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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술과 콘텐츠 사이

누구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콘텐츠’ 삼아 생계에 필요한 돈을 벌고, 작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시대에 자신의 예술적 생산물이 화폐로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일말의 거리낌조차 느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이 신에서 인간으로 이어지는 시대가 규정하는 정신의 발현으로 중요한 대상이었던 시기는 이미 우리에게 멀리 떠나버렸다. 지금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한껏 경멸의 의미를 담아 불렀던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지금 우리에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것이 된 셈이다.예술의 가치는 가늠하기 어려운 복잡한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화폐의 가치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예술가의 생계 때문에, 비싼 예술품에 대한 환호 때문에, 예술작품을 점유한 화폐 가치는 그것 외에 예술 속에 존재하는 모든 다른 가치를 축소시킨다.작가 이상이 1936년에 쓴 소설 ‘날개’는 사실, 그가 화폐의 가치에 의해 예술이 전도되는 당시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두고 쓴 작품이다. 우리는 작가 이상이라고 하면 골방에 유폐된 천재라는 이미지만을 기억하지만, 이 무렵 그의 글들 속에는 당시의 사회 현상에 대한 예민한 관찰의 결과들이 들어 있었다.이상은 폐병을 치료하고자 갔던 온천에서 우리가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물에도 값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하고, 어떤 글에서는 세상에 빈 땅이 없음을 한탄하며 여기저기를 쏘다니다가 자신의 책상에 있는 화분만이 유일한 빈 땅임을 깨닫고 한탄하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이상이 살았던 시대는 모든 것에 화폐가치가 붙어 본래의 가치를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사회였으니 말이다. 그러한 시대에는 화폐로 교환되지 못할 것은 없다. 시간이나 공간, 취미나 기호, 심지어 인간의 노동력과 성(性)까지도 화폐로 환산되는 것이 바로 그가 목도한 시대상이었다.이상의 ‘날개’속에는 소설의 주인공과 아내가 살고 있는 33번가가 등장한다. 모두 꽃과 같이 아름다운 그 33번가에 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카페(당시의 카페는 술을 파는 곳이었다)에서 일을 하는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나’의 아내와 이웃들은 모두 술과 ‘웃음’을 팔면서 살아가는 자본주의적 존재들이다.작가 이상.이 소설 속 주인공인 ‘나’가 비정상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가 화폐가치에 전혀 무지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가치에 무지하다는 것은 사회적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인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작가 이상 자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고안된 인물이다. 이 소설은 결국 화폐가치를 알지 못하던 주인공이 그것을 알게 되면서 결국에는 파멸하게 되는 이야기이다.화폐가치에 무지한 ‘나’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인물은 그와 유일한 관계인 아내이다. 어느 날 외출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외출해서 쓰라고 준 돈을 고스란히 돌려준다. 그랬더니 아내는 자신의 방에서 하룻밤을 재워준다. 이때 ‘나’는 시간과 공간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점점 현대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어 어느덧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에 있는 티룸에서 커피를 한 잔 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 우리가 카페에서 돈을 내고 사는 것은 커피 한 잔이라는 실물인가. 아니면 그 장소의 시간을 사는 것인가. ‘날개’를 통해 이상은 바로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비록 ‘날개’의 후반부에서 ‘나’는 완연한 현대의 인간이 되어 나중에는 ‘돈’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된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것을 파멸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달콤한 즐김이라고 해야 할까.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0-06-08

여름, 시 읽기를 위한 짧은 제목의 수사학

날이 따뜻해져 완연한 여름이 되면 몸도 마음도 조금씩은 활동적인 상태가 된다. 이번 여름에야말로 책을 좀 읽고자 마음이 동한 분들도 적지 않으시리라. 눈에 띄게 한산해진 서점에 들러 서가를 살펴보면, 이 계절에 읽기에 좋은 시집이며, 소설집들의 제목이 적잖게 눈에 띈다. 요즘 나오는 문학책들은 대부분 한 번 들으면 그야말로 쉽고 재치 있는 제목들을 갖고 있어 선뜻 쉽게 꺼내볼 수 있다.예전 시인들은 분명 시어의 메타포, 즉 은유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생각하여,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에 달라붙어 있는 풍부한 의미들을 살리고자 애썼다. 반면, 요즘 시인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독자의 공감을 부른다. ‘진달래꽃’이라는 단어 하나에 한 인간이 살아온 삶과 그 분위기, 욕망 등이 다 담겨 그 가벼움 속에 둔중하고 두터운 의미들이 들어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면, ‘진달래꽃’이야 그저 아무 것도 가리키지 않는 것이라는 시대도 있는 법이니 어느 쪽이 더 낫다거나 더 시의 본질에 가깝다거나 할 수는 없다.최근 일본 정부 환경상인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90CE)의 독특한 화법이 여기저기에서 화제였다. 인터넷에는 재밌는 밈(meme)으로 다뤄져 여기저기서 인기를 얻고 있는 한편,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그의 화법 중 흥미로운 것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지금대로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야말로 일본은 지금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말하고 있는데, 그 원인과 결과가 동어이다. 논리적인 언어 사용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아한 기분이 들 만하다.물론 정부각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겠지만, 시를 좀 읽어보신 독자들이라면 이런 어법이 그리 낯설지 않은 분이 많을 것이다. 1993년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드실 무렵, 남기셨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한 마디의 말은 우리 사회 전반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또 있을까. 또한 이 말을 산이 산이며, 물은 물이라는 그대로의 말로 받아들였던 사람이 또 있을까.우리는 하나의 말이 단지 하나의 의미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말 속에는 그 말의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는 온갖 의미들이 착 달라붙어 있다. 때로는 비꼼 같은 대상에 대한 태도가 언어에 포함되기도 하고, 그것을 위해 반어나 역설 같은 수사법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시를 읽을 때 하나의 단어에서 들려오는 화성과도 같은 울림은 바로 그 시가 펼쳐놓은 은유와 상징의 그물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기형도의 ‘빈집’에서 온갖 종류의 음색을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처럼 인간의 언어 사용이 고도화된 시대 속에서는 자칫 고색창연한 언어적 전통이 무겁게 내려앉기 쉽다. 윗사람의 한 마디를 이리저리 곱씹으며 그 속에 담겨 있는 진의를 파악해야 했던 사회의 분위기는 얼마나 무거운가. 분명 그런 시대의 시는 그 고도화된 언어를 더 나은 방향으로 풍요롭게 표현하여 방향을 틀거나 오히려 당연한 것은 당연하게 말해버린다. 모두가 하나의 말을 듣고 하나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대에는 하나의 당연한 말이 잔잔한 물 위의 파도가 되는 것이다. 앞서 일본의 환경상은 말의 책임을 져야하는 자리에서 말의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니, 그런 어법을 ‘잘못’ 이용했던 셈이고, 웃음거리가 될 만하다.다시, 서가에 꽂혀 있는 시집들의 제목을 쭉 눈으로 훑는다. 어떤 제목은 무언가 풍부한 함의가 담겨 있을 것만 같아서 눈길이 가고. 어떤 제목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어서 눈길이 간다. 시의 언어에 있어서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때의 내 기분과 계절의 냄새가 있을 뿐이다./홍익대 교수

2020-05-18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진다

김동리의 단편집 ‘무녀도’.인간이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그 대상을 어떤 언어로 포획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어쩌면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때로는 그에게 딱 맞는 그가 자신을 부르고자 하는 이름으로 그를 불러주지만, 때로는 싫어하는 이름을 강압적으로 붙이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가 붙인 이름은 그의 정신과 신체를 옭아매는 구속이 되고, 혐오의 언어가 된다.제국주의 시대 유럽이 ‘아시아’라는 신비에 싸여 있는 공간을 보고 싶은 대로 바라보고(혹은 바라보지 않고) 붙였던 이름은 오랜 기간 동안 아시아를 비롯한 비유럽의 공간들을 탐험과 모험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른바 탐험의 대상으로의 동양에 대한 호기심의 열망은 그렇게 언어와 매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의 명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서구 문학사의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동방을 향한 모험이나 여행기들 속에 담겨 있는 진귀한 동양의 이야기들의 편린들은 바로 그 명명의 역사를 증언한다.지금은 보편적인 모험 이야기로만 생각되는 대니얼 디포(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1719)’는 당시의 유럽인들이 외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표상하는가 하는 것을 낱낱이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자신과 똑같이 숨 쉬고 움직이고 있는 한 자율적 인간에게 로빈슨 크루소가 붙인 ‘프라이데이(금요일)’라는 이름은 인간의 지식문명이 대상에게 보여주는 인식적 폭력,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대상을 신격화하는 언어나 악마화하는 언어, 모두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슷한 뿌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김동리(1913~1995)의 ‘무녀도(1939)’, 그리고 나이지리아 작가인 치누아 아체베(1930~2013)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1958)’는 식민지를 겪었던 국가의 비슷한 시기, 비슷한 상황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이 두 편의 작품은 제국주의적 폭력 속에 자기의 이름을 잃은 ‘프라이데이’들이 어떻게 저항하고, 어떻게 패배해갔는가 하는 것에 대해 기록한다.‘무녀도’의 무당 모화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이보족의 오콩고는 모두 서구로 대표되는 외부 세계의 문화적 식민지화 속에서 자신의 자식들이 자신의 가장 큰 적이 되어 자신이 평생 지켜온 가치를 부정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치누아 아체베물론, 그들은 단지 피해자는 아니다. 서구에 의해 식민지를 겪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낭만화하거나 합리화해주지는 않는다. 무당인 모화는 자신의 아들 욱이가 자신과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는 욱이가 소중하게 품고 있던 성경을 불태우고 욱이를 칼로 찌른다.‘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지다’속 주인공인 오콩고의 아버지는 호칭이 없는 남자, 즉 부족 내에서는 ‘여자’라고 불리는 남자였고, 오콩고는 그런 그를 경멸하여 최선을 다하여 부족 내에서 성공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라져야 한다는 그 힘으로 살아온 그는 점점 사회에서 폭력을 용인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그의 아들 은워예는 그를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이후 자신의 아버지에게 반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따라서, 이 두 작품을 단지 서구 열강의 문화적 침략에 저항하다 파멸해간 영웅들의 이야기로만 보는 것은 어쩌면 이 작품들을 읽는 올바른 독법은 아닐 것이다. 단지 ‘우리 것이 아름답다’는 막연한 긍정은 타인이 우리를 규정한 언어를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할 뿐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리 아픈 것이라도 스스로 바라보고 자기 규정할 수 있는 언어, 바로 그것이리라./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0-04-20

청춘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김승옥 작가그래도, 꽃은 피고 있다.서로 반갑지만 그리 반가워하지 못하는 얼굴들 사이로. 새로 학교를 들어간 아이들의 설렘이나 새롭게 만나게 된 인연에 대한 예감을 쉽사리 표현하기 힘든 요즘이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김없이 꽃은 피고 있다.생각해보면, 형편이 너무 어려워 죽을 것 같이 힘들던 시기에도, 전쟁을 겪으며 온통 세상이 끝날 것만 같은 시기에도, 꽃은 어김없이 이맘때가 되면 피었을 것이다. 그 시기 힘들었던 이들은 그 꽃을 보고 잠시나마 위로를 얻었을지, 아니면, 무참한 시간에 오히려 부아가 났을지 가늠하기 어렵다.지금까지 인간이 자연에 대해 노래하고 썼던 글들은 그렇게 인간이 가지는 인간으로서의 고됨과 절망에 대비되어, 그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저렇게 ‘저만치’ 놓여 있는 자연의 무심함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연의 시간은 그렇게 인간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원리를 따라 흘러가고 있는데, 인간은 그것을 보며, 때로는 인생을 그것에 비유하거나, 때로는 훨씬 더 심하게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에 비교해 그 무심함을 탓한다.우리가 마치 청춘의 상징처럼 생각하고 있는 ‘막막함’이나 ‘무분별함’은 어쩌면, 그러한 사고의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서구에서 오랜 기간 동안 문학이 인간과 사회의 운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뤄왔던 소위 ‘성숙한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던 것에 비해, 봄날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처럼, 가볍고 변덕스럽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젊음을 문학의 형식을 통해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용기를 필요한 일이었다.문학이 ‘청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고 독자들이 그것에 열광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지금은 문학의 가장 커다란 주제 중 하나인 ‘젊음’이나 ‘청춘’의 유동성과 덧없음은 실은 근대 이후에 ‘발굴된’ 것이거나 ‘재발견된’ 것이다.어느 시대에나 ‘막나가는’, 그래서 ‘미성숙한’ 젊은이들은 존재해왔지만, 그것을 문학으로 만드는 대부분의 서사들은 결국 그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상상해왔다. 무분별했던 아이가 세상의 온갖 쓰디쓴 경험을 하고 나서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전형적인 서사들은 결국 젊음이 갖는 독자적인 가치보다는 완성된 인간에 대한 미달형의 상태를 극적으로 강조한다. 이러한 미숙한 젊음을 예찬한다는 것은 항상 주류 사회의 관점으로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위험한 ‘신드롬’으로 표상되거나 사회의 올바른 기능을 위협하는 반항적 태도로 간주되기 일쑤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음은 예찬할 만한 가치를 갖는 중요한 문학의 주제다. 젊음의 미숙함이란 죄악이 아니라 풍요로운 감정과 감각의 산물인 까닭이다. 진중하지 못하고 끓어 넘치는,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젊음이란, 바로 짧은 순간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일회적이고, 그래서 아름답다.물론, 이처럼 ‘청춘’의 아이콘이 된 그들의 반항은 오히려 기성 세대들에게는 청춘의 추억을 자극하는 대상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막 힘겹게 그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기억은 언제나 보정되고, 청춘의 고됨은 채색된다.오랜만에 모처럼 서가에서 어떤 세대에게는 청춘을 상징했을 김승옥과 최인호의 책을 하나씩 꺼내본다. 김승옥이 고백하는 부끄러운 어린 시절의 자아상은 어떤 시기에는 독자들에게 바로 청춘의 미숙함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아마 지금 시기에 어린 학생들이 읽으며 위안을 얻고 있을 것들 역시 어떤 시기가 되면, 청춘의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채색될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시간은 조금씩 흔들리며 변화해가는 것이다.그래도, 꽃이 피고 있다. 미숙하여 아름다울 이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열심히 서로를 위로하자. /홍익대 교수

2020-04-06

보이지 않았던 세계에 대한 공포

주제 사라마구코로나19로 인해 사회에 공포가 만연해 있다. 과학의 발전으로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았던 세균과 바이러스의 영역을 발견해 낸 것이 위생의 영역에 있어서 인류가 이룬 가장 큰 진보 중 하나였지만, 그것이 존재하되 여전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속에 공포를 만들어낸다.우리 마음속에 불길과 같이 일어나는 공포는 비가시적인 존재에 대한 가시화된 상상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맺고 있던 인간적인 관계들과 매일 생활하는 공간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을, 위험한 존재들에 대한 상상을 통해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뀐다. 공포는 인간이 갖고 있는 감각을 바꾸고, 관계를 바꾸고, 자신이 영위하는 시공간의 형태를 바꾼다.세계 속에는 인간이 공포를 느낄 만한 대상들이 수도 없이 존재하고 있지만, 비가시적인 대상에 대한 공포만큼 본질적인 공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범죄나 전쟁처럼 명확하게 타자화될 수 있는 공포의 대상과 달리, 바이러스와 세균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 살아가는 전제 조건에 대한 믿음을 흔든다. 언제나 붙잡고 기대 있던 손잡이의 명확한 감각도, 내가 의지하고 믿고 있던 사람들과의 유대 관계도, 늘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져야만 할 것 같은 집이 주는 안온함도,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그 모든 것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볼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현상이었다.어쩌면, 이러한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바깥 세계와 맺고 있는 인간적인 관계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문학적인 사유의 대상이 되곤 했다. ‘페스트’를 통해 인간 사회에 흘러 넘쳐 있는 비인간성이라는 징후를 파악했던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1947)’가 그렇고, 콜레라를 사랑의 열병에 비유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며 사랑하고 고통 받는 것에 대해 긴 호흡으로 담아낸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1985)’이 그러하다.199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Jos00E9 de Sousa Saramago·1922~2010)의 ‘눈먼자들의 도시(1995)’는 그 중에서도 인간의 시각의존성과 전염되는 질병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직조되는 인간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느 날 의사는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자신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의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눈이 멀게 되고, 그는 이것이 원인을 알 수 없이 전염되는 백색 질병임을 당국에 알리고, 역시 전염되는 상황이었지만, 특이하게도 눈이 멀지 않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격리된다.눈이 먼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격리되면서 그들에게는 전문가의 권위나 윤리, 이성적 판단 같은 인간이 인간됨을 규정해왔던 여러 가지 기준들이 사라지고, 일용품과 식품에 대한 약탈을 넘어 인간에 대한 약탈이 시작된다. 이 ‘눈먼자들의 도시’속 인간들은 시력이 상실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표현할 줄 모르는 채 공포에 자신을 내맡긴 인간들의 세계가 얼마나 처참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인간 역사에 대한 우화이다. 눈이 보이는 자들은 남의 것을 훔치고, 눈이 보이지 않는 자들은 길바닥을 기어가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하고 생존을 위한 먹을 것에 매달린다.이 소설에서 함께 하고 있는 무리들 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비인간적인 상황을 목도하고 있던 의사의 아내는 아이와 어른을 씻기고,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며, 그 모든 공포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 노력이 단지 숭고하다 말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그는 맹목적 폭력을 막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 있을 때, 그것에 대처하면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공포는 종종 절망으로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과 배려를 가진 인간은 공포 속에서도 그것을 절망으로 바꾸지 않을 힘을 갖고 있다. 모든 것보다 가장 인간다운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0-03-16

매혹하는 언어들과 그것이 일으키는 파문

그래도, 여전히 한국 문학에서 ‘이상(1910~1937)’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지금은 조금 퇴색한 것이 되고 말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중고등학교 문학시간에 이상이라는 천재의 시와 소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그래서 독해 불가능한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열렬하게 강조하시던 문학 선생님의 목소리를 기억하시는 분도 계실 터이고, 난해하기로 악명 높다던 시 연작 ‘오감도(烏瞰圖)’를 두고 내가 그것을 해석해 보겠노라 호언하셨던 분도 계실 것이다. 아마도 한국 문학 작가들 중에서도 이상만큼 많은 독자들의 마음속에 예술적 파문을 남겼던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감수성이 예민했던 어린 시절 한번 들여다보고 매혹된 예술적 대상이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느 시기 접했던 어떤 언어는 우리의 주의를 끌고, 예술적으로 매혹한다. 우리를 매혹하는 언어들은 이미지와 달라, 그 언어를 품고 있는 소리나 문자가 우리 앞에서 사라지더라도, 훨씬 오래 동안 우리의 마음에 각인되어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의도치 않은 어떤 순간에 나타나 우리의 마음을 잠식한다.어린 시절, 나 역시 이상의 그 ‘악명 높은’ 시 연작 ‘오감도’를 열어 보고 그만 그 낯선 언어에 매혹되었다. 그 속에는, 그 무렵의 어린아이 치고는 책 좀 읽어 보았다는 나의 자만을 깨어버릴 만큼의 낯선 언어들이 천연덕스럽게 들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불안을 일으키는 언어이면서 한편으로는, 갇혀 있는 의식을 해방하는 언어였다. 그렇게 나는 이상이라는 낯선 언어에 매혹되어 버렸다. 그 매혹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문학에 대한 기대감을 못내 거두지 못하게 하는 원천일 지도 모르겠다.우리가 알고 있는 시 연작 ‘오감도’는 조선중앙일보에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15호가 연재됐다. 원래는 30호의 기획이었으나 중도에 독자들의 비난이 빗발쳐서 그만뒀다. 이상은 정지용, 이태준과 함께 구인회 활동을 함께 했는데, 이 때의 인연으로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이태준이 학예부장으로 있었던 조선중앙일보에 시 연재를 하게 됐다. 정지용은 분명 당시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이러한 정도의 시는 발표되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했겠지만, 의외로 반발이 대단했던 것이다. 아마도 추천을 한 쪽이나 받은 쪽이나 당황스러웠을 터였고, 나중에 이상은 다른 지면에서 당시 ‘오감도’의 연재를 중단하게 된 경위를 밝히며 그 몰이해를 한탄하기도 했다.당시 ‘오감도’에 대한 독자들의 반발이라는 것은 사실 지금 생각해도 독특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좋고 싫음 같은 취미의 차원이나 이념적 분쟁의 차원이 아니라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언어가 버젓이 신문에 실려 있는 것에 대한 집단적 불안 반응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연재 당시 이상이 원고교정과 인쇄를 살피기 위해 신문사에 왔을 때에는 신문사의 모든 이들이 도대체 이상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생겼는가 구경하기 위해 나왔다고 하니, 당시의 독자들은 그의 언어가 싫어 그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두 그의 언어에 매혹되어 불안의 상태로 빠져버렸던 셈이었다. 마치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생물을 보거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면 판단 이전에 겁부터 집어먹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그렇게, 가장 이상다운 파문을 일으키며 문학계에 등장한 이상은 그 뒤로 한참 동안 한국 문학에서 가장 특별하고 독특한 자리를 차지했다. 매혹의 순간에 대한 경험은 그것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설명할 수 있는 만큼 그 경험은 빛을 잃어버린다. 내 주위를 둘러싼 언어들이 더 이상 빛나지 않을 때, 이상의 시 연작 ‘오감도’의 15편을 다시 열어보시기를. 그 속에는 새로운 매혹의 계기들이 들어 있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0-02-24

문학의 ‘인간다움’… 여전히 중요한가

프란츠 카프카인간이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를 가지고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려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의 ‘인간성’을 규정하는 것은 가장 큰 과제였다. 오래전 그리스 비극의 사례로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이, 우리가 ‘문학’이라는 대상 속에서 느끼는 일말의 휴머니즘의 기운이 그러하고, 최근 문학 불황의 시대에 파편화된 인간성에 대한 이해에 대한 당혹감을 통해서도 역설적으로 증명된다.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단지 생존만을 위해 산다고 한다면, 여타의 동물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지금까지 인간이 문학을 창작해온 과정은 언어를 가진 인간이 던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부친을 살해하고 모친과 결혼한다는 금기를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결국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서구 비극의 모티프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주는 까닭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계된다.여타의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윤리를 지키는 것이 인간다움인가, 아니면 그것을 지키고자 애쓰지만, 결국 신의 섭리에 압도되는 한계를 만나는 것이 인간다움인가. 이 간단하지만 모두가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시대를 통해서 반복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인간성의 규정이란 한 번의 창작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새롭게 바꾸면서 새롭게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인 까닭이다.한편,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고민했던 햄릿의 가장 인간다운 고뇌는 어떠한가. 우리가 그 고뇌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단지 생존만이 인간임을 증거하는 유일한 가치가 아닌 까닭이다. 그러니 결국 인간이 세워 올린 문학은 애초부터 인간의 인간성에 대한 규정의 문제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물론, 인간다움에 대한 문학의 규정은 단순히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갖는가 하는 것에 대한 순진한 서술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문학에서 이뤄지는 인간성에 대한 규정은 언제나 극단적인 비인간성에 대한 반대급부로 주어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아니고서 인간은 인간다움의 영역을 체감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의 휴머니즘의 문학이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또, 어느 날 아침에 벌레가 되어 버린 카프카의 ‘변신’속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떠한가. 그가 벌레가 된 것은 결코 ‘은유’가 아니었다. ‘은유’ 즉 ‘메타포(metaphor)’는 인간이 언어를 통해 외부 세계를 규정해온 표상의 기술 중 하나였으니,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간화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전쟁 속에서도 피어나는 꽃’ 같은 은유가 결국 인간성을 표상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단지 비-인간성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진짜 벌레가 된 이 작품 속 주인공을 보고서 독자 모두가 느꼈을 놀람과 충격은 분명히 일종의 부조리에 닿고 있다. 분명 그것은 언어화되지 않는 물질적인 당혹감이다. 메타포의 기술에 익숙한 인간은 어떤 언어를 할애하더라도 규정하기 어려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나 알베르 카뮈의 ‘뫼르소’의 파편화된 맥락과 닮아 있다.하지만, 그는 왜 벌레가 되었는가 혹은 카프카는 이 상황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하는 물음에 이르게 되면, 독자의 해석은 다시 ‘인간다움’이라는 문제와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마치 순수한 악이나 폭력 같은 비윤리적 신화를 마주하고서 충격을 받은 인간이 다시 어떻게든 그것을 인간다움으로 봉합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그러니, 문학에서 인간다움에 대한 규정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인가, 묻는다면, 인간이 언어를 세계 표상의 도구로 쓰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답해야 한다. 인류가 가진 어쩌면 가장 비인간적이고 가장 비언어적인 작품일 카프카의 ‘변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0-01-27

백석 시를 맛보는 겨울밤

백석 시인언제든 시간이 지나도 반복되고 찾아오는 것들이 있다. 처음에는 분명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었지만, 지금은 단순한 제도나 의무 같이 내게 주어져 그 이유를 물을 필요 없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남겨진 것들 말이다. 어릴 때, 이유도 모른 채 부모님들의 손에 끌려 참석했던 제사 의례가 그렇고, 온 가족이 모여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그는 김장처럼, 한 해의 정해진 때에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예의 관념이 꼭 그런 것들이다.인간에게 있어 이렇게 반복되는 것들이 매번 다른 의미를 갖기 어려운 까닭은 반복되는 것들 사이에서 매번 의미를 챙기기보다는 그대로 흘러가도록 두는 것이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순 반복되는 일들을 행하기에 적절한 존재가 아니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하나하나의 일들에 의미를 담기보다는 기계화된 동작과 의식으로 반복되는 일들에 자기를 맞춰갈 수밖에 없다. 인간을 둘러싼 반복적인 의례들이 매번 새로운 의미를 갖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인간이 그러한 노동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당연하게 된 것일 터이다. 그러한 의례에 담긴 큰 뜻이나 취지를 다시 설명한다고 해서 사라진 마음이 다시 생기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반복되는 겉치레의 예의 속에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인간의 삶에 가끔씩 어떤 ‘마음’이 찾아오는 때가 있다. 어느 겨울밤, 누군가 밖에 온 것 같아 공연히 문을 열어보게 되는 것처럼. 혹은, 새벽녘 문득 울린 스마트폰 알림에 이제는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어떤 기억들이 찾아오는 것처럼. 연말 같은 시기가 되면 문득 찾아오는 그 마음은 이제는 관성화되어 버린 반복된 예의 관념의 근원을 깨닫게 한다. 그래, 그랬었지, 우리가 그것을 처음 행했던 것에는 바로 그런 ‘마음’이 있었다. 우리는 어떤 것이 먼저였고, 어떤 것이 나중이었는지 쉽게 잊어버린다.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겨울밤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백석을 떠올리고, 백석 시 몇 편을 읽곤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니, 의례나 의무 같은 것은 분명 아니다. 유독 겨울밤이 되면 찾아오는 그런 어렴풋한 ‘마음’을 백석만큼은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릇 시인이라면 자기 앞에 놓인 무표정한 반복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당연한 의무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유독 백석은 낯선 얼굴 너머에 들어앉아 있는 어떤 ‘마음’의 기원을 찾아낸다.백석에게 있어 그 ‘마음’은 사방으로 눈이 내려 주변이 먹먹함으로 가득한 때, 온 가족들이 모여 보내는 명절날의 분위기로부터 온다. 그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반복되어 찾아오는 것이니, ‘원형’적인 것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니, 매번 반복되는 명절날이나 가족들이 모임이 먼저가 아니다. ‘마음’이 먼저다. 내 앞에 가득 사리워 오는 한 그릇의 국수 속에도, 어떤 날을 떠올리도록 푹푹 내리는 눈 속에도, 눈같이 하얀 달이 빛나는 밤에도 그 마음이 담겨 찾아오는 것이다. 마치 이제는 어떤 정신도 죽어버렸다고 생각되던 고도 자본주의시대에도 보들레르가 언어 속에서 맡았던 고대의 향기처럼. 백석의 시 속에는 어떤 오래되었지만, 그리 오래된 것만도 아닌 어떤 ‘마음’을 동반한 맛이 존재한다.물론, 깊은 겨울 밤 따뜻한 방안에서 차갑고 시큼한 귤을 까먹으며, 백석 시를 맛보는 재미가 어디 그런 어렵고 복잡한 생각의 재미뿐이겠는가. 지금은 귀에 선 이북 사투리를 읽는 재미라든가, 마치 코끝이나 혀끝에서 맴돌 듯 느껴지는 감각도, 눈이 내리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를 읊으며, 데운 술을 한 잔 마시는 경험도 백석 시를 맛보는 겨울밤의 일부가 아닐 것인가./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12-30

작가의 글 쓸 권리와 글 쓰지 않을 권리

‘모비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먼 멜빌은 미국의 소설가로 뉴욕 세관의 검사계로 일하면서 법률 소설을 활발하게 썼다.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글로 쓰는 사람이다.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시대에 작가는 그리 특별날 것 없는 존재로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책 표면에 새겨진 글자를 훑으며, 그것이 단지 까만 잉크로 된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 생생하게 빛나는 또 다른 차원의 글자처럼 여겨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거나, 또는 글자들 낱낱을 읽어내는 파편적인 시선이 아닌 어떤 통합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작가’를 본다.과거, 문학 작가의 모델은 남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지식이나 뛰어난 생각을 자신이 갖고 있는 문자 표기의 기술을 활용하여 글을 쓰고, 그 글을 읽는 누군가로 하여금 자신의 지식이나 생각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고 나아가 동의하는 것에까지 나아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과정을 포함하는 대상이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지금보다 조금 더 특별한 것이었던 시대에 작가의 자리는 좀 더 특별한 곳에 마련돼 있었다.하지만, 대도시 파리의 아케이드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곳에 진열된 자본주의 상점의 상품들 속에서 희미하게 감지되는 고대의 향기를 맡았던 작가 보들레르 이후, 작가는 거리를 산책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이 받은 감각이나 자신이 했던 정서, 생각 등을 단초로 글로 옮기는 사람이 되었다.조금은 특별한 곳에 마련됐던 온전히 창조적인 작가의 자리는 이제는 현실 세계의 감각을 받아들이는 예민한 자의식으로 환치된다. 글쓰기가 특별한 능력이랄 것도 없게 된 지금 시대에 우리 모두는 새로운 의미의 ‘작가’가 될 준비가 이미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미국 작가인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이 1853년에 쓴 ‘필경사 바틀비-월가 이야기’라는 짧은 소설은 바로 새로운 시대의 작가의 모습에 대해 말해준다.바틀비는 월가의 변호사 사무소의 세 번째 필경사로 고용됐다. 필경사란 남이 쓴 글을 그대로 옮겨 적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문서를 복사하는 기계 같은 존재이다. 바틀비는 엄청난 양의 문서를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필사를 해낸다.하지만, 독특하게도 그는 자신이 쓴 글을 검토하는 일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는 단호하게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필경사로서 글을 옮겨 적는 것은 할 수 있지만, 검토하는 것은 거부하는 태도는 일반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현대적인 작가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 문제는 좀 더 복잡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글을 복제하는 기계인 복사기에게 그 글을 검토하기를 요구할 수 있을까.바틀비는 ‘진정한 의미의 작가’가 되지 못하는 시대에 ‘작가’가 되고자 했던 20세기의 돈키호테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필경을 멈추는 틈틈이 유일하게 하는 일이 가끔씩 창밖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그러한 지표이다. 그는 진정한 작가를 꿈꾸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고작해야 남의 말을 옮기는 필경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는 남의 글이 자신의 살이 되는 것을 원치는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 시대 작가가 처한 모순이다.결국 모든 것을 거부한 채 죽어가는 바틀비를 기억하며, 이 소설은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라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바틀비는 작가가 되었지만 작가가 되지 못하는 바로 우리 시대의 인간이었던 것이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12-09

문학적 공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에드가 앨런 포우(1809∼1949)는 미국 단편소설의 선구자로, 미스터리와 환상, 과학소설 양식을 창조한 역사상 가장 독특한 작가였다.순간, 어두워진 스크린 속에서 눈으로 보기에도 끔찍한 존재가 튀어나온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다. 시각적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영화는 이렇게 끔찍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눈앞에 즉각적으로 소환한다.이처럼 지금 시대에 공포라는 감정은 마치 영화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된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무엇이든 상상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시대의 영화는 우리의 상상적 영역 내에만 존재했던 기괴한 대상들을 우리 눈앞에 가져올 수 있다. 끔찍한 범죄나 괴물, 비인간적인 존재들에 대한 인간의 공포는 그렇게 우리의 현실과 공존한다.하지만 공포는 감각적 재현만으로 촉발되는 감정만은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상상과 관련되어 있다. 지금은 마치 그 자리를 호러나 스릴러 영화에 내준 듯 보이는 공포의 영역을, 이전 오랜 기간 동안 점유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문학이었다.사실 지금 이 시점에 생각해 보면, 공포라는 감정이 과연 언어로서 매개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의문이 찾아온다. 세계와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시기에는 기괴하고 끔찍한 대상을 언어로 묘사하는 것만으로 공포를 자아내게 마련이었다. 과거에라면 살인하는 인간의 상황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공포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공포를 매개하는 감각적 재현이 우세한 때라면 어지간히 공포스러운 장면에 대한 묘사는 우스워 보일 뿐이다.분명 감각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 공포와 문학적 공포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 틀림없다. 예를 들어 보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 미지의 기괴한 형상에 대해 우리가 갖는 감정이 바로 감각적 공포이다. 엄청나게 큰 거미를 보고 깜짝 놀라 끔찍한 느낌이 드는 것이 그것이다. 주로 인간의 형상과 관계되어 있지 않은, 인간적인 요소로 규정되지 않은 대상에 대해 공포의 감정이 솟아난다. 역으로 말한다면, 인간성에 대한 규정의 바깥에서 드러나는 대상에 대해 공포의 감정이 생긴다. 그러니 더더욱 끔찍한 대상을 그려낼 수 있게 된다면, 감각적 공포는 극대화된다.이에 비해 문학적 공포는 좀 더 느리게 찾아온다. 예를 들어, 에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는 사실 지금 보면 그다지 공포스러운 소설은 아니다. 그 속에는 피가 튀는 장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도, 기괴한 존재에 대한 공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술에 빠진 어디에나 있는 인간과 고양이가 있다.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 플루토의 눈을 도려내고 그를 죽인 뒤 불의의 화재를 겪고 나서 곤궁한 생활에 술까지 마시며 피폐한 생활을 한다. 그러다 그는 우발적인 사고로 아내까지 죽이게 된다. 그는 죽은 아내의 시체를 지하실의 벽 속에 숨겼는데, 그가 아내를 죽일 무렵, 그의 주변에는 그가 죽였던 플루토와 비슷하게 외눈박이의 고양이가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결국,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의 실종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나’의 집 이곳, 저곳을 수색하다 결국 찾지 못하고 떠나려는 찰나, 나는 자만심과 광기에 지하실의 벽을 보란 듯이 두드리고, 아내와 함께 묻혀 있던 고양이의 기괴한 울음소리 때문에 나의 범행은 발각된다.문학적 공포의 대명사가 된 이 작품의 공포는 그리 즉각적이지 않다. 공포를 일으키는 스펙터클을 구성하지 않는다. 아마 독자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뒤인 어느 순간, 나를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공포의 감정으로 스산한 느낌이 들게 될 것이다.어쩌면 이 작품에서 고양이의 울음은 실제의 그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이 마음 깊숙하게 존재하는 심연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죄책감의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문학적 공포는 서서히 나를 덮쳐 오싹한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11-11

인간이기 때문에 갖지 않을 수 없는 한계

인간은 살아가며 수많은 한계와 마주한다. 어쩌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 ‘삶’이 아닐까. 태어남에서 죽음 사이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결정하거나 결정하지 못한 채로, 또는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있었다면 좋으련만, 언제나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 한계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아서 충격을 받는 일도 있고, 때로는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아예 하지 않는 일도 빈번하다.인간이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한계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위대한 문학의 주제로 다뤄져 왔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늘 마주치게 되는 한계들이 언제나 명확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일 터. 인간에게 있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인 것인 까닭이리라. 타인의 삶을 다룬 소설을 읽고 문학을 읽으며, 삶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정작 자신의 삶에서 도래하게 되는 한계라는 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위대한 문학은 언제나 인간이 자신에게 도래한 한계에 대해 인식할 수 없다는 아픈 진실을 건드린다.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52년 쿠바에서 쓴 노인과 바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 ‘산티아고’는 ‘늙음’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지 않을 수 없을 시간적인 한계에 직면해 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시간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쇠약해가는 힘과 정신, 그리고 그로부터 초래되는 자기 확신의 문제와 관련된다. 분명 예전에는 전설적인 어부였을 테지만, 이제는 늙고 쇠약한 산티아고에게 사람들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서 여전히 신화적 환상을 보고 있는, 또 인간으로서 그를 동정하고 있는 아이 하나만이 그를 챙겨준다.하지만, 산티아고는 여전히 사자의 꿈을 꾸고 있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이 성장하는 단계를 세 가지로 나누어, 낙타와 사자, 어린아이로 나누고 있다. 자신이 정한 길만을 열심히 나아가는 낙타와, 그 단계를 넘어 누군가와의 인정 투쟁을 거쳐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사자,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한 어린아이의 단계가 그것이다. 산티아고는 자신의 늙음에 대해 받아들이기보다는 아직 사자의 꿈을 꾸며 자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에 어느 누가 그의 바람을 헛된 것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산티아고는 바람대로 커다란 청새치를 낚고 그와의 사투를 겪고 돌아온다. 그가 낚은 물고기는 돌아오는 길의 고난으로 인해 형체만 남았다. 그는 청새치의 뿔은 아직도 신화적 환상에 빠져 있는 아이에게, 머리는 지금까지 자신을 무시했던 어시장의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사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하고자 하는 욕망과 한계 사이에서 결정되는 것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아도 그 곳에 무언가 의미가 남는 것처럼, 말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10-21

현실의 여백, 환상을 모험하는 경험

문학에 있어서 ‘환상’은 예로부터 중요한 주제였다. 사실, ‘환상’ 말고 달리 더 문학적인 주제가 존재하기나 할까.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이야기란 ‘여기’, 현실적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여백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비현실의 세계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환상에 대한 이야기니 말이다.이처럼 어린 시절 누구나 매료되기 마련인 환상이야기 가운데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빼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 작품을 처음 열어보았을 때 경험했던 최초의 당혹감과 이어 찾아온 그 세계에 대한 매혹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세계는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 한 구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누구나가 그러했을 것처럼.‘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1865)’에서 ‘거울 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Glass, 1871)’로 이어지는 루이스 캐럴이 만들어낸 앨리스적인 세계가 그토록 특별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별다른 이유는 아니다. 인간의 이성이 중심이 되는 근대 세계와 표준시로 대표되는 일말의 여백도 존재하지 않는 동조화된 세계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여백의 사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따분한 역사공부를 하던 앨리스는 ‘늦었다’‘늦었다’고 외치는 조끼를 입은 토끼를 발견하고 그를 따라가다가 환상의 세계로 굴러 떨어진다. 우리의 정신은 조금의 실마리라도 눈앞에 나타나면 그 실마리를 따라 제멋대로의 상상의 세계로 떠나가 버리지 않는가. 그것이 따분한 공부를 하는 와중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게 ‘꿈’과 ‘거울’이라는 근대 세계의 두 가지 여백을 통해 만들어진 환상의 세계에 굴러 떨어진 앨리스는 현실의 답답한 규칙성이 아니라 완전히 독자적이고 환상적인 규칙의 지배를 받는 세계를 모험한다.이렇게 자신의 눈앞에 존재하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세계를 여행하는 앨리스의 모험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새로운 환상적 세계의 규칙을 발견하는 인간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이 환상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지 지금까지 본 일이 없는 기괴한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우리가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와 유사한 규칙을 가지고 단지 창조된 세계에서 일어난 기괴한 소재만으로 만들어진 환상 문학은 그것을 보는 인간에게 당혹감을 줄 수 없다.자신이 마주친 이전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세계 속에서 앨리스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목적도 없이 그저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그 세계를 경험한다. 세계의 규칙을 알 수 없으니 그 경험은 이성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무엇이든 입안에 넣어보지 않으면 대상을 알 수 없는 아기처럼. 앨리스는 실제로 먹어보지 않으면 효과를 알 수 없는 약을 먹어보기도 하고, 말을 하는 기괴한 대상들과 만나 그들과 나름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결국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는 진정한 환상의 이야기이자 낯선 세계에 던져진 아이가 세계의 규칙을 이해해나가는 경험에 대한 알레고리다. 어른이 된 사람은 결코 아이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 세계의 여백에서, 그렇게 우리는 가끔씩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매혹되어 붙들린다. 아마 그것 없이는 문학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9-23

죽음의 공포도 이겨내는 이야기의 힘

이야기는 늘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흘러간다. 한 번 이야기에 붙들린 인간은 그 어딘가로 흘러가는 이야기가 결국 끝날 때까지, 그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이야기에 들린 경험이란 어린 시절일수록 더욱 강렬한 법일 터, 고백하건대 나는 어린 시절 어린이용 문고판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고 신밧드의 모험 이야기에 붙들려, 중앙아시아 부근의 저 먼 어느 세계를 그리워하기도 했다.분명 어린 시절,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었거나 혹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 이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 이야기는 중동 지역에서 누군가의 입을 떠돌던 구전의 이야기를 모아둔 것으로, 1,001일 밤 동안 이어진 이야기라는 의미로 ‘아라비안 나이트’ 혹은 ‘천일야화’라 부른다.중동의 여러 지역에서 제각각 생겨난 280여 편 정도 되는 이야기들을 모은 것인 만큼, 이 이야기들 사이에 연관성은 없다. 어린이용 문고판에는 신밧드의 이야기나 알라딘의 마술램프 같은 어린 아이들의 모험에 대한 취향을 자극할 만한 것들이 특별히 선택되었던 것뿐이다.이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의외로 재미있는 것은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엮고 있는 액자가 되는 이야기이다. 바로 우리에게는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로 알려진 그것이다. 이야기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고대 페르시아 왕에게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맏이인 샤리아가 왕위에 올랐고, 동생인 샤즈난은 평민으로 만족했다. 샤리아는 그런 동생이 기특해서 타타르 왕국을 그에게 주었고, 샤즈난은 그 왕국의 왕이 되었다.하지만 샤즈난은 자신의 왕비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을 보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형인 샤리아에게 해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샤리아는 오히려 본인이 여성에 대한 공포에 빠져, 여성과 결혼을 하고 하룻밤이 지난 뒤 그 여성을 죽이는 끔찍한 행동을 반복한다.이런 샤리아 왕의 고약한 습벽 때문에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 도시에서 거의 사라질 때쯤, 당시 ‘채홍사’를 맡고 있던 재상의 딸이었던 셰에라자드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샤리아 왕과 결혼하여 샤리아의 끔찍한 행위를 막아보겠다고 자원하게 된다. 셰에라자드는 그렇게 동이 떠오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시작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앞두고 있던 셰에라자드가 이어가던 이야기가 바로 ‘천일야화’였던 것이다.동이 터오고 샤리아 왕이 자신과 결혼한 여성을 죽여야 할 시간이 되었지만, 아직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에서 샤리아 왕의 고민이 시작된다. 여느 경우처럼 셰에라자드를 죽이면 더 이상 그 이야기의 뒷부분을 들을 수 없다. 샤리아는 그래서 셰에라자드를 살려두고 다음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다. 여성에 대한 공포가 빚어낸 강박을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이겨낸 것이다. 호기심은 그렇게 힘이 세다.셰에라자드 역시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을 터.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샤리아의 관심이 끊어지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치 독자의 서늘한 눈빛을 상상하는 연재 작가의 공포와 닮았다. 그런 공포와의 줄타기 끝에 셰에라자드는 무사히 천 일과 하루 동안 이어진 이야기를 마친다. 물론 영원히 이어지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 언젠가 셰에라자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끝난다. 하지만, 샤리아는 그간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이야기의 두 번째 힘은 바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분명, 이야기는 어딘가로부터 와서 어딘가로 흘러간다. 우리는 그 흐름 어딘가에서 이야기에 붙들리고 그 이야기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한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 샤리아가 붙들렸듯이./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9-02

도무지 잠들 수 없는 여름밤, 문득 내게 말을 걸어왔던 ‘책’들에 대하여

갑자기 내려 창가로 들이치는 비가 오히려 반가울 만큼, 불같은 여름 더위가 한창이다. 최근에야 집집마다 에어컨을 구비하고 있는데다가, 어디든 널려 있는 카페로 나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켜 놓고 시원하고 편한 의자에 앉아 있으면 여름 더위랄 것이 특별할 것도 없는 것 같다. ‘피서’라는 것이 1년 중에 꽤 큰 행사였던 시기에, 산으로 바다로 떠나거나, 물이 있는 곳에 모여 ‘납량회’ 같은 것을 열던 감각에 비해,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호캉스’를 즐기거나 하는 것처럼 더위를 피하는 일이 커다란 일이 아닌 것처럼 돼버렸다.사실, 인간이 쌓아올린 근대적인 문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도록 하는 방향으로 급속도로 발전해왔다. 예전이라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거리를 비행기로, 기차로 연결하고, 더울 때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고, 추울 때 추위를 피할 수 있게 하며, 시끄러움 속에서 소리를 사라지게 하고, 조용함 속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처럼, 인간이 갖고 있는 태생적인 감각을 보다 무디게, 혹은 편하게 바꾸어 왔다. 그것이 말하자면, 기계문명의 발전이 인간에게 제공해온 감각의 즐거운 퇴화였던 것이다.이러한 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본래적인 감각의 변화 앞에서, 더울 때는 좀 더워야 하고, 추울 때는 추워야지, 같은 의견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꼰대스러운 것임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이 어디 태초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랴. 인간의 감각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니 말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자고, 하루에 세 끼를 먹고 하는 감각 내지는 삶의 문화적 습관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점차 변화하여 우리는 또한 새로운 ‘자연스러움’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이처럼, 인간의 감각적 변화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나 부당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예전에 존재했던 감각들이 사라져 가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여름밤 낮에 다 소진되지 못한 열기가 공기 속에 남아 여전히 살갗을 파고드는 후텁지근한 감각 같은 것들은 일반적으로야 좋을 수 없는 감각이겠지만, 어떤 기억과 얽혀 있을 때, 그것은 전혀 싫지 않은 감각이 된다.내게 여름은 어린 시절 방학이면 언제나 찾아갔던 큰집의 기억과 뗄레야 뗄 수 없게 엮여 있다. 낮 동안 더운 줄도 모르고 돌아다녀 벌겋게 상기된 내 팔을 어루만졌던 할아버지의 서늘한 손길. 땀으로 끈적거렸던 등에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을 부어 등목을 했던 기억. 인근의 큰 도시로 진학하여 남겨진 사촌 형, 누나들의 책이 보관된 웃방에서 책들을 하나하나 열어보던 것이 바로 내가 갖고 있는 여름의 기억이다. 지금이라면 분명 책들보다도 그 위에 뽀얗게 내려 앉아 있었던 먼지가 더 신경 쓰였겠지만, 그때는 그 책 하나하나가 마치 미지의 어딘가로 막 떠나버릴 것만 같은 기차표처럼 보여 허겁지겁 하나, 둘 씩 뒤지느라 먼지 따위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당연히 이마를 따라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땀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확실히 어린 시절에는 무언가 하고 싶은 대상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과자를 먹을 때 손에 달라붙는 과자부스러기들이 신경 쓰여 정작 과자의 맛에는 집중하기 어렵지만, 어린 시절에는 손에 달라붙는 것 따위에 신경 써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인간이 어떤 대상에만 집중해서 모든 그 외의 것들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복잡한 세계 속 인간관계에 존재하지 않는 어린 시절의 특권인 것만 같다.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있어서 여름철의 ‘피서’라는, 더위를 피한다고 하는 행위는 물리적으로 차가운 것을 먹거나 접촉하여 열기를 내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그보다 더 집중할 거리를 만들어 더위를 잊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간의 감각이란 사실 단순하고 상대적이라, 덥다는 감각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온몸에서 느껴지는 더위의 신호들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만, 그에 비해 더 집중할 만한 대상을 찾게 되면, 더위는 금방 잊어버릴 수도 있게 된다.책을 읽으면서, 또 무언가 즐거운 일을 하면서 더위를 피한다는, 지금 생각해서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옛사람들의 감각은 어쩌면 이와 같은 발로일지도 모른다. 더워서 견딜 수 없는 열대야의 밤을 지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입 안에 들어오는 얼음 한 조각일 수도 있고, 더위를 잊어버릴 만큼 집중할 수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좀처럼 더위를 견디기 어려운 여름밤, 책 속의 이야기가 내게 반가운 말을 걸어오는 순간, 나는 그 이야기 세계로 걸어 들어가 피부에 달라붙은 끈끈한 땀의 열기나 한참 전에 꺼진 선풍기 같은 다른 현실적인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문자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시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시대, 상상의 힘은 더욱 약화되고 있어 책을 매개로 하는 이야기 세계에는 좀처럼 집중하기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그래도, 여전히, 더위를 견딜 수 없는 밤에 여전히 생각나는 책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꽤 다행한 일인 것 같다. 어떤 여름날 만큼은 TV를 켜거나 유튜브의 영상을 보기보다는, 수박 한 조각과 맥주 한 잔을 따라 놓고, 책을 읽고 싶은 날이 있는 것이다. 그런 날 만큼은 심오한 내용이 담긴 철학이나 역사에 관한 책이나 예술이나 문학에 관한 책이 아니라, 시리즈로 된 미스테리나 스릴러가 어울린다. 내친 김에 몇 편의 시리즈를 더 볼 수도 있고, 중간에 그만두고 잠을 청해볼 수도 있다.여름밤이라면 탐정의 현란한 추리에 압도되어 종종 밤을 새버리기 일쑤였던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나 사건과 추리 모두에서 극적인 상황을 제시해서 입을 벌어지게 만드는 길버트 체이스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보다는, 감정이입을 자극하는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경감 시리즈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플 시리즈가 추리소설의 팬들에게는 더 좋을 것 같다. 미스테리라는 장르의 특성상 머리를 쓰지 않는 경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언제나 타인의 상황 속에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혈 형사 ‘매그레’ 경감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나 옆집 아주머니처럼 수더분한 태도로 동네 곳곳을 누비는 ‘제인 마플’의 뒤를 따르는 일은 책을 계속 읽어나가는 것도, 중간에 그만두고 잠으로 빠지는 일에도 부담은 적다.다음날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어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다면, 조금 긴 역사소설책에 손을 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첫 부분만 잘 넘기게 된다면, 눈을 감아도 천정에 책의 한 장면, 한 장면이 펼쳐지고 위기에 빠진 주인공의 운명이 궁금해지는 탓에 아마 쉽게 다시 잠들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사실 역사 소설이라면, 역시 한민족의 역사를 다룬 것들이 입에 맞는다. 홍명희의 임꺽정이나 황석영의 장길산처럼, 역사의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호쾌한 모험담을 다룬 것도 좋고, 사실 이제 와서 추천한다는 것이 새삼스럽지만, 이번 여름을 기회로, 조정래의 현대사 3부작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이야기인 만큼 크게 어렵지 않게 소설 속에 펼쳐진 세계를 남김없이 내 머리 속에 담아낼 수 있다. 그 세계의 재료가 모두 내 머리 속, 내 경험에서 온 것인 만큼, 책을 읽고 내 머리 속에 만들어진 세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문자로 가득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 저기 내 바깥에 존재하는 스크린에 영사된 영화가 오직 감각만으로 수용 가능한 유사 현실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책 속에 존재하는 세계는 어느 것이나 독자가 그 속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단함 때문에, 책읽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리라.어쨌거나, 여름밤은 그렇게 흘러간다. 누군가는 여름밤을 빨리 보내고 싶어서, 누군가는 이 여름밤을 쉽게 보내고 싶지 않아서 못 다 읽은 책을 펴든다. 비록 몇 장 읽지 못하고 그만두기를 반복하면서도 쉽게 책을 아예 덮지는 못하는 것은 분명 아직 어딘가에 그리운 무엇인가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여름밤은 흘러간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8-19

로봇은 무엇을 꿈꾸는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공포를 안고 사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라는 길가메시 신화에서도 그렇듯, 죽음이라는 인간이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공포가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또한, 가파른 언덕 위로 끊임없이 돌을 굴려 올라가야 하는 시지프스의 이야기가 그렇듯, 평생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자신이 감당하기도 버거운 돌을 끊임없이 굴리듯,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그러하다.한편, 언젠가 기계가 인간보다 뛰어나게 되어 인간의 위치를 대체하리라는 상상은 또 어떨까. 인간에게 과연 그것보다 더 큰 공포가 존재할까. 불과 몇 년 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 그렇게 화제가 되었던 배경에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것이 인간의 삶을 대체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의 근거에는 바로 인간의 삶을 기계가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공포가 존재했다.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공포라면, 우리가 왜 그것을 그렇게 계속 이야기하느냐고? 사실, 모든 이야기 중에 가장 재미있는 것들은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공포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인간의 다른 모든 감정들 중에서도 가장 인간의 모든 감각과 지각을 활성화한다.메리 셸리(Mary W. Shelley·1797~1851)가 쓴 프랑켄슈타인 ; 혹은 근대의 프로메테우스(1818) 속에는 이미 죽은 사람을 재료로 그를 되살리는 연구에 몰두했던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등장한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키가 8피트나 되는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 괴물은 빅터로부터 인간다움에 대해 배우지만, 인간다움에 대해 배우고 나자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괴물’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빅터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괴물은 빅터의 친구들을 하나씩 죽이고, 빅터는 복수를 위해 그 괴물을 쫓는다.메리 셸리의 이 프랑켄슈타인은 분명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딜레마가 담긴 이야기다. 신이 인간들을 빚어내고 그것에 숨을 불어넣었듯, 인간을 신의 자리에 위치시켜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나아가 그 무언가가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승인을 요구한다면? 이라는 꽤 섬뜩한 상상력이 그 속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서 창조된 괴물은 키가 엄청나게 크고 힘이 센 대상으로 분명 내가 만든 것이었으되, 그것이 점차 자라나면서 자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면서 창조주의 생명조차 위협한다. 어쩌면 문학이라는 도구로 자신을 규정당하는 것을 바라보는 신의 마음속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신화 속 인간 창조라는 주제에서 빠져나와, 근대에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에 대한 상상이 본격화된 것은 분명,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Karel  apek· 1890~1938)가 쓴 희곡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Rossum’s Universal Robots·1920)에서부터였다. 사실 ‘로봇(robot)’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된 것이 바로 이 작품에서였다. 이 단어는 ‘노동’을 의미하는 슬로바키아어에서 비롯되었다.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의 의미와 가치가 가장 치열하게 대두되었을 무렵인 1920년, 작가인 차페크는 이 작품을 통해 로봇이라는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력을 제시하였다. 이 작품에서 로숨이라는 박사는 머나먼 섬에서 해양생태계를 연구하다가 ‘인간’을 만들어내었고, 그가 세운 로숨이라는 로봇 회사는 노동 사회 속에서 번창일로를 겪게 된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해버린 새로운 시대가 된 것이다.로숨 회사가 만들고 판 로봇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인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로숨의 대표인 ‘도민’은 자신이 만들어 판 로봇들이 진화의 단계상 인간보다 자신들이 더 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서 코웃음을 치지만, 로봇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신하면서 인간을 위협해온다. 분명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대립이 이 작품에 알레고리로 들어 있는 것이다.이 작품에는 인간의 노동이 창조성을 잃고 컨베이어벨트에서 파편화된 부분만을 반복하는 생산적 효율성만을 추구하게 된 테일러주의 아래의 노동이 중요한 테마로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노동은 인간을 괴롭게 한다. 매일 정해진 시간 단순 반복적인 프로세스를 반복하는 인간의 노동은 그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노동의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해진 알고리즘을 반복하는 로봇의 필요성을 요청한다. 로봇이 필요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노동이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라 파편화되어 지루한 단순반복을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로봇은 어떨까. 그들은 과연 자신의 일을 대신해 줄 또 다른 로봇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로봇들은 로숨 회사를 포위하고 로숨 박사가 만든 생명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비밀이 담긴 문서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대표인 도민은 그 문서를 내주려고 하지만, 도민의 부인 헬레나는 두려운 나머지 그 문서를 태워버리고, 도민과 함께 떠난다. 로숨에 남은 유일한 인간 알퀴스트가 로봇들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생명의 비밀을 담고 있는 어린 로봇들을 풀어주면서 이 작품은 끝난다.차페크의 이 희곡은 우리에게 있어 인간이 만들어낸 로봇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로봇은 인간의 삶에 들어 있는 결여에서 비롯되는 상상력에서 시작되고, 그 상상은 점차 실현되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대상이라고 해도 좋은 인간의 ‘노동’에 대한 로봇의 대체 가능성을 차페크는 이미 100년 전에 보여주었던 셈이다.차페크의 이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 출판된 해에 태어난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1920~1992)는 로봇에 대한 수많은 단편들과 로봇 시리즈를 연이어 쓰면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로봇학의 3원칙(Three Laws of Robotics)’을 제시한다. 로봇이 인간의 일을 대신하면서 단순반복의 노동만을 대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인간과 동등한 사고를 하게 될 때, 과연 인간을 위협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에 대한 아시모프의 대답이었던 셈이다.로봇은 알고리즘으로 구성되어, 그 알고리즘을 반복하는 존재로, 그 알고리즘 속에 인간을 보호하는 원칙을 넣으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절대로 서로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갖고 있는 것처럼, 로봇의 가장 밑바닥의 토대에 일종의 원칙화된 헌장을 마련해두자는 생각이었다. 아시모프는 이 3원칙을 자신이 발표하는 작품 마다 조금씩 바꾸어가면서 발전시켰지만, 이들은 결국 “로봇은 인류에게 해를 가하거나,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인류에게 해가 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가장 단순한 원칙으로 귀결된다.아시모프의 로봇이 지켜야할 원칙이 매력적인 것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카렐 차페크의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 신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로봇을 비유하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에 비해, 아시모프는 인간과 로봇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로봇이 가져야할 자율적인 원칙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로봇을 인간학적인 사고로 바라보는 것에서 그 자신이 정의하였듯이 로봇학적인 사고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봇의 내부에 자기 원칙들을 가지고 인간과 관계없이 사고하고 활동하는 존재로 간주한다는 생각은 꽤 매력적이다.물론 로봇이 자율적으로 사고하게 된다면, 스스로 자신의 원칙을 부정하고 새롭게 자기의 존재에 대한 원칙을 새롭게 구성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결국 로봇은 자신에게 부여된 원칙을 폐기하게 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상상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의 원작인 필립 K. 딕(Philip K. Dick·1928~1982)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1968)로 이어지겠지만, 일단은 여기까지만 해둔다. 여름날 로봇에 대한 상상은 그 정도까지가 딱 좋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7-29

저, 반짝거렸던 취향의 상징에 기생해온 것들

얼마 전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이제 거의 극장에서 내려가 상영하는 곳을 찾기 쉽지 않지만, 아직 사람들의 입에서는 내려가지 않고 있다. 단지 한국에서 처음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가 던지고 있는 사회적 이슈나, 그것을 다루고 있는 방식이 의미 있었던 것이리라.이 영화에 대해서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던 관객에서부터 고개를 갸웃거렸거나 심지어 불편함을 느낀 관객까지 있었겠지만, 적어도 이 ‘기생충’은 한국 영화에서는 이제 몇몇 예술영화라는 장르 속에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 ‘상징’의 힘을 보여주었던 영화로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서사가 주는 불편함이란 단지 그것의 약점 내지는 결여만은 아닐 것이다. 그 불편함은 바로 우리가 매혹되어 온 상징의 실체를 직시하게 될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인정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 상태에서 비롯된다.사실, ‘기생충’이 드러내고 있는 ‘상징’의 세계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폭로된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문화적 산물로서의 ‘상징’은 현대 사회가 적어도 백 년 이상 계속해서 유지해왔던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신념과 그것을 가능케 했던 계급적 취향의 문제, 그리고 그러한 취향에 기생하여 형체를 유지해왔던 지식과 문화 담론이 갖고 있는 실체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상징’은 소설이나 영화의 언어적 층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 저변에 널려 있는 상품의 표면과 그 배후로부터 도래하여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을 이끄는 힘을 갖는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본의 상징이 갖는 힘에 대해 얼마나 무기력한가. 저 반짝거리며 나의 눈길을 끄는 브랜드의 로고가 갖는 힘에,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외국어 단어 몇 자에, 너무나 확고해 보이는 취향이 갖는 힘에 마주하는 인간은 언제나 그것에 매혹될 수밖에 없다. 전혀 실체를 갖지 않는 예술이 차가운 자본의 사회에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사실은 삶에 있어서 어떠한 유용성을 갖지 않는 지식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매혹적인 까닭은 어쩌면 그 때문일 것이다.영화 속에서 가난한 ‘기택’의 집은 아무런 실체를 갖지 않는 ‘상징’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인 경제 주체가 되지 못하는 ‘기택’이 가족들을 모아 놓고 전통을 내세우며, 가족의 가치를 말하는 대목이라든가, 수능에서 수도 없이 실패했던 아들 ‘기우’가 ‘교육’의 이상에 대해서 말하는 대목, 딸인 ‘기정’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해외 대학이나 미술가들의 이름은 모두 실체를 갖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힘을 갖는 상징이다. 허영과 기대감이 교차할 때, 실체 없는 상징은 반짝거리기 시작한다.반면, 스타트업이 성공하여 벼락부자가 된 ‘동익’과 ‘연교’의 집은 상징이 결여된 실체로 가득 차 있다. 유명 건축가가 지었다는 집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집의 예술적 가치가 아니라 자본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바로 ‘동익’과 ‘연교’가 매혹된 상징과 그 상징의 연쇄로서의 구성된 세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연교’는 자신과 오래 인연을 맺어왔다는 과외선생 ‘민혁’으로부터 ‘기우’를 소개받고, 소개라는 인간의 관계에 의한 보증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보증이나 신용 등은 ‘기우’ 등이 거창하게 늘어놓는 상징에는 무력하다. 하긴 누구라고 매혹되지 않을 재간이 없다.역사적으로 이야기해본다면, 자본의 힘을 가지고 귀족의 신분적 정통성을 누르고자 했던 부르주아 계급이 자기를 구별 짓기 위한 방편으로 구성한 계급적 취향이 바로 이러한 예술이나 지식의 상징에 대한 매혹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귀족 사회에도 이러한 취향은 없지 않았으되, 자본이라는 양적 기준이 신분이라는 질적 기준으로 옮겨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특수성이 바로 이처럼 상징에 취약한 문화적 경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에 놓여 있는 한국 사회에서 학벌이나 지식, 예술에 대한 태도 등은 여전히 과시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자기 취향을 보여주는 상징 형식에 무기력한 인간들을 만들어낸다. ‘동익’과 ‘연교’의 집은 바로 그러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오랜만에 자본주의의 문화적 상징을 읽어낼 수 있는 영화(물론 그 영화 자체도 하나의 상징이며, 그것을 읽어내는 것도 지식적 상징을 구축하는 행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작가는 다름 아니라 미국의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F. Fitzgerald·1896~1940)였다. 이 대목에서 다름 아니라 무려 백 년 전의 소설가의 소설을 떠올린 것에 대해 다소 의아하실 분도 있겠지만, 이 영화 ‘기생충’과 스콧 피츠제럴드의 예를 들어 ‘위대한 개츠비’같은 작품은 분명 백 년의 시대적 차이를 걸쳐 두고 있으면서도 비슷한 예술적 전형을 공유하고 있다. 분명 앞선 시대 부르주아 자본주의계급의 천박한 문화를 비판했던 에두아르 마네(00C9douard Manet·1832~1883)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자본주의 문화적 상징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서 시작된 것이면서, 부르주아의 문화적 소비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소비를 강화한다는 이중적 양식을 보여준다는 동일한 예술적 이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1920년대 초반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닉 캐러웨이’는 예일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인물이고, 이제 주식과 채권을 공부하여 자본주의 경제로 편승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이웃에 사는 ‘제이 개츠비’를 알게 되는데, 그는 엄청난 부자로 매일 파티를 열고 있으며, 아무도 그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는 비밀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개츠비’의 파티 속에서 미술작품이나 음악, 책을 매개로 한 지식 등은 모두 진지함이 아니라 ‘개츠비’라는 부르주아의 이상을 실현한 가장 완전무결한 취향을 가진 대상을 의심하기 위한 계기로 활용된다. 파티에서 ‘개츠비’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이 모두 진짜라고 놀라워하는 대목이나 ‘개츠비’의 재즈에 대한 취향을 보여주는 ‘블라디미르 토스토프’의 최신작을 연주하는 대목 역시 마찬가지이다.말하자면, ‘개츠비’는 기대와 의심, 그리고 취향과 감식안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자본주의적 상징이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그 상징에 매혹되어 그의 비밀스러운 삶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말하고, 어떤 이들은 그가 갖고 있는 엄청난 자본의 근원이 불법적인 밀수에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시도한다. 결국 이 ‘위대한 개츠비’의 서사는 바로 실체 없는 상징과 상징 없는 실체 사이에서 일어난 욕망과 다툼이 초래한 개츠비의 비극 위에 조립되어 있는 셈이었다.이 ‘위대한 개츠비’와 달리 영화 ‘기생충’에는 닉 캐러웨이 같은 ‘진실한 친구’ 혹은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는 관찰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작가의 서사에 대한 관점 내지는 미학의 차이이며, 사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존재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마치 ‘개츠비’에게 집약되어 있던 자본주의적 취향과 자본력은 각각 나뉘어 그 사이의 물고 물림으로 표현된다. 사실 백 년 사이가 만들어낸 서사의 변화라고 한다면 약소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우리의 의식 속 어떤 부분은 결코 쉽게 변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이처럼 이 백 년의 시간을 걸쳐 연결된 소설과 영화 속에서 겉으로는 반짝반짝 거리는 상징의 세계는 사실 엄청나게 매혹적이지만, 또한 엄청나게 허약하다. 쉽게 균열을 일으킨다. 이는 ‘자의식’ 같은 것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가져왔던 버리기 어려운 삶의 습관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은 그것을 감각적으로, ‘냄새’로 표현한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개츠비가 남긴 수첩 속에 빼곡하게 적혀 있던 계획표로 표현했던 것과 꽤 달라 보이지만 사실 같은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 반짝반짝 빛나는 상품의 상징이 호명하는 취향에 매혹되면서도 살아나가는 절박감에 의해 균열과 파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 상징이라는 거미줄에 걸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7-01

1905년 대한제국에서 일어난 멕시코 이민사기 사건의 전말

과거로부터 우리의 삶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이 언제나 합리적인 관점에서 설명될 수는 없다. 단지 우연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불합리와 비합리로 점철된 사건들이 버젓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욕망이나 비규칙적인 충동이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재이므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물론 역사로 기록된 사실들은 역사가가 갖는 일련의 역사적 관점에 의해 취사선택되기 마련이므로, 역사 속 기록들이 일견 합리적이고, 그럴 법한 것들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한참이나 지난 시간 이후에 과거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익숙한 질서나 문법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정리하기 마련이기 때문일 것이다.역사에 등장하는 광인조차 전형적인 광인의 문법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한 사실이 비교적 명확하지 않은가. 광인은 전형화될 수 없는 대상임에도 우리는 우리가 규정한 전형적인 광인의 모델 속에서 영조와 사도세자라든가 연산군 등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작 우리의 삶 속에서 겪는 사건들이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다만, 우리가 역사책을 읽는 이유는 기록된 문장 속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 자체와 그것이 도래하게 된 합리적인 발생적 근거에 대해 배우고자 함일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지금 현재를 살아갈 방향성을 얻는다거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일련의 관계에 대해서 확인한다는 감각은 바로 그것에서 온다.한편, 우리는 늘 역사의 행간 사이에서 아직 기록되지 않은 사실을 욕망하기도 한다. 기록된 역사의 행간에 존재하는 여백을 상상하면서 기록된 역사라는 문자에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 바로 역사의 독자의 태도가 아닐까. 역사 속에 숨겨졌던 이야기를 찾아내고 상상하는 행위의 즐거움은 확실히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에서 비롯되는 감정적이면서 또한 지적인 유희다.지금까지의 우리 역사 속 많은 장면들이 소설이나 영화로 다뤄졌지만, 그 중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 중에서 백 년에 걸쳐 계속해서 회자되는 사건이 있다. 바로 1905년에 일어났던 묵서가(墨西哥·멕시코의 한자음역어) 이민 사건이 그것이다. 아마 이렇게 말하면 잘 모르실 분이라고 하더라도 ‘애니깽’ 사건이라고 하면, 소설이나 영화로 접한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1905년 4월 초에 한인 1천33명이 영국 상선인 일포드 호에 실려 제물포항을 떠나 한 달에 걸친 항해 끝에 멕시코 유카탄반도 메리다 지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모두 처음에는 멕시코의 거대한 땅에서 부농이 될 것을 꿈꾸고 배에 탑승하였지만, 처음에 광고되었던 것과 달리 그들은 모두 농장에 노예로 팔려나갔다. 노예로 팔려간 그들은 40도가 넘는 멕시코의 더위 속에서 에네켄(Hen equen)이라는 선인장 농장에서 가시에 찔려가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고된 노동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견디다 못해 탈출을 시도하거나 병을 얻어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당시 그들이 팔려갔던 농장에서 기르던 선인장 에네켄이 바로 ‘애니깽’으로 나중에는 그렇게 팔려간 한인들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다.사실 이 사건은 지금 생각하더라도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속아서 배를 타고, 게다가 노예로 팔려나갔다는 일은 아무리 백 년 이전의 사건이라고 해도 쉽게 믿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 사건이 그토록 여러 번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졌던 것의 배경에는 바로 이 사건이 갖고 있는 이해되지 않는 비합리성이 그 원천이 된 것은 아닐까.이 사건에 대해서는 작가 김선영이 이미 1992년에 ‘애니깽’이라는 6권짜리 소설을 썼고, 1997년에는 김호선 감독이 장미희, 임성민 배우와 함께 동명의 영화를 멕시코 현지 로케이션으로 제작했다. 사실 97년의 영화는 배우 임성민이 촬영 중간에 간질환으로 사망하여, 미완성으로 남아버렸다. 가장 최근에 작가 김영하는 ‘검은 꽃’(2004)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사실, 기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이미 1911년에 소설로 쓰였다. 가장 인기 있던 신소설 작가였던 이해조는 이 이야기를 신소설 ‘월하가인’에서 이 사건을 다뤘던 것이다.소설에 등장하는 ‘심진사’라는 주인공은 ‘윤조’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묵서가로 떠나는 배를 탄다. 그는 농장에 노예로 팔려나가 갖은 고생을 하게 되고, 그 와중에 친구 ‘윤조’는 죽고 만다. 이후 ‘심진사’는 묵서가에서 고된 노동을 견디다 중국인 ‘왕대춘’을 만나 탈출하게 되고, 미국 화성돈(워싱턴)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무사히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다.천리 바깥 멕시코에 노예로 팔려 간 인물이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는 어이없는 전개나, 이 이야기에 ‘월하가인’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제목을 붙였던 것은 빈약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작가의 시공간적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당시 한국 정부에 멕시코에 노예로 팔려간 이들의 참상이 알려진 것도 청년회원인 정순만이라는 사람이 중국인 하혜(河惠)라는 사람의 편지를 전하면서 알려진 것이라, 이해조가 여기에서 창작적 모티프를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그는 이 작품에서 멕시코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는 심진사의 고된 노동 환경이나 의사소통이 거의 되지 않는 어려움 등을 소설을 통해 생생하게 옮겼다.이후 이 사건을 배경으로 쓰인 소설들은 대부분 일제 통감부가 수립되고 정부가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부당한 노동이민 사기를 당한 이들의 고통을 부각시키고,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관점을 보여준다. 당시의 역사를 들춰보면, 그들이 스스로 노예가 되는 노동이민을 선택했던 배경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면도 있다.1904년 12월 17일부터 무려 한 달여 동안 황성신문에는 “농부모집광고”라는 제목으로 2면에 3단으로 광고가 계속 되었다. 그 광고 속에는 멕시코는 미국과 함께 문명부강국이고 물과 토양이 좋고 기후가 따뜻하여 질병이 없어, 일본과 중국인들이 이미 멕시코에 건너가서 이득을 보고 있다는 찬사가 가득하다. 이번에, 한국과 멕시코가 협의하여 최빈국대우를 받게 되어 이번에 대륙식민합자회사라는 곳에서 농부를 모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럴 듯한 이 광고 속에는 받게 될 월급이나 토지 같은 장밋빛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가장 유력한 신문에 실렸던 광고이니 누구라고 믿지 않을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한편, 가장 최근에 쓰인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은 이 사건에 다소 다른 시각으로 접근한다. 당시 천 명이 넘는 한인들을 태우고 멕시코로 향한 일포드호는 이전까지 존재했던 계층, 성별, 권위 등 모든 허위의식들이 뒤섞이는 멜팅팟(melting pot, 재료들이 끓으면서 섞이는 냄비로 문화혼합을 가리키는 용어)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유민이면서,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나아간 일종의 문화적 ‘메스티소’였다.그래서 김영하의 ‘검은 꽃’을 찬찬히 읽으면, 일포드호 안에서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나 남성과 여성의 구분 같은 차이에서 비롯되는 권위의 위계가 어떻게 한 달이라는 배 생활 속에서 깨지게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묘사가 굉장하다. 어쩌면 그러한 감각은 단일민족에 대한 환상으로 둘러싸여 있던 한국이 처음으로 대면한 문화적 혼합의 경험이다.이렇게 보면, 이해조는 그 나름대로, 그리고 김영하는 김영하 다운 방식으로 어쩌면 또 다른 유례가 없을 역사적 사건에 다가가 소설로 썼던 셈이다. 앞의 것은 한 인간이 겪는 모험담, 그리고 성장하여 돌아오는 귀환을 담아낸 드라마가 되었고, 뒤의 것은 우리가 처음 겪었던 문화적 혼합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되었다. 물론 백 년 정도 되는 그 둘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즐기는 것 역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얻는 재미가 아닐까.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6-03

희망 있음과 희망 없음 사이에 존재하는 삶

물론 인간의 삶 속에 ‘절망’이나 ‘희망’이 본래부터 확정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희망’이나 ‘절망’은 개개의 사람들이 다가올 미래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태도와 관계된다. 사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되던 삶을 유일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되도록 만드는 ‘희망’이나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절망’의 상태가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린 것”이라는 식으로 편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절망이든 희망이든,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 그러한 요소를 진단하고 그러한 상태에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맞춘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가오는 현실은 언제나 더 치명적인 것이다.우리는 매일매일 무언가를 위해서인지도 모르게 바쁘게 어떤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 또 가끔은 가는 길을 멈추고 길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곰곰 생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면서 동시에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는 없다. 달리기 선수가 결승점을 향해 달려 나가면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달리고 있는가 하는 것을 동시에 알 수는 없는 것처럼 축구선수가 축구를 멈추고 자신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해보아야 자신이 지금 골대 앞에서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영역과 그것이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가 하는 조망하는 영역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내 작은 방 구석에 놓여 있는 화분 속 식물은 빛과 물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자신이 담고 있었던 모든 가능성을 발휘하여, 그 작은 몸을 애써 새로운 싹을 틔운다. 자연스러운 생명의 작용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신에 대한 증명과 타인과의 경쟁으로 점철된 하루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누구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저녁이 되어, 잠시 치열한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그것에는 희망이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때로는 그 ‘희망 없음’에 절망하기도 한다.이렇게 삶의 궤도에서 잠시 내려와 있는 시간에, 우리가 ‘인생론’이나 ‘자기계발론’에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시간이 흐르는 대로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하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처음이기 때문에 내가 향해가고 있는 길이 의미 있는 길인지 그 속에 ‘희망’이 있는지 하는 것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번잡한 술자리에서 큰소리로 짐짓,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의 눈동자에 어려 있는 확신은 사실은 불안함을 이겨내고자 자신을 단련한 결과에 불과하다. 우리의 말은 ‘희망’을 말하지만 그 말속에 담긴 ‘희망’은 이 세상에 그것이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우리의 삶은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 또 우리의 사회는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 우리가 조망하는 삶의 이상은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펼쳐져 지평선을 만들고, 이상을 말하는 우리의 말과 글은 논리에 따라 전개된다. 그렇게 삶의 방향성을 향해 여러 가지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이 서로 교차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관점을 만드는 것이다. 중세 이후 신의 언어를 대신하는 인간의 의미와 가치에서 희망을 발견했던 르네상스의 인간들이 그러했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군중’ 속에서 그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동시에 ‘군중’ 바깥에 존재하는 현대인들에 대해 조감하는 시선을 갖고자 했던 보들레르 같은, 파리의 산책자들의 불가능한 꿈이 그러한 것이었던 셈이다.지금까지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이상이나 희망을 말했던 많은 작가들이 있었지만 아마도 중국의 소설가 루쉰(魯迅·1881~1936)만큼 ‘희망’에 대해 조심스러운 견해를 가졌던 작가는 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연한 태도와 큰 목소리로 절망적인 상황과 그 속에 존재하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자연스레 마음이 기울고 그에게 막연한 기대를 걸어보고 싶어지게 되지만, 차분한 태도와 떨리는 목소리로 만연한 ‘절망’과 ‘희망’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과는 차를 한 잔 나누면서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의 근거에 대해서 대화하고 싶어진다. 루쉰은 바로 결코 섣부른 절망이나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그러한 작가이다. 작은 서가를 뒤져, 루쉰의 소설집 서문의 한 대목을 작게 소리 내어 읽어본다.“가령 말일세.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쇠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네. 오래지 않아서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야.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사멸되어 가고 있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 따위는 느끼지 못할 걸세.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비교적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켜서, 그 소수의 불행한 이들에게 구제될 수 없는 임종의 고초를 겪게 한다면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는가”“그러나 몇 사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그렇다. 나는 비록 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희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말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없다고 하는 내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그에게 글을 쓰겠다고 응답했다.-루쉰, 김시준 역, ‘제 1소설집 납함의 자서(自序)’, ‘루쉰소설전집’,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6, 8-9쪽.‘쇠로 된 방에 대한 비유’로 알려진 이 대목은 ‘희망’이나 ‘희망’을 말하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가장 잘 알려준다. 루쉰은 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던 중국인들의 몸이 아니라 정신을 새롭게 바꾸기 위해서 문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를 위해, 자신이 생각했던 사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잡지 ‘신생(新生)’이라는 야심찬 기획을 준비하였지만, 그 기획은 결국 여러 가지 현실에 부딪혀 아예 좌초되어 버렸다. 처음에 의기투합했던 세 명의 사람마저 장래의 꿈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적막 그 자체였다. 그곳에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일상의 삶에서 희망을 갖는 것은 누구에게나 나쁜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소리 높여 말하여, 아마도 그 희망이 없었다면, 희망도 절망도 아니었을 사람들을 깨워 깊은 절망을 경험하도록 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 것인가 루쉰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고민들은 사회적 이상을 말하거나 계몽을 말하는 정치가들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고민일 것이다.그럼에도 루쉰은 자신의 고민에 대한 친구의 발언을 듣고, 희망은 미래를 향해 있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으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확신이 타인의 희망을 꺾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자신의 첫 소설인‘광인일기’를 완성했던 것이다.루쉰의 소설들은 대부분 섣불리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정치가든 소설가든 누구나 희망이나 절망을 입에 올릴 수 있지만 자신의 말 속에 담긴 그것이 아직 그러한 적막과 고독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는 작가는 그가 유일하다. 분명 그는 ‘희망’을 말하기 망설이고 있는 작가이며, 그 망설임은 작가에 대한 신뢰로 되돌아온다.당시 여느 중국인들이 그러하듯,‘정신적 승리’로 살아가다 나름의 이유로 대인의 댁에, 또 나름의 이유로 혁명당에 가담한 아큐나, 주점에서 일하면서 살아가는 소년에게 굳이 문자 쓰는 법을 알려주고 싶어 했던 쿵이지가 발견한 희망은 모두 각자 나름의 ‘희망’을 구성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결국 누군가 발견한 희망-있음과 희망-없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오늘만큼은 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말해보는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5-06

타인의 연애편지를 훔쳐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한 시대를 빛냈던 한국의 근대문학, 예를 들어 김동인이나 염상섭, 이상이나 정지용, 박태원 등의 작품들은 이제는 중고등학생들의 국어나 문학 교과서에만 남겨져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덧없는 걱정이 생길 때가 있다.물론 교과서에나마 남겨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교육과정의 담당자들에 의해 여전히 남기고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하지만 문학 작품들이 뒷 세대들에게 다시 읽히고 그 새로운 해석을 매개로 또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가는 과정이 이른바 문화적 생산력 내지는 해석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면, 한국 근현대문학은 이제는 새로운 시대의 문화를 생산할 힘을 잃어버리고 교육과정의 일부에 머물러, 닫혀 있고 명확한 해석만을 재생산하는 것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현진건의 사진.분명 문학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 자신의 몫이다. 이미 공인된 해석이 갖는 힘을 지나치게 절대화하지 않는다면, 어떤 문학작품이든 독자 자신이 갖는 개개인의 이상과 가치에 맞게, 그리고 변화하는 동시대의 문화적 함의를 통해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학 작품에 대한 열린 해석의 가능성은 그 사회가 얼마나 열린 가치를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서가를 뒤지다가 오랜만에 현진건의 소설집을 꺼낸다. 현진건(玄鎭健·1900~1943)이라고 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바로 ‘운수 좋은 날’(1924)의 ‘김첨지’를 떠올릴 것이다.“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이라는, 인력거꾼 김첨지에게 가장 운수가 좋았던 날이 바로 병에 걸린 아내가 죽은 가장 운수가 나쁜 날이었다는 역설이 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어 크게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그 때문인지 어지간한 문학 교과서들에는 대부분 수록이 되어 있어서, 현진건이라는 이름을 바로 기억해내지 못하시는 분이라도, 아마 이 ‘운수 좋은 날’이라는 제목이나 그 마지막 상황이 자아내는 독특한 페이소스만큼은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사실, 현진건은 1920년대 무렵 일제 식민지하에서 기형적으로 자본주의화하는 도시 서울의 풍속도를 가장 예리하게 파헤쳤던 작가였다. 비록 ‘운수 좋은 날’로 대표되기는 하였으나, 도시노동자의 피폐한 현실을 그려내는 것만이 작가 현진건의 주제는 아니었던 셈이다. 에두아르 마네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들이 갖고 있던 속물적 취미를 자기 작품의 풍자적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현진건은 가장 예리한 시선으로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의 양상을 소설 속에 옮겨와 일종의 풍자적 대상으로 삼았다.현진건이 초창기부터 꽤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랑의 열병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1920년 무렵 조선 사회의 예술적 아이콘과도 같았던 나혜석과 김우영의 화려한 결혼식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자유연애’라는 사상이자 풍속이 널리 퍼지게 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근대적 사랑의 열정이 일종의 풍속이자 정신으로 체현되었던 것이다. 현진건은 이러한 상황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냈다.그가 최초로 발표한 소설인 ‘희생화’(1920)에서 근대적 사랑의 열기에 들떠 바뀌어 가는 누님을 바라보는 남동생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창경원에 벚꽃이 한창일 무렵, 나는 누님과 함께 식물원에 간다. 누님은 공부를 썩 잘하고 재주가 비범하다는 같은 학교 4학년 급장과 시선을 마주치고 얼굴이 붉어졌던 것이다.이후 같은 학교 지육부(智育部)의 간사로 활동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감정을 갖게 되지만, 두 집안 사이의 반대로 그들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하게 된다. 집안의 반대로 사랑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주제는, 이미 고전소설에서부터 신소설에 이르기까지 오래되어 낡고 뻔한 문학적 클리셰이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하지만 현진건은 그 둘의 상투적인 운명이 아니라 열병과 같은 사랑 뒤에 누이에게 남은 감정적 불길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자리에 주목한다.사랑을 잃은 누님은 격정과도 같은 감정에 휩싸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 역시 동정(同情)의 정서가 가득하다. 작가 현진건은 새로운 시대, 도래한 근대적 사랑의 열병과 그것이 담고 있는 힘에 대해서 주목했던 것이다.이후 2년 뒤쯤에 쓴 ‘타락자’(1922)에서 현진건은 다시, 사랑이라는 주제를 꺼낸다. 부모의 뜻에 의해 결혼한 ‘나’는 신문사(현진건은 1921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가 시대일보로 옮겼고, 이어 1927년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했다)의 신입 환영 모임으로 요리집 명월관 지점에 갔다가 그곳에서 춘심(春心)이라는 기생을 만난다. 처음에는 아무런 마음도 없었던 나는 말수작을 몇 번 나누다가 술을 더 마시고 그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술에 잔뜩 취하여 집으로 돌아와 잠들었다가 깬 나를 본 아내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지으며, 어젯밤 술에 취한 내가 춘심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을 잡아당기더라고 말하며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다.이 작품의 이 대목은 퍽 의아하다. 자신의 남편이 명월관 지점에 가서 기생과 놀음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 아내를 보고서 기생으로 착각하여 그 이름을 부르는데, 아내는 그 상황을 재밌어 하며 웃는다. 일반적인 감각에서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해보면 어떨까. 집안의 뜻에 의해 결혼한 아내는 아마도 자신의 남편이 사랑의 열병에 들떠 있는 장면을 아마도 처음 봤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기생이든, 누구든 일단은 신기하고 재미있었을 터이다.이어, 나는 춘심이 보낸 편지를 받는다. 몇 줄 적지 않은, 사소하다면 사소할 그 편지를 받고서 나는 하늘이 떠나갈 듯 기뻐하면서 아내에게 그 편지를 자랑한다. 나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있지만, 작품 속에서 아내의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아내가 신기해했던 연애에 빠진 남편의 상황은 딱 여기까지였을 것이다.사랑에 빠진 이들이 늘 그러하듯, 그 남편은 열병에 빠져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인 아내의 심리를 간과해버린다. 결국, 아내는 화를 내고, 집안의 반대까지 더해, 나는 춘심과 헤어진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춘심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슬퍼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성병인 임질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아내의 장면이다. 사실 여기에서 임질이란 실제의 병이기도 하고, 감염되는 근대적 사랑의 열정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현진건의 작품 중에서 ‘근대적인 사랑’을 다룬 것 중 가장 짧은 것이지만, 가장 강렬한 작품은 바로 ‘B사감과 러브레터’(1925)이다. 아마 이 소설의 세부까지 기억나지는 않으셔도, 아마 독신주의자이자 노처녀인 B사감의 기괴한 형상만큼은 기억하며 질겁하실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여학교에서 근무하는 B여사는 학생들에게 오는 ‘러브레터’를 싫어한다. 하루에도 몇 장씩 죽느니 사느니 하는 사랑 타령이 들어 있는 편지들이 들어오면, 해당 여학생들을 호출하여 닦아세우기 일쑤다. 그러면서 그는 ‘사내란 믿지 못할 것, 우리 여성을 잡아먹으려는 마귀인 것, 연애가 자유이니 신성이니 하는 것도 모두 악마가 지어낸 소리’라며 학생들에게 일장연설을 올린다.그러던 B여사가 밤에는 학생들의 ‘러브레터’를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절절한 사랑의 글귀들을 보면서 그 속 감정에 푹 빠져 일종의 연기를 하듯이 그 상황을 재연하는 것을 3명의 학생들이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 이 짧은 소설의 대강이다. 이렇게만 보면 마치 이 소설은 겉과 속이 다른 엄숙주의자의 행태를 풍자적으로 다루면서 그 기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생각해보자. 연애소설을 읽는 우리의 마음 속 풍경이 B여사의 그것과 과연 많이 다를까. 비슷한 시기 노자영(盧子泳·1896~1940)이 펴낸 연애서간집 ‘사랑의 불꽃’(1923)는 시대적인 베스트셀러였다. 그 책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누군가의 편지를 훔쳐보면서, 독자들은 ‘사랑’의 열정을 되새겼던 것이다.누군가의 절절한 연애편지를 훔쳐보는 독자가 나의 일도 아닌데 가슴이 뛰는 것, 그것이 바로 연애소설의 기본 도식이었던 것이다. 현진건은 이 작품을 통해 근대적인 사랑의 풍속도뿐만 아니라 연애소설의 독자들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에 대한 동정과 공감의 문제를 다뤘던 것이다./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4-15

‘부끄러움’이라는,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감정

인간의 마음은 마치 잔잔한 바다 속 깊이 감춰진 물결처럼 빠르게 흐른다. 걷거나 뛰고, 일하고 사랑하는 그 순간에도 마음 속에는 생각이 물결처럼 계속해서 빠르게 흐르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기만 하는 바다 속 물결의 흐름을 읽어내기 어려운 것처럼, 타인인 우리가 그 사람을 보아도 그 마음속에 어떤 거친 물살이 흘러넘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흐르고 있을까 하는 갖지 말았어야 할 호기심은 나를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자신이 쓴 철학서인 ‘존재와 무(L‘00EAtre et le n00E9ant, 1943)’에서 타인 내지는 타자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에 대해서 궁금해 문에 귀를 대고 열쇠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본다는 가상의 상황을 제시한다. 그런데, 갑자기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서, 뒤늦게 깜짝 놀라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물론 내 숨어 있는 모습을 들킨 것이 아니니, 숨어 있던 사실을 남에게 들켜서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질투에서든, 호기심에서든 내가 타인에 대해 마음을 품고 그를 궁금해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일깨워져 부끄러운 것이다. 그가 그 즈음 쓴 희곡 ‘닫힌 방(Huis clos, 1944)’에서 버젓이 ‘타인은 지옥’이라고 선언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인간됨이라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신 앞에 선 똑같은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하나의 마음을 강요받았던 신화의 시대 이래로, 바벨탑 아니 그보다 한참 뒤에 모든 인간들이 각자의 인격을 갖고 자기가 창조한 마음 속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인간들은 이제는 서로의 마음 속에 흐르고 있는 생각을 알 수 없어 괴로워하고, 그것을 궁금해 했다는 사실 때문에 한 번 더 부끄러워한다. 사르트르에 의한다면, 지금 시대의 인간은 영원히 타자의 시선이 빚어내는 부끄러움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 셈이다. 그러기에 부끄러움이란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라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가 타인을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축복이면서 또한 저주이다.이러한 시대에는 아마도 언어만이 타인의 내면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것이다. 지금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어른들이 수다를 떨고, 편의점 구석에서 고등학생들이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궁금해 하는 것, 그것은 바로 타인의 마음이다. ‘그날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이상하고 낯선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쳐다봤을까.’ 몇 명이 모여서 이야기해본들, 답이 나올 리 없다. 그것은 온전한 타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명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면 두려운 감정만큼은 사라진다. 분명 돌아오는 길 어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또 다시 부끄러워지겠지만, 타인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만큼은 위안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누군가와 타인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이리라.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지금 우리 시대의 소설이 대부분 타인의 내면을 다루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타인의 내면에 비교적 온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 언어를 다루는 작가가 예민하게 포착해낸 누군가의 속마음이 소설 속에는 오롯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인물에 대한 묘사며, 시점이라는 장치며, 어느 것이나 독자로 하여금 소설 특유의 타인의 속마음으로 들어가는 기술을 극대화하는 방법일 것이다. 바로 옆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조차 쉽게 알 수 없는 인간에게 소설은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가 아닐 수 없다.이런 생각을 하며, 서가의 책들을 둘러본다. 사춘기 시절, 설명하기 힘든 기분에 빠져 있던 나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던 책들이 여전히 그대로 서가에 꽂혀 있다. 기형도와 김승옥, 카프카와 손창섭…. 그때 나의 세계의 전부였던 것들은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부끄러운 것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 소설을 통해서야 겨우 내게 찾아온 타인의 감정에 대한 갈망을 비슷한 언어로 정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아무래도 알 수 없는 타인의 내면에 대한 자기에 대한 사랑과 자기에 대한 혐오와 부끄러움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갖지 않을 수 없는 감정이다.어쩌면, 일본의 다자이 오사무(太宰治·1909~1948)라는 작가는 그러한 인간이 가진 감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던 작가가 아닐까. 그의 대표작 ‘인간실격’을 꺼내 든다. 그 속에서는 낯선 표정으로 세상과 마주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소설 ‘인간실격’은 1930년 무렵 ‘요조’라는 주인공이 쓴 세 편의 수기를 누군가로부터 받은 작가가 이를 소설로 꾸미면서 앞과 뒤에 이야기를 덧붙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기를 남긴 요조는 비교적 부유한 가족에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모두 낯설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요조의 수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라는 자기고백의 시작은 단지 특별한 인간의 자기고백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라면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근원적인 부끄러움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요조는 세상과 타인에 대해 깊은 감수성을 가진 인간이 모두 그렇듯이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 그 사이에서 근본적인 불일치를 경험하면서, 어린 시절 너무 일찍 자신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가 불협하다는 것을 이해해버린 것이다.“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김춘미 옮김, ‘인간실격’, 민음사, 2004, 16쪽.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그것,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지 않을 수 없는 근본적인 불일치일 것이다. 이 소설은 섣불리 타인의 이해나 앎을 말하기보다는 담담하게 바로 그 아픈 저주 같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 ‘인간실격’은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간됨조차 어떤 개인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것이라는 불안의식을 최초로 선언하여 낙관주의의 언어를 통해 은폐된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과 공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비록 소설 속 요조는 익살로서 인간을 가장하거나, 동반자살에 실패하고, 폐병과 정신병을 앓으며 인간으로서의 하찮은 인생을 마치 광인처럼 살아간다. 그가 순수하거나 세상이 더러워서가 아니다. 세상에 던져진 그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것조차 갖지 못한 낯선 인간이었던 것이다.마찬가지로 우리가 그의 수기를 읽으며 어떤 위안을 얻는 것은 결코 우리의 삶이 그의 삶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되기조차 어려워했던 그가 갖고 있던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실은 가장 인간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모두 잊어버렸던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가 이 소설 속에서는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화해되기 어려운 인간과 저 바깥 세계 사이의 간극을 다루는 가장 소설다운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0년대 초에 김승옥은 다시, 다자이 오사무를 읽자, 는 제안을 하면서 다자이 오사무 전집을 출판하고자 기획했었다. 어린 시절 김승옥의 소설을 읽으며 타인에 대한 부끄러움을 읽어냈던 나는 다자이 오사무를 읽으며 한 번 더 그에게 공감한다. 이 탁월한 작가는 인간이 낯설었던 인간을 통해 우리 모두가 이미 한참 전에 잊어버렸던 것들을 불현듯 다시, 슬쩍 건네고 있는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19-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