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학자인 빌렘 플루세르(Vilem Flusser)는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하고 질문했던 적이 있다. 물론 플루세르는 이 글쓰기를 책이라는 미디어와 더 관련시켜 논의하고 있긴 하지만, 글쓰기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감각적 이미지의 저장장치와 전송속도의 발전으로 인해 어떤 인간의 감각과 다른 인간의 감각 사이를 연결하는 추상적인 형태의 글쓰기는 사실 그 매개로서의 역할을 잃어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카페나 대중교통 안에서 글쓰기가 아닌 영상으로 사유를 배운 유튜브-네이티브들이 모두 제각기 스마트폰을 쥐고 영상에 열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순간 다가올 미래에 대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바야흐로 우리는 지금 책의 시대를 빠져나가고 있으며, 글쓰기의 미래 역시 그리 낙관할 수만은 없다.
새로운 미디어의 발달은 글쓰기가 갖는 매개의 불투명한 영역을 삭제하여 모든 인간이 다른 인간의 직접 경험에 구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자유를 부여한다. 작은 스마트폰의 화면을 통해서라면, 우리가 글쓰기로 어떻게 해도 다가가기 어려웠던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 감각, 그리고 일상에 직접 접속할 수 있다. 그러니 메타적이고 추상적인 문자와 그 연결로서 글쓰기라는 논리를 통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통은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입지를 갖기 어렵다. 조만간 우리는 글쓰기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시대로 접어들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대상이 갖고 있는 권위가 땅에 떨어진 뒤에야, 우리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직시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책과 글쓰기가 가진 의미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 시기는 어쩌면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에게 글쓰기는 무엇이었을까.
한때 글쓰기는 인간이 가진 사유의 형태와 색깔, 그리고 그 깊이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좀 더 어려운 말로 해본다면, 피와 살을 가진 구체적인 감각을 영위하는 인간에게 메타적 인지와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추상적 개념의 문자화와 그 연쇄로서 글쓰기는 인간의 사고를 확장시켜주는 매개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문자와 글쓰기에는 아무런 감각적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은 인간이 가진 감각과 감정,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회로를 작동시킨다. 여전히 대학에서 신입생에게 앞으로의 대학 강의를 듣기 위한 도구로서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아마 글쓰기가 가진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어쩌면 글쓰기가 갖고 있는 불편함이란 바로 글쓰기가 갖는 가치에 해당한다. 눈을 가린 채, 그것이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강변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구체의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그를 통해 사유의 힘과 상상력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라니, 그것에 가치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과 감정과 사유를 기록할 또 다른 미디어적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토록 불편한 글쓰기가 인간의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우리 인간이 글쓰기를 완전히 포기하는 날은 그리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읽기와 쓰기는 불편하지만 인간다운 행위이다. 소설가 이태준과 시인 박목월이 제각기 시대에 썼던 ‘문장강화’를 열어본다. 문자에 대한 충만한 신뢰가 그 속에는 들어 있다. 글쓰기가 주는 아름다움도 들어 있다. 글쓰기는 분명 물성을 가진 존재이면서, 인간의 사유를 확장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글쓰기가 저물어가는 시대에 여전히 읽고 쓰는 존재들이 어딘가에 있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