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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물컵과 술잔과 커피잔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눈 내리는 밤에 평론가와 소설가와 시인이 만났다. 평론가와 소설가는 본래 친분이 있던 터라 언제 한 번 보자고 벼르던 게 그 밤이 되었다. 평론가는 최근에 시집을 낸 시인이 생각나서 합석을 하자 했다. 시인이 한 사람 더 동반해 와서 일행은 모두 합해 넷이 되었다. 네 사람은 `오늘도`라는 간판이 달린 소설가의 단골 음식점에 모여 앉았다. 그날 자리를 처음 제안한 소설가께서 포항에서 고래 고기를 공수해 오고 일본 술까지 가져왔다. 술자리가 아주 고급스러워졌다.네 사람 다 이제는 사십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들. 시끄러운 곳은 귀가 감당을 못해 가지 못한다. 아무나 하고 어울리는 성품들도 못 된다. 낯선 곳 찾아다닐 모험심조차 잃었다. 단골 음식점의 따로 나 있는 조용한 방 같은 곳이 이런 사람들 모임에는 제격이다.소설가와 시인은 자주 어울린 사이가 아니다. 그러나 진귀한 안주가 있고, 고급 사케까지 있으니, 자리는 금방 풀어져 버린다. 정치 얘기도 하고, 고래 고기 칭송도 하고, 시집 얘기도 한다.열시쯤 되자 집이 경기도 여주라는 시인의 친구는 퇴장을 선언한다. 나머지 셋은 자리를 사케집으로 옮겨간다. 이번에는 줄곧 일본술로 `달려` 보자는 소설가의 제안이 있으셨던 까닭이다.밖에는 눈이 내린다. 술집 안에는 사람들이 많다. 벌써 세 사람은 주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박정희, 박근혜 얘기도 나오고 박태준 얘기도 나온다. 이 이름들이 모두 소설가의 인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까닭이다.평론가는 난데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나러 하와이에 갔던 일을 소설로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하루키가 `선언`했던 것처럼 고독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또 하나는 자신의 삶을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공적인 일들이 자신의 일이 되기도 한다. 나머지 하나는 삶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다거나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 지상에서의 삶은 무한자에 귀의하기 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도 희생도 필요 없다.평론가는 탁자 위의 그릇들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탁자 위에는 술잔과 물컵과 시인이 들고 온 테이크아웃 커피 잔이 놓여 있다. 사람들은 마치 술잔과 물컵과 커피잔이 다른 것처럼 다른 유전자를 따라 세 가지 삶의 유형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삶이 자신의 의사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들은 유전자가 시키는 일을 할 뿐이다. 그러니까 세상은 이상적인 곳이 될 수 없다. 타인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언제나 나머지 두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나아질 수 없다.그러자 소설가가 말한다. 자신은 요즘 술잔과 물컵과 커피잔이 놓여 있는 탁자에 관해 생각한다고 한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라 해도 그 다른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공유할 수밖에 없는 탁자는 무엇이겠는지 묻는다고 한다. 그것은 의식주일 수도 있고, 의식의 최대공약수일 수도 있겠다. 그는 늘 역사에 관심이 많다. 이제 그것을 움직이는 근본적 요인을 찾고 싶어 한다.시인이 묻는다. 같은 탁자라 해도 술잔과 물컵과 커피잔에게는 각기 다른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술잔에 있어의 탁자는 물컵에 있어서의 탁자와 같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것들은 다시 커피잔에 있어서의 탁자와도 다를 것이다. 평론가가 주석을 단다. 그러나 역시 탁자는 하나이지 않느냐. 이 탁자가 그 셋에게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는 있다. 그럼에도 탁자는 여전히 하나다. 그것의 의미를 물어볼 수 있다. 시인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바깥으로 나오자 눈이 그쳐 있다. 머리가 어쩐지 더 무거워진 것 같다. 과음을 해서인가. 그러나 마흔도 중반을 넘어서 버리면 다들 생각이 근원에 다다르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2013-02-07

전망 좋은 집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지난 며칠 동안은 목에 디스크가 도져서 며칠 다시 침을 맞으러 다녔다. 몇 년 전이었던가. 한 4년쯤 된 것 같다. 어느 날 늦가을에 눈을 뜨니 엉치뼈가 금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관절 부근이었던 것도 같다. 마치 유리창에 돌멩이가 날아와 금이 간 것처럼 기분 나쁘게 번져 가는 통증이 허리 디스크의 시작인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런데 그게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하는 상태로 전개되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에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경향이 있고, 웬만한 아픔쯤은 별 것 아니려니 하고 넘기는 악습이 있었다.서른일곱 살까지는 담배도 하루에 한 갑 이상을 피웠고, 술은 여전히 소주나 양주 같은 독주를 마신다. 일을 시작하기를 두려워하는 진입 공포증 같은 것을 지니고 있지만, 글감을 머리속에 넣어두고 미루고 미루다 한 번 시작하면 몇 날 며칠이고 끝을 봐야 손을 떼는 벼락치기 형에, 국문학 연구부터, 비평, 그리고 때로는 시나 소설 창작에 이르기까지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든 손을 대야 직성이 풀리는 까닭에, 몸을 편히 쉬게 할 날이 없었다. 밤에는 안 자고는 버틸 수 없는 순간까지 잠을 미루다 한순간에 쓰러지는 잠을 자고, 그러고도 잠이 자꾸 없어져 최근에는 다섯 시간쯤 자는 것 같다. 게다가 어떻게나 사람이 잡스러운지 관계하는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문학잡지도 만들고, 학회 대표도 하고, 또 다른 학회는 총무를 한다. 문학에, 학교에, 사람들과의 관계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어,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복잡한 일을 처리하느라 글을 다시 끊었다 쓰고 있다.한 번 디스크가 번지기 시작하자 며칠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동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 받고 약 타먹으면 된다 해서 그렇게 했는데,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는 통에 결국에는 남들 다 간다는 모모한 병원으로 갔다. 심각한 디스크 환자라면 으레 한 번쯤은 들러 수술을 해보려고 하는 유명한 곳이다. 당장 수술을 하란다. 병원에 누웠다고 통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밤새 몸부림 친 끝에 정말 수술해야 살 수 있나 보다 하고 의사를 불러 달라는데, 어머니가 말리신다. 디스크 수술은 조심해야 하니, 그래도 참으라는 전갈이다. 차라리 허리뼈를 통째로 빼내고 싶은 심정인데 참 야속한 말씀이었다.몇 날 며칠을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진통제로, 컴퓨터 유도 신경 치료로 가라앉히고 나니 염라대왕 앞에 갔다 온 심정이었다. 그 아픈 겨울, 체중이 무려 8kg나 빠져서 다이어트에는 제격이었다. 양의학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니 갈 곳이라고는 한의원밖에 없어 이 한의원, 저 한의원 떠돌아다니고, 떠돌아다니는 민간 치료사한테까지 시술을 받고 하면서 세월이 낫게 해준 게 그때 1년의 일이었다.그러다 어느 아는 분께 맹인 침술사를 소개 받았다. 그 분 집이 서울 신림 사거리 근처여서 자주 다녔다. 침 놓는 비용치고는 꽤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효험이 있는 것 같았다. 작년엔 가는 손이 저리고 어깨가 아픈 목 디스크 증상이 나타나자 재빨리 그 분을 찾아가 악화되는 걸 막기도 했다. 그 사이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며 제법 가까워지기도 했다. 이번에 다시 전화를 드리니, 이사를 갔단다. 그전에는 일층 다세대 주택에 살았는데, 이번에는 아파트란다. 가보니 봉천동 산동네 재개발 아파트의 19층이다. 며칠 다니다 어제 문득 거실에서 창밖을 보니 동네가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게 전망이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문득 생각했다. 이 분은 저 전망을 어떻게 즐길까.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높은 전망을 무슨 뜻으로 산 것일까. 그러자, 아, 이 분은 바람의 감촉으로 그것을 느끼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촉은 얼마나 새롭고도 생생한 것일지, 어림짐작해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2013-01-31

조지 오웰 같은 사람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여행 가면서 책 두 권을 들고 갔다. 그 중 한권이 조지 오웰의 산문집.`나는 왜 쓰는가`하는 제목의 산문집이다. 왜 쓰는가. 너무 근본적인 질문이어서 혼자 여행할 때 부담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다 읽지 않은 게 늘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 중에 사형수를 처형하는 얘기를 써놓은게 있었다. 조지 오웰은 원래 영국 사람이지만 버마에서 경찰을 했다. 식민지를 다스리는 경찰이니 결코 좋은 일을 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경찰 일을 하면서 오히려 영국이 식민지를 끝까지 다스릴 수 없고, 언젠가는 물러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버마 사람들은 이 젊은 영국 경찰 머리속에서 그런 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 리 없었을 것이다. 그는 흔해빠진 지배자의 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도 코끼리를 총으로 쏘면서 정말 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보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쏘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했다. 코끼리를 쏘아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식민지 경찰의 위엄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는 자기를 의식하면서 일종의 연기를 펼쳤던 것이다.그러나 그는 생각이 달랐고 지배자의 일원인 자기를 의식함으로써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가 어떤 인도 사람 하나를 처형하던 일을 써놓은 수필이 흥미롭다. 그 사람은 젊은 생명체였고, 그 점에서 조지 오웰 자신과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를 처형하는 사람들의 일행이었다.그는 이 과정을 지극히 냉철하게 묘사했다. 죽음을 향해 무심하게 힌두교 주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 남자는 태연하게 물웅덩이를 피해 걷는다. 조지 오웰은 그런 행동에서 그가 살아 있는 사람임을 깨닫는다.나는 이 사형수 이야기를 읽으며 여순 감옥에서 그렇게 죽어간 안중근과 신채호를 생각했다. 이역만리에서 처형당하고 병사해야 했던 그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생명들이었던가.자기 한 목숨을 바쳐 숭고한 뜻을 이루려는 사람은 아름답다. 조지 오웰이 그 인도인의 이름을 밝혀놓았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예전에 이돈화라는 천도교 운동가가 쓴 `천도교 창건사`라는 것을 보았더니 거기에 동학혁명에 참여해서 생명을 바친 사람들의 이름이 여러 줄에 걸쳐 나열돼 있었다. 이름 석 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죽으면 다 끝인 것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그러나 바로 그 이름으로 그 사람의 값진 삶이 거기 그렇게 존재했음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그 인도 사람의 이름을 써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겪으면서 자신이 다른 세계에 속해야 하는 사람임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 같다.그의 산문집은 오로지 그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경험세계를 다른 어디서 볼 수 없는 어조와 문체로 기록하고 있다. 이 산문집 속에는 서점 이야기도 있다. 그는 별스런 직업들을 다 전전했던 것 같다. 또 전쟁에 관해서도 남들과 전혀 다른 것을 보고 말하고 있다. 진귀한다는 것, 그것은 이런 글들을 가리켜 말하는 게 아닌가 한다.삶을 진짜로 살고, 글도 진짜가 되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칼럼만 해도 벌써 2년이 되는데, 그 사이에 과연 나는 나 자신의 눈과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글을 썼는가. 아니면 적당히 타협하고 눈치보고 했던 것은 아닌가.글은 이름 석자처럼 무서운 것 같다. 조지 오웰 같은 사람과 글이어야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시간이 이렇게 오래 흐르도록 그를 기억하는 뜻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 아니겠는지.

2013-01-24

설국의 고향, 에치고유자와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일본 동북부의 에치고유자와(越後湯澤)라는 곳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설국`의 고향이다. 이곳은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옛날 같으면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곳이다. `설국`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일본에 갔을 때, 요미우리신문 1면에`세설`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네 번이나 올랐다는 기사가 났다. 그러나 결국 그 세대의 일본쪽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로 낙착된 것이었다.왜일까.`설국`은 두 번은 읽은 것 같은데, 줄거리 같은 것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신에 작품 전면에 흐르는 어떤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주인공 시마무라와 게이샤 고마코의 연애 이야기는 줄거리도 분명치 않고, 그들의 성격도 명료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기억에 그렇다는 것이다. 대신에 내 머리속에 남아 있는 것은 작품에 가득 차 있는 눈과 우울 같은 것이다.에치고유자와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탔다. 버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묵으면서 소설을 집필했다는 여관으로 간다. 에치고유자와는 그렇게 크지 않은 도시로서 스키 타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버스를 타고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아서 나는 다카항(高半) 여관으로 올라가는 언덕 밑에 섰다. 여기서부터 나는 천천히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다카항은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걸어 올라갈수록 도시의 모습이 눈에 점점 더 잘 들어오게 되어 있다. 도시 한가운데에 높은 고가 철로가 지나가고 있어 아름다울 게 없다. 그러나`설국`의 고장답게 눈이 쌓여 운치가 있다.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 도시에서 1930년대, 1940년대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그가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30년대 중후반에 일본은 중일전쟁을 벌이던 참이고, 태평양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런 시대와 동떨어진 소설을 썼다. 일본 춤을 연구하는 인물이며, 게이샤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전쟁을 외면한 것이 오히려 그가 시대를 응대하는 방식이었다면, 그는 진실한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다카항 여관 2층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머물렀다는 방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나는 다다미방 한가운데에 다탁을 앞에 놓고 잠시 앉아 바깥에 가로막고 선 산을 바라본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생각한다. 문장이란 무엇인가 생각한다. 글을 쓰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다카항을 나와 언덕을 걸어 내려와 에치고유자와 역까지 걸어가며 나는 이것저것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겨두는 한편으로 왜 한국엔 노벨문학상이 돌아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시대라는 것과 너무 많이 타협해 버리는 한국문학의 풍토를 생각한다. 시대와의 불화를 이야기하는 것조차 사실은 그 시대와 타협하는, 또 다른 포즈에 불과하다고 확신하게 된다. 정말 불화를 겪고 있는 사람은 말하거나 꾸짖는 대신에 방에 들어가 글을 쓸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생각을 들어주지 않을 때, 아무도 내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을 때, 나는 나 혼자만의 세계에 침잠해서 내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삶과 문학에서 침묵의 가치가 빛나는 이유일 것이다.니가타로 갔던 나는 다음날 에치고유자와를 지나쳐 다른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에 눈이 내렸다. 천지에 가득 찬 눈 때문에 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있었다. 나무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맞으며 말없이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2013-01-17

생명이 소중하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나는 디스커버리 애청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최근에는 지구 45억년의 비밀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지구에 어떻게 생명체가 나타났으며, 공룡은 어떻게 해서 멸종됐고, 인간은 어떻게 이 땅에 출현하게 되었느냐를 이 프로는 참 생생하게 알려 주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한 가지. 예전에는 공룡이 멸종하고 나서 포유류가 나타난 것으로 알았는데, 땅속 생활을 하던 포유류가 소행성 충돌로 인한 화마를 피해 지구를 지배하는 주인공으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하기는 어렸을 적에는 공룡과 인간이 함께 사는 원시시대 만화를 보았으니 내 기억이 잘못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인간이 이 땅에 접붙이고 그 생명이 이어지고 이어져 `나`라는 존재에까지 이르렀다고 보면, 그런 사연이 예삿일은 분명 아니라 할 것이다.그런데 이런 프로는 삶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네 인생은 지구 45억년 나이에 비하면 찰나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 게 아닌가. 이 지구 환경이 다 파괴될 지경이 돼서 지구인들이 먼 지구 형제 행성을 찾아 떠나는 상상을 해본다. 그런 일이 언젠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 전에 먼저 지구가 원자력,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버리거나, 소행성 충돌로 화마에 휩쓸려 버릴지도 모르지 않는가.사실 인간이 역사라는 것을 지으며 살아온 것도 인류 역사 전체에 비추어 보면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가끔 그리스 비극`오이디푸스`나 `안티고네` 같은 것에 매료되기도 하는데, 이런 지혜를 담은 문헌들이라는 것도 과연 얼마나 가겠는가. 아무리 애지중지해도 천 년, 이 천 년 후에 그것이 남을지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온갖 훌륭한 종교들도 저마다 삶에 대해 깊은 통찰을 펼치고 해석력을 자랑하지만, 그런 종교라는 것도 과연 수천 년 더 갈 것인가.나는 마음속에 언제나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영육이 하나로 영원히 살 수 없다면 영혼만으로라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육체가 죽음과 더불어 홍진으로 돌아가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영혼에 저 갈망하는 영원성을 부여하고자 한 것이 초월적 종교들의 기원이 된 것은 아니겠는지?그러나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그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이는 아무리 훌륭한 종교인이라 해도 오히려 신 앞에, 영원성 앞에, 너무 거만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나는 죽음 너머의 영원성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자기의식을 품고 살아가고 있음을 안다. 이 자기의식이라는 것도 한갓 기만에 불과한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삶의 기쁨과 고통을 맛보며, 하루하루 시간적인 존재로서의 생명적 과정을 통과해 가고 있다.그런 느낌을 중시하는 사람의 하나로서, 나는 우리가 이 지상의 삶을 더 소중히 만들어갔으면 한다. 한국 사람들이 자살률이 세계 최고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극히 현세적이라는 한국인들의 심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삶이, 우리들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충분히 공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의 삶이 아무렇게나 취급되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아름다운 꽃송이가 떨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바로 그 심정으로 내 삶과 타인들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고, 이 삶을 함께 만들어 가려는 노력을 펼쳐야만, 허무하게 목숨을 끊는 이 시대의 저주받은 유행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용산이나 평택을 생각할 때 나는 이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2013-01-10

새해 덕담 “어울려 살아가라”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겨울 눈 내린 대전 중앙시장통 골목길 저녁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금방 어머니, 아버지와 헤어져 이곳에 들렀다.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두어 시간 동안 역에서 가까운 이곳을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옛날에는 더 어렸을 때 크던 공주에 자주 갔는데, 이제 공주는 맘을 못 내고 대전의 추억 어린 곳들만 둘러보게 되는 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사람은 현실과 싸우지 못하는 법. 나는 이 악습을 언제 버릴지 알 수 없다.겨울 저녁은 어딘가 쓸쓸하고 추워, 따뜻한 곳을 찾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나는 대전역에서 옛날 도청으로 통하는 큰 길을 걷다 중앙시장 통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 곳에 이른바 `먹자거리`가 있다. 나는 오늘 이 먹자거리며, 생선 파는 곳들을 둘러보고 싶다.옛날에 몰랐던 사실 하나. 이 먹자거리에는 유난히 지명을 딴 가게 이름이 많다는 것. 그 골목 쪽으로 몸을 틀자 처음에 보이는 상호는 안영집. 그 옆은 함경도집. 또 그 옆에는 강원도집. 그런데 이 강원도집에는 전라도집이라는 상호도 함께 붙어 있다. 여기서 좁은 골목 사거리를 하나 건너뛰면 전주집. 그 옆에는 만경집. 아마도 만경강에서 유래한 지명인 듯하다. 그 옆에는 단골집. 그 옆에는 별미집. 또 그 옆집은 백천순대. 만경집과 골목을 사이에 둔 앞집은 옥천집이다. 그 옆에는 은하다방이 있고.나는 이 가게들이 다 무엇을 팔고 있나 새삼스레 헤아려 본다. 소머리국밥, 보신탕, 순대국, 설렁탕, 닭도리탕…. 다들 육식이다. 그런데 파는 건 육식인데, 사는 모양은 어쩐지 초식동물들 같다. 한 골목에 여러 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고향 음식을 팔면서 어울리며 살아가는 모양이니 경기체가식으로 물어, “이 풍경 과연 어떠한지요?”이 먹자골목 풍경을 가슴에 담아두며 걸어간 나는 다음 골목으로 들어가 본다. 그곳은 생선, 야채를 파는 곳이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작은 난로 하나씩을 끼고 앉은 아주머니들이 손님들을 기다린다. 나는 야시장을 좋아하지만 여간해서는 찾아가지 못한다. 생선요리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스스로 다듬어 요리해내긴 힘들다. 나는 어물전에 가지런히 놓인 생선들을 정다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가오리, 홍어, 동태, 아귀, 미꾸리, 쭈꾸미, 쏘가리 같은 애들은 나도 다 안다. 박하지라고 하면 충청도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겠지만 게를 간장에 담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나는 어물전에 쓰인, 모르는 말들을 읽어본다. 호끼알. 이것은 나중에 보니 민태라는 생선 알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니라고 쓴 것은 새의 일종인 고니가 아니라 표준어가 `곤이`인 고니다. 물고기 배속에 든 알뭉치나 새끼 물고기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불메기는 메기의 일종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잡혀와 어물전에 누워서도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입이 마치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 같다. 이 골목이 끝나는 곳에는 정육점이 하나 붙어 있는데, 간판 중에 국내산 암퇘지 쫄데기라고 쓴 것이 있다. 쫄데기란 돼지 앞다리나 뒷다리살을 말하는 것이다.나는 이 먹거리들을 팔고 있는 사람들도 쳐다본다. 나보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내 궁금해 하는 것에 답해줄 수 없다는 듯 딴청들을 피우고 있다. 같이 장사하는 사람들끼리 수다를 떨거나 묵묵히 앉아서 마지막 손님을 기다릴 뿐이다. 나는 이 골목을 다 빠져나와 큰 거리 쪽으로 나간다. 어둠 속에 가스라이터를 파는 사람이 앉아 있다. 이 사람은 몇 개를 더 팔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일까 하고 궁금해진다. 이 사람이 오늘은 왠지 더 쓸쓸해 보인다. 사람끼리 어울려 사는 골목에서 혼자 떨어져 있어 그런가 보다.어울려 살아가라. 모르는 곳에서 잡혀온 애들처럼. 그것을 팔아가며 한 골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2013-01-03

야권이 가야 할 길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48%의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문재인 후보가 절반은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현 정부에 대한 염증이 그렇게 넓고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는 실패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만약 투표율이 77%를 넘어갔다면 문재인 후보는 선거에 지고도 말춤을 춰야 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번 선거를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세대 간 대립, 지역 간 대립이 너무 크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두 단절 때문에 차라리 눈에 덜 뜨인 계층간 대립도 그에 더하면 더했지 못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선거 기간 내내 좌절과 증오의 목소리가 여론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여당도 그렇고, 야당도 그렇다. 여권에서는 야권 세력 전체가 종북 세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몰아붙였다. 문재인이나 안철수 후보에 대해 공식석상에서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말들도 많이 한 것으로 안다.그러나 필자는 야당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보았다. 선거기간 내내,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야당은 좌절과 증오에 호소하는 전략에 깊은 유혹을 느끼는 듯 했다. 젊은이들, 20~30세대들,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좌절감에 호소하는 정치는 투표율이 얼마가 되면 말춤을 추겠다든가, 건전지를 주겠다든가 하는 식의 선동적 구호로 이어졌다.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목소리는 귀에 잘 들리지 않고, 현 정부에 대한 반감에 호소하는 단순한 전략이 계속되는 바람에, 원래부터 여권에 속해 있는 사람들 외에, 여(與)든 야(野)든 설득력 있는 호소를 하는 쪽에 마음을 주곤 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많이도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정희 후보가 토론회에 나와 박근혜 후보를 냉소와 조롱을 섞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을 보고 속시원해 하는 분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한 유력 정당의 후보를 저렇게 예의 없이 대해도 되나 하는 상식적인 물음을 던지며 상황을 우려하는 분들이 훨씬 더 많았으리라고 생각한다.필자는 이미 지난 총선 때, 야권이 자신들이 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선거를 엉망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냉정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때 필자가 가장 우려한 것은 야권에 이미 야당적인 입지에 기반을 둔 기득권 세력이 배타적, 독점적인 방식으로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권력은 여당이나 여권만 가진 것이 아니다. 야당이나 야권도 그에 상응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을 창조적, 긍정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원래 자신들이 누리는 힘을 확장하는 쪽으로 사용하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다.야권은 총선 패배 후 야권이 걸어온 길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할 것 같다. 안철수 후보는 그가 하는 말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그가 걸어온 길이 새로웠기 때문에 사람들의 각광을 받았다고 봐야 한다. 안철수라는 기호로 대표되는 사람들을 배제한 채 대선에 뛰어든 야당, 야권의 `기득권` 세력은 새로움과 창의력 대신에 약자들, 패배한 이들, 좌절과 분노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의 부정적 감정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일관했다.`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그들을 지지한 국민들에게 이번 선거는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의 연속이었다.메시지보다 메신저가 훨씬 더 중요한 법이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누가 말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야권, 야당에서도 대선때 뭔가 새로운 말을 많이 만들어 내려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서 졌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새로운 말을 해도 사람이 그렇게 새롭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야권에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은, 새 출발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12-12-27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께 바란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먼저 박근헤 대통령 당선자께 진심을 담아 축하를 드린다. 학교 교실에서 반장을 뽑을 때도 드라마가 있는데, 하물며 대선에서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 모든 어려움을 겪고 앞으로 5년 동안 새로 나라를 이끌어 가시게 되었다. 이제 며칠 동안은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안정을 취하셔도 될 것이다. 그런데 뜨거운 마음으로 축하를 드리며 함께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 곳에 기대와 당부의 말씀을 드릴 것을 벌써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우리는 벌써 여러 차례 국민의 손으로 직접 큰 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을 거쳐 왔다. 그때마다 그 분이 당선되실 때는 큰 기대를 품고도 퇴임하실 때는 참담한 실망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겪어온 5년의 소감도 똑같이 그렇다. 새 대통령 당선자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필자는 먼저 박 대통령 당선자께 지금 우리 국민들이 겪고 있는 마음의 깊은 단절을 치유해 주실 것을 요청 드린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 많이 가진 이와 덜 가진 이, 윗세대와 아랫세대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우리가 이 대한민국이라는 이 배를 함께 헤쳐 몰고가야 할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인 것만이 아니라 `남`이기도 하고, 남이 곧 나일 수 있도 있다는, 사랑, 자비, 동정의 마음이 졸아들고 나 먼저 살아야겠다는 좁은 마음이 풍선처럼 커졌었다. 그러니 어떻게 나라에 평화와 안정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대통령은 자신이 속한 정파와 자신을 지지해 준 국민을 보고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정파와 국민이 모두 똑같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새로운 시대는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열고 정을 나눌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다음으로 필자는 박 대통령 당선자께 우리 사회를 더 자유롭고도 공정하게 만들어 가 달라고 당부 드리고 싶다. 지난 10년, 특히 5년 동안 필자가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만 보아야 했던 일들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한다.사회의 요직들을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이의 약점을 잡아 쫓아내 버리고 점령군처럼 차지하던 일. 민심이 대운하 사업에 반대하자 대운하가 아니라 4대강 정비라며 나라 예산을 물 쓰듯 토건사업에 쏟아 넣던 일. 777이라는 공약은 어디로 가고 세계 경제가 좋지 않다는 핑계만 대며 사회의 특정 지역, 특정 계층, 특정 인맥과 학맥에만 기회를 제공하던 일. 나랏일에는 늘 반대하는 이가 있게 마련이건만 들리는 목소리가 귀에 거슬린다고 해서 온갖 사법적 수단을 활용해서 언로를 막아온 일. 나라를 위해, 국익을 위해 일해야 할 지도자가 나랏돈을 움직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했다는 의혹을 받는 상황….왜 잘 한 일은 기억에 남지 않고 나쁜 일만 마음을 괴롭히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말이 있다.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뜻이다. 필자가 지난 몇 년 동안 경험한 통치는 그런 것이었다.가난 구제는 임금님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경제를 살리고 복지를 늘리고 빈부 격차를 줄이는 일은 쉽지 않다. 모든 일을 단번에 잘해 달라고 하면 그것처럼 부담스러운 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모습만큼은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크나큰 국민의 마음은 하루아침에 움직이지 않지만, 일단 움직였다 하면 어떤 잔재주로도 막을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한다. 민심은 가혹한 정치보다 더 크고 무서운 호랑이다. 민심이라는 이 호랑이 등에 올라타시게 된 귀한 분이 정녕 우리 국민들 `모두를` 위해 주실 것을 다시 믿는다.

2012-12-20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나라가 온통 사람 뽑는 문제로 뒤숭숭하다. 여당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처음부터 단일 후보로 나섰고, 야당에서는 문재인 후보에 안철수 후보까지 있어 단일화하는 과정을 거쳐 이제야 겨우 전열을 정비한 것 같다. 대통령 선거는 일개 기업이나 학교에서 사람 뽑는 것과 달라서 국민 다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몇 백만, 몇 천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나. 이 큰 마음은 한 두 시간에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마음 급해도 하루이틀 따지지 않고, 급한 사람 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천천히, 움직이지 않는 듯 움직이는 게 이 마음이다. 그러나 또 한 번 어느 방향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어떤 방패로도 그물로도 막지 못하는 게 이 마음이다.나는 여권은 여권대로, 야권은 야권대로 어떻게 움직여 가는가를 먼발치서 냉연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두 분이 대통령 후보로 등록할 때 전후부터 지금까지 큰 부침이 있었다. 나는 이 큰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도대체 어떤 사람을 선택해야 할 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문제는 비단 대통령 선거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세상 살아가면서 늘 사람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려면 우리는 제 힘만으로 뜻을 이룰 수 없고, 반드시 다른 이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자기 혼자 이룰 수 있는 일이 세상에는 없다.나는 최근 들어 이상하게도 이런 문제 앞에서 심한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생각을 거듭하면서 얻은 작은 결론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 마음이 훌륭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력이 좋은 사람은 가치있는 일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이 하나 남김없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라면 마음이 훌륭하지 않고는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 세상을 여기까지 겪어 오면서 나는 실력 있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실력이 있는데 마음까지 훌륭하면 금상첨화다. 실력 좋고 마음이 그 반대면 결국 탈이 나는 일이 많았다. 아니, 실력이 좋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일을 더 크게 나쁘게 만든다.또 하나는 사사로운 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적 덕목인지 어떤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가까운 것은 가깝게 생각하고, 먼 것은 멀게 생각하는 문화적 습성이 있다. 내 가족이 소중하고, 다른 이의 가족은 덜 소중하다. 내 동창의 일은 중요하고, 학교가 다른 이는 그만큼 헤아려 줄 필요가 없다. 나와 같은 띠는 어울려 술 마실 만하고, 나이 차이가 지면 치받거나 누르거나 한다. 이런 사고법, 행동방식으로는 세상일을 뜻있게 만들어 갈 수 없다. 가까운 사람을 멀게, 먼 사람을 가깝게 여길 줄 아는 사고방식, 행동방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와 아무 관계가 없어도 이렇게 보고, 저렇게 생각하니 그 사람이 적절하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과연 나는 사람을 선택하는 문제 앞에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은 심정의 동물이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도 마음이 가면 위하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마음이 멀어지면 쳐다보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이다. 이런 마음을 마음대로 부려 사리에 맞는 판단을 하는 일이 어찌 쉽다고 할 수 있겠는가?사람을 선택하는 일은 위도, 아래도 원리는 같다. 마음에서 실력까지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눈이 있으면 크게 실수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과연 나는 5년 후, 17년 후를 내다보고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고민이 깊어가는 겨울밤이다.

2012-12-13

싸움에서 살아남기?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세상 사는 일에는 늘 싸움이 뒤따라 다니는 것 같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저께 토론이 있었던 것도 싸움의 측면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계절이 되면 노사 양측이 타협하지 못하고 일전을 벌이는 것을 보는데, 이것도 다 세상살이의 싸움이라면 싸움이다. 계급이나 계층, 성별이 달라서 집단적인 갈등을 빚고, 더 많은 것, 더 유리한 것을 차지하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의 필연이라면 필연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단지 집단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창시절부터, 취직을 하고, 승진을 할 때도 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고독한 경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쟁은 곧 싸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싸움은 일반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학교에도 싸움이 있다. 학생들끼리도 일진이다 뭐다 해서 싸우고, 반장이 되기 위해 싸우고, 1등을 하기 위해 싸운다. 어떤 사람을 뽑으려고, 또 뽑지 않으려고 싸운다.나는 이 학교 안에서 일생을 지내다시피 하는데, 그 여정의 어느 때인가 싸움과 같은 경쟁 속에서 밀리고 밀려 왕따 같은 신세로 전락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밀려난 사람은 학교에서도 가장 보이지 않는 곳, 가장 초라한 곳에서 음지식물처럼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런 자에게는 대학 시절에 같은 하숙밥을 먹었던 후배까지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간다. 그에게는 장학금이나 조교 자리 같은 것은 제대로 돌아오는 법이 없다. 이 질긴 악연은 대학 교수가 되려고 원서를 들고 다닐 때까지 계속된다. 한 번 링 밖으로 밀어낸 자가 혹시라도 링 안으로 들어올까 저어한 나머지 끊임없이 밀어낸 자를 또 밀어내는`이지메` 같은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반복된다.나는 그 어떤 때 단 한 가지 진리만을 가슴에 안고 버텨내야 하는 때가 있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는 한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소외시킬 수 없다. 자기가 자기를 버리는 순간에서야 그는 완전한 고독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그에게는 아직 살아나갈 힘이 있다. 다 졌다고 생각되는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나는 지금 생각한다. 싸움에서는 늘 이겨야만 하는 것일까. 싸움에서 지는 길을 택할 수는 없는 것일까. 싸움이라는 것을 세상살이에서 아예 없애버리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나라와 나라끼리 전쟁을 치르게 되면 한쪽이 죽지 않으면 다른 한쪽이 죽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 하고 기독교에서도 원수를 사랑하라 하건만,`호국불교`라는 말이 있듯이 불가피한 싸움에 나가지 말라는 법이 없고, 자국에 테러를 가한 집단을 원조한다고 해서 아예 도륙을 내버리는 일도 그치지 않고 있다.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슬픈 일이다. 승리한 자가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에 패배한 자는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생명을 빼앗기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신념을 가지고 대들어야 할 싸움이란 존재하는 것일까.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무리 영광스럽게 살아도 결국 삶이란 죽음 위에 떠 있는 조각배와 같다. 나만이 아니라 남도 다 똑같은 조각배들이다. 내가 이 바다 위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면 남도 그럴 것이다. 내가 더 어려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면 남도 똑같이 그럴 것이다.내게는 지금 어떤 어려운 일에서 무엇인가의 결정을 놓고 싸울 때 나 아닌 쪽의 처지와 아픔을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 서울은 희디흰 눈이 온 천지를 감싸주고 있다. 싸움의 논리를 덮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모포가 필요한 때다.

2012-12-06

삶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가는 것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얼마 전에 학교 후배가 대학에 취직하는 문제로 몸살을 앓은 일이 있다. 멀리서 이 일이 되어 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대학 교수가 되는 일은 참 어렵다. 그 어려움은 고시에 합격하는 것과도 다르다. 고시 같은 것은 점수를 높게 받으면 그 순서대로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대학에서는 그와 다르다.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와도, 아무리 논문 실적이 많아도 그 사람이 취직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게 바로 대학의 교원 임용 과정이다. 학과마다 필요로 하는 사람의 특성이 다르고, 그 학과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학맥이나 인맥이 다르다보니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꼭 선택된다는 법이 없다. 어떤 때는 남자라서 안 되고 어떤 때는 여자라서 안 된다. 어떤 때는 특정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안 되고 또 어떤 때는 믿기 때문에 안 된다. 더구나 매번 한 사람만이 선발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도전해도 매번 좌절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이렇듯 교수가 되는 정법이 없기 때문에 웃지 못할 일이 다종다양하게 생겨나는 것이 대학 인사다. 밖에서나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보면 저것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벌어지는 일이냐고 아연실색할 일이 버젓이 행해지곤 하는 것이 대학에서의 취직 일인 것이다.그런데 이 후배는 다행히도 자신을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연구 실적이 좋았기 때문에 주관이 개입하기 어려운 1차 심사인 서류 심사를 거쳐서 2차 심사에 해당하는 공개강의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어떤 우여곡절을 거쳤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 후배는 2차 심사 과정도 무사히 마치고 마지막 심사과정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웬만한 학교들은 대체로 2차 심사를 거쳐 올라온 성적표를 인정해서 1위로 올라온 사람을 낙점해 주게 마련이지만 사립대학 같은 경우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3차 심사에서 순위가 싹 바뀌어 `엉뚱한`사람이 낙점을 받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1순위, 2순위, 3순위자까지 모두 자격이 부적합하다 해서 이른바 `나가리`를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많다.결과적으로, 가슴을 졸이며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마지막 관문을 이 후배는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이 사람을 이끌어 줄 수 있는 마지막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 나는 그와 정반대의 경험을 했다. 그때 나는 세력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박사졸업생이었다. 졸업하고 나서 두 학기를 몇 곳에 원서를 냈지만 소득이 없었다. 내심 연구 실적이 꽤 만만찮다고 생각하던 터에 이곳저곳에서 `낙지국`을 먹고 나니 낙심천만이었다. 세상이 나를 배척한다는 서운한 마음과 더불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사회에 입문할 수 있는지 난감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용케 2차 심사까지 세 곳 다 올라갔지만, 또 3차 심사까지 올라가서도 더 이상 문을 열어주지 않는 세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참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쳐왔다. 나와 어떤 일면식도 없고 관련도 없었던 분이 내 서류만을 보고 호의를 품으셨던 것이다.세상이란 뭔가? 그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삶을 이어주고 이어받는 것이다. 아랫세대 사람은 늘 부족하고 약하다. 그러나 후생가외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윗세대는 잘 살펴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역할을 잘 하면 할수록 사회는 더 나아질 것이다. 물론 그분이 그때 잘된 선택을 하셨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2012-11-29

운명이라는 것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최근에 백석이 번역한 `테스` 에 대해 글을 쓴 일이 있었다. 백석은 너무나 잘 알려진 시인이지만 이 사람이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 까지 번역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뿐이 아니다. 백석은 숄로호프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돈강`의 1부와 2부까지 번역하기도 했다. 백석은 언어에 달통한 사람인 듯했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했고, 신문사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라는 곳에서 교사 일을 하기도 했는데, 그 때 러시아 사람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는 것을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이 있다. 그러니까 백석은 영어나 러시아어, 일본어 같은 외국어들을 상당히 자유자재로 이해하고 구사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그러나 그런 백석이라고 해서 시인이 `테스`라는 분량 많은 소설까지 번역해야 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백석은 조선 땅을 떠나 만주로 건너가 살면서도 이 번역 일을 놓지 않았고, 마침내 1940년 9월에 조광사라는 곳에서 한국어 번역 `테스`가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나는 이 번역작에 대한 글을 쓰면서 생각했다. 백석은 그 자신이 이 소설의 여주인공 테스처럼 자신의 뜻이며 의지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없었음을 너무나 괴롭게 자각했던 같았다.자 먼저 이 소설의 줄거리를 보자. 소설 속에서 테스는 집안 형편을 좀더 낫게 만들어 보려는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자기와 먼 친척벌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알렉이라는 남자에게 겁탈을 당한다. 그리고 아이가 생겼다. 테스는 집에 돌아와 이 아이를 낳아야 했으나 결국 아이는 일찍 죽고 만다. 집을 떠난 테스는 멀리 가서 착유장에서 젖 짜는 일을 한다. 참 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작가 토마스 하디는 이 광경들을 참으로 자세하게 묘사하는 힘을 가진 작가였다. 그곳에서 테스는 또 다른 남자를 만나는데 그의 이름은 엔젤이다. 엔젤은 관념적이지만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었고 이 때문에 테스의 아름다움에 주목해서 청혼을 한다. 테스는 이 결혼을 끝내 받아들이지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엔젤은 테스의 과거를 용납하지 못한 채 멀리 브라질로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괴로운 테스에게 또 다시 다가온 알렉은 엔젤이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며 집요하게 새로운 결혼 생활을 요구한다. 남편의 냉대와 시간의 흐름에 패배해 버린 테스가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먼 곳에서 세상의 참된 아름다움에 눈 뜬 엔젤이 돌아온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절망에 빠진 테스는 자신을 속이고 또 불행의 나락으로 빠뜨린 알렉을 살해하고 만다.운명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 운명이라 하는가? 그것은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구절이 잘 보여준다.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그렇다. 운명이란 내 뜻이나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것이다. 내 뜻이나 힘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이다. 그 힘은 대문자로 된 파워(Power)이기 때문에 그것을 물리칠 수도, 넘어설 수도 없다.사람은 누구나 운명이란 것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늘 자기보다 더 크고 높은 것 앞에 놓여 있고,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슈퍼 파워를 가진 인간이란 없기 때문이다.요즘 내 주변에는 참 어려운 일들이 많다. 학교도 어렵고, 공부도 어렵다. 세상도 어렵다. 운명이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날들이다.

2012-11-22

대전 한의원 한 장면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2년 전에 대전에 있는 한의원에 간 적이 있다. 애초부터 한의원에 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대전은 내가 성장기를 보낸 곳이다. 가끔 혼자 아무 이유 없이 그곳에 가고 싶은 때가 있다. 그곳에는 부모님이 계시지만 이런 때는 부모님조차 뵙지 않는다. 잠행을 하듯이 옛날 추억의 거리들을 둘러보고 돌아오게 된다. 대전역에 내려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아카데미 극장이라는 옛날 극장이 아직도 간판을 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뒷문 쪽으로 난 골목으로 접어들면 여인숙 촌이 즐비하다. 이곳은 왠지 은밀한 거래들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이 골목을 조금 더 걸어가다 보면 한의원들이 밀집해 있는 거리가 나타난다.나는 아무 이유 없이 단지 추억을 곱씹으면서 나 자신에 대한 상념이나 즐길 요량으로 이 거리를 걸어갔다. 그러다 한의원들이 문을 열고 있는 곳까지 이르게 됐다. 그러자 갑자기 만성이 된 허리 디스크가 악화돼 몸이 썩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을 한 번 맞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떤 한의원 문을 열고 들어갔다.한의원 주인은 나이가 무척 들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노인 중에도 힘이 많이 달아나버린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손님도 없어서 금방 침을 맞게 됐는데, 침을 아주 잘 놓는 분이었다. 침을 맞은 채로 한 십 분 있다 나오니 이 노인 분은 웬 중년의 여인과 함께 앉아 있었다. 여인이 노인 드리려고 김밥을 싸온 모양인데 그 모양이 심히 가지런했다. 나는 두 사람이 정답게 김밥을 나눠 먹은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상상해 보았다.그로부터 몇 달이나 지났을까. 나는 똑같은 심정으로 대전을 다녀가게 되었다. 그러자 침 잘 놓던 노인 분이 생각났고, 그 한의원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한의사 노인과 중년 여인이 함께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아마도 부부인 듯했다. 나이 차이는 꽤나 많아 보이는데, 그래도 부부일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나선 한참 대전 생각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별 취미는 생겨났다가도 사라지고 사라진 듯했다가 다시 솟아나게 마련이다. 며칠 전에 다시 대전에 가게 됐다. 마침 읽어야 할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들고, 새마을호를 타고 두 시간을 여유 있게 즐기며 대전으로 갔다. 6호차, 7호차 사이 빈 곳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책을 읽다가 풍경을 바라보는 재미가 썩 좋았다. `테스`를 쓴 작가는 참으로 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대전에서 다시 그 거리를 지나가게 되자 한의원 생각이 났다. 굳이 침을 맞을 생각도 아니면서 다시 그곳을 찾아들어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노인 혼자 구부정하게 정수기 물을 받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어딘가 몸의 기운이 완전히 달아나버린 것 같았다. 한 일 년 사이에 노인은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노인이 저렇게 상해 있는데, 그 중년의 여인이 옆에 같이 있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한의원이라면 아무 용무도 없이 들어가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다시 침을 맞으러 왔노라고 말씀 드렸다. 그러자 노인은 말을 할 기운조차 없는 사람처럼 손을 천천히 휘저으며 침을 놓지 않는다는 표시를 했다. 그 모습은 말을 안 하는 게 아니고 말을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이었다.한의원을 돌아서 나오면서 그 중년의 여인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상상해 보았다. 노인이 저렇게 폐인이 되다시피 한 것은 필시 그 여인이 보이지 않는 것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그러자 세상의 인연은 다 저렇게 맺어졌다가 흩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허무한 생각이 머리를 드는 것이었다.

2012-11-15

학교를 바꿔야 한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우리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이 걸리는 교육제도를 가지고 있다. 12년을 공부한 후 다시 대학에 가서 2년에서 4년 정도 공부를 하고, 남자는 군대에 갔다 와야 비로소 명실상부한 사회인이 된다. 12년 동안 학생들은 매일 아침 학교에 나가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받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교과목 교육은 한 층 한 층 얇은 벽돌을 쌓아나가듯이 이루어진다. 국어 과목을 예로 들면, 초등학교 6년 동안 이루어진 성취기준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와서도 수준을 높여 섬세하고 조밀하게 이루어진다. 세밀한 성취기준에 따라 만들어진 국어 교과서를 중심으로 꽉 짜여진 교육을 받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12년은 너무 길다. 또 학생들의 서로 다른 재능들을 높이 고양시키는 방법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과정에 의해서도 우수한 학생들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식인과 관료들, 기업가들도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교육제도를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나는 먼저 학교 교육 기간을 10년으로 줄여보자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교육을 중심으로 초등학교 5년, 중고등학교 5년, 합쳐서 10년 동안 지금 12년 동안 이루어지는 학교교육을 해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고등학교 5년은 학생들이 학교에 앉아서 교실 수업을 받는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장래의 직업을 찾아나가는 센터로서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교사들은 이를 위한 지도자로서 학생들이 사회 각계에서 자신의 재능 또는 적성과 관련된 교육을 받는 일을 조정, 조절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제철소에서 일을 하고자 하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선생님은 제철소에 학생 소개장을 써서 보내고, 제철소는 학생을 위한 교육시설을 확보해 놓고 있다가 그에 맞는 교육을 실시한다. 학교는 이 학생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도록 학생의 부모, 그리고 회사의 교육담당자들과 긴밀히 협의한다.셋째, 이런 일들이 가능하려면 대학 입시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학생들이 곧바로 대학에 갈 수도 있지만, 직장에 다니다 필요에 따라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져야 한다.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했던 사람이라면 그 경력과 실적을 중심으로 선발해서 대학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내가 이러한 교육제도를 꿈꾸어 보는 것은 이런 변화가 청소년들의 육체적 성장속도에도 부합하고, 그들의 정신적 성숙을 효과적으로 촉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옛날에는 15세만 되면 결혼도 했던 사람들을, 근대에 들어서면서는 긴 제도교육 기간을 거쳐 성인이 될 수 있도록 했고, 이에 따라 아주 긴 청소년 기간이 설정됐다. 이 기간 동안 학생들은 공장이나 군대, 감옥과 같은 구조를 가진 학교라는 건물, 일종의 수용시설 속에서 길러지게 됐다. 고등학생이 되어 육체적으로 이미 성숙한 학생들, 자신의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데 목이 마른 학생들은 틀에 박힌 교실과 수업에 적응하지 못한다. 이미 이러한 학교교육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들의 비율이 아주 높은 수준에 다다라 있다. 위험신호가 나타난지 벌써 오래된 것이다. 나의 공상에 따르면 학생들은 18세가 되면 실제 성인으로 사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군대에 갔다 와도 빠르면 20세면 사회생활이 가능해진다. 대학은 사회인으로서 공부하는 곳이 된다.지금 내가 말한 학교 개혁론은 하나의 공상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일은 공상에 가까운 상상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2012-11-08

역사 문제를 생각한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최근 여러 문제와 관련해서 역사 인식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복잡한 현대사를 헤치고 나왔기 때문에 우여곡절이 많고, 그만큼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사람도 많다. 나는 역사 문제를 역사가들처럼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내 의견을 정면에서 피력하는 것을 피하곤 한다. 역사가들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뭘까? 그것은 인물의 행위를 역사라는 거울에 비춰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는 역사가들 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역사 속의 인물을 판단하는 것 역시 그들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속성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역사적 신념에서 벗어나는 인물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가는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 독재에 협력한 인물들을 뱀 보듯이 하고, 또 어떤 역사가는 좌익 활동을 한 인물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빨갱이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인정할 수 없다고 본다.나는 이런 대쪽같은 판단과 의지를 존중하는 편이지만 특정 인물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해방 이후에 좌익 활동을 하다 월북해서 6·25전쟁에 가담한 인물이 있다고 하자. 역사 속에서 그런 인물은 얼마든지 있다. 그가 일제 시대에 좌익적인 사회운동을 하다 일경에 검거돼 투옥된 일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또 친일 경력이 농후한 인물이 해방 후 한국 사회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을 수도 있다. 이런 인물 역시 한둘은 아닌데, 이런 인물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는 뭔가?나는 인물의 역사적 행위 과정을 판단할 때 여러 측면을 고려하는 종합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본질주의적인 사고, 즉 어떤 잘못된 점이 있기 때문에 인물을 원천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시각은 우리나라와 같이 복잡한 역사적 과정을 거친 사회에서는 쉽게 통용되기 어렵다.명쾌하고 투명한 판단과 처리가 가능하려면 잘못된 점을 즉시 시정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렇지 못했다. 해방 이후에 극단적인 친일 활동을 벌인 인물조차 사회의 중심무대에서 밀어낼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었다. 또 북한에는 아직도 6·25 전범들이 그득하지만 그들을 어떻게든 처벌할 현실적 도구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떤 인물은 사회적 환경의 변화를 견뎌가며 오래 살아남는다. 많은 일을 해나가고, 그 가운데에는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있다.문학 관계자가 하는 일은 역사가가 하는 일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옳고 그름에만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학은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문제, 또는 그 이전의 문제를 다룬다. 어떤 분들은 이런 문학의 역할이나 가치를 불만스럽게 본다. 왜 더 투명하게, 명쾌하게 보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자명한 것이 내일은 반드시 자명하지 않는 것이 된다. 오늘 그르다고 생각했던 것이 내일은 바른 것이 된다. 때문에 문학은 지금 시비를 판단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없다. 더 포괄적으로 내면적 정황까지 다 살펴야 사태의 진실에 가까운 면이 드러나고,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총체적인 판단에 가까운 진단을 할 수 있다.최근에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하는 것이 있다. 반복은 싫다는 것이다. 과거는 잘 됐든 잘못됐든 우리 것이다. 우리가 책임을 나눠 가져야 한다. 우리가 과거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과거가 오늘에 반복돼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유신체제도, 노무현 정부도 반복되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 내일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의 바람 아닐까. `

2012-11-01

그날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그날 나는 학교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내가 살던 동네 태평동도 변두리지만 학교는 더 먼 변두리에 있었다. 학교에 가려면 시내버스나 스쿨버스, 아니면 자전거를 이용해야 했지만 그 어느 것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 시내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까지 한참 걸어간 후 버스를 타야했다. 등교시간에는 언제나 만원. 버스 안내양 누나가 배로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한 김밥 버스에 밥알들을 밀어 넣으며 오라이를 외치면 버스 기사 아저씨가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김밥 속을 정리했다.버스 앞문과 뒷문 중간쯤에 겨우 버티고 서서 한손으로는 터질 듯한, 또 다른 김밥 책가방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 천장에 매달린 손잡이를 잡고 거친 운전솜씨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라디오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음이 점차 안정되면서 학교 앞 정류장에 내릴 때까지 이것저것 공상이나 하는 것이다.그때 라디오가 무슨 소식을 전해주고 있었다. 흔히 틀어주는 정규방송이 아니었다. 학생들도, 어른들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은 대통령 유고를 알리는 소리였다. 여기저기서 작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기억에는 그것이 여학생인지 남학생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그쪽 노선으로 여학교가 없었으니 그것은 남학생들의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그때 나도 눈물을 흘렸다. 우리 대통령이 돌아가시다니….몹시 슬프면서도 세상이 곧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대통령이라는 직함이 박정희라는 이름이나 마찬가지로 고유명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박정희라는 세 글자와 동의어였다. 나는 1965년생이다. 기억이 허용하는 유년의 시절부터 언제나 대통령은 그분이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사였고, 나중에 장학사를 거쳐 교장선생님이 됐다. 나는 학교의 질서를 적어도 겉으로는 따르는 소년이었다. 종신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세상이 곧 그를 따라서 끝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학교도 그날 하루종일 뒤숭숭했다. 물상 선생님은 늘 전날 마신 술이 안 깬, 벌건 얼굴로 수업에 들어와 학생들을 쥐 잡듯 혼내곤 했는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그때까지 완강하게 지켜져 온 질서가 어떻게 해서 깨어지게 되었는가는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다.그 다음해 봄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교정 옆 언덕에는 같은 재단에서 지은 상고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함성 소리가 나면서 고등학생 형들이 전부 운동장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큰 사변이라도 난 것 같았다. 중학생인 우리들 수업도 중단되고, 선생님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나갔다. 체육 선생님이 학생 주도자 같은 형에게 다가가 뺨을 때리며 무엇이라고 혼을 냈다. 고등학교 전교생을 그 자리에서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는 `서울의 봄`이라고 했던 때의 사건이었을 것이다.어린 시절의 내게 체제는 무엇이 되었든, 한국식 민주주의가 무엇이든 아무런 상관 없는 일이었다.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는 어린이였다. 반공 웅변대회에 여러 번 나가봤고, 전교 어린이 회장을 했다. 아침마다 교장선생님이시기도 한 설립자의 훈시를 교실마다 설치된 마이크로 듣고, 일요일 아침에는 같은 반 학생들끼리 유등천변에 풀을 매고, 도랑을 치러 삽을 들고 나갔다. 대통령의 사진과 훈시는 국민학교 때나 중학교 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분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존경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그 분의 일자걸음을 본받으려고 쉬는 시간에 화단에 나가 좁은 경계석 위를 걸어가는 연습을 하곤 했다.어느 날 갑자기 그분의 세계가 끝났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엔 아직도 그분의 신화가 살아 있어 다른 생각을 하려는 나를 잡아끈다. 그 분의 역사는 아직 제대로 평가될 수 없다. 모든 평가는 신화가 물러나고 이성이 제대로 작동할 때 이뤄지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2012-10-25

노벨문학상 그리 멀지않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중국의 모옌으로 결정났다. 말로는 말하지 않고, 글로나 말하겠다는 뜻에서 필명을 말 막자, 말씀 언자, 莫言으로 했다는 작가다. 우리에게는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영화`붉은 수수밭`의 원작자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작가 이름만 가지고는 낯설게 느낄 작가다. `붉은 수수밭`을 본 것은 한참 된 일인데, 화면에 흐르던 중국적인 붉은 색채와 지독한 고량주 냄새는 생생하기만 하다. 주연을 맡은 공리는 이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그 뒤로 숱한 명작들에 출연하는 명배우가 되었다.모옌에게 명성을 선사하고, 끝내는 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까지 만들어준, `붉은 수수밭`의 원작 이름은 `홍까오량 가족`이라는 상당히 긴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연작 장편소설로 영화 `붉은 수수밭`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 첫 번째 연작이라 할 제1장 `붉은 수수`에 대부분이 들어 있다.이 소설을 읽으면서 중국에 노벨문학상을 안긴 모옌이라는 작가는 과연 어떤 미덕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서구인들은 역시 중국에 대해 어떤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일찍이 펄벅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긴 작품이 `대지`였음은 무슨 뜻일까? 서구인들에게 중국은 광활한 대지, 황원, 그 위에 터를 잡고 자연-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중국은 역사-인간 이전에 자연-인간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것 같다. 그래서 역사-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연-인간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는 중국인들의 초상을 접하면서 예술미를 느끼고 감동을 받는 모양이다. `대지`가 그리고 있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었고, 이 `대지`의 풍경화가 바로 이 모옌의 `홍까오량 가족`에도 여실히 담겨 있음을 본다. 그러니까 `홍까오량 가족`은 서구인들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중국인의 심성을 가장 그럴 듯하게 보여준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몇 년 전에는 지극히 `반중국적인`소설을 쓰는 중국계 귀화 프랑스인인 가오싱 젠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중국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아예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작가다. 나는 그의 장편소설 ` 혼자만의 성경`을 통독했는데, 문화혁명기에 대한 이 작가의 처절한 고발과 비판에 전율감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가는 그 반체제적인 철저함 때문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모옌은 소설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인정하는 듯한 화자의 어조가 말해주듯이 체제내적인 속성이 있다. `홍까오량 가족`은 중국인들의 빛나는 항일 반제 투쟁이라는 이념에 결부돼있다. 거기서는 중국주의의 냄새가 나고, 중국식 속류 사회주의의 영향이 엿보인다. 그런데도 왜 서구인들은 그에게 노벨상을 수여했던 것일까?모옌 소설은 표방하는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자연-인간의 모습을 풍요롭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속에서 인간들은 대지가 부여한 강인한 생명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간다. 때로는 죽음마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 수단이 된다. 그것은 더 많은 생명을 번성하게 한다.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이 카자크인들의 생명력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인간에 대한 자연-인간의 승리를 보여주었다면, `홍까오량 가족`역시 훌륭한 점이 있다. 모옌은 작품을 쓸 때면 늘 붉은 수수밭 들판이 있는 고향에 돌아가곤 한다고 한다. 성공하면 대지를, 고향을 떠나는 작가들과 달리 그는 늘 그곳으로 돌아가는 진정성이 있다.한국 작가들이 노벨문학상을 못 탄다고 야단들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작가들이나 우리들 자신이나 더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근본적이 돼야 한다. 우리가 서구인들이 찾아 헤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노벨의 문학상도 그렇게 먼 남의 일만은 아니게 될 것이다. 얼추 많이, 여기까지, 왔다.

2012-10-18

사적이기만 한 삶은 추하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무라카미 하루키를 향한 내 의문에 답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하루키도 이미 변했다. 하루키라는 존재가 한국문단에 그 존재를 뚜렷이 한 때는 1990년대 전반기. 그때 문학사상사에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상실의 시대`로 번역해 들인 것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일본 68혁명 세대의 패배를 노래한 이 음유시인 기질의 작가는 한국에 들어와 80년대 학생운동의 패배감에 젖어 있던 세대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당시의 X 세대들은 그의 신도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80년대에 학생들이 `창작과 비평`이나 `김수영시전집`을 들고 다녀야 고상한 티가 났다면, 그때는 하루키 책 한 권쯤은 들고 다녀야 시대를 아는 청년으로 취급되는 듯했다. 하루키의 어느 단편소설에서 주인공이 이렇게 독백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절대로 사회 문제의 개선을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또 다른 숱한 문제들이 생겨나는데 왜 그런 부질없는 싸움을 위해 내 귀중한 인생의 시간들을 허비해야 한단 말인가.`나는 이런 하루키를 혐의쩍어 했다. 많은 이들이 하루키 노선을 따라 공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삶에서 사적인 삶의 세계로 인생 전환을 해나갔다. 내가 중요하고, 나의 자유가 중요해졌다. 언론은 386세대와 X세대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도를 했다. 왕가위 감독이니, 하루키니, 서태지니 하는 기호들이 새 시대 개막을 알리는 나팔 소리처럼 간주되는 때였다.그때 나는 지하생활자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시대는 바뀌어서 나처럼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설 자리는 없어졌다. 그러나 세계가 부조리하며 더 정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감각만은 남아 있었기에 진군하는 시대와 호흡을 같이 할 수도 없었다. 새로운 시대를 구가하는 이들이 이상을 품는 것은 부질없다, 우리는 한갓 개체일 뿐이다, 사회 따위에 관한 고민은 벗어버리고 나와 너만을 생각하자고 할 때, 나는 그런 주장을 선뜻 받아들일 수도, 철 지난 꽃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 또한 내 자신의 삶을 위해 싸워 나갔다. 아니, 그런 쪽으로 오히려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는지도 모른다. 세계가 내게 냉담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이 자명한 진리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남은 자는 슬퍼할 수 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어가는 자는 살아남으려고 애쓰느라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시대였다.그러면서도 나는 하루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대학원에서 시간강사로, 전임 교수로 건너뛰어 오는 동안 간간히, 그러나 늘 과연 나는 이 지극히 사적인 삶에 만족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나는 늘 공적인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듯한 포즈를 취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포즈의 이면에는 집요하게 나 자신을 관철시키려는 욕구가 도사리고 앉아 나라는 가면을 조종해 나갔던 것 같다. 세상이 내게 냉담한 때는 어떻게든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세상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 온기가 선사하는 쾌락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추석 연휴 때 나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식사를 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주위를 의식하지 못하고, 내가 주시하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밥을 먹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꽤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인데, 그날은 그렇지가 않았다. 타인을 의식하지 못한 분주한 손과 입은 그의 모습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하나의 명제가 떠올랐다. 사적이기만 한 삶은 추하다.남을, 타자를, 사회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가장 중시하고, 자신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추하다. 나를 쳐다보는 타인의 시선은 단지 눈빛인 것이 아니라 내 외부 세계의 존재를 상징한다. 공공성에 대한 천착이 없는 삶은 아름답지 않다. 나는 이렇게 하루키의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해답을 내놓아 본다.

2012-10-11

올해 추석은 아주 길었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올해 추석은 아주 길었다. 마음이 한가로워서였을 것이다. 8월, 9월은 몹시 힘들게 보냈는데, 급한 일들을 어떻게든 마감을 짓자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추석 전전날에 대전에 내려갔다. 전날에는 고등학생 때 추억이 깃든 옛 도시 중심가를 걸었다. 그곳도 역시 변하기는 했다. 옛날에는 브라암스가 있었고, 얼마전까지 쌍투스라는 커피숍이 있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드나드는 로바다야키가 들어섰다. 대신에 쌍리라는 조용한, `요즘스럽지` 않은 찻집이 생겼다. 오래 못 만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차례를 지내고 서울로 올라와 장인이 계신 파주에 다녀오자 어쩐지 모든 의례를 다 끝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음날은 일찍 학교에 나갔다. 월요일이었을 것이다. 불교방송 라디오에 잠깐 들러 생방송 10분을 한 뒤다. 아무도 없는 인문대학 캠퍼스가 그렇게 마음에 들 수 없다.연구실에 들어가자마자 방 청소를 하고 책들을 새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매번 수업에, 회의에, 논문에, 평론에, 출판에, 약속에 쫓겨 다니다 보니 마음은 늘 분주하고, 연구실에 들어앉아 있어도 마음은 바깥에 있을 때가 많다. 아홉 시 반쯤부터 시작한 정리는 네 시가 훌쩍 넘어서야 끝났다.이제 다 된 것 같다. 있을 게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 같다. 당장 필요할 때 필요한 책을 찾을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이제 `문학사상`소설 부문 신인상 응모 원고들을 보아나갈 차례다. 놓일 곳에 놓여 있는 원고들을 우편봉투에서 꺼내 하나하나 읽어간다.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구성이며, 문장 솜씨 같은 것들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한참을 끈기 있게 찾아 읽어가자 마음에 드는 작품들이 두세 편 있다. 그만하면 나머지 응모 원고들 중에도 고를 만한 작품이 있을 테니 오늘 성과는 이것으로 되었다.그러자 찾아뵈어야 할 선생님들을 찾아뵙지 못한 늦은 생각이 난다. 한 분 선생님께는 미리 전화도 드렸지만 다른 분께는 추석 전에 인사조차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그런데 오늘은 운이 좋다. 이 분과, 이 분이 아끼는 `늙은` 박사 한 분과, 언제 저녁 식사라도 하시자고 전화를 드렸는데, 마침 두 분이 같이 있다고 당장 올 수 있으면 오라시는 것이다. 학교에서 양재동까지 택시로 삼십 분. 가니 선생님과 선생님의 `학생들` 셋이 함께 앉아 있다. 선생님께서 요즘 어떠냐고 물으신다.선생님, 이제부터는 글을 가려 쓰겠습니다. 글 많이 쓴다고 좋은 글 쓰는 것은 아니고, 몸도 좋지 않으니, 이제는 공부 절반, 운동 절반 하겠습니다. 눈이 좋지 않아졌으니 밤 아홉 시가 넘으면 책을 읽지 않고 대신에 아침에 일어나 공부하겠습니다. 마음 급하게 먹지 않고 차근차근 하루에 200자 원고지 스무 장만 써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술도 가려 먹고 사람도 가려 만나겠습니다. 이 말씀은 밖으로 내지 못했다.)어제는 다시 학교에 나갔다. 심사 원고들을 다 읽고 그 가운데 서너 편을 추려냈다. 도서관에 반납하려고 그렇게 찾아도 없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집 `고독한 자유`를 찾았다. 이 가운데 `지금은 죽은 왕녀를 위하여`와 `거울`을 읽었다.오늘은 아침부터 북한산에 올랐다. 이북5도청 쪽으로 올라가 대남문, 대성문 지나 형제봉 거쳐 평창동 쪽으로 내려왔다. 산에 오르니 바야흐로 가을 기운이 세상에 가득하다. 문득 어제 휴대폰 메모에 써 둔 시 구절을 생각한다. “돌아가는 길은 / 오던 길 꼭 그대로인데 / 왜 이렇게 가슴이 막막한지요”.나는 벌써 하산을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한가롭다. 이번 추석은 유난히 길다. 아무래도 내 인생이 한 번 또 변하려나 보다.

2012-10-04

한중러 삼국의 일본 때리기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바야흐로 한국, 중국, 러시아와 일본의 영토 전쟁이 심각하다. 한국의 독도, 중국의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러시아의 북방 4개 섬을 두고 동아시아 관련 4개국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 여론이 엇갈렸다. 그때는 한창 대통령 인기가 떨어지고 있을 때였고, 한일 정보보호협정 문제로 논란이 많았기 때문에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인기 제고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일본 여당은 그때 세금 문제로 급박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한다. 내막은 잘 알 수 없지만 일본 여당 역시 `내우(內憂)`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때문인지 일본 수상은 독도 방문에 즉각 반응하며, 국내 여론의 관심을`외환(外患)`쪽으로 돌리려 했다.일본의 반응이 심각하자 독도 방문은 뜨거운 감자를 건드린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몇 주가 지나면서 상황은 아주 달라졌다. 한국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이어 곧바로 중국의 민간인들이 시위대를 조직해서 댜오위다오에 접근, 상륙했다. 중국 정부는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일본에 이 섬들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중국 안에서는 성난 시위대들이 일본 상품을 배격하고 일본 자본을 위협하는 상황이 몇날 며칠 계속됐다.이제 일본은 자신들이 단지 한국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중국 정부의 댜오위다오 자국 영토화 정책과 내막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이 급속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끝일까? 아직 러시아 문제가 남아 있다. 북방4개섬은 일본이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해 온 섬들이지만 이 섬들 역시 세계제2차대전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이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일본은 영토 문제 측면에서는 한·중·러 세 나라의 신`삼국간섭`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한국을 향해서는 섬을 내놓으라고 하고, 중국을 향해서는 섬들이 자기 땅이라고 하는 모순을 감출 수 없게 됐고, 이 과정에서 일본이 역사 문제를 얼마나 소홀하게, 부정직하게 다루어 왔는지 드러났다. 위안부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식민지배, 침략전쟁 등에 대해서 일본은 유럽의 독일과는 전혀 다르게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기조차 꺼릴 뿐 아니라 자신이 마치 전쟁의 피해자나 되는 것 같은 억울한 표정을 짓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새로운 영토 분쟁 국면은 제2차대전 결과로 형성된 `전후체제`가 새로운 정비를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전후라고 하면 6·25 전쟁 이후를 가리키는 말로 정착이 됐지만 다른 나라들, 특히 일본에서 전후는 태평양전쟁 이후의 긴 역사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전후체제 아래서 일본은 미국과 동맹을 맺어 평화시대를 구가했고,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이 시대가 지금 끝나가고 있다. 중국은 근대 이후 어느 때보다도 강해졌고, 일본을 한 번은 `손봐줘야` 한다는 역사적 보상심리를 키우고 있다. 한국은 북한이 여전히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라도 분단을 넘어 통일로 갈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일본의 외교는 치밀하다. 계산도 정확하다. 그러나 이 수치 계산 능력 때문에 지금 일본은 많은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있다. 한국의 외교 능력은 형편없어 보이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잘 상대하고 있다. 일본이 키워 온 여러 논리들은 과거를 직시하지 않는 한 바다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언제라도 쓰나미에 쓸려갈 수 있다. 국가들끼리 분쟁을 치르면 양쪽의 국민들만 피해를 입게 된다. 나는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일본이 과거를 바로 보기를 원한다.

2012-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