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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고요하디 고요한 태풍 직전의 세계

등록일 2024-05-28 20:16 게재일 2024-05-2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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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중편소설 ‘태풍’(1907)은 앞서 그가 데뷔했던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에 마지막으로 연재했던 작품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중편소설 ‘태풍’(1907)은 앞서 그가 데뷔했던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에 마지막으로 연재했던 작품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1905년, 대학 시절 친구였던 마사오카 시키가 창간하고, 그의 사후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던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의 한 구석을 빌려 연재했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의도치 않은 성공으로, 그야말로 당시 문단에 충격을 던지며 데뷔했다. 이전까지 그는 단지 영문학자로 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에 불과했지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예기치 않은 성공 이후, 쉬지 않고 창작에 몰두해서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는 10년여의 창작 생활을 통해 과거의 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근대적 소설의 한 시작점을 열었다.

정치소설이나 가정소설 등 굵직한 스토리와 드라마가 주류였던 메이지 시대의 소설계에서 나쓰메 소세키 특유의 관점과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은 글쓰기가 창조해낸 세계가 독자에게 특정한 감각이나 감정을 일으키고, 나아가 어떤 생각의 변화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한다는 예술로서의 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해도 좋다.

단지 흥미 있는 읽을거리로서의 의미에서 벗어나 문학이 자연주의나 상징주의 등, 미술의 예술적 사조를 본떠 예술적 창작을 지향하기 시작했던 그 시기 문학계의 가장 중요한 지분을 그가 차지하고 있다.

그리 많다고도 적다고도 하기 어려운 작품들 중에서도 ‘태풍’(1907)은 유독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 해당한다. ‘도련님’의 다음이자, ‘산시로’를 시작으로 한 3부작의 이전이어서 그런지, 언제나 사건보다는 내면을 오가는 미묘한 심리가 주류가 되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유독 이렇다 할 사건이 존재하지 않아서 그런지, 알 수 없다. 분명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에서 들려오는 와글거리는 소리가 사그라들고 난 뒤, ‘산시로’와 ‘그후’ 등에서 마음속에서 파문처럼 일어나는 새로운 인상으로 넘어가기 전, 머뭇거림이 읽힌다. 인간이 자신이 영위해왔던 어떤 일관된 태도를 바꾸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그때, 어쩔 수 없는 머뭇거림을 읽어낼 때, 나는 한 없는 인간다움을 읽어낸다. 인간이 행하는 일에 확신 같은 것은 가질 수 없다. 반드시 맞을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내딛는 발걸음이야말로 우리를 전혀 인간답지 않은 어딘가로 이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태풍’의 세계는 고요하다. 애초에 그 세계 속에는 도무지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학자인 시라이 도야와 좌충우돌하는 학생 다카바야시는 사실은 별개의 목소리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소세키 자신의 각각 다른 두 개의 자아이다. 본래 하나였던 두 개의 자아가 만나 어떤 스펙터클한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태풍’의 세계는 분열한 두 자아가 아직 각자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서로 마주쳐 어색하게 예의를 차리는 세계다.

아직은 내면이라고도, 균열된 자아들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없는 태풍 직전의 고요함이 지배한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 한 가운데를 “현대 청년에게 고함” 같은 사회주의의 구호가 가로지르고 있다. 이는 분명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가 번역했던 크로포트킨의 ‘청년에 고함’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사회’를 향한 주의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하는 것조차 아직 명확하지 않았던 시대의 풍경화 같은 것이다.

글쓰기 같은 새김의 도구나, 서사 같은 언어 나열의 방식이나, 소설 같은 문학의 한 형식들은 본래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전달하는 외침이기도 하고, 언어를 통해 타인에게 보여주는 정교한 그림이기도 하고, 타인의 마음속을 해부하는 해부학이기도 하고, 그 모두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대에 글쓰기가, 서사가, 소설이 예전과 같은 의미는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앞을 향해 내디딜 때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글쓰기는 여전히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저 고요하디 고요한 ‘태풍’의 세계가 보여주고 있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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