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마다 어김없이 열리는 관촌 장날오늘도 아홉시 버스로 장에 나와병원 들러 영양주사 한 대 맞고소약국 들러 위장약 짓고농협 들러 막내아들 대학등록금 부치고시장 들러 생태 두어 마리 사고쇠고기 한 근 끊은 일흔 다섯 살의 아버지볼일 다보고 볕 좋은 정류장에 앉아졸린 눈으로 오후 세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기력조차 쇠잔해진 그림자가 꾸벅꾸벅 존다시골 장 서는 날 아버지의 동선을 따라감으로써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평화 한 컷을 선연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현재형으로 호명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정겨운 언어들로 풀어내고 있다. 아버지의 시간들- 정확하고 느릿하면서도 쇠잔한 그 시간들에 대해 간절한 그리움은 비단 이 시인에게만 있는 것일까, 아버지가 많이 그리워지는 아침이다.시인
2014-11-13
어느 날 인터넷에 내 이름을 검색하니간밤에 무슨 성도 돌아가시다, 가 뜨고모르는 여러 사람들이 명복을 빌고 있다그것 참 나 모르게 내가 죽어 추모되다니나 말고 또 어떤 이가 내 이름을 썼겠지뜻밖에 듣는 부음에 내가 나의 명복을 빈다재미난 시다. 시인이 어느날 컴퓨터 검색창에 자신의 이름을 치고 검색을 했더니, 동명이인의 아무개 성도가 죽었다고 뜨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명복을 비는 댓글을 올려놓은 것을 발견하고 황당한 체험을 시로 쓴 것이다. 언젠가 자신도 진짜로 죽을 것이고 다시 검색창에 오를 것이고 누군가가 또 똑 같은 황당한 체험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명복을 빌어보는 뭔가를 생각게하는 재미난 시다.시인
2014-11-12
새 한 마리가 뚫고 오르는가을 하늘에서갈잎 밟는 소리가 들린다오늘 하루만이라도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고길 밖으로 훨훨 떠나가겠네바람아 붙잡지 마라!구름아 따라오지 마라!깨끗하고 투명한 가을 하늘로 새 한 마리 솟아오르고 있다. 청정무궁의 시공 속으로 날아가는 가을 새를 바라보면서 시인은 분탕스러운 현실을 들여다본다. 아니, 온갖 스트레스와 고민과 생각으로 꽉 찬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번뇌의 세상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려고 눈감고 귀 막고 길 밖으로 내려서서 훨훨 날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저 자유로운 영혼의 새들처럼.시인
2014-11-11
진달래꽃을 스치면 진달래꽃이 되고후박나무잎을 만나면 후박나무잎이 된다사막 언덕을 넘을 때면 거대한 모래산이 되고드넓은 바다를 건널 때면 거친 파도가 된다보이지 않아도 가장 먼저 자신을 알리고허공을 날 때면 없는 듯 있다검고 긴 머리칼을 만나면 여인이 되고단단한 이마를 스치면 남자가 된다무엇을 만나면 그 무엇이 되고그 어디를 스치면 그 어디가 되는 바람바람은내 안에 스미어또 다른 나를 만든다꽃을 만나면 꽃이 되고 나뭇잎을 만나면 나뭇잎이 되고 모래산이 되고 거친 파도가 되는 바람은 우주만물과 가장 잘 동화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이 시에 깔려있다. 바람이 그러하듯 우리네 인생들도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살아가길 소망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다.시인
2014-11-10
누가 깨어가을이 살살 깃드는 소리와겹겹이 옻칠 같은 어둠 속산사 떨리는 종소리와우주의 고귀한 생명들살아 숨 쉬는 소리하나로 듣고 있을까시인은 어느 가을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 산사의 종소리를 듣고 있다. 그 신선한 공기를 뚫고 번져가는 종소리가 시인의 몸 속으로 들어와 세포 하나하나에 스미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 종소리 뿐 아니라 자연, 우주의 만물들이 서로 소통하며 깨끗하고 경건한 생명감을 나누고 함께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이리라.시인
2014-11-07
접점을 찾아야 해달려오는 봄의 속도에 맞춰정확한 탄성을 내지를 때꽃봉오리는 탁 피어오르듯한 치의 오차도 없이허공을 가르는 배트의 원심력생의 딱 한 번 있을 법한주어진 운과만들어야 할 노동이 행복하게 만나는 점그 어떤 떨림도 없이손맛을 찾을 때타구는 달콤함을 느끼며, 하염없이센터를 향해 날아갈 예정이다`스위트 스폿`이란 말은 달콤한 지점이라는 뜻인데 시인은 예를 들어 야구에서 공과 배트가 만나는 히트의 순간이 달콤한 지점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러한 접점의 순간은 그리 흔치 않고 잘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도 이러한 스위트 스폿은 우연과 필연의 상호작용 속에서 어느날 우연히 찾아오는 것 아닐까. 시인은 간절히 그 달콤한 지점에 닿고자 소망하고 있다.시인
2014-11-06
곰작 않고 죽은 체하는한 마리의 고요를 본다공기들을 일순 긴장시키며물질이 된 놈의 태연한낮의 정적과 바람 햇살을상처로 덮은 채놈은 격렬하게 떨고 있을 것이다(마음이 있다면 금 갔을 것이다)몸뚱이 온통 귀로 만든저 번지는 선들의 소용돌이무정부주의자처럼 흔드는 섬모들…후략…시인은 배추벌레가 죽은 척하고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고 거기에 고여 있는, 아니 격렬하게 움직이는 고요를 발라내고 음미하고 있다. `내 발 앞의 배추벌레`라는 부재를 가진 이 시는 고요한 풍경 속의 사물들이 가만히 죽어있거나 정체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섬세한 시인의 인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시인
2014-11-05
내 이름은 진창진입니다 아니 진진입니다선생님께서 이름이 시와 걸맞지않다고 가운데 `창` 자를 떼곤 두 자 이름으로지어주셨습니다진진, 군침이 도는, 약간 중국 냄새가 나는, 말랑말랑한내 이름 속에는말을 다듬어 말의 오두막을 짓고심심하면 전설 속의 제주 미인 자청비를 불러 연애도 하는선생이 있습니다어떤 날은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가 기웃대는가 하면,어떤 날은 바가지를 긁어대는 뺑덕어멈이 있고어떤 날은 털북숭이 사내가 몰래 들어와 수작을 부리고자신의 이름에 얽힌 조그만 이야기와 시인의 느낌을 적은 이 시는 이름이 갖는 기호성과 그 속에 담긴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시를 적은 진진이라는 시인은 여자다. 성격이 거칠고 고집 센 남자같은 느낌도 드는 진창진이라는 원래의 이름보다는 나긋나긋하고 다소곳한 느낌이 드는 진진이라는 이름으로의 교체가 갖는 감회를 읽을 수 있다. 우리의 이름이 갖는 느낌은 어떨까?시인
2014-11-04
흙벽 무너지고 덩쿨풀 우거진 폐가사람살이 떠나 풍화에 몸 맡긴 집그 세월의 무게 못 견뎌 문짝 하나가 떨어져도, 제 팔 하나 뚝 떼어 던져주고홀로 뒹구는 장독대의 빈 항아리, 마치 소신공양하듯 껴안고 등신불이 되는풀들, 그렇게 풀들의 집으로 고요히 돌아가고 있는 폐가그 폐가 앞에 서면마치 풀들이, 설산 고행을 하듯 모든 길 잃은 것들 데리고귀향하는 것 같을 때 있다풀의 집은 풀이듯 데려와, 제 살의 흰죽 떠먹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잡풀들이 우거진 폐가를 지나며 시인은 선승의 묵언수행을 떠올리고 있다. 넝쿨풀은 폐가를 풀의 집으로 데려다주는 부처다. 침묵의 극점에서 남아있는 것들 하나하나 다 사라지고 사람의 기척마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설산에서 고행하는 부처처럼 뼈만 앙상한 모습으로 가만히 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풀이라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상상하는 시안이 깊고 그윽하다.시인
2014-11-03
기울어진 길을 누가 제일 잘 달리는가중심 밖으로 기울어진 여섯 개의 트랙선두주자의 속도를 방해하는 바람을 막기 위해그는 앞에서 달린다어디로 파고들 것인가모든 기회는 그의 등 뒤에 있다골인지점을 향해 속도를 내야하는 마지막 한 바퀴허벅지의 근육들 팽팽해지는 찰나그는 재빨리 트랙 밖으로 사라진다수없이 달렸지만 그에겐 기록이 없다빗발치는 야유마저도 그의 것이 아니다자전거는 삼백 개의 부품으로 달리고사람은 단 하나의 외로움으로 달린다시인은 기울어진 길을 가장 달 달리는 바람막이인 `경륜 선두유도원`을 바라보면서 승리를 향해 파고들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고 마지막 남은 한 바퀴를 남겨두고 트랙 밖으로 사라져버리는, 그 절망적 현실을 받아들이는 운명적인 외로움이랄까 아픔을 그려내고 있다. 경륜의 바람막이의 외로움을 말하면서 시인은 매일매일이 바람 치고 비탈진 길을 달려가는 한 생을, 그 길을 선두유도원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를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해 주고 있다.시인
2014-10-31
콘크리트 갈라진 자리마다푸른 물줄기가 새어 나온다물줄기는 분수처럼 솟구쳐 포물선을 그리지만땅바닥에 뚝뚝 떨어지지는 않는다쉬지 않고 흔들려도 떨어지지는 않는다포물선의 궤적을 따라출렁거리는 푸른 물이 빳빳하게 날을 세운다약한 바람에도 눕고 강한 바람에도 일어난다포물선은 길고 넓게 자라난다풀줄기가 굵어지는 그만큼 콘크리트는 더 벌어진다연하고 가느다란 풀뿌리들이콘크리트 속에 빨대처럼 박히자커다란 돌덩어리가 쭉쭉 콜라처럼 빨려 들어간다시인은 연약한 힘이지만 끝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풀을 인용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약한 바람에도 눕고 강한 바람에도 일어나는 풀의 이 절묘한 힘을 우리는 이 땅의 민초들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하고 가느다란 풀뿌리가 커다란 돌덩어리라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시인의 인식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시인
2014-10-30
금강송 잔가지들은 햇빛 받으러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있다넘치는 햇살만 줄기 타고 번져온다벌겋게 까진 산길엔 통나무집 한 채손가락으로 머리 빗는 할머니장성한 자식들 도시에 나가 있고소리 없이 일어나는 개 한 마리허스키,눈썰매에 디프테리아 항혈청 싣고혹한 속 멀고 먼 설원을 달려놈 아이들을 구해낸 시베리안 허스키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으니부드럽게 목을 들어올린다털 속의 털 보얗게 드러날 때푸른 눈빛에 스쳐가는 눈보라눈보라 속을 헤쳐 나와할머니 옆에 기대앉는 허스키할머니가 손가락으로 미소로허스키의 뭉친 털을 벗겨주고 있다낯선 러시아 땅에서 느낀 금강송과 통나무집이 있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거기에 스며있는 할머니의 동작과 미소에서 느끼는 생의 따스함을 정갈한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젊은이들이 떠나버리고 할머니와 개만 남아 있어 얼핏 차갑고 쓸쓸해 보이기 쉬운 시베리아의 일상적 삶을 관통하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운 빛과 할머니와 개가 자아내는 따사로움이 가만히 다가오는 아침이다.시인
2014-10-28
앞차에 헌 자전거가 한 대 실려간다끈을 문 트렁크 뚜껑이 질겅질겅자전거를 씹는 형국이다불가사리다, 자전거에 감긴 길길이 길 잡아먹는 것 본다 경부고속도로나는 조수석에 기대앉아 지그시되새김질에 빠진 하마다. 청춘….제멋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아,잘 씹지도 않고 삼킨 길이 지금막힌 길이 저 아가리에 깜깜 오래 질기다재미난 장면 하나를 소개하면서 시인은 청춘의 시간들 그 아득히 지나가버린 시간들에 대해 추억하고 있다. 제멋대로 소화하지 못했던 그 뜨거웠던 젊음의 시간들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다. 목표도 없이 무작정 내달린 길, 맹목적인 열정으로 달려갔던 청춘의 길, 한번도 뻥 뚫린 적이 없는 감감하게 막힌 길에 대한 서운하고 아쉬웠던 시간들에 대해 뒤돌아보고 있다. 우리에게도 그런 길들이 있었다. 아득한 그 길이.시인
2014-10-27
아직도 어머니를 파먹고 있다고향집 뒤란 그녀의 간장 독 속에는알금알금한 망사주머니인지 삼베주머니인지어머니의 기술이 숨겨져 있는 것인데그것이 맑은 장을 뜨기 위한 필터인지간을 조절하는 장치인지 모를 일이나그녀에게는 중요한 덫이고 간을 재는계기판 같은 것이리라허연 매를 걷어내면 꼴삭하게묵은 간장이 깊은데거기 어머니의 길이끝도 없이 무너져 내려짭쪼롬하게 웅크린 그녀의 통로가 있다싱거운 세상의 길그녀를 파먹으며 이만큼 왔다고향집 뒤란에 아직도 어머니가 거느리는 독이 몇 있다. 간장과 된장, 맛깔스런 빠알간 고추장이 꼴삭하게 담겨져 있는 장독대에서 화자가 느끼는 어머니의 한 생과 사랑과 정성을 그려내는 시다. 오랫동안 장을 담아놓고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간장독에는 어머니의 인고의 세월이 녹아있다. 자식과 가족을 향한 일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과 정성이 그윽한 맛으로 스며있다. 이 땅 어느 산자락 어느 모룽지마다 어머니와 함께 낡아가는 고향집 뒤란에는 이러한 간장독이 없을 것이며 그 독마다 꼴삭하게 녹아있는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의 향기가 없겠는가.시인
2014-10-24
너는 늘 꿈을 꾸는 천상의 여인이었지, 이슬비 젖은 음계 연주하는 꽃이었어, 발목 흰 아이들을 품으며 수채화도 그렸지물안개 고운 날은 꽃잎 속에 눈을 뜨고, 난해한 신의 지문 마흔 아홉을 인화하면, 물보다 진한 그리움이 연꽃으로 피었어천상의 여인이면서 이슬비 같은 음계를 연주하는 여인, 지상의 꽃이기도 한 여인이 시인이 말하는 항아다. 실존적 인간이면서 그녀는 우주요 자연이다. 아름다운 여성성을 간직한 여인이다. 시인의 다른 시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이 항아라는 여인은 참으로 신성하고 아름다운 미의 표상이며 존재의 실상이다. 저만치 보이는 곳에서,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운 눈빛의 항아가 있다. 그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아침이다.시인
2014-10-23
바람은 풍경을 흔들어 댑니다풍경 소리는 하늘 아래 퍼져 나갑니다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나는그 속마음의 그윽한 적막을 알 리 없습니다바람은 끊임없이 나를 흔듭니다흔들릴수록 자꾸만 어두워져 버립니다어둡고 아플수록 풍경은맑고 밝은 소리를 길어 나릅니다비워도 비워 내도 채워지는 나는아픔과 어둠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어두워질수록 명징하게 울리는 풍경은아마도 모든 걸 다 비워 내서 그런가 봅니다풍경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깊은 사색에 든다. 풍경은 바람에 흔들릴 때 그윽하고 맑은 소리를 내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은 왜 맑아지기보다 어두워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이런 의문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의식하고 반성하는 겸허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을 읽으며 우리도 좀 더 비우고 낮추고 더 겸손하게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봄직한 아침이다.시인
2014-10-22
낙타똥 뒤섞이는 봄동쪽 사막 기차역이 그림자 수건을 펄럭인다어린 손녀와 주전부리 좌판을 잡고 선 뭉흐바트르검은 두루마기 까마귀떼는 철둑길 모랫길 휘도는데그대 무얼 껴입은 세월이었나1950년 평양에서 기차로 흘러든 삼백 아이더러 돌아가고 떠돌다 묻히고어느새 꾀꼬리눈썹이 웃자란 채 그대말도 이름도 모르는 설렁거스오늘은 무슨 인사로 내게거품진 슬픔 한 병을 그저 건네는가몽골땅에서 시인은 우리의 아픈 현대사와 대면하고 있다. 1950년 아픈 반도의 역사를 등지고 흘러든 조선 사람들의 아픔과 비애가 시 전반에 깔려있다. 식민체험과 전쟁과 독재로 얼룩진 현대사가 곳곳에 유이민을 낳았지만 아무도 그들의 그 불행한 삶에 대해 책임지거나 그들이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시인의 가슴 아픈 현실인식이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먼 이국땅에서 건네받은 사이다 한 잔에서 이러한 아픈 역사를 들여다보는 시인의 아픔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시다.시인
2014-10-21
드넓은 김해평야에서 잘 자란 모 한 판집 옥상에 옮겨 심어놓고욕심이 과했던가 보다아침마다 물 대고 쓰다듬고 말을 붙이는데벼는 가을이 오기도 전에 비실비실 말라가고 있었다그 가녀린 벼에 무슨 힘이 있다고제 몸 하나 버티기도 힘든 놈 모가지에 매달려나는 마구 무엇인가를 애원하고 있었던가 보다어서어서 커서 쑥쑥 밥이 되어 걸어나가라고늦은 봄에서 여름까지 줄기차게 물 대고 말 시킨 죄날마다 쇳덩어리 하나씩 가슴에 안긴 꼴이었을까도시의 찌든 어둠과 불빛을 비료로 받아먹고벼는 가을이 오기도 전에 하얗게 머리가 세고 있었다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화자의 오랜 가슴앓이는 생명의 본질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도시문명의 피로, 도시의 흉년임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 시의 흥미로운 부분은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무너지고 규격화되고 제도화돼 버리는 도시 속 옥상에다 벼를 키운다는 사실이다. 문명의 병이 깊어질대로 깊어져 잃어버린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랄까, 전근대적인 농사법으로 생명을 키우며 그것을 느껴보고자 하는 시인 정신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시가 아닐 수 없다.시인
2014-10-20
화분에 매화꽃이 올 적에그걸 맞느라 밤새 조마조마하다나는 한 말을 내어놓는다이제 오느냐,아이가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나는 또 한 말을 내어놓는다이제 오느냐말할수록 맨발 바람으로 멀리 나아가는 말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어 깊은 구럭 같은 말뜨거운 송아지를 여남은 마리쯤 받아낸 내 아버지에게배냇적부터 배운토속적인 시인의 언어들에는 그 시어들이 가지는 푸근하고 여유로운 맛스러움 외에 강한 시인의 시정신이 숨어있다. 봄을 기다리는 늦겨울 어느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매화의 개화를 기다리며 시인이 툭 던지는 말 한 마디, `이제 오느냐` 이 말 속에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반가움과 함께 새로운 한 시간들이 열림에 대한 경이로움이 나타나있다. 모든 인간의 일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나게 되는 것에 대한 반가움과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보배로운 것이다.시인
2014-10-17
야산이 며칠 새 허리까지 깎여나가자, 무연분묘 한 쌍 허공에 덩그렇게 떠올랐다. 제상에 나란히 오른 고봉밥 같기도 했고, 오래전 떠난 애인의 젖무덤이거나, 사막 가운데 우뚝 선 낙타 등 같았다. 저 아슬아슬한 허공 무덤은 생이 한바탕 부유(浮游)라는 걸 보여준다. 저 무덤 객잔은 원래 거기 있던 거였지만, 모래먼지처럼 떠올라 공중 사원(寺院)이 되었다`생이 한바탕 부유`라는 부분에서 이 시의 중심을 본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바탕을 이루는 이 시는 변화무쌍한 우리의 삶이 어느 순간도 멈춰있지 못하고 흐르고 있으며, 그 수많은 고통의 순간들을 껴안은 채 공중무덤에 들어 가버리는 것이 우리네 한 생이 아닌가 하는 시인의 통찰에 깊이 동의하고 싶은 아침이다.시인
2014-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