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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로 빚어낸 ‘쿨’한 세계

등록일 2021-11-15 19:47 게재일 2021-11-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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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일본과 한국에 동시 발간되거나 불과 몇 달 사이를 두고 번역출판 된다. 가장 최근에 번역된 ‘백조와 박쥐’(양윤옥 역, 현대문학)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로 위치가 바뀐다. 쿨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세계가 조금 진지해지는 징후가 아닌가 기대한다.

외국의 작가가 쓴 작품 중에서 한국에 가장 많이 번역되고 읽힌 책을 떠올려 본다면, 일본의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사진)를 빼놓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1985년에 ‘방과 후’라는 정통 추리소설로 데뷔한 그는 매년 2~3편의 책을 꾸준히 출판해왔고, 그 대부분이 이미 한국에도 소개되고 번역되어 있으니 말이다. 매년 2~3편의 책을 출판하는 인기 작가 자체는 해외에 드물지 않지만, 그 대개의 책들이 한국에서 번역 소개된 작가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제외하고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 편, 한 편 그의 작품이 시나브로 번역되어 나올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어느새 우리는 그가 만들어둔 세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것은 어떤 소설보다 잘 읽히고, 어떤 소설보다 인간의 감정과 호기심이 결합해 있는 마력을 가진 세계다.

배를 타고 몇 시간이나 가야하는 외딴 섬에 지어진 호텔 같은 곳에 모종의 이유를 가지고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다양한 방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도저히 풀 수 없는 밀실의 트릭과 살해방법들, 사라지는 흉기들. 아마 정통적인 추리소설의 팬이라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르적 관습일 것이다. 모든 종류의 관습이 그러하듯, 이미 책을 펴든 순간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 관습과 계약을 끝낸 상태이다. 그토록 먼 곳에 왜 호텔이 있을까 라든가, 그들은 왜 거기로 가야만 했을까, 게다가 하필 왜 모든 문제를 풀어낼 탐정은 왜 일행 사이에 끼어들어 있을까 하는 중요한 질문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 된다. 사건의 발생과 해결 사이에서, 도저히 풀 수 없을 것만 같은 범죄의 해명에 나선 탐정과 마치 공정한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은 환상만이 추리소설 독자의 유일한 게임의 규칙이다. 그러니, 앗, 하는 사이에 범인을 놓쳐버리는 아슬아슬한 시간적 지연도, 추리소설 독자에게는 즐거움일 뿐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던 것은 이처럼 미스터리로 가기까지의 비현실적인 구성이나 독자가 탐정과 지적인 경쟁을 벌인다는 추리소설 읽기의 독특한 측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소설적 전통에서 소설은 대개 마음을 움직이거나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지, 머리를 자극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적인 소설이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움직여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소설이 그만큼 압도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의미이리라.

히가시노 게이고는 처음에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정통 추리소설로 소설계에 입문하여 꾸준히 추리소설을 써왔지만, 종종 다양한 장르로 확장하면서 정통 미스터리만이 아닌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거나 장르를 결합한 장르 혼종적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에 처음 히가시노 게이고가 알려지고 번역되기 시작한 시기가 미스터리에 기반해서 독자의 마음에 무언가 남겼던 ‘비밀’(1998년 출판, 1999년 번역)이나 ‘백야행’(1999년 출판, 2000년 번역)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두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이른바 ‘역주행’하여 그의 정통 추리소설까지 번역되기 시작되었고, 한국에 어느새 히가시노 게이고 월드가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펼쳐놓는 세계는 결코 심오하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을 해결하는 누군가가 있다. 호텔에서도, 공항에서도, 나무신을 모신 작은 절에서도, 그리고 코로나가 한창인 지금 여기에도 사건은 발생하고, 누군가 그것을 해결한다. 그만큼 쿨한 세계는 또 없다. 세상이 어디 그런가, 싶다가도 그만 그 쿨한 세계에 스스로 들어가게 된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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