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과 포숙아는 춘추시대 제(劑)나라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렸을 때 같은 고장에서 자랐는데 포숙아는 관중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가난했던 관중을 늘 도와주곤 했다고 한다. 당시 제나라는 양공 (襄公)이 형인 노()의 환공(桓公)을 죽이고 그의 부인을 차지한 후 정사를 돌보지 않아 매우 혼란스러웠다. 차츰 조야의 기미가 어지러워지자 관중은 공자(公子)규를 모시고 이웃 나라로 포숙아는 규의 이복동생인 소백(少白)과 함께 거나라로 망명했다(BC.686). 예상한 대로 그해 양공은 사촌동생 공손무지에게 암살당하고 왕위를 찬탈한 무지는 또 이듬해 다시 살해당해 제나라에는 국왕의 자리가 비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두 공자는 왕의 자리를 노리고 귀국을 서둘렀고 이런 사정으로 관중과 포숙아는 뜻하지 않게 정적이 되었다 관중은 이때 거에서 돌아오는 소백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용케 모면한 소백이 먼저 귀국해 환공(桓功)이라 칭하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관중의 압송을 요구했다. 고자 규는 자결하였으나 관중은 태연히 나아가 포박을 받았다. 제나라로 압송된 관중은 환공 앞에 릅릎을 끓고 처분을 기다렸다. 이때 환공이 그를 죽이려 하자 포숙아가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마 단지 제나라만의 군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이오(夷吾:관중의 이름) 외에는 달리 쓸 인재가 없습니다”
환공은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에게 요직을 주었다. 이리하여 제나라의 재상이 된 관중은 우선 고아나 병든 사람을 비롯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휼정책을 시행해 민심을 얻은 후 이를 기초로 부국강병책을 추진, 제나라를 일거에 천하의 부국으로 만들었다. 그후 관중은 제후들을 규합해 제나라를 중심으로 동맹을 체결토록 함으로써 환공을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는 구호는 관중의 정치철학을 드러내는 유명한 구절이다.
관중의 이같은 성공은 무엇보다 관중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지만 그 능력을 알아보고 중용될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따뜻한 우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은 상대를 알고 자기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손자 병법에 나오는 글이다. 잘 활용하여 뜨거운 인간애로 살아가는 지혜를 찾자. 단점 보다 장점을 보는 안목을 키우자.
/쌍산 김동욱
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