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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찾아 떠난 숭고한 순례의 여정

등록일 2021-05-31 20:07 게재일 2021-06-0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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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의 ‘심춘순례’(1926)
최남선이 1925년 3월부터 약 50여일에 걸쳐 지리산 근방의 각 지역을 순례하고 집필하여 백운사에서 1926년에 출판한 기행문.

우리를 둘러싼 공간은 사실 아무 특색도 없이 그저 그곳에 놓여서 그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뿐인 것만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공간에는 이미 내가 누군가와 그곳에서 만나며 관계를 맺으며 교섭해나갔던 경험들이 그대로 쌓여있게 마련이다. 가족이 오랫동안 살았던 집에는 자연스레 그들이 남겨둔 물건들, 상처들, 사건들이 흔적처럼 남아 켜켜이 쌓이기 마련이다.

물론, 그곳에 우리 마음의 어떤 부분이 실제로 쌓이는 것은 아니다. 쌓이는 곳은 사실 우리의 마음이다. 층층이 남은 그날의 감상들, 단단히 묶인 감정들, 분위기나 냄새 등은 모두 우리 마음속에만 기억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단지 벽에 난 생채기는 그날의 마음을 흔적처럼 남기고 있는 것뿐이다. 이사 갈 때쯤이 되어 우리가 그런 흔적들이 가득한 집을 둘러보면서 여기에 우리 가족의 기억이 가득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가 어딘가 여행을 떠나 늘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은 여행자에게 호기심을 유발하는 그런 낯선 공간만이 아니라, 그 공간을 터전 삼아 살아가고 있는 그네들이 남긴 흔적들이다. 시장에는 몇 번이고 고쳐 묶어둔 자국이 있는 천막을 묶은 끈이 있고, 어린 손자들의 손으로 그려진 작은 꽃이 벽 한 쪽에 귀퉁이 한 쪽이 조금 떨어져 붙어 있기도 하다. 그 공간을 살아가면서 그네들이 남겼던 삶의 기억들이 여행자들에게는 한편으로는 동질감으로, 한편으로는 이국의 정취로 다가온다. 여행이란 결국 누군가 그 공간을 점유했던 사람들의 삶의 기억들을 기념물 같은 흔적들을 통해 잠시나마 돌아보는 행위라 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행이나 유람 등 어딘가에 가서 그처럼 옛사람들의 자취를 돌아보고, 새롭게 자신이 느낀 정취를 더하는 행위로서 여행기라는 글쓰기는 인간이 말과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계기와 마찬가지 기원을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말과 글을 가지고 무엇을 했을 것인가. 저 먼 고개 너머를 가보고 그곳에 누가 살고 있는가, 무엇이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말과 글을 통해 전하는 경험은 바로 그 요체인 것이다.

지금까지 옛사람이 남겨둔 수많은 기행문 또는 여행기가 존재하지만, 최남선(1890~1957)이 1926년에 발간한 ‘심춘순례’의 자리는 유독 빛난다. 조선의 ‘국토’를 순례의 대상으로 새롭게 발견했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순례’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대상에 대한 종교적 함의를 감안한다면, 이 시기의 최남선은 바로 조선의 국토에 대한 태도를 마치 종교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3·1운동 당시 투옥되었을 때의 최남선(왼쪽).
3·1운동 당시 투옥되었을 때의 최남선(왼쪽).

최남선은 1925년 3월 하순부터 지리산 근방의 각 지역을 순례하고 주로 백제의 흔적을 중심으로 이어진 각 사찰들 속에 흔적처럼 남겨진 한민족의 기억을 복원하고 찾아내고자 애썼다. 그는 서문에서, “조선의 국토는 산하 그대로 조선의 역사며 철학이며 시며 정신입니다. 문자 아닌 채 가장 명료하고 정확하고 또 재미있는 기억입니다. 조선인의 마음의 그림자와 생활의 자취는 고스란히 똑똑히 이 국토 위에 박혀 있어서 어떠한 풍우라도 마멸시키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조선 국토에 남겨진 민족의 기억이 단지 책 속 문자에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 남겨진 문화적 기억의 흔적 속에 널리 남아 있음을 간파했던 것이다.

최남선의 이러한 시도는 이후 그가 남긴 일련의 기행문, ‘백두산근참기’, ‘금강예찬’등으로 이어졌거니와, 그가 발견한 순례의 정신은 현진건의 ‘고도순례경주’, ‘단군성적순례’ 등으로 이어졌다. 그들에게 있어 조선의 국토는 바로 순례의 대상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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