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사람이 시시각각 다른 사람이 돼가는 것을 보면,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일지언정 아기자기, 재미스럽다는 쓴웃음이 지어진다.마침 크리스마스 이브다. 오늘 한낮에 모처럼 종로에 나가 탑골공원을 거닐었다. 옛날에는 파고다 공원이라 했고 노인분들이 한가득 앉아 계셨는데, 오늘은 보니 어린 학생들이 무슨 모임인가를 하러 잔뜩 모여 들어 있다.날씨가 푹해지니 좋군.나는 한 학기도 마치고 처음 맞은 50대의 한해도 저물어간다는 호젓한 심정으로 이상재 선생 동상이 서 있는 공원안을 둘러본다.그리고는 3호선 종로3가역이 있는 거리를 거닌다.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에는 행상들이 많다. 호떡집, 오뎅집, 간이김밥집, 양말 행상에, 장난감 행상. 없는 가게들이 없다. 남루한 행상들의 거리를 걷는데 그 비닐로 포장 친 가게 주인들이 다들 착한 짐승들 같이 느껴진다.여름에는 얼마나 볕이 뜨거웠으랴. 비는 또 얼마나 들이쳤으랴. 어느새 겨울이다. 며칠 무섭게 추웠고, 오늘 겨우 풀렸다. 겨울 맞은 행상 주인들, 누비옷 같은 두꺼운 외투들을 쓰고 손님들을 맞고 기다리고 일들을 하고 있다.세상 소식은 아무 안중에 없는 듯하다. 통진당이 해산됐다든가? 구중궁궐에 무슨 게임인지 혈투가 있었다든가? 그네 짐승들은 아무 관심도 걱정도 비판도 마음 속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아름답다.짐승들처럼 한 생명 받아 태어났기에, 부모 자식 있어 먹고 먹이랴 쉴새 없이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아름답다.옷을 멋지게 입은 그 감춤과 치장이 그네들에게 있을 수 없다. 입은 옷은 꼭 그렇게 필요해서 입은 것이요, 손님을 기다리며 쟁반에 배달해 온 국수나 된장찌개를 후루룩 삼키고 있는 그 먹을 것은 한 생명이 오늘 하루의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먹는 것이다.모름지기 우리들 삶이 그래야 하리라. 모든 가식, 위선, 거짓, 감춤을 버리고 가장 꾸밈없는 생명의 존재 방법을 이행하며, 순명할 줄 아는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리라.산책을 하는 사이에 아버지께서 전화하신 것을 받지 못했다. 나중에 문득 보니 전화도 하시고 문자도 보내셨다. 며칠 소식 못 전한 아들이 궁금해지신 모양이다.크리스마스 이브라서 옛날 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어렸을 적, 그러니까 일곱 살 때쯤, 아버지가 뒷산에서 어린 소나무를 캐오셨다. 파인 트리. 크리스마스 이브에 밤을 꾸밀 나무를 캐오신 것이다.우리들 어린 삼형제를 위하여 산 나무를 가져다 우리들 모르는 풍습을 만들어 주려 하신 것이다.소나무는 지금 생각해도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좋았다. 어린 마음을 들뜨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그러고 보니 그때쯤 몇년 동안은 큰 양말에 선물도 아침에 깨어나면 생겨나 있었다.아버지.나도 모르게 지금은 연로할 때로 연로해지신, 그러면서 경제에 더 피로해지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한 마리 짐승처럼, 배울 만큼 배웠다 해도 처자식을 먹이고, 당신도 목숨을 피우려고 힘들게, 가장 자연스러운 짐승으로 살아오신 부친.세상에는 숱한 경륜가들이 있고, 지식가들이 있고, 돈과 신분의 세련가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가치도 보람도 없다.어미, 아비, 새끼, 산 목숨이 살아가야 하는 이치. 메리 크리스마스.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 버림받은 세상을 위해 여기에 오셨다.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있다.
2014-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