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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김주락 대구지방변호사회 포항지회장

“법률사각지대 시민 직접 찾아가 봉사” 공공기관 무료법률상담서비스 등 다양한 대시민 서비스 활동 추진고도화된 현대사회일수록 각종 법률적인 분쟁이 복잡다난하게 확대되고 있는게 현실이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법률사각지대에 있는 대다수 서민들은 아직도 법률서비스에 목말라 있다. 최근 대구지방변호사회 포항지회장으로 취임한 김주락(56) 회장을 만나 포항지회의 운영방향을 들어봤다.-취임소감을 말씀하신다면.▲2년으로 임기를 정하고 회장을 선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등록 변호사 28명 전원의 추대형식으로 임기를 시작함으로써 포항지회가 회원 전원의 의견이 반영된 조직으로 새로 출발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법률사각지대에 있는 시민들을 위해 좀더 다가서는 지회가 될 것이라고 천명하셨는데 구체적인 활동계획이 있다면 소개해주시죠.▲변호사를 찾아오는 법률상담에서 변호사가 법률사각지대에 있는 시민들을 직접 찾아가 봉사하는 포항지회가 되도록 회원들과 구체적인 활동방안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예를 들면 포항시청 등 공공기관에서 회원변호사님들이 참여하는 무료법률상담서비스 등의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민들로부터 인정받는 변호사가 되고, 변호사 모임이 구태의연한 친목단체의 성격을 지양할 수 있는 다양한 대시민서비스 활동을 추진할 계획입니다.-시민들로부터 인정받는 변호사의 성격은 또 어떤 것이 있다고 보십니까.▲변호사이기 때문에 존경받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즉, 희소가치로 사회적 대접을 받던 시대가 지금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시민들에게 존경받는 행동을 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법률적인 서비스에서 소외돼 있는 시민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것도 지금 변호사로서의 사회적인 책무이자 역할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좌우명`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溫)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이창형기자 chlee@kbmaeil.com

2009-07-20

감은사지·감은사지 삼층석탑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93년에 발행한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감은사에 대한 답사기를 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이렇게 쓰고 싶다고 하였다. 지금도 찾는 이들이 많지만, 대구-포항 고속도로가 생기기전에는 대구와 인근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바다 중의 한 곳이 문무대왕암이 있는 경주시 감포읍 봉길리 일대였다. 경주시가지에서 보문단지와 덕동 댐을 지나 봄. 여름에는 신록에 취해,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에 취해 산길을 달리다보면 어느새 곧게 뻗은 감포읍의 지방도와 만나게 된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곧게 뻗은 도로여서 20대에 친구들과 이곳을 찾을 때는 우리끼리 `감포 아우토반`이라고 불렀던 도로이다. 이 도로의 끝자락이자 대종천과 동해가 만나는 지점에 도착하면 왼쪽 해발 240m의 연대산 남쪽 기슭 언덕위에 우뚝 솟은 3층 석탑 두기가 보인다. 감포의 동해바다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본 곳이고 너무나 유명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다. 감은사지는 경주시내에서 약 35km 거리의 동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번지 일대로서 절터가 위치한 마을은 속칭 탑골 또는 탑 마을로도 불리고 있다. 언덕위의 절터에서 2시 방향의 동해안 어귀를 바라보면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문무대왕 해중릉으로 전해지는 대왕암이 한눈에 보이는데, 이곳에 절터를 잡은 것은 기록에 나타난 호국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삼국사기 만파식적조에 의하면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기록을 종합해보면 감은사는 문무왕대에 창건되기 시작하였으며, 문무왕 사후인 신문왕 원년(682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처음 문무와이 창건할 당시의 사찰 성격은 알 수 없으나, 문무왕릉의 조영과 함께 신문왕이 삼국을 통일한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라고 사찰명을 부여함으로써 원찰의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문왕은 감은사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일주일은 문무왕의 유해를 대왕암에 올라 산골하는 장례의식과 감은사의 낙성식이 함께 진행되는데 필요한 기간으로 생각된다. 만일 그렇다면 아마도 신라의 여러 사원 가운데 가장 성대한 의식이 감은사에서 장기간 베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절터는 1960년과 1979년~1980년 발굴조사를 통해 유물이 수습되었고 절터의 전모가 확인 되었다. 감은사는 일당쌍탑식(一堂雙塔式) 가람으로서 남북의 길이보다 동서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성된 점과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중회랑인 익랑(翼廊)을 둔 점이 특이하다. 절터의 남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문지가 있고, 중문 좌우로 후면의 강당지에 이르기까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감은사지에는 중문의 북쪽이자 금당 앞 좌우에 같은 형태의 삼층석탑 2기가 있다. 이 두 석탑은 682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오랜 세월동안 자연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속적인 크리프(creep)―일정한 하중상태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료의 변형이 증대하는 현상이다.― 현상으로 부재의 열화, 이완, 파손, 풍화현상 등으로 붕괴의 위험과 훼손이 우려되어 시차를 두고 각각 해체보수 하였다. 서탑은 1959년에서 1960년까지 일차 보수를 하고 2007년부터 2008년까지 해체보수를 하였다. 동탑은 1995년부터 1996년까지 해체 보수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탑이 해체 보수과정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1959년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은 보물 제366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1996년 동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은 보물 제1359호로 지정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 제112호인 동서삼층석탑은 제일 윗부분인 찰주까지의 높이가 13m로 국내의 현존하는 석탑가운데 가장 큰 탑이다. 신라석탑은 삼국통일과 함께 백제와 고신라의 각각 다른 두양식을 통합하여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양식으로 집약, 정돈된 신라석탑의 시원적인 양식의 표본이 바로 감은사지삼층석탑과 고선사지삼층석탑이다. 특히, 감은사지삼층석탑은 신라와 백제의 삼국시대 말기 석탑 양식이 하나로 집약된 새로운 양식으로 신라석탑의 규범을 이루는 시원적인 석탑이다. 건립 연대가 확실하고 고졸한 자태를 간직한 거대한 규모의 석탑으로 시대에 따라 부분적으로 다소의 변화는 있지만, 이러한 형식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신라석탑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석탑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많은 부재로 구성된 방식은 백제석탑과 공통되지만, 백제석탑이 목조 탑파를 충실히 모방하고 있는데 비해서 감은사지삼층석탑은 기하학적으로 계산된 비율에 의하여 짜인 새로운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지붕모양의 옥개석과 공포를 약화하여 표현한 옥개받침과 기둥을 그대로 표현한 별석(別石)의 우주(隅柱), 다층(多層) 등 목조 탑파를 모방한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지대석을 갑석보다 더 많이 내밀고, 갑석의 이음 위치를 탱주 위에 두고, 낙수면과 옥개받침석의 이음 위치를 서로 엇갈리게 두어 상부 하중을 분산시킨 조탑기법은 초기 석탑에서만 볼 수 있는 부재 결구 기법이다. 동서 두 탑은 전체적인 형식과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각 부재의 치수까지도 같다. 다만 상하층 기단 부재 모양에 있어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기단부와 탑신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고, 상륜부 노반 위는 결실되어 없어진지 오래이지만 찰주(擦柱)가 남아 있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부처님의 힘을 왜구를 물리치고자 절의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어 승려 지의법사에게 “내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겨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이름을 감은사로 고친 것이다. 이러한 유언의 흔적은 금당의 구조에도 반영되어 있다. 금당의 바닥구조는 H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 위에 장방형의 석재유구를 동서방향으로 깔아서 마치 돌 마루를 얹어 놓은 것 같이 되어있다. 그 위에 주초를 배열하고 건물을 세웠던 특이한 구조로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의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부합하고 있다. 금당 북쪽의 강당지는 원래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던 것을 , 후대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고쳐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 때 금당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용으로 화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문헌을 살펴보면 대체로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09-07-17

`킹콩을 들다`

영화 `킹콩을 들다`는 2000년 전국체전에서 총 15개의 금메달 중 14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휩쓸었던 시골 고등학교 소녀 역사들의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극화되었다.대회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신화가 된 소녀들의 뒤에는 故정인영, 김용철, 윤상윤 세 명의 역도코치가 있었다.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버지처럼 가르치고 먹이며 시골소녀들을 역도선수로 키워낸 그들 중 정인영 선생은 전국체전 1년 후 49세의 나이에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학교에서 근무 중 순직했다.그는 역도황무지였던 한국에서 바르셀로나 올림픽 역도 금메달리스트 전병관을 발굴하기도 했다.영화는 그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미래를 꿈꿀 수 조차 없는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의 시골소녀들에게 `역도`를 가르쳐 주고 역도를 통해서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만드는 역도코치의 모습을 통해 인생의 멘토가 된 진정한 스승의 면모를 보여주고자 했다.시골소녀들을 아름다운 역사로 키운 어느 역도코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실제 역도 선수들의 다양한 경험과 역도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한데 버무려 진솔하고 감동적인 스토리로 만들어낸 `킹콩을 들다`가 단순히 감동적인 스포츠 영화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부분이 바로 이점이다.`킹콩을 들다`는 아무것도 모르던 시골소녀들이 `자신의 삶의 무게`를 깨치고 `아름다운 역사`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통해 역도가 가진 힘과 묵직한 감동을 영화 속에 녹여내는데 성공했다.역도는 축구, 농구 등 인기종목의 스포츠에 밀려 올림픽 기간 외에는 국민들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경기이다. 하지만 2007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비인기종목인 핸드볼 경기를 스크린으로 가져와 전 국민에게 감동을 안겨주며 핸드볼 경기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처럼 `킹콩을 들다`를 통해 `역도`가 던져주는 힘과 감동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역도`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기회가 되고 있다.조안을 필두로 한 여섯 명의 여배우들이 역사로 거듭나는 과정은 그야말로 땀과 눈물로 점철된 고난의 과정이었다.조안은 여배우로서의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7kg이상 체중을 불리고 특수 분장으로 땟국물이 묻어나는 영락없는 시골소녀로 완벽하게 변신했다.극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여배우들의 `실전연기`는 그들을 웃고 울렸으며, 그 모습은 생생하게 영화 속에 담겨 감동과 웃음의 동력이 되고 있다.`킹콩을 들다`에는 쟁쟁한 중견 배우들이 조연진에서부터 카메오까지 포진해 웃음을 선사한다.영화 속에서 보성여중 교장과 교감으로 분한 박준금과 우현은 때론 자상하게 때론 무섭게 시골소녀들을 역도선수로 단련시키는 이지봉(이범수)의 곁에서 그의 든든한 지지자 역할을 유감없이 해냈다.오랜만에 스크린에 얼굴을 비친 박준금은 다양한 작품에서 감초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는 배우 우현과 환상의 호흡을 과시하며 능청스러운 연기를 선보인다.실제로 두 배우는 연기를 하는 동안 환상적인 애드리브로 촬영현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후문이다.여기에 대표적인 연기파 중견배우인 변희봉은 교육감으로 카메오 출연해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역시 변희봉`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내공 깊은 연기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으며, 기주봉은 이지봉의 역도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는 역도감독으로 출연해 영화에 감동과 무게를 더했다.

2009-07-17

4. 공민왕이 남긴 문화유산

몽진 당시 청량산성·왕모산성·학가산성 등 축조해 전란 대비공민왕 가족 신격화… 정월대보름 동제 통해 마을 안녕 기원 1. 들어가며-공민왕과 홍건적2. 공민왕은 왜 안동을 피난처로 택했나3. 임시수도 70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대항했나4. 공민왕이 남긴 문화유산 5. 문화유산의 전승방안 고려 31대 공민왕이 안동에 머문 기간은 모두 70일에 불과하다. 우리 역사상 왕의 몽진도 흔치 않았거니와 공민왕의 안동몽진 역시 긴 재위기간에 비하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단 한 번 안동을 찾아 70일을 머문 공민왕. 그러나 그가 남긴 흔적은 이후 안동 지역 사람들의 삶 속에 700년의 세월동안 유·무형으로 남아 이어져 왔다. 이를 크게 나누자면 하사품과 성곽들, 공민왕 신앙, 전통놀이 정도를 들 수 있다.충성에 보답한 하사품 공민왕은 유형의 문화유산과 무형의 문화유산을 다양하게 남겼다. 유형의 자취 중 대표적인 것들은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안동 지역 백성들의 정성에 감동해 안동부와 안기역에 하사한 물품들이다. 보물 451호로 지정된 이 하사품들은 현재 안동시내의 태사묘의 보물각에 보관중이다.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공민왕은 안동부에 백옥대와 옥관자를 비롯해 모두 18종류 35개 물품을, 안기역에는 유잔구대 14개를 하사했다. 이 가운데 9종 30점이 유실됐고 6종은 일부가 남아있지만 역시 유실된 게 더 많다. 태사묘 보물각에 보관된 하사품들은 따라서 전체 하사품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군왕이면서도 서화에 뛰어난 예술가로 알려진 공민왕은 현판과 포장교서의 형태로 많은 글씨도 하사했다. 현판 글씨로는 영호루(映湖樓)와 안동웅부(安東雄府), 봉정사 진여문(眞如門)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 등이 있다. 포장교서로는 1360년 당시 복주목사이던 정광도에게 내린 것이 태사묘 보물각에 남아있다. 이 교서는 `영가지`에서 안동의 고적 가운데 하나로 꼽은 공민왕 친필교지로 추정되지만 친필 여부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공민왕이 축성했다는 산성들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한 것은 전란을 피해서였다. 이에 따라 안동 지역에는 어찌 보면 필연적이게도 공민왕이 축성했다는 산성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청량산 축용봉 부근의 공민왕산성, 청량사와 여러 절터가 자리 잡은 곳 부근의 청량산성, 오마대도산성(五馬大道山城), 도산면 원천리의 왕모산성(王母山城), 안동과 예천 및 영주의 접경지역인 학가산의 학가산성, 서후면 천등산의 천등산성, 남선면 신석리의 신석산성, 용상동과 성곡동 일대의 성황당토성, 송천동과 임하면 천전리의 경계쯤인 양장성(羊腸城), 일직면 송리의 송리산성, 풍산읍의 풍악산성, 도산면 서부리의 선성산성(宣城山城) 등이다. 이 같은 안동지역의 산성들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도록 이어진 축성방법에 따라 석성 또는 토석혼축의 성으로 모두 공민왕이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성 중 상당수는 공민왕 이전에 있었던 성으로 공민왕이 몽진했을 당시 재정비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이는 원래 안동지역이 전략적 요충지였던 점에 비춰 몽진 이전에 이미 상당수의 산성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도산과 청량산 일대의 경우 왕모산성과 청량산성 등은 물론 공민왕이 군율을 위반한 죄인을 처형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밀성대가 남아 있어 공민왕과의 깊은 인연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학계의 어떤 연구에서도 공민왕이 청량산을 직접 다녀갔다는 사실은 증명되지 않았지만, 산세가 험한 청량산 일대가 매력적인 군사적 요지였던 사실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이 점은 공민왕이 청량산에 직접 다녀갔으며 산성 구축이나 재정비에도 일정부분 관여했을 가능성을 유추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공민왕 신앙 공민왕이 남긴 무형의 문화유산으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신격화 양상이다. 공민왕 또는 왕의 가족을 동신으로 모시는 마을은 현재 안동에만 9개 마을이며 봉화군 지역에도 8개 마을에 이른다. 사실 전통사회에서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공동체의 신으로 모신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공민왕의 신격화 양상은 왕은 물론 왕의 어머니와 부인,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등 가족 구성원 거의를 나눠 신앙화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실제, 공민왕을 직접 모신 마을은 풍산읍 수리 국신당과 남선면 신석리 성골, 용상동 공민왕당이 있다. 또 그의 딸을 모신 `딸당`은 도산면 가송리와 예안면 신남리 구티미마을에 남아 있다. 또 왕의 어머니를 모신 `왕모당`이 도산면 원천리 왕모산성에 존재하며 예안면 신남리 정자골에는 `며느리당`이 남아있다. 600여년 동안 동제가 올려진 가송리 `딸당`에서는 해마다 정월대보름 자정께 많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풍물 등을 앞세우고 길 굿을 벌인 뒤 유교식 제례로 치러진다. 이날 자정을 전후해서는 안동 지역의 공민왕과 가족신을 모신 마을에서는 규모만 다를 뿐 일제히 동제가 열린다. 주민들은 이 동제를 통해 마을의 안녕과 안동 전체가 복을 받기를 기원한다. 놀이와 설화 공민왕의 안동 몽진시 노국공주가 송야천을 건널 때 안동의 부녀자들이 등을 잇대어 인교를 만든데서 유래했다는 `놋다리밟기`는 실은 이전부터 있어온 여성들의 집단놀이라는 데 이설이 별로 없다. 여성들이 서로 손을 잡거나 몸을 부대끼면서 벌이는 집단적 춤이나 놀이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문화임을 춤 인류학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안동의 놋다리밟기는 곤경에 처한 공민왕에 대해 안동 사람들이 얼마나 친절을 베풀었는지에 대한 증거로서 하나의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놋다리밟기는 전라도의 강강술래, 동해안의 월월이청청, 의성의 지애밟기 등과 같은 맥락인 여성의 대동놀이이다. 다만 다른 지역에서의 놀이가 서로 밟고 밟히거나 주고받는 평등한 방식의 놀이라면 안동의 놋다리밟기는 그와 다르다. 공주를 뽑은 뒤 나머지는 모두 엎드리고 공주만이 등을 밟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공민왕 몽진시 노국공주가 이 놀이에 함께 동참하면서 전승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안동에서는 해마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등 수차례 놋다리밟기 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이와 함께 안동 지역에는 공민왕과 관련한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설화는 공민왕이 몽진한 과정을 조명한 이야기기 10편에 달하며, 몽진 기간 동안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는 무려 46편에 달하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공민왕과 그 가족들을 모시는 동제와 관련해서도 42편의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유형별로 살펴보자면 공주를 위해 인교를 놓았다는 놋다리밟기 설화의 경우 공민왕의 몽진과정을 이야기한 대표적인 설화이다. 안동의 여러 지명에 대한 전설과 공민왕이 청량산에서 거주했다는 설화 등은 공민왕이 안동에 머물던 당시의 행적을 소재로 한 설화이다. 이처럼 다양한 설화는 곧 공민왕 신격화의 토대가 됐으며 `공민왕 신앙` 자체도 영험담 등이 전해지는 등 설화로 내려온다. 이처럼 공민왕은 안동 지역에 크고 작은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남겼다. 왕의 안동 체류 이후 7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일부 유실되거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유산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끈질긴 인연은 오늘날까지 안동의 문화적·정신적 모태가 되고 있다./정태원·이임태기자

2009-07-17

`신라 천년의 향` 품은 맛·최고 육질로 `명품` 각광

경주는 대내외적으로 `문화관광도시`로 알려져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언급하자면 신라 천년 수도였기에 그 당시 유적과 유물이 지역 전역에 걸쳐 분포해 `노천 박물관`이 불릴 정도다. 그러나 경주가 도시 브랜드 이미지와 달리 국내 최대 `축산집산지`라는 이면성에 대해서는 생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 사육농가만 해도 5천569호에 6만370여만 두가 사육되고 있고, 연간 수입만 해도 1천600억원대 이르는 등 전국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이같은 배경에는 경주시와 경주축협 등 관계기관은 축산농가에 대한 지원을, 축산농가는 철저한 사육 및 관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경주 `천년한우`라는 명품 브랜드가 탄생한 것이다.편집자주 ▲경주 천년한우 경주시와 경주축협은 지난 2006년부터 경주 한우를 업그레이드한 명품 `경주천년한우`로 탈바꿈시키고 국내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특히 이같은 명품화 성공이 소비자들로부터 외국산 고품육보다 더 각광을 받고 있다. 경주천년한우를 생산하는 과정은 이렇다. 번식농가에서 생산된 혈통등록 이상의 건강한 한우송아지를 비육농가에서 입식하여 7개월 이전에 거세를 실시한다. 거세 후 양질의 조사료가 첨가된 브랜드전용 TMR 사료를 급여하고, 출하하기 전에 급여하는 브랜드전용사료에는 항생제가 첨가되지 않은 `무항생제` 사료를 급여함으로서 `한우브랜드육`으로서의 안전성을 지키고 있다. 이에앞서 `경주버섯한우`에서 출발, 지난 2006년 `경주천년한우`로 브랜드명을 변경하면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해인 2006년에는 경상북도 우수농산물 선정 및 전국한우능력평가대회 장려상을 획득, 2007년에는 국내 최초 한우사육단계 HACCP 인증 획득 및 경주천년한우 상표등록을 완료했다. 이어 브랜드사업에 탄력이 가해져 `2008년 경북한우경진대회` 브랜드 고급육 부문 최우수상과 `전국한우능력평가대회` 육질 최고상 등을 수상을 통해 각종 평가 대회에서 명품 한우브랜드로서 검증을 받았다. 이를 위해 `경주천년한우 브랜드사업단`이 설치됐다. 사업단은 더욱 안전한 브랜드 육 생산을 위해 경주시농업기술센터와 공동으로 한우사육단계 HACCP 인증사업을 추진했다. 이 결과 2007년 10월 국내최초로 한우사육단계 HACCP (위해요소 중점관리 우수축산물) 인증을 획득해 현재까지 한우브랜드 분야에서 전국 최다인 17농가가 인증을 받았다. 또 2009년에도 22농가의 인증을 추진 중에 있어 안전하고 깨끗한 선도 한우브랜드로 정평이 나있다. HACCP는 CODEX라는 국제식품규격위원회에서 정한 `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이란 뜻이다. 유래는 미국항공우주국에서 우주인에게 무결점 식품을 공급하기 위해 위생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해요소를 분석하여 사전에 체계적으로 차단하는 시스템이다. 현재까지 개발된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위생관리제도로서 여러 선진국에서는 위생적인 축산식품 생산과 관리를 통해 식품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이다. ▲경주천년한우 브랜드의 특징 경주천년한우 브랜드 번식(암소)농가에는 부루민(해초추출물)을 첨가한 브랜드전용사료를 급여하여 암소의 번식기능 향상과 면역력을 증가시켜 우수한 형질의 건강한 송아지를 생산하고 있다. 브랜드 비육농가에서는 번식농가에서 생산된 우량송아지를 입식해 비육전기까지는 양질의 조사료를 충분히 섭취할 수 있는 브랜드 전용TMR 사료를 공급한다. 출하 6개월 전에 급여하는 후기사료에는 항생제를 전혀 첨가하지 않은 무항생제 사료를 급여하고 있으며 특히 브랜드 사료에는 토코페롤(vitamin E)이 첨가되어 있어 브랜드우의 생리작용과 건강을 도와 자연스럽게 안전한 고급 브랜드육이 생산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경주천년한우 우수성 홍보 경주천년한우 브랜드사업단은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탤런트 현석이 출연하는 경주천년한우 홍보 CF를 제작해 수도권 및 대도시에 송출하고 있다. 또한 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에 제작지원을 해 홍보의 파생효과를 보고 있고, 각종 언론매체를 통한 홍보도 같이 하고 있다. 또한 매년 경주시가 주최하는 `술과떡잔치` 행사 참여를 비롯한 연간 5~6회 정도의 무료시식회와 홍보행사를 실시해 수도권 및 인근지역 소비자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경주천년한우 브랜드사업단장인 최삼호(사진) 조합장은 “경주천년한우와 같이 안전하고 깨끗한 한우를 홍보하고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국민들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한우의 전통과 안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끝/윤종현기자 yjh0931@kbmaeil.com

2009-07-16

경산·대구 통합추진위원회 송세혁 공동대표

“행정체제 개편 논의 본격화… 희망 보인다” `경산시` 고유 명칭·지자체 독자기능 보장 전제돼야정치권 등 각계각층 추진위원 260여명 활발한 활동정치권에서 행정체제 개편 논의가 본격화되며서 경산·대구의 통합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송세혁(74) 경산·대구 통합추진위원회 공동대표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경산은 지난 1981년 7월 지역의 일부인 고산면(시지) 지역과 안심읍(반야월) 지역을 대구광역시 승격과 함께 대구시에 편입시켰던 아픔이 있으며 자녀의 교육을 위해 시지지역으로 위장전입을 하는 학부모가 증가하는 사례도 있었다.교량 하나와 경계선을 경계로 대구광역시와 경북도로 나뉘는 경산은 대구와 통합요구가 지속적으로 있었지만 실제 이익과 반사 이익 사이에서 고민하던 정치권과 행정권의 관망으로 쉽게 관철되지 못했다.정치권이 어떤 결과를 도출할지는 모르지만 경산·대구 통합을 위한 노력과 전망 등을 송세혁 공동대표에게 들어 보았다.-경산·대구지역 통합 추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추진 이유는.▲통합추진은 지난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경산과 대구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 같은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고 팔공산과 금호강을 함께 끼고 살아온 동질성과 일체감이 있다.94년 경산시의회와 군의회는 대구광역시로 편입되면 지역 경제 및 개발, 교육, 교통 등 여러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과 개선이 기대된다며 경산시란 고유 명칭을 가지고 자치단체의 독자적인 기능수행을 보장하는 전제를 가지고 대구시 편입을 희망하는 견해를 정부와 국회 등에 전달했었다. 현재는 대중교통이 서로 무료 환승을 하며 대구지하철 2호선의 경산연장공사가 진행 중이고 1호선의 하양 연장이 추진되는 등 경산과 대구는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이고 있다.-통합추진위원회에는 어떤 분들이 활동하고 있는지.▲260여 명의 추진위원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어느 지역에 편중된 것이 아니라 고른 지역을 대표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사는 윤영조 전 시장을 비롯해 성재영, 최기환, 이영교, 김경윤, 임채열 씨 등이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많은 독지가가 통합을 바라며 후원에 나서고 있다.-지금까지 가시적으로 나타난 성과가 있다면.▲지역적으로 나타난 것은 없다.그러나 정치권의 행보는 남다르다. 지난 2005년 11월 8일 국회가 행정구역체제개편 특위 첫 회의를 열고 `시·도-시·군·구-읍·면·동`의 3단계 행정구역체계를 광역단체-실무행정단위의 개편한다는 큰 원칙을 세웠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이제 다시 행정구역체제개편이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대구와 경산의 통합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또 최경환 국회의원이 지난 2004년 17대 총선에서 경산과 청도, 대구를 통합해 교육과 문화, 과학이 중심이 된 에쿠스시티 건설을 공약으로 당선돼 재선의원으로, 실세의원으로 의정 활동을 하고 있으니 지역민의 민심을 외면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반대 의견도 있다. 이 반대 의견은 어떻게 수용할 것이며 앞으로의 계획은.▲어느 의견이나 일에 대해 100% 찬성은 있을 수 없다. 경산·대구의 통합은 지역민의 80% 정도는 찬성하는 입장이라고 본다. 이는 매일신문이 지난 2005년 6월 `대구·경북 경계인`을 주제로 칠곡군과 경산시, 영천시, 성주군, 청도지역주민을 대상으로 대구 편입에 대한 전수조사에서 경산은 77.4%가 찬성했다.민주주의는 다수 의견이 존중받는 사회이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렸지만, 경산시민은 대구와의 통합에 찬성하고 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자신과 의견이 합치되지 않아도 다수 의견을 존중하리라 본다.경산지역은 독자적인 권역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대중교통을 포함해 문화·상권이 대구시에 예속되거나 막대한 영향권 안에 있다. 그럼에도 행정적인 경계로 분리되어 경제적인 면이나 교육, 문화에서 누려야 할 권리가 박탈되고 있는 느낌이다. 행정구역체제개편에 나선 정치권이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다 하여도 경산·대구의 통합은 지속적으로 추진될 것이다. /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09-07-16

오메가형 인간이 뜬다

한 때 알파걸이 각광을 받은 때가 있었다. `알파걸`이란 미국 하버드 대학교 댄 킨들런 교수가 자신이 출간한 책 제목으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알파걸은 공부와 운동 등 모든 면에서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 엘리트 소녀를 일컫는 말이다. 알파걸에는 그리스 문자의 첫 글자인 `알파`가 사용되어 `1등` `최고`라는 의미가 있다. 알파걸의 특징을 지닌 사람을 알파형 인간이라고 한다. 알파형 인간은 당당하고 적극적이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그러나 이들은 늘 긴장 상태에서 생활하며 빠듯한 일정 속에서 여유 없이 앞만 보고 살아간다. 이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나타낸다. -연속적으로 업무를 처리한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한다. -각종 자료에 기초하여 분석적인 결론을 잘 내린다. -일찍 출근해서 하루 종일 강도 높게 일하다가 늦게 퇴근한다. -권력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한다. 외르크 페터 슈뢰더가 지은 책 `행복한 게으름뱅이`에는 알파형에 비교되는 여러 가지 유형의 인간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최근의 조직 문화와 노동시장을 관찰하던 중 지금까지 흔히 볼 수 없었던 유형의 사람들을 발견하였다. 그 중에는 상관의 부름에 대기하고 있다가 지시가 떨어지면 즉시 실행에 옮기는 헌신적인 베타형 인간도 있고,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델타형 인간도 있다.슈뢰더의 주목을 끈 것은 알파걸처럼 뼈빠지게 일하는 대신, 인생과 일을 마치 놀이하듯 즐기며, 창의적이고 직관적으로 행동을 하는 오메가형 인간이었다. 오메가형 인간은 양 보다 질을 추구하는 창의시대에 꼭 맞는 유형으로 알파걸을 대체할 새로운 트랜드이다. 오메가형 인간은 직관, 감성적 지성, 음악적 감수성, 창조성, 경험 등 각종 소프트 스킬이 결합된 인간이다. 오메가형 인간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알파형 인간과 비교해 보자. 알파형이 자기중심적이라면, 오메가형은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이들은 위계질서에 따라 일하지 않고, 네트워크에 의해 일한다. 알파형이 `Work hard`를 강조한다면 오메가형은 `Work smart`를 강조한다. 오메가형 인간은 얼핏 게으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파형 보다 업무를 훨씬 더 효율적으로 처리한다. 이들은 단순히 게으름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느긋한 마음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거기서 깨닫게 된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준에 따라 행동한다. 다른 사람이 어쩔 줄 몰라 당황할 때 오메가형 인간은 통찰력을 발휘한다. 오메가형 인간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다차원적인 사고를 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 그리고 저것도`라고 생각한다. -양보다는 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오히려 다른 사람들 보다 천천히 걷는다. -다른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공동체 의식을 발휘한다. -직관적으로 상황의 본질을 신속하게 파악해낸다.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처럼 정보의 홍수 속을 유유히 헤엄쳐 다닌다. -기존의 것에 만족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규칙을 바꾸고 자기 자신과 상황을 거듭 새롭게 창조한다. -맨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뒤에서 조종한다. 이러한 오메가형 인간이 일하는 지침은 `더 적게 일하고, 더 크게 성공하자`이다. 이제 시대가 변하고 있다. 다양성과 개성, 그리고 독창성이 요구되는 창의시대에는 오메가형 인간이 각광을 받는다. 게으름뱅이처럼 보이지만 속에 무능과 가난뱅이 의식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스스로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창의의식이 들어 있는 이들, 오메가형을 주목하라. Create yourself!

2009-07-15

과학- 은하

별들은 우주 속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것일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별들이 제멋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별은 `은하`에 속해 있다. `은하`란 광활한 우주 속에서 중력에 의해 한데 모여 있는 별들의 거대한 집단을 뜻한다. 그래서 모든 은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별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은하에는 무게 중심 주위를 공존하는 항성이 있다. 항성은 1000만 개에서 1조 개나 된다. 우주에는 은하가 많이 존재하며, 이런 은하들은 `은하단`이라는 무리를 짓고 있다. 은하는 모양에 따라 타원·나선·불규칙 은하 등으로 나뉜다. 타원형 원반으로 보이는 타원 은하는 빛의 분포가 고르고, 중심부에서 가장자리로 갈수록 어두워진다. 나선 은하는 중심에서 나선 모양의 팔이 나와 있다. 불규칙 은하는 특정한 모양이 없는 은하를 말한다. 은하 중에는 보통의 은하가 일생 방출하는 에너지를 짧은 시간에 폭발적으로 방출하거나 은하 내부의 큰 충돌이나 폭발에 의해 강한 전파를 방출하는 전파 은하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 은하는 `우리 은하`로 불리며, 위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보이는 `나선 은하`이다. 옆에서 보면 납작한 원반처럼 보이고, 은하의 중심에는 많은 별로 된 핵이 있다. 이 핵 주위를 띠 모양으로 이어진 별들이 돌고 있다. 우리 은하에는 약 2천억개 가량의 별이 속해 있다. 태양은 은하면 위에 있으며, 중심에서 약 3만3천광년 떨어져 있다. 은하의 원판은 회전 운동을 하며, 태양은 2억5천만년 주기로 은하 중심을 공전하고 있다. 한 여름 밤, 하늘을 올려다보면 띠처럼 줄줄이 이어진 별들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게 보일 것이다.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은하`의 일부로, 우리나라에선 `은하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우리나라의 전래 동화 중 `견우와 직녀` 이야기가 있는데,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 강을 건너 7월7일 칠석날에 만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서양 사람들은 은하수를 보고 붓으로 우윳빛 길을 그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은하수를 영어로 말할 때, 우유라는 단어 `밀크(milk)`와 길이라는 단어 `웨이(way)`를 합쳐 `밀키웨이(milky way)라고 불렀다.생각 생각▶초등 1. `은하`란 무슨 뜻인지 기사에서 찾아보세요. 2. 서양 사람들이 은하수를 부르는 이름은 무엇인가요? 3. `은하수`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세 가지 이상 적어 보세요. 4. 은하는 모양에 따라 어떻게 나누어지는지 기사에서 찾아보세요. 5. `은하수`라는 제목으로 동시를 써 보세요.

2009-07-15

하늘마음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벌써 2개월이 지났다. 봉사활동도 3번이나 갔다 왔다. 처음 봉사활동은 봉사활동이 아닌 체험학습이었고, 두 번째 봉사활동도 사실 청소만 하다왔지 제대로 봉사를 한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로원에 간다고 하니, 왠지 제대로 봉사활동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때 까지 양로원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사실 약간 두려운 마음도 있었고 기대되는 마음도 있었다. 나는 어른들께 싹싹하고 어리광피우는 편이 아니라서 사실 할머니들과 말을 하게 되면 어색할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늘마음은 구룡포에 위치해 있었는데,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니 외딴 마을에 하늘마음이 있었다. 십자가도 있고 약간 교회같은 분위기가 들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편안해 질 수 있었다. 일단 우리는 아이들을 나눠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나와 시은이, 유라, 효정이, 새름이, 수진이는 2층을 청소하기로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올라갔다. 아마도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몸이 불편하시기 때문에 2층에 올라가는 데도 엘리베이터를 타야 된다고 생각했다. 안내해 주시는 직원분을 따라 우리는 우선 각자 청소기, 걸레를 들고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였는데 내가 청소기를 밀면 몇몇 아이들은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그런데 유난히 지금도 생각이 남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 할머니는 복도에 머리를 내밀고 누워계셨다. 그 할머니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참 편안하다고 느꼈었다. 정말 편하게 누워계셨다. 그런데 우릴 보더니 소리를 지르셨다. 처음엔 서로 무슨 말 인지 몰라 당황을 했지만 잘 들어보니 방문을 닫아달라는 얘기였다. 몸이 불편하셔서 창문을 못 닫으실 것을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아팠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다고 한다. 치매에 걸리면 아이로 돌아 간다는 게 정말 인 것 같았다. 자꾸 우리를 보시고 소리를 지르셨다. 겁이 나서 일부러 피하기도 해서 죄송하기도 했다. 그렇게 청소를 마치고 우리는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되었는데, 나와 유라가 같이 청소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화장실이 깨끗하다고 얘기를 하다가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절대로 이런 시설에 보내지 않을 거라고 얘기를 했다. 사실, 그 곳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정말 한가롭다 못해 적적해 보이셨다.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는 할머니들도 계셨지만, 대부분의 노인분들은 누워있거나, 가만히 앉아 계시는 게 전부 였다. 우리가 처음 할머니를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했을 때 그 분들은 아무런 대답도 미동도 없었다. 정말 일상이 지루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측은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여러 얘기를 하면서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각자 덥고 계시던 이불을 걷어 들여 털어드렸다. 이불이 정말 무거웠지만 상쾌한 바람과 뜨거운 햇빛에 이불을 터니 기분이 정말 상쾌했었다. 우리는 이불을 털고 약간의 휴식시간을 얻었다. 더운 줄 알았던 날씨가 바람도 상쾌하고 정말 시원했었다. 그리고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다음 할 일은 방에 있는 개인 물병을 씻고 물을 새로 받는 것이었는데 통마다 이름과 호실이 적혀서 있어서 인상 깊었다. 함께 따라오신 두 명의 교생 선생님들과 함께 물병들을 가지고 1층에 내려갔다. 물통을 씻은 다음 소독기에 넣고 소독을 시켰다. 물통에 물을 채운 다음 2층으로 다시 올라가 제자리로 놓은 뒤, 우리는 1층에 앉아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갔다. 아이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몇몇 아이들이 나가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니 정말 즐거우신 듯 하였다. 손뼉도 같이 쳐 주시고 웃는 모습을 보니 괜시리 기분이 좋았었다. 그렇게 3시간이 지나 12시 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왔다. 떠나올 때 정말 몇 달 뒤에 올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었다. 저 분들이 그 때 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고, 다음에 하늘마을에 봉사활동을 올 때에는 치매 걸리신 2층의 할머니에게 일부러 피하지 않고 말도 걸어드리고 얘기도 해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정말 힘든 일은 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로 보람찬 하루였다.

2009-07-15

연임 성공 서상기 대구시당위원장

“그동안의 불협화음 기우로 만들겠다”친이vs친박 대결구도로 비쳐져 마음고생 많아“제대로 된 공천 이끌어 지방선거 압승 이룰 터”서상기(대구 북구을) 현 대구시당위원장이 연임에 성공했다.시당위원장 연임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기에 반대도 많았던 것이 사실. 특히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 의원의 대구시장 출마설이 불거지면서 이한구 의원과 이명규 의원 등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더욱이 대구시당위원장 선거가 `친이 vs 친박`의 구도로 비치면서 마음고생이 많았던 것이 서 위원장의 속내다.- 연임에 어렵게 성공하셨는데.▲ 솔직히 되니까 기분이 좋으네요. 앞으로 열심히 해서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가 기우였다, 또 그 말을 하신 분들을 멋쩍게 만들 생각입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이유하고 표면적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임이라는 자체가 흔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저는 저대로 연임을 해야 하는 필요성이나 또 권유하는 분도 계셨기 때문에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이한구 의원과의 명분싸움이 있었는데.▲ 이한구 의원은 시장 나올 사람이 시당위원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시에서 하는 일에 적극 협조를 해야 한다는 두 가지를 명분으로 했습니다. 사실 시당위원장이 대구시의 일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것은 99% 당연한 이야기이고 그 조건은 문제없었습니다. 다만, 시장 나올 사람은 곤란하다는 이야기는 합리성 여부를 떠나서 제가 결심을 하거나 계획을 하거나 해야 포기를 하든 강행을 하는데, 전혀 아직까지 미래를 모르는 입장에서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결국 그렇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시당위원장이 되어서 시장 선거에 그 자리를 활용하는 측면이 없으면 되는 것 아니냐. 그리고 나중에 가서 상황이 변화가 되면 일찍 사퇴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했고 그 부분을 이한구 의원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향후 1년간 대구시와의 협조문제, 지방선거의 문제가 있는데.▲ 대구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똘똘 뭉쳐 대구의 경제를 살리는 데 힘을 합치고 내가 할 수 있는 협조는 무엇이든 다 할 생각입니다.지방선거와 관련해서는 가장 핵심이 공천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다른 의원님들과 협의하고 제대로 된 공천을 해서 지방선거를 압승으로 이끄는 것이 제 소임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이 저에 대한 걱정을 기우라고 생각하도록 특별히 염두에 두고 시당위원장 직을 수행하겠습니다. 내년 이맘때 그런 이야기를 하신 분들이 머쓱해 지도록 하겠습니다.- 대구와 경북의원들 간의 협력이 예년만 못지않다는데.▲ 우리 의원들이 중간 역할을 잘해서 정말 대구와 경북이 같은 경제권, 같은 운명체로 힘을 합할 수 있도록 개별 의원들이 앞장서고 시장과 도지사의 협력에 일조를 하겠습니다.하지만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달리, 상임위원회나 본회의장에서 다른 지역 의원보다는 가깝게 지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특별히 예산문제에 대해 지정받고 큰 프로젝트로 경쟁하는 것은 있지만 대부분은 옛날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09-07-15

15일 퇴임 앞둔 신상철 대구시교육감

“창의성교육 인프라 구축이 가장 성공作”난치병학생돕기·아침독서 10분운동 등 보람“지역·학교간 학력격차 해소 못해 아쉬움 커”신상철 대구시교육감이 오는 15일 7대 교육감 임기를 끝으로 대구시교육청을 떠난다. 신 교육감은 2001년 6월22일 6대 민선 교육감으로 당선돼 7월16일부터 임기를 시작한 뒤 4년 뒤인 2005년 7월 또다시 7대 교육감으로 재신임을 받아 8년간 시교육청을 이끌어왔다. 신 교육감은 13일 퇴임 기자회견에서 “재임한 8년간은 교육계로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변혁기였다”면서 “아쉬운 점도 있지만 보람과 기쁨도 함께 했던 인생의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지난 8년간을 되돌아본다면.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5·31 교육개혁과 교원정년 단축, 교원노조의 합법화와 교원단체 간의 심각한 갈등, 고교 평준화, 대학입시제도의 잦은 변화 등을 비롯 교육정보화와 NEIS 도입, 교원평가제와 교장공모제, 초·중등 교육 관련 업무의 시도교육청 이양, 학교자율화와 공교육 내실화, 사교육비 경감 대책 등 변화의 연속이었고, 교육계는 많은 진통과 갈등,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비전을 찾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길다면 긴 8년은 저 개인에게도 다사다난했으며, 늘 머리 속을 맴도는 책무와 갈등으로 고뇌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보람과 기쁨도 함께 했던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가장 보람있었던 점을 꼽는다면.▲`창의성 교육`은 2002년 재임 초기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추구해 온 소신이며 지향점입니다. 초기에는 창의성 교육 인프라 구축을 위해 힘썼고, 이후에는 그동안 쌓아온 창의성 교육 인프라를 토론학습과 프로젝트 학습 등 수업방법 개선에 접목시켜 기초·기본 학력을 확고히 다지고 학생 활동 중심의 교실수업 개선으로 자기 주도적 학습력을 키워가는데 역점을 뒀습니다. 앞으로 창의성 교육이 활짝 꽃피워 우리 대구의 교실에서 노벨상 수상자나 세계적인 석학이 탄생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또 하나는 2004년부터 실시해 온 `난치병학생돕기운동`으로 연인원 1천318명의 학생들에게 의료비 36억4천여만원을 지원하고, 올 5월 현재 88명의 학생이 완치단계에 이르러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아침독서 10분 운동`을 전개해 학생들에게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도 보람으로 기억됩니다. -아쉬웠던 점은.▲교육의 성과라는 것이 금방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을 위한 초석을 닦는 것이기 때문에 8년이 지났지만 뚜렷이 자랑할 거리는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후회스러운 점을 든다면 사학 등 학교교육을 지원함에 있어 좀더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다는 것과 창의성 교육 등 학력 관계만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인성 교육에 좀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특히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지역간·학교간 학력격차가 심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인사와 예산 지원 등을 통해 해결하려 했으나 성과는 미미하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교원노조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점 등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8년간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그동안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많이 소홀했습니다. 당분간은 개인적인 일을 좀 정리할 생각이고, 차기 시교육감 출마와 관련해서는 지금 한다 안한다 말하기에는 좀 이르고, 어느 적절한 시기가 되면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이현주기자 sun@kbmaeil.com

2009-07-14

예순아홉번째 안부 - 포구에서

우기 중인 포구가 눅눅합니다. 다행히도 지난밤엔 바람이 크지 않아 오늘 아침 배들은 제법 많은 청어를 풀었지요. 비닐 옷에 장화를 신은 사내들이 터질 듯 한 뜰채를 힘껏 올려 청어를 쏟으면 한가득 싣고 떠나는 트럭과 중매인들 오토바이 소리로 한동안 판장이 북적였구요. 젖은 배 위에서 밥을 지어 둘러앉은 아침식사 위로 한두 방울 또 비가 다녀가네요. 서둘러 식사를 마친 그대는 끼걱끼걱 흔들리는 뱃머리에 걸터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태우며 먼 곳 바라보았지요. 온통 펄럭이는 오후였던가요? 후둑거리며 굵은 빗방울이 사선으로 칠 때 수협 앞 공중전화 박스에서 비스듬히 기댄 채 어디론가 안부 전하는 당신을 본 적 있어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지만 까무잡잡한 얼굴에 다녀가는 웃음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나는 걸 보며 아마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했지요. 작정하고 잡은 듯 수화기를 오래 놓지 못하는 걸 보며 무척이나 오랜만에 나누는 이야기인가 보다 했구요. 힘이 들지만 참을 만 하다고 날이 덥지만 참을 만 하다고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모처럼 목욕탕에 다녀왔다고 여긴 골목마다 주홍빛 능소화가 담을 넘어 피고 키가 큰 줄기에 빨갛게 하얗게 접시 같은 꽃도 피더라고 그리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였더랬지요. 길고 긴 통화를 마치고 그대가 우산을 펴기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비바람이 치기 시작했어요. 묵직한 할인마트 비닐봉투를 야물게 쥐고 다시 배를 향해 걷는 그대의 걸음이 세찬 빗줄기 속에서도 사뭇 가벼워 보였답니다. 멀고 먼 나라 포구에 정박한 그대의 젊은 날 비록 지금은 눅눅한 외로움의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꿈꾸던 것들을 향해 조금씩 당겨 앉는 귀하디귀한 시절이기를 바라며 포구를 둥글게 돌아 나옵니다.

2009-07-14

김영화 전 한국환경기술진흥원장

국내 최초 `새집증후군` 보상 판결 이끌어내 경북 포항출신의 김영화 전 한국환경기술진흥원장은 요즘 강의준비를 위한 저서집필에 한창이다. 지난 3월부터 연세대학교 외래교수로서 자신이 환경부에서 환경정책을 다뤘던 경험에다 자신의 저서인 환경영향평가론을 덧붙인 강의를 학생들에게 펼쳐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좀 더 충실한 강의를 위해 환경관련 논문과 최근 학계의 동향 등을 반영하기 위해 더욱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환경행정의 산 역사`이자 `환경행정의 달인`으로 불리는 김 전 원장을 만나 고향에서의 추억과 공직에서의 에피소드, 근황 등을 들어봤다.편집자주산림청·지주 수차례 방문… 국립공원 구역조정문제 해결무조건적 환경보호보다 개발도 필요하다는 `환경개선론자`환경·경제 동반성장 위한 `저탄소 녹색성장 전도사` 자처 -어릴때 고향에서 뛰어놀던 추억들 가운데 어떤 일들이 인상에 남아있습니까. ▲어릴 적 기억은 주로 농사일에 관한 기억뿐입니다. 학교를 마치면 소 먹일 풀을 베고, 잡초를 뽑으러 다녔죠. 그때 문득 든 생각이 이런 일을 평생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검정고시를 통해서라도 고교에 진학하게 된 셈입니다. -어릴 때 장래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릴 때는 교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농촌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선생님이 가장 좋은 직업으로 보일 때였습니다. 좀 더 커서는 가정형편을 고려해 공짜로 대학을 나올 수 있는 곳을 선택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육사는 아시다시피 학비는 물론이고 잠자리걱정이 없을 뿐 아니라 용돈 걱정도 없어서 좋았습니다. -육사를 졸업한 뒤 군인의 길을 가지 않고, 공무원생활로 뛰어든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그 당시 고 박정희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추진력있고, 청렴한 공무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공무원시험에 응시하도록 권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박 전대통령을 매우 존경해 왔기 때문에 그 뜻에 따라 행정공무원 시험을 치르게 됐습니다. 군에서 봉사를 하나 공무원으로서 봉사를 하나, 국가에 대해 봉사를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있었고, 존경하는 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보람있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공직자로 근무할 때 보람있었던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을 들 수 있을까요. ▲환경부 관리관(1급)으로서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장으로 일할 때입니다. 당시 새집증후군으로 인한 아토피성 피부염에 대한 최초의 피해보상판정을 해 친환경주택건설 자재 개발과 친환경 벽지 및 도료 개발에 기여했던 일이 보람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판정내용은 전국 일간지 1면에 보도될 만큼 관심을 모았습니다. 대형 건설업체가 경기도에 시공한 아파트 벽지 자재에서 포름알데히드 등 유해물질이 나왔고, 이 때문에 한살난 남자아이의 아토피 피부염이 생겼기 때문에 치료비와 벽지와 도료 등 내부장식을 모두 바꿔주도록 판정을 냈죠. 그 이후 지어지는 아파트에는 모두 친환경벽지 및 도료가 쓰이게 됐습니다. -환경부 자연보전국장으로 근무했을 때는 주로 어떤 업무를 하셨는 지요. ▲당시 환경부가 10년간 해결하려고 노력해도 풀지 못했던 오랜 숙제로 국립공원의 구역조정문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 업무를 맡은 뒤 땅을 가진 개인과 국립공원의 구역조정문제를 해결했죠. 대전에 있는 산림청을 수십차례 드나들며, 땅 주인들을 만나 끈질기게 설득하고 협의해 어렵게 국가적 숙제를 해결했죠. 또 동강유역 생태보전지역 지정문제도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당시 댐 건설이 중지된 후 생태보전지역을 지정해야 했는 데, 영월·평창·정선 지역담당 정책과장을 40여회 만났습니다. 땅을 보상해 사들이고, 비료나 농약을 못쓰게 하고, 유기농으로 유도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환경부 기획예산담당관으로 예산업무를 3년동안 맡았는 데, 이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 기간동안 풍치를 앓으면서 어금니 4개를 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때 환경개선특별회계를 최초로 도입해 환경개선사업의 투자를 확대하고, 관리운영을 효율화하는 데 힘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부가금과 부담금 등을 거둬 일반 세금의 비중을 줄이는 자립형 특별회계 도입이 그때가 처음인 것으로 압니다. -환경영향평가에 대해서는 저서도 쓰셨던 데, 환경영향평가를 한마디로 말하면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환경영향평가는 원래 미국에서 나온 제도인 데, 환경영향평가를 해서 하라거나 하지말라는 결정을 하는 의사결정제도입니다. 다만 미국은 땅이 넓은 나라여서 하지말라고 해도 다른 데 가서 개발사업을 하면 되지만, 일본이나 독일, 또는 우리나라처럼 땅이 좁은 나라에서는 의사결정도구로 쓰기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땅이 좁은 나라에서 개발사업을 어차피 해야 한다고 하면 환경영향이 적은 쪽으로, 또는 환경을 해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쪽으로 통제해서 환경을 관리하는 수단으로 바꿔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환경영향평가제도가 사업을 못하게 해야 하는 데, 사업자에게 면죄부를 만들어준다는 비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에) 아주 나쁜 것은 못 들어오게 막아야 하지만, 아주 나쁘지는 않으나 피해가 있는 것은 피해를 줄이거나 오염을 줄이고, 사후에 계속 오염관리를 해서 환경피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운동과 관련해서는 어떤 지론을 갖고 있습니까. ▲환경운동을 하는 분들은 대략 두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첫째는 무조건 `개발은 환경파괴`라고 보고, 환경을 개발하지 않고 보호해야 한다는 환경보호론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환경개선론자입니다. 환경도 놔 두면 자체적으로 퇴화하기 때문에 돈을 들여서 더 좋게 만들어야 하고, 개발도 일정 부분 필요하다고 보는 쪽이죠. 저는 환경개선론자 입니다. 경제성장이 환경을 개선하고, 환경이 성장을 지원하는 선순환 경제와 환경의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영어로 환경분야 회의도 주재할 만큼 영어에 능통하다고 들었습니다. ▲공무원 생활하면서 아침7시부터 시작하는 종로시사영어학원을 3년동안 다녔습니다. 두달이면 끝나는 코스를 매년 6회 반복해 약 18번 반복한 셈이죠.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눈이 많이 내려 학원에 늦게 도착했는 데, 들어서자 마자 교재의 몇쪽 몇번 문제를 공부하고 있는 지 알 정도가 되더군요. 그리고 난 뒤에 미국유학을 갔는 데, 공부하는 데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영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환경분야 회의라면 영어로 충분히 진행할 정도입니다. -현재 정부에서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저탄소 녹색성장은 어떻게 보십니까. ▲저탄소 녹색성장이야 말로 환경개선론자의 사상에 가장 잘 들어맞는 정책입니다. 저는 대학강의에서도 녹색기술과 녹색산업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녹색생활화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죠. 에너지 절약이나 물절약, 생활용품절약, 걷기운동 확산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강조합니다. 저 스스로는 `저탄소녹색성장의 전도사`라고 자부하고 있을 만큼 지지하고 있는 정책방향입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김영화 전 한국환경기술진흥원장은 김영화 전 원장은 1950년 경북 포항시 북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기북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검정고시를 거쳐 대구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태국의 아시아과학기술대학원에서 환경공학석사, 영남대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1978년 10월 육사출신을 위한 특별고시를 통해 행정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며, 환경부에서 환경평가, 수질정책, 기획예산 업무를 담당했다. 대구지방환경청장, 영산강환경관리청장, 한강환경관리청장, 환경부 공보관을 거쳤으며, 환경부 자연보전국장과 환경분쟁조정위원장으로 역임한 뒤 지난 2004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한국환경기술진흥원장으로서 환경기술개발에 힘썼다. 지금은 연세대학교 외래교수로서 환경영향평가와 관련해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지난 2001년에 출간한 `최신 환경영향평가론`이 있는 데, 지난 2006년 2쇄에 들어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교재 또는 참고서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9-07-13

홍석규 울진군태권도협회장

“도교육감기 선수권대회 성공개최 이룰 터” 출전선수만 1천여명… `전자호구 사용` 관심“지역 태권도 위상 걸맞는 `실업팀` 만들고파” 오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울진에서는 `2009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 성공 기원을 겸한 제 42회 경상북도교육감기 태권도선수권대회`가 열린다. 경북태권도협회가 자체적으로 주최하는 대회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대회다. 초·중·고등부를 통틀어 출전선수만 1천여명에 달한다.홍석규 회장은 울진 토박이다. 11살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한 울진 태권도 역사의 산 증인이다. 태권도 외길을 걸어온 홍 회장은 경북태권도협회 감사 등을 역임하면서 태권도 행정에도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이 대회를 유치하게 된 배경은.▲울진군 태권도의 위상에 비해 시설과 인적 인프라가 열악한 것이 안타까워. 오래 전부터 `태권도대회를 유치하면 좋겠구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태권도협회장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태권도대회 유치를 계획하고 추진에 나선 것입니다울진은 전국규모 태권도대회 유치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유서 깊은 전통과 문화의 고장인 만큼 다른 스포츠 행사와 문화 행사 등 각종 행사가 많은 곳입니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어려움은.▲다른 부분에서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2009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를 앞두고 있는데다 여름 피서철과 겹쳐 숙박장소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울진군 차원의 배려와 협조, 군민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요즘은 지방자치단체에서 태권도대회를 서로 개최하려고 하기 때문에 경쟁이 심합니다. 울진협회 만의 힘으로는 힘들었지만 울진군 차원에서 태권도에 대한 관심이 컸고 대회를 유치에서 부터 시작해 대회 준비과정에도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다른 대회 때와 다른 점은.▲이번 울진대회는 전자호구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 울진에서 처음 개최되는 대회라는 점 등으로 비교적 관심을 많이 받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특히 전자호구 사용에 대한 평가가 어떤식으로 나올지 관계자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습니다.-도 단위 태권도대회 개최라는 숙원을 풀어낸 울진군협회가 앞으로 가지고 있는 계획은 무엇인가.▲울진군 태권도단을 만드는 것이 남은 꿈입니다. 올해 도민체전에서도 출전 23개 시·군중 종합 3위를 차지하는 등 울진 태권도 위상은 높습니다. 그래서 실업팀을 만들고 싶어요. 울진군에서도 공감을 하고 있고 경북태권도협회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끝으로 군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한국을 대표하는 전통과 문화의 고장 울진. 그리고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태권도. 멋진 어우러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울진군태권도협회의 발전이 기대되는 만큼 지역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립니다./주헌석기자 hsjoo@kbmaeil.com

2009-07-13

`킬 빌` 그 두 번째 이야기

영화 `킬 빌`은 일반적인 시각으론 이제까지 보아온 익숙한 다른 영화들의 스타일에서는 느끼지 못한 너무도 이질적인 영화다.(물론 쿠엔틴 타란티노로선 아주 익숙한 스타일이지만) 처음부터 중간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순서는 아예 고려가 안 된 것처럼 순서가 뒤죽박죽 섞여있는 이 영화는 그 순서의 파괴에 표한 매력을 풍기며 각각의 에피소드와 챕터들로 영화를 구성하며 긴장을 고조시키고 관객들에겐 지금부터 벌어질 재미난 광경을 그저 지켜보고 즐기라고 말하는 듯하다.영화의 첫 장면 더 브라이드가 살해되는 장면에 이어지는 더 브라이드의 순서상 두 번째 제거 대상인 버니타 그린과의 대결, 그리곤 멕시코의 결혼식장의 더 브라이드의 참혹한 결혼식 살해현장에서 곧장 병원에 누워있는 그녀와 그녀를 암살하려는 엘 드라이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는 정신이 없을 정도로 시간을 거스른다.코마에서 깨어나 복수를 다짐하는 브라이드와 오웬 이시이의 에피소드 그리고 청엽정에서의 마지막 혈투는 영화에서 사건이 발생한 순서와는 전혀 상관없이, 회상의 주체가 있던 없던, 주인공의 현 상황과 그녀 앞에 펼쳐질 일련의 사건들을 나열하듯 각각의 에피소드를 형성하며 감독이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늘어놓은 듯 부산하다.그런데 묘한 것은 이렇게 아무렇게 늘어놓은 듯한 에피소드들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묘한 힘을 발휘하며 흥미를 고조시킨다.약에서 중 그리고 강으로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액션의 잔인함 또는 참혹함 그리고 그로 인해 형성되는 영화의 긴장감은 영화의 재미를 차츰 아주 조용하게 증가시키곤 마지막 청엽정의 결투에서 그것을 폭발시킨다.그런 미묘한 영화의 흐름은 관객을 영화에 더욱 집중시키고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보이며 더 브라이드와 오렌 이시이의 숙명의 대결 이후에 이어질 나머지 복수극을 담은 `킬 빌 : Vol.2`에 대한 기대까지도 증폭시킨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챕터를 이루어 그녀가 죽여야 할 또는 복수의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아주 친절하게 짚어주고 설명해 줌으로써 영화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해주고 동시에 영화에 대한 긴장감을 잃지 않게 해 준다.영화 `킬 빌`은 역시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선혈이 낭자하는 피와 살인, 복수로 점철된 잔인한 액션 느와르다.이제까지 보아왔던 어떤 영화들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폭력이 기존의 타란티노 영화조차도 무색하게 할 무자비함과 잔인함이 존재하는 영화이지만 이상하게 `킬 빌`에서 느껴지는 잔인함은 낯설다기 보다는 익숙하단 느낌이다.요즘 자주 접하게 되는 한·중·일의 무협, 사무라이 극이나 일본의 장편 만화영화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일련의 성인만화에서 익히 접했던 일련의 잔인한 장면이 그저 형상화되어 있을 뿐 기존에 접했던 그 무엇과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은 영화 속 잔인한 장면들이 거부감을 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진다.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액션이 기존의 활자나 그림매체에서 보아왔던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실감나는 영상을 보여주고는 있으나 그 폭력이 잔인함이 타란티노 스타일로 경쾌하고 발칙하게 때론 흥겹(?)게 연출되어짐으로써 무자비함과 비정함으로 점철된 피의 복수극임에도 영화는 화려함과 흥미로움만 느껴진다.적절한 와이어 액션과 엄격한 사무라이 검법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액션 스타일은 총기나 단검으로 보여지던 기존의 폭력물들과는 엄격한 차별을 이루고 영화를 더욱 독특하고 대중적이며 세련된 느낌으로 한층 재미있고 신기하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게 도와준다.더욱 신선하고 세련되게 단장된 타란티노식 영화문법은 관객을 더욱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구실까지 한다.

2009-07-10

2009 포항시 여성상 수상 최채원·이평자씨

디지털 시대, 다감한 여성의 능력 필요 최채원씨, 23년간 교직원으로 참일꾼 양성 노력이평자씨, 25년간 미용사로 예절문화 보급 앞장 “디지털 시대, 친환경 시대인 21세기는 섬세하고 다감한 여성의 능력을 더욱 필요로 하는 시대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이라는 것 자체가 경쟁력이 되고 있지요. 생명의 모태로서 만물의 근원이며 여기에 새로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능력을 지닌 여성, 이제 여성은 `절반의 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와 능력을 지닌 무한한 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2009 포항시여성상` 수상자 최채원(74) 연원장학회 이사와 이평자(62) 전 경북미용협회장. 포항여성상은 포항시가 지난 1997년부터 여성의 권익 증진과 봉사활동에 기여한 지역 여성을 뽑아 주는 상이다. 최채원 이사는 지난 6일 열린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묻자 “늦은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앞으로도 내가 필요한 곳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포항 출신인 그녀는 1960~1980년 포항여성사회를 그야말로 주름잡던 일꾼 중의 일꾼이었다. 당시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들도 그녀를 모르면 간첩으로 불릴만큼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밝은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봉사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여성의 사회적 참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여성의 권익증진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동지교육재단 교직원으로 23년간 재직하면서 참일꾼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1957년 교육공무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은 그녀는 특히 졸업생들이 안정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도록 직업군별 자료 정리와 사업장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또한 학교 부적응 학생들을 위한 학생들의 건전한 성장 발달을 돕고, 그들이 저마다의 적성, 흥미, 능력, 포부, 성격에 맞는 진로를 선택해 자아를 실현하도록 도움을 줬으며 또한 가정환경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소리 없이 학생 4명에게 등록금과 쌀, 옷을 지원했다. 특히 가정환경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소리없이 학생 4명을 지원했고, 학교새마을어머니연합회장으로 장학사업과 청소년들의 호연지기를 위해 전방견학 및 국토순례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또한 여성전진대회와 국산차 보급에도 앞장서고 사회복지시설 및 군부대 위문과 재활용나눔장터 개최 등 스스로 참여하는 자원봉사 생활문화를 만들어가는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특히 주부들의 가정문화 회복을 위해 전통윤리 사상에 입각한 다도, 관혼상제, 복식, 음식문화, 인사법, 다양한 예절교육을 24개 읍면동 지역 및 여성문화회관에서 교육시켜 인간중심의 전통윤리사상의 정착화와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해 노력하는 존경받는 여성지도자상을 정립했다. 38세에 홀로 5남매를 훌륭히 키워낸 친정엄마의 정신을 존경하고 그 가르침으로 살아왔다는 그녀. “나이가 있어 뒷자리 있었지만 앞으로는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싶다”며 “오래 살다보니 기뻤던 일도 찾기 어렵지만 장애인들에게 봉사하면서 삶의 큰 기쁨을 얻었다”고 했다. 이평자 회장은 1979년 (사)포항시미용협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지역사회발전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상소감에 대해 “부족한 면이 많은데 이렇게 큰 상을 받아 영광스럽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달전이 고향인 그녀는 25년간 미용사로 일해오다 여성유림회 창립을 시작으로 지역의 예절문화 보급에 앞장서온 주인공이다. “그때만 해도 미용인들에 대한 사회 인식은 그다지 좋지 않았을 때이지요. 저는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직접 회원업소를 방문해 지부를 조직하고 포항시 위생계와 협의해 매주 일요일을 정기휴일날로 정하고 회원들의 권익신장과 또한 사회계층간의 학력격차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미용인들의 학력신장을 위해 야간고교, 통신고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진로를 마련하는 한편 포항대학 야간부에 진학할 수 있는 교육 균등의 기회를 열어주었지요.” 이후 1986년 경상북도 미용협회장에 취임해 도내 각 시군에 시군지부를 창립하고 여성 미용인의 상호 유대강화 및 조직활성화 및 권익신장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1994년에는 성균관 유성유도회 중앙회 포항시지부를 창립해 유교문화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한 법무부 교화위원으로 위촉돼 재소자 기술자격취득을 지원해 사회갱생과 재범방지에 앞장서 왔다. 특히 경북도교육청 위탁교육 외국인 교사 한국전통 문화체험 봉사를 운영했으며 예절교실에 출강해 학생들의 올바른 예절교육에 앞장서 예절있는 청소년을 길러내는 역할을 했다. 후배여성들에게 “매일 자신을 거울 삼아 자신을 되돌아 보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루를 반성하고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져온 것이 오늘의 수상의 영광을 안은 것 같다”고 했다. 어릴적부터 신사임당을 존경했다는 그녀. “현모양처라기 보다 여자로서 옛날 사람임에도 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과 남편을 뚜렷이 만들고 시서에 능한 여자로서의 당당한 모습과 여성으로서 갖추고 자기일을 완벽히 해낸 모습을 본받고 싶었어요.” 앞으로 청소년들에게 예절교육의 전도사로 오래토록 봉사하고 싶다는 그녀는 특히 청소년 인성교육에 몰두하고 싶다고 했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바쁜 관계로 아이들 인성교육에 신경을 많이 못쓰기 마련이지요. 작은 시간이라도 아이들의 인성교육 강사로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어요.” 미래포항을 견인할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희망찬 메시지를 우렁차게 전해주었던 두 여성상 수상자들. 오랫동안 대양으로 진출을 꿈꾸어왔던 포항의 꿈이 영일만항에서 펼쳐지듯 이들 여성들의 꿈도 대양과 함께 드넓게 펼쳐지길 희망한다. 끝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09-07-10

김제간 포항와인협회장

포항대학 관광호텔비즈니스과 교수로 재직전국대학 최초 소믈리에 수료증 취득길 열어 동호회 `포샤또` 이끌며 와인전도사로 대활약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와인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와인은 농업, 상업, 의학, 종교,성(sex), 문화 등 다양한 여러 분야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살아 숨쉬는 대표 식음료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와인이 국가 10대 수출품목 중 하나이며, 현대 글로벌비즈니스에서는 필수메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서양문화이라서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만 시음회,동호회에 자주 참석해서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처럼 시작하면 와인은 인생에 즐거움을 주는 좋은 문화라고 생각합니다“세계에서 e°€장 비싼 와인은 1985년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팔린 1787년산 `보르도 샤토 라피트(Bordeaux Cha teau Lafite)`라고 합니다. 당시 16만달러(약 1억5천만원)에 팔렸다고 하네요. 보통 사이즈(750㎖)론 사상 최고가였다고 합니다. 한 잔당(100㎖) 150만원꼴입니다. 지난달 홍콩에서 샤토 라피트 로칠드 와인 60병이 144만 홍콩달러(약 2억3150만원)에 팔린 일도 있답니다. `평범한` 와인도 많습니다. 이른바 데일리 와인입니다. 늘 두고 마실 수 있는 `착한` 가격대입니다. 비싼 와인이거나 값싼 와인이거나 주조원리는 같습니다. 잘익은 포도의 당분을 알코올 발효하는 겁니다. 기원전 3천~4천년 전부터 그래왔다고 합니다.” 김제간(50·포항대학 관광호텔비즈니스과 교수·사진) 포항와인협회장.경북 영천이 고향인 그는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고향에서 보냈다.그 당시 영천은 사과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집에서도 과수농장이 있어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책가방에 책보다 사과를 더 많이 갔고가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추억이 있단다.세월이 많이 흘러 영천은 지금 포도의 고장, 부가가치가 높은 와인의 고장으로 바뀌어서 지금 그의 와인사랑과 새로운 인연으로 다시 시작돼 가슴 뿌듯할 뿐이라고 했다.그가 와인을 즐긴 지는 올해로 20년째다.특별한 동기가 있냐고 하니 어릴 적 어머니가 담구어 놓은 달콤한 포도주가 첫 인연이라며 장난을 친다.“어린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담구어 놓은 달콤한 포도주가 첫번째 달콤한 포도주의 취함이고, 두번째는 20대 초반에 일본에서 힘든 유학시절 교수님께서 연구실에서 `많이 힘들지` 하시면서 내민 한잔의 와인이 내생애 처음 접해보는 첫와인-그 로망에 빠져 취해버렸고, 세번째는 관광호텔비즈니스과 교수가 되고서 자연스럽게 와인에 관심을 가지면서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다는 와인 매력에 빠져 있습니다.”그는 포샤또(Po Chateu), 포항의 포와 와이너리 의미의 샤또의 합성어로 포항을 대표하는 와인동호회 회장으로 회원들과 함께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포항와인협회장으로서 포항대학 관광호텔비즈니스과의 취업경쟁력 강화을 위해 전국 대학 최초로 한국와인협회와 프로그램교류로 소믈리에 수료증을 취득하도록 했다. 특히 관광호텔비즈니스학과에 중국 자매대학에서 관광전공으로 유학온 19명 학생이 중국에는 아직 와인소믈리에 자격증이 없는데 이번에 와인소믈리에 자격증 취득이 취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해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와인동호인의 정신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와인동호회의 어떤 거창한 정신이라기보다는 힘들고 지칠때 비타민과 같은 회원들끼리 서로 힘이 되고 즐거움을 주는 와인이 있어 행복을 느끼고 있어 좋은 것 아니겠냐”는 답이 돌아온다.그가 관광호텔비즈니스과 교수가 되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있다. “한때 유행했던 대기업들의 세계화 해외연수 프로그램 비즈니스를 서울에서 하다가 1997년 IMF로 국제교류 프로그램이 없어지면서 포항대학과 인연을 맺은지 12년 되었고 지금은 연구실에서 바다가 보이고 산이 보이는 포항에서 제자들과 와인을 얘기하면서 사는 삶이 행복합니다.” 포항대학에 둥지를 튼지도 벌써 12년. 서울에서 기업연수프로그램 일로 유럽, 미국, 일본 등 많은 비즈니스 여행을 하시면서 바쁘게 지내왔는데 대학에 와서도 국제교육개발원장 보직으로 대학간의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해외출장이 잦은 이다. “우리 재학생들을 어학연수,테마여행,인턴쉽 등 여러나라에 보내 문화체험, 외국어 능력향상, 자격증 취득 등 다양한 경험을 하고 도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학과에서 강의와 연구 등 바쁜 생활이 취미로 바뀌었지만 즐겁습니다. 슬로우라이프(Slow Life)를 동경하는건지 와인도 그렇고 최근에는 거북이처럼 닮고 살고 싶다고 마음으로 출장때마다 작은 기념 거북이 켈렉션이 취미가 되어버렸습니다.”와인에 대해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와인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와인은 농업, 상업, 의학, 종교,성(sex), 문화 등 다양한 여러 분야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살아 숨쉬는 대표 식음료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와인이 국가 10대 수출품목 중 하나이며, 현대 글로벌비즈니스에서는 필수메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서양문화이라서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만 시음회,동호회에 자주 참석해서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처럼 시작하면 와인은 인생에 즐거움을 주는 좋은 문화라고 생각합니다.”와인 마시는 법도 빠트리지 않고 상세하게 알려준다. “처음 양식을 먹을때 오른손에 나이프, 왼손에 포크, 스프는 떠먹는다 등 몇번 경험하면 적응하듯이 식사중에 나오는 요리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간단한 에티켓을 갖추면 됩니다. 특히 와인은 즐기는 것과 감정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초대 받아가서 따라 준 와인을 밝은 곳에 대고 색깔을 살피고 코을 깊숙이 넣어 향를 맡는다면 좋은 것인지 아닌지 따지는 셈이 되어 상대에게 상당한 결례가 될 수 있습니다.”음식과 와인의 궁합에 대해서는 일반화 되어 있는 와인상식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특별함이 있다. “와인의 어울림은 생선요리에는 화이트, 고기요리에는 레드와인이라는 공식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 입니다. 생선요리에는 화이트와인이 어울리는 것은 화이트와인의 새콤한 맛과 조화 되기때문이고 레드와인과 육류는 레드와인 탄닌이 육류 기름기와 짙은맛을 조절해주기 때문입니다. 불고기, 갈비, 한식요리에는 묵직한 레드와인 까베르네 쇼비룡 품종의 와인이 어울립니다.”특히 여름에는 시원한 와인 한잔이 생각나는 계절인데 상쾌하고 식욕을 돋우어주는 화이트나 로제와인을 추천했다. 최고로 꼽을 만한 와인을 소개해 달라고 하니 “와인은 다양한 종류와 5천원에서 1000만원이 넘는 천차만별의 가격대,개인의 취향 등 너무 다양해서 추천이 쉽지는 않다”고 했다. “그래서 스토리가 있고, 가격에도 부담없이 저의 마음을 사로 잡은 칠레산 1865를 소개합니다. 산페드로의 설립연도인 1865를 레이블로 옮겨서 선풍적인 인기로 성공한 사례입니다. 골퍼들 사이엔 18홀을 65타로 치라는 의미와 또는 18세에서 65세까지 두루두루 좋아한다는 뜻으로도 해석되기도 하고 2006년 APEC 공식와인으로 선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와인 초보자도 무난한 맛으로 괜찮을 듯 합니다.”그는 와인 이외에도 여행 애호가이다. “즐거움이 있는 일과 여행을 통해서 웰빙을 하고 싶고 앞에서 얘기한 즐거운 일과 여행의 행복조건에 하나 더 추가하면 건강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건강에도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건강 관리하고자 합니다.”그는 여러 사회단체활동을 하지만 아태관광서비스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여러 국가에서 관광서비스에 관심있는 교수, 단체로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지역이 고품격서비스로 선진 관광대국이 되길 희망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희망이 무엇인가요?“저에게도 가장 소중하고 큰 꿈이 있습니다. 기네스북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은 일본의 이시카와현에 있는 호시료칸은 1300년동안 46대째 가업을 잇고있는 호텔이다. 이 호텔의 서비스모토가 일기일회(一期一會)다. 일기일회란 일생에 단 한번뿐인 만남이라는 인연으로 생각하고 고객에 최선의 정성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저가 몸담고 있는 관광호텔비즈니스과와의 인연을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자와의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하고 최고의 학과로 발전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저의 소중한 꿈이요 미션입니다. 지금도 연구실에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사자성어를 붙여놓고 연구실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는 절대로 그냥 돌아가게 하지않고 꼭 시원한 물이라도 마시고 돌아가게 하는 하고 있어 이 작은 행복이 큰 꿈으로 이뤄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09-07-10

`선덕여왕 행차` 기획 조경수 경주문화관광축제조직위 팀장

신라 최초 여왕 `선덕여왕`이 1천400여년 만에 부활된다.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 축조와 분황사 창건, 황룡사 9층목탑 건립 등 찬란한 신라문화를 꽃피운 선덕여왕의 업적을 기리는 `선덕여왕 행차`가 오는 주말 경주시 일원에서 재현된다.`선덕여왕, 그 화려한 부활`이란 주제로 열리는 대형 퍼포먼스의 총괄기획자인 (재)경주문화관광축제조직위 조경수(40) 기획팀장으로 부터 추진 과정을 들어봤다.-추진 배경은.▲경주문화의 컨텐츠화를 통한 `지역 브랜드`를 구축시키기 위함입니다. 특히 MBC 드라마 선덕여왕과 연계를 통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신라 문화유적의 배경인 경주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킬 것으로 예상됨니다.또한 선덕여왕 퍼레이드를 지역을 발전시키는 문화컨텐츠로 발전시켜 관광객에게 볼거리 제공 및 지역경제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행사와 관련된 전문가들은. ▲총감독 김수현 (사)전통문화진흥회 이사장을 비롯 음악감독 박상진 동국대 국악예술단 단장, 운영감독 이경우 2005년 APEC 정상회의 만찬행사 무대감독, 제작감독 김수완 서울시 왕궁수문장교대의식 연출자, 무술감독 구수본 이명박 대통령 취임 청계광장 축하공연 연출자, 안무감독 김응기 동국대 한국음악과 교수 등 국내 쟁쟁한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행차 내용은. ▲퍼레이드 구성의 기본 근간은 사료 상 유일한 6세기 진흥왕 순수비 중 영통확장의 산물인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와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의 변제지역 순시시 행차 구성을 토대로 구성됐습니다.제 1그룹은 `선덕여왕, 그 화려한 부활`로 총인원 79명이 투입돼 화려하게 만개했던 신라문화의 위상을 연출합니다.제2그룹은 `신라의 기상`으로 총 94명이 선덕여왕이 탑승한 플루트카를 중심으로 김유신, 김춘추, 화랑, 원화 등 여왕의 행차에 걸맞는 웅장함이 표현됩니다.제 3그룹은 `신라의 영광`으로 총 27명이 선덕여왕의 가장 큰 업적인 황룡사 9층 목탑과 첨성대를 플루트카로 제작, 여왕의 업적을 기리며 축원하는 시녀들이 펼치는 퍼레이드입니다.-큰 행사를 추진함에 있어 애로사항은.▲최근부터 시작된 장마와 무더위입니다.특히 이 행사는 수 천년 전의 복식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에 참가자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또한 시내 주요 도로를 중심으로 퍼레이드가 펼쳐지기에 교통 통제 등 시민들의 불편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큰 행사인 만큼 시민들의 이해가 있었으면 합니다. /윤종현기자 yjh0931@kbmaeil.com▶▶ 프로필△경주 술과 떡잔치 △보문호반축제 △울진대게 축제 △부산 BEXCO 박람회 △AEPC CHAMBERS CONGRESS △강남 신세계 백화점 술과 떡 잔치 △정보통신부 홈 네트워크 디지탈 전시

2009-07-10

3. 임시수도 70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대항했나

공민왕이 홍건적의 2차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해 머문 기간은 1361년 12월 임진일로부터 1362년 신축일에 이르기까지의 70일 동안이다. 하필 몽진지로 안동을 선택한 것은 날랜 적 기병의 추격을 떨치는데 안동의 산간지형이 유리했고 태조 왕건 이래 보여준 고려왕실에 대한 안동인들의 충성심 등이 작용했음을 전편에서 언급했다. 또 당시 공민왕의 측근 중에는 안동 출신 또는 안동에 연고를 둔 인물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고려왕실을 의리로 지켜낸 안동 사람들은 공민왕의 체류기간 70일 동안 어떻게 왕을 모셨으며 위급한 정세에 대응했을까. 따뜻한 영접과 재기의지 독려 공민왕이 안동에서 70일을 무사하게 보냈다면 이는 안동지역을 관리하는 행정책임자와 지역 백성들의 역할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왕의 몽진 당시 안동의 관리는 목사 김봉환이었던 것으로 최근까지의 연구는 결론 내리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공민왕의 몽진 당시 김봉환 목사와 안동 사람들이 국왕을 극진해 예우해 모시자 공민왕은 그 공로를 인정해 복주목을 안동대도호부로, 복주목사를 안동대도호부사로 승격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안동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고려사`는 안타깝게도 자세한 기록을 전하지는 않는다. 이는 전략상 왕의 행적을 지나치게 노출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봉환 목사는 왕의 안동 도착 당시 상주도(尙州道) 소속 안기역 역리들에게 왕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독려하거나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게 학계의 추정이다. 또 부녀자들이 인교를 놓아서 노국공주가 송야천을 건너게 한 것도 안동부의 행정적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목사 김봉환은 왕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집무하던 복주목 청사를 정리한 뒤 왕이 머물 수 있는 행궁(行宮)으로 준비했을 것이다. 또 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왕과 군지휘자들과 협의해 확실한 방어태세를 구축했을 것으로도 보인다. 정세가 위급하던 이때 왕의 최후의 보루로 준비됐던 곳은 다름 아닌 현재 성곡동의 성황당토성과 청량산의 공민왕산성과 왕모산성, 오마도산성 등이었음을 들 수 있고 김봉환이 이를 주도했다는 사실적 추측이다. 이런 것들은 `영가지`가 김봉환의 직책에 대해 행정 관리인 목사나 부사라 하지 않고 무인에게 통용됐던 안집사(安集使)로 기록한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왕의 휴식과 군사정비 지원 공민왕은 안동에서 우선적으로 오랜 몽진길의 피로함을 달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왕이 어느 날에는 낙동강 영호루 아래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며 물가에서 활쏘기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전시체제에서도 후방인 안동이 비교적 안전했으며 왕은 피로를 풀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나들이를 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실제 이때 홍건적은 한 번도 경상도를 넘은 일이 없었다. 이에 따라 왕의 일행은 전세가 비교적 안정된 틈을 이용해 안동 지역의 다른 곳으로도 순행했을 것이며, 안동 지역의 많은 산성들이 공민왕의 안전을 위해 축조됐거나 보수됐다고 전해진다. 산성 축조가 정확히 이 시기에 공민왕을 위해 이뤄졌다는 사실적 기록은 충분하지 않지만 안동에 이르러 공민왕의 마음이 편안했음은 여러 기록으로 입증되고 있다. 한편, 왕은 개성 일대를 휘젓던 홍건적을 물리치기 위해 안동에 머무는 동안 군대의 지휘체제를 정비했다. 이는 총병관으로 정세운을 임명해 홍건적을 격퇴한 사실로 증명된다. 이때를 전후해 진성이씨의 안동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李子脩)가 정세운의 휘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건적을 물리친 공로로 이자수는 공신이 됨으로써 그 자손들이 예안현과 청량산 일대에서 사회적 위상을 점했으며 후일 이 가문에서 성리학의 최고봉 퇴계 이황이 배출되는 계기가 됐던 점도 소홀히 볼 수 없는 한 인과다. 왕은 또 한편 봉정사의 진여문(眞如門) 현판글씨로 볼 때 봉정사에도 들러 불력으로 홍건적을 물리치기를 기도했을 개연성도 적지 않다. 이후 공민왕은 정세운이 지휘하는 군대가 개성의 홍건적을 섬멸했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개성 환도를 준비했던 것이다. 왕은 떠나기 전 “안동이 나를 중흥시켰다”며 안동부에 여러 가지 선물을 하사했으며 이 중 다수가 아직까지 태사묘 등에 전해지고 있다.안동에 대한 공민왕의 사은 공민왕이 안동에 도착해 송야천을 건널 당시 노국공주를 위해 안동의 부녀자들이 서서 엎드린 채 등을 잇대어 인교를 만들었다는 `놋다리밟기` 전설은 사실일까. 결론부터 내리자면 사실이 아니다. 영덕의 월월이청청과 의성의 지애밟기, 호남의 강강술래 등 놋다리밟기와 같은 맥락의 놀이는 얼마든지 있다. 여성들이 소로 손을 잡거나 몸을 잇대어 노는 춤의 문화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이다. 결국 안동의 놋다리밟기는 안동의 백성들이 공민왕을 어느 정도 환대했던지를 보여주기 위해 덧씌워진 전설이다. 이런 환대에 힘입어 왕은 재기할 수 있었고 안동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았다. 앞서 거론한 것처럼 두드러진 왕의 사은 중 하나는 몽진시에 복주목이었던 안동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킨 일이다. 안동이라는 지명은 왕건이 최초로 내렸고 중간에 몇 번이나 다른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확고한 지명으로 굳었다. 이와 함께 `금방기`에 따르면 왕은 안동대도호부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주는 조치를 내림으로써 안동 지역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배려했다. 의미가 깊은 여러 가지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안동부와 안기역리들에게 복식류와 식기류를 하사했으며, 영남의 대표적 누각이자 자신의 시름을 달랬던 `영호루`의 현판 글씨를 친필로 하사했다. 이로써 안동의 영호루는 국가적인 주목을 받게 됐으며 이후 누각을 확장하고 유실시 복원하는 동력이 될 수 있었다. 또 몽진해온 공민왕을 중도에서 맞이한 손홍량에게는 “충정이 하나같이 곧은 사람이 늙을수록 나라 위한 마음이 독실하도다”라는 시를 내리고 그의 사후에는 정평이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당시 손홍량은 나라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으로 낙향해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던 충성심 강한 신하였다. 이외에도 공민왕은 여러 가지 유무형의 선물을 안동에 남겼으며 안동의 백성들은 왕이 머물렀던 역사를 잊지 않는 의미로 `공민왕 신앙`을 이어왔던 것이다. /정태원·이임태기자

2009-07-10

문신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대구부의장

“국민 소통과 화합에 역량 집중하겠다” 2년간 평화통일 지역기반 확충 등 활동 펼쳐 “`상생과 공영` 대북정책 성공 위해 적극 노력”문신자 전 대구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이 최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대구지역 부의장으로 임명됐다. 신임 문 부의장은 앞으로 2년간 제14기 민주평통 대구지역회의 수장으로, 평화통일의 지역기반 확충과 평화통일을 위한 정책수립·추진에 대해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자문에 응하는 등 활동을 하게 된다.-민주평통의 활동방향은 어떻게 되나.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고 남북한 모두의 이익과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윈윈(win-win)의 남북관계를 만들자는 정부의 `상생과 공영`의 대북정책 성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남북 간 공영, 공생, 나눔의 문화를 정립하고 다음으로는 통일무지개운동을 통해 젊은 인재들을 적극 영입, 평통 발전을 꾀하겠습니다. 또 해외 101개 국가에 평통 조직이 되어 있는데 교포들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해 홍보를 강화하는 한편 국내적으로는 국민과의 소통 및 화합에 앞장설 계획입니다. -대북정책이 어떻게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하는지. ▲대북정책도 주고받는 관계가 돼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주고 받고 돕는 관계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또 그렇게 돼야 남북관계도 건강해지고 투명해지겠지요. -국민들의 안보의식에 대해 한마디. ▲북한 핵도발이 빈번해지니까 요즘 우리 국민들이 이에 대한 경각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안전불감증에 걸려 있다고 할까요. 하지만 아직은 북한과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좀더 우리 국민들이 안보의식을 갖고 남북관계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앞으로 활동 계획은. ▲남북관계 증진을 꾀하고 평화통일에 대한 소임을 다하며 회원 간의 화합과 내실을 다지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특히 평화통일을 위한 국민의 염원에 필요한 것은 국민화합으로, 소통과 화합에 역량을 집중하고 나아가 실용적 정책 건의 추진, 평화통일을 위한 한민족 네트워크 기반 구축 등에도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또 민주평통이 지역사회의 구심점이 되어 지역발전을 이루는데도 역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이현주기자 sun@kbmaeil.com▶▶ 프로필△대구시교육청 초등장학사·장학관 역임 △대구신천초 교장 역임 △경북과학대학 사회교육원장 역임 △제12대 대구여성단체협의회 회장 역임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 공동대표 역임 △재구 영덕군 향우회 회장 역임 △한국우즈베키스탄협회 회장 △독도사랑범국민운동본부 대표 △대구가톨릭대 미래지식포럼원장

2009-07-09

영일촌 한우, 영일촌 포크

철강산업의 메카 포항은 `글로벌 도시`라는 이미지답게 축산물 관리에 있어서도 세계적 수준을 자랑한다. 포항은 흔히 제조업에 편중된 산업도시로 인식하기 쉬우나 1천531호의 농가에서 모두 1만8천775마리의 한우를 사육하는 등 축산물 시장의 규모도 상당하다. 특히, 영일만의 이름을 딴 포항시 고유 브랜드 `영일촌`의 한우들은 포항축산농협 육가공공장의 전문화 공정을 거쳐 각 학교와 군 부대, 대형마트 등 전국으로 유통되고 있다. 편집자주▲`영일촌`이란 포항시에서 개발한 농특산물 공동브랜드이다. 포항지역 우수 농특산물의 차별화 및 통일된 이미지 창출로 소비자 인지도 향상과 판매촉진을 꾀하기 위해 지난 2001년 만들어졌다. 축산물의 수입 개방으로 국내 축산물 품질 차별화가 시급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에 포항축산농협은 정부의 축산물 유통구조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육가공공장을 설치, 지역에서 생산된 한우와 돼지고기를 가공해 그 중 선별된 고급육에만 `영일촌`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현재 8천775마리의 영일촌 한우들이 포항지역 곳곳에서 자라나고 있으며, 30개월의 사육기간을 거쳐야 영일촌 한우로써 인증 절차를 거치게 된다. ▲운영 및 가공 절차 영일촌 한우는 포항축협의 조합원들이 선별된 종자와 정형화된 사육 기준을 갖고 생산에 나서고 있다. 이들 조합원이 사육한 한우는 30개월이 흐른 뒤 포항축협 육가공공장으로 옮겨져 수집, 도축, 가공, 브랜드육 선별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영일촌이란 브랜드명을 부여받고 나면, 영일촌 한우는 3개의 조합직판장과 5곳의 가맹점, 120곳의 학교, 군 부대, 농협 하나로마트 등을 통해 전국의 소비자와 만나게 된다. 포항지역의 농특수산물 특성화 브랜드답게 영일촌 한우는 엄격한 가공공정을 거친다. 우선 영일촌 한우는 지금도 출하 하루 전 절식을 원칙으로 한다. 도축 시 오염을 방지하고, 제품의 신선도를 지키기 위해서다. 이후, 한우의 스트레스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도축 전 최소 12시간 이상 계류하고, HACCP(위생 인증) 인정도축장에서만 도축한다. 이렇게 도축된 영일촌 한우는 도축 당일 바로 가공공장에 수송된다. 철저한 위생관리 역시 영일촌 한우가 자랑하는 부분이다. 특히, 미생물 번식의 최소화를 위해 냉장탑차의 온도는 항상 0~4도를 유지하며, 가공실 온도도 15도 안팎을 벗어나지 않는다. 한우가 가공실에 입고하면 36시간 이내 무조건 골발, 정형, 진공포장이 시행되며, 고압 세척기를 통한 냉장탑차 세척 및 소독도 이때 같이 이뤄진다. 이 밖에도 포항축협은 식육처리기능사 자격을 갖춘 자체 위생 관리인을 배치해 위생관리 일지를 작성하고 있다. 또, 매월 1회씩 시료를 채취해 경북도 환경 보건연구원에 의뢰, 성분 및 유해물질 잔류검사 등을 행하고 있다. ▲영일촌 한우 프라자 포항축협은 축산물 수입개방에 대응한 유통구조개선 사업으로 1993년부터 식육유통센터를 설치, 운영해 오고 있으며, 2001년 8월부터는 포항시 농특산물 공동브랜드인 영일촌 한우, 영일촌 포크를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한미 FTA 협상 타결에 따라 한우가격 하락 및 수입육시장 확대 등 축산업 사육기반이 위협받고 있는데다, 대형할인업소 입점으로 지역 브랜드의 입지가 줄어들자 고유 유통망 확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에 포항축협은 경쟁력 있는 도매센터 및 식당을 개설해, 생산농가와 판매업소, 소비자가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현재 포항축협은 영일촌 브랜드육의 판매를 위한 일반식당(80평형) 1곳, 고급식당(40평형) 1곳, 도매센터(40평형)을 운영하고 있다. 포항축협은 이들 유통기반을 통해 도매, 소매, 택배, 인터넷 판매 기능을 확충, 영일촌 한우 프라자를 축산물 프랜차이즈점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계획이다. 또, 이들 유통기반을 딱히 한우에만 국한하지 않고 지육, 부분육, 정육, 가공육, 기타 축산물 등을 다양하게 취급할 수 있는 복합 매장으로 운영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포항축협은 식당과 도매센터 경영을 성과에 의한 철저한 책임경영제로 운용해, 고급육 생산뿐 아니라 전문 브랜드 유통구조까지 정립시킨다는 청사진을 구현하고 있다. /신동우기자 beat082@kbmaeil.com

2009-07-09

석병양로원을 다녀와서

박 지 은영일고 1석병양로원은 내가 영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세 번째 봉사활동을 하게 될 장소이다. 처음엔 양로원에서 봉사한다는 소릴 듣고 되게 힘들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면서 버스에 올라탔다. 도구와 구룡포를 지나 바다건너 산 건너 경치 좋은 곳에 다다랐다. 폐교가 되어버린 학교건물에 도착하였고 인상 좋으신 남자 선생님 한분이 우리 모두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몇몇이서 모둠을 짜서 활동하였다. 나와 내 친구들은 마른걸레와 젖은걸레를 들고 양로원의 모든 유리와 창문을 찾아 닦으러 다녔다. 우리가 온걸 알고 편찮으신데도 나와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일일이 인사를 하였다. 인사를 할 때마다 몇몇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기도 하셨다. 그럴 때 마다 “영일고등학교에서 왔어요.”하면서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한 할아버지께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였는데 할아버지가 대답도 안해주시고 다른곳을 쳐다보고 계시길래 몇 번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인사하기도 하였다. 몇 번을 하고나서야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 때 빨리 깨닫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할아버지도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걸레로 유리와 창을 닦아나갈 때 마다 내가 느끼는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갔다. 유리에 낀 먼지 하나하나가 말끔히 사라질 때 마다 봉사활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갔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다 끝마치고 잠시 쉬려고 복도에 앉아있었다. 옆 창 안으로 할머니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친구 두 명을 데리고 할머니들의 방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부터 하였다. 그리고 친구들과 각자 할머니 한 분에게 붙어 안마를 하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처음 나와 얘기를 나눴던 할머니가 잊혀지지가 않는다. 내가 할머니께 “할머니 제가 안마해드릴게요.” 하자 누워계시던 할머니가 나에게 눈을 마주치시며 힘들게 몸을 일으키시곤 안 펴지는 무릎을 억지로 펴시는 모습이 아직 내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내 마음 한 구석에 뭔가 모를 찡 한게 올라왔다. 할머니 무릎을 나도 같이 펴드렸고 할머니가 바지를 걷어 올리시자 무릎에는 파스가 붙여져 있었다. “ 할머니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 라고 수 십 번은 넘게 말 한것 같았다. 할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영덕에 계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우리 할머니도 지금 무릎이 많이 편찮으신데 하고 생각났다. 봉사활동 다녀와서 꼭 안부전화를 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여태 해드린것도 없고 불효 한 거 같아서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 때 만큼은 내가 할머니의 손녀처럼 정성껏 안마해드렸다. 할머니에게 안마해드리면서 할머니와 몇 마디 짧은 대화를 하였다. 할머니와 했던 대화 중 에서 “영일고등학교 학생들이 참 자주 오네~ ” 하는 소리에 나는 너무 흐뭇했다. 그 때 너무 우리 고등학교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할머니들께서 지루해 하실까봐 노래를 불렀다. 야영을 갔다 온 후라서 목이 많이 아프고 따가웠는데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열심히 힘껏 불렀다. 처음엔 뭘 부를까 망설이다가 노래 하다가 춤까지 추면서 열심히 웃기게 해드렸다. 그러자 할머니들께서 박수를 치며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 미소를 본 나는 더 힘에 입어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나서 반 아이들과 모두 모여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곳을 찾아가 순회공연을 하였다. 반 친구들과 다 같이 트로트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때 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마치 손녀를 보듯이 대해주셨다. 몇 분이 흐른 후 다른 건물로 모두 이동하여 큰 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앉아계신 곳 앞에 모두 모여 앉아서 장기자랑을 하였다. 그 때 만큼은 같은 반 친구지만 얼마나 이뻐보이고 착해보이던지 모르겠다. 그리고 헤어질 시간이 다 되어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느꼈다. 석병 양로원에 오기 전 까지만 해도 양로원이라는 생각 하나로 `많이 힘들고 고된 하루가 될 것 같다` 고 생각한 내가 참 부끄럽다. 한 달에 한 번 반 친구들도 단체로 오는 것 이외에도 가족들과 함께 양로원을 찾아 일손을 돕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도와주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뿌듯한 하루였고, 부모님에게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2009-07-08

사업가가 되기위한 필요조건

오늘은 엄마의 생신. 모처럼 가족끼리 외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요? 피자, 자장면, 돈가스, 갈비….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음식점에는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있고, 그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벌까요? 오늘은 음식점 주인이 되어봅시다! 그럼, 본격적으로 음식점을 경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찾아봅시다. 우선, 어떤 음식을 판매할 것인지를 정해야 합니다.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등 다양한 음식 종류 중 하나를 고르고, 판매하고 싶은 구체적인 메뉴를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한식을 선택했다면 설렁탕 한 가지만 집중해서 판매할 것인지, 아니면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 여러 가지 음식을 다양하게 팔 것인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음식점의 위치를 정해야 합니다. 위치는 내가 정한 메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나, 그 사람들이 이용하기 편리한 거리에 있는 것이 좋겠죠? 하지만 좋은 자리일수록 가게 세가 비싸다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세 번째, 음식의 가격을 정합니다. 가격이 비싸면, 이윤이 많이 남아 좋지만 사람들이 많이 사지 않을 것이고, 가격이 싸다면, 사람들이 많이 사먹겠지만 이윤은 적게 됩니다. 이런 점을 잘 고려하여 적정한 가격을 책정해야 합니다. 네 번째, 이 음식점을 경영하기 위하여 어떠한 사람들이 필요할까요? 요리사, 계산하는 사람, 주문 받고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 접시 닦는 사람, 주차 요원 등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고용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음식점 경영에 필요한 사람들은 모두 생각한 뒤, 그들 중 어떤 사람이 더 필요한지를 생각하여 고용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가장 필요한 사람부터 고용한 뒤, 음식점이 잘 되면 추가로 한 명씩 고용합니다. 마지막으로 음식점 이름도 정해야겠죠? 내가 판매할 음식을 잘 나타내줄 수 있는 이름을 신중하게 생각해서 정해야 합니다. 음식점 경영에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가령 음식점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열 것인지, 음식점에서 음악을 틀 것인지, 음식점 내부는 어떤 색깔, 어떤 디자인으로 꾸밀 것인지 등 많은 것들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음식점 사장, 즉 사업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해야 하며 식당의 위치, 음식의 종류 및 가격 등 여러 가지 사항을 결정해야 합니다. 훌륭한 음식점 사장, 훌륭한 사업가가 되기 위해서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신중하고 꼼꼼하게 잘 준비해야 하며, 문제가 생겼을 때 합리적이고 올바른 결정을 해야 한다는 점 명심하세요.생각 생각 ▶초등 1. 음식점을 창업하려면 무엇부터 해야할지 적어 보세요. 2. 어떤 음식을 판매하고 싶은지 그림이나 사진으로 메뉴판을 만들어 보세요. 3. 음식점을 알릴 홍보물을 만들어 보세요.

2009-07-08

퇴직위로금 장학금 쾌척 천근배 前상주시의회 사무국장

“제 것 나눠주는 기부는 아름다운 덕목”매년 불우이웃돕기 성금… 봉사활동도 활발 부인과 함께 장기기증 절차도 마무리 `귀감`37년간의 공직생활을 명예롭게 마감하고 지난달 말 정년퇴임 한 천근배 전 상주시의회 사무국장은 후배 동료공무원들이 한푼 두푼 모아 전달한 퇴직위로금 성격의 300만 원을 (재)상주시장학회에 장학금으로 쾌척했다.평소에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이면서 박봉임에도 매년 상당액의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부인 최순자씨와 함께 장기기증 절차도 마무리했다.선진국의 경우 빌 게이츠 등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기부와 자선이 사회적 덕목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지만, 아직 기부문화가 걸음마 단계인 우리의 실정을 감안 할 때 천 전 국장의 숨은 선행은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장학금을 맡기게 된 동기는. ▲먼저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도 되지 않는 적은 금액을 맡겨 부끄러울 뿐입니다. 저 자신이 만학도로서 1968년도에 상주농잠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가세가 기울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찍이 사회생활에 뛰어든 적도 있습니다.1974년부터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하다 1991년 상주대학교 야간대학이 설립돼 행정학과에 입학하고 이어 같은 대학원 아동복지학과 노인복지학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배움에 목말라하는 학생들을 수없이 봐 왔기 때문입니다.-주요 봉사활동 내용과 기부문화에 대한 의견은.▲1998년 사무관 교육 중 충북 음성에 있는 꽃동네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글귀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이후 꽃동네를 비롯해 상주시장애인복지회관, 상주사회복지관, 자원봉사센터, 장기기증운동본부 등에 매월 일정 금액을 맡기고 있으며 노력봉사로는 상주사회복지관에서 도시락 배달을 합니다.2006년도에는 아내와 함께 장기기증 서약을 하고 후원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연말이면 50~100만 원 수준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맡기고 있습니다.봉사활동과 기부는 다 같은 맥락으로 남고 넘쳐서가 아니라 나누어 남을 도움으로써 자기 스스로 가슴 뿌듯해지는 아름다운 덕목이라 생각합니다.-퇴직 공무원의 진로에 대해서는.▲대부분의 공직자들이 퇴직과 함께 제2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실생활은 권위적이고 피동적인 공직생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개인적으로 저는 공로연수 기간 중에도 중소기업에서 무보수로 연수를 받았으며 퇴직과 동시에 정상적인 보수를 받고 연수받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공직을 떠나고 나서 또다시 직장을 가지는 것이 마치 염치없는 선택처럼 인식되는 풍토가 팽배해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사고라 여겨집니다.심각한 인구 감소로 뒤따라올 인적자원이 고갈돼 가는 상황에서 퇴직 공무원이라 해서 팔짱만 끼고 있을 때는 절대 아니라 생각되며 오히려 집적된 노하우를 살려 적재적소에서 생산적 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봅니다./곽인규기자 ikkwack@kbmaeil.com

2009-07-08

입체적으로 생각하게 하라

“사과가 열두 개 있는데 그 중 일곱 개를 먹었다. 남은 것은 몇 개일까?“ 영구가 벌떡 일어섰다. “일곱 개요.” “왜 일곱 개가 되지요?” 평소에 좀 엉뚱한 면이 있는 영구에게 되물었다. “우리 엄마가 늘 먹는 것이 남는 거라고 했어요. 사과를 일곱 개 먹었으니까 당연히 일곱 개가 남는 거지요.” 수학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면 엉뚱한 답이지만 영구가 말한 답은 그럴듯하다. 창의의 세계에서는 정답만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때로는 엉뚱한 발상에서 기발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 창의 세계의 특성이다. 선생님이 이런 문제를 제시했다. `나는 준다`의 미래형은 무엇인가? 선생님이 생각한 답은 `나는 줄 것이다`였다. 그런데 영구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받는다.` 이 답은 문법적으로는 틀리지만 세상사를 통찰한 수준에서는 맞는 말이다. 주면 언젠가는 받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영구는 입체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아이다. 입체적 사고란 좀 엉뚱해 보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 보는 것을 말한다. `12-7=`에서 `5`라고 답하는 것은 마침표(.)와 같이 닫힌 답이다. 그러나 영구가 제시한 답 `7`은 다른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라는 물음표(?)를 던진 다음 `아하!`라는 느낌표(!)를 갖게 하는 열린 답이다. 단순히 마침표에서 끝나지 않고 물음표와 느낌표로 이어지게 하는 사고가 바로 입체적 사고이다. 입체적 사고를 위해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 보다는 외워서 아는 지식이 많다. 이렇게 하면 `무엇`에 대한 것은 많이 알지만 `어떻게`에 대한 것은 잘 모른다. 여기서 `무엇`에 대해 아는 것, 즉 외워서 아는 것이 단순한 `알기`라면, `어떻게`에 대해 아는 것, 즉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이해`이다. 어떤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응용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며, `어떻게`를 모르면 `새로움`을 창출할 수 없다. 결국 진정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는 `새로움`이 생명인 창의성 계발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이 `알기` 위주로 흐르는 예를 TV 프로그램에서 찾을 수 있다. `장학퀴즈` `도전 골든벨` 등과 같은 `어떻게` 보다는 `무엇`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들은 진정한 `이해` 보다는 `알기` 수준에 머물게 한다. `알기`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 루트번스타인이 `생각의 탄생`에서 제시한 `관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찰훈련은 그 동안 학교 교육에서 중점을 두었던 `생각나기`의 기억훈련에서 벗어나 `생각하기`의 고등 사고훈련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된다. 학교에서 3학년을 대상으로 재미있는 실험을 해 보았다. 포장이 되어 있는 일반적인 껌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 20분 동안 관찰한 내용을 최대한 많이 적어보게 하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20가지 이상 쓰지 못했다. 그런데 관찰을 눈으로만 하지 말고 오감을 모두 사용해 보라고 했더니 50가지 정도를 썼다. 이렇게 관찰 훈련이 잘 되면 나중에는 같아 보이는 모양, 색깔, 맛, 향기 속에서도 미묘한 차이를 찾아낼 수 있다. 차이를 느끼고 발견할 수 있어야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모든 분야에서 남다른 차이를 만들 수 있는 힘이 바로 창의력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한쪽 면으로만 보지 말고 여러 면에서 보고 생각하도록 입체적 사고력을 키우는 것이 창의력 훈련의 핵심이다. Create yourself!

2009-07-08

김정철 경북대병원 모발이식센터장

“첨단의료복합단지 대구 유치가 급선무” “전국 최고 의료인프라로 `메디시티 대구` 만들어야” 모근복제 연구 진행… 모발이식용 로봇 개발도 추진 모발이식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김정철 교수가 센터장을 맡고 있는 경북대병원 모발이식센터에는 연간 수백명의 환자가 찾는다. 정치인, 기업인, 고위 공무원도 상당수다. 대기 환자도 2011년까지 밀려 있다. 올 4월에는 경북대병원 모발이식연구소 산하 노화극복·웰빙을 위한 융합의료기술개발사업단(단장 김정철 교수)이 교과부 지정 지역거점연구사업으로 최종 확정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최근 의료관광 바람을 타고 대구시는 아예 모발이식을 대구의 의료관광 대표상품으로 내세웠다. 이달 말께 첨단의료복합단지 선정을 앞두고 김 교수를 만나 대구·경북지역의 의료산업이 나아갈 길을 들어봤다. -의료산업을 대구의 신성장동력으로 육성시키기 위해 필요한 제반 여건은. ▲대구는 전국 최고 수준의 의료인프라를 갖고 있으며 의료관련 산업도 풍부합니다. 하지만 의료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계속적인 지원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첨단의료복합단지의 유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메디시티 대구`의 전망을 어떻게 보나.▲메디시티 대구의 성공 역시 첨단의료복합단지의 유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첨단의료복합단지가 대구로 와야 하는 당위성은.▲첨단의료복합단지의 성공여부는 역시 우수한 인재에 의해 좌우된다고 봐야 합니다. 대구·경북에는 의과대학 5개, 치과대학 1개, 약학대학 2개, 한의과대학 1개가 있으며 대학병원 5개를 포함한 27개 종합병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의료인재 인프라를 갖고 있는 지역은 서울을 제외하고는 대구·경북이 최고입니다. -개인적으로 모발이식 분야와 관련한 또다른 계획이 있는지. ▲옮겨 심을 모발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 모근을 복제하려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모발 이식용 로봇도 개발할 계획입니다./이현주기자 sun@kbmaeil.com

2009-07-07

예순여덟번째 안부 - 바느질을 하며

그대에게 그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말았지요. 쉬이 사과도 못하고 근심만 돌돌 굴리다가 도무지 꼼수로는 헤어날 길 없어 종일 바느질을 했네요. 입 꼭 다물고 돋보기 끼고 뚫어져라 한 곳만을 바라보며 왼손으론 천을 잡고 오른손으론 바늘을 잡고 한 땀 한 땀 넣었다 빼고 다시 뒤로 찔러 앞으로 빼는 동안 촘촘하게 길을 내는 실의 자국들. 그렇게 커다란 방석 하나를 만들어 갑니다. 도톰하게 속을 채운 뒤 먹물 염색한 천을 테두리에 두르고 쪽물 염색한 천을 가운데 대고 붉은 실로 한 바퀴 흰 실로 한 바퀴 그렇게 깁습니다. 행여 앉는 자리 속이 밀릴까봐 곱하기 모양으로 다시 또 길을 내고 그것도 모자라 돌려가며 네모를 자꾸 그립니다. 한 줄로는 모자라 또 한 줄 곁에 내니 어느새 톡톡하게 자리를 잡는 귀퉁이가 제법 그럴듯한 방석 매무새로 고개를 듭니다. 이 가느다란 실을 끌고 가는 바늘 하나도 조금만 비껴 지르면 빼또롬해지는 길 선명한데 하물며 함부로 말하고 생각 없이 행동한 나의 모습은 얼마나 흐트러진 자국을 주변에 남겼을까요. 함께 기워가는 세상일 텐데 삐딱하게 돌아앉는 나 하나로 인해 잠시나마 흔들린 우리들 질서에 대해 생각합니다. 올려놓은 음반이 서너 번이나 반복해서 돌아가는 동안 바늘을 쥔 엄지와 검지가 아파 오는 동안 솜씨 없는 바느질로 다시 그대를 생각하는 동안 말없이 말을 건 나와 내가 잘 화해하고 있더군요. 참나무 좌탁 아래 놓아둘까? 강돌 위에 깔고 앉아 강을 바라볼까? 그러다가 아니야, 그대에게 주어야지 하고는 만져보며 또 만져보며 가뿐해진 마음을 부지런히 깁습니다.

2009-07-07

홍희덕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서민 소비생활 촉진해야 대한민국 경제 되살아나” 2008년 총선 당시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으로 유명세사회적 약자·서민들 권익 옹호·생활향상 노력 보람 느껴현재 비정규직 문제, 정부가 나서 정규직 전환 주도해야" 대부분이 석·박사, 판·검사출신인 국회에서 저 같은 노동자출신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치란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경북 상주의 조그마한 아이에서 아버지를 도와 일하는 소작농으로, 그리고 우유배달과 도로포장일 등 그 옛날 우리네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가족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러다 청소부, 즉 요즘 같지 않았던 냉대 속의 환경미화원 출신의 국회의원. 그가 경북 상주 출신의 홍희덕(비례대표) 민주노동당 의원이다. 인터뷰를 통해 “대부분이 석·박사, 판·검사출신인 국회에서 저 같은 노동자 출신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문을 뗀 그의 꿈은 서민이 행복해지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5명 중의 1명인 홍 의원은 다른 정당의 10배의 몫을 해야 한다. 때문에 의원실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오히려 본회의장이나 상임위에 있는 것도 감사해야 할 지경. 그가 찾아가야 할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있었던 시간. 그 시간에도 그는 쌍용차 문제라든가, 비정규직법 관련 문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경북 상주가 고향이신데,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78년도만 하더라도 아직 우리나라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70년대 공업화가 진행되고 부동산개발도 진행됐지만 그것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지요. 노동자, 서민들은 그때도 지금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 초등학교 졸업 후 13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소작농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8년 배곯는 자식들을 볼 수 없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서울에 와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유배달, 도로포장 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93년도에 환경미화원이 되면 자녀들 학자금을 지원해준다는 말에 의정부시에 환경미화원으로 취직하게 돼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상주의 은척 초등학교 당시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그 시절 이야기야 다들 어렵고 힘들던 시기였다는 것이 기억합니다. 십릿길이 넘는 거리를 꽁꽁 언 발과 손을 입으로 불며 학교에 가던 일이 기억이 납니다. 밤에 산길을 갈 때는 무서워서 크게 노래부르며 뛰어가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가난입니다. 다들 가난했지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아버지 농사를 도우며 노동을 했습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습니다. 옛날 기억도 많이 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대구와 경북 출신으로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대구·경북지역이 좀 보수적이라는 인식이 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난한 노동자, 서민의 삶을 살아오다 보니 노동자, 서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진보정당에 가입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93년 의정부시에 환경미화원으로 취직해서 생활이 조금 나아지나 싶었지만 98년 IMF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으로 환경미화원들의 소속이 의정부시 시설관리공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사회적 약자인 환경미화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운동을 하게 됐고 자연스레 노동조합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정치세력화를 고민하고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지난해 총선 당시에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으로 유명세를 탔는데. ▲처음 국회에 들어올 때는 사실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부분이 석·박사, 판·검사출신인 국회에서 저 같은 노동자출신이 의정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저도 있었고 저를 바라보는 국민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치란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년 전 처음 들어올 때처럼 임기가 끝날 때까지 노동자, 서민들의 이해를 대변하자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사회적 약자, 노동자, 서민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의원님은 6,70년대를 산 억척스러운 아버지의 느낌인데, 고향민들에게 하실 말씀은 ▲과거 6,70년대 우리가 살아갈 때 다들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까? 전쟁 직후 이어진 가난과 수많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우리 노동자, 서민들은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왔습니다. 지금 또다시 경제위기다 뭐다 하면서 서민들의 삶이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대구·경북지역의 서민들의 삶도 많이 힘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힘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노동자, 서민들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온 저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노동자,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저 자신도 다짐하고 있습니다. -현재 비정규직법 문제로 국회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은 비정규직의 남용과 차별입니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기간을 유예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는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금 정부가 나서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주도해야 합니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주장하는 비정규직법 개악은 결코 동의할 수 없으며 오히려 비정규직의 사용을 제한하는 형태로 비정규직의 숫자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저임금의 소폭 인상, 그리고 박사 환경미화원 등이 현재 사회의 모습입니다. 의원님이 바라시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있다면. ▲얼마전 2010년 최저임금이 결정됐습니다. 고작 2.75% 인상, 110원이 올랐습니다. 경영계와 정부에서는 경제가 어려워서 최저임금을 오히려 삭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어떻습니까? 경제가 어려우니까 오히려 최저임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많은 나라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경제가 어려울수록 최저임금을 인상해서 서민들이 소비를 하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경제가 살아납니다. 한국은 지금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최저임금은 전체 노동자 평균임금의 50%는 되도록 올려야 합니다. 제가 법안까지 제출해놓은 상황입니다. 이명박 정부와 국회가 진심으로 노동자, 서민들의 생활과 삶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홍희덕 국회의원은 1949년 경북 상주 출생, 은척초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 93년 경기 의정부시 환경미화원으로 입사, 2004년 제3대 경기노동조합 위원장, 2006년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초대위원장, 2008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2009-07-06

법원 회생절차개시 결정받은 C&우방 심명대 C&우방 법정관리인 겸 사장

“MA 통한 조속한 매각에 속도 내겠다” 임직원·채권단 `비상대책위` 동분서주 “지역·출향기업인이 인수해 줬으면…”“20여년간 지역민들의 사랑으로 성장한 지역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C우방이 사라져서는 안됩니다. 그동안 쌓아올린 지역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인수·합병(MA)을 통한 매각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C우방은 지난 11일 법원의 회생절차개시 결정과 함께 심명대씨가 C우방 법정관리인 겸 사장으로 선임되며 MA를 통한 매각에 속도를 내고 있다.-C우방 회생에 막중한 임무를 맡으셨는데….▲C우방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큰 만큼 책임감도 무겁다. 우방이 기력을 차려 지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으로 다시 서야 하지만 주변 여건이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자력 회생은 불가능해 MA를 통해서만 회사의 장래가 담보될 수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지난달 10일 삼일회계법을 매각 주관사로 선정하고 자산실사와 채권내용 등을 파악해 오는 16일 매각공고를 내는 등 속도를 내려고 한다. 지역 또는 출향인사가 인수하기를 기대한다.-C우방의 현 상황과 MA 일정은.▲현재 직원임금이 9개월 체불 상태이고 협력업체 납품대금 미지급, 운영자금 고갈 등으로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다. C우방을 살려내기 위해 경영진이 아닌 임직원과 채권단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가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는 등 직원들이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고 있어 대구시와 지역민들의 성원이 필요하다. 특히 대구시를 비롯한 지자체와 지역민, 채권단 등이 참여하는 사모펀드조성, 금융기관 지원 등의 대책을 구상하고 있다. 우방은 빠른 시일 내에 매각을 위해 16일 일간지 매각공고를 내고 24일까지 인수의향서(LOI) 접수를 통한 예비실사, 8월19일 입찰, 8월21일 우선협상대상자 통보, 8월27일 양해각서(MOU) 체결, 9월25일 최종계약 체결 등으로 일정을 잡았다. -최근 언론에서 현장직원 임금직불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했는데….▲언론에서 터져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내용을 확인해본 결과 현장 직불에 대한 경영인의 인감 날인이 빠진 부분이 문제가 됐다. 그러나 이 부분도 당시 결재권자인 건설본부장과 현장소장 등이 정상적으로 회의를 거쳐 결제 품의를 받았으나 이후 결제 과정에서 경영진과 비대위 간의 갈등이 심화되며 결재라인이 혼선돼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직원이 혼자 살겠다고 가로챈 것도 아니고 문서 위·변조도 사실과 다르다. 이번 사건은 다분히 MA를 추진 중인 회사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회사 명예를 훼손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처하겠다.-MA에 관심을 가지는 기업은 그리고 MA를 빠르게 진행하는 이유는.▲최근 매각주관사인 삼일회계법인과 접촉한 결과, 3~4군데에서 인수에 대해 관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지역 또는 출향기업인이 인수해주기를 가장 바라고 있다. MA에 속도를 내는 것은 대형 국책사업인 4대강 살리기 사업이 벌써 발주되는 등 기업이 회생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업은 우방과 화성, 서한 등으로 손에 꼽을 정도이다. MA가 빨리 이루어져야 4대강 살리기 사업 등의 국책사업 수주를 통해 기업을 정상화될 수 있다./이곤영기자 lgy1964@kbmaeil.com

2009-07-06

`킬 빌`

이 영화는 원래 `킬 빌`이라는 한편으로 된 영화인데, 런닝타임이 길다는 이유와 상업적인 목적으로 `킬 빌 Vol. 1`과 `킬 빌 Vol. 2`으로 나뉘어 개봉했다.감독이 동양 문화를 좋아해서 그런지 영화 내내 일본 사무라이 칼이 등장하고 사무라이 정신이 바탕을 이룬다. 킬 빌 Vol. 1에서는 영화의 반이 일본을 무대로 한다.타란티노가 동양 무술 영화의 마니아라는 사실은 너무 유명하다. 홍콩 쇼브러더스의 로고를 띄우는 장난스런 오프닝부터 시작해서 사지절단 무술과 사무라이 영화의 피분수가 솟구치는 액션 장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보이는 캐릭터, 무엇보다 이소룡의 노란색 트레이닝 복을 입은 주인공까지 타란티노는 자신이 보고 열광한 영화를 재료 삼아 `킬 빌`이라는 큰 그릇에 넣어 화려하고 그득한 성찬을 내 놓았다.다음 8가지 사항들을 알고 보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1. 영화의 라스트씬에서 모든 복수를 끝내고, 소파에서 휴식을 취하는 브라이드(우마 서먼)의 모습은 `펄프픽션`에서 빌려왔다.2. 엘 드라이버(대릴 한나)와 브라이드가 버드(마이클 매드신)의 트레일러에서 싸우는 장면을 눈썰미를 가지고 지켜본 관객이라면 대릴 한나가 출연한 `블레이드 러너`포스터를 발견할 수 있다.3. 장장 13분이나 되는 영화 엔딩 크레딧이 끝나면 우마 서먼이 대릴 한나의 눈알을 뽑는 장면이 어떻게 촬영이 되었는지 볼 수 있다.4. 타란티노는 버드가 브라이드를 생매장하는 장면에서 `황야의 무법자`의 영화음악을 사용했다.이 음악이 `황야의 무법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악당들에게 붙잡혔다가 관에 주검 대신 자기 몸을 넣고 탈출하는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올드팬이라면 감회가 남다를것 같다.5. 전편보다 말이 많아진 `킬빌2`에는 `슈퍼 히어로`를 다른 식으로 접근하는 빌의 발상에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빌은 슈퍼 히어로들이 지니고 있는 양면성을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하는데, 이는 실제로 데이빗 캐러딘과 타란티노가 나누었던 대화다.6. 원래 브라이드에게 쿵푸를 가르치는 백발의 파이 메이 역은 타란티노 본인이 연기하려고 했지만 1편에서 크레이지 88의 대머리 두목으로 출연했고, 무술의 조예가 깊은 유가휘에게 최종낙찰됐다.파이 메이라는 캐릭터는 쇼브라더스의 전속배우였던 유가휘가 출연한 영화 `홍휘관`에서 빌려왔다.실제로 유가휘는 남파소림권이기도 한 홍가권을 익힌 진짜 무술인으로 황비홍의 직계제자라고.7. 타란티노 감독과 절친한 영화동료인 사무엘 L.잭슨은 브라이드의 결혼식장에서 축가를 연주하는 오르간 주자로 깜짝 출연했다.8. 2편의 백미인 브라이드와 엘 드라이버의 결투는 원래 넓은 황야를 무대로 펼쳐질 예정이었으나 촬영 하루 전날 타란티노는 버드의 트레일러로 장소를 변경했다.타란티노는 한 인터뷰에서 “현재 `킬빌3`를 기획 준비중”이라고 말문을 연 뒤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 `속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처럼 처음부터 이 작품이 나의 달러 삼부작(Dollars Triogy)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타란티노가 밝힌 `킬빌3`은 `킬빌1`에서 브라이드에 의해 희생된 버나타 그린(비비카 A.폭스)의 딸 니키가 주인공으로 나설 예정.내용은 빌의 모든 유산을 상속받은 소피(줄리 드레퓌스)가 니키를 키워 브라이드에게 보내고 니키가 차세대 브라이드가 된다는 내용.15년후 정도에나 제작이 가능할 `킬빌3`을 위해 몇몇 장면을 미리 찍어놓았다고 하니 역시 타란티노 다운 발상이다.다음주에 계속

2009-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