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형제 ‘헨젤과 그레텔’
어렸을 적 동화를 통해 그 속에 들어 있는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갔던 경험은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도 어린 시절 ‘헨젤과 그레텔’을 읽었던 때의 느낌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어두운 숲 속에서 어린 그레텔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던 헨젤이 막막함을 느끼던 부분을 읽을 때면, 그 세계 속 어느 곳인지도 모를 곳의 숲길을 나도 함께 마주 걷는 듯했고, 헤매던 그들이 알록달록한 과자로 된 집을 발견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함께 환호하며, 어딘지 모를 미심쩍은 위험에 대한 예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어린 시절 동화 속에 들어 있는 세계가 나에게 완전한 몰입의 경험을 주었던 것은 그때가 세계에 대한 감수성이 좀 더 풍부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조차 아직 완전히 구분되어 있지 않던 시절, 어린 독자는 동화 속 세계의 어린 아이들이 겪었던 두려움과 놀람, 그리고 기쁨과 공포를 마치 내 것인 양 받아들이며 숨죽이곤 했다.
누구나 그렇듯 나이가 들어 이제는 더이상 그러한 상상의 세계의 동기화로부터 벗어난 때, 다시 손에 잡은 동화 ‘헨젤과 그레텔’ 속의 세계는 사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세계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동화의 내용이 바뀔 리 없으니, 그것을 바라보는 독자가 더 커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세상을 미세하게 분해하여 받아들이는 이른바 마음의 해상력이 좀 더 촘촘해지게 된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이는 어른이 되기 마련이고, 동화책에 찍혀 있는 고정된 문자들 사이로 빠져 들어가 그 단단한 언어의 연결을 유연하게 만들고, 반짝거리게 만드는 아이들의 재능은 어른이 되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한때 그 재능이 자리 잡고 있던 곳에는 실제 세상에 대한 경험 같이 어디를 봐도 당연한 것들이 채운다.
독일의 언어학자이자 문헌학자였던 야코프 그림(1785~1863)과 빌헬름 그림(1786~1859) 형제는 독일 지역에서 구전으로 떠돌던 이야기를 수집하여 이를 바탕으로 동화를 쓰곤 했다. 그들이 쓴 이 ‘헨젤과 그레텔’ 역시 구전되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는데, 대개 떠도는 이야기가 그렇듯이 그 속에는 당시 유럽 사회에 떠돌던 공포, 즉 가난으로 인해 유아를 숲에 방치하여 살해하던 비정한 부모에 대한 소문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끔찍한 공포를 담고 있던 그림 형제의 원작은 이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완화되었다. 즉 시대가 지나며 바뀌는 것이 어른이 된 동화의 독자만이 아니라 동화 그 자체이기도 했다.
이 동화 속에서 헨젤과 그레텔은 두 번 버려진다. 자기들을 버리려 한다는 계획을 알아낸 헨젤은 첫 번째에는 흰색 조약돌을 주워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아버지가 나무를 하러갈 때, 길 위에 하나씩 떨어뜨린다. 아버지는 도망치고, 칠흑같이 어두운 숲길에서 흰색 조약돌은 ‘반짝’ 빛난다. 마치 그 길이 유일하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듯. 이 부분을 읽었던 어린 마음은 그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헨젤의 재치가 마치 내 일인 양 대견하기만 했다. 하지만 반짝거리는 그 길이 단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만 하는 길이라면 그것을 과연 마냥 기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두 번째로 헨젤과 그레텔은 또 숲에 버려지지만 이때는 시간이 없어 먹으려고 싸둔 빵부스러기로 길을 표시해둘 수밖에 없었다. 한없이 가벼운 빵부스러기는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새들이 다 먹어버린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운명은 한없이 가엾지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보증이 사라지지 않고서야 그들의 눈앞에 과자의 집은 나타날 수 있었을까. 길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고는 새로움도 위험도 없다, 고 어른이 된 마음이 생각한다.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