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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 없는 책을 무슨 재미로 볼까?

등록일 2022-05-09 19:47 게재일 2022-05-1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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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조가 ‘이열재(怡悅齋)’라는 필명으로 1912년 1월 1일부터 실었던 ‘신소설 춘외춘’에 처음 들어간 삽화.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소재

“그림도 없고 대화도 없는 책을 왜 보는 걸까? 그런 책이 무슨 소용이람?”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시작 부분에 앨리스는 언니와 함께 강둑에 앉아 있다가 언니가 읽고 있던 책을 흘끔거리고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른들만 읽던’ 글자만 있던 책이 지루했던 앨리스는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넘치고 있는 꿈 속 세계로 토끼를 따라 들어가게 된 것이다. 루이스 캐럴 역시 이 아이들을 위한 환상의 동화의 삽화를 소설만큼이나 귀중하게 골라 넣었다. 어쩌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독자들을 끌고 가는 것은 이야기의 힘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삽화와 대사의 맛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금처럼 어디에나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책 속에 들어가 있는 삽화 정도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겠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책 속에 간간히 들어 있는 삽화들은 그야말로 사막에서 발견한 오아시스 같은 반가운 것이었다. 아직도 읽는 것을 취미로 여기고 있는 분들이라면, 아마 책 속에 간혹 들어 있는 삽화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많으시리라. 물론, 문장을 읽고 또 읽고 난 뒤,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희부윰하지만 강렬한 세계라는 것도 매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지만, 간단히 손으로 그린 작은 삽화라도 문자로 만드는 세계를 위한 상상의 재료로 소중했다.

한국에서 신문에 연재된 소설에 삽화가 처음 들어가게 된 것은, 1912년 1월 1일의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나 다름없던 ‘매일신보’가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해 연재소설을 싣기 시작했고, 나아가 연재소설에 삽화를 넣기 시작했던 것이다. 강점 이전 제국신문에서 오랜 기간 동안 소설을 연재했던 작가 이해조(李海朝)가 새롭게 연재했던 ‘춘외춘’이라는 제목의 소설에 신문 일을 하려고 잠시 한국에 와 있던 일본인 화가가 삽화를 넣었다. 한국인 소설가가 쓴 소설에, 일본인 화가가 삽화를 넣었으니, 소설의 내용과 삽화가 잘 맞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문밖으로 내다보고 있는 어린 여자 아이의 뒷모습이 그려진 이 삽화는 한국에서 이후 백 년 좀 못되게 이어진 삽화가 들어 있는 신문연재소설의 관습적 전통을 만들어낸 최초의 일이 되었다. 대체로 인쇄 매체 속에 시각적 이미지가 부족했던 당대의 독자들이 삽화 속 이미지를 상상의 재료로 소설 속 세계를 보다 다채롭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금색야차’ 같은 작품을 썼던 오자키 고요나, ‘무정’의 이광수도 연재소설의 삽화에는 다소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들은 삽화가 소설적 세계의 상상을 제약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삽화는 이미 시대적인 흐름이 되었다. 당시 이 삽화가 붙은 신문연재소설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1912년 이후 약 3~4년 동안 한국인 소설가와 일본인 삽화가의 공존은 계속되어 ‘장한몽’등 번안소설로 이어졌고, 3·1운동 이후 국내에 민간신문이 생겨나면서, 안석주, 이승만, 이상범, 노수현 등의 전문 삽화가들이 등장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옛신문의 연재소설란을 아직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2단 정도의 크기로 소설과 함께 실려 있던 이 반가운 흑백의 삽화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처럼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 나는 시대에 이 흑백의 삽화를 추억하는 것은 시대착오가 아닐 수 없지만, 눈으로 꾸역꾸역 읽어내던 문자들이 물릴 때쯤, 나타나 눈을 시원하게 해주던 이 삽화를, 그 반가움을 기억한다. 전달의 매체는 다를지언정 그것을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상상의 세계는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렇게 삽화의 시대는 저물었으면서, 이제는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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