듯 자유로이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가. /홍익대 교수 송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