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번연 ‘천로역정’
인류의 역사에서 신의 구원을 찾아 순례를 떠났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종교적 대상이 탄생한 이른바 신성한 영역에 발을 들여보고자 그토록 먼 길을, 심지어 죽을 위기까지도 넘겨 가며 찾아가 마침내 보고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이끌림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라 단지 신앙의 유무나 종교의 형태를 넘어서는 울림을 준다.
사실, 순례(巡禮)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어떤 대상을 돌아보는 행위 속에는 이미 그 대상에 대한 예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신적인 대상이 남긴 흔적을 따라 선교사들이 떠났던 산티아고 순례가 이제는 ‘나’를 찾아 떠나는 순례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순례의 대상은 바뀔지언정, 순례라는 여정이 이끄는 대상에 대한 경건한 태도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좁은 인간의 머릿속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고뇌는 결국 신의 영역에서만 해결될 수 있고, 해결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인류가 존재해왔던 모든 순간들 속에서 이처럼 신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순례를 떠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에 얽힌 이야기들은 그것이 신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바로 그렇게 목숨을 걸고 떠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크고 넓게 울린다.
신적 대상이 남겨둔 흔적을 따라 실제의 길을 걷는 순례의 여정뿐만 아니라 미술작품이나 문학작품을 통해 신적 대상에 이끌린 순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기록들은 훨씬 더 많다. 특별한 종교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더라도 특히 문학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이끌림과 관계되어 있으니, 신의 구원이나 기적을 향한, 인간의 아스라한 마음을 향한 모든 예술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어떤 대상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나고 있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19세기 후반 유럽과 미국의 선교사들은 포교를 위해 해가 뜨는 조용한 나라, 조선으로 이끌리듯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James S.Gale·1863~1937)이 번역했던 것은 존 번연(John Bunyan·1628~1688)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이었다. 기독교적인 순례의 가장 대표적인 대상이 성경일 것이며, 단테의 ‘신곡’ 역시 인간의 죽음 이후의 세계에 다녀오는 순례일 것이나, 이 시기 가장 대표적인 순례 문학은 바로 ‘천로역정’이었다. 게일은 당시 원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1894년에 순한글로 ‘텬로력뎡’을 번역했다. 당시 선교사 게일은 성서를 번역하고, 한영사전을 내고 있던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이 책을 번역했고, 부산 초량에서 활동하고 있던 화가 기산 김준근과 함께 상의하여 상하 권을 통틀어 마흔 점 가까운 삽화를 싣기도 했다.
이 책에서 지옥의 불길 속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기독교도는 구원을 찾아 집을 나와 순례를 떠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가르침을 얻기도 하며 자신을 유혹하려는 대상과 맞서기도 하며 자신이 갖고 있던 답을 찾아내고 결국 천국으로 들어간다. 죽음 뒤에 존재하는 암흑의 세계에서 천국이라는 신적인 대상을 향해 찾아가는 순례가 바로 이 ‘천로역정’의 여정인 것이다. 게일이 번역한 이 ‘천로역정’은 한국 개화기 독립협회의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갖게 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자신이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풀 수 없던 물음들이 풀려가면서 결국 천국으로 가게 되는 과정들이, 암흑에 가까워 바로 앞도 보이지 않던 당시의 현실과 겹쳐져 그 기독교도의 순례에 공감하게 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이어, 이 ‘천로역정’은 이후 여러 번 다시 번역되었지만, 제임스 게일의 이 번역이 가진 가치가 여전히 대단한 것은 그 번역 자체가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순례의 여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