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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

등록일 2020-10-12 20:04 게재일 2020-10-1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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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

“당신은 지금 이탈로 칼비노의 새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를 읽을 참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가 책을 읽고 있다 보면, 불현듯 책 속에 있는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 작가는 언제나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서 작가의 말건넴이란 이런 소설가의 창작이나 독서의 몰입에 대한 비유가 아니다. 칼비노는 책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실제로 말을 걸어온다.

이탈리아의 환상문학 작가인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는 소설의 목소리나 서술의 형식에 있어서 지금까지 존재했던 소설 작품들 중 가장 독특하다고 해도 좋을 작품 중 하나이다. 서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많은 이론가들 역시 특히 독자에게 전하는 작가의 목소리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을 특별한 사례로 손꼽고 있기도 하다.

이 소설은 철도역에서 시작한다. 여느 작가가 그렇듯 칼비노도 어느 철도역에나 있을 법한 풍경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기관차에서 나오는 증기 구름, 그리고 냄새, 낡은 기차의 뿌연 유리창과 멀어져가는 기적 소리들이 이 소설의 초반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당연히 그 배경 속으로 역시 여느 소설이 그러하듯이 아마도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사람이 카페로 들어온다. 역 안의 풍경과 시골 역 한 켠에 있는 카페에 지금 막 들어선 남자를 묘사하는 시선은 작가의 그것이다. 그러다가 소설 속 목소리는 남자의 것으로 바뀐다. “나는 카페와 전화 부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남자다” 그러면서 작가는 ‘당신’이라고 불리우는 독자를 소설 속에 초대한다. “그 남자는 ‘나’라고 불리며 당신은 이 역이 ‘역’이라고 불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듯 그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

이처럼 이 소설에는 ‘작가’와 ‘나’와 ‘당신’이 공존한다. ‘작가’는 한편으로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나’가 하고 있는 행동들 속에 담긴 심리를 이해하면서 그것들을 소설 속에 기록해둔다. 또 독자인 ‘당신’이 갖고 있는 마음속 상태를 예민하게 짐작하면서 작가의 마음속, 그리고 독자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소설’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다룬다. ‘메타픽션’이라는 형식으로 작가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목소리가 소설이 되어가는 양상을 다뤘던 경우는 적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 소설은 독자의 자리를 소설의 내부에 만들어 두고 그 독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소설이라는 현상에 참여하도록 한다.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인 당신은 이 책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를 30페이지 넘게 읽고 있다가, 제본의 실수로 같은 페이지가 중복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당신이 서점에 항의를 하러 가보니 서점 주인은 제본소의 실수로 책의 속지가 타지오 바자크발이라는 폴란드 작가의 책과 뒤섞여 버렸다고 한다. 당신은 서점에서 만난 다른 여성 독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우연히 발견한 이 바자크발이라는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하고, 그 사이에 책의 중단과 그 책에서 연결되어 파생된 다양한 책들을 읽어나가면서 책의 또 다른 독자인 루드밀라와 책이 얽혀 있는 다양한 관계들을 경험한다. 독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바자크발이나 칼비노의 완결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이든 읽어나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삶이라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당신은 루드밀라와 결혼하여, 다시 책을 읽는다. 루드밀라가 불을 끄고 그만 자라고 말하자, 당신은 “조금만 더 보고.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인데 거의 다 읽었어” 라고 말하며, 소설은 끝난다.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인가. 아니면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당신의 삶 자체인가. 이 소설은 이렇게 질문한다.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인가? 아니면 당신의 삶 자체인가?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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