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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마고할멈 전설 · 忠婢단량 · 貫目魚등 다양한 역사 간직”

이삼우포항향토사가더 이상 갈 곳 없어 ‘이제 그만’이란 탄식에서 유래된 ‘구만리’청어 관목어에서 비롯된 과메기, 지금은 세계속 먹거리로 발전사랑하는 님 만나려고 마고할멈이 놓은 바닷속 돌다리 ‘교석초’■ 구만리의 유래동해안에 별스럽게 툭 불거져나온 작은 반도 그 끝 부위를 장기곶이라 한다. 고산자는 이 나라의 지형이 호랑이 같다며 이 일원을 호미등(虎尾嶝)이라, 곧 호랑이꼬리짬으로 표현했다.해맞이 공원이 있는 대보면소재지 보천마을 북쪽으로 KBS송신소가 자리하는 언덕배기 전체를 구만등(九萬嶝)이라 한다. 구만리라는 단어 그 자체가 한없이 넓다는 뜻을 품는다. 혹자는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던 지역이라고 龜滿, 혹은 언덕이 질펀하다하여 丘滿이라는 설도 있다. 그 다 일리 있는 풀이이겠지만 ‘이제 그만이구나’라고 외친 한 여인의 절규에서 발생했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 여겨진다.세종때 영의정에 올라 훗날 단종을 보필하던 충신 황보 인 정승 가문이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몰락할 때였다. 단량(丹良)이라는 여종이 정승의 어린 손자를 물동이에 숨겨 한양을 빠져나와 산 넘고 물 건너 낯선 길 천리를 걸어서 봉화군 닭실마을로 황보 인의 사위 윤당(尹塘)을 찾아가 노잣돈을 마련하여 은신처를 찾아서 이 곳까지 내려온다.이제 더 달아나 숨을 곳이 없는 허허로운 구만등 언덕에 이르러 한숨지으며 외쳤던 절규가 ‘이제 그만이구나’이었다. 이 ‘그만’이 ‘구만’으로 와전되어 이두식 한자표기로 구만(九萬)이라 불려지게 되었다는 설이다.더 나아갈 땅길이 없음에 그녀는 아기를 다시 들쳐 업고 눈을 피해 장곡봉수대(봉화봉 130m)가 있던 고금산(일명 馬峯산) 골짜기 집신골(집성골)로 숨어든다. 그 곳은 해변에서 불과 1㎞ 남짓 떨어진 그리 높지 않은 산이요 깊지도 않는 골이건만 외지고 깊숙하기가 심산유곡 같아서 숨어 살기에 적지였다. 그 곳이 곧 황보 집안의 맥을 다시 잇게 하는 은둔처였으니 4대를 칩거했던 곳이다. 그래서 이름이 집성골[集姓 골]이라 불러지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그 자리에 대곡(大谷) 저수지가 축조되어 550여 년 전의 그 뼈아픈 흔적들을 물속에 묻어 담고 유유하기만 하다.훗날 세상이 밝아지고 곤혹의 역사가 희석되면서 그 후손들은 장기면 모포리 뇌성산성 뒷자락, 지금의 구룡포 성동(城洞)마을로 이주를 하여 세거(世居)할 터를 잡고 다시금 핏줄을 늘리며 가세를 회복하기 시작하여 숨어 산지 290여년 만에 자유와 명예를 되찾게 된다. ■ 깔구리개와 과메기의 전설대보 마을에는 ‘봄 샛바람에 목장 말 얼어 죽는다’는 말이며 ‘내밥 먹고 구만등 바람 쐬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3면이 탁 트인 바다요 바람막이 숲도 없는 언덕배기 지형이라 바람거세기가 가히 살마적(殺馬的)인 곳이다.그 구만등 끝자리에 깔구리개라는 작은 포구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종종 깔구리로 고기를 끌어 모아야 했던 풍경들 때문에 지어진 마을 이름이다. 그도 보통 고기가 아닌 청어였다. 개는 浦-개 자다. 옛날에는 음력 정월이면 이 연안으로 청어 떼가 몰려오곤 했는데, 몹시도 풍랑이 거친 지역이라 몰려다니던 고기 떼들이 거친 파도에 떠밀려서 이 마을 포구로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여서 이를 주민들이 깔구리로 긁어모았던데 연유한다.과거 영일만 호시절 까지도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풍어였었다니 족히 가능한 이야기다.교석초 일원은 암초투성이다. 물밑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난파선도 잘 생기는 별난 자리다. 그래서 풍랑이 거친 날에는 고기떼가 방향을 잘못 잡아 골탕을 먹고서 뭍으로 밀려 나둥그러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한 북새통 속에 어떤 녀석은 해변 나뭇가지에 걸리고 어쩌다 꺾어진 나뭇가지에 눈이 꿰뚫려 걸린 상태로 피둥피둥 건조되기도 하였다. 한자로 쓰니 곧 ‘꿰뚫을 관(貫)’ ‘눈 목(目)’이라, 즉 관목어(貫目魚)가 된 것이다.어느 추운 날 가난한 한 선비 나그네가 이 해변을 거닐다가 그렇게 방치된 고기를 챙겨 주막에 들어가 술을 사 마실 때 안주로 했던 것인데, 그 맛이 특이하고 좋은지라 신상품이 개발되니 이에 관목어(貫目魚)라 이름 한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방언의 습성이 작용하여 ‘과메기’가 된 것이라 한다.그 후 과메기는 발달을 거듭한다. 옛날에는 꽁치가 아닌 청어두름을 부엌 환기창 밖에 걸어두고서 말리게 되어 있었다. 부엌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가 훈제역할을 하여 방부효과를 내게 하기 위함이요,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면서 건조되게 하기 위함이다.그것도 등이 아래로 향하게 거꾸로 메어 달게 된다. 그래야 온도의 고저에 따라 애간장이 녹아내려서 서서히 몸체에 스며들어 깊고 오묘한 맛을 내기 때문이다.惡化(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더니 과메기 원조는 까마득히 사라지고 꽁치과메기가 기승을 부린다. 어쨌거나 경향각지로, 마침내 세계로 까지 판매망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꽁치팔자도 시간문제였나 싶다.깔구리개 앞 바다 속으로는 겉과는 달리 험하기가 설악이나 금강산의 어느 바위산지느러미 능선 같다고 한다. 수중 험한 산봉우리들의 정수리가 해수면위로 노출된 부분이 북쪽 축산을 향해 거대한 디딤돌 놓이듯 돌출 배치되어 있어 교석초(橋石礁)라 한다. 태고적에 마고(麻姑)할멈이 영덕군 축산으로 사랑하는 님을 만나러 가려고 밤새 놓다만 돌다리라는 전설을 갖는다.1907년 9월9일 일본 동경수산대학의 전신이던 수산실습소 실습선 가이요마루(쾌응환·快鷹丸)라는 범선이 이 지점에서 좌초, 조난하면서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거친 파도에 휩쓸려 죽은 것을 기념하는 비가 이 일원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있어 그 정황을 짐작케도 한다.이 지점이 겉보기에는 육지의 한 끝이지만 해저지도에 의하면 바다 속으로 울퉁구불 이어지는 큰 산맥이 있어 영덕의 축산과 연결된 형국이라 한다. 바다 속에도 산맥이 있고 분지며 평원이며 단애며 밀림이며 갖가지 형상의 지형이 있게 마련이다.곧 이 해중(海中) 산맥 때문에 동해로 흘러드는 각종의 오염물질들이 쌓이고 또 쌓여서 마침내 조개 한 톨 건저 먹을 수 없는 죽은 바다로 변한다는 학설이 있어 우리를 경악케 한다. 환경부 발간 환경백서에 의하면 포항과 경주, 영덕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바다를 오염시키는 우행을 지속한다면 불과 20년 이내에 그렇게 된다는 경고다.특히 우리 포항은 해양 도시로 발돋움하여야 할 운명인데 바다가 죽으면 함께 죽어갈 것이 뻔 하기에 걱정이 된다.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주겠다는 각오를 한다면 과메기에서 벌어들인 순수입에 해당하는 재원부터 몽땅 바다 살리기 투자로의 전환을 기획하는 것도 불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이제 ‘포항의 역사이야기’ 연제의 그 끝을 본다. 필자가 써 내린 글 들 중에 더러는 誤記(오기)며 文弱(문약)함에도 핀잔 없이 격려와 공감대로 함께해준 애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표하고 향토 사랑의 깊은 정이 확산되므로서 품격 있고 아름다운 포항이 건설되기를 빌어본다.끝

2006-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