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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결핍, 혹은 공감 과잉의 시대

등록일 2023-02-27 19:34 게재일 2023-02-2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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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미국의 영장류학자이자 행동심리학자인 에밀 멘젤(Emil Menzel·1929~2012)은 침팬지들에 대한 실험에서 침팬지들도 다른 침팬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즉 다른 침팬지의 마음속에 실제로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대상을 관찰해서 획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대상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어릴 때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할 수 있다. 당연히 그 타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까지는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빠나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며 그의 입장이 되어 숨겨둔 과자 같은 것들을 찾아낼 수도 있다. 이렇게 우리가 관찰을 통해 얻은 외부의 정보들을 통해 이를 종합하여 타인의 마음을 재구성하는 것은, 그것을 공감(empathy)이라고 부르든 동정(sympathy)이라고 부르든,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타인의 입장이 되는 과정이다.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거나,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한 기쁨을 느끼는 누군가를 보며 덩달아 흡족해진다.

그것은 어쩌면 신경생리학자들이 ‘거울 뉴런’이라고 불렀던 감정의 모방이나 전이라는 신체의 기능일 수도 있고, 인간이라는 종의 본능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렇게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대상에 대해서도, 심지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몇 줄 글 속에만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그의 입장이 되어 공감할 수 있는 존재이다.

물론,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내러티브 속에 등장하는 대상의 입장이 되어 판단하고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이와는 조금 다른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정보들은 동시다발적이고 맥락화되어 있지 않지만, 문학작품이나 영상작품은 그것을 구성하는 정보들이 단단하게 엮여 의미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언어 정보나 시각 정보의 전달 순서를 통해 독자나 관객을, 그 속에 들어 있는 상황에 몰입하도록 만들고, 그 속의 생판 타인에게 감정이입하도록 만든다. 문학작품을 읽는 경험 중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렇게 고유한 ‘나’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공감의 영역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사회에 타인에 대한 공감의 영역은 과잉되어 넘쳐흐르기도 하고, 결핍되어 사라져 버린 것 같기도 하다. 타인이 겪은 어떤 일에 대해 마치 자신이 상처받기라도 한 듯 맥락화되지 않는 분노를 쏟아내는가 하면, 타인의 어떤 당연한 아픔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뿌리를 알 수 없는 복수심리를 다룬 영상 작품들이 넘쳐나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진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소설의 서사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공감의 결핍과 과잉이 공존하는 모순된 시대이다.

문득, 우리가 타인과의 거리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을 다룬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다고 해서, 타인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했다고 생각하는 때 타인의 존재는 미궁으로 빠져든다.

까뮈가 ‘이방인’에서 보여준 뫼르소의 부조리가, 올더스 헉슬리가 풍자했던 ‘멋진 신세계’의 소마의 ‘행복’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타인의 입장을 짐작하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감정을 단순화시켜 타인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공감의 결핍인가, 아니면 공감의 과잉인가. 우리는 어떤 시대로 가고 있는가.

/홍익대 교수 송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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