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는 듯, 스산한 바람이 들기 시작하면, 왠지 대학 시절 읽었던 김승옥의 작품 속 문장들이 생각난다. 그때는 그 사소한 문장 한 줄이 대학에서 교수가 전해주는 지식보다도, 매일 밤새도록 함께 술을 마셔주던 친구들보다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 같은 기분을 주었다. 누구에게나 가끔씩 찾아오는,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온통 잿빛으로 가득한 그 문장이 내 마음에 손을 내밀어 모종의 위로를 주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없는 문장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렇게 겨울 공기에 섞인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기의 기운을 맡곤 했다.
비록 구십년대의 대학생이었던 나는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바라보고 있던 긴박된 시대의 분위기를 함께 느끼지 못했고, 그 속에서 조금씩 불어오고 있던 자유의 비린 냄새도 함께 맡을 수 없었다. 그러니 비장한 태도로 유서를 쓰고, 어딘가로 떠나고 있는 김승옥 소설의 주인공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오만한 수사나 합리화에 불과할 것이다. 육십년대를 호흡하는 김승옥의 허무와 감수성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것이고, 내게 그것은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이나 지식의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십년대의 공기를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내가 김승옥의 문장을 읽을 때 들었던 그 위로와 씁쓸한 공감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문득 들었던 느낌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어려워 혀끝에서 맴도는 감정들을 굴리고 있을 때, 누군가 툭 바로 그 단어를 떨어뜨려 두고 간 것만 같은 감각이 김승옥의 소설 속에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시 아직 어렸던 내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나의 문장이 삶에 주는 영향 같은 것에 대해 말하기도 했고, 글로 써보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김승옥이라는 계기를 통해 확인한다.
내가 김승옥을 통해 전혀 본 적이 없었던 육십년대식의 분위기를, 육십년대식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고 내가 향유했던 구십년대식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듯, 이천이십년대의 누군가도 그에 마땅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온갖 종류의 유사-감각들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시대지만, 마음 깊이 존재하는 우리의 감정에 다가가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지 않은가. 어떤 문장은 여전히 그런 힘이 존재한다.
그렇게 보면 인간이 영위하고 있는 삶이라는 것은 그 시대의 공기 내부 속에 있을 때는 너무나 빠르고 급하게 변해서, 당장은 마치 저 멀리까지 떠나가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나갔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계절의 변화와 사람의 변화를 노래했던 이제는 그 문자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시가의 언어들도 새삼스러워지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문명과 시대의 변화는 기술이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수성의 영역은 언제나 한계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계절은 어김없이 변하고, 그 시대를 호흡하는 인간의 감정은 그에 따라 어김없이 피었다가 졌다가 한다.
어느새 겨울이 오고 있다. 코끝이 시큰한 겨울의 냄새를 맡으며, 오랜만에 김승옥의 소설집을 펼친다. 빛이 들어 책표지는 바랬고, 그 문장은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잿빛투성이지만, 그 문장은 여전히 반짝거린다. 분명 시대는 많이 변했지만, 지금도 어딘가의 여관에 허무로 갈 길을 잃어버린 잿빛 청춘들이 그렇게 두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위로를 위한 것도 무엇도 아니지만, 읽는 누군가에게는 분명 위로가 된다. 그 분명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육십년대식의 위로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간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