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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청도공영사업공사 박종규 사장

청도 소싸움은 `청도공영사업공사`와 `(주)한국우사회`가 업무를 분담해 운영한다. 청도공영공사는 사업 시행자로서 경기의 공정성과 관련된 업무와 싸움소 관리 업무를 수행한다. 한국우사회는 농림부에 의해 지정된 수탁사업자로서, 우권 발매, 방송, 안전, 고객지원, 시설관리, 홍보 등을 맡았다.소싸움 개장을 진두지휘해 온 주역이다. 개장식과 첫 경기를 치러내느라 정신이 없다.“참으로 오랜 세월 공 들여온 사업입니다. 1990년 개최한 영남민속투우대회로부터 치자면 무려 2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2003년 10월1일 공영공사가 발족한 것부터 쳐도 벌써 8년이지요”박 사장은 그 동안 많았던 곡절을 숨기지 않았다.“2007년 1월 돔 경기장을 완공하고도 4년 이상 개장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 감사원은 사업청산을 지시했습니다. 저런 고난을 넘어 오다보니 개장이 누구보다 기쁩니다” 개장식 순간에는 `그간의 고충이 주마등처럼 스쳐가 눈물이 핑돌더라`고 했다.공영공사는 박 사장 주도로 싸움소 수급, 심판·조교사 선발, 전산·방송시설 가동, 경기 운영 숙달, 고객 서비스 훈련 등에 많은 준비를 기울여 왔다.지난 7월9일부터 매주 토·일요일엔 시뮬레이션을 해 가며 실황상의 문제점을 보완해 오기도 했다.박 사장은 “청도 소싸움은 경기 자체만으로도 많은 볼거리로 좋은데다 베팅 묘미까지 가미돼 사업 전망이 매우 밝다”면서 “세계적 문화관광상품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했다.청도/이승택기자 lst59@kbmaeil.com

2011-09-06

“대구 시민과 서포터즈 진정한 금메달 주인공”

“IAAF, 역대 최고대회 찬사” “9일간의 짜릿한 감동과 환희와 열정이 지구촌 65억 세계인의 가슴속에 또렷이 각인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대구 시민의 열띤 응원과 뛰어난 시민의식이 있었습니다” 김범일 대구시장은 5일 오전 시청 기자실에서 2011세계육상선수권대회 성공에 큰 역할을 해 준 대구 시민께 드리는 감사 인사를 발표했다.김 시장은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성공은 위대한 시민 여러분의 열정적인 참여 덕분으로, 대구시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대구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대구 시민들과 6천700여명의 자원봉사자, 1만7천여명의 시민서포터즈가 이번 대회의 진정한 금메달 주인공”이라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이어 그는 “육상의 비인기 종목인 한국에서, 그것도 지방도시 대구에서 개최됐지만 지금까지 선진국의 세계적인 도시에서 열린 역대 대회와 비교해 엄청난 성공을 이뤘다는 평가와 함께 라민 디악 IAAF 회장 및 육상연맹 관계자로부터 역대 대회 중 가장 준비가 잘된 대회라고 찬사를 받았다”고 덧붙였다.김 시장은 “역대 대회 중 가장 많은 202개국 선수·임원이 참가했고 최첨단 경기장과 최고수준의 경기운영, 만석 관중과 수준 높은 관람 및 응원, 역대 최고 수준의 선수촌 시설과 선수촌내 연습장, 한국 전통의 각종 문화행사 등 명실상부한 역대 최고 대회로, 대구 유사 이래 최고의 행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자부했다.김 시장은 “이번 대회를 통해 대구가 전 세계 언론에 수천번 노출되면서 글로벌 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며 “높아진 대구의 브랜드 가치를 이용해 투자유치 활성화, 지역 잠재력을 확인한 문화관광자원의 개발, 육상의 메카로서 육상진흥센터를 활용한 꿈나무 육성 등 포스트 2011사업 추진에도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김 시장은 “이번 대회는 대구 시민들이 하나로 뭉친다면 어떠한 난관도 돌파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었다”며 “자신감과 자긍심을 되찾아 글로벌 도시 대구를 향해 힘차게 달려 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 달라”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이곤영기자 lgy1964@kbmaeil.com

2011-09-06

경북 유일 청도소싸움 20년전에 시작됐다

소는 우리 민족과 더불어 2천여 년 함께 살아오면서 `생구`라 불리게 됐다. 생구는 한 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가리키는 말로, 소를 거의 사람 대접할 만큼 존중했다는 뜻이다.소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소 먹이러 간 아이들이 심심해 즉흥 놀이로 시작했으리라 짐작될 뿐이다. 그러다 규모가 커져 마을 혹은 씨족단위로 번져 가세(家勢) 또는 족세(族勢) 과시의 장으로 발전됐을 가능성이 점쳐진다.현재 전국에서는 11개 소싸움대회(축제)가 열린다. 대부분 연중 한 두 차례 시기를 정해 5일 정도 기간에 리그전으로 치러진다. 전체 11개 대회 중 6개가 경남에서 열리고, 전라도서 2개, 경북·대구·충북에서 각 1개 열린다. 경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경북에서는 청도 것이 유일한 대회다. 입상 순위별로는 상금이 주어진다.시기별로 보면 봄·가을로 열리는 것에 진주소싸움대회(5월·10월)가 있고, 봄에 열리는 것에는 △함안소싸움대회(4월. 5일간) △의령소싸움대회(5월, 5일간)가 있다. 그 외에는 가을에 열린다. △청도소싸움대회 △대구달구벌축제 소싸움대회(9월·5일간) △창녕소싸움대회(9~10월, 5일간) △창원소싸움대회(10월·5일간) △김해소싸움대회(11월·5일간) △정읍소싸움대회(10월·5일간) △보은소싸움대회(10월·5일간) △완주소싸움대회(9월·5일간) 등이 그것이다.저 여러 대회 중에서는 진주소싸움대회의 역사가 가장 오래 됐다. 신라가 백제를 이긴 전승 기념잔치에서 비롯된 후 고려 말부터 진주를 중심으로 민속놀이로 정착됐다는 것이다. 현대 들어서는 1971년부터 전국대회로 자리잡았다.경북에서 유일하면서도 청도소싸움의 역사는 깊지 않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년 전이다. 싸움소를 기르던 농가들이 `청도투우협회`를 조직하고 1990년 영남민속투우대회를 연 것이 처음이다. 이 대회는 1995년 전국민속투우대회로 발전해 1998년까지 지속됐다. 1999년엔 청도소싸움축제로 명칭을 바꿔 오늘에 이르렀다. 그해엔 문화관광부 지정 `한국의 10대 지역문화 관광축제`로 선정됐다.이런 여러 소싸움대회는 모두 잠깐 축제 형태로 열리는 행사다. 하지만 근년 들면서 그런 일시 행사를 뛰어넘어 소싸움을 상설대회로 격상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내 처음으로 2001년 매주 토요일 상설 소싸움 경기를 시작한 진주가 첫 주자였다.그 뒤를 이은 게 이번 청도 상설소싸움이다. 하지만 청도소싸움은 진주 것과는 또다르다. 경마 처럼 복표를 사서 돈을 걸 수 있는 형태로 한단계 더 진화했다. 지금으로서는 세계 유일의 투우사업이라 볼 수 있다.청도상설소싸움은 2003년 청도공영사업공사가 설립되면서 구체화됐었다. 경기장도 2007년에 완공됐다. 2010년 12월31일에는 사업에 조건부 승인이 났다. 그리고는 지난 3일 첫 시합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정철화기자

2011-09-06

“팸투어 개발로 외국 관광객 유치”

(주)한국우사회 기화서 대표사업의 앞날을 짊어진 주역이다. 소싸움 활성화를 위해 여러 여행사 및 코레일과 연계해 국내 수도권 관광객들의 청도 단체 관광상품 개발을 완료했다. 일본 오사카 등 외국 관광객 유치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소싸움 영상을 해외방송사로 송출하는 일과, 관광객들이 소싸움에 겸해 청도 경승지를 둘러보는 팸투어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청도 소싸움이 어느 정도 흥행을 거두고 매출을 올릴지는 명확히 예측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한국마사회가 운영하는 경마사업이 2009년 기준 7조3천억원 가량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입니다. 소싸움경기장 주변 개발이 성사돼 관광단지화가 이뤄질 경우 비슷한 수준까지 매출이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우사회는 나아가 청도지역 주요 관광지를 묶는 종합레저타운 개발, 마카오 등 해외에서의 우권 발매 등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소싸움을 지금은 주 이틀만 열지만 안정되면 주 3일까지로 늘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 했다.기 대표는 “천년 역사를 가진 소싸움이 현대적 브랜드로 탈바꿈해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게 청도소싸움”이라며 “가족 단위 관람을 권하고 싶다”고 인사했다.청도/이승택기자 lst59@kbmaeil.com

2011-09-06

“가장 한국적인 관광상품 될 것”

세계 유례없는 상설 베팅 소싸움 청도서 팡파레서울 대구 부산 등 5만여 관중 우뢰같은 `와~아` 신대구부산고속도로에서 청도나들목을 빠져나와 북쪽(경산쪽)을 향해 국도 25호선을 타고 5분 정도 달리면 오른편에 지붕이 하얀 천으로 덮인 돔형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 속에서 본 비행접시를 연상시킨다. 이곳이 바로 청도 소싸움 전용 경기장이다. 자동차로 대구에서 30분, 부산에서 1시간, 서울에서 5시간 남짓 거리다.지난 3일 있은 개장식 날엔 이 경기장에 무려 5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도군민이 많았지만 대구, 부산, 서울에서 달려온 사람들도 엄청났다. 서울서 온 한 50대 남자는 진작부터 다양한 싸움소들의 오랜 전적 기록을 들고 다니기까지 했다. 그는 직장에 휴가를 내면서까지 종전의 일반 소싸움대회 때도 청도를 매년 빼먹지 않고 들락거렸다고 했다.첫날 총 10경기 중 오전 5경기는 시범경기로 진행됐다. 돈을 걸 수 있는 소싸움은 나머지 5경기였다.경기장 지하층과 1층에 포진한 우권 발매소들에는 한번도 해 본 적 없는 우권 베팅에 호기심이 발동한 거대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발매 아나운서의 카운트다운이 진행되더니 얼마 안 가 우권 발매가 끝났음을 알리는 창구 커튼이 드리워졌다. 그러자 장내 어나운서가 소싸움 시작을 알렸다.모래판 한 가운데에는 850㎏이 넘는 거구의 황소 두 마리가 마주섰다. 앞발로 모래를 차내며 거친 숨을 몰아 쉰다. 금방 달려들 듯 기세가 맹렬하다. 주심이 호각을 불자 경기장은 떠나갈 듯한 함성에 휩싸였다. 두 마리 황소는 뿔치기, 뿔걸이, 밀치기 등 다양한 기술을 주고 받았다.한참을 한 발짝도 밀리지 않는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경기시한 30분을 5분 남겼을 때까지 그랬다. 힘이 부친 한 마리가 등을 보이며 도망치고서야 경기는 종료됐다. 무려 25분에 걸친 혈투였다. 심판이 승패를 선언했다. 그와 함께 대형 전광판에 경기 결과와 배당률이 공개됐다. 순간 관중석엔 당첨자 환호와 탈락자 탄성이 교차했다.첫날 싸움소들은 일반 소싸움(민속대회)에서 기량이 검증돼서인지 대체로 팽팽한 접전을 펼쳤다. 박진감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관중석은 각자 베팅한 소가 이기기를 열망하는 관중들의 응원으로 더욱 뜨겁게 달궈졌다.이날 5경기 베팅 총액은 6천여 만 원으로 집계됐다. 한 경기당 1천200만원 정도다. 최고 배당률은 두 번째 경기의 시복승식에서 나온 1천172배로 기록됐다.개장식날 소싸움장에 몰린 인파는 청도군 전체 인구 4만7천여명보다 많은 것이었다. 1천400여대 분의 주차공간은 오전 10시께 이미 만원이 됐다. 오후엔 경기장 주변도로 갓길까지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했다.한국우사회 기화서 대표는 “개장 첫날 치고는 매우 성공적이다. 인파가 6, 7년 전 부산 경륜장 개장일 때의 10배 정도에 이른다”고 반겼다.청도/이승택기자 lst59@kbmaeil.com

2011-09-06

“대구 잊지말고 다시 오세요”

9일 간의 감동 드라마 세계육상 폐막“대회 훌륭”…2년 뒤엔 모스크바서 “2013년 모스크바에서 다시 만나요!”8월27일부터 9월4일까지 9일간 대구 스타디움과 대구 시내 전역을 뜨겁게 달구며 감동의 드라마를 시연했던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4일 폐막했다.관련기사 3·11·12·13·14·15면 세계 3대 스포츠 축제 중의 하나인 세계육상선수권의 이번 대구 대회에는 202개국 47개 종목 선수 1천945명, 임원 1천817명, 미디어 관계자 3천59명, 기술사·개인코치 7천명 등 역대 최대 규모가 참가했다. 또 65억 세계인이 감동의 드라마를 시청해 세계 속의 한국 위상을 드높였다.특히 이번 대회는 대구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응원, 자원봉사자와 시민 서포터즈의 헌신적인 노력 등으로 성공에 이름으로써 이 도시의 이미지를 세계에 고양했다. 대회 유치 당시 우려했던 관중 부족 문제는 목표관중 49만명의 92%인 45만명 관람으로 깨끗이 극복됐다..그러나 육상 성적은 대회 폐막일인 4일 남자 400m 릴레이에서 우사인 볼트가 마지막 주자로 나선 자메이카 팀이 37초04(종전 37초10)으로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며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회신기록이 2개에 그치는 등 흉작이었다. 한국 선수는 남자 경보 20㎞ 김현섭이 6위, 남자 경보 50㎞ 박칠성이 7위, 남자 넓이뛰기 김덕현이 본선진출한 데 그쳤다.폐막식은 김황식 국무총리, 라민디악 IAAF(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 각국 선수·임원, 자원봉사자, 시민서포터즈 1천500여명 등이 함께 그라운드에 입장한 가운데 진행됐다. 김범일 조직위원장의 환송사, 라민디악 IAAF회장의 폐회사, IAAF기 차기 개최도시 모스크바 전달식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 김범일 시장은 “각국 선수와 임원, 미디어 그리고 모든 IAAF 가족들에게 깊이 감사 드린다. 오랫동안 대한민국과 대구를 기억해 주시고, 다시 오시기 바란다”고 인사했다.한편 그에 앞선 4일 오후 5시 라민디악 IAAF회장, 김범일 대구시장, 문동후 대회조직위 부위원장 등은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총평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가졌다.라민디악 회장은 훌륭한 경기시설과 대구시민의 성숙한 관전문화 등에 박수를 보낸다고 했다. 도핑검사에서 문제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큰 수확이며, 그레나다 등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 메달을 딴 것도 성과라고 평했다. 경기운영과 관련해서는 “경기 초반 약간 미비한 점이 있었으나 극복됐으며, 방송 시청이 직전 오사카대회의 10배가 넘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오사카대회는 600만이 시청했으나, 대구대회는 6천만 이상, 유로존에서만 3천만명이상이 시청했다./이곤영·이창훈기자

2011-09-05

한국 남 400m계주 런던 보인다

한국 남자 400m 계주팀이 제13회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내년도 런던올림픽 본선 무대를 향한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여호수아(24·인천시청)-조규원(20·구미시청)-김국영(20·안양시청)-임희남(27·광주광역시청)이 이어 달린 계주팀은 4일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예선에서 비록 조 5위로 결승에 오르진 못했지만 38초94를 찍고 종전 한국기록을 0.1초나 앞당겼다.계주팀이 발족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이뤄낸 성과라는 점에서 기적이라는 평가다.특히 발목이 좋지 않은 전덕형(27·경찰대) 대신 신예 조규원을 투입하고서 얻은 결과라 더 주목할만하다.계주팀은 이날 결승 진출과 한국신기록 수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역주를 펼쳤다.그러나 2년 전 베를린 세계대회 결승 진출 마지노선인 38초60을 통과한 팀이 이미 8팀을 넘어서면서 아쉽게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하지만 대만(39초30)과 태국(39초54) 등 아시아의 계주 강국으로 통했던 나라를 잇달아 제치며 자신감을 수확했다.대한육상경기연맹은 100m 개인 최고기록이 10초23에 머무는 현재 실력으로는 100m 단일종목에서는 세계와의 격차를 줄일 수 없다고 판단, 지난 1월 계주팀을 결성해 틈새를 노리겠다고 선언했다. 대표팀은 바통 터치를 완벽하게 가다듬는 것에서 기록 단축의 해법을 찾았고, 이날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리는 팀워크를 발휘하며 한국 기록을 4개월 만에 0.1초 다시 앞당겼다.레이스가 끝난 뒤 많은 육상인의 축하를 받은 오 코치는 “감격스럽다. 내년 런던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고자 더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어 “100m 10초5대를 뛰는 조규원이 오늘 아주 잘해줬다”며 “10초3대를 뛰는 선수가 한 명만 더 있으면 아시아 최강이라는 일본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이날 전체 23팀 중 13위를 달린 한국은 일본(9위·38초66)과 중국(12위·38초87)과의 격차를 각각 0.28초, 0.07초 차로 줄이며 턱밑까지 추격했다. 계주 선수들은 개인의 100m 기록 향상보다 400m 계주의 기록 단축에 더 집중했고, 마침내 대구 세계대회 폐막일에 값진 열매를 맺었다.런던올림픽에는 기준기록을 통과한 나라 중 기록이 좋은 16개 나라가 참가한다.드디어 38초대에 진입한 계주대표팀이 기록을 어디까지 줄일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이창훈기자 myway@kbmaeil.com

2011-09-05

승자도 패자도 축제 즐겼다

女800m 사비노바 銀 세메냐 우정의 포옹 러시아 마리야 사비노바(26)가 여자 800m의 새 여왕으로 등극했다.사비노바는 폐막일인 4일 오후 대구 스타디움에서 열린 여자 800m 결승에서 지난 2009년 이 종목 우승자로 성별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캐스터 세메냐(20·남아프리카공화국)를 제치고 1분55초87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골인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3위는 자넷 젭코스게이 부시에네이(케냐·1분57초42).이날 여자 800m 결승 경기 후반 100m를 남겨두고 세메냐가 선두로 치고 나오며 이 종목 2연패를 달성하는듯 했으나 루사노바가 10여m를 남겨두고 막판 스퍼트로 대역전극을 펼치며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해 정상에 올랐다.남자 5천m 결승에서는 소말리아 출신으로 영국에 귀화한 철각 모하메드 파라(28)가 13분23초36의 기록으로 버나드 나가트(미국·13분23초64)를 제치고 가장 먼저 결승선을 끊고 우승했다. 3위는 이마네 메르가(에티오피아·13분23초78)가 차지했다.여자 해머던지기에서는 러시아의 타티아나 리센코(28)가 결승에서 77m13을 던져 이 종목 세계기록(79m42) 보유자로 타이틀 방어에 나섰던 베티 하이들러(독일·76m06)를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3위는 중국의 장웬시우가 74m48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획득했다.남자 세단뛰기에서는 미국의 신예 크리스천 테일러(21)가 결승 4차 시기에서 올해 최고기록인 17m96을 뛰어 2연패에 도전했던 필립스 이도우(영국·17m77)를 19㎝ 차로 물리치고 우승했다./이곤영기자 lgy1964@kbmaeil.com

2011-09-05

`실격` 볼트로 스타트 `세계신` 볼트로 피날레

자메이카 男 400m 계주 37초04로 우승… 볼트 200m 이어 2관왕女 400m 계주 4년만에 정상 탈환 미국 금메달 12개 종합우승 명불허전. 명성은 헛되이 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회 마지막날 마지막경기에서 극적으로 세계신기록이 나왔다. 그동안 목말라 하던 기록가뭄에 말 그대로 단비였다. 4일 밤에 열린 남 400m계주에서 볼트를 앞세운 자메이카는 37초04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조국에 금메달을 보탰다.이날의 히어로도 단연 볼트였다. 6번 레인의 마지막 주자로 나온 볼트는 200m 금메달로 여유가 생긴 듯, 연신 몸을 흔들며 쇼맨십을 과시했다. 전광판에 경기 전 시작되는 `쉿`하는 소리가 나올 때는 자신이 먼저 인지손가락을 입에 대며 관중에게 조용히해 줄 것을 주문하는 등 예선보다 한결 여유있어 보였다.경기가 시작돼 3번 주자 블레이크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후에는 폭발적인 스퍼트로 2위와의 격차를 벌리며, 여유만만하게 결승선을 끊었다.이후 볼트는 웃옷을 반쯤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관중석으로 다가갔다. 마침 흥겨운 디스코 음악이 나오자 거기에 맞춰 연신 디스코 동작을 해보이며 팬들과 호흡을 맞춰 우레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탭댄스 동작을 몇번 반복해 관중들로 하여금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당초 자메이카의 강력한 상대로 여겨졌던 미국은 3번 주자 패튼이 바통을 넘겨주는 순간 넘어지면서 완주도 못해보는 불운을 겪었다. 당연히 바통이 손에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레이스를 시작하던 딕스는 뒤를 돌아보는 순간 경악했다. 패튼이 트랙에서 넘어져 있었던 것.미국의 거듭된 `바통 악몽`은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미국은 남녀 대표팀 모두 바통을 떨어뜨려 메달을 놓치고 말았다. 남자 400m 계주 예선에서는 3번 주자였던 다비스 패튼이 마지막 주자로 나선 타이슨 게이에게 바통을 넘겨주려던 순간 게이가 놓치면서 레이스를 포기했다. 이어 벌어진 여자 400m 계주 준결승에서는 4번 주자 로린 윌리엄스가 너무 일찍 출발한 나머지 토리 에드워즈가 건넨 바통을 제대로 움켜쥐지 못하고 뒤로 흘리면서 한참 뒤로 처지고 말았다.이듬해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도 악몽이 이어졌다. 미국은 남자 400m 계주 예선에서 전체 출전팀 중 가장 빠른 37초97의 기록으로 결선에 진출했으나 이튿날 바통 터치 과정에서 규정된 지역을 벗어났다는 판정이 내려져 실격됐다.3번 주자 숀 크로퍼드가 마지막 주자였던 다비스 패튼에게 바통을 주는 과정에서 바통 터치 구역을 벗어났다는 판정이었다. 특히 다비스 패튼은 세 차례 연속으로 바통 터치 실수의 장본인이 돼 `억세게 운 없는 사나이`로 남고 말았다. 트랙에 넘어진 패튼은 힘없이 엎드린 채 4년째 깨어나지 못한 악몽에 고개를 떨궜다.망연자실한 미국 계주팀이 트랙에 누워있자, 금메달을 목에 건 자국의 여자 계주팀인 지터, 팰릭스 등이 나와 성조기를 걸어주며 위로했다. “노 프라블럼, 더 선 라이즈 어게인.”앞서 벌어진 여자 400m계주에서는 비안카 나이트 - 앨리슨 펠릭스 - 마르쉐벳 마이어스 - 카멜리타 지터가 이어달린 미국이 41초56의 시즌 최고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끊었다.자메이카는 프라이스, 스튜어트, 심슨, 브라운으로 팀을 꾸린 후 마지막 주자 캠벨브라운이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지터를 따라잡지 못해 은메달에 머물렀다. 3위는 42초51을 기록한 우크라이나가 차지했다. 이로써 미국은 4년만에 400m계주 정상을 탈환했으며 100m, 1,600m계주에서 각각 우승한 지터와 펠릭스는 2관왕에 올랐다.한편 미국은 제13회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8개, 동메달 5개를 획득하며 종합우승을 차지, 2003년 파리 대회 이후 종합 5연패를 달렸다./이창훈기자 myway@kbmaeil.com

2011-09-05

“내년 올림픽서 전설이 되고 싶다”

역시 볼트였다.100m부정출발로 팬들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겼던 우사인 볼트(25·자메이카)는 3일 열린 남자 200m 결승에서 19초40의 시즌 최고 기록을 작성하며 우승, 팬들을 흥분시켰다. 이날 볼트의 기록은 2년 전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세계기록(19초19)을 작성한 이후 2년 만의 최고 기록이다.역대 기록 중에는 두 차례 자신이 작성한 19초19, 19초30의 세계기록과 마이클 존슨(미국)의 종전 기록(19초32)에 이어 4위에 해당한다.볼트는 트랙에 주저앉아 잠깐 숨을 고르고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번개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그리고 관중석에서 자메이카 국기를 받아 들고는 손에 말아 들고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볼트의 사진을 찍으려는 취재진 때문에 트랙 주변의 광고판이 넘어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다음은 볼트와의 일문일답-금메달을 딴 소감은.△아주 기분이 좋다. 최선을 다해 최대한 빨리 달렸다. 내가 자랑스럽다.-100m실격에 대해서.△참으로 아쉽다. `셋(set·차려)`이라는 소리를 `고(go·출발총성)`로 잘못 듣고 뛰어나갔다.우승에 대한 열망이 너무 강해 마음이 조급했다. 앞으로 이를 교훈삼겠다.-강력한 경쟁자는 누구로 봤는가.△모든 선수를 경쟁 상대로 생각한다. 오늘 달린 선수들이 다 훌륭하다.-뛰면서 무슨 생각을 하나.△200m는 100m보다 긴 거리이기 때문에 많은 생각이 든다. 지금 컨디션이 최상이 아니라 계속 내 자신에게 `잘할 수 있다`고 자기 암시를 보낸다.-오늘 결승전 소감은.△나는 원래 5번, 6번 레인에서 뛰는데 3번에서 처음으로 오늘 뛰었다. 코너 돌기가 어렵다. 돌 때는 약간 조심해서 돌았다. 오늘 기술이 최고는 아니었다. 그래도 만족할 만하다.-5, 6번 레인에서 뛰었다면 기록이 더 좋았을까.△다른 레인이었다면 코너를 돌 때 더 속도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부정출발 실격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나.△너무 흥분했고 긴장했다. 차분하게 경기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제는 경기 자체를 즐기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부정출발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나.△규정을 이미 알았고 내 실수였기 때문에 개정 규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더 집중해서 앞으로 경기에 임할 것이다. 코치도 `천천히 차분하게 뛰어라, 예측하지 말라`고 계속 주문했다.-부정출발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100m 기록은 얼마나 나왔을 것 같나.△아마 그렇게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9초70이나 9초60 정도가 됐을 것 같다.-세계기록이 나오지 않는 대구의 환경은.△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었는데 오늘은 바람이 잘 불어 내 기록도 세계기록에 가까워졌다. 다만 내 컨디션이 최고가 아니었다. 그러나 19초40에 충분히 만족한다.-내년 올림픽에 대한 각오는.△100m를 이번에 못 뛰었다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에 각오가 더 새롭다. 진지하게 임할 것이다. 나는 전설이 되고 싶다./이창훈기자 myway@kbmaeil.com

2011-09-05

매일 매일 축제… 젊은이들 마음 사로잡다

사통팔달 교통망에 접근성 탁월도심 속 쉼터서 문화 공간 대변신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통해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과 2·28 기념중앙공원이 대구 문화의 허브로 부상했다.특히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 교통 접근성도 좋은데다 이번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남·녀 마라톤과 남·녀 경보의 출발점 및 결승점으로 세계 곳곳에 생중계되면서 단순한 도심 속 쉼터에서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지는 공간으로 자리를 굳혔다.또 한국 근대사의 국채보상운동과 2·28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인 의미가 담긴데다 사통팔달의 교통망 덕분에 대구지역 젊은이들의 문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지역으로 거듭나면서 동성로만으로 국한되던 젊은이들의 거리가 이곳까지 확장됐다는 평가다.9일간의 육상대회기간 대구시가 동성로 등 5개 공간에서 마련한 도심문화행사인 컬러풀 대구페스티벌의 112회에 달하는 행사중에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과 2·28기념중앙공원에서 열린 행사만 각각 20회와 48회 등 68회를 차지해 전체 공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꽃이 피는 예술정원`에는 교향악과 합창, 무용, 기악, 전통공연, 재즈 등이 펼쳐졌고 2·28기념중앙공원 `상상의 숲`에는 마임극과 마당극, 뮤지컬, 연극, 성악공연 등이 길을 걷던 젊은이들의 발길을 붙들었다.다양한 장르만큼 공연 내용도 거의 백화점 수준으로 다양했다.이번 육상대회기간 이들 공원에서 선보인 공연 프로그램은 콘서트에서, 전통춤, 재즈, 오페라, 연극, 서커스 쇼, 플루트 연주, 피아노 연주, 남사당놀이, 마술, 뮤지컬, 인형극, 영화음악, 국악, 클래식, 피아노연주, 전시회 등 문화 전분야를 총망라해서 공연이 이뤄졌다.지난달 31일 오후 6시에 열린 `미리보는 오페라 축제`에서는 귀에 익숙한 오페라가 올려졌고 버스를 기다리던 젊은이들은 영화음악과 우리 가요 등이 계속 연주되자 하나둘씩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으로 몰려들어 함께 즐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지난 3일 오후 7시에 거리에서 펼쳐진 `저글링 코믹 마술쇼`와 지난달 30일 오후 6시에 공연된`나홀로 서커스 쇼`등은 화려한 댄스에 이어 코믹한 마술로 젊은이들이 가던 길을 멈추게 했고 공연장면을 담기 위해 연신 사진 플래시를 터뜨리며 저글링의 묘비를 만끽하기도 했다.같은날 오후 7시까지 열린 `거리의 피아노` 공연에서는 야외에서 연주되는 피아노 선율에 이끌린 관객들이 공연장 주위를 에워싸 도심 속 공원에서 문화를 직접 보고 듣고 즐기는 작은 연주회장으로 변모시키기는 등 새로운 도심문화의 정착을 엿보게 했다.또 지난 3일 오후 2·28기념공원에서 열린 `도심속의 재즈 스테이션`에서는 실용음악과 교수를 중심으로 구성된 밴드가 재즈는 물론이고 펑키, 라틴 등 다양한 장르를 연주하자 관객들이 함께 춤을 추면서 연주를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이재영(22. 수성구 만촌동)씨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입구에서 친구를 기다리다가 오페라 공연장에서 귀에 익숙한 우리 가요와 영화음악 OST가 흘러나와 나도 모르게 공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며 “대구에 이런 곳이 있는지 다시 알게 됐다”고 말했다.또 한빛나(27. 서구 평리동)씨는“자원봉사를 하는 친구를 통해 2.28기념중앙공원에서 심금을 울리는 플루트 연주를 듣게 됐다”며“번잡한 동성로보다는 이곳이 오히려 젊음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공간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김영태기자 piuskk@kbmaeil.com

2011-09-05

“국제행사 안전 기여 보람

끝까지 혼신의 노력한 대원들에 감사” “역대 어느 대회보다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을 자신이 있습니다”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대테러를 담당했던 대구지방경찰청 특공대장 이홍수(38) 경감은 “육상선수권대회에는 80여명의 특공대원들이 항시 출동 태세를 하고 있었다”며 “각종 전술 훈련을 통해 어떠한 경우에도 완벽히 대응할 태세를 완비해 테러가 근접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이 대장은 “지난달 31일 지하철 고산역에서 폭발물 신고가 접수됐을 때도 10분만에 폭발물처리반(EOD) 대원들이 현장에 도착, 지하철역사 출입을 통제하고 의심 물체를 검색한 후 안전을 확인해 40여분만에 상황을 끝냈다”며 대응테세가 완벽했음을 보였다.“대회 전에는 총기로 완전 무장한 대원들이 순찰을 할 경우 외국인들이 치안이 불안한 나라로 오해할까봐 무척 고민했었다”는 이 대장은 “그러나 실제 순찰할 때 외국인들이 오히려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친근감을 표시하며 사진 촬영까지 요청해 자부심과 함께 우려를 불식하게 됐다”고 언급했다.이어 이 대장은 “특히 특공대가 들고 있는 총기를 보고 외국인들이 신기해 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며 “40대이후 일부를 제외하곤 국내 관광객들도 우리 요원들에게 사진촬영 요청이 쇄도해 우리 사회에서도 경찰에 대한 이미지가 점차 좋아지고 있음을 느꼈다”고 은근히 자랑한다.9일간의 대회기간동안 힘든 일이 없느냐는 질문에 이 대장은 “2002월드컵대회 이후 대구에서 10여년만에 열리는 국제적인 행사에 안전을 책임지고 기여한다는 보람이 더 컸다”며“안전한 육상선수권대회를 위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끝까지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대원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김영태기자piuskk@kbmaeil.com

2011-09-05

유병훈·정동호 시상대 첫 태극기 꽂아 감동의 물결

남자 휠체어 T53 400m 2·3위 한국 첫 메달 3일 오후 대구스타디움 시상식 게양대. 호주국기와 함께 태극기 2개가 나란히 걸렸다.대회 막바지인 8일만에 처음 우리나라 태극기가 올라가는 장면이었다. 이날 관중은 귀로는 호주의 국가를 들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애국가를 불렀다.이날 태극기는 우리나라의 장애인 선수 유병훈과 정동호가 나란히 은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해 올라간 것.“이렇게 많은 관중 앞에서 경기를 치르니 꿈만 같습니다.”경기장 곳곳에서 여자 높이뛰기 결승, 남자 창던지기 결승이 펼쳐지며 어수선한 가운데, 3일 오후7시55분 스타디움에 휠체어가 등장했다. 휠체어를 탄 8명의 선수가 예선 없이 바로 결선을 치르는 이번 대회 이벤트 종목인 남자 휠체어 T53 400m에 한국의 유병훈과 정동호가 나섰다.T는 트랙을 의미하고 53은 허리를 쓰는 데 불편함이 있는 장애 상태를 의미한다.관중석의 육상 팬들은 휠체어에 탄 한국 선수가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질렀다. 앞서 뛰었던 블라인더 러너 스미스와 블레이더 러너 피스토리우스에게 보낸 격려처럼. 경기에 나선 유병훈과 정동호는 관중의 환호성에 메달로 보답했다.유병훈은 50초69의 기록으로 49초36을 기록한 리처드 콜먼(호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유병훈과 함께 달린 정동호는 50초76으로 3위에 올랐다.이로써 유병훈과 정동호는 이번 대회에서 한국 선수로는 첫 메달을 땄다. 두 사람이 2·3위 시상대에 함께 올라 관중이 느끼는 감격의 강도는 더했다. 출발이 약하다는 평을 듣는 유병훈은 긴장감으로 경기 초반에 중위권 이하로 처지며 정동호에게도 밀렸지만 중반 이후 스피드를 올리고 막판에 폭발적인 스퍼트를 내면서 정동호를 앞지르고 2위까지 치고 올라섰다.모든 코너를 돌고 난 340m 지점에서 선수들이 폭발적인 스퍼트를 내며 경쟁하는 장면은 이 종목의 하이라이트. 유병훈은 마지막 직선 주로에서 팀 동료 정동호를 간발의 차로 앞서는 드라마를 연출했다.하지만 1위로 치고 나간 호주의 리처드 콜먼을 따라잡기는 역부족이었다.유병훈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긴장을 많이 했다. 홈 관중이 꽉 들어찬 경기장에서 경기를 펼치니 눈물이 절로 난다”고 소감을 밝혔다./이창훈기자 myway@kbmaeil.com

2011-09-05

한국 노메달 수모 세계의 벽은 높았다

개최국 역대 3번째 오명… 희망 걸던 `틈새 종목`마저 무릎 개최국 메달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남자 마라톤마저 중하위권으로 처지면서 이번 대회 개최국 노메달국의 오점을 남겼다. 13회 대회동안 주최국 노메달국의 멍에를 쓰고 있는 스웨덴과 캐나다에 이어 역대 3번째 국가에 이름을 올렸다.대회 첫날 향토 대구은행팀이 주축이 된 여자 마라톤을 필두로 여자 100m 정혜림, 남100m 김국영, 여자 멀리띠기 정순옥, 남자 높이뛰기 윤제환, 남 1,500m 신상민, 여자 세단뛰기 정혜경, 여자 20km경보 전영은 등이 줄줄이 탈락했다. 대회 중반에 접어들면서 어느정도 기대를 걸었던 남자 20km경보 김현섭이 최종 6위로 마감하며 세계의 벽을 실감해야만 했다. 이어 벌어진 남자 멀리뛰기에서 김덕현이 결선에 올랐으나, 세단뛰기에서 부상당해 기권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김덕현도 결선 12명 중 11위로 진출해 메달권과는 거리가 있었다사실 조직위는 처음 `10-10전략`(10개종목에 10명 결선진출)을 목표로 힘찬 스타트를 걸었으나 첫날 여자마라톤부터 저조한 기록이 대회 끝까지 이어지면서, 실날같은 요행마저 비켜갔다.우리나라는 1983년 1회 대회부터 꾸준히 선수를 파견했으나 한 번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정식 종목에서 메달을 따낸 적이 없다.2007년 오사카 대회에서 살인적인 무더위의 덕을 본 남자 마라톤이 2위에 오른 적이 있으나 번외 경기라 정식 메달로 집계되지 않았다. 이를 제외하면 1993년 대회 남자 마라톤에서 김재룡이 4위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톱 10`에 진입한 것도 다섯 차례밖에 없다.남자 높이뛰기의 이진택이 1997년 8위, 1999년 6위에 올랐고, 1999년 여자 포환던지기의 이명선이 10위, 2007년 남자 세단뛰기의 김덕현이 9위를 차지한 것이 전부다.이런 배경에서 2007년 케냐 몸바사에서 올해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한 한국 육상은 다양한 방법으로 선수들의 성적을 끌어올리려 애를 썼다.2007년에 마라톤 등 장거리 선수들을 아프리카 케냐에 보내 훈련시켰고, 지난해에는 김국영과 박봉고 등 단거리 선수들을 미국으로 보내는 등 유망주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또 외국에서 코치를 초빙해 선진 기술을 배우는 투자도 했다. 상대적으로 세계 수준에 근접하기 용이한 `틈새 종목`을 노리겠다는 것이었다.남자 경보는 육상연맹이 점찍은 틈새 종목 중의 으뜸이었다. 마침 김현섭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등장하면서 메달권도 바라볼 수 있다는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김현섭은 끝내 세계 강호들과의 경쟁에서 객관적인 실력 차의 벽을 넘지 못하고, 순위 밖으로 밀려나 조직위의 실망은 더욱 컸다.이에대해 조직위는 “이번 대회에서 한 개의 메달이라고 따 개최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 세계의 실력과 차이가 있다보니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를 계기로 꿈나무를 발굴, 육상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좋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이창훈기자 myway@kbmaeil.com

2011-09-05

`아!남자 마라톤마저`

단체전 겨우 6위… 케냐 키루이 2연패 이번 대회 노메달국의 오명을 벗을 마지막 기회였던 마라톤에서 한국 선수들이 개인전은 물론 단체전 6위에 그쳐 개최국 노메달국이 확정됐다.대회 폐막일인 4일 오전 9시에 열린 남자마라톤에서 정진혁(21·건국대)이 2시간17분04초로 23위로 골인했고, 이어 이명승(32·삼성전자)이 2시간18분05초의 기록으로 28위에 올랐다.황준현(24·코오롱)은 2시간21분54초로 35위에 머물렀고 황준석(28·서울시청)과 김민(22·건국대)은 각각 2시간23분47초, 2시간27분20초로 40위와 44위로 처졌다.지난 3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9분28초를 찍고 깜짝 2위를 차지했던 정진혁은 15㎞까지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속도전을 펼친 아프리카 철각들에 밀려 20㎞ 이후부터는 중위권으로 떨어졌다.상위 세 선수의 기록을 합쳐 6시간57분03초에 그친 한국은 마라톤 단체전(번외경기)에서도 6위에 머물러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케냐의 철각 아벨 키루이(29)가 2시간7분38초의 기록으로 우승, 남자 마라톤 2연패의 금자탑을 세웠다.2년 전 베를린 세계대회에서 2시간6분54초의 대회 신기록으로 정상을 밟았던 키루이는 이날 출발부터 줄곧 선두권을 유지하다 30㎞ 지점부터 선두로 치고 나와 10㎞ 이상을 독주한 끝에 여유 있게 타이틀을 방어했다.지칠 줄 모르는 체력이 돋보이는 키루이는 결승선을 끊은 뒤 우승자가 결정될 때 나오는 대회 주제가 `렛츠 고 투게더(Let`s go Together)`에 맞춰 춤을 추면서 기쁨을 만끽했다.키루이의 개인 최고기록은 2009년 작성한 2시간5분04초로 이번 대회에서도 일찌감치 우승할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이날 날씨가 섭씨 24.5℃, 습도 67%로 선선한 편이었고 구름이 끼면서 햇볕도 거의 나지 않아 세계최고 수준의 케냐 철각들이 강세를 보였다.케냐의 빈센트 키프루토(케냐)가 2시간10분06초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3위는 2시간10분32초를 찍은 페이사 릴레사(에티오피아)가 차지했다. /이창훈기자 myway@kbmaeil.com

2011-09-05

대구세계육상선수권 결산 ◇육상 불모지를 참여와 봉사로 꽃피우다

대구시민 중심 행사장 곳곳 미소·친절 빛나 이번 대회에서는 폐막일인 4일 오후 남자 400m 릴레이에서 우사인 볼트가 마지막 주자로 나선 자메이카 팀이 37초04으로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피날레를 장식, 세계신기록 없는 대회로 전락할 위기에서 벗어났다. 우리 선수들의 성적은 초라해 남의 잔치로 끝났다. 그러나 `육상 불모지 한국에서, 그것도 비수도권 대구에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우려는 말끔히 씻어냈다.무엇보다 대구시민을 중심으로 한 전 국민적 참여와 자원봉사의 헌신이 빛났다. 소문난 대구의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오전 세션부터 수많은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오후 세션에서는 대구 스타디움이 만석이 될 정도로 관중이 들어찼다. IAAF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9일간 입장권은 전체 45만3천962석의 99.2%인 45만356석이 팔렸다. 관중석도 늘 만석에 가까웠다. 목표 관중 49만명의 92%인 45만명이 찾은 것이다. 2007년 오사카대회 25만4천명, 베를린대회 39만7천명을 넘어섰다. 관중들의 관전 매너와 응원도 수준급이었다. 관중들은 역대 어느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파도타기 응원을 자발적으로 해보였다.자원봉사자와 시민서포터즈의 활동이 감동적이었다. 대구시민이라는 자부심과 주인정신 아래 모인 6천700여명의 자원봉사자와 1만7천명의 시민서포터즈는 행사장 곳곳에서 밝은 미소와 친절로 손과 발이 돼 줬다. 시민서포터즈는 각국의 선수·임원을 따뜻하게 맞는 접빈객의 역할도 맡아 훌륭히 수행했다./이곤영기자

2011-09-05

대구세계육상선수권 결산 ◇빛나는 경제·문화적 성과

유발가치 2조원 이상… 한국 알리는데 큰 역할 대회에 직접 투자된 2천466억 원과 정부 추가 지원금 994억 원은 마라톤 코스 확장·정비, 경기장 진입도로 개설, 육상진흥센터건립 등에 사용됐다. 투자 비용이 적게 든 저비용 고효율의 대회였다.대구경북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이번 대회 생산유발은 5조5천876억 원, 고용유발은 6만2천841명, 부가가치유발은 2조3천406억 원으로 평가된다.이번 대회는 전 세계에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지역 예술단체가 대거 참가해 기획 제작한 대구 도심의 문화행사에는 경기를 마친 선수·임원, 외국인 관광객들이 즐겁게 몰려들었다.관광 발전에서도 가능성을 확인시켰다. 약령시 한방체험과 팔공산 투어, 동화사 템플스테이, 승시 프로그램 등 한국의 전통문화는 외국인의 집중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대구시청의 투자유치 활동도 활발했다. 시청은 주한 유럽상공회의소 회원사 초청 투자설명회, 해외바이어 초청 수출상담회, 한국로봇산업협회 오픈 팩토리, 대구텍 해외고객사 초청 등 국내외 대기업을 초청해 대구의 투자환경을 보여줬다. 해외바이어 초청 수출상담회에는 10개국 58개사가 찾아 지역기업 103개사와 상담을 통해 9천276만2천 달러의 가계약을 체결했다./이곤영기자

2011-09-05

대구세계육상선수권 결산 ◇경기시설 등 하드웨어 최고 수준

IT기술 최첨단장비 원활한 경기 운영 도와 완벽한 경기시설, 뛰어난 IT기술, 어느 대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선수촌 등이 외국 선수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줬다. 주 경기장인 대구스타디움은 IAAF로부터 국제공인 1등급인 `Class-1` 인증을 받았다. 전광판은 분할 연출이 가능한 초대형 기종으로 교체됐다. 멀리뛰기와 세단뛰기에 쓰이는 전동식 모래장 정리기, 경기장에 투척된 포환과 원반 및 창 등을 회수하는 투척용구 회수차량 등 최첨단 장비는 원활한 경기 운영을 도왔다.뛰어난 IT환경에 세계의 취재진이 극찬을 했다. MPC시설과 경기장 대형스크린 및 앰프시설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입촌한 선수촌은 쾌적했다.선수촌, 대구스타디움, 동대구역, 지하철 고산역과 신매역, 범물동과 지하철 율하역에 셔틀버스를 배치해 선수의 80% 이상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관중들의 경기장 왕래 여건도 충분했다.경보와 마라톤 로드 경기에서는 시민들이 교통통제에도 불평 없이 질서를 지켰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한 도시마다 골머리를 앓았던 선수들·취재진의 숙박·교통 문제를 이번엔 말끔히 해결해 낸 것이다.대회 준비가 경제적이었다는 것도 칭찬의 대상이 됐다. 주 경기장을 새로 짓지 않고 월드컵과 유니버시아드 등을 치른 대구 스타디움을 리모델링해 사용했다. 선수촌은 이미 민간에 분양 완료됐다./이곤영기자lgy1964@kbmaeil.com

2011-09-05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7> 포항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구룡포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어 갔다. 바다에서 잡아 올리는 수자원을 보관하기 위해 마을 곳곳에 우물을 파고 저장고를 지었다. 정신문화의 계승을 위해 신사와 절을 지었다. 그리고 학교를 세웠다. 얼마 전 폐교가 된 동부초등학교는 일본인들이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심상소학교였다. 심상소학교는 훗날 지금의 중학교 과정인 고등과를 신설하고 조선인 자녀 서너 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치열하고 격동적인 움직임에 비해 정착촌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일상은 매우 평범했다. 몇몇은 조선인 친구들과 유년의 깊은 우정을 쌓기도 했다. 1918년 구룡포에서 태어나서 평생 토박이로 살아 온 서상호(93세)씨는 그들과 보낸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日人들 신사와 절 학교 등 짓고 그들만의 정신문화 계승 본격화조선 어부와도 공생 관계… 겉으론 평온“여름이면 구룡포 해수욕장이나 근처 바다에서 고기도 잡고 수영도 했지요. 겨울이면 어울려 썰매를 탔구요. 돌아다니며 철사를 구해서 썰매를 만들어 장터 앞 거랑에 가서도 타고 논에 물을 막아서도 탔습니다. 형편이 좀 나은 아이들은 일본 나막신에 날을 달아 스케이트를 탔지요. 어스름 저녁 무렵 헤어지면 다음날 아침 다시 만나 놀곤 했습니다. 나카이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배우지도 않은 한국말을 아주 잘했어요. 나카이시에게는 서너 살 위의 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 역시 조선말을 술술 했지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몰라도 심지어 우리 옛날이야기까지 재미나게 들려주곤 했는걸요. 다른 일본 친구들과는 일본말로만 대화를 해야했지만 나카이시와는 조선말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했어요”그 시절, `나나`라고 불리던 처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인 집에 파출부로 들어갔는데 주 일거리는 아이를 봐주는 것이었다. 나이가 15~16세 정도의 어린 처녀들이었는데 일본인 집에서 거주하면서 아이를 보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아침에 일본인 집으로 들어갔다가 저녁 9시경이면 돌아왔다. 나나들은 약간의 보수를 받고 일을 했는데 한두 달이 지나면 특별한 일본어 교육을 받지 않고도 일본말을 유창하게 했다. 그들이 `나나`라고 불린 이유는 맨 처음 그 일을 맡은 처녀의 이름이 `란` 혹은 `난`으로 끝나 `란아` 혹은 `난아` 라고 부르던 것에서 서서히 `나나`가 되었고 후엔 그 일을 하는 모든 이들을 총칭하는 대명사가 된 것이다.“일본인들 은 10월 15일경이면 아끼 마쯔리라는 가을 축제를 크게 벌였습니다. `미꼬시` 또는 `오미꼬시` 라며 나무로 만든 빈 가마를 메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지요. 가마를 멘 청년들이 좀 잘 사는 집을 찾아가면 주인은 술과 떡 같은 음식을 내놓았어요. 그렇게 온 골목을 요란스레 돌고는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도 가마를 멘 채로 바닷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들이 `와쇼이!` 혹은 `와세이` 라 외쳤는데 어른들은 조선시대 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 “왔소!”라고 한데서 유래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추절 행사 때는 온 동네가 집집마다 처마 끝에 고운 단풍잎 같은 낙엽을 만들어 빙 둘러 달고 등불을 달았어요. 빨간 단풍잎을 단 처마도 멋졌지만 밤이면 불을 밝히던 등불도 장관이었지요. 그렇게 온 동네가 치장을 하고 한 사나흘 정도 들썩거렸는데 신사에서 시작해서 신사에서 끝났습니다. 마쯔리축제는 순전히 일본인들만의 축제였어요. 조선사람들은 해코지를 하지도 않았고 방해도 하지 않았지요. 그저 구경만 했습니다”반면 조선인들은 음력 8월16일이면`들구경`이라는 행사를 했다. 추석 다음날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 입구의 용두산 고개로 올라갔다.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삼정골이고 성동이고 몰려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좀처럼 바깥나들이가 없었던 처녀들도 그 날만은 잘 차려입고 나섰다. 전날 추석 명절에 준비한 음식을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사돈이나 일가친척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올라왔다. 좀처럼 들판 구경이 힘든 바닷가 사람들이라 가을 동산에 올라 눌태리 쪽 들판을 바라보는 들구경은 아주 인기가 좋았다. 누가 언제 시작했고 언제 끝이 났는지는 모르나 그리운 추억이다. 들구경에는 일본인들이 참여하지 않았고 순전히 조선인들만의 행사였다. 마쯔리를 구경하던 조선인들처럼 일본인들은 들구경을 지켜보며 흥미로워 했다.일본인들은 주로 어스름한 저녁 무렵에 결혼식을 했다. 따로 식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주로 자신의 집 2층에서 했으므로 자세한 절차나 광경은 볼 수가 없었다. 하객이 북적이지 않았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치렀다. 또 그들은 함께 살던 이웃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 장례를 치렀다. 상여는 시신을 눕힌 직사각형인 우리나라 상여와는 조금 달랐다. 일본인들의 상여는 마치 가마처럼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들은 시신을 바르게 앉힌 채로 가마에 태우고 가서 화장을 했다. 그러나 축항을 만들고 나서 지금의 구룡포 화장장 앞에 새로 화장장을 만들고는 그들 역시 시신을 눕히는 형태로 바꿨다. 아마도 사망 후 시신을 앉은 자세로 유지하는 것이 번거로웠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변화는 공존하는 세월이 길어지면서 섞인 문화의 대표적 예다. 지금의 동부초등학교 부근에 일본인들이 만든 납골당이 있었는데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모두 가져갔다. 그러나 구룡포 공원 옆 대나무 숲에는 무덤이 하나 남아 있다. 당시 신사의 제주였던 사카이 어머니의 무덤이다. 사카이는 당시 80세가 넘는 나이였는데 본국으로 떠나면서 무슨 연유인지 어머니의 무덤을 챙기지 못했다. 나이가 연로한데다가 느닷없이 닥친 상황에 경황이 없던 탓인지도 모르겠다.구룡포에 거주하던 양측 어민들의 관계에서 특별히 드러나는 부딪침은 없었다. 조선인들은 그들로 인해 활기를 띄기 시작한 항구의 모습에 협조했고, 일본인들은 텃세를 부리지 않고 자신들을 호기심으로 지켜보던 조선인들과 공생의 지혜를 발휘했던 탓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 속에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경계했으리라는 느낌도 버릴 수가 없다. 계속* 이 글은 2009년 3월, 소설가 조중의씨와 필자가 공동 집필하여 발간한 `구룡포에 살았다(도서출판 아르코)`를 바탕으로 쓰였습니다.

2011-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