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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사회’는 도래할 것인가 ?

등록일 2022-06-20 20:04 게재일 2022-06-2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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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성의 SF소설 ‘완전사회’(1967)
수도출판사에서 1967년 출판된 문윤성의 ‘완전사회’. 이 책은 2018년 아작출판사에서 새롭게 발간되었다.

인류에게 있어 ‘과학’이라는 단어는 마법술과 같이 언제나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기능해 온 것만 같다. 우리가 모두 느끼고 있듯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이란 언제나 예측불허이고, 결정 불가능성 속에 놓여 있게 마련이라, 마찬가지로 그렇게 불안하고 두려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럴 때마다 거대한 문자로서의 ‘과학’은 인간이 그런 삶에 일말이나마 단단한 확신의 토대를 마련해온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적자생존!”이라는 선명한 선언을 인류 사회로 옮겨 제국주의 시대를 여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던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떠올려보라. 그것이 점유했던 가장 강한 적자만이 생존한다는 그것이 ‘과학’이라는 담론이야말로 시대적인 당위성에 대한 예감으로 식민지 정복전쟁에 나서고 있던 청년 군인의 두려움을 절박한 미래의 확고한 전망으로 대체해주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이처럼 언제나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전망이 떠오를 때마다 ‘과학’은 그 불안함을 확실한 당위 내지는 절박함으로 바꾸는 중요한 힘으로 기능해왔다. 맬서스의 인구론이 가져온 공포가 뒤덮고 있던 시대,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전망과 함께 ‘과학’이, 혹은 과학에 대한 상상이 떠오르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한국 최초의 과학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김동인의 ‘K박사의 연구’(1929)가 비대해가는 인구에게 도래할 식량 생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미친 과학자’의 노력을 다루고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학은 언제나 유토피아적인 장밋빛 미래 전망과 연결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가장 우울하고 가장 비관적인 디스토피아적 미래 전망과 접속한다. ‘과학’은 언제나 사회에 대한 미래적 불안의 배후에서 출현해서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과학기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들은 대부분 이렇게 당시에 존재하고 있는 시대적인 불안의 징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최초로 창작된 에스에프(SF), 즉 사이언스픽션(Science Fiction) 장르의 작품인 문윤성(1916~2000)의 ‘완전사회’를 읽으며 그 소설 속 알레고리로 들어 있는 시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1967년에 출간된 이 작품 속에는 한국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 4·19를 겪으며 민주주의의 분위기로 팽배해 있다가 독재사회로 넘어가게 될 무렵의 시대적 전망이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인간을 냉동시켜서 보존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그를 위해 완전인간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한국인 우선구는 바로 이 완전인간에 선발되어 냉동되었다가 161년만에 깨어나게 되는데, 그가 눈앞에 맞이한 세계는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완전사회’였다. 이 사회는 한글과 영어 알파벳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언어 하나만 쓰이고, 인류는 여성만이 존재하고 남성들은 모두 화성으로 추방당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 완전한 사회 속에 유일하게 남성으로 존재하는 옛날 인간 우선구는 철저한 감시의 대상이 되면서 곤란을 겪지만, 협력자들과 협력하면서 스스로 완전사회에 균열을 내는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쌓아올린 161년 후의 ‘완전사회’라는 것은 꽤 놀랍고 정교하다. 여성이 사회의 유일한 젠더가 되는 과정도 가상의 역사로서 잘 구현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과학이 부여해온 기대와 두려움이 점이적 영역이 드러난다. 젠더와 언어가 통합된 완전한 사회, 그것이 또 다른 전체주의 파시즘의 시대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의 다른 편에, 민족주의가 소멸한 유토피아적인 미래상이 펼쳐져 있다. ‘과학’은 그저 놓여 있을 뿐이지만, 그를 둘러싼 우리의 사회는 그것을 매개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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