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자기 앞의 생을가위질했던 아버지 극약처방이 필요했던그리고 끈으로 다시 묶어 봉합해버린,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비밀을어깨에 높이 떠메고 나무들이 점차어둠의 모래 구덩이 속으로 꺼져 들어간다마음이 여린 사람들이 독한 몸을 지우고남은 형해, 앙상한 뼈가 사라져가는 빛 속에다가오는 어둠 속에 검게 인화되어 드러난다삶의 격랑과 격정을 뜨거운 것이라 명하면서 그의 시는 온전히 그 뜨거움에게로 향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빛과 어둠, 소멸과 현현이 교차하는 이 시는 뜨거운 것의 차가운 존재라는 역설을 품고 있다, 곱씹어 보고 깊이 생각해보면 깊은 의미의 삶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시인
2014-12-12
기러기 지나가려 하니쓸쓸하지 가을 하늘아?난 예 논두렁에서너처럼 저물 순 없겠다순이 고무신 속 들국화를 보겠구나꽃 주위 붕붕거리는 멍청이 꿀벌과저 방죽 위 억새꽃으로난 어딜 좀 다녀와야겠다가을의 쓸쓸함과 가을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계절의 길목은 늘 쓸쓸한 정서를 거느리고 있다. 그 스산함이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하게도 한다. 들국화 피어 고운 길 늦은 꿀벌들의 잉잉거림과 하얗게 길 떠나는 뚝방 위의 억새꽃잎들…. 어딜 좀 휘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은 비단 시인에게 뿐만은 아닐 것이다.시인
2014-12-11
그러나,로 시작되는 문장을 쓰지 않기 위해새벽마다 달력의 날짜를 지웠다길은 온몸을 꼬며 하늘로 기어가고벌판을 지우는 눈보라빈집의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뿌리에 창을 감추지 않고 어떻게 잠들 수 있겠는가시인은 그의 불행에 반전은 없을거라고 믿고 있다. 그가 어느날 문득 그러나로 문장을 시작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의 근기가 약해진 까닭일 것이다. 그가 세상을 내다보는 진정한 창은 하늘을 향한 잎사귀나 꽃에 있지 않고 흑암을 향해 뻗어내리는 뿌리에 있을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내용 없는 희망은 불행을 대신할 수 없다라는 시인의 확신을 읽을 수 있는 시이다.시인
2014-12-10
알 수 없다내가 마지막으로 그 집을 떠나면서문에다 박은 커다란 못이 자라나집 주위의 나무들을 못 박고하늘의 별에다 못질을 하고내 살던 옛집을 생각할 때마다그 집과 나는 서로 허물어지는지도 모른다 조금씩조금씩 나는 죽음 쪽으로 허물어지고나는 사랑 쪽으로 무너져 나오고시인에게 집은 사랑으로부터 버림받은 곳이자 불행했던 유년기를 환기시켜주는 매체이지만 집이라는 끈끈한 기억에 이끌리고 있는 이 시는 추억을 회상하는 힘에 의해 한껏 아름다워져 있다. 추억이란 마음이 가난해질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보화다. 시인은 이러한 보화를 살짝 꺼내보고 있다.시인
2014-12-09
퍼득이는 날것들에 핀을 댄다 금세 새몸으로 몸 바꾸어 날아오르는 날것들의 퍼득임 도무지 저 퍼득이는 날것들의 퍼득임을 온전히 날것으로 표본할 수 없다 뒤 바뀌는 꿈처럼 밤새 표본되는 저 퍼득이는 날것들이 앵글에 찍힌 퍼득임 표본상자에 빼곡이 들어차는 표본들 표본실을 채우는 탈피의 흔적들일찍이체 안에서 퍼득이는 저 수만 마리 날것들의 퍼득임을온전히 날것으로 표본한위대한 표본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시인은 그 어떤 표본책도 날것들의 퍼득임을 온전히 표본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날것들의 퍼득임, 그 자체는 동태적인 것이지 결코 정태적으로 묶어두거나 가두지 못한다는 인식이 이 시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제 안에서 퍼득이는 저 수만 마리 날것들의 퍼득임을 온전한 물질성으로 표본할 수 있는 위대한 표본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시인
2014-12-08
생각을 하면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간절히 원하는 것은 반대로또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생각만을 줄곧 해왔다지금의 것은 두고아주 오래된 별에게 말을 걸거나일어나지 않은 일들만 기억하고 서술하기로 한다번민을 내려놓고신생아처럼 먹고 자고눈 마주치면 까르르 웃는다웃다가 싱거우면 우는 게 일이었다뜻없는 옹알이뿐분간이나 분별도 생각이 나눠지지 않았으므로몸은 가벼워지는가깡충 뛰면 미루나무에 뭉게구름으로 나는 걸린다생의 본질이 어쩌면 상처와 고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이 시는 시작한다. 우리네 삶이 고통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그 상처와 고통에서 이기고 벗어나기 위해 아주 오래된 별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고통의 실체에 대한 철저한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가 가지는 결핍과 고통의 삶을 치유받으려는 의지적 시 정신을 읽을 수 있다.시인
2014-12-05
바람이 불었다밤새 산비알을 쓸던 바람은 날이 밝자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었다바람은 덧없다 들어앉을 몸을 얻으려고 산죽을 바닥까지 휘어놓고도들어앉는 삶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 깊은 잠 속의 흐느낌처럼 소리로만육체를 드러낸다당신은 시김새 없이도 한 생을 이루었다 저 바람처럼 어쩌면 몸 없이회오리치는 것이 생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소리로 인해 일어서고드높아진 영마루 같다바람이 누웠다 소리로 와서 소리 없이 사라질 줄 아는높새바람이었다들어앉을 몸을 얻으려고 산죽을 바닥까지 휘어놓고도, 들어앉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바람, 오로지 소리로만 육체를 드러내는 바람, 시김새 없이도 한 생을 이루는 바람, 소리로 와서 소리없이 사라지는 높새바람, 그런 바람 같은 존재를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깊은 시안을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시인
2014-12-04
아는 아무개가 무슨 문학상을 탔다는 기사를 보고괜시리 해묵은 내 시집을 꺼내 읽어 보다가담배를 피우러 베란다로 나갔다어둠 속에 자동차들이 불빛들이 휘황하다저 불빛들처럼 세상을 탐하는 벌레들이내 안의 구석을 열 지어 기어가고 있을 것이다용속(庸俗)한 마음으로 노래한 것들은지금껏 어느 책갈피에서 불편한 잠을 자고 있을까생각해보면 두렵다시(詩)와 함께한 세월만으로 한세상 버티겠다던 그 마음그 어디쯤 혹시 선이 있다면 위선이다단풍은 제 아름다움에 취해 속고나는 나에 묻혀 속을 뿐이다동료 시인의 수상 소식에 자신의 시에 대한, 문학에 대한 자세를 돌아보는 시인의 자기성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욕심을 버리고 오직 시에 대한 열정으로 시 창작에 몰두해온 자신의 글쓰기가 혹여 그 순수성이 더럽혀진 것은 아닐까 하는 자성의 마음이 위선이라는 제목으로 그려져 있다. 필자도 오랫동안 시를 쓰면서 혹여라도 세상을 탐하는 벌레로 시를 써 온 것은 아닌지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은 아침이다.시인
2014-12-03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세다가 그만 두었다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두어 가지 찬으로 밥을 먹었다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어느 늦은 가을날 시인의 하루를 쓰고 있다. 생활의 깊숙이 파고드는 가을의 부분들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결코 그냥 스치지 않는 섬세한 시인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가을 꽃이며 가을 벌레며, 듬성하게 열매를 달고 선 감나무며, 추녀 끝으로 날아가는 안행(雁行)이며, 혼자 먹는 차가운 가을 밥이며… 이런 것들에 하나 하나 눈길과 마음을 쏟아넣은 하루를 섬세한 시안과 시심으로 써 내리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4-12-02
이 마을 숲엔 몇 십 년 묵은아름드리 상수리나무가 모여 산다하나같이 허리께에 커다란 웅덩이 같은 상처가 있다그 옛날 마을 사람들 떡메를 지고 와서나무둥치를 쳐 올려 상수리를 땄기 때문이다나무를 쳐댈 때마다나무는 굵은 눈물 같은 상수리를 한 소쿠리씩쏟아 냈을 것이다벗겨진 제 상처를 안으로 오그리며나무는 하늘로 더 멀리 가지를 뻗었을 것인데그 가지 끝에 새들이 둥지를 틀었다썩어가는 둥치 속으론버섯이 자라고청개구리가 기어들고또 풍뎅이가 알을 깐다내가 다가갈 때마다나무는 무슨 이야기 같은 것 혹은 노래 같은 것을이것들의 입으로 날갯짓으로 들려주곤 하는데내 살아갈 길을 넌지시 들려주는 것도 같은데한 계절도 아니고한 해로도 끝나지 않아서아예 이 숲에 살림을 차려서 모시고도 싶다마을의 오래 묵은 상수리 나무를 관찰하고 시인은 그 나무가 겪었을 아픔과 함께 상처와 생채기에 마음이 간다. 모든 것을 희생하는 모성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상수리를 쏟아내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 상수리 나무, 그리고 새들이 둥지를 틀 수 있도록 자신을 내주는 나무, 끝없이 희생하면서 고통을 참아내고 마지막까지 자신을 다 줘버리는 어머니 같은 나무를 바라보면서 모시고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마음이 따스하기 그지없다.시인
2014-12-01
겨울산이 마음을 비우고 있다나도 산으로 간다산 어디쯤 앉으니으악새가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바스락 바스락나도 으악새를 바라본다겨울 한 가운데 옷을 벗고지나간다찬 바람이 내 아랫도리를 휙,지나간다산이 휙, 지나간다생(生)이 휙.겨울산에서 으악새를 보고있는 시인은 으악새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추위 속에 옷을 벗고 선 겨울산도, 나무들도, 추위에 떨면서 그들을 보고 있는 시인 자신도 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겨울바람처럼 휙휙 지나가버리는 순간적인 존재들이다. 더더욱 그런 순간에 얹혀가는 우리네 인생은 더더욱 허망하기 짝이없는 존재들이다 삶에 대한 성찰이 깊은 시이다.시인
2014-11-28
손을 쭉 뻗어검지를하늘 가운데 세웠더니잠자리가 앉았습니다내 손가락이잠자리 쉼터가 되었습니다가만히 있었습니다내가 나뭇가지가 되었습니다한 때 필자와 같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 시인은 지금은 경남 산청에 있는 대안학교인 간디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초가을 하늘은 한 점 구름도 없는 맑고 붉게 물든 서쪽 하늘가에 고추잠자리 떼가 날고 있는 평화로운 풍경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손가락을 내밀어 나뭇가지처럼 그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시인의 모습은 자연과의 아름다운 조화, 동화돼가는 시인의 마음이 그려져 있는 풍경 하나를 본다.시인
2014-11-27
고샅길을 따라 돌아가는물동이가 있다철 지난 유행가 가락에 맞춰찰랑찰랑 넘칠 듯풋내 나는 순정을 담고지는 벚꽃 잎으로 온몸을 가리우고오는 옆집 강아지의 그림자에속치마 잘근잘근 끌다가흙담에 기대어 휴우, 눈 흘기는볼이 발그레한 그 여인을 보러오늘도 나는 머리를 깎으러 왔다순박한 사람의 정이 넘치는 곳. 아득한 시간 속의 고향 이발소를 떠올리며 시인의 어린 시절의 순정한 장소인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오래된 기억 속의 순수한 풍경이 우리들 가슴 가슴마다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다. 점점 퇴색되어가는 시간의 풍경들을 들추고 깨끗한 그리움으로 꺼내보는 흑백사진 같은 느낌을 던져주고 있다. 순수했던 시간 속의 서사 혹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오래오래 우리들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것이다.시인
2014-11-25
땅속 긴 길 내려서는 하프 멘 올페처럼어둔 하늘 길을 내어 걸어가는 반달처럼사랑에맨몸 부딪는언 호수의 쇄빙선(碎氷船)알몸인 영혼을 스스로 당겨 안고햇빛도 보이기 전 스러지는 유리디케한 계단남은 절망도마다않고 잡는 손시인이 바라고 그려보는 참다운 시인의 모습은 사랑에 대한 남다른 생각과 실천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온몸으로 사랑을 실행할 수 있어야 하고 남은 절망도 마다않고 잡는 손을 가진 것이 시인이어야한다는 것이다. 절망도 끝에 가서는 친구로 연인으로 신앙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것이 사랑이고, 그 사랑을 간직한 것이 시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시인
2014-11-24
부모한테 맞을 때는 빨리달아나는 것이효도란다나는 왜 그 열 살에서 서른다섯이 넘도록마당 한가운데이렇게 맞고만서있는가어린 시절 부모님한테 꾸중을 듣고 매를 맞을 때 보면 안다. 어떤 아이는 매 맞기도 전에 도망해서 그 자리를 모면하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끝까지 순종하며 매를 맞고 서 있는 아이가 있다. 어리석게도 그냥 매를 맞으며 그 매를 다 감당하고 서 있는 것은 시인의 말처럼 효도가 아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어느 쯤에서 달아나서 매를 멈추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은 다른 측면에서 감동을 주고 있다. 시인은 서른 다섯이 넘도록 다소곳이 부모님의 질책과 타이름에 순종하며 살아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아름다운 순종이고 효도가 아닐 수 없다.시인
2014-11-21
하나 둘징검돌을폴짝폴짝건너가듯잘 있거라손 흔들며떠나가던너의 모습내 그냥우두커니 서서바라보다놓쳤다정지해 있는 듯한 수면 위로 납작한 돌멩이를 수면과 평행지게 던지면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자잔히 물을 튀기며 아득히 멀어져가는 물수제비. 징검돌을 폴짝이며 건너가 버린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하며 아련히 수면을 응시하는 시인의 마음 가까이 가본다. 저만치 미끄러져가서는 종작없이 사라져버린 돌멩이처럼 잘 있거라 손 흔들며 멀어져가버린 사람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아린 마음이 함께 느껴지는 아침이다.시인
2014-11-20
찬비에 젖는 비석처럼 냉정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눈비 다녀간 강물처럼 불어난 생의 슬픔을 글썽대는 눈풍경 담은 호수처럼 깊어지는 눈사금파리로 창 긁는 소리 연신 뱉어내는 연인의 눈빛 앞에서바람 만난 촛불로 일렁대는 눈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숯불처럼 맹렬하게 적의로 불타는 눈냉정함과 글썽임의 공존, 일렁임과 적의로 불타는 시선의 깊이가 시인으로 하여금 세계와 생의 슬픔과 풍경과 연인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해주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시선을 통해 때로는 냉정하게 때로는 글썽이는 따스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게 지금까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이 시인의 안목이고 시정신인 것이다.시인
2014-11-19
꽃은 비가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천둥이 울어도 귀를 막지 않는다그 위에 천둥빛 별들의 노래나비들의 춤이 우러져비로소 세상의작은 향기 하나 된다는 것을 안다꽃은 비가와도 우산을 쓰지 않고 천둥이 쳐도 귀를 막지 않으며 자연 그대로 동화되어 한 송이 꽃을 피워 올리는 것이다. 꽃의 탄생은 한 우주의 열림을 의미한다. 꽃 한 송이가 피는 것은 세상을 밝혀주는 등불이 하나 켜지는 것이고, 새로운 한 세상이 열림을 의미한다고 믿고 있는 시인은 피어오른 한 송이 꽃은 끝내 세상 한 쪽을 힐링해주는 작은 향기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시인
2014-11-18
어서 가요, 어머니이 햇빛 따라가요, 어머니벌판의 풀들도 전부 일어서는데,바라보면 동으로 동으로힘주어 흔들리는데꽃이란 꽃에 다 물들고바위란 바위에 다 물들고도흥건히 남아 우리 얼굴 비추는이 햇빛 따라가요꽃이란 꽃에 다 물들고 바위란 바위에 다 물들고도 남아 흥건히 우리들 얼굴을 비추는 햇빛은 도대체 무엇으로 다가오기에 이렇듯 간절히 따라가자고 하는 것일까. 아무 거리낌없이, 어떤 망설임이나 구별도 없이 은총으로 내리비치는 햇빛이야말로 깨끗한 생명의 빛이 아니겠는가. 벌판의 풀들도 전부 일어서게 만들고 만물이 햇빛 비치는 곳으로 향하게 만드는 것은 햇빛이 차별 없이 맑고 신선하게 누구에게나 골고루 은총을 내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리라.시인
2014-11-17
사내는 해를 등지고그림자를 보고 있다길게 누운 건물들쓰러진 채 달리는 버스사내를 밟고 지나간다몸 가운데 타이어 자국이 선명한 그림자벌떡 일어나 사내에게서 발을 뺀다그림자를 잃은 사내는 보도블록에 붙어버린다멀어져가는 그림자를 쳐다보는 사내기울어지는 해를 따라 점점 길어진다몸의 그늘에 불과한 그림자에 시인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버스가 시인의 그림자를 밟고 지나가고 차에 치인 그림자 중간에 타이어 자국이 나 있다고 믿는 시인의 인식에서 현대인들의 공허의식이랄까 여러 자극에도 무감각한 내면의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를 통과하는 것은 우리의 그림자를 밟고 지나는 버스만 아니다. 수없이 우리를 지나고 통과하는 보이지 않는 방사선이나 전파, 우리가 직접 느낄 수 없는 수많은 물질문명의 무선들이 우리를 통과하고 지나가버리지만 우리는 무감각하다. 우리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번 쯤 생각해볼 일이다.시인
201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