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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2. 공민왕은 왜 안동을 피난처로 택했나

공민왕 몽진 당시의 정세 1360년 홍건적은 해로를 거쳐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침입하는 한편 요동 지방에서 활동하던 홍건적의 대부대는 원(元)의 상도를 공격했다. 같은 해 9월 원이 대군을 동원해 만리장성 이남과 이북의 양 방면에서 홍건적을 포위해 압박하자 궁지에 몰린 홍건적은 진로를 고려로 돌렸다. 이에 따라 고려는 다시 한 번 홍건적과 결전을 치러야만 했다. 공민왕 10년인 1961년 10월 20일 10만여 명의 홍건적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서 고려의 영내에 침입했다. 이들이 5일 만에 삭주를 거쳐 이성을 점령하자 고려 조정은 홍건적을 방어하기 위한 지휘부를 편성했다. 방위군을 전진 배치하는 한편 각 도에서 장정을 징발하고 선비와 향리가 출전을 자원하면 관직을 주고 천민이 출전을 자원하면 양인 신분을 주는 우대를 통해 전투 병력의 확충에도 팔을 걷었다. 그러나 1차 홍건적의 난을 비교적 쉽게 제압한 바 있는 상원수 안우와 도지휘사 이방실 등이 지휘한 고려군은 홍건적을 다소 과소평가했다. 청천강 방어선에 머물던 고려군은 홍건적이 한꺼번에 대부대를 남하시킬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경계태세를 게을리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중과부적으로 고려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홍건적은 놀라운 기세로 남하했다. 패배와 퇴각을 거듭한 고려군이 개경까지 퇴각하자 고려 조정은 개경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파천을 결정하기에 이른다.눈보라 맞으며 초라한 몽진 파천 계획에 따라 고려조정이 부녀자와 노약자를 도성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하자 개경 도성의 민심은 크게 흔들렸다. 최영과 이방실 등 무장들은 공민왕과 문신들이 피난길에 오르자 앞을 가로막고 도성의 사수를 주장했다. 최영 등이 국왕의 파천을 반대한 것은 국왕이 조정을 지켜야 군대의 사기가 유지되고 의병모집도 쉬워지며 그래야 반격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문신들은 개경의 성곽이 불완전하고 비축된 양곡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파천을 강행했다. 이때 최영은 통분을 이기지 못해 울면서 “주상께서 개경에 머물며 종묘와 사직을 지키셔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다고 `고려사`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결국 겨울이 닥쳐오는 11월 19일 공민왕 일행은 개경을 떠났다. 20일 파주 분수원과 양주 영서역을 거쳐 21일에 광주 사평원에 도착했다. 당시 이 지방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도망친 뒤였고 고을의 행정책임자만이 쓸쓸이 남아 왕을 맞았다. 이천에 이른 24일에는 눈과 비가 함께 섞여 휘몰아치는 궂은 날씨여서 공민왕은 옷이 눈비에 젖어 얼어붙자 모닥불을 피워 옷을 말리는 등 초라함을 면치 못했다. 25일 충주 북쪽의 음죽에 도착했지만 발길이 닿는 지방마다 관리와 백성은 도망친 뒤였으므로 공민왕 일행의 고생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이 같은 백성들의 외면과 함께 피란 중 전해진 수도 개경 함락 소식은 공민왕으로서는 그야말로 뼈 아팠을 것이다. 안동에 이르러 비로소 극진한 대접 거쳐 온 지방마다 국왕의 지위에 걸맞은 대접은커녕 눈보라를 뚫고 갖은 고생만 겪은 초라한 몰골로 왕은 충주와 문경을 거쳐 예천과 용궁을 지나 12월 25일 한 달 정도 만에 복주(福州:안동)에 도착했다. 안동의 초입인 송야천에 공민왕이 이르러 다리가 놓이지 않은 냇물을 건너야 할 상황에 놓이자 추운 겨울 이 곤란한 장면을 본 안동의 젊은 부녀자들이 서로 등을 잇대 인교(人橋)를 만들어 노국공주 일행을 건너게 했다고 전설로 전한다. 이는 다른 고장에서는 받아본 적 없는 극진한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깃발을 앞세우고 관복 행렬이 줄지어 나타나 왕을 맞이하고 궁궐을 정해 어가를 모시니 공민왕이 비로소 기뻐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공민왕 일행은 그동안 지나온 다른 고장과는 달리 안동에서는 고을 입구에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안동의 목사였던 김봉환과 토착세력은 주민들과 힘을 합쳐 공민왕을 성심껏 보위하면서 재기에 필요한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민왕은 나중에 수도 개경을 수복한 것을 두고 안동 주민들의 정성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이때의 고마움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실제 공민왕은 안동의 주민 대표들에게 옥대와 옥관자, 상아홀 등 귀중품을 하사했는데 이는 홍건적의 1차 침입을 물리치고 개선했던 무신에게도 노국공주의 반대로 하사하지 못한 귀중품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당시 안동의 안기역 관리들에게도 여러 종류의 귀중품을 하사했다. 개경에 환도한 뒤 안동과 안동 주민들의 따뜻한 대접을 잊지 못한 공민왕은 복주목(福州牧)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조세를 면제하기도 했다. 대도호부란 지금의 광역자치단체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행정단위다. 이와 함께 공민왕은 손수 붓과 벼루를 가져다가 자신이 몽진의 시름을 달랬던 안동의 누각에 `영호루(映湖樓)`의 현판을 써서 내려 걸어두도록 했다. 임시수도는 왜 하필 안동이었나 안동은 고려의 건국부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등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패한 뒤 수세에 몰리자 찾은 곳은 안동이었다. 태조 13년 안동지역의 토착세력인 삼태사(三太師)가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친 공으로 안동부로 승격됐다가 다시 영가군(郡)으로, 성종 14년 길주자사(吉州刺史)로 바뀌었다가 현종 3년 다시 안동부라 했다. 이후 명종 27년 김사미와 효심 등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안동부에서 평정한 공으로 도호부(都護府)로, 신종 7년 동경 야별초의 패좌 등이 일으킨 반란을 막아낸 공으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했다. 이후 다시 복주목으로 고쳤다가 공민왕에 의해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된 것이다. 이 같은 안동의 지명변천 및 승격과 강등의 역사적 사실로 미뤄 안동 지역은 당시만 해도 지방지배의 핵심이자 군사 전략상의 요충지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들로 안동은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여러 유리한 점을 가진 지역이었다. 홍건적은 북에서 처내려왔기 때문에 주변에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험준한 산들이 에워싼 안동의 지형은 적의 날랜 기병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상당했다. 또한 내륙이라는 특성으로 서남해안에 자주 출몰한 왜구의 침략을 우려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식량은 물론 철을 비롯한 각종 물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에도 유리했다. 이외에도 안동은 수차례 반란을 제압한데서 알 수 있듯이 `남쪽에서 충성과 의리가 가장 뛰어난 고장`으로 고려 왕실은 인식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전란을 맞아 고려의 임시수도가 된 안동은 왕을 보필해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왕이 수도를 떠나는 몽진이 결코 흔치 않았기 때문에 왕의 방문지라는 강한 자부심을 안동사람들은 지녔고 지금까지도 그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정태원·이임태기자 lee77@kbmaeil.com

2009-07-03

충남 예천 남연군의 묘

` 2대에 걸쳐 천자 배출` 천하의 명당 흥선대원군이 가야사에 불지른 후 석탑 부숴 묏자리 만들어묘 옮긴후 7년뒤 `고종` 탄생… 완벽한 `배산임수` 최고 명당 명당(明堂)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에 썩 좋은 자리`, `풍수지리에서 후손에게 장차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묏자리나 집터`로 나와 있다. 이번 충남 지역 답사의 마지막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를 찾았다. 흥선대원군은 잘 알려진 대로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와 멸시가 심해지자 파락호(破落戶)로서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기에 이른다. 흥선대원군은 풍수지리의 대가인 정만인을 불러 경기도 연천에 있는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자 명당을 추천 받는데, 이때 정만인이 두 곳의 명당을 천거하게 된다. 한 곳은 자손이 만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명당이고, 다른 한 곳은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명당이라고 천거하는데 흥선대원군은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온다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의 명당자리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가야사라는 사찰과 석탑이 있어서 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원군은 가문의 가보인 `단계 벼루`를 가야산 주지승에게 선물로 건네고, 그 당시에 충청감사로 있던 자를 회유해 가야사의 스님들을 다른 사찰로 보내기에 이른다. 1844년 어느 날 가야사에 불을 지른 흥선대원군은 직접 석탑을 부수고 묏자리를 만들어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게 된다. 묘를 옮긴 지 7년 후 차남 명복을 낳았는데, 명복의 나이 12세에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가야사를 없앤 대원군은 인근 골짜기에 절을 지어 보덕사(報德寺)라 이름 짓고, 개운사 주지인 도문을 초대 주지로 삼은 후에 남연군묘 수호일품대승이라는 직책을 내려 묘를 돌보게 하였다. 1868년에는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고 나서 대원군과 통상 문제를 흥정하고자 남연군묘의 시체와 부장품을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쳐 대원군이 쇄국정책강화와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인 남연군의 묘는 높은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물과 비석이 서 있다. 주차장에서 마을 길을 따라 5분여 정도 걷다 보면 남연군의 묘가 보인다. 마을 길을 따라 걸을 때만 해도 그냥 조용한 시골마을 정도로만 여겨졌는데, 묘가 있는 언덕에 올라서니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천하의 명당이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짧은 순간이지만 바람도 멈춘 듯 주위가 고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딱 잘라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굳이 글로 표현하자면 `포근함`이었다. 이곳을 찾기 전에 답사지도위원께서 “남연군묘에 가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그곳이 명당인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말 그대로였다. 풍수에 대해서는 `배산임수`를 들어 본 것이 고작이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알 수 없는 포근함이 이곳이 명당임을 느끼게 하였다. 시야가 확 트인 묘의 전면에는 좌·우에서 내려온 산의 줄기가 맞다은 듯 이어지고, 후방과 좌·우에는 높고 낮은 산이 인근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남연군묘의 이장과 고종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가 세상에 전해지면서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한바탕 명당 찾기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지금도 유적 답사를 다니다 보면 명산의 사찰 주변에 무덤이 많고 특히 탑이 있었던 자리에 무덤이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때부터 유행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대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부모의 묘를 이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이인제 의원 등 수많은 대권 도전자와 대권에 뜻을 둔 정치인들이 조상의 묘를 소위 명당으로 이장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09-07-03

윤희정 기자가 만난 여성들 (72) 김인순 포항차인회장

茶 한잔 마시며 찻잔 속 여유를 담다 26년간 다도교실 운영… 2천여명 제자들 배출포항여성차문화축제 10회째 열며 우리차 홍보 김인순(79·포항시 북구 중앙동 59번지·사진) 포항차인회장은 경북도내 최고령 다도인이다. 경남 김해가 고향인 그녀는 남편과 결혼후 포항에 정착하면서 올해로 26년째 다도 인생을 살고 있다. 경기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그녀는 지난 1983년 1월 (사)한국차인연합회에 입회해 (사)한국차인연합회포항차인회를 직접 설립했다. 1994년 7월 한국다도대학원 교수 자격증을 취득하던 그해부터 한국차인연합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1974년경에 일본의 지인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동경에 가게 됐다. 그 집이 바로 일본에서도 이름있는 表千家(오모데센게)의 교수집이다. “생전에 보지도 못한 차(茶)를 대접 받고 당혹스러움을 본 다도교수님이 한국에도 茶가 있느냐 하고 묻는데 나는 그 순간 입이 딱 다물어졌어요. 과연 우리나라는 차가 숭늉인가?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쥬스, 사이다인지, 아니면 커피일까?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며 대답을 할 수가 없었지요. 이 순간이 계기가 되어 한국에 돌아와서 백방으로 우리 차 알기에 앞장섰으며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교수분이 2007년 포항시청 개항 기념 때 한일다도 교류하신 교수님 이시지요.” 그녀는 다도가 주는 보람으로 단연 `여유로움`을 꼽았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취미라고 귀띔했다. “우리는 무한경쟁 속에 살고 있어요. 학교 들어가서부터 계속 남보다 한 점이라도 앞서야 했으며, 사회에서도 모든 면에 심사기관이 있어 대상이다 은상이다 하며 또한 겨누며 마음 다치게 합니다. 그러나 다도(茶道)란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다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지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내면과의 부단한 싸움, 자기를 이기면 성공하는 것 입니다. 다도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철저하게 상대방을 배려함이 스며 있으며, 차 생활에는 예절이 덧붙여 가게 돼 있습니다. 예절이 플러스 돼 있다는 것이 가장 좋은 점이라 할 수 있지요.” 26년간을 쉬지않고 다도 교실을 운영해 오면서 하나의 조직이 자연이 생기게 되니 많은 사람을 소리 없이 하나같이 한결같이 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 만은 아닌 것. 그녀는 바쁘게 살며 마음의 여유가 없는 현대인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것은 차 생활이라며 사람으로 하여금 예의롭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차 한 잔 마시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 짧은 시간에 몸에 배고 습관이 되어서 차츰 자기의 마음속에 향유하는 시간과 공간이 한 없이 넓어진다면, 자기의 인생을 멋지게 설계하는 항목이 생길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을 놓아보기도 하고, 삶의 갈증난 목을 적셔보기도 하는 마음의 여유, 이것이 정신적인 건강이 됩니다.” 그녀는 최근 포항시민에게 있어 최고의 영예인 포항시민상을 수상했다. 포항시승격 60주년 뜻깊은 행사날에 수상하게 돼 그 기쁨이 배가 됐다고 했다. “차! 하면 보통사람들 생각에도 굴러다니는 차로 생각하는 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굴러다니는 차가 아니고 기호음료인 마시는 차로 인식하게 되어 무엇보다 기쁩니다. 말하자면 차의 위상이 이 만큼 높아졌으며 많은 사람이 차를 즐겨 찾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 시민상은 비단 본인에게 준 것이 아니며 차를 사랑하는 차인들에게 주신 큰상이라 믿습니다. 그동안 차를 찾는 곳이라면 앞뒤 돌아보지 않고 경제적인 문제 등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으며 무조건 홀린 듯이 쫓아가서 찻자리를 폈던 것입니다. 그 회수, 그 많은 시간 등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요.” 그녀는 여성들을 위한 `포항시 여성차문화대축제`를 올해 10회째 열고 있다. “차가 무언지도 모르는 20여년전부터 우리차를 알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포항 덕수공원에서 먼저 충헌탑에 헌다를 시작으로 또한 반공비에도 동시에 헌다를 했으며, 두리차회를 하면서 찾아오는 시민들에게 차를 음미하게 했으며, 가을에는 송라 보경사에 10월 3째주 일요일에 등산객들에게 무료 차 봉사를 지금까지 하면서 우리차를 알리는데 앞장서 왔습니다. 처음에는 무료 시음회라고 하니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공짜 뒤에 무엇인가 대가를 바라는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했으나 진정한 뜻을 알았기에 돌아가는 길의 등산객들의 호응은 너무도 좋았지요. 이때는 떡에도 차를 넣고 하여 가마니로 해서 가지고 갔었습니다. 엄마 따라 온 아이들의 저 떡 좀 얻어달라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그녀에겐 2천여명의 제자들이 있다. 포항시 북구 신흥동에 위치한 청정다례원은 포항다도인 배출의 산실이랄 수 있다. “청정다례원에 들어오면 본원에 들어오면 한국, 중국, 일본 세나라의 차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문생들이 직접 중국이나 일본에 가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전체에도 이와 같은 공간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초부터 차 생활과 우리나라 전통예절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공간입니다.” 다도는 여성들이 주로 하고 번거롭다는 편견에 대해 그녀는 우리나라는 원래 선비들이 차 생활을 많이 했으나 최근에는 남성들은 직장관계로 여성들이 많은 편이다. 가정에서 차 생활은 자녀들과의 대화의 시간, 차를 마시면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다도예절이야 말로 최상의 웰빙이라는 것. “웰빙이란 최상의 몸과 마음을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생각이 나옵니다. 사실입니다. 다도예절이야말로 웰빙입니다.” 여름에 어울리는 우리차를 물으니 “여름에는 차를 우려서 유리다관 등에 넣어두고 시원하게 마시라”고 추천한다. “차라고 해서 무조건 뜨거운 것을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냉차를 해서 마시는 것 또한 최상이다. 특히 여름에는 연화차나 오미자차에 얼음을 넣어서 시원하게 마시는 것도 좋습니다.” 그녀는 우리차를 최고의 차로 꼽는다. “우리나라의 차는 최고의 찻잎으로 만든 것이며, 우리 한국 사람의 입맛에 어울리게 덖어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일본차는 증기로 찌는데 그래서 증제차라고 하는데 색은 아름답습니다.일본은 색성민족이라고 합니다. 색상을 중요시하기에 증기로 찌는 것이지요. 이 차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시기에는 느끼하고 미원 같은 조미료를 넣은 듯한 맛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40여년을 다도예절을 가르치는 사범으로 다도인으로 살며 여성계의 큰언니로 존경받고 있는 그녀. 잘사는 것은 무엇으로 생각할까. “사람이 뒤돌아보면 잘 산다, 잘 살았다는 것은 후회 없는 인생살이가 될 것입니다. 정말 정갈하고 질서있게, 검소하고 덕망스럽게 산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연세가 많으신데 강의하랴 시범보이랴 힘들지 않는지 물었다. “다도가 끝이 있나요? 나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할 겁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09-07-03

독도 지키기 선봉 나선 최상식 독도평화호 선장

“전 국민이 부여한 임무 사명감 다해 수행” 20만t급 상선·썬플라워호 선장 역임한 베테랑 항해사“선박 운항한지 27년만에 가장 큰 보람… 책임감 느껴” 국민의 염원을 담고 독도 지키기에 나선 독도평화호. 독도 영토를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하는 선박이다. 독도 평화호가 최근 취항식을 하고 독도 지키기의 최선봉에 나섰다. 역사적인 현장의 중심에 서 있는 최상식(49)독도평화호 선장.-독도평화호 초대 선장이 된 소감은.▲대학을 졸업하고 지난 82년부터 20만t급 무역선과 지난 91년부터 2천t급 여객선 선장을 하다가 작은 선박에 선장으로 승선했지만 이 세계에서 가장 큰 선박의 선장이라는 자부심을 느낀다.독도를 지키고 가꾸는 역사적인 현장에 선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고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낀다. 선박을 운항한지 27년 만에 가장 큰 배를 운전한다고 생각하며 가장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독도평화호선장을 지원한 동기는. ▲ 올 초 독도관리선 건조와 직원 책용 소식을 듣고 공직 생활에 대한 동경과 독도관리라는 역사적인 사명을 경험하는 것도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18년 동안 조선한 경험과 노하우로 독도를 가꾸고 지키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선박운항 경력은.▲ 지난 82년 목포해양대학 졸업과 동시 무역선에 승선 수출의 역군으로 9년간 세계 각국을 누볐다. 지난 91년 5월 (주)대아고속에 입사해 지난 94년 우리나라 최연소(34) 여객선 선장으로 목호에서 울릉도를 왕복한 대원카타마란호을 몰았다. 이후 씨플라워호, 오션플라워호, 한겨레호 선장 등 울릉도 여객선만 18년을 운전했다. -독도평화호가 다른 선박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독도평화호는 알루미늄 선체로 일반 선박과는 달리 스크루와 키가 없는 물 분사 추진방식의 특수한 선박이다.따라서 일반 선박을 운전하던 선장들은 조선을 하기 힘들다. 저는 18년동안 물 분사 방식의 선박을 조선한 경험이 있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물분사 선박을 조선했던 풍부한 경험이 있다. 또한 이 선박이 정선해 있을 때 선박이 움직이지 않도록 자동적으로 움직임을 조정해주는 장치가 부착돼 있는 것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각오가 있다면.▲독도평화호는 영토를 수호하고 보존하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국민적으로 독도사랑운동이 전개되고 있고 독도수호의 최일선에 저희 독도평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해 독도평화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게을리 하지는 않겠다. 또한 지금 주어진 독도평화호의 선장의 임무는 전 국민이 나에게 부여한 임무로 생각한다. /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09-07-02

전국 여자천하장사 씨름대회 4강 신은현 씨

“전국대회 여자부 통합장사가 목표” “여성 씨름인구 크게 늘면서 기량 날로 발전”“방어기술 등 훈련으로 정상 꼭 제패하겠다” 제1회 국민생활체육 전국 여자천하장사 씨름대회가 지난달 28일 전남 구례체육관에서 막을 내렸다.전국 씨름왕(1997년) 출신 신은현(38)씨는 초대 여자천하장사에 등극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갖고 경북대표로 대회에 참가했으나 준결승전에서 2판을 모두 비긴뒤 계체패를 하며 아깝게 결승진출에 실패했다.신은현씨를 어렵게 꺾고 결승에 오른 임수정(25·부산)은 초대 여자천하장사에 올라 안타까움이 더했다. 97년 김종호(42·포항시 남구 대잠동)씨와 결혼하면서 씨름을 그만뒀다가 다시 샅바를 잡은 가현(10·대이초 3년), 채언(7) 두딸의 엄마인 신은현씨를 만나 소감과 각오, 앞으로의 목표 등에 대해 들어봤다.-아깝게 결승진출에 실패했다. 대회 출전 소감은.▲옛날 실력만 믿고 훈련을 많이 하지 못한채 출전해보니 자세도 잡히지 않는등 부족한 점이 많았다. 또한 여성 씨름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실력이나 힘, 기량등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월(?)이 흐른만큼 젊은 선수들을 이기려면 처음부터 다시한다는 마음으로 훈련해야 할 것 같다.-오랜만에 다시 샅바를 잡았는데 앞으로의 목표는.▲당연히 여자천하장사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우선 당장 오는 10월에 있을 전국대회 여자부 통합장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수 있는 여건이 안돼 안타깝다. 남은기간 열심히 훈련해 다시한번 정상에 서고 싶다.-여자 천하장사에 오르기 위한 라이벌을 꼽는다면.▲여자씨름은 남자들과 달리 변수가 많다. 그만큼 기량이나 씨름에 대한 이해도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대회에 출전하는 모든 선수가 라이벌이다. 굳이 꼽는다면 임수정, 임혜미, 정은미, 박미정등이 정상의 기량을 갖춘 선수인 것 같다.-씨름을 그만뒀다가 다시 시작한 계기는.▲지난 1997년 해태유업 선수시절 전국씨름왕에 올랐다. 당시 전국씨름왕에 오른 선수는 대회에 출전할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고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됐다. 이후 2004년 규정이 풀리면서 다시 샅바를 잡았으나 아이들 때문에 훈련은 하지 못한채 가끔씩 대회에 출전해 왔다.-자신의 장점과 보완해야 할 점은 뭐라고 생각하나.▲씨름은 중심이동이 중요한 운동으로서 용인대시절 기본기를 철저하게 배운만큼 자세가 좋다고 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연함도 부족하고 균형감각이 많이 떨어졌다. 또한 상대 선수가 배지기나 밧다리기술을 걸어올때 방어기술이나 되치기 기술등이 부족하다.-가정일과 훈련을 병행하려면 힘들텐데 앞으로 각오는.▲태권도장을 운영하는 남편이 많이 이해하고 도와준다. 남편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그동안 도와준 남편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여자 천하장사에 오르고 싶다. 또한 사랑하는 두 딸에게도 자랑스런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권종락기자 kwonjr@kbmaeil.com

2009-07-01

정애원 봉사활동을 마치고

조 은 지 영일고 225일 토요일 아침, 두 번째 봉사활동을 가는 2학년 반들이 모두 입지관 앞에 모여 앉았다.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자랑스러운 영일고등학교의 이름이 새겨진 봉사 유니폼을 입고 씩씩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한 소대의 정예부대를 보는 것 같아 왠지 웃기면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번에 우리 반은 정애원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이번이 정애원에 세 번째로 가는 것이라서 그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다가 드디어 정애원이 위치한 산 아래 논길로 접어들었다. 늘 그랬듯이 논길이 너무 좁아서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버스가 논으로 빠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 앞 쪽의 길목에 차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논일을 하다 점심을 드시며 쉬고 계시던 할머니, 할아버지셨다. 버스가 지나가기 위해선 점심상을 치우고 모두가 비켜서야 하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할아버지 한 분께서 버스 쪽을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내셨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당황하시며 얼른 차에서 내리셨고, 할아버지께선 마치 담임선생님을 한 대 칠 기세로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담임선생님께서 진땀을 흘리며 할아버지께 연신 사과를 드리고 할머니께서도 할아버지를 말리셨지만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버스기사 아저씨께서도 차에서 내리셨다. 그렇게 한참동안 실랑이하다 결국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길을 비켜주셨다. 버스기사 아저씨 말씀이 근처 논 주인들은 논 근처에 정애원이 세워지고, 가뜩이나 좁은 길에 봉사다 뭐다 해서 차가 많이 다니는 것을 못마땅해 하신단다. 그래서 정애원 봉사 초반에 근처 논 주인들이 아예 고의적으로 길을 막기도 했을 정도로 말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정애원에 도착했다. 맑은 공기에 가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날씨도 쨍쨍하여 봉사하기에 기분 좋은 날씨였다. 우리는 건물 앞에 쭉 줄을 서서 정애원 봉사자 분께 인사를 드리고 각자 봉사구역을 배치 받았다. 나는 2층에 배치되었다. 계단을 올라가자 많은 할머니 분들께서 계셨다. 먼저 인사를 드리고 네 사람씩 방 하나를 맡았다. 우선 깨끗이 청소를 하기 위해 걸레를 빨고 방을 닦으려는데 매일 청소를 해서 그런지 먼지도 별로 없고 내 방보다 훨씬 깨끗했다. 그래도 일단은 꼼꼼히 방바닥을 걸레로 훔치고 있는데 할머니들께서 우리들을 보고 미안해하시며 그냥 대충해라고 말씀하셨다. 또 우리들에게 밥은 먹었냐며 힘들진 않느냐며 계속 걱정을 해주셨다. 가슴이 정말 따뜻해졌다. 봉사를 하러 온 것이지만 내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에 힘을 얻고 더욱더 열심히 봉사를 하기 위해 애썼다. 방바닥을 다 닦고 다시 걸레를 빨아 넌 후, 이번에는 이불을 털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온 방의 이불을 다 밖으로 가지고 나와 온 힘을 다해 이불을 털었다. 이불에서 날리는 먼지들이 햇빛에 비쳐보였다. 정말 안 털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먼지가 많았다. 빨랫줄이 있다면 햇볕에 뽀송뽀송하게 말리고도 싶었지만 그냥 잠시 동안이나마 햇볕을 쬐여주는 데에 만족해야만했다. 드디어 다 턴 이불을 들고 다시 방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어느 방에 어느 이불이 있었는지가 잘 생각이 안 났다. 들고 나갈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간 탓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정확히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자원 봉사자 선생님께 여쭤보아 겨우 이불을 원래 자리에 개어놓을 수 있었다. 봉사란 이런 사소한 일에도 섬세함과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고 내 자신에 대해 반성했다.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다. 할머니들께서는 식사를 하러 가시고 우리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러 밖으로 나갔다. 시원해 보이는 정자에는 등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그 옆으로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있었다. 어젯밤 내린 비를 머금은 것 같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정말 예쁜 풍경이었다. 여름에 클럽활동 부서에서 정애원에 캠프를 온다고 하던데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2009-07-01

정부, PSI 전면 참여 선언

북한의 제2차 핵실험에 대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강력한 제재안을 준비 중인 가운데, 우리 정부는 26일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를 선언했다.-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이란?대량살상무기(WMD)와 그 운반 수단을 차단해 WMD 확산을 막자는 일종의 국제 협력체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앞으로 우리 영해나 영공에서 WMD 운반이 의심되는 선박과 항공기를 세우거나 착륙시켜 검색을 할 수 있다. 한국의 이날 선언으로 PSI 참여국은 모두 95개국으로 늘어났다.-우리 정부, 전면 참여 선언 왜?WMD 확산을 막겠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PSI 가입 요구에 대해, 자칫 남·북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전면 참여를 미뤄왔다. 이처럼 계속된 PSI 참여 연기가 국제사회에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이번 결정의 계기가 됐다.-북한의 핵무장 수준은?2차 핵실험으로 드러난 북한 핵무기의 위력은 지난 2006년 1차 실험 때보다 최대 20배 이상 강력해진 TNT 폭약 2만t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투하된 것이 1만5천t, 나가사키에 투하된 것이 2만2천t가량의 위력을 가졌었다. 핵무기를 실어 날릴 수 있는 미사일 제작에 있어선, 스커드(사정거리 300~500km)나 노동(사정거리 1천300km) 미사일 장착 핵탄두 개발은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북한의 핵실험 의도는?단순히 미국과의 `협상용 카드`가 아니라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체제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이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를 공격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핵무기 보유가 미국의 공격에 맞서 체제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군사적 입지가 점점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1. PSI란 무엇인가요?2. 현재 PSI 참여국은 몇 개국인가요?3. 우리 정부는 PSI 전면 참여를 왜 하게 되었나요?4. 북한의 핵실험 의도가 무엇인지 기사에서 찾아보세요.

2009-07-01

창의력 계발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상관계수가 높게 나타난다. 미네소타 대학 심리학과 토마스 보우차드 교수가 1981년 일란성 쌍둥이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에 의하면 함께 자란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아이큐 점수에 대한 가중 평균 상관계수가 0.86으로 나타났고, 따로 자란 일란성 쌍둥이는 0.72, 함께 자란 이란성 쌍둥이는 0.50으로 나타났다. 같은 환경에서 자라게 되면 일란성 쌍생아는 지능면에서 86%가량 같게 된다. 이 일란성 쌍둥이를 대상으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한 아이에게는 걷기 전에 수영을 먼저 가르치고, 또 한 아이는 보통 아이들처럼 걷기를 가르쳤다. 시간이 지난 후 비교해 보니 수영을 먼저 가르친 아이는 걷기를 어려워했고, 걷기를 먼저 가르친 아이는 수영을 어려워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아이의 입장에서 어렵고 쉽다는 기준은 어느 것을 먼저 배우고 나중 배우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람이 영어를 어려워하는 것은 우리말 보다 나중 배우기 때문이지 영어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우느냐가 아니라 시기인 것이다. 다중지능 이론을 소개한 미국의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아이들은 지적 능력의 발전 속도가 빠르고 잠재력이 크기 때문에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하여 어린 시절에 적절한 지적 자극을 줄 것을 강조하였다. 가드너는 지적 능력의 구성 요소를 주의집중력, 관찰력, 기억력, 사고력, 상상력으로 생각하였다. 이들 요소는 서로 관련성이 있으며 상호작용이 잘 이루어질 때 잠재력이 극대화 된다. 창의성과 관련이 깊은 관찰력, 사고력, 상상력 등은 어릴 때 적절한 자극을 주고 체계적인 교육을 하면 그 능력을 극대화 할 수 있다. 관찰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평소에 민감성 훈련을 충분히 하는 것이 좋다. 민감성 훈련은 오감을 자극하는 훈련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있는 것을 소재로 삼아 훈련을 진행하면 교육이라는 생각 보다는 생활로 받아들이게 된다. 민감성 훈련을 쉽게 할 수 있는 예를 들면, 음식을 할 때 보지 않고 냄새로 무엇인지 알아맞히기 게임을 한다.(후각) 눈을 가린 후 가족의 손을 만져보고 누구인지 알아내게 한다.(촉각) 가족의 옷차림이 어제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게 한다.(시각) 요리를 맛보고 나서 어떤 재료들이 들어갔는지 알아보게 한다.(미각)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나무젓가락으로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후 어떤 물건에서 나는 소리인지 알아보게 한다.(청각) 이러한 오감 훈련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여 그 특징을 알아내게 하면 무엇이든지 예사롭게 보지 않을 것이다. 사고력을 키워주려면 평소에 부모가 질문을 잘 해야 한다. 질문은 비판적 사고, 논리적 사고, 창의적 사고를 키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녀가 무슨 말을 하면 `과연 그럴까?`라고 되물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어떤 사실에 대해 한 번 더 확인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습관을 가지게 한다. 논리적 사고를 키워주려면 `왜 그럴까?`라고 물어서 이유와 근거를 찾아 말하도록 한다. 창의적 사고를 키워주려면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을 것 같은 답`을 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답이 하나 밖에 없는 질문(정답형 질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답이 있는 확산적 질문(해답형 질문)을 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자녀도 이러한 수준의 질문을 많이 하도록 훈련하면 창의력 계발에 도움이 된다. 상상력을 키워주려면 평소에 책을 많이 읽도록 한다. 특히 그림이 많은 책을 읽다가 그림이 적은 책을 읽고 장면을 생각하도록 하며, 각 장면에 어울리게 이야기를 꾸며 보도록 하면 좋다. 또 이야기의 중간이나 결론 부분을 자기 나름대로 꾸며서 이야기를 해 보게 한다. 또 `만약에~`를 넣어서 생각하게 하면 상상력 자극에 많은 도움이 된다. “만약에 네가 엄마라면 어떻게 하겠니?” “네가 만약 코끼리라면 좋은 점과 불편한 점이 무엇이겠니?” 이와 같이 성장 시기에 맞게 적당한 활동과 질문을 의도적으로 해 주면 자녀의 창의력은 쑥쑥 자라게 된다. Create yourself!

2009-07-01

예순일곱번째 안부 - 봄이, 짱이, 소낙비

봄이는 화실로 출근합니다. 짤막한 다리로 힘겹게 3층 계단 끙끙 올라 그림 그리는 엄마 곁에서 납작한 코, 동그란 눈으로 종일 맴돌지요. 음악을 들으며 콜콜 잠을 자는 게 대부분이지만 간식 생각이 나면 킁킁 조르기도 하고 위층 체육관에서 아이들 포도 알처럼 쏟아지면 유리문 앞으로 가서 물끄러미 내다보기도 합니다. 봄아~ 지나는 길에 문 밀고 들어서면 어찌나 반가워하는지요. 겅중겅중 뛰고 뱅뱅 돌고 머리라도 쓰다듬을라치면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눈빛을 줍니다. 짱이는 회사에 출근합니다. 큰딸이 낳은 아이를 봐주느라 아내가 서울로 간 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있을 짱이가 걱정되어 데리고 출근하는 아빠, 간식과 사료 그리고 담요까지 꼼꼼하게 챙긴 배낭 속 빵빵 합니다. 그 녀석 물기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면 사장님 체면이고 뭐고 짱이 보다 소중한 건 없습니다. 일가친척 없는 곳에서 젊은 날을 다 소진하며 기업주로 산 세월 컸다고 훌쩍 떠나 저 살기 바쁜 자식들이 서운할 때 마다 정 붙이고 맘 나눈 게 짱이였기 때문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짱이가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라고 장난처럼 말하면 무슨 소리냐고 얘처럼 예쁜 애가 어디 있냐고 펄쩍 뛰는 짱이 아빠 보는 마음 간혹 짠할 때가 있답니다. 그게 뭔지 아니까요. 우리 소낙비는 바닷가 마을에 삽니다. 제가 베란다에 앉아 신문을 보면 주둥이를 쭈욱 깔고 곁에 자리를 잡구요.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다 `소낙비야, 오늘 바람 참 좋재?` 하면 눈 지그시 감고 까만 코 발름거리며 `그렇네요` 바람 냄새 맡지요. 태어난 지 40일이 되어 와서 12년 훌쩍 넘는 세월을 살았으니 제가 하는 말, 눈빛, 마음까지 죄다 읽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얼굴로 말입니다. 이젠 녀석도 늙어 예전처럼 뛰노는 일은 줄었지만 글 쓴다고 앉은 늦은 밤이나 어쩌다 홀로 마시는 술상 앞에는 여전히 눈 맞추고 소낙비가 있네요. 봄이 엄마, 짱이 아빠, 그리고 소낙비 엄마는 압니다. 통하는 말 때문에 통하는 글 때문에 막혀버린 세상에서 아무것도 통하는 게 없어 최선을 다하는 녀석들. 그 맑은 눈망울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깊은 소통이고 울림인지를.

2009-06-30

김용창 11대 구미상공회의소 회장

“구미경제 규모 걸맞게 기업 참여도 확대”회원사 권익신장 앞장 직접적 혜택 창조“발전기획단 발족… 자생력 키워나갈 터”구미공단 1단지에 소재하고 있는 (주)신창메디칼 대표 김용창(57)씨가 제11대 구미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됐다. 김 회장은 지난 25일 열린 구미상의 회장 투표에서 19표를 얻어 18표를 얻은 류한규 후보를 1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오는 7월 8일 구미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 3년간 구미경제계를 새롭게 이끌어갈 김 회장을 만나 이모저모를 들어봤다. -상의 회장에 출마하게 된 동기는.▲수도권 규제완화 등으로 지방은 어려움에 처해있는 것이 현실이다.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업하기 좋은 도시, 교육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상공인 여러분들과 일조하기 위해 출마하게 됐다.또한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에 변화의 바람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인 사명이며, 상공회의소의 위상도 거기에 걸맞게 많은 변화를 추구해야 할시기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변화에 대응하고자 출마를 결심하게 됐다. -앞으로 구미상의를 이끌어 나갈 계획은. ▲50만도시에 걸맞게 구미상의도 많은 변화와 혁신을 추구할 계획이다.먼저 회원사 권익신장에 앞장설 것이다. 이를 위해 회원사가 요구하는 필요사항을 파악해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회원사가 회비납부에 대한 보람과 긍지를 갖도록 하겠다.구미경제의 규모에 맞게 상공의원 수를 증원해 기업의 참여도를 확대해 나가겠다. 회장단과 회원들이 함께 걱정하고 토론하는 등 구미상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화합의 장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구미상의 비전은. ▲앞으로 구미상의는 지역경제계의 중심지로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고민하며, 문제를 명쾌하게 풀려는 자세로 임하겠다.그리고 오는 2011년 상공회의소 임의가입에 대비해 자생력을 키울 수 있도록 구미상의 발전기획단을 발족시켜 여러가지 현안들을 해결해 나갈 계획이다. -지역경제계의 수장으로서 한 말씀. ▲앞으로 구미상의는 작은 목소리도 크게 들어 모두가 참여하는 화합의 장을 만들어 나가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따라서 회원사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구미가 `기업하기 좋은 도시, 교육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하고 앞장서겠다. 많은 조언을 부탁드린다./이승호기자 shlee@kbmaeil.com▶▶ 프로필△구미 출신, 1952년 4월14일생 △1968년 구미시 해평중학교, 1971년 대구 농림고등학교 졸업, 2008년 경운대학교 의료경영학과 졸업, 2009년 안동대학교 경영대학원 재학 중 △1999년 구미시 이업종교류회 회장, 2001년 구미 국가산업단지 중소기업협의회 초대, 2대, 3대 회장 역임, 2006년 구미 국가산업단지 초대 경영자협의회장 역임, 2006년 구미상공회의소 부회장 역임, 2008년 구미국제친선교류협회장 현임,

2009-06-30

적자기업 흑자 전환시키는 `마이더스의 손`

`적자기업 구원투수`, `소방수 CEO`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경북 김천출신의 배영호 코오롱 사장이다. 우연찮게도 적자기업만을 맡아 흑자기업으로 바꿔놓은 이력때문이다. 적자에 허덕이던 코오롱제약을 살려냈고, 코오롱유화의 성장기반을 닦아놓은 게 바로 그다. 강성노조로 소문난 구미 코오롱 노조를 보듬어 지난 2007년 `항구적 무파업선언`까지 이끌어낸 후 영업이익도 지난해에 비해 두배 가까이 불렸다. 글로벌 경기침체속에 코오롱을 고부가가치 기업으로 변모시킨 배영호 사장의 어린시절 추억들과 경영자로서의 성공비결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고향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비록 태어나기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부친 고향이 김천시 조마면이어서 김천출신이라고 해야겠죠. 학교는 부산 초량초등학교를 다니다 김천으로 전학해 서부초등학교와 김천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죠. 어릴 때 추억이라면 이사만 열 번 정도 다닐 정도로 집안사정이 어려웠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세끼 밥 잘먹는 게 꿈이었죠. 소풍때는 부추김치만 싸갔을 정도였습니다. -대학때 섬유공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한창 공부해야할 고등학교 3학년때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입주 가정교사 생활을 해야했습니다. 당시 가르치던 아이가 제일모직 공장장집이었어요. 매일 빚쟁이들이 집에 찾아와 빚독촉하던 일이 다반사였던 제 입장에서 `나는 앞으로 사업은 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한 데다, 그 집의 생활이 매우 윤택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섬유쪽이 취직도 잘 되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섬유공학을 전공하게 됐죠. -입사후 임원만 21년, CEO경력도 11년째에다 `적자기업 구원투수`란 별명을 얻었는 데, 어떤 뜻입니까. ▲워낙 상태가 안좋은 사업을 자꾸 맡다보니 제가 기업인이라기 보다 의사라는 마음이 들 때가 많았을 정도입니다. 가장 먼저 미국 뉴욕지사 근무후 1981년 귀국해 타이어코드 사업부장을 맡았는 데, 가동률이 40%도 안돼 존폐기로에 서있었습니다. 이유를 살펴보니 거래선이 금호타이어에 의존하고 있어 그 회사가 파업하면 조업이 중단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최고의 타이어회사인 미국의 굿이어사에 납품할 수 있도록 1년여 노력끝에 판로를 뚫었습니다. 그 결과 적자에서 흑자로 돌릴 수 있었죠. 1998년에는 코오롱 제약겸 코오롱 유화 사장으로 발령났는 데, 코오롱 제약은 부도직전이었습니다. 저는 부임하자 마자 300여명의 전 직원에게 1인당 100만원의 격려금을 지급했습니다. 직원 사기부터 올려놓고, 발로 뛰는 영업망을 점검해야겠다는 `역발상`을 했는 데, 이게 먹혀들었죠. 1년여만에 흑자로 돌려놨습니다. 코오롱유화 역시 재임기간동안 매출이 두배이상 늘었고, 수익구조가 개선돼 이제는 알짜배기 회사가 됐습니다. 코오롱 사장에 취임한 뒤에는 노조문제를 해결했고, 이어 구조조정과 경영혁신을 통해 지난 1.4분기 매출액 4천311억원, 영업이익 405억원으로 지난 해 동기에 비해 영업이익이 두배가까이 불었습니다. 이런 성과가 그런 별명의 유래가 된 셈입니다. -강성노조로 유명한 코오롱 노조를 노사화합의 모델로 탈바꿈시켰는 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코오롱 사장으로 취임할 때는 구미 코오롱 노조와의 갈등때문에 회사 존립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최우선으로 노조문제를 해결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혁신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데 동의가 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해 취임식을 며칠 앞당겨 치른후 신년을 맞았는 데, 모 일간지 신년특집기사 2면에 GM대우 관련 기사가 난 걸 보게됐습니다. 영국인인 닉 라일리 GM대우사장이 신년 1월1일 인천 앞바다에서 노사상생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사진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두가지를 느꼈습니다. 먼저 인천 대우노조가 노조운동이 제일 심했던 곳인 데, 이런 회사도 노사화합을 이루는 데,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 하나고, 둘째로 외국사람도 노사문제를 잘 해결하는 데, 같은 문화에 같은 민족인 내가 해결못할 일이 없다고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도 자신감만으로 해결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데, 비결이 있었습니까. ▲저는 사원들에게 회사, 즉 CEO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습니다. 저를 믿고 따르면 회사도 발전하고, 사원들에게도 성과급이 돌아올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구미공장장으로 3년을 근무했던 인연이 도움이 됐습니다. 또 그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3가지를 지시했습니다. 먼저 경산공장에 사장전용 승용차가 있었는 데, 자주 쓰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승용차를 매각토록 지시했습니다. 또 사장이 쓸 수 있는 골프멤버쉽카드도 1개만 남겨놓고 모두 팔도록 했습니다. 비서도 2명에서 1명으로 줄였습니다. 이런 작은 것들부터 솔선수범한다는 자세로 처리했습니다. 또 사원들에 대해 신뢰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전 사원 2천명에게 100만원씩 20억원을 들여 격려금을 지급했습니다. 이 돈으로 개인부채를 정리하고 같이 열심히 일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흔히 일 잘하면 돈을 많이 주겠다고 하지만, 저는 먼저 돈을 주면서 일 잘할 것으로 믿는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래도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 데요. ▲코오롱은 임금동결을 3년간 했습니다. 월급을 올리게 되면 회사가 어려워 정리해고를 하게 되니까 오히려 동결해서 성과를 올린 뒤에 성과급을 주겠다고 설득을 했습니다. 성과급을 주면 결국 연봉개념으로 보면 봉급이 오른 것과 같은 효과가 납니다. 그러나 노사간 신뢰가 없어서 대부분 노조가 받아들이지 못하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노조는 받아줬습니다. 저와 회사를 믿어 준 것입니다. 제가 코오롱 유화나 코오롱 제약 사장을 맡아서 적자기업을 흑자기업으로 만들어낸 `마이더스의 손`이란 평판을 받고 있었던 것도 신뢰의 기반이 된 게 사실입니다. -최근에는 아예 노조가 영업까지 나서서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일명 `노사부부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회사 사장은 남편이고, 노조는 부인이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바깥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고, 부인은 집안살림을 아껴쓰고 해야 그 집이 잘된다는 논리죠. 더 잘되는 집은 부인도 밖에 나가서 돈벌어오는 집이 있잖아요.(웃음) 그래서 노조위원장이 거래선에 가서 영업을 하기도 합니다. 대구 상신브레이크도 코오롱의 납품업체인 데, 노조위원장이 직접 가서 “책임지고 좋은 품질의 물건을 제때 납품하겠다”고 영업활동을 펼쳐 화제가 됐죠. 요즘은 노조에서 저보고 자주 공장에 내려오지 말고, 돈많이 벌어서 성과급을 많이 달라고 합니다. 노조위원장이 원가절감팀장을 맡아 뛰고 있고요. 이제 신뢰의 기반을 굳힌 이상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경기침체로 어려운 고향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저는 어릴 때 학비가 없어서 시험준비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그런 제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무한불성(無汗不成)`즉, 땀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려움이 생겨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극복해 낼 때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배영호 코오롱 사장은 코오롱 배영호 사장은 1944년 부산에서 출생했으나, 초등학교때 부친의 고향인 김천으로 전학해 서부초등학교, 김천중학교를 거쳐 경북고와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주)코오롱에 입사해 뉴욕지사 근무, 타이어코오드 사업부를 거쳐 1989년 산자사업본부장으로 기업의 별인 이사를 달았다. 이후 구미공장장을 거쳐 1998년 코오롱제약 겸 코오롱유화 사장을 맡아 적자기업을 흑자로 돌려놓았으며, 2006년 (주)코오롱 사장으로 취임해 코오롱 도약의 기수로 뛰고 있다.

2009-06-29

명예퇴직 앞둔 서현수 대구지방국세청장

“국세청, 권위 벗고 국민 섬기는 전통 쌓아야” 찾아가는 세정지원 등 납세자 우대 최선 다해“고향 대구발전에 기여할 새로운 방법 찾겠다”우리나라 주세법의 대가이면서 주류정책학 박사 1호인 서현수 대구지방국세청장이 국세청과의 공식적인 인연을 마치고 새로운 국세청과의 인연과 개인의 또 다른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30일 명예퇴직 한다.주류박사로 불리는 서 청장은 국세청이 권위에서 탈피해 국민을 섬기는 전통을 세워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명예퇴직하는 서 청장을 만나봤다. - 대구·경북에서 국세청장을 하셨는데.▲글로벌 금융위기로 불어닥친 경제위기는 대한민국은 물론 대구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짧은 시간이지만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해 나가는데 국세청과 더불어 대구·경북시도민들과 함께 한 시간이 정말 헛되지 않았다. 대구지방국세청장에 금의환향 한지 꼭 6개월만인 30일 대구청 직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까 한다. 어려운 지역경제회복과 대구청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그동안 정말 수고했고 앞으로 받은 은혜 꼭 돌려 드리겠다.- 정말 어려운 시기에 오셨고 역할을 다하신 것 같은데.▲국세청은 이제 세금 징수가 아니라 기업(납세자)을 도와 지역경제, 나라발전을 시켜주는 중간역할을 해야 하고 권위에서 탈피해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의 전통을 세워나가는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따라서 비상경제상황 세정지원단을 만들어 대구·경북 지역 상공인들과 일일이 만나 기업의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도와주는 데 정말 노력했다.그간 어려운 기업에게 1만5천800여건의 납기연장, 1만6천여건의 징수유예, 238건의 체납처분 유예, 더 낸 세금 찾아주기 6천여건 등 10만여건의 찾아가는 세정지원을 펼치는 등 납세자 우대에 최선을 다했다.- 왜 주류 박사였나.▲경기도에서 근무할 당시 주류총괄업무를 보고 국세청에서 전국적인 주류정책업무를 담담하게 됐다. 따라서 국내 주류산업의 정책과 전략을 접하면서 이론과 학문으로 연계해 공부했다. 이후 주류박람회, 주류 품평회 등의 행사를 펼쳐 명품주 제도 육성과 주류혁명을 이루기도 했다.- 앞으로의 여정은. ▲서울에 있는 세무법인에 근무하면서 대학 강의도 나갈 예정이다.국세청과의 인연으로 맺은 고향의 고마움도 많이 느꼈다. 청장으로서가 아닌 개인으로서 고향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찾겠다. - 좌우명과 가족에 고마움이 있다면▲정말 내조를 잘해준 김종수 마님에게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고 잘 자라준 아들과 딸 자식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좌우명은 서산대사의 `답설`이다.(답설(踏雪)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行(불수호난행)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서인교기자 igseo4302@kbmaeil.com▶▶ 프로필△대구 출신 △영남고 고려대 졸업 △1980년 1월 세무직 7급 공채 △안동세무서장, 국세청 소비세과장, 서울청 조사 2국장

2009-06-29

이정희 위덕대 일어일문학과 교수

정확한 시선으로 일본문학·문화 봐야일본 대학과 교류 위해 `7+1유학제도` 정착시켜“열의·성의 다해 한국 최고 학과로 만들고 싶어” 이정희(49·사진) 위덕대 일어일문학과 교수. 경기도 파주가 고향인 그녀는 1999년 위덕대로 부임해 올해로 11년째 전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8년간 일본 유학생활 후 1998년 2월 귀국해 서울에서 1년간 시간강사 생활 후 1년만에 전임이 됐다. 위덕대에 일문과가 신설되면서 부임해 `일문과 1호 교수` 타이틀도 얻었다. 처음으로 교수가 되자마자 일본인 교수와 그녀밖에 없었으니 학과장을 연이어 3년간 맡기도 했다. “당시는 미혼이었기에 24시간 모두 투자해서 학과 기틀을 마련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지요. 2000년부터 일본 대학과의 교류의 물꼬를 틀기 시작해서 지금은 `7+1유학제도`라고 해서 대학생활 4년(8학기) 중 한 학기는 일본 대학에서 학점을 취득하는 것으로 정착했습니다. 2004년에는 제1회 위덕대 총장배 전국 중고등학생 일본어 스피치 대회를 주최, 개최해 올해로 6회를 맞게 됐습니다. 이 행사는 해를 거듭 할수록 내실 있는 행사로 거듭나 위덕대 일본어학과에서 가장 주요한 행사가 됐습니다.” 그녀는 올해 다시 학과장을 맡게 됐다. 현재 추진 중인 사업은 일본 호텔인턴십 제도를 성사시켜 해외 현장학습 체험을 주기적으로 실시해 해외 취업과 연계시킬 계획에 있다. “우리 위덕대는 앞으로 무한히 성장 가능성이 있는 대학입니다. 올해 개교 13년째를 맞고 있습니다만, 짧은 기간 내에 많은 발전을 했습니다. 경주, 포항, 울산이라는 잠재력 있는 도시와 긴밀하게 연계돼 있어서, 지방대학의 한계를 극복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의 강점은 대학 교수들이 100% 박사에다 젊고, 학생들 교육과 지도에 열의와 성의를 다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현재 위덕대 일본어학과 4학년 학생들 90%정도가 재학 중 `7+1제도`로 6개월 또는 1년 이상의 일본 유학 경험이 있어서 일본어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고, 3학년 학생들은 70% 이상이 일본어능력시험(JLPT) 2급 이상으로 일본어를 잘 한단다. 일본 쓰쿠바대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그녀는 박사논문으로 작가 아베 고보의 문학세계를 분석했다. 아베 고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한국에서는 그녀가 1호이다. 그래서 일본 관련 학회에서는 아베 고보 연구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 현대문학의 기수라 불리는 작가 아베 고보(安部公房)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베 고보를 연구하면서 그의 작품을 번역한 작업이 가장 보람되게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문학치료학 분야를 새롭게 연구할 계획에 있습니다.” 위덕대 일문과 1호 교수, 아베 고보 연구 박사 제1호 등 여러 닉네임이 붙은 그녀는 여성으로, 주부로, 엄마로 바쁘게 살지만 힘들지 않다고 했다. 2002년 그녀 나이 42살에 결혼한 그녀는 그 다음해에 딸을 낳았다. “40이 넘어 엄마가 된 그때 그 감동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답니다. 그 이후로 제 생활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직장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가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일 것입니다. 임신한 직장 여성에 대해서도 의외로 주위의 배려가 없고, 출산 이후 육아 시기의 직장여성에 대한 배려 역시 인색하죠. 요즈음 출산을 장려하는 분위기인데 무엇보다도 먼저 각 직장마다 보육시설이 완비돼 있지 않으면 여전히 직장 여성들이 출산을 꺼려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제 주위에 있는 미혼 여성들에게는 반드시 엄마체험을 하라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그나마 자신의 일에 충실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남편의 이해와 시댁식구들의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숙모가 아이를 돌봐주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이런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경험하면서 인간이 인간으로 더욱 더 성숙해 가는 구나 하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사람과 사물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제가 일본문학, 일본문화를 공부하면서 좋아하게 된 문구가 있습니다. 일본어로 `이치고이치에`라고 하는데, 사람과 사람과의 인연, 나아가 사람과 사물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입니. 다도(茶道) 정신 중의 하나로, 다도에서 함께 차를 마시는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상대방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람, 또는 사물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나아가 좋은 인연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노력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인간관계라 생각합니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게 되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일본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 너무도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제가 일본문학, 일본문화를 연구하는 이유는 정확이 일본을 보자는데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일본의 직업의 귀천이 없는 사회입니다. 무슨 일을 하건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의식이 강합니다. 이것이 일본인의 장인정신이죠.” 늦깍이로 얻은 7살난 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위덕대 영재교육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며 `자랑아닌 자랑을 하는` 그녀. 영재교육 전문가에 의한 수업으로 다양한 지적 자극과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열렬 엄마”이지만 후배 여성들에 대한 마음도 이에 못지 않다. “제 권유(?)로 제 후배들이 40이 넘어서 일본 유학을 결정하고 약 5년 뒤에 박사학위를 취득해 온 후배들이 더러 있습니다. 일본유학을 권한 이유는 물론 미국이나 유럽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일본만 하더라도 남녀 차별이 거의 없는 사회입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인정받고 기쁨을 맛 볼 수 있는 사회죠. 이런 측면에서 여성 후배들에게는 권할 만하죠.” “앞으로의 꿈이라면, 열의와 성의를 대해서 위덕대학교 일본어학과를 한국 최고의 학과로 만들고 싶습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09-06-26

“동서횡단 고속철도 건설사업은 지역화합·국토균형발전의 열쇠”

동서횡단 고속철도 재조명동서횡단 고속철도의 건설 사업은 지난 정부의 제1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서 제외됐다. 철도 건설에 비해 이득이 낮다는 것이 제외의 배경이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의 계획은 포항의 영일만항과 새만금 개발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사업. 따라서 환태평양 물류 기지로서의 포항과 새로운 공업단지로서의 새만금을 연결하는 구간으로의 동서횡단 고속철도를 조명해본다.편집자 주 김천에서 전주에 이르는 97.4km 구간을 이어, 장래에 포항과 새만금을 연결시킨다는 계획인 동서횡단철도 건설에 대한 움직임이 뜨겁다. 더욱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책 화두가 `지역화합`이었다는 측면에서 철도 건설 사업이 탄력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다 부산과 인천에 이은 새로운 물류항구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경북권으로써는 환태평양의 중심 항구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상황. 이와 관련, 동서횡단철도 김천에서 전주구간은 지난 제1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서 타당성이 낮아 추가검토대상사업으로 반영됐었지만, 근래 들어 새만금 지구와 포항의 영일만 신항이 대두되면서 “2010년에 추진중인 제2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 마련시에 교통수요와 지역여건 변화 등을 고려해 타당성을 면밀히 검토 후 법정계획 반영 여부를 재결정한다”는 것이 국토해양부의 설명이다. 실제로 김동선 대진대학교 교수는 “장래수요 예측결과, 여객수요는 2010년에 4천763명(인/일), 2036년에 7천231명(인/일)으로 분석됐으며 화물수요는 2016년에 3천363t(t/일), 2036년에 4천418t(t/일)로 분석되고 있다”며 “정책적 측면과 지역균형발전 측면을 종합해 고려한 결과, 사업의 시행이 타당한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또 “본 과업노선은 경북권과 전북권을 연계함으로써 환황해경제권의 물류수송의 기간망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특히 동서4축 간선철도망 완성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는 중요 노선”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김 교수는 “김천은 동서4축과 더불어 남북3축 간선철도망의 십자형 결절점을 형성하는 집분산지역”이라면서 “이번 사업은 단일철도건설사업의 파급효과를 일정부분 이상 상회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송하진 전주시장 역시 “전주에서 김천 간 철도의 경제성 분석 결과, 단선으로 건설시 B/C(편익/비용) 비율이 0.72로서 비록 경제적 타당성은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물동량과 관광자원이 풍부한 새만금 지역까지 연장 건설한다면 B/C 비율이 크게 향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기대감은 박보생 김천시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박 시장은 “동서횡단 철도의 건설은 ▲국토 균형 발전을 위한 필수 사업 ▲동서화합과 문화교류를 위해서 건설 필요 ▲환황해권, 환동해권 동반 발전 ▲저탄소 녹색 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며 “동서간 인적·물적·문화적 교류 및 동반성장과 동서화합 차원의 광역철도교통망 조기구축과 포항에서 새만금 간 국가철도망 구축 수정계획에 대한 반영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09-06-26

“영호남 잇는 인적·물적교류 통한 녹색성장시대 교통수단으로 각광”

“동서횡단고속철도를 통해 새만금에서 생산된 각종 공산품들이 포항의 영일만항에 집결한다. 대형 컨테이너에 속속 화물이 적재되고, 대형 화물선은 미국을 포함한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의 오세니아 등지로 나갈 준비를 한다.”새로 나온 소설의 첫 머리가 아니다. 오는 2020년 동서횡단고속철도가 완공되면, 현실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번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이철우(경북 김천) 국회의원은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측면과 영남과 호남의 자유로운 소통의 분위기가 가장 큰 매력”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이 의원은 “전북과 경북을 잇는 인적·물적 교류의 네트워크는 지역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며 향후 정부가 추진하는 녹색성장시대의 대표적 교통수단으로 각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남북을 잇는 종단철도 및 도로에 관심을 쏟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 후 동서횡단철도의 의미를 부여한다면.▲지금껏 백두대간으로 가로막혀 소통이 되지 않았던 동과 서가 서로 화합함은 물론이고 인적·물적 그리고 문화적 교류가 원활해져 국토의 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새만금이 개발되면 중국으로의 수출 증대 효과까지 누릴 수 있어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사업이다. 수도권으로만 향해오던 교통망이 영남과 호남을 같이 잇게 해준다면 우리 국토는 그야말로 균형발전을 이루게 되며, 영남과 호남의 자유로운 소통의 분위기가 정착되고 서로의 경쟁력 있는 분야가 활발히 교류한다면 지역감정은 완전 치유될 것이다. -포항의 영일만항과 새만금의 물동량이 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사업의 매력이다. 그 효과는.▲물론 포항의 영일만항과 전북 새만금의 물동량이 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사업의 매력이 맞다.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 평가 받고 있는 것은 바로 대구·경북 경제자유구역에서 포항 영일만으로, 또 전북 새만금으로 이어지는 물류교류가 활성화 될 것이며, 나아가 대구와 김천혁신도시, 전북혁신도시, 군산산업지대 및 새만금 지구를 연결하는 인적·물적 교류의 네트워크가 잘 구축돼 지역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일각에서는 이번 철도가 건설되면, 철도의 가장 큰 목적인 인력수송보다는 화물수송에 주력하는 철도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부정적 견해도 나오고 있는데.▲김천과 전주를 잇는 동서횡단철도의 수요를 예측한 용역결과에 따르면, 사업의 초기개통년도인 2016년에는 1일 이용 여객수가 4천763명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새만금 종합개발계획이 단계별로 추진되는 2021년 이후에는 1일 이용여객수가 6천108명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에다 1일 화물수요예측량은 2016년에 3천363t, 2021년에는 4천t정도 상승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따라서 이 노선은 화물수송에만 치우친 철도가 아니란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더욱이 철도는 자동차에 비해 에너지 소비가 1/13 수준이다. 자동차에 1만명을 태우고 서울~부산까지 갈 연료비라면 철도로는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자동차의 1/30에 불과하다. 그래서 철도의 건설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녹색성장시대의 대표적 교통수단이다.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09-06-26

`아버지의 깃발`

피 비린내 나는 참혹한 전쟁 속 비극·고뇌·갈등때는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연합군은 유럽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일본군과의 태평양전투는 점점 치열해지고 있었다.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곳은 바로 일본 이오지마 섬.이오지마 섬 전투는 6천명의 미군병사가 사망하고, 1만 7천여명의 부상자를 기록하며 태평양 전투의 중요전환점이 되었는데, 1945년 2월 23일, 마침내 섬을 손에 넣은 미군이 수라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으며 끝을 맺는다.당시 5명의 해병대원과 1명의 해군병사가 성조기를 세우는 모습은 AP 통신의 존 로젠탈 기자에 의해 사진기로 찍히고, `이오지마 섬에서의 성조기 세우기`란 제목으로 신문 1면을 장식, 미국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고 로젠탈 기자는 퓰리처 상을 수상한다.깃발을 세운 6명 중 곧 사망한 3명을 제외하고 본국으로 송환된 생존 병사 3인은 영웅대접을 받으며 대국민 전쟁기금마련 행사에 동원되지만, 정작 본인들은 자신들을 영웅이라 생각하는데 대해 어색해하고 괴로워한다.이 영화는 그런 전장의 한가운데를 묘사함으로써 영웅주의의 탄생 배경을 묘사하고 그런 영웅주의가 탄생하게되는 사연을 추문한다. 본국으로 돌아온 세 전쟁영웅은 사실 자신들이 다른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단지 자신들은 성조기를 세우는 옆에 있었을 뿐이고 우연히 그 깃발을 세우게 되었을 뿐이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그 깃발을 세우던 영광이 아니라 그곳에서 무참히 죽어나가던 동료들의 마지막 순간이다.그들은 자신들이 선 단상에서 자신들은 영웅이 아니고 그곳에 목숨을 바친 전우들이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한다.물론 이는 전쟁기금마련에 한몫을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그것은 그들의 진심이다. 아이라와 닥은 모형으로 만들어진 돌산을 기어오르면서 그 당시의 기억을 회상한다.우연찮게 거머쥔 영광이지만 그 영광은 결코 맛있게 씹어넘길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기억에 각인된 것은 그 전장에서 세운 깃발의 영광 따위가 아닌 피 흘리고 찢겨져 나간 채 죽어간 전우들에 대한 목도이다.이 작품은 우리가 전쟁을 기억하는 옹졸한 시선을 탐색하고 지나간 것들에 대해 쉽게 간과해버리는 습성을 지적한다. 모든 것은 세월이라는 필터를 걸쳐 추억으로 미화되고 포장되지만 전쟁이라는 비극이 그 필터에 걸러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전장 한가운데 서보지 않은 이들의 지독한 무지함일 것이다.명예로운 애국심에 고개를 들던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날아드는 총알과 포격에 공포의 시선을 떨군 채 고개를 숙일 때 우리는 전장의 진실을 발견한다.우리가 미화하는 전쟁의 명예는 그 현장을 애써 포장하고자 하는 합리적 욕구의 발현과도 같다. 그 현장에서 죽어나간 이들의 본심과 무관하게 우리는 그것을 명예로 미화하고 숭상한다.과연 그곳에 명예가 있는가. 그곳에는 인간의 죽음이 있다.승리와 패배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곳에는 파시즘과 프로파간다에 휘둘려 내몰린 나약한 인간들의 피 비린내나는 비극들이 엉켜있다.정상에 꽂힌 알량한 깃발의 명예는 그 깃발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비극들을 함구해버리게 만든다.전쟁의 참혹함과 영웅주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이다.

2009-06-26

울릉도, 세계 최고 `해양심층수` 메카 된다

Blue Gold시대 개막 바닷속 심해에서 끌어올리는 제3의 물 해양심층수. 지난해 2월 해양심층수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프리미엄 생수시장이 활짝 열렸다. 대기업, 대형음료회사들이 해양심층수시장에 앞다퉈 뛰어들면서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시장으로 발전하고 있다. 해양심층수는 우리나라에서 서해, 남해에서는 생산할 수 없어 현재 강원도 지역에 고성 등 5곳, 울릉도 현포리, 서면 태하리, 울릉읍 저동리 3곳 등 동해안 8개 지역에 취수허가가 나 있다. 전국의 37.5%의 취수 시장을 가지고 있는 울릉군은 섬에서 해상으로 3~4km만 나가도 1천m가 넘는 수심을 보유하고 맑고 깨끗한 청정해역 등 해양심층수 취수지역 여건상 세계 최고의 해양심층수를 자랑하고 있다. 울릉도는 전역 해안 가까이에서 해양심층수를 취수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는 천혜의 해양심층수 취수 지역으로 육지의 해양심층수 생산과는 비교가 안 된다.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울릉도는 단연 해양심층수 메카로 부상하고 있다. ■해양심층수 1호 면허업체 (주)파나블루(구 울릉미네랄) 우리나라에서 해양심층수 면허 1호인 현포리 취수지는 이미 대기업인 (주)SK가 울릉미네랄을 인수, (주)파나블루로 사명을 변경하고 생산에 들어간다. ㈜파나블루는 (구 울릉미네랄) 지난 2004년 국내 최초로 울릉도 현포리 앞바다에 취수관을 설치, 해양심층수 취수에 성공한 뒤 2005년 정수 및 제염기능을 갖춘 제1공장 준공했다. 해양심층수에서 추출한 소금을 1일 700t가량 생산, `U-650`이란 브랜드로 출시했고, 하루 60t 가량 생산하는 생수도 CJ와 협력해 혼합음료인 `울릉미네워터`란 브랜드로 판매 중에 있는 등 해양심층수업계 선두주자로 나섰다. 이후 SK가 울릉미네랄을 인수하고 곧바로 제2 공장건설에 들어가 총 사업비 115억 원을 투입, 부지 8천25㎡에 제조시설 2천213㎡ 부대시설 1천843㎡ 등 울릉도에서 가장 큰 민자 공장을 건설하고 26일 준공식을 한다. 이 공장에서는 생수 350㎖ 분당 250병, 500㎖ 분당 200병, 10ℓ 분당 4병을 생산한다. 소금도 1일 2t(제품명 마레솔트 110g, 250g, 500g)의 생산능력을 갖췄다. 자사제품인 생수 `슈어` 350㎖, 500㎖와 CJ의 생수 `울릉미네워터` 500㎖와 1천500㎖들이를 생산하고 있으며 7월부터 양산체제에 들어갈 계획이다. ㈜파나블루는 지난 4월27일 세계 최고 수심에서 해양심층수를 취수할 수 있는 해역변경허가를 받았다. 취수해역이 현재보다 3km 더 연장, 취수 수심을 현재 650m에서 1천500m 이상을 추가 확보해 제품이미지 및 경쟁력도 높였다. 또 취수로 397m(총연장 4천687m)와 배수관로 374m(총연장 1천254m)를 증설하고 해양심층수개발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시설기준에 적합한 처리수 제조설비를 설치했다. 따라서 (주)파나블루는 7km의 HDPE(향균수도관, 크기 250㎜)관을 해저에 깔아 구관을 교체하고 1천500m 수심에서 해양심층수를 끌어올린다. 심층수 제품은 유리병과 페트(플라스틱)병 2종에 5∼20ℓ들이 4종 벌크제품을 생산할 예정이며 현재 시판 중인 심층수 정제 소금을 비롯한 화장품 첨가물 등 고기능성 제품 등을 생산, 2015년까지 연간 1천억원대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기대된다.■해양심층수 7호 업체 울릉군(울릉읍 저동리) 우선 공익목적으로 개발되는 울릉군해양심층수개발은 지난 9일 시공회사, 감리단, 마을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울릉읍 저동1리 어선상가 장에서 해양심층수개발 취수공사 안전기원제를 지내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신활력 사업으로 진행되는 해양심층수개발사업은 총 사업비 34억1천600만원을 투입해 취수관실 1식, 관로 매설 4㎞, 취수관 규격 300㎜ 규모, 1일 취수예상량은 1천800t 규모다. 동해안 어업전지기지인 저동항 선박이 출입하는 항구 입구를 통과 해상으로 취수관(경도 130도57분24초, 위도 37도29분32초)을 설치, 해저 750m 바닷속에서 해양심층수를 끌어올리게 된다. 해상취수관로 공사는 해상에서 취수관로를 통해 끌어와 육상취수 관로를 통해 울릉수협위판장으로 이동된다. 이를 위해 해상취수관로는 아쿠아이엔지(주)(대표 강석중)가, 육상취수(저동어선상가장∼수협위판장) 사업은 세원건설이, 감리는 (주)도화종합기술공사가 맡아 공사를 하고 있다. 울릉군은 해양심층수(원수)를 이용해 오징어 세척 및 기타 농, 수산업에 이용하고 타라소테라피 사업 등에 사용할 계획이다. 이번에 개발하는 해양심층수는 개인에게 판매 또는 먹는 물 등으로 가공하지 않고 원수를 출하하며 지자체의 이익보다는 공익 목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울릉군은 앞으로 특산품인 오징어 세척 전 과정을 해양심층수로 처리하고 울릉도에서 생산되는 웰빙 산나물도 해양심층수로 세척 경쟁력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울릉군은 또 활어수족관에도 공급, `해양심층수 활어`를 시판하는가 하면 해양심층수로 양식한 어패류도 내놓을 방침이다. 이와함께 어민들이 운영하는 횟집 등 저동지역 횟집에 해양심층수를 공급, 육지와 차별화하고 해수탕 등에도 공급해 울릉도관광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즐기고 건강도 챙길 수 있는 관광지로 만들어 간다는 계획이다.■해양심층수 제8호 업체 울릉도 심층수(주) 육지와 울릉도를 연결하는 여객선을 운영하고 있는 (주)대아고속의 자회사인 울릉도 심층수(주)가 서면 태하리 해양심층수 취수 제8호 면허를 인수 올해 안으로 본격적으로 개발에 들어갈 계획이다. 모 회사의 막강한 자금력을 동원 서면 태하리 앞바다의 맑고 깨끗한 해양심층수를 생산할 계획인 울릉도 심층수는 가능한 깊은 바다에서 해양심층수를 끌어올려 제품의 이미지와 경쟁력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특히 울릉도 심층수(주)는 울릉도에서 최고의 품질을 생산하는 서면 태하리 오징어와 함께 청정이미지를 상품에 접목하고 생수, 소금 등 가능한 완제품을 울릉도에서 출시 고용창출도 늘린다는 계획이다.■해양심층수의 경제적 효과 한국해양연구원이 지난 2006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해양심층수의 생산유발효과와 취업유발효과는 연간 3조5천270억 원, 3만1천1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현재 시장에 나온 해상심층수 제품은 술, 화장품, 간장, 생수류, 두부 등이지만 앞으로 의약품, 음료수, 간장, 소금 등 일상생활에 사용되지 않는 곳이 없고 고갈되고 있는 식수난으로 엄청난 시장이 형성될 생수시장은 천문학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동해안 최고 청정해역인 울릉도 심층수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해저에서 취수돼 품질경쟁력이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어 향후 세계시장 도전의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워터비스는 지난해 8월 4만 달러, 10월 8만 달러에 이어 올해 4월 12만 달러를 중국에 수출하는 등 동해바다에서 끌어올린 해양심층수가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서도 생수, 주류, 생활용품 등에서 해양심층수가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워터비스는 `깊은 바다`가 없는 중국을 비롯해 이미 해양심층수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 미국 등지에까지 관련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중국에는 회사명과 같은 워터비스란 상품명으로 수출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호주서 12만 달러어치를 주문받았다. 또 이미 해양심층수 취수기술을 10년 전 선보였던 일본보다 앞선 기술력을 내세워 일본에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류석필(주)파나블루 공장장은 “울릉도 심층수가 해외시장 개척에서는 한발 뒤처졌지만 세계 최저 수심에서 취수하는 품질을 발판으로 기술개발에 나설 경우 세계 시장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며 “울릉군과 지역 심층수 개발업체들은 심층수 개발과 함께 세계 시장을 향한 품질 제고 방안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09-06-26

중국 국적 안동시청 공무원 왕위 씨

한국인과 결혼 `안동 새댁`으로 제2의 인생“안동문화 해설 가능한 전문가가 되고 싶어”이달부터 안동시청 지방계약직 공무원으로 임용된 중국 국적의 왕위(25)씨는 앞으로 진짜 안동 사람이 되고 싶다.안동의 명소인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도산서원의 경치는 볼수록 좋고 지난달 2일에는 안동 사람인 남편과 결혼을 해서 `안동 새댁`으로 제2의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그녀는 중국어와 한국어는 물론 영어에도 능통한 인재로 어학능력을 이용해 외교사절로 활약하겠다는 당찬 여성이다. 굴뚝 없는 산업이라는 관광산업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고국인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인과 결혼하고 한국의 공무원이 돼서 정착했다. 한국의 어떤 점이 좋은가.▲ 한국은 어딜 가나 아름다운 경치가 그만이다. 특히 안동의 대표적 관광지인 도산서원과 하회마을의 경치는 볼수록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며 인정이 넘친다. 아주 만족하면서 한국생활을 해 왔다.-현재 일하는 안동시청 관광산업과의 업무는 어떤가.▲아직은 업무를 배우고 공직사회의 분위기에 적응하는 단계이다. 한국어도 더 익혀야 하므로 단어장을 들고 다니면서 듣기와 말하기 연습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연세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한국학도 전공하고 있다. 앞으로 중국어 통역과 번역 및 중국어로 된 안동 홍보물 제작 등 내가 할 일이 많을 것이다.-결혼 생활을 시작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문화적으로 부딪히는 부분은.▲ 남편과는 이미 5년 전 중국 동북사범대 국제정치학과 시절 만났다. 당시 교환학생으로 유학와 있던 남편을 알게 된 뒤 2006년 내가 동국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오면서 다시 만났다. 알고 지낸 게 오래됐고 서로 이해심이 많아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 비슷한 문화도 많이 있다. 다만 높임말을 구분하는 한국어를 아직 정확하게 구사하지 못해서 시댁 어른들 앞에서 민망한 경우에 처할 때가 있다.-한국과 중국의 유교문화는 어떤 차이가 있나.▲중국에는 공자나 맹자, 주자 등의 학문과 사상이 크게 보존돼 있지 않다. 나 역시 별 관심이 없었는데 오히려 한국학을 배우면서 공자 등의 유교문화를 더욱 깊이 접하게 됐다. 유교문화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과제다.-안동시청 공무원으로서 포부는.▲안동의 유교문화와 중국 문화의 공통점을 찾고 안동을 중국에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현재 안동을 찾는 중국인은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이들이 안동을 찾아 관광하고 체험하는 데 나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단순한 통역과 안내를 넘어서서 안동의 문화를 그들에게 이해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관광객 안내는 물론 안동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까지도 가능한 전문가가 되고 싶다. 중국인 관광객을 안동으로 최대한 많이 유치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이임태기자 lee77@kbmaeil.com

2009-06-26

고갈없는 청정자원 해양심층수

해양심층수(Deep Sea Water)는 햇빛이 전혀 도달하지 않는 수심 200m 이상 깊은 심해 바다에 형성돼 있는 바닷물을 말한다. 따라서 바닷물이 마르지 않는 한 영원한 자원이다. 자원적 가치가 높고 재생순환형이어서 석유처럼 고갈될 염려는 없는 `블 루 골드`인 셈이다. 표면적이 30만㎢에 달하는 동해의 심층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남동부 해역에서 형성돼 100년에 걸쳐 반시계방향으로 순환한다. 북대서양 그린 랜드 근처의 빙하가 녹으면서 염분 차이로 가라앉아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을 4천 년에 한 번 순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온이 연중 2℃ 이하의 저온 안정성, 무균·비 오염의 청정성, 90종이 넘는 원소를 함유한 미네랄 성, 부영양성 등 5대 자원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 화장품·물리치료, 바디크림 등 건강미용 산업에도 활용이 가능하며 선진국에서는 표층수와의 온도차를 이용한 발전기술도 개발되는 산업용으로도 사용된다. 특히 한국해양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울릉도 주변 심층수는 개발 가능한 동해 심층수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일본, 미국 심층수와 비교해서는 자원적 특성은 비슷하지만 저온성 측면에서는 더 뛰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일반적으로 표층수 등을 육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수질이 나빠지기도 하지만 해양심층수는 안전한 물이라는 것이 큰 장점이기도 하다. /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09-06-26

백자도예전 연 이점찬 경일대 공예디자인학과 교수

“뛰어난 `도자기 문화` 현대화 이뤄져야” 도예가 이점찬(48) 경일대 공예디자인학과 교수는 조선백자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드문 작업을 하는 도예가다. 기존 백자를 그대로 전승하는 작업이 아닌 `현대적 백자의 재창조`가 그가 지향하는 작업 목표다. 최근 대구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도예전을 개최한 이 교수를 만나 작품세계와 도자기에 대한 철학 등을 들어봤다. 500년간 계승돼온 조선백자의 재창조가 목표“힘든 현실 맑은 백자를 통해 정화시키고 싶어”-어떤 도예작업인가. ▲세계적으로 미적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있는 조선백자는 500년 동안 계승 발전돼왔다. 이러한 백자도 시대에 맞는 미감이 필요하다. 그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 나의 작업이라 하겠다. 백자는 발색이 중요하다. 보통 백자라 하면 흰색 하나로 대표되는데 흰색에도 푸른빛이 도는 흰색 등 수만가지의 색이 존재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눈이 온 것 같은 설백색 느낌의 색감과 일반적인 백자 크기보다 훨씬 큰 형태미를 조화시킨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또 낚싯줄과 실로 도자기 면을 치는 기법을 통해 선이 가지는 한국미술의 아름다움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우리는 21세기를 희망과 꿈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경제불황에 흔들리는 가치관과 자아정체성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이러한 현실을 티없이 맑은 백자를 통해 정화시키고 싶었다. 우리 사회도 백자처럼 밝고 투명하고 깨끗해졌으면 하는 마음을 백자에 담았다. -도자기에 대한 철학은.▲도자기는 흙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재료적 속성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도자기의 조형작업이다. 특히 조선백자의 경우 500년 동안 그 문화가 계승돼왔다는 것은 전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현상이다. 세계 문화사를 봐도 기껏 30~40년 정도 그 흐름이 지속돼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백자를 현대 속에서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지 진지한 고민을 해봐야 할 시점이다. -현대 도예의 나아갈 방향은.▲고려청자, 조선백자가 한국에서 우수하다는 얘기는 세계에서 우수하다는 얘기다. 도자기 만큼은 한국이 최고라는 것이다. 이런 뛰어난 도자기 문화를 현대화시키는 작업과 모색이 많이 나와야 발전이 있겠다. 시대 미감이 바뀌었고 주거공간도 바뀌었으니 현대생활 속에 어울릴 수 있는 작업이 보다 많아져야 도자기의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현주기자 sun@kbmaeil.com▶▶ 프로필△상지대 공예학과·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졸업 △이탈리아 파엔자 국제도예전 입상 △대구공예대전 대상 수상 △대한민국 공예대전 심사위원 역임

2009-06-25

국립 영천호국원을 다녀와서

장재영 영일고 2오늘은 영천호국원을 다녀왔다. 호국원은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신명을 바친 국가유공자와 참전유공자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공적을 기리는 곳이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수천, 수만 개의 비석들이었다. 그 비석 모두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위패를 새긴 것이었다. 정말 장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광경에 잠시 말을 잊을 정도였다. 이런 곳이 몇 곳 더 있다는 말에 얼마나 많은 분이 전쟁으로 돌아가셨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반은 먼저 관리인 아저씨를 따라 현충탑에서 참배를 했다. 높이 솟은 하얀 현충탑 앞에서 장엄하면서도 조용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우리는 묵념을 하면서 국가를 위해 스러져간 분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일단 우리는 수만 개의 비석들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기로 했다. 물론 모두 청소한 것은 아니지만 잠드신 애국자 분들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쓰레기를 치웠다. 각각의 비석을 살펴보니 이름과 돌아가신 곳, 날짜가 매우 자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많은 비석을 일일이 새긴 정성은 매우 놀라웠다. 거의 6줄 정도를 끝내자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전쟁 당시 사용된 진짜(모형도 있지만) 전쟁무기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십 킬로미터를 날아가 적진을 부순다는 나이키 미사일이었다. 그러나 이 무기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 거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병기들을 관람한 우리 반은 거대한 영천대첩비를 지나 현충관으로 갔다. 이곳에서 2002년 월드컵 열기에 파묻혀 제대로 보도되지도 않은 제2차 연평대전을 짧은 영화로 보게 되었다. 서해바다를 지키는 참수리 호 해군들은 가족들과 많은 꿈을 가진 순수한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기습해 온 북한전함에게 포격당하여 전원이 사망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도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말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선제공격은 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NLL을 침범한 북한전함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신 분들은 딸의 100일 잔치가 얼마 지나지 않은 분, 즐거운 신혼을 보내던 분, 제대하고 나선 반드시 효도하겠다는 분등 정말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순수한 분들이었다. 참수리 호의 조타수 분은 마지막까지도 온몸으로 키를 붙잡아 조류가 심한 그 바다에서 우리의 자존심과 애국심을 지켜내었다. 우리는 그 분들의 희생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영원히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호국원에 간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매우 기대했었는데 기대만큼 즐거운 봉사가 되어서 정말 기뻤다. 또 평상시 잠잠하던 애국심이 솟는 것만 같아 은근히 기분도 좋았다. 이번 봉사활동은 우리의 애국심을 반성하면서 우리의 나라를 좀 더 소중히 하고 돌아가신 분들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 활동이었다. 앞으로도 이 같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봉사활동을 해야겠다.

2009-06-24

신임 정창교 포항농협 조합장 취임

정창교 신임 포항농협 조합장이 23일 취임했다. 포항지역 3천여명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선두 농민으로서 본격적인 첫 임무에 들어간 것이다.갈수록 어려워져 가는 농촌 현실을 감안할 때, 현재 상황이 정 조합장에게 던지는 부담은 크다.특히, 요즘처럼 가속화 된 경제위기로 인한 농촌 경영위기와 금융불안은 농협의 미래에 불안하기만 하다.-당선을 축하한다.▲감사의 마음보다는 먼저 심한 중압감을 전해 드리고 싶다. 직선제로 선출된 만큼, 앞으로 나에게는 유권자인 조합원들을 대표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최근 세계 경제위기는 단위 농협이라고 해도 전혀 예외가 없다. 또, 이번 조합장 선거와 관련된 조합원들 간의 감정싸움도 향후 극복해야 할 문제다. 먼저 내부 화합에 주력하고 나서, 조합원들의 의견을 그러모아 그들을 대표하는 직무를 수행할 작정이다.-어려운 농촌현실을 위한 복안은.▲선거공략에서도 말했듯 농산물 유통을 총망라한 `유통기획단(가칭)`을 신설할 계획이다. 이는 현 농민들의 수익구조를 개선하기 위함이다. 사실 현재의 유통망은 농민들에게 다소 불리한 감이 있다. 거미줄처럼 얽힌 중간 유통체제는 정작 농민들에게 돌아갈 실수익을 줄어들게 하고, 오히려 소비자의 부담은 가중시키게 된다. 유통기획단은 이러한 누수 비용을 거둬들여 농민과 소비자에게 돌려주자는 취지다. 그 후 비료 지원 등 농민들의 실정에 맞는 정책을 펼쳐나갈 생각이다. 그러려면 먼저 포항농협이 밝아져야 한다. 그래서 이번 포항농협 정책방안을 `투명화`로 꼽아봤다.-내부 화합을 위한 방안은.▲어떠한 선거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감정의 골은 종료와 동시에 사라져야 한다. 어차피 선거 후에는 당선자가 모두 안고 가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선거로 발생한 불신을 잊고, 포항농협이란 한 단위로 뭉쳐 함께 발전해나가야 한다. 같은 조합원이란 것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만약 대립하고 있는 조합원들이 있으면 내가 나서서 중재하고, 나를 반대했던 조합원이란 더 깍듯이 위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는다.-포항농협은 그동안 신용사업과 비교하면 농업사업이 적다는 질타를 받아 왔는데.▲포항은 도시지역이다. 그래서 포항농협도 도시농협이 될 수 밖에 없다. 포항농협은 신용사업이 경영구조의 80%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포항시민과 유리해서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오히려 포항농협을 도시민과 농민의 가교역할로 만들 생각이다. 직거래 장터 등의 직통 판매망 구축이 그것이다. 생산자로서 농민이 있다면 소비자로서 시민도 당연히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경북지역 1등 도시의 단위농협이 갖춰야 할 자세라고 믿는다./신동우기자 beat082@kbmaeil.com▶▶ 프로필◆출생:1952년생 포항시 남구 동해면 ◆학력:포항중(23회)·포항고(20회) ◆가족관계:부인 이영애(56) 여사, 1남 1녀 ◆좌우명: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

2009-06-24

세계의 장기 집권자들

잡는 것보다 놓는 게 더 힘들다는 권력. 그 달콤한 유혹 속에 수십 년을 빠져 지내던 세계의 장기 집권자들이 하나 둘 권좌를 내려오고 있다. 가봉의 오마르 봉고(73) 대통령은 지난 8일(현지 시각) 심장발작으로 숨을 거두며 무려 42년간 움켜줬던 권력의 끈을 내려놓았다. 이에 앞선 지난해 2월엔 `세계 최장기 집권자`로 군림해온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83)가 49년 영욕의 세월을 마무리하고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세월과 민심 앞에서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절대권력. 하지만 세계 곳곳엔 여전히 허망한 권력의 모래탑을 쌓아가고 있는 인물들이 있다. ♠장기집권의 필수 코스 `쿠데타` 장기집권의 권좌는 합법적 선출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이 주로 취하는 방법은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쿠데타`. 이처럼 불법적으로 권력을 차지할 경우 권력을 내놓았을 때 받게 될 보복 등이 두려워 통치권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봉고 대통령 사망으로 `현역 최장기 집권` 타이틀을 넘겨받게 된 리비아 국가 원수 무아마르 카다피(67)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 1969년 육군 대위 시절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 40년째 통치하고 있다. 예멘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67) 또한 1978년 쿠데타를 통해 북예멘 정권을 장악했고, 1990년 남예멘을 흡수 통일한 뒤 31년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견제 장치 고장 난 장기집권국 장기집권에 대한 폐해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 교수였던 액튼 경(Lord Acton)의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유명한 말로 정리된다. 국가가 한 사람의 권력에 의해 통치된다면, 권력이 사유화되고 이로 인해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이 제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서울대 박찬욱(정치학과) 교수는 “권력의 속성은 결국 부패로 이어진다”며 “이를 막기 위해 견제가 중요한데, 장기집권국가에서는 이 같은 정치 기본원리가 지켜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지구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주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인물은 1946년 즉위한 푸미폰 아둔 야뎃(82) 태국 국왕이다. 생각 생각 ▶초등 1. 기사에 나온 장기 집권자들은 누구인지 찾아보세요. 2. 장기 집권을 하게 되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3. 장기 집권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4. 기사의 핵심 내용은 무인가요? 기사를 읽으며 느낀 점도 정리해 보세요.

2009-06-24

창의력 키우는 다섯가지 원리 `OMEGA`

창의성은 용어의 정의만 해도 100여 가지가 넘을 정도로 다양하고 다루는 범위가 넓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학생들이나 자녀에게 창의력을 제대로 길러주고 싶은 교사나 부모가 있다면 창의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지도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창의성이 왜 필요한지(Why), 창의성이 무엇인지(What)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 왔다. 그런데 생활 속에서 어떻게(How) 창의성을 키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필자는 그 동안 창의성의 `How`에 대해 연구를 해 오면서 학부모나 교사들이 창의성 교육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섯 가지 원리를 생각해 보았다. 이 원리는 일반인들이 기억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OMEGA`의 이니셜로 정리하였다. 첫째, Open Mind(열린 마음)이다. Open Mind는 말 그대로 마음을 여는 것이다. 창문을 열면 바깥의 시원한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와서 새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듯이 새로움이 생명인 창의력을 키우려면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마음을 여는 활동은 상대편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자기의 새로운 것을 표현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Open Mind를 통해 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가벼운 게임, I-message 대화법, 감정코치법, 토론법 등의 활동이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Open Mind 상태에서의 활발한 토론은 창의력 신장에 크게 도움이 된다. 둘째, Multiple Thinking(다면적 사고)이다. 우리는 그 동안 하나의 정답을 찾는 공부를 해 왔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에 접근하기 보다는 정답을 좇아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면 핀잔을 받는 분위기에서는 남다른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다. 창의성을 키우려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면적으로 바라보고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셋째, Embodied Knowledge(체화된 지식)이다. 창의력을 발휘하려면 풍부한 바탕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때의 지식은 암기 위주로 얻은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직접 경험을 통해서 얻은 주관적 지식을 말한다. 직접 고민하면서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문제 상황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므로 체험적 지식을 많이 얻어야 한다. 넷째, Goal-oriented Learning(목표 지향 학습)이다. 창의성에는 크게 지식, 경험, 기능, 성향의 네 가지 영역(Category)이 있다. 이 영역 속에는 24가지의 요인(Factor)이 있다. 이 요인들을 세분하면 다시 114개의 요소(Element)가 있다. 창의성을 기른다는 것은 각 요소들을 자극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창의성을 기른다고 막연하게 영역이나 요인에 해당되는 큰 덩치에 접근할 것이 아니라 세부 요소들을 자극하는 목표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한 후 그것에 도달하여 성취감을 맛보는 경험을 자주 해야 한다. 다섯째, Aha, Product(새로운 산출물)이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생각하거나 놀라운 것을 보게 되면 `Aha(아)하!`라는 탄성을 지르게 된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창의성 교육에서도 `Aha!` 탄성이 자주 나오게 해야 한다. Aha 경험을 많이 하게 하기 위해서는 한 번도 안 가본 곳에 자주 가고, 새로 나온 것과 자주 접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해 보는 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 생활 속에서 이 다섯 가지 원리를 잘 적용한다면 누구나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문구가 있다. `To get what you have never had, you must do what you have never done.`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을 해 보아야 한다.) Create yourself!

2009-06-24

1. 들어가며-공민왕과 홍건적

글 싣는 순서① 들어가며-공민왕과 홍건적② 공민왕은 왜 안동을 피난처로 택했나?③ 임시수도 70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대항했나?④ 공민왕이 남긴 문화유산 ⑤ 문화유산의 전승방안 안동은 지리적으로 경북북부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웅부로 명실상부하게 자리매김한 것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몽진을 온 이후부터 이다. 공민왕은 수도 개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파천하면서 왜 하필이면 임시수도로 안동을 택했을까? 왕이 다녀간 뒤 안동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으며 현재의 안동인들에게는 공민왕의 파천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본지는 창사 19주년을 맞아 특별취재팀을 편성하고 관계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 `공민왕과 안동`을 5회에 걸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주공민왕이 남긴 발자취1361년 12월 임진일 고려 31대 공민왕은 2차 홍건전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와서 난이 평정될 때까지 70일간 이곳에 머무른다. 전란 70일 동안 안동은 임시 수도의 역할을 하며 왕을 극진히 모셨다. 공민왕이 머물고 간 안동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해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공민왕이 하사한 백옥대와 옥관자 금대 비단 등을 비롯해 안동웅부와 영호루 현판 등 유형문화와 공민왕을 모시는 사당, 민속놀이 등 다양한 무형문화가 전승돼 오고 있다.지난달 29일부터 3일간에는 안동시내 일원에서는 공민왕 안동 70일 체류 역사 재현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이 행사는 안동시 용상동 공민왕 사당에서 열린 성황제를 시작으로 놋다리밟기와 어가행렬 재현, 그리고 사은행사 등 다양하게 펼쳐졌다. 행사에 맞춰 안동지역 내 신석동과 수동, 가송, 신남, 원천 등 6곳에 있는 공민왕 관련 사당에서는 왕의 추모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8일 자정 무렵에 안동시 도산면 가송 가사리마을에서는 인근 올미재, 쏘두들 주민들이 수백 년 전부터 연례행사로 이어져 온 마을 동신제를 올리기도 했다. 청량산 축륭봉을 이은 연봉 아래 자리 잡은 이 마을의 동신제는 여느 마을 동신제와는 다르게 공민왕의 따님을 마을 수호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이 마을 어귀 산자락에 자리한 부인당에 모셔진 공주는 인근 원천리의 왕모당과 신남리의 며느리당과 함께 왕의 가족들까지 신으로 모시고 600여 년이 넘게 섬기고 있다.공민왕과 홍건적의 난“공민왕은 이름이 전이고 몽골 이름은 백안첩목아(佰鞍貼木兒)이다. 충혜왕의 동생이고 충숙왕 17년에 태어났다. 성품이 엄격 중후하고 또한 자애로우며 어질어 백성의 인심을 많이 얻었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시기심이 많고 음란하여 화를 당하는 데에 이르렀다.”라고 고려사절요는 적고 있다. 그림과 글씨 등 예능 방면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왕후인 노국대장를 끔찍이 사랑하는 등 감수성이 예민해서 유약해 보이기까지 한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원나라와 왜구에 시달리는 등 고려 말의 시대 상황마저 녹록하지 않아 원만한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즉위 8년째 되던 1359년 2월부터 침략의 조짐을 보이던 홍두적(홍건적)은 그해 11월 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노략질을 해 갔으나 변방을 지키던 지휘관은 이를 숨기고 보고마저 하지 않는다. 홍두적은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 성[河北省] 영평(永平)에서 한산동(韓山童)·유복통(劉福通) 등이 중심이 돼 일어난 한족(漢族) 반란군이다.머리에 붉은 수건(紅巾)을 둘러 표시를 했으므로 홍건적 또는 홍두적·홍적이라고도 했다. 몽골민족이 세운 원나라는 중국 내지를 통치했으나 13세기 전반에 이르러 피지배 민족이었던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홍건적은 당시 유행하던 비밀결사인 백련교(白蓮敎)를 업고, 우두머리가 미륵불을 자처하며 큰 세력으로 성장해 중국의 각지를 점령했다. 홍건적은 원나라와 벌인 전쟁의 물자를 구하기위해 1357년부터 1360년까지 여러 차례 2~3천 명의 소규모로 고려를 침범한다.그러다 공민왕 즉위 10년(1361년) 10월에 10만 여명의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로 침입해와 최영과 이자춘 등을 중심으로 고려군이 필사적으로 대항했으나 결국 밀리고 만다. 적들이 개경 인근까지 밀고 들어오자 다급해진 왕은 태후와 공주를 대동하고 남쪽으로 파천을 모색한다. 이 때 최영 장군이 통곡을 하며 왕이 조금만 더 머물면서 군사를 모집하고 종사를 지키자고 간청했으나 왕은 남쪽으로 파천을 결심하기에 이른다.의병을 모집하겠다고 신하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모집에 응한 이는 겨우 몇 명에 불과하고 적은 코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라 우선 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다급하게 피난이 이뤄졌던지 왕이 숭인문을 나서자 `늙고 어린 자들은 땅에 넘어지고, 자식을 버리고, 짓밟혀 깔린 자가 들판에 가득했으며,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고려사는 이 상황을 묘사했다. 이처럼 다급한 파천 길이라 공주마저 연을 버리고 말을 탔는데 차비가 탄 말은 병들고 약해 제대로 달리지 못하자 보는 이들이 모두 울었다. 왕의 일행은 이처럼 경황 없이 남행길을 재촉한다. 왕의 안동 도착 공민왕 일행이 수도를 버리고 떠난 뒤 홍두적들은 바로 경성을 함락시키고 소와 말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겨서 성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리니 이 같은 전술을 겪어 보지 못한 고려군들은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홍두적들은 온갖 만행을 다 저지르는데 사람을 잡아 굽거나 임산부의 젖을 구워먹는 등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고 다녔다. 왕의 일행이 경기도 이천현에 이르렀을 때는 눈까지 내려 왕의 옷이 젖어 모닥불을 피워 말리는 궁색하기 그지없는 피난길로 이어진다.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인 음죽현에 이르렀을 때 백성은 물론 관리마저 도망가 버리고 없어 먹을 양식마저 구하기 힘들어 관리 한 명이 어렵게 구해 온 쌀 두 말로 일행이 연명을 하는 등 어렵고 힘든 여정으로 문경새재를 넘고 예천을 거쳐 12월 임진일에 목적지로 잡았던 지금의 복주(안동)에 다다른다. 안동에 도착한 왕은 정병운을 총병관으로 삼고 임금의 죄를 뉘우치는 `애통교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 같은 행동은 일부 충신들의 간언에 따른 것일 뿐 왕 스스로는 유흥을 즐겨 찾는 등 전란 중의 임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서슴지 않았다.안동에 도착한 며칠 뒤 왕은 영호루에 올라 한동안 경치를 바라보다가는 누에서 내려와 강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줄을 지어 늘어섰고 더러는 차마 이 모습을 보지 못해 돌아서서 탄식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의 왕이었지만 안동 지역 백성들은 언 강을 공주가 건너도록 사람의 등으로 놓아 주는 충성스런 모습으로 왕의 일행을 맞이해 이를 후세의 문화로 전해 오고 있기도 하다.특별취재팀 : 정태원·고도현·이임태· 이용선 ♠자문: 한양명(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권두현(안동축제관광조직위 사무처장, 안동대 출강) ♠사진자료제공: 사진작가 강병두·안동시청 문화예술과

2009-06-23

"태양신화의 '삼족오 문양' 포항 브랜드로"

3. 태양신화의 동점과 농경제의1) 태양신화의 동점연오랑과 세오녀가 이즈모(出雲)를 중심으로 한 산음(山陰)지역 변읍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고 추정되는 것은《일본서기》와《고사기》등 일본 사서의「스사노오노미코도의 출운천강설화(出雲天降說話)」와 아메노히보코(天日槍)의 도일설화 속에 나타나는 내용과 기본 구조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병도는「천일창의 전설은 《삼국유사》에 보이는 연오랑세오녀의 설화를 연상케 하거니와 단 후자는 전자와 반대로 남편 연오가 먼저 일본에 건너가 왕노릇을 하고 다음에 아내 세오가 도해하였다고 한다. 연오 세오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에는 신라의 일월이 빛을 잃었다는 설화와 천일창이란 이름과의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이것도 생각할 문제이다......천일창 등의 사화는 무엇보다 고대 변진인들이 동해의 일본을 별천지로 알아 여기에 빈삭(頻數)한 왕래, 활발한 무역과 이주식민을 행하면서 일대세력을 잡고 있었던 것을 우리에게 말하여주고 남음이 있다.」라고 하였다.장덕순은 연오랑세오녀가 바다를 건너간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 문헌에는 없으나 다행히도 일본 문헌에는 자세히 전하고 있는데, 신라의 일월신인 연오랑세오녀가 오끼(隱岐)섬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은기는 본래 영일지역의 초기 명칭인 근오지(斤烏支)가 일본의 오끼(오기)지명으로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고찰을 종합할 때 한국 일월신화의 근원인 한민족(고조선)문명권의 삼족오태양숭배사상이 민족 이동과 함께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한국 양곡(暘谷)의 고장 영일지역에 귀착하였으며, 아울러 이 일월신화가 일본으로 이동하여 일본 소국의 개국신화로 정착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2) 농경제의(農耕祭儀) 특별한 환경의 영일지역에 귀착한 고대 한민족 문명권의 삼족오 태양신화에서 비롯된 연오랑세오녀의 일월신제는 광명을 발하여 천지를 밝게 하고 만물을 생육하게 하는 해와 재생과 풍요를 상징하는 달을 숭배하여 한해의 풍년과 집단의 안녕을 기원하는 농경제의를 구조적 기저로 하여 형성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흔히들 신화시대를 제정일치사회라고 칭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이 신화의 구조를 종합할 때 연오랑세오녀가 근오지국의 유력한 인사 특히 일월신제와 농경제의를 주재했던 제사장으로 생각된다. 아달라왕대의 시대적·역사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수서(隋書)》와《당서(唐書)》에서「매양 정월 초하룻날 일월신에 절한다」라 하여, 정월 원단에 일월신에게 절(제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라의 고유한 일월제는 정월 초하루에 거행되지 않았나 추정되며, 그 제의 장소는 연오랑세오녀 설화가 유전되는 도기야인 듯하다.포항지역이 신라시대부터 중요한 제의 장소로 등장된 것은 근기국의 일월신제의의 본거지였고, 동해안의 긴 해안지역의 어로채취 뿐만 아니라 특히 농경지가 넓게 분포되어 농산(農産)이 많고, 신라 왕경 경주로 침입하는 동해구로서 ‘해구침입의 요해처(海寇侵入之要害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오랑세오녀 신화는 처음에는 삼족오태양숭배의 일월신제에서 출발했으나 선사시대부터 국토방위를 위한 성격이 첨가되고 후대로 오면서 점차 농경제의와 습합되어 제일(祭日)도 매년 원단(元旦)과 파종·수확기인 봄·가을 2~3회로 지내왔던 것으로 본다.Ⅳ. 포항문화 브랜드의 미래화 포항 영일만은 한국 삼족오 태양(일월)신화의 귀착지로서 2번의 신화를 창출한 한반도의 정기와 국운상승의 기운이 서린 곳이다. 포항문화 정체성의 원형질이며 포항정신의 근원인 삼족오 일월사상의 문화브랜화는 지역문화의 자생력과 경쟁력을 발현시키는 동시에 빛의 광명사상을 문화화·생활화하여 포항과 지역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미래 포항발전의 원천적인 에너지로 승화하자는데 큰 뜻을 두고 있다.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와 일월사상을 브랜드화하여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몇가지 제시한다. (1) 학술적이고 과학적인 문화재 발굴, 문화유산의 보존과 발전에 대한 계기적 연구가 뒤따라야 하며, 이 분야의 전문인력을 길러낼 수 있는 지역 대학의 인문·예술 관련 학과의 개설을 추진해야 한다. (2) 포항문화 브랜드화의 핵심적인 과제 중의 하나인 박물관(가칭, ‘일월박물관’) 설립을 추진해야 한다. (3) 포항정신의 DNA로서 아름답고 힘찬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와 한민족 태양숭배신앙의 ‘삼족오태양’를 표상하는 ‘삼족오’ 문양을 포항(문화)의 브랜드로 채택할 것을 제의한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국가 브랜드인 삼족오의 세발이 삼신(환인, 환웅, 단군)을 상징한 것이라면, 현대 포항 삼족오의 세발은 선진 첨단과학문화관광도시로의 도약을 상징하는 세발, 즉 3S(Sun, Steel, Science, 또는 Sightseeing)가 될 것이다.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의 고장(과거), 영일만 신화의 철강도시(현재), 꿈과 신화의 첨단과학문화관광도시(미래)를 상징하고 있다. 맺음말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포항지역의 특수한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배경을 새로운 관점에서 고찰함으로써 연오랑세오녀 신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여러 추정을 ‘실존 인물 연오랑세오녀의 행적’이 신화화 된 것으로 구명할 수 있었다. 포항문화 정체성의 고향이며 포항정신의 뿌리인 일월신화와 일월사상은 온누리를 밝히는 광명정대 사상으로서 홍익인간의 이념을 표방한다. 즉, 포항인의 신앙이며, 사상이며, 꿈과 희망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광명정대 사상(일월사상)은 구체적으로 희망, 충절, 개척, 화합, 근면, 부부사랑을 함축하는 일월정신(포항정신)의 요람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포항의 역사와 문화 저력이 되었던 일월정신(포항정신)은 포항이 역사의 시련과 위기 때마다 시대적 과제를 달성해 온 포항의 생존과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를 낳은 ‘일월지향(日月之鄕), 포항’이란 말은 시민들에게 자긍심과 함께 무한한 꿈과 희망의 가능성을 심어주고 있다. 포항은 ‘삼족오태양의 도시’ ‘일월신화의 도시’다. 포항은 고대국가 형성기에 연오랑세오녀가 신천지를 개척하고 신라의 빛을 회복하여 제1의 영일만 신화를 창조하였고, 근래 1968년 이후 포스코의 설립으로 제철보국의 한국 근대화를 이룩하여 제2의 영일만 신화를 재창출하였고, 바야흐로 지금부터 꿈과 희망의 도시 첨단과학문화관광도시, 글로벌 포항을 향해 제3의 영일만 신화에 도전, 점화할 때이다. 아울러 앞으로 한국과 일본 태양신화의 요람인 포항이 삼족오 일월신화를 브랜드화하고 일본 신화의 도시와 자매결연·민관교류 등을 모색한다면 양국 선린교류의 한 물꼬로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에 의해 전통과 미래가 함께하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하는 ‘활기찬 경제’ , ‘쾌적한 환경’, ‘따뜻한 복지’, ‘꽃피는 문화’의 도시 글로벌 포항은 성큼 다가오는 것이며, 이 길은 포항시민들의 행복한 삶과 자손만대의 무궁한 번영을 위한 영일만 신화의 세 번째 목표인 것이다. 포항(문화) 브랜드의 이론적 배경은 새로 발견된 자료에 의해 연오랑세오녀가 실존 인물로 밝혀짐에 따라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이번 ‘제7회 일월문화제’의 ‘제1회포항정신문화 심포지엄’을 통해 포항이 이 ‘일월신화의 도시’로 브랜드화 하여 포항 정체성의 이미지를 세계화하는 횃불로서 역사적인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끝

2007-11-16

연오랑 · 세오녀는 日 개국신화의 모태

Ⅲ. 역사적 배경1. 근기국 형성과 신라로의 편입1) 근기국의 형성근기국의 읍기는 고현리(古縣里)로서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포항시 남구 오천읍 원리(院里:院洞)지역이다. 고현은 오늘날 포항 남부지역의 젓줄인 형산강과 냉천 사이의 중심지역으로, 양쪽 하구 부근에 어미들, 제내들, 송내들 등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포항시 남구 인덕동, 동북쪽으로는 일월동과 청림동을 접하여 영일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연해지역과 내륙을 있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선사시대부터 주거생활의 중심지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이병도 박사는 일찍이 근기국을 신라시대의 근오지현(斤烏支縣) 지역이었던 경북의 영일지역으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음운상으로도 근기(勤耆)-근오기-근오지(斤烏支)로 변함이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근기국은 고현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포항시 남구의 오천읍, 연일읍, 동해면, 대송면 등의 지역을 지배한 소국을 형성하면서부터 이 고장의 역사는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2) 신라로의 편입과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탄생근기국은 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1세기초 경 소국을 형성하였다가 신라 건국 이후 2세기경 고대국가에 편입되었다. 신라 고대국가의 형성기인 제5대 파사왕(80~112)때에 전쟁을 수행하여 안강·흥해·기계를 복속하여 울산까지 동해안 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 후 신라 고대국가 형성의 큰 정치사적 사건인 근기국 복속이 제8대 아달라왕(154~183)대에 이루어진다. 연오랑세오녀 신화 탄생의 역사적 배경은 아달라왕대 고대국가의 영역 확장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신화가 탄생된 왕 즉위 4년(157)이 주목되며, 「2월에 감물·마산의 두 현을 처음으로 두었고, 3월에 왕은 장령진으로 순행하여 군사를 위로하고 모든 정병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3월에 지난 해(왕 3년)의 계림령에 이어 죽령(竹嶺)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계획과 실천은 아달라왕대에 이르러 영일만 일대를 실질적인 지배영역으로 복속하여 흥해에서 울산만에 이르는 동해안의 지역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신라 2대 남해왕 3년에 시조묘를 세운 후 7대까지 한 차례씩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으나 8대 아달라왕대에 와서 두 번이나 시조묘 제사를 올리며, 시조묘를 중수했다는 사실은 건국의 시조신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통합하여 신라 고대국가의 확립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연오랑과 세오녀를 중심으로 한 근기국의 삼족오일월숭배 집단(사제자·귀족·직조·제철기술자 등)은 전통적인 천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사로국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자 신라의 복속에 불응하고 도기야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양곡의 땅 신천지 일본지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영일만의 근기국세력이 일본 변읍의 왕이 되었다는 것은 신라의 정치적 상황과 연계된 것으로 이 후 전개되는 모국 신라와의 교류관계를 짐작하게 한다.2. 선진문화 전파와 일본과의 교류 잘 아는 바와 같이 고대 한국인의 일본이주와 문화이식이 일본고대사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음은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관계로 선사시대부터 관계를 맺어 고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의 문화가 대량으로 일본에 유입 전수되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일본의 야요이시대(彌生時代:B.C 4세기~A.D 3세기)문화는 토기·청동기와 묘제·주거양식 등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진한과 신라는 철과 철기를 생산하여 당시 동북 아시아에 널리 공급하던 철국이었으며, 그 흔적으로 영일 호동(虎洞:현 포항시 남구) 폐고분군(廢古墳群)에서 B.C.2세기~A.D.2세기경의 초기 철기시대의 철부(鐵斧)·철모(鐵?)·철도자(鐵刀子)·철촉(鐵鏃) 등의 철제품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근기국의 치소 인근에서 활발했던 철생산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 실체는 고고학적 성과를 더 기다려 확인되어야 할 것 같다. 일찍이 이홍직(李弘稙)은「신라 지방과 이즈모지방과의 긴밀한 척식(拓殖)관계를 전하는 일본측 고전으로서는 ‘이즈모풍토기(出雲風土記)’가 있다.」,「진한(辰韓) 지방에서 동해를 건너서 일본의 일부 지방의 지배자가 된 신화는 우리나라 고전에도 남아 있다... 이것이야 말로 태고시대에 정말 있을 수 있는 역사를 반영한 전설로 볼 곳이며, ‘연오랑(延烏郞)’이야 말로 일본 전설의 ‘스사노오노미코도(素잔嗚尊)’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라 하여 양국의 교통과 문화교류 등 이 방면 연구에 큰 시사를 주었다.연오랑세오녀 세력들이 배를 타고 떠난 곳은 영일만 출입의 요해처인 임곡진으로 비정되며, 그들이 도해하여 개척한 곳은 영일만 지역과 가장 가까운 일본 지역으로 거의 같은 위도인 36。에 있는 오키(隱岐)섬과 이즈모(出雲)·마쓰에(松江)지역을 들 수 있다. 영일과 출운 지역은 가까운 거리, 항만, 조류와 풍향 등의 자연의 지리와 환경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일본의 천일창(天日槍) 설화는 연오랑세오녀 신화가 동점하여 이루어진 태양신화의 이동으로 보는 연구와 함께「도기야(都祈野)는 근오지(斤烏支)의 ‘오지’(烏支)와도 음이 일치하며, 일본의 지명 오키(隱岐)와도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연오랑세오녀가 건너가 옛땅 오기(迎日)의 이름을 신왕국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보는 연구는 태양신화 동점의 민속학적 접근과 지명의 언어학적 접근으로 눈길을 끈다. 계속

2007-11-09

포항은 한국 일월신화의 대표적 聖地

Ⅱ. 신화의 지리적 배경과 지명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의 명증(明證)은 앞의 문헌자료 외에도 포항 지역의 특성을 밝혀주는 연(영)오·세오의 인명과 근기국, 근오지(斤烏支), 오천, 일월·영일·도기야·일광·세계·夫山(부산 또는 扶桑)·광명 등 해와 달, 해맞이, 빛을 상징하는 밀집 분포된 지명을 통해 밝힐 수 있다. 연오랑세오녀 신화가 없었더라면 일월·빛과 관련된 수많은 인명·지명의 역사적 배경을 온전히 구명할 수 없고, 반면에 이러한 명칭들이 남겨지지 않았다면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지리적 배경을 구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一 즉 二’ ‘二즉 一’로서 서로의 정체성을 보완하고 밝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1. 영일현과 도기야《삼국유사》에서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한 것에 대해 필자는 넓게는 영일현(당시의 근기국과 근오지현의 영역), 좁게는 도기야를 지칭한 것으로 보았다.선사시대부터 사용되었을 두 명칭 중 영일은 근기국 수립시의 치소 명칭과 신라 편입후 고을명인 근오지·오천·오량우·임정 등의 명칭으로 변하였으나, 도기야는 초기와 같은 ‘해돋는(크게 비는)’ 신성한 들(野)의 이름, 제장명(祭場名)으로 오랫동안 불리워지다가 점차 마을이 형성되어가면서 마을명으로 변천했다고 본다. 2. 일월지, 천제당, 연오랑세오녀의 거주지 ‘당평’(塘坪)마을 현재 일월지는 오천 해병부대 내에 소재하고 있으나, 본래는 도기야 지역에 속해 있었다. 주위보다 높은 언덕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저수지로서 주변의 여러 작고 큰 들을 끼고 있어서 비록 바닷가 지역이지만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는데 큰 도움을 준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일월지의 못 위’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일월지 위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해석을 좀더 폭넓게 하여, 일월지 못둑 위 가까운 지점에서만 제천지나 제당을 찾지 않고, 좀 떨어진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 연오랑세오녀가 살았던 세계동의 당평 마을이 제천지와 일월사당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고자 하였다. 세계동은 ‘당평(안마실, 안마을)’, ‘중흥’, ‘등위(신흥)’, ‘원세계’, ‘장터’ 등의 자연부락을 합쳐 이루어졌다. 이 동네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천제당(天祭堂)’이 있어서 매년 정월 초 정일(丁日)에 연오랑·세오녀 일월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당집 내부 앞 벽면에는 부부처럼 보이는 남녀가 서로 마중하는 시늉을 하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과거 천제당 자리였으므로 아마도 연오랑세오녀 부부를 상징한 그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천제당이 있었던 당평마을에서 동해바다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길목 언덕에 ‘당옆’이란 자연부락이 있다. ‘당옆’마을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 바로 이 당옆마을에 연오랑세오녀가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한다. 마을 이름의 유래도 연오랑세오녀의 집인 ‘당(堂)옆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3. 연(영)오·세오와 삼족오 포항지역의 일월과 관련된 명칭 중에 ‘오(烏)’자가 든 지명인 斤烏支·烏良友·烏川·斤烏兄은 삼족오태양(일월)을 상징하는 양곡(暘谷:해가 가장 먼저 돋는 곳)의 고을명이다. 延烏와 細烏 역시 삼족오태양(일월)을 상징하는 인명이다. 해 속의 세발 까마귀 삼족오(日中三足烏)는 달 속의 두꺼비(月中蟾?)와 함께 쌍을 이루고 있다. 삼족오는 음양론에 따라 해의 상징으로 양의 뜻이고, 두꺼비는 달의 상징으로 음의 뜻이다. 이러한 인명과 지명들은 영일만 양곡이 고대 한민족 문명권의 삼족오태양신화가 이동 전승된 귀착지로서 한국의 대표적 일월신화의 성지임을 밝혀주고 있다. 천손의 나라 한민족의 태양숭배사상과 조류숭배사상의 연합토템으로서의 우주관, 일월의 음양조화사상 및 천제적 제의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이 상징화되고 체계화된 것이 삼족오라 할 수 있으며, ‘하느님숭배’·‘태양숭배’·‘삼신(三神:환인·환웅·단군)숭배사상의’ 상징적 표현양식의 하나임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월지정(日月之精)이라는 의미와 함께 일월신화의 이동 경로에 나타난 삼족오의 ‘烏’자가 든 인명이 주목된다. 연오랑세오녀는 일월지정의 양오(暘烏)이며, 천강지자(天子) 왕(태양)의 안내자임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오이(烏伊), 백제의 시조도 오간(烏干) 등의 보필로 나라를 세웠다. 그러므로 연오랑과 세오녀도 근기국과 신라의 왕을 보필하는 지배세력의 유력한 인사(사제자,왕족, 귀족, 고급기술자 등)로서 태양을 상징하는 왕을 대신하여 태양의 빛을 온 나라와 백성에게 안내하고 밝히던 높은 직분의 인사였을 것이다.삼족오 문양은 고구려의 벽화 뿐만 아니라 1986년 익산(益山) 입점리(笠店里) 백제고분의 금동관에서도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지난 1985년 출토된 순흥읍내리 고분벽화에서도 양광(陽光) 즉, 양수지조(陽燧之鳥)와 흡사한 삼족오의 전신(前身)을 상징하는 일상(日象)이 발견되었다. 신라지역인 경북 동북부의 영풍·안동·봉화·청송·울진·영덕·영일·영일지역에서도 고구려 지명이 나타난 점으로 보아 상당한 기간 고구려의 세력이 이들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삼족오태양 관련 유물 연구와 지금까지 살펴 본 지명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의 지리적·역사적 특성 구명을 종합해 볼 때 우리 나라 일월신화와 삼족오태양신앙의 종착지인 포항 영일만 지역에도 이와 같은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될 것임을 기대한다. 계속

2007-11-02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 연구

배용일(포항1대학 초빙교수)이 글은 배용일 초빙교수(포항1대학)께서 지난 10월 8일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된 제7회 일월문화제 기념 ‘제1회 포항정신문화 학술심포지엄’(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일월사상)에서 발표한 주제 논문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 연구 -포항 정체성 탐구와 포항문화브랜드화를 중심으로- ”를 요약한 것이다.(각주는 지면 관계로 생략) /편집자 註 머리말 포항지역의 연오랑 세오녀(延烏郞細烏女) 일월신화(日月神話)는 단군신화를 수록하여 유명한《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어 일찍부터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최남선이 단군신화는 한국문화 일체의 종자라고 했듯이 연오랑 세오녀 신화는 포항문화 일체의 종자이며 원형질이다. 지금까지 ‘연오랑 세오녀 설화’라고 일컬어 온 것을 2007년 포항의 문화제 명칭을 영일만축제에서 이번 제7회 ‘일월문화제(日月文化祭)’로 개칭한 것을 기념하는 ‘제1회 포항정신문화 학술심포지엄’ 개최를 계기로 ‘연오랑 세오녀 신화’로 명명하였다. 그 이론적 근거는 본고의 지리적 배경, 역사적 배경 및 신화적 구조를 통해 구명하였다. 이번 연구에서 연오랑세오녀가 실존 인물임을 밝히는 귀중한 사료를 발견하여 포항 정체성 탐구에 큰 전기를 맞으며, 일월신화 1850년의 신비로운 베일을 한 겹 벗길 수 있게 되었다.이 논문의 궁극적 목표는 연구 결과 얻은 포항문화의 정체성을 브랜드로 상징화하여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와 일월사상의 창조적 가치를 재창출하는데 큰 뜻을 두었다. Ⅰ.연오랑 세오녀 사료연오랑 세오녀 신화 연구의 가장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는 《삼국유사》의 ‘연오랑(延烏郞)세오녀(細烏女)’와《영일읍지》의 ‘세계동(世界洞)’의 내용을 소개한다. 1.《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제 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부부로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미역 종류〕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한 바위 -혹은 한 고기라고도 한다-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이는 비상한 사람이다.」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일본 제기(帝紀)를 살펴보면 전후에 신라 사람이 왕 된 이가 없으니, 이것은 변읍(邊邑)의 소왕이고, 진왕(眞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는 그 남편이 돌아 오지 않음을 괴이히 여겨 가서 찾다가, 남편의 벗어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또한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놀라서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세오〕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지니, 일관(日官)이 말했다.「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 나라에 있었던 것이 지금 일본으로 가버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일어났습니다.」왕은 사자(使者)를 일본에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다. 연오는 말했다.「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거요.」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그런 후에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며,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三國遺事》권1, 紀異, 원문생략) 2.《영일읍지》의 ‘세계동’예로부터 세곡이라 부르다가 후에는 누을(또는 혜곡)이라고 불렀다. 세 구역(원신흥·중흥·세계)을 합하여 세계동이라고 했다. 신라 아달라왕 때 영오랑·세오녀가 세계동의 못둑 위의 들에 집을 지어 살았던 곳이나 지금은 빈터만 남았다. 남쪽에는 춘덕보가 있어 일월지로 통하고, 동쪽에는 순제가 있어 앞들에 물을 대고, 북쪽에는 옥령이 있고, 서쪽에는 도덕곡이 있다.(金鎔濟,《迎日邑誌》권1 ‘世界洞’ 원문생략) 《삼국유사》에서는 연오랑(延烏郞)이라 했으나《영일읍지》는 연(延)자를 영(迎영)자로 써서 영오랑(迎烏郞)이라 다르게 표기했다. 그러나 ‘연(延)’과 ‘영(迎)’은 음과 훈이 흡사하여 조선시대에는 영일현(迎日縣)과 연일현(延日縣)을 혼용해 온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같은 명칭이다. 《영일읍지》‘세계동’에서는 영오랑 세오녀가 집을 짓고 살았던 세계동 마을과 주위의 못·재·골짜기 등 구체적인 지형적 환경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일월지와 제천지(祭天地) 및 연오랑세오녀 거처를 비정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하여 당시 부부의 신분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세계동〉의 마을명과 주변의 못·재·골짜기의 명칭이 지금까지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동국여지승람》의「일월지 못 위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은 일월신화의 발생지역을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단서가 되고 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세오녀 신화는「동해 바닷가에 사는 해와 달의 정(精)인 연오랑세오녀가 바위를 타고 일본에 건너가 그곳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도일(渡日) 건국 사실이 자연환경의 지역성과 고대 신라왕국 성립기의 역사성을 토대로 상징화된 것이다. 즉, 당시 전개되었던 근기국(勤耆國)의 신라로의 편입, 선진문화의 일본전파 및 신라와 일본과의 문물교류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화한 것으로 추단된다. 특히 일월신화(日月神話)의 탄생지를 에워싼 여러 지명들과 이 지역의 가장 빠른 연중 일출시각 등은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포항지역만이 일월신화의 정체성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계속

2007-10-26

‘충효의 고장’ 영천

2월이 다가기전에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가족과 함께 ‘충효의 고장 영천’, ‘관광 영천’의 명소들을 찾아다니며 여행의 참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해 보는 것이 어떨까. 영천에는 우리나라 3대 천문관측소 중의 하나인 보현산 천문대와 정각 별빛마을,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임고서원, 국내 최고 수준의 시안 미술관, 국내 최대 한약재 거래지역인 영천한약약령시장, 7천평 규모로 산 정상에 자리한 사일관광온천,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있는 영천댐 등이 가볼만한 곳을 2회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주 보현산 천문대 태양플레이어 망원경 보유 먼저 보현산 천문대를 찾아 겨울철 별자리를 찾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정각리 별빛마을에 들러 상큼한 고로쇠 수액도 맛볼 수 있다. 국내 3대 천문관측소 중 하나인 보현산 천문대는 보현산 정상에 위치해 있어 밤하늘 머리 위로 별빛이 쏟아진다하여 ‘별빛 나라’로 불리고 있다. 보현산 천문대는 천체의 움직임과 변화를 관측하며 우주의 생성과 진화를 연구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국내 최대의 천체망원경(렌즈구경 1.8m)과 태양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태양플레이어 망원경을 보유하고 있다.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100만 배 이상 관측이 가능하고, 12km에 떨어져 있는 100원짜리 동전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해상력이 높다. 천문대에 오르면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야간 개장 때에는 별도 함께 관측할 수 있어 청소년 견학지로 좋은 곳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망원경을 비롯해 천체관측 시설을 직접 둘러보고 별과 우주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4월부터 10월까지, 매월 네 번째 토요일 주간 공개행사를 열고 있다. 행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전에 전화(054-330-1000)로 예약을 해야 한다. 보현산 천문대 방문객센터에 있는 전시관에는 각종 천체사진들이 전시돼있으며, 간단한 기념품들을 구입할 수 있다. 야간에는 천체관측이 이뤄지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일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한다. 야간공개 행사는 연 중 보현산 별빛축제 기간 중에 한 차례 열린다. 행사시간은 오후2시부터 밤11시까지다. 부대행사로는 유명가수 축하공연, 불꽃놀이, 별빛 패션쇼, 별빛 가요제, 별빛 퀴즈대회, 심야과학영화상영, 별빛 동요왕 선발대회등도 열린다. 보현산 천문대는 1996년4월 영천시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에 걸쳐 있는 보현산 정상일대 9천122평(3만156평방미터) 부지에 세워졌다.(문의 : 054-330-1000) ◎ 가는 길 영천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청송방향으로 약 20km 지나면 자천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자천과 과적차량 검문소를 지나면 천문대로 향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우회전해 ‘옥계교’라는 다리를 건너 10여분 정도 가면 왼편으로 정각교회가 보이고, 곧 정각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해 정각 별빛마을을 가로질러 보현산 천문대(9km)로 향하면 된다.   정각별빛마을 밤하늘 쏟아지는 별빛 감상 이름만 들어도 신비스러운 별빛마을에서는 연중 흐린 날을 제외하곤 머리위로 쏟아지는 별빛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별빛마을은 보현산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동사, 양촌, 신리, 절골 등 4개의 부락 산골마을로 보현산 천문대 입구에 있다. 행정동으로는 정각(正覺 : 바르게 깨닫다)리다. 별빛 마을은 해발 1천124.4m의 웅장한 보현산이 거대한 병풍처럼 우뚝 솟아 정각리 별빛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 한 가운데를 관통해 바위틈을 비집고 흐르는 맑은 물은 횡계천으로 향하고 있다. 밤하늘을 쳐다보면 머리위로 얹혀 있는 듯 한 수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별빛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아마추어 천문캠프가 설치되고 별빛마을 농촌체험이 운영돼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진다. 영천시는 이곳에 20억원을 들여 지상2, 지하1층 연건평 200평 규모로 보현산 천문과학관을 착공, 올해 말 문을 열 예정이다. 천문과학관은 주관측실, 보조관측실, 전체투영실, 천문관측 전시실, 시청각실 등으로 꾸며진다. 천문관측관이 들어서면 관광객들이 연중 천체관측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각리 별빛마을에는 모두 55가구 1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주민들의 주 소득원은 미나리와 고로쇠 수액, 사과 등이다. 미나리는 14농가가 참여, 매년 3월5일부터 한 달 동안 1억3천200여만 원의 매출을 올리며, 고로쇠 수액은 2월18일부터 40일간 5천100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요즘 이곳을 찾는다면 별빛을 머금고 자란 고로쇠 수액을 구입할 수 있다. 고로쇠 수액은 20리터 한 통에 5만원 정도.(문의 : 허성수 이장, 010-6595-3773)   임고서원 선현들 배향 사설교육기관 임고서원은 위기에 처한 나라의 국운을 바로 세우고자 죽음으로서 절의를 지킨 시대의 충신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임고서원은 1553년 조선 명종 8년에 창건해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3년 선조 36년에 중건됐다. 1643년 인조 21년 여헌 장현광과 1727년 영조 3년에 지봉 황보 인을 배향했으나 1871년 고종 8년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됐다. 1965년 복원했고, 1990년대부터는 성역화사업을 추진해 기존 서원 옆에 새로 서원을 세워 큰 규모를 갖추었다. 임고서원 소장전적 및 포은 정몽주 영정이 보물 제1109호, 11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앞에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다. 높이 20여m, 둘레 5.95m의 이 은행나무는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됐다. 수관 폭은 동서방향으로 22m, 남북 방향으로 21m에 이르고 있으며, 생육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여기서 서원에 대해 간단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여행 중에 더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 어려서 처음 가는 교육기관은 서당이며, 서당에서 기본적인 유학서들인 ‘동몽선습’, ‘격몽요결’, ‘명심보감’ 등을 익힌다. 지금의 사립초등학교라 생각하면 된다. 서당을 마치고 다음으로 진학하는 교육기관이 서원과 향교이다. 서원과 향교는 유학의 선현들을 모시고 후학을 양성하던 똑같은 기능을 하던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국가교육기관인 향교는 대성전을 두어 공자를 배향하는데 비해 사설교육기관인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들을 배향했다. 향교나 서원에서는 ‘소학’을 시작으로 사서삼경을 배웠다. 서원이나 향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과거를 보거나 성균관 입학시험을 보았다. 대원군의 서원(당쟁의 뿌리 역할) 철폐령 이후 남아 있는 오늘날 서원들은 교육기능을 상실한 채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는 문묘의 기능만 하고 있다.   정몽주 선생 · 조양각 영남 3대 루 중 하나 조양각 ◆정몽주 선생 호는 포은. 1337년 고려 충숙왕 6년에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났다. 성리학을 세계관으로 한 고려 말 신진사대부 중 온건파의 수장으로서, 고려를 보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급진파인 이성계 일파와 대립하였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1392년 공양왕 4년 4월4일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됐다. 이때 나이 56세였으며, 선혈을 흘린 자리에서 푸른 대나무가 솟아나 이름을 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됐다. 이후 조선 태종 원년(1401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익양 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를 문충공이라 했다. 포은은 효성이 지극했으며, 생활이 검소했고, 벼슬에 있을 때 청렴, 근신했다. 이방원의 하여가의 답가로 유명한 단심가를 남겼으며, 의창과 5부학당, 향교 등을 세워 빈민구제 및 성리학 보급, 사회윤리 확립, 교육진흥에 힘썼다. 문집으로는 ‘포은집’이 있고, 그의 굳은 충성을 읊은 시조 ‘단심가’가 전해지고 있다.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영천IC에서 빠져나와 시청방향으로 진입해 안강, 포항 방면 26번 국도 조교삼거리에서 임고 방면 69번 지방도로를 따라간다. 4.5km 정도 가다보면 임고 삼거리가 나오는데 바로 왼편이 임고서원이다. (054-335-2864) 여기서 곧장 가면 보현산 천문대가 보인다. ◆조양각 진주 촉성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3루 중 하나인 조양각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에 성리학의 원조 포은 정몽주 선생과 당시 부사이던 이용, 향내 유림들이 합심해 지은 건물이다. 조양각은 명원루, 서세루라고도 한다. 명원루라는 이름은 당나라의 문장가 한퇴지의 시구(훤히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조차 더 밝아오는 듯하다)에서 왔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15년(1637)에 조양각이라는 이름으로 중건했으며, 누각 안에는 포은의 청계석벽을 비롯 율곡, 사가, 노계 등 명현, 풍류객들의 시구가 새겨진 현판 80여개가 걸려 있다.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3대 루 중에 하나이며, 경내에는 백신애 문학비와 황성옛터 노래비, 영천지구 전승비 등이 있다. 계속 /김규동·장병욱기자

2007-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