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건, 신들이 버리고 간 별자리나 돌보려는 자는이 도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유리벽 안쪽 거인들 어깨에도 먼지와 소음이주점 불빛이 취기처럼 덧쌓이고환영의 거리를 빠져나온 나는표정 없는 동시대의 엘비스와 헤라클레스와 아인슈타인을 지나쳐 걸어간다헤라클레스는 여전히 엘비스의 기타 선율과 아인슈타인의 미소 가운데 놓여 있다헤라클레스는 여전히 여름 하늘 거문고좌와 목동좌 사이에, 엉거주춤거꾸로 매달려 있다인간의 운명을 넘어 신화가 됐던 헤라클레스, 술집의 장식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숭고하고 존엄한 신화적 가치는 이제 더 이상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현상을 간파하는 예리한 시선을 지닌 시인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무심하지 않다. 엘비스와 아인슈타인의 시대에 어색하게 끼여있는 헤라클레스, 현실 속에서 신화가 뒤집어쓰고 있는 두터운 먼지와 공허한 몸짓에 시인의 예리한 눈은 슬프게 가 닿아있다.시인
2015-01-13
육교 계단에 벌겋게 토해놓았다출렁이던 고통이 할복(割腹)했다코를 풀면서 치를 떨면서쏟아진 내장을 수습한 그가어둠 속을 뚜벅뚜벅 걸어갔다쥐도 새도 모르게 밤이 가고한낮의 태양이 흑점을 키울 때들끓는 파리떼여사방으로 튄 얼룩이여먼지가 될 때까지밟히고 지워지면서머리 처박은 주검 하나오래오래 눈 안에 있다모든 고통이나 주검은 결국 먼지가 될 때까지 소멸의 과정을 밟게 된다. 먼지가 될 때까지 서서히 자신을 지우는 죽음의 연습을 하는 것이다. 시인은 죽음을 잊혀짐과 지워짐이라 인식하고 모든 죽음의 뒤에 남겨진 망각, 서서히 잊혀져 감은 또한 얼마나 허무하고 허망한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시인
2015-01-12
병약한 아내와 딸이웃는 얼굴로밤하늘 별자리에 높이떠 있다두 팔로껴안다내리고 싶지만 그냥바라본다뇌경색을 앓은 시인이 겪은 가족의 보살핌과 사랑에 대한 느낌을 참참하게 그려내고 있다. 병상에 누워서 위로 올려다보니 병약한 아내와 눈빛 초롱한 딸아이의 얼굴이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다가와 사랑스럽게 빛나고 있다. 가만히 침묵하며 바라볼 뿐이지만 가족에 대한, 사람에 대한 진한 애정이 번져나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시인
2015-01-09
오래된 나무를 보다 진실이란 말에대해 생각해본다 요즘 들어 진실이란말이 진실로 좋다 정이 든다는 말이 좋은것처럼 좋다 진실을 안다는 말보다 진실하게산다는 말이 좋고 절망해봐야 진실한 삶을안다는 말이 산에 든다는 말이 좋은 것처럼좋다 나무그늘에 든 것처럼 좋다이 시에는 진실, 좋다, 들다라는 말이 반복되면서 각각의 시어들이 품는 말의 품이 넉넉하고 푸근하기 짝이 없다. 흔히 쓰는 말들이지만 가만히 곱씹어보면 우련하게 녹아나는 맛스러움이 있다. 이러한 화법은 천양희 시인만의 개성적 화법이기도 한데 당연함에서 풍겨나는 설득력이랄까 그윽한 향기가 있어 잔잔한 감동을 거느린다.시인
2015-01-08
한 치 더 높이 날았다간 지옥행이다여름밤 공원의 작은 나무 사이사이아가리를 쩍 벌린 해충퇴치감전등이긴 목을 쭉 빼고 서 있다목숨을 움켜쥐고 줄줄이 날아든 날벌레들통제도 없는 접경을 날아오른 익명들의단 한 번 저항도 없는 죽음차라리 공원에 여름이 찾아오지 말았어야 해오늘도 저 고압 전류에 찌직찌직 난사당한목숨의 파편들총성만 들리고 총알 박힌 흔적은 없다이 날벌레들의 참극 이후에 오는인간의 무절제한 평화어떤 정치성도 이 참사에 대해선아무 말이 없다전기에 감전돼 벌레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과 삶이 교차되는 생의 단층을 투시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한 풍경이지만 시인의 눈은 예리하게 그곳에 머물고 하루살이 같은 우리네 한 생을 대입시켜본다. 벌레들의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는 인간들이 떼로 무너지고 다치고 죽어가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시인
2015-01-07
높은 산에 올랐어요산꼭대기에는 티 없는 벽공이하늘 궁전이 펼쳐 있어요알 수 없는 문장들이제단 위에 쓰러져 있어요저 희생된 언어들 지워버린 온갖 상념들피 묻은 칼이 있어요굽어보는 발 아래는 강물이 흐르고강물 위에는 주먹별이 떠오르고 있어요희끗희끗 진눈깨비 흩날리면하늘 길도 질척일까요헛다리 발자국도 감미로워별빛 궁전이라도 가까이 찾아 들겠어요하늘 궁전이 목메게 그리워요어쩌면 여기에서도하늘 궁전에 닿을 것만 같은마음 안의 꽃향기 향그러워요힘들고 상처투성이의 현실을 피해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는 시인의 마음이 읽혀지는 작품이다. 지상의 속된 가치를 떠나 산에 오르고 일상의 곤고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세계는 시인이 말하는 하늘궁전인지 모른다. 그것은 운명적으로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공간이고 영원한 추구와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끝없이 산에 오르고 또 오른다. 그것이 그러한 한계를 벗어나려는 인간들의 절규다.시인
2015-01-06
사내들이 담배를 한 대 피우는 동안벽 여기저기에 작은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염소 똥처럼 툭툭 자갈들이 떨어져 내렸다시궁쥐 떼가 구멍을 헤집고 다녔다쥐를 쫓아 고양이들이 드나들었다구멍은 점점 커지며 수많은 선을 치기 시작했다가랑이의 가랑이를 벌리며 선은 벽 전체로 뻗어나갔다또다른 구멍들을 쑥쑥 낳았다얼마 후 사내들이 손을 대자 벽은 폭삭 내려앉았다벽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집을 든든히 지탱해주는 벽은 웬만해서 무너지지 않는다. 이 시에서처럼 벽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구멍과 틈과 균열이 원인이 되어 와해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을 원시적 야만과 경계 짓는 문명이라는 단단한 벽 또한 예외일수는 없다는 것이다. 끝내는 문명 내부의 여러 요소들 때문에 파괴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견고하게 문명의 벽을 쌓아올리더라도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는 문명비판적인 시인의 눈을 본다.시인
2015-01-05
떄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역이 없는데 역전 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박 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이 살고 있고말라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송이 꽃이 있다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세세한 체험의 결을 만지며 시인은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이 땅 어느 소읍에도 있을 법한 동네 이발소를 풍경의 중심에 두면서 편안한 말투와 정겨운 정서를 엮어가면서 기억의 창고에서 하나 하나 추억의 소품들을 꺼내고 있다. 가만히 눈 감으면 우리는 벌써 그 시골 이발소 의자 위에 떠억하니 앉아서 곱사등이 이발사가 기다리고 있는 풍경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시인
2015-01-02
물오른 달이북채 잡은 고수되어소쩍새 소리꾼 가락에큰 굿판 펼쳐 놓는데곁엔 옷고름 풀린삼지닥나무꽃과 산수유꽃참꽃 산벚꽃에 앵두나무꽃이도래 도래 둘러 앉아장단 맞추고 있네아름다운 봄밤은 여러 구성요소들로 그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다. 그 매혹적인 소통회로에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얽히고 설켜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달, 고수, 소쩍새, 굿판, 꽃들이 그들이다.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동일한 생명체로 인식되어지고 있는 이 시는 그들의 소통을 통해 그들만의 견고한 벽을 허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시인
2014-12-31
이쪽에서 보면 못은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실제의 영역이면서도 그 인식의 범주를 넘어선 어떤 세계 혹은 영역이 따로 있을 수 있다는 전제가 이 시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벽에 박힌 못 하나도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존재의 방식이 달라지고 다양한 모양과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이 짧은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주의 모든 것이 그렇다면 하물며 우리 인간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나름대로 다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시인
2014-12-30
하고 싶은 일하며 살아도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네적막을 지키는 산겨울 어둠에 덮인 들녘저녁상 물려 놓고혼자서 세상 타령해 보지만역시 허탈한 겨울밤밤늦게 눈이라도 오려나산과 들녘이자꾸만 창밖에 어른거린다친구여필자의 고등학교 적 은사이셨던 시인은 평생을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시다 이제는 퇴임을 했다. 선생님은 평생을 무욕의 깨끗한 선비로 한 생을 건너고 있다. 깊어진 인생의 후반 겨울 어둠이 덮인 산을 바라보면서 분탕스러웠던 청춘의 시간과 힘겹고 어려웠던 생의 노정을 뒤돌아보면서, 그 모든 것들이 부질 없고 허탈한 것이라는 성찰에 이르고 있다. 착잡하고 허탈한 심정을 평생동안 가슴 속에 품고 가는 친구에게 가만히 건네고 있다.시인
2014-12-29
아내가 고구마를 삶아놓고나갔다젓가락으로 여러번 찔러본 흔적이 있다나도 너를 저렇게 찔러본 적이 있지잘 익었나, 몇 번이고깊숙이 찔러본 적이 있지뜨거워손을 바꿔 잡다가괜한 내 귓불을 잡은 적이 있지후후, 베어물고입속에서 여러 번 굴려본 적이 있지벗겨 먹은 적이 있지목이 메어 가슴을 두드리고벌컥벌컥, 찬물을 들이켜고는망연자실내려다본 적이 있지지난 가을 지역출신의 김왕노 시인의 모친상에서 고영민시인과 한 시간 여 정담을 나누다 왔다. 고영민은 충남 서산 사람이다. 그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착하고 순한, 천상 촌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맑은 사람의 향기를 소매가득 묻히고 돌아왔다. 이 시에서도 마흔을 넘기면서 삶을 뒤돌아보는 순정한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거침없이 달려온 시간들을 이제 마흔의 고개에서 돌아보고 있다. 열정의 시간들과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지하게, 의욕과 뜨거움의 시간들을 아내를 내세워서 성찰하는 시인의 눈이 깊다.시인
2014-12-26
한 말 굵은 소금에 절여 볼까컴컴한 광 속에서한 오백 년 푹 삭아 볼까(중략)그대 혀 끝에올려진다면그게 나인 줄도 모르고삼켜진다면그리운 그대 속내알아보는 거야살다보면 밀려오는 슬픔의 떼가 있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고 꾹꾹 삼킬 때가 많다. 그야말로 가슴 속 깊이 쌓아둔다. 시인의 말처럼 한 오백년 푹 삭아내리도록 소금에 절여 컴컴한 가슴의 광 속에 처박아둔다. 언젠가 그 슬픔이 사랑하는 그대의 혀 끝에서 녹아나는 소금 알갱이로 세상에 나오더라도, 그 님이 나의 슬픔의 정수를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깊이 깊이 소금에 절여진 슬픔을 보듬고 살아가겠다는 순정한 마음을 본다.시인
2014-12-24
겹벚꽃 한 그루 어두워지고 있다칠 벗겨진 창틀 너머우두커니 파놓은 우물을 들여다보며제 몸 지우는 꽃나무한나절 벌떼도 잉잉대다 돌아가고한줄기 거센 바람에 흩어지는꽃잎, 꽃잎들저 살점, 살점들세상 흐린 물소리는 뿌리 밑으로 고여들어고름이 되고그 샘물에 다시 머리를 감는다어머니, 어두워지는 당신 몸속으로 이 봄날겹벚꽃이 지고 있어요세상 흐린 물소리는 뿌리 밑으로 고여들어 고름이 된다는 말이 가슴을 치는 아침이다. 어머니, 그 위대한 모성을 시인은 참참한 어조로 읽어내리고 있다. 어찌 어머니에게도 청춘의 시간, 꿀벌 잉잉대던 시간이 없었으랴만 그것마저 다 자식들과 가정을 위해 내려놓고 이제 늙고 병들어 가만히 어두워져 가는 어머니,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이렇게 헌신적으로 당신의 것을 다 줘버리고 조용히 지워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거룩한 본능에 거수경례를 하고 싶은 아침이다. 시인
2014-12-23
한적한 산길 섶하늘 지붕 덮고 누운 산바람 우거진 풀숲에세상 부귀공명도 그리움, 사랑, 미움도죄다 버린 지 오래된 묘비 석 하나 쓸쓸하다작은 하늘 집 허물어진 채로 잔술도 없이알몸으로 누워서이 세상 살면서 다 하지 못한 말하 많이도 있으려만 아무 말 없이 쓸쓸히이 땅 어느 산자락 모룽지마다 이러한 묵묘가 없겠는가. 가난하고 쓸쓸하게 살다가 하늘로 돌아간 민초들이 말없이 조그만 돌 비석 하나 앞세우고 누워있는 것이다. 세월 많이 흘러 봉긋하던 봉분도 거의 지워지고 우거진 잡풀 속에 누워 무상히도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인생이던 모두 그곳으로 가서 누울 것이다. 부자도 빈자도 권력자도 민초도 모두들 자연으로 돌아가 누울 것이다. 그게 인생이다.시인
2014-12-22
목에 줄을 걸 때까지도 개는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웃었다그러지 마라 곧 너를 잡아 삶아 먹을 텐데그러면 네 고기 맛이 어찌 좋겠냐가만히 있어라 꼭 그렇게 살갑게 다가오려면아예 내게 덤벼들어라 그래서 줄을 놓게 하여저 산속 깊이 들어가서 살아라그래도 개는 둥글게 만 꼬리를 흔들며 웃었다그런다고 너를 살려두진 않을 테니이제 그만 해라 그리고 잘 가라그래도 개는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웃었다오랫동안 산속 생활을 해오는 시인이 곧 잡아먹을 개에게 말을 걸고 있다. 곧 잡아 먹을 개가 살갑게 꼬리를 흔들며 웃는 현실, 이런 현실은 시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동정심을 자극하는 일이지만 시인은 애써 차갑게 말하고 있다. 우리네 삶의 여러 모습들 속에서도 이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연민 따위는 사치라는 위기의식과 삶의 차가운 이면을 직시하는 시인의 눈이 그윽하다.시인
2014-12-19
술안주로 먹으려고 사온 조개를수돗물에 담그자그것들 일제히 입을 다문다몸 밖은 죽음제 안의 어둠을 파먹으며이승의 삶을 잠시 버티는 그불에 닿자 퍽 소리를 내며다 놓아 버리는온몸을 환히 열어 보이는악착같이 잡고 있던 것이生이라는 암흑이었구나조개는 다가오는 죽음을 예견하고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입을 다무는지 모른다. 그 죽음의 암흑에 저항하기 위해서 취는 것이 빛이 아니라 도리어 암흑이라는 것이다.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불에 온몸이 닿으면 조개는 자기를 열고 자기를 놓아버리는데 그것은 삶의 순간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이다. 이런 상황을 예리하게 발견하고 표현하는 시인은 우리들 삶과 죽음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시인
2014-12-18
바다는 지금 보름달을 순산 중이다물 위로 길게 뻗은 금빛 항로가 눈부시다낮 동안의 부끄러운 것들은숨어들었다물소리 베고 누워 눈만 껌뻑이는,시간의 끈을 놓아버린 폐선 한 척이결빙된 자신의 꿈보다흘려보내지 못한 말들을아파하며 몸 뒤척이는 곳에서나는 바다로 인해끝없는 패배를 배운다달빛이 바다를 삼키는생명의 대서사시 앞에서물결 위로 금빛 길을 열어주는 보름달. 분탕스러웠던 한낮의 시간들 그 부끄러웠던 것들이 그 길 위에 스미고 폐선 한 척이 가슴 가득 품은 아픈 시간의 흔적들로 뒤척이는 송라바다에서 시인은 이만큼 세상을 뜨겁게 건넌 시간들을 돌아보고 있다. 그 성찰을 통해 겸허하게, 끝없이 패배를 배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가만히 맑고 밝은 밤의 서정이 곱고 깊다.시인
2014-12-17
신무(神舞)에 취한 저 여자, 사뿐사뿐 날아오르더니 어느새 천하를 호령하여 발아래 들어앉히네 산 자들의 한과 망자들이 혼, 천지사방 신기(神氣), 모두 불러들여 젖빛 버선발로 자분자분 내통하네 장군칼 양손에 쥐고 가슴 쪽 울화 쓸어올리며 솟구칠 땐 오, 저 여자의 허리, 저승의 곡선으로 팽팽히 휘어지네.작두를 타는 무녀의 신무를 보고 쓴 시다. 작두 위에 올라선다는 것은 두려움을 잊은 것이리라. 신무에 취한 여자는 아무리 작두의 칼날 위를 걸어다녀도 베이지 않는다. 그 칼날은 이미 칼날이 아니고 떠나지 않은 자의 길이, 오르지 않은 자의 날개, 취기에 젖지 않은 자의 술, 직선을 잊은 자의 곡선이다. 구도란 길을 떠나는 것이고 하늘을 오르는 것이고, 취하는 것이고, 직선을 기억하는 일이다.시인
2014-12-16
일요일 나무 심는 날 아침, 전봇대 맨 위 전깃줄에서 목청 좋게 노래하던 새, 내 발자국 낌새 알고 옆집 전봇대로 휘익 날아간다. 아침마다 찾아와 노래를 불러대는 저 손님은 누굴까? 이튿날 아침에도 살포시 문 열고 노래를 엿듣는데 어찌 알고는 도망간다. 대체 누굴까? 며칠 인터넷을 뒤진다. 한국의 새, 멀리서 봐 놓으니 생긴 건 분명치 않아, 새소리 텃새 소리 듣다듣다 비슷한 걸 찾아내었다. 휘-익, 휘파람새. 아내한테 자랑을 했더니, 미숙이가 휘파람새라 그러대요, 나무 심는 날 다녀간 후배가. 어떻게 알았대? 그냥 들어보니 휘파람을 불더래요.휘파람 소리를 내며 생의 사소한 현장 혹은 풍경 속에 날아오고 울고 날아가버리는 새의 이름을 궁금해 했다. 그러나 그 새가 한국의 새인지, 멀리서 봐 놓으니 생김새도 분명치 않아서 어찌 생긴 새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 그냥 목청 좋게 노래해주고, 아침마다 찾아와 울어주는 새면 족하다. 이름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냥 휘파람 소리를 내며 우니까 휘파람새라고 부르면 된다고 말하는 시인의 말 속에는 휘파람 소리가 묻어난다.시인
2014-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