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백석이 번역한 `테스` 에 대해 글을 쓴 일이 있었다. 백석은 너무나 잘 알려진 시인이지만 이 사람이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 까지 번역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뿐이 아니다. 백석은 숄로호프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돈강`의 1부와 2부까지 번역하기도 했다.
백석은 언어에 달통한 사람인 듯했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했고, 신문사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라는 곳에서 교사 일을 하기도 했는데, 그 때 러시아 사람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는 것을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이 있다. 그러니까 백석은 영어나 러시아어, 일본어 같은 외국어들을 상당히 자유자재로 이해하고 구사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백석이라고 해서 시인이 `테스`라는 분량 많은 소설까지 번역해야 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백석은 조선 땅을 떠나 만주로 건너가 살면서도 이 번역 일을 놓지 않았고, 마침내 1940년 9월에 조광사라는 곳에서 한국어 번역 `테스`가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나는 이 번역작에 대한 글을 쓰면서 생각했다. 백석은 그 자신이 이 소설의 여주인공 테스처럼 자신의 뜻이며 의지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없었음을 너무나 괴롭게 자각했던 같았다.
자 먼저 이 소설의 줄거리를 보자. 소설 속에서 테스는 집안 형편을 좀더 낫게 만들어 보려는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자기와 먼 친척벌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알렉이라는 남자에게 겁탈을 당한다. 그리고 아이가 생겼다. 테스는 집에 돌아와 이 아이를 낳아야 했으나 결국 아이는 일찍 죽고 만다. 집을 떠난 테스는 멀리 가서 착유장에서 젖 짜는 일을 한다. 참 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작가 토마스 하디는 이 광경들을 참으로 자세하게 묘사하는 힘을 가진 작가였다. 그곳에서 테스는 또 다른 남자를 만나는데 그의 이름은 엔젤이다. 엔젤은 관념적이지만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었고 이 때문에 테스의 아름다움에 주목해서 청혼을 한다. 테스는 이 결혼을 끝내 받아들이지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엔젤은 테스의 과거를 용납하지 못한 채 멀리 브라질로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괴로운 테스에게 또 다시 다가온 알렉은 엔젤이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며 집요하게 새로운 결혼 생활을 요구한다. 남편의 냉대와 시간의 흐름에 패배해 버린 테스가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먼 곳에서 세상의 참된 아름다움에 눈 뜬 엔젤이 돌아온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절망에 빠진 테스는 자신을 속이고 또 불행의 나락으로 빠뜨린 알렉을 살해하고 만다.
운명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 운명이라 하는가? 그것은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구절이 잘 보여준다.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그렇다. 운명이란 내 뜻이나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것이다. 내 뜻이나 힘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이다. 그 힘은 대문자로 된 파워(Power)이기 때문에 그것을 물리칠 수도, 넘어설 수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운명이란 것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늘 자기보다 더 크고 높은 것 앞에 놓여 있고,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슈퍼 파워를 가진 인간이란 없기 때문이다.
요즘 내 주변에는 참 어려운 일들이 많다. 학교도 어렵고, 공부도 어렵다. 세상도 어렵다. 운명이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