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작은 출판사 풍경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그저께 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어떤 출판 지원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평소에 왕래하는 출판사 대표 두 분의 지원대상 선정을 축하해 주기로 했다.이제 나이가 제법 됐고 그래서 청력도 좋지 않고 기력도 달려 시끄러운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세 사람이 허름한 술집에서 선정을 자축했다.발단은 송인이라는 서적도매상의 부도사태였다. 출판사들은 책을 발간하면 일단 창고를 겸한 유통업체에 넣고 교보나 영풍 같은 대형 소매점들, 송인 같은 도매상을 통하여 시중에 책을 공급한다. `예스24`나 `알라딘`을 위시한 여러 인터넷 서점들도 창고에서 도매를 거치지 않고 구입자들의 손으로 직행하게 된다.크고 작은 출판사들이 모두 그런 시스템으로 움직이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곳은 도매상 쪽이다. 대형서점이나 인터넷 쪽은 출판사에 주문을 넣으면 한달치씩 대금을 현금으로 지불해 준다. 하지만 도매상은 때로 몇 달치 어음을 끊어 주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늘 다 지불하지 않고 잔금을 남겨놓는 식으로 움직인다.송인은 십수 년 전에도 한번 부도가 나 출판사들을 괴롭힌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부도가 났다 해서 보니 송인이었고, 그 경과 과정에 관한 여론도 아주 좋지 않았다.딱한 것은 출판사들이고, 그 중에서도 작은 출판사들이다. 특히 거래선이 많지 않거나 유통을 송인 쪽에만 걸어놓은 출판사들은 피해나 타격이 크지 않을 수 없다. 또, 큰 출판사는 도매상을 상대로 돈을 미리 지급받을 수도 있는 등 도매상과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작은 출판사는 주면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약자요, 을이다.속된 말로 송인 부도에 돈을 물린 출판사가 하나둘이 아니요 그중에 작은 출판사들도 수없이 끼어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정부 차원이나 지자체 차원에서 곤경에 처한 출판사들을 돕겠다고 나선 것. 비록 큰 액수는 아니라 하나 돈을 떼인 출판사들의 책을 사주기도 했고, 각종 지원책을 내놓는 중에 출판 원고를 심사해서 지원금을 주는 방안도 마련한 것이다.그리하여 이제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지원 공고가 뜨자 관계된 출판사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던 바, 나 또한 그러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내가 관계하는 출판사가 조만간 출간하기로 된 내 소설을 가지고 이 지원사업에 응모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비록 저자에게 돌아가는 지원은 아니고 출판사의 출판 비용을 보전해 주는 식이지만 이것도 선정 사업은 사업이니 관심이 없을 수 없다.있었다. 듣기로 사백 건 정도 지원을 하기로 했다는데, 그 대상 목록에 내 소설의 제목도 끼어 있다.하지만 나는 이를 확인한데 그치지 않고 가나다 순으로 나열된 지원 대상 목록을 좀더 살폈다. 내가 알고 있는 작은 출판사들의 이름이 들어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향연, 답, b 같은 출판사들의 이름이 발견된 게 내 일 같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요즘 경제가 엉망이라고들 한다. 가는 곳마다 돈 가뭄이라 한다. 허나, 출판업종만 한 불황도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책만큼 팔기 어렵고 이문 남기기 어려운 게 없다. 워낙 싸고 워낙 안 읽는다.ㅡ송인 잔고가 얼마나 되셨죠?ㅡ천이백만원요.ㅡ그쪽은요?ㅡ육천만원요.ㅡ왜 그렇게 많이?ㅡ죽어라 냈더니 그렇게 됐네요.다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책은 이 나라에서는 아이들 책 말고는 사치품이다. 쉽게 주머니를 열 생각들 안 한다.그런데 물경 육천만원이라니. 오백만원 지원을 받게 되면 뺄셈을 해서 오천오백만원 남았다. 이날 술값은 내 차지일 수밖에 다른 도리 없었다.

2017-02-23

사람 사이의 사귐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옛날에 나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내 자신에 대해서 곱씹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곰곰이 뜯어 생각하곤 했다.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살펴보고 어떤 유형의 사람이겠구나 하고 가늠해 보고 사귈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주의 깊게 판단해 보곤 했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을 그렇게 보낸 것 같다. 나는 내 자신이 그렇게 평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늘 남의 시선을 의식했고 그런 만큼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도 길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어떤 유형 같은 것으로 묶일 수 있음도 깨달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도 있는 것 같았다.대학에 가 보니 세상은 더 넓고 사람들은 더 종류가 많았다. 내가 접하고 생각할 수 있었던 사람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많은 것을 새로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각 지방에서 모여든 학생들끼리 부대끼다 보니 사고방식이 정말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고 그러나 보니 더 많은 관찰과 탐색이 필요했다.시간이 흐르자 나는 또 어느 정도 사람 보는 눈이 새로 생겼다고 자신할 만하게 되었다. 직관이라는 게 있는데, 어느 철학책을 보니 직관은 그냥 홀연히 생기는 게 아니라 경험이 오래 축적된 나머지 그 경험 자료의 축적에 힘입어 무엇을 보면 반사적으로 통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직관이라 한다고 했다. 직관이란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 경험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사례들을 접하고 생각할수록 직관은 발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면 나는 어느덧 직관이 발달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을 척, 하고 보면 사귀어야 할 사람인지 피해야 할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내 나름대로 정한 척도에 따라 이 사람 아니다 생각하면 안 만나고 이 사람이다 싶으면 만나고 하기를 반복했다. 한눈에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오랫동안 내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던 것이다.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이제 옛날에는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는 때가 왔다. 믿었던 사람에게 발등을 찍히는 경우도 생겼고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적어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 하고 생각했던 것이 알고 보니 전혀 다른 계산속에서 속내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을 뿐임을 알게 되는 경우도 생겼다.내 자신의 감별력에 대해서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사람이란 변하게 마련이어서 나도 옛날의 내가 아니요 내가 알던 사람도 옛날의 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도 변하고 남도 변하고 있어 원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이제는 나 자신의 능력의 부족 때문만 아니라 그 가변성 때문에 알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사람 사이의 사귐이란 아주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한 번 알고 맺어짐이 있어 그것을 그대로 지킬 수 있으면 좋으련만 끝내 나 자신이 달라지고 상대도 달라져서 만남을, 사귐을 지속시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전에 좋았던 것이 싫어지고 싫었던 것을 추구하게 되어 더 이상 그 사람과 사귐을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나는 지금 몇 사람의 친구가 있나 생각해 본다. 하나, 둘, 셋을 헤아리다 말고 자신이 없다. 정말 귀한 것은 그 이상을 넘어서기 어려운가 한다. 이것이 인생의 슬픔이요, 굳이 서글퍼할 일도 아니리라 한다.

2017-02-16

나가사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1945년 8월 9일이라고 했다. 당시 나가사키는 크지 않은 도시 같았다. 성당이 있었다 했는데 피폭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듯했고 그곳이 지금은 기념관, 아니 추모관이 되어 있었다.사람이 벌이는 일 중에 전쟁처럼 어리석고 모순적인 것이 없으니 살려고 세상에 나왔건만 남도 죽이고 자기도 죽이는 짓을 저지르다니.원폭은 끔찍했다. 건물은 잿더미가 되고 열폭풍에 녹아버렸다. 사람도 숯처럼 변해버리고 산 사람도 뜨거운 열에 피부가 벗겨지는 참화를 당했다.새로운, 끔찍한 살상병기의 실험 대상이 되어버린 일본. 이 추모기념관은 미국의 원폭 투하를 말없이 힐난하고 있었다. 이 공간끝에 지구상 여러 곳에서 있어온 핵실험을 열거함으로써 자신들이 핵을 쓸 줄 모르는 희생양인 듯한 포즈를 `평화`라는 이름으로 취하고 있었다.죄없이 군국주의, 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나가사키 사람들. 한국인이기에, 만약 이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면 지금 일본말과 일본 역사를 이 나라 말과 경험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나는 그들을 충분히 애도할 수 없었다.아니, 죄없이 죽음을 당해야 했던 나가사키 사람들을 나는 한없이 동정하고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여기에까지 역사의 해석과 입장의 차이가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괴로워 했다.2월의 나가사키는 따사롭고 한가롭게만 보였다. 구식 전차가 노면을 따라 덜커덩거리며 지나가고 거리의 사람들은 아무 근심 걱정 없는 듯했다. 일본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속사정 내색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살아가는가 보았다.그리고 우리는 스물여섯 성인들이 순교한 것을 기념하는 곳으로 갔다. 현재 일본은 기독교와 천주교를 합한 신도수가 전체 인구의 1%도 되지 않는다는데, 옛날에는 그럼에도 이런 비극적인 순교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순교한 성인들의 부조가 모셔진 벽화를 지나 추모 기념관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알지 못하던 사연이 하나 펼쳐져 있다. 가톨릭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동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하나가 전시되어 있었던 것. 여기에 친절하게 한글 설명이 부기되어 있다.“삼국시대 한반도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짐. 나가사키에서 몰래 천주교를 믿었던 크리스찬의 집에서 예수를 상징하는 것으로 전해져 옴.”그러니까 그 옛날에 이 나가사키 사람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미륵보살상을 예수를 대신하여, 아니, 예수를 상징하는 것으로 모셨다는 것이다.나가사키에서는 미륵보살이 예수가 되고 예수는 미륵보살로 화현하여 신의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또 거꾸로 부처가 예수로 화현하여 환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원과 해탈로 이끌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다시, 이 추모관의 2층에는 순교자들의 유골을 모신 곳이 있다. 이 순교의 중심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마리아 관음`인가 `관음 마리아`인가 하는, 여덟 개의 흰빛 조각상이다.피에타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지극한 슬픔을 형상해 놓은 것이다. 세상에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처럼 지극한 것 없기에 피에타는 모든 사랑, 사람들을 한없이 안타깝게 동정할 수밖에 없는, 대자대비, 지극한 사랑의 상징이다.이 성모마리아가 이곳 나가사키에서는 관음보살이 되고, 다시 관음보살은 마리아로 화현하여 모든 `아들`된 이들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듣는다` 관음이다.나가사키는 옛날부터 중국과 한국의 문물이 바다를 건너 전해져오는 곳. 동시에 난학, 즉 네덜란드학이 일찍이 꽃핀 서양 문물의 도래지다.아시아의 많은 것들의 `끄트머리`가 서양과 만나 새로운 것을 이룬다. 불교가 예수교가 되고 예수가 부처가, 보살이 되고, 삶이 죽음이 되고 죽음이 삶을 가리킨다. 그리고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나가사키는 새로운 삶을 열고 있다.

2017-02-09

이순신팀 대첩

4년 전 우리 건설사들은 터키 프로젝트에서 일본에 참패했다. 원자로 4기를 건설하는 200억 달러(약 23조원)짜리 프로젝트를 위해 3년이나 공을 들였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러나 일본은 막판 뒤집기를 했다. 아베 총리가 터키까지 날아가`정치`를 했고, 미쓰비시중공업 중심의 컨소시엄이 낙찰받았다. 그러나 최근 우리 건설사들은 그때의 역전패를 설욕했다. 터키가 4조원 규모의 세계 최장 현수교 건설 프로젝트를 놓고 경쟁입찰을 벌였고, 우리와 일본이 또 만났는데 이번에는 우리 `이순신 팀`이 이겼다.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 경계선에 있는 나라이고, 동서양을 가르는 기준이 다르다넬스 해협인데, 동쪽은 아시아, 서쪽은 유럽이다. 서쪽에는 고도(古都) 이스탄불이 있고, 동쪽에는 신도시 수도 앙카라가 있다. 이 해협을 가로지르는 현수교를 놓는 공사인데, 그 길이는 3.7km로, 일본 고베의 아카시대교(약 2km)를 제치고 세계 최장의 현수교가 된다. 이 프로젝트에는 대림산업과 SK건설이 참여했고, 이 컨소시엄은 `이순신TEAM`이란 별명이 붙었는데, 국내 최장 현수교인 `이순신 대교` 건설에 손을 맞춘 전력이 있기 때문.이 두 회사는 궁합이 환상적이다. SK건설은 지난 달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도로 `해저 터널`을 완공한 실적이 있고, 대림산업은 교량 건설에 상당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컨소시엄이 터키 현수교 경쟁입찰에서 일본을 이기자, 업계 관계자들은 “이순신은 무조건 일본에 대첩하게 돼 있어” “이순신 이름 앞에서는 일본이 맥빠지기 마련”이라며 의기양양했다.이 현수교 낙찰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외국의 대형 프로젝트에는 민간기업과 정부가 함께 뛰어야 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해 손발이 묶여 있는 상황이라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나 황교안 권한대행, 국토교통부와 기획재정부가 “이럴 때일수록 힘을 내자” 의기투합해서 짜릿한 승리를 낚아냈다. 위기 상황에서 더 빛을 발하는 `한국인의 저력`이 이번에 본때를 보였다./서동훈(칼럼니스트)

2017-02-02

바울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겨울을 견디는 심정은 나를 나 자신도 모르게 이천 년 전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갔던 한 인물에게로 나아가게 한다.그는 신약성경에 다수의 편지가 실려 있는 독특하고도 위대한 인물로서 소아시아 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출생했고 유대교의 율법에 충실한 사람으로 생애의 전반부를 보냈다.귄터 보른캄이라는 한 철저한 학자가 그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저술을 펴냈고 나는 그것을 아주 오래 전에 사서 부분부분 읽었던 적이 있다.그때 왜 이 책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다. 이 책은 옵셋 인쇄로 되어 있을 만큼 출판된 지 오래되었고 번역 문체 역시 몹시 문어적이어서 젊은 사람이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정도였다.그를 사도로 지칭하며 철학적 논의를 개진한 사람의 책을 읽다가 그 안에서 귄터 보른캄의 저술을 새겨들을 만하다는 평을 접한 것이 다시 한 번 이 책을 찾아보게 했다. 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어느 서가에 꽂혀 있는지 표지가 온통 하얀 이 책이 아쉬운 나머지 나는 다시 헌책방에 들어가 구해 보기로 했다.며칠만에 책이 왔다. 14쇄 짜리였다. 나는 이 책을 이번에는 정독을 해볼 생각으로 처음부터 밑줄을 그으며 읽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내게 관심사는 그의 생애 과정이다. 사람의 생각, 사상을 알려면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게 문학작품 연구를 해온 내 원칙 가운데 하나다.그는 처음에 바리새인적인 율법주의에 철저한 사람이었지만 나중에 신의 은총을 얻어 회심했다 하며 그때로부터 삶이 다할 때까지 자신이 입은 은혜를 땅 끝까지 펼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그의 신앙은 아는 자, 배운 자, 가진 자의 것이 아니요, 믿는 자, 가난한 자, 정통에서 소외된 자들의 것이었다. 유대인만의 독점적인 신앙이 아니요, 이방인들, 그리스인들, 다른 모든 변방의 민족들을 위한 것이었다.그는 자신이 입은 신의 은혜를 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빚을 짊어진 사람으로 자신을 이해했고 이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숭고한 사명을 빚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내면 세계를 나는 보른캄의 저술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었다.아, 무서운 것은 그가 자신의 `소식`을 세상에 전파하고자 할 때 그에게는 아무런 광명의 약속도, 보상도, 기약도 주어지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그는 천막을 만드는 피혁공이었고, 언변이 아주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다. 로마시민의 신분을 가지기는 했지만 이 제국의 지배질서에 복속되어 기묘한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유대인들, 그리고 이들을 보증하고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지배를 관철하고자 했던 제국의 관헌들에게 지속적인 박해를 당해야 했고 끝내 그들의 손에 희생되었다.그러나 그는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서 기약 없는 사업을 벌여나가면서도 포기하거나 돌아서지 않았다. 그의 말은 화려하거나 교묘하지 않았지만 광신도들, 유대주의자들, 주술사들, 철학자들의 세치 혀로는 얻을 수 없는 정직함을 담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의 서신은 그가 말로써 다하지 못한 진실을 충당하고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믿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세상이 어둡고 혼란스럽고 그러한 상태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음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 도시에서 도시로 나아가며 가는 곳마다 자신의 힘과 기술로 노동하는 일을 그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굳세게 전파해 나갔다는 사람. 그가 바울이다.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 그의 삶의 과정이 지금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어둠이 있어 빛의 사람은 이렇듯 오래 빛날 수 있는 것이리라.

2017-02-02

우울한 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설이 가깝게 다가오자 나는 또 대전에 가고 싶어졌다. 지난 2년 동안 대전에 무척 자주 다녔다.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보다 고향이나 다름없는 장소를 향한 말 못 할 그리움 때문이라고 말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대인은 모두 고향을 상실한 자들이라고 말했고 그 존재의 근원을 향한 그리움과 현재의 자신에 대한 우려, 근심을 말했었다.대전을 굳이 무궁화호를 타고 두 시간을 쓰며 내려가면서 나는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안도감을 맛보았다. 장편소설 한 권을 넘겨가며 밑줄까지 그으며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기차 안에 생겨나 있었던 것이다. 비도, 눈도 감당할 수 없게 내리는 법은 한번도 없었던 대전. 이곳에도 오랜만에 눈이 제법 내렸다.눈이라면 폭설이면 더 좋겠지만 그정도 눈은 아니다. 그래도 근래 맛보지 못한 한파가 닥친 참이라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는 거리. 대전역에서 옛날 충남도청으로 향한 직선도로 중앙로의 오후는 유난히 쓸쓸하다. 나는 오늘 아직 한 끼도 먹지 않았다. 마음이 고달픈 나머지 문득 시장기를 느끼고 칼국수라도 몇 젓가락 뜰까 하고 중앙시장 시장통 먹자 골목으로 접어들었는데 마침 칼국수도 한다고 쓴 집이 눈에 뜨인다. 들어가보니, 그런데 겨울에는 칼국수를 하지 않는단다. 대신 주방쪽에 갓 삶아낸 소고기를 가리키며 해장국이 좋다고, 한우만 써서 지금 막 삶았으니 한번 먹어보라고 권한다.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고기 건져 놓은 것을 보니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요즘 들어 육식을 현저히 줄이고 가급적 배를 채우지 않으려 해왔건만 오늘만은 예외로 삼아보기로 한다.나는 밥때를 넘겨 손님없는 식당의 한쪽 벽 옆 탁자에 자리를 잡는다. 품이 넉넉해 보이는 주인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그 자리가 전직 대통령이 왔을 때 앉은 자리라고 했다. 선거 때 여든여덟 명이 일층, 이층을 다 채웠었는데 그때 바로 이 자리에서 식사를 했다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거려 드리고 밥을 기다리며 장편소설 상권의 뒷 페이지들을 마저 넘기는데 텔레비전에서 실황 중계를 한다. 특검에 여러 사람들이 소환되는 상황을 현장 중계로 실어나르는 것이다.세 사람이 한꺼번에 한 호송차에 실려 소환된다는데, 막상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니 여성이 세 사람에 남성이 하나다. 나쁘지 않은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던 여성들, 그리고 권력 체계의 정점을 차지했던 노인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특검 빌딩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주인 아주머니가 난로가에 앉아 있다 탄식을 했다. 사람 앞 일은 모른다더니 저럴 줄 알았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동의를 구하는 주인 아주머니를 향해 의무감에서 고개를 끄덕여 드리고 마침 가져온 해장국을 떠먹기 시작했다. 과연 해장국은 큰 선거에 나간 사람들이 일부러 찾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하지만 입맛은 쓰다. 올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았는데도 더 음산하고 우울하다. 설이 바싹 다가왔는데도 거리는 들썩이지 않고 명랑해지기는커녕 더욱 우울해진다. 그래도 나를 쳐다보는 주인 아주머니의 시선을 의식해서 나는 해장국 한 그릇을 거의 다 비워냈다. 덕분에 속은 많이 따뜻해졌다. 중앙로 한가운데를 대전천이 가로지른다. 여기 있는 다리를 목척교라 한다. 나는 이 다리 위에서 얕게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며 생각하기를 즐긴다.다리 위에 오랜만에 찾아온 한파를 품은 찬바람이 빠른 물살처럼 지나친다. 나는 마치 고향에 돌아와도 마음에 제 고향 지니지 못한 사람처럼 쓸쓸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따뜻하고 정다웠던 것 같다. 부모, 형제가 있으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내가 속한 세상에 눈뜨자 고향은 사라지고 아주 멀리, 아득히 먼 곳에나 있을지 알 수 없고, 싸우고 미워하고 잡아뜯는 아비규환 속에 처박힌 것 같다. 고향이 그립다. 마음 둘 수 있을 고향 같은 세상에 가닿고 싶다.

2017-01-26

믿음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겨울이 깊다. 어둡고 춥고 봄이 올 것 같지 않은 막막함이 여러 날을 두고 계속된다. 따스한 봄을 생각하며 이 날들을 견뎌보려 해도 살갗을 투과해 들어오는 한기는 간단히 막을 수가 없다.그냥 생각해 본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가톨릭의 사도 바울은 믿음, 사랑, 소망을 말했다고 한다. 나는 성경을 잘 모르기에 성경에 쓰인 말씀은 알 수 없다. 다만 최근에 읽은 현대적 해석에 관한 책에 따르면 믿음은 부활을 믿음이요, 사랑은 믿음을 나누는 것이요, 소망은 부활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임재해 있음을 아는 것이라 했다.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고 원래는 그리스도 같은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깨달음을 얻는 은총의 순간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로부터 그는 새로운 사랑의 종교,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그리고 모든 이방의 민족들을 차별하지 않고 한 품안에 끌어안는 믿음의 전파자가 되었다고 했다.이 책을 통하여 나는 왜 기독교가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거리가 먼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종교가 될 수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이 종교를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예수에서 시작된 유대교의 `개혁`이 바울을 통하여 `대승적인` 새로운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오랜만에 읽는 철학 책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번역문이 매끄럽지만은 않았고 그래서 단락과 단락, 문장과 문장이 정확하게 이어지거나 들어맞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어려운 논리의 계단을 밟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오랜만에 책장을 아껴가며 넘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책이 다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사이에 어느덧 마지막 장에 도착했다. 아쉬움 속에서, 다시 한 번 읽을 것을 기약하며, 책상에 책을 조심스레 눕혔다.겨울이 깊구나.한숨 속에서 나는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막막해 하는가 하고 생각했다.믿음이 없다는 것. 믿을 수 없다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기구 사이의 믿음이 단절되어 버린 것. 사람살이에는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한데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나는 지금 그런 소망의 부재를 견뎌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이것은 너무 세속적인 해석일까.`나`를 해치리라고 생각되지 않아야 할 기구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낙인을 찍고 목록을 작성하고 위해를 가할 작정을 하는 것. 사람이 사람을 해하는데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이익조차 없이도 오로지 그를 해할 수 있는 기쁨과 쾌락 때문에 그런 일을 행할 수도 있다는 것. 원조를 받은 사람이 원조의 기억을 유지하려 보답하려 애쓰기는 커녕 무슨 도움이었더냐고 반문을 하는 것.응당 사람살이를 위해 기대되어도 좋을 믿음이 배신을 받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유대가 단절되는 듯한 경험에 직면할 때 겨울은 깊다. 겨울은 봄이 될 희망을 얻지 못한다.책에서 저자는 열심히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따라가며 그가 죽음의 옹호자가 아니었고 삶을 위해 싸운 사람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사람에게 죽음이 있기 때문에 죽음 너머의 영생을 위해 신과 신의 심판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과 달리, 그들의 바울에 대한 선입견과 달리, 바울은 오히려 삶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 자체의 구원을 위해 일했으며 그것이 바로 그가 매번 반복해서 되돌아가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의였다는 것이다.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갑자기 기독교식으로, 바울 식으로 부활을 믿고 싶어졌다. 이 세계가 지금 여기서 되살아나는 그런 꿈을 꾸고 싶어졌다.

2017-01-19

가치혁명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가치혁명이라는 말은 무슨 경제학적 용어였던 것 같은데 말 그대로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얘기다.광화문에 지난 시월 말부터 지금까지 모여드는 사람들에 관해서 하는 말이 있다.하나는 노인층 분들까지 광장에 나온다는 것. 이분들이 어떤 분들인가 하면 8·15광복도 겪고, 6·25도 겪고, 4·19에 5·16에 1980년 광주항쟁에 1987년 민주항쟁까지 다 겪은 분들이다. 식민지 시대의 괴로움과 좌우익 반목에 전쟁의 살육, 독재, 민주화 다 거친 분들이 바로 이 노인분들이시다.다른 하나. 대학생도 나오지만 고등학생들, 중학생들이 광장에 나오고 있다. 이점은 1987년 민주항쟁을 생각할 때 가장 큰 차이다. 그때는 대학생과 이른바 넥타이 부대라고 불리는 기성 시민 층이 상황을 주도했다. 그때 `노학연대`라는 말도 있었듯이, 학생이 모든 사회적 문제에 참여하고, 그럴 수는 없는 것인데도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주체라도 되는 것처럼 대두했다.지금 대학생들은 이 현대 생활 메커니즘의 부속화 경향에 깊이 침윤되었다. 다시 깨어나고 있다고는 해도 옛날 같은 `주력부대` 의미는 없다.대신에 지금 이상하게도, 또 노인분들 놀라시도록, 중고등학생이 광장에서 눈에 띈다. 좋다고 만은 할 수 없는 일일 수 있다. 세상에 일찍 눈뜬다는 것, 사회적 이슈의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결정하고 행동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 좋지만은 않다.그런데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87년도에 대학생들이 사회적 필연성에 의해 거리로 나왔듯이 지금 중고생들이 광장으로 나온다. 하나는 세월호처럼 우리가 겪은 십대 청소년들의 상처로 인해. 그러나 다른 하나는, 이것이 중요한데, 삶의 양식에 대한 가치관의 혁명으로 인해.조국 근대화를 말하던 시대에 세상은 무엇보다 달러로 환산되어 측정되어야 했다. 1억불, 10억불, 100억불 수출은 그것이 가상이든, 실제든 우리들의 삶은 그것 때문에 나아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물질 위에 지위와 명예가 함께 축조된 가치의 위계서열! 그런데 지금 이것이 바야흐로 허물어지고 있다!노인과 십대들이 광장에 나온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것이 있다.그분들, 그 친구들이 최근 세 달 사이에 이 가치축이 지배하는 사회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내부는 겉면, 윗면의 화려함, 장려함에 비추어 뜻밖에도 너무나 초라하고, 비속하고, 야만적이었다. 겉과 속의 대립과 괴리를 이번에 사람들은 너무나 충격적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돈을 외형적으로 얼마나 많이 가지면 뭐하나? 삶이 거짓과 위선과 타락과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데 평생 아무리 써도 다 쓸 수 없는 돈을 남의 눈을 속이며 쌓아두고 있으면 뭐하나?또 지위가 아무리 올라가고 이름이 어떻게 알려지면 뭐하나? 나의 상승이 남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냉혹한 생존경쟁을 뚫고 내가 오늘의 불완전한 승리자가 되면 행복할까?이것이 많은 이들의 심중에서 싹터 광장으로 흘러들었다. 광장의 노인분들, 십대들은 바로 이 가치관의 혁명, 가치혁명을 보여준다. 삶을 길게, 믿을 것을 믿고 살아왔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세상이 이렇게 곪고 있었음을 우리들은 너무 일찍 알았습니다.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인들이 달라질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 사람들의 삶에 그런 전환이 있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물질적 척도의 시대를 모두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미래는 언제나 개선되고 달라져야 하므로.

2017-01-12

어떤 장흥행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어제는 안산에서 사월 동인 모임이 있었다. 동인 가운데 한사람 김명철 시인이 안산에 살면서 죽집도 하고 아들 바울을 위해 커피숍도 냈다. 거기 엄청난 횟집이라고 있다 해서 거기서 세시부터 좌담도 하고 회도 먹고 막걸리도 마시고 방담도 나눴다.집에 돌아오니 열두시가 가까웠는데 다음날은 장흥에 가기로 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하지만 요즘은 자명종 없이도 잘 일어난다.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에 눈이 떠져 엎치락뒤치락 하다 여섯 시 반쯤 일어나 대충 씻고 일곱 시 출발이다. 장흥 가는 고속버스는 센트럴시티 호남선 고속버스 정류장에 가야 한다.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철 역에 도착한 게 일곱 시 사십오분. 여유 있게 나왔다 했건만 아메리카노도 사고 파리바케트에서 평소에 먹지 않는 샌드위치도 사고 이만사오천원 하는 버스표도 사서 2번 홈으로 나와보니 출발이 겨우 4분 남았다.다섯 시간이나 걸린단다. 하지만 내게는 박미하일의 장편소설 “밤, 그 또다른 태양”이 있다. 첫 페이지를 넘길 때부터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그렇다. 하지만 요즘에는 달리는 버스에서 책 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책도 보고 인터넷도 보고 생각도 하는 사이에 버스는 금방 탄천 휴게소에 정차하는데, 15분을 쉰단다. 버스에서 내려 할일없이 어슬렁거리는데, 뻥튀기 기계가 있다. 펑펑 하고 터져나오는 소리와 함께 쌀, 밀 등속을 섞어 한줌 집어넣은 것이 뻥 튀겨 나오는 게 구경하기 좋다.벌써 아홉시 오십 분. 버스는 또 달리기 시작하는데 첫번 달릴 때보다 견디기 힘들다. 겨우겨우 버스 안 스팀을 참고 버티는데 두 시간 남짓을 달려서야 영암 터미널에 버스가 선다.아하. 여기는 서울식당이라고 생막걸리 파는 집이 있었다. 염치불구 한 병 삼천원 짜리를 사서 차안에 들고 들어와 아메리카노 빈 컵에 따라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안정된다. 알콜 중독 증세다.여기서부터 장흥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장흥 하면 세상 떠나신 이청준 선생, 또 한승원 작가, 그리고 또 천관산 억새가 있고 정남진이 있다. 하지만 나는 영치금을 들고 면회를 간다. 이곳 호남 아래까지 오면 건물들은 오래 되고 시설은 적고 말씨들은 한결 느려진다.장흥 버스터미널에 내린 게 열두시 반 조금 넘었다. 잠깐 쉰다. 여기서 택시를 타야 한다고 했다. 터미널 뒷편으로 나가니 음식점들, 생선가게인데, 군청 소재지 거리같지 않게 소박하다. 여기는 국회의원 사무실도 먼지 앉은 2층짜리 버스터미널 2층에 있다.택시를 타고 이제 그곳엘 간다. 옛날에 대학 2학년 때 와보고 처음보는 시설. 깨끗하다. 친절도 하다. 대신에 접견실에서 촬영, 녹음은 금지. 서울에서 왔다 하면 5분 더줘 20분 면회. 나온 얼굴이 깨끗해서 좋다. 마치고 나오니 두시 이십 분. 하루는 아직도 길게 남았다.내 발걸음은 남은 몇 시간의 낮을 소비하기 위해 정남진으로, 장흥 무슨 다리 건너 토요시장으로 향한다. 다리를 건너갔다 건너올 즈음 석양빛이 산등성이에 걸렸다.문학을 한다는 것은 제도와 관습의 울타리 경계 안과 바깥에 위태롭게 걸려 있다. 누군들 조심하지 않으랴만 시운이 나쁘거나 시대가 마음을 먹으면 위험을 벗어날 수 없다.문학을 하는 이 또한 잘못을 범함이 없지 않겠지만, 때로는 그것이 큰 화가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다섯 시, 이제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내일은 또다른 몫의 일이 있으므로.

2017-01-05

요즘 결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후배들이 결혼을 하는데 축사를 해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축사라니, 그런 절차가 결혼식에 있었던가? 무슨 뜻인지 물으니 자기들은 주례를 모시고 결혼할 생각은 없고 자기들끼리, 그래도 부모님은 모시고 할 텐데, 중간에 나와서 축하의 말을 몇 마디 해달라는 것이었다.주례 선생이 안 계신 결혼식이라. 글을 읽고 쓰는 처지라 늘 머릿속에 장면을 상상으로 그리는 습벽이 있다. 까닭에 그런 결혼식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한국의 결혼식에서 주례사 없는 결혼식을 본 적 없었다.주례가 서 있을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가운데 신랑 신부가 입장을 한다? 그것, 참. 발상이 새롭기는 하다. 그래도, 거기 서 있지 않을 주례 대신에 내가 축사라고 나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한다? 난감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두 사람은 올해로 나이가 마흔두 살, 마흔 세 살. 여자가 한 살 위로 연상연하 커플이다. 사귄지 무려 18년이나 되었지만 드디어 결혼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불과 1,2년밖에 되지 않았다 했다. 여자는 직업이 동화작가, 남자는 비평을 하고 가끔 소설도 쓴다나. 결혼식은 구청 결혼식장에서 하게 되고 그래도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간다 했다.얘기를 듣고 보니 나쁘지 않다. 요즘 새로운 결혼식 풍속도에 나 자신도 한 번쯤 적응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축사 부탁도 날짜가 꽤나 가까워서야 해온 까닭에 오후 세 시 결혼식에 맞추기 위해 쇼를 하다시피 해야 했다. 전라북도 무주에서 무슨 문학상 시상식에 심사평을 해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전날 밤 대전까지 승용차를 운전해서 내려가 자고 다음날 일찍 무주 행사에 참석한다. 대전까지 올라와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KTX로 서울역까지, 여기서 지하철로 영등포구청까지 간다.이렇게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짜놓고 그대로 실행을 하고 나서야 예식장에 도착해 주어진 `임무`를 이행할 수 있었다.문제는 그 다음에 또 생겼다. 그날 부케를 받은 여성이 내가 아주 아끼는 비평가였던 것을, 그로부터 불과 2주일만에 똑같은 축사를 부탁해 온 것이다.이건 또 무슨 일이람. 또 얘기를 듣고 보니 사정이 딱하다. 아버지가 후두암으로 재발까지 있으셨는데 이번에 또 `삼발`이 되었다는 판정을 받으셨다 했다. 수술 날짜가 잡혔는데, 자기가 맏딸이라 아무래도 급히 결혼식이라도 치러야 후회가 없을 것 같다 했다.이렇듯 급하게 결혼을 결정하다 보니 예식장에 빈곳이 없다. 겨우 찾아낸 게 누군가 예약했다 없앤 자리. 이 예식장 사정에 맞춰 날짜를 잡고 보니 이렇게 서두르게 되었다나? 신혼여행은? 신랑 직장 사정상 당분간 가지 않고. 신혼집은? 일단 결혼식만 올려두고 혼인신고 하고 봄에 집들 날 때 들어가기로 하고. 맙소사.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한 번 뜻하지 않은 결혼식 축사를 감행하게 됐다. 12시 결혼식에 맞춰 가니 축하객들 수런거리는 소리 중에 이 커플도 역시 연상연하라는 소리가 들린다. 세 살 차이라니 놀랄 것은 없다.축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궁리하다 몇 가지 생각해 둔 게 있기는 있었다. 우선, 돈과 지위와 명예를 따라다니지 말고 보람 있는 삶을 살려 하는 게 좋겠다. 다음으로, 그러려면 젊은 사람일수록 삶의 이상이 있어야 한다. 또 다음으로, 자기 식구만 위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넓게 위하는 사람들이 되라. 그 다음에 서로 사랑하라.그렇게 축사를 하기는 했는데 하면서도 요즘 결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한 십 년 되었나. 그때 어떤 결혼식에 갔는데 신랑이 만세삼창을 하기에, 앞으로 결혼이 큰 과제가 되겠구나 했는데, 바로 그런 시대가 닥쳤다. 남자도 결혼하기 힘들어 하고 여자도 그렇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그래도 요즘 젊은이들도 결혼을 하려 하고, 또 실제로 하고, 아이를 낳고 살려고도 한다. 그렇게 삶은 이어지고 새로운 날은 오고 그 위에 새로운 세월이 쌓여가는 것이다.마지막 하나. 그러나 결혼이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말라. 미래의 삶의 형식은 달라질 것이니까.

2016-12-29

밤은 또 다른 태양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박경리 선생 문학에 대한 발표를 하고 돌아온 날, 나는 무슨 보고라도 하듯 벗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 속 벗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들었지만 한 가지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들려주었다.우리 두 사람이 같이 아는 후배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었다.아뿔싸.이미 밤이 늦은 탓에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전화를 했다. 후배의 목소리는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직접 전해주는 소식은 더 좋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T세포성 림프종이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즉시 입원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병실이 다 차 있어 들어오라 하지를 않는다고 했다.이날, 어느 작가의 소설 출판 축하 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작품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38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간 기녀 시인의 삶을 그린 것이었다.약속 시간이 되자 예정된 사람들이 거의 모두 참석했다. 기자간담회도 하고 한 해가 저무는 때 같이 글쓰는 친한 `도반`들도 만나서 그런지 작가의 표정은 몹시 밝았다.우리는 모두 이 작가가 몸이 편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작품 출간을 더욱 크게 축하해 주고 싶었다. 이 문우들 모임에 언니 격인 이평재 작가는 보랏빛 장미 한다발을 가져 왔다. 이들 모두의 선생인 윤후명 작가도 오셔서 건배 제의를 해주셨다.통증 때문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든데도 작가는 오랫동안 함께 있으며 즐거워 했고, 우리들은 작품 구절들을 하나씩 읽어 보기로 했다. 나도 읽고 작가와 절친인 방현희 작가도 읽고 해이수, 김이은 작가도 다 읽은 후 작가가 직접 자신이 쓴 소설의 어느 부분을 읽었다.“사실을 고하자면 참으로 분에 넘치게 복된 인생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뼈를 녹이는 사랑, 부리기 버거운 재주, 아름다운 산천 속에서 한 생 잘 살다 갑니다. 가장 큰 기쁨과 가장 큰 고통을 감당할 근기까지 받아 태어났으니 이번 생에서 무슨 불평을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잔은 차면 넘치고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니 복록도 충분히 누리고 나면 넘치기 전에 거둬들이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 가슴에 품고 떠납니다. 부디 모두들 강녕하시길 앙상한 부끄러운 두 손 모아 비옵니다.”일동 모두 잠시 숙연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무거운 자리를 만들 작정들은 아니었기에 모두 박수를 치고 즐거운 얼굴로 이차를 가기로 했다.막걸리집 이름이 `유목민`이라 해서 다들 애호하는 곳이지만 시간이 일러 열지 않았고, 그 못지 않게 좋아하는 `푸른별 주막`으로 향했다. 그때 소설가이기도 한 세계일보의 조용호 기자도 합류했다.나는 모임을 주선한 사람답게 더 기뻐한 나머지 과음을 하고 말았다. 점심 때부터 시작한 자리가 여덟 시까지 가서야 파했다.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게 깨어나니 새벽 두 시였다. 자리에 누운 채 스마트폰으로 T세포성 림프종이라는 것을 찾았다.“일반적으로 B림프종보다는 치료가 곤란한 것으로 되어 있다.”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후배가 부디 쾌유될 수 있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단 이틀 동안 머물렀던 겨울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를 가로지르는 강, 그 이름이`네바`라고 했다. 얼어붙은 그 강은 창백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오전 열 시가 되어야 날이 밝고 오후 세 시면 벌써 저물어 버리는 그 도시에 대해 어느 작가는 `밤은 또다른 태양`이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을 썼다.모두 쾌유되기를.털고 일어날 수 있기를.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다 해도 나는 소설 속에서 기녀 시인이 당부한 것처럼 슬퍼하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한다.나 자신 또한 모든 사랑해야 할 죽어가는 존재의 하나인 까닭에. 그리고 살아 있는 그 시간 동안 내 모든 힘과 의지를 들여 사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다시 한번, 그러나 모두 무사히 털고 일어나기를.

2016-12-22

팟캐스트를 듣는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세월호 참사를 겪기 전에도 `나꼼수`라는 프로를 즐겨 들었다. 김어준, 정봉주, 주진우, 김용민 같은 분들이 하던 것으로, 이들의 정의감과 용기, 끈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찬사를 보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사흘 후에야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팟캐스트의 존재가 절실해졌다. 어떤 기성방송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MBC는 말할 것도 없고, SBS도, KBS도 권력이 주는 것, 하라 하는 것만 말하고 보여 주었다.그 무렵 김어준, 정봉주, 김용민 세 분은 함께 하는 데서 분화하여 각자 다른 팟캐스트를 운영했다. 주진우 기자도 시도를 했지만 취재 능력에 비해 언변이 어눌해서 그런지 상위 링크에 오르지 못했다. 아마 취재에도 분주해서 그럴 것이다.김어준의 파파이스와 뉴스공장, 정봉주의 전국구, 김용민 브리핑은 지금 매주 1위에서 5위 안에 드는 팟캐스트 방송으로 비판적 지식인, 청년층, 야당 지지자, 이른바 진보파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당연한 현상이다. 이들은 언론이 질식해 있고 지식인들 입에 재갈이 물려 있을 때 희생되기를 각오하고 `사내`답게 싸웠다. 그들은 또 지략을 가졌다. 무턱대고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게 아니요, 찾고 모으고 따지고 추리하고 판단하고 종합해서 사태의 전모를 밝혀 목하 우리 앞에 군림하고 있는 `비정상`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싸웠다.멋진 일이다. 그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그 모든 일을 한 것이다. 항간에, 특히 합리적이라고, 균형 잡혀 있다고, 경거망동하지 않는다고, 유언비어와 마타도어, 억설과 음모에 쉽게 휘말리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신하는 분들이 팟캐스트를 타매하고 조롱거리로 삼는 것을 본다.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그 진실을 추적하는데 어느 매체보다 기여한 팟캐스트가 둘 있다. 하나는 `김어준의 파파이스`, 다른 하나는 `새가 날아든다`.이 두 방송 아닌 방송은 세월호 참사가 종편을 포함한 기성 언론이 앵무새처럼 떠벌이는 것과는 전혀 다름을 무려 2년 하고도 6개월에 걸쳐 계속해서 따져 나갔다. 그들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유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이상 징후와 증거를 수집, 분석하고,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따졌다.`파파이스`와 `새날`은 최근 들어 두각을 보이게 된 손석희씨의 JTBC와 함께 이 숨막히는 시대에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였다. 그들의 살아있는 저항정신이 있어 사람들은 숨통을 겨우 틔워놓을 수 있었다.그런데, 올해 봄쯤, 특히 4·13 20대 총선을 전후로 해서 이 팟캐스트들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파이스, 전국구, 브리핑, 새날 모두가, 그리고 이에 더하여, 이이제이, 청정구역, 팟짱, 뉴스바, 더비평 같은 팟캐스트 모두가 억압된 시대의 진실의 전달자가 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특정 정치세력과 정치노선의 대변자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유혹한 것도 아니겠지만 마치 그런 보이지 않는 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현실정치의 어느 한 편을 `무조건` 지지, 지원하고,`적`은 물론이고 다른 편도 `적`과 다름없는 존재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김어준씨의 정의감이, 정봉주씨의 저항비판이, 김용민씨의 풍자가, 어두운 시대를 견디는 모든 이들을 위한 등불이 되기를 넘어서서 특정 정파를 위한 랜턴이 되고자 나서기 시작했다.그들의 독자적인 판단이 그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그런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모두를 위한 목소리 속에 특정 세력을 위한 목소리가 뒤섞여 있는 것은 그들 팟캐스트에 깊은 연대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깊은 어둠이 바야흐로 걷히려 하는 지금, 팟캐스트는 이 시대에 어울리는 섬세한 판단력, 더 큰 시야를 요청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전국구`만 해도 한 달만에 백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다는 시대다. 이 시대에 팟캐스트는 분명한 `공기`다. 공적인 역할에 어울리는 시각 조정이 필요한 때 아닐까.

2016-12-15

새 질서가 지향해야 할 것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더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에 모여들었고 놀란 국회에서는 대통령 탄핵을 결행한다고 한다. 탄핵안이 가결되면 새 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몸살을 앓게 될 것이고 부결되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여기에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진실의 문제가 무서운 무게감을 가지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른바`일곱 시간` 문제라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단순한 일곱 시간이 아니다. 세월호 유가족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유경근씨는 머리 손질, 연출 같은 것은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고 더 무서운 진실이 기다리고 있음을 시사했다.어찌 되었든 혼란과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삶은 질서나 체계 같은 것보다 근원적인 동력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나 그 삶을 어떤 틀 같은 것에 넣지 않고는 나라도, 사회도 운영될 수 없다. 그래서 혼자 생각한다. 무엇이 비정상적이었는지, 무엇이 정상화되어야 하는지 말이다.첫째, 국민의 기본권이 하나의 기본선으로 너나없이 인정되고, 요구하거나 싸우지 않아도 침해받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언론과 표현이 자유로워져야 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기성 방송을 포함한 모든 언론들이 정부의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었음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옛날 군사정부 시절과는 달리 여기에 모든 언론이 하나같이 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것이 하나의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었을 것만은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지식인들 또한 할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60년대 말의 김수영-이어령 `불온시` 논쟁처럼 그럼 너의 책상 서랍 속에 들어 있는 `불온시`를 꺼내보라고 따질 수도 있겠고 또 `불온시`를 써서 발표하는 것을 누가 막았더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 공기가 음산했던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언론과 지식인이, 나아가 모든 시민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명하고 상호간에 토론과 비판이 가능한 문화를 다시 형성해야 하며 이 자유를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섣불리 힘으로 막아서려는 사람들은 특별한 지위를 얻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둘째, 이데올로기 선전과 선동으로 시민들의 의사를 왜곡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모든 노력을 중지, 자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정치적 허위의식을 말한다. 그것은 진실하다기보다 허위적이며, 거짓과 허풍이 섞인 담론으로 진실을 가리는 장막 역할을 한다. 다른 서구 사회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 사회는 특히 남북 분단 및 6·25 전쟁을 겪었고 오래된 독재 통치의 조작술과 이에 저항하는 비합법운동의 비판 논리가 극단적으로 대립해 왔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적`, `반대편`과 `상대방`이라고 간주된 집단 및 개인을 향한 마타도어, 비방, 이미지 덮어씌우기, 궤변적 공격, 유언비어 유포, 지역주의 조장, 공격심리 및 피해의식 자극 같은 것이 지극히 심하다. 권력과 조직의 힘을 동원하여 자기 집단의 논리를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 유포시키는가 하면 자신이 비판, 공격하고자 하는 쪽을 향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왜곡을 일삼는 경향이 있다.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는 모든 언어를 사회적 공기, 즉 매체들로부터 추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집단 차원에서만 아니라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나는 오늘 두 가지만을 말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조차 실현은 너무나 어렵게 느껴진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라는 위태로운 사회를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를 향한 공동체적 유대의식의 회복이 필요하다. 오늘 정치적으로 반대자라 해서 그들을 절멸시켜야 할 대상이라고 속단하는 패악을 버릴 때만 새로운 좋은 공동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016-12-08

헛된 물음, 보수냐 진보냐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세상이 다시 한 번 용틀임을 한다. 시대의 흐름이 바뀌려는 모양새다. 이때를 맞아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다시 한 번 제기된다. 그러자 난리다. 보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느니, 진보세력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이 흘러넘친다. 보수냐, 진보냐, 어떤 보수, 어떤 진보냐 하는 말이 신문지상, 인터넷 화면에 넘쳐난다.나는 생각한다. `나`는 보수주의자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나`는 진보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보수고 진보고 이름이 보수요 진보일 뿐 진짜 보수, 진짜 진보가 무엇인지 과연 얼마나 알 수 있겠는가.우리들은 이름이 주는 망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비단 보수나 진보의 문제만이 아니요 모든 성별과 직책과 신분에 딸린 이름의 망상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장이다, 노동자다 하는 미망에 갇혀 헤맨다.시대적으로 보면, 1990년을 전후로 한 동구 사회주의권의 쇠망 이래 무엇이 보수요 진보냐, 어느 편이 왼쪽이고 오른쪽이냐 하는 문제는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청받게 되었다. 소련은 좌익 진보였는가? 중국은, 북한은, 지금 어떤 사회인가? 좌익인가? 그래서 진보인가? 무엇이 좌익이요, 무엇이 진보인가? 무엇이 오른쪽이요, 무엇이 보수인가?고전적인, 그래서 진부하고 따분한 구분법에 기초해서 좌우를 가르고,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방식으로 이 21세기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있겠는지? `나`는 보수다, `나`는 진보다 하면서 머리를 짚더미 속에 쑤셔 넣고 엉덩이를 뒤로 빼놓는 태도로 어떻게 새 세상을 읽을 수 있겠는지?며칠 전 쿠바를 반세기 이상 통치해 왔다는 피델 카스트로가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뉴스가 세상에 타전된 날 인터넷의 한 댓글에 이런 말이 써 있었다.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나서 더 큰 독재를 행한 자라고.물론 냉전시대였다. 한 작은 나라의 운명이 소련이나 미국 같은 양극의 두 강대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였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 같은 것이 없지 않고는 안되었다. 그러나 역사에서 변명은 쉽게 통하지 않는다. 미국이 독재체제를 지원하고 있었다고 해서 그것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새로운 독재를 더 강한 방식으로 행한 것이 쉽게 용인될 수 있을까? 카스트로는 혁명가였고 영웅이었지만 항상 모든 것은 쉽게 반대의 극으로 전화된다. 그는 독재를 행하는 자, 새로운 시대의 가장 낡은 사람으로 인생을 마쳤다.세상이 다시 한 번 바뀌려 하니, 모든 정치세력이 이 변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몸부림을 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변화를 요구하고 초래한 시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보수인가? 진보인가? 시민은 보수가 무엇이고 진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광화문에 모인 백 만 인파가 원하는 것은 `비정상의 정상화`요, 상식의 승리요, 더 많은 민주주의일 뿐이다. 오랜 역사 경험으로 우리는 젊은 사람까지도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안다. 그러나 무엇이 보수고 진보냐 하면 그것은 이 시대에 여전히 어려운 질문 거리, 정답을 잘 모르는 문제일 뿐이다.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름뿐인 보수나 진보의 어느 한 개념, 그 개념의 진영 속에 밀어 넣고 만족해 하는 어리석음을 언제까지 범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프랑스혁명의 의회의 오른쪽, 왼쪽에서 유래한 좌우의 개념을 언제까지 내 것인 양 신봉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그러나 이 헛된 물음에서 이익을 찾는 이들이 있으므로 세상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2016-12-01

기본선에 관한 생각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학교에서 좋은 친구와 점심을 먹기 위해 교내 캠퍼스를 걸어 베트남 쌀국수집으로 향했다. 학교는 넓은 편이고 점심식사 삼아 조금 멀리 걸으면 기분도 좋아지고 식사 후에도 부담이 없다. 음대, 미대가 있는 곳으로 해서 경영대 건물 지나 언어교육원 넘어가야 쌀국수집이 있다. 대운동장을 왼쪽으로 놓고 오른쪽으로 꺾어 순환도로 쪽으로 향하는데 일군의 젊은이들이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두 줄로 죽 늘어선 젊은이들이 들고 있는 피켓 글자들을 다 합쳐 읽어보니 그들은 비학생 조교들. 학교에는 조교라는 `독특한` 직종이 있는데, 일선 행정에 관한 많은 일을, 잡다한 일까지 모두 챙기는 어렵고도 괴로운 일을 한다. 없어서는 안 되고 그만큼 요긴하게 쓰이는 사람들이지만 대학의 일상 속에서 그 존재 가치가 가장 쉽게 부정되는 직함이기도 하다.학교마다 이 조교를 `쓰는` 방식은 같지 않다. 대학원생을 조교로 채용하는 경우도 있고 대학 출신의 일반인을 채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거의 대부분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이다. 대학원생 조교는 그래도 공부가 주업이라고 생각하고 선생과도 사제관계가 있어 일시적으로 지나치는 과정으로 생각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조교가 일반인이고 앞으로도 직장을 계속 구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비정규직이냐 정규직이냐가 아주 큰 문제고, 같은 비정규직이라 해도 어떤 처우를 받느냐가 또 작지 않은 문제다.점심시간에 때를 맞추어 피켓을 들고 나와 무엇인가를 외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나와 거친 목소리로 항의를 하고 구호를 외치고 심지어 절규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다른 나라도 그런 일이 많은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 나라는 그런 일이 미국보다도 일본보다도 유독히 많은 것을 사람들은 안다.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그런 모든 문제들의 연장선상에 있고 그 모든 일들의 위에 있고 가장 저층에 있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12일 서울에서는 백만의 사람들이 모였고 19일에도 전국에 백만 인파가 여기저기 모여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날 서울에 모인 인파는 지하철 이용 통계를 적용해 볼 때 75만인가가 모였다고 했다.이번 주 토요일에도 서울에 다시 사람들이 운집한다고 한다. 신문방송을 보니 이번에 예상되는 숫자는 지금까지 모인 사람들의 두 배는 되리라고 한다. 비가 오거나 한파가 몰아치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로 들어가는 이 초입에 숱한 사람들이 고생하지 않으려면 나라 차원에서 기우제라도 지내야 할 판이다.도대체 왜 이 나라에서는 모든 일이 이렇게밖에는 해결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항의하고 몸부림치고 절규를 하고 차벽 위로 올라가고 젊은 전경들이 하루 종일 도시락 하나 까먹고 박스 채로 배급된 콜라를 마시면서 시위대를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이 사태를 겪어야 나라가 정상화될 수 있느냐 말이다.그냥 상상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날 19일 경복궁역 앞에 있는`이상의 집`에서 열린 이상문학회 학술 세미나에 참석했다 저녁을 먹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경복궁역부터 사직터널 쪽으로 버스 차벽이 긴 줄을 이루어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있었고 그 차벽 너머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본의 아니게 그 차벽으로 나뉜 세상의 이편에 있었고 젊은 전경들의 모습을 아주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들의 무표정은 그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전혀 기꺼워하지 않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도대체 왜 기본을 지켜 주지 않느냐 말이다. 조교라면 이 정도는 처우해 줘야 하고 민주사회라면 이 정도는 지켜야 나라가 운영될 수 있다는 그런 상식을 왜 도대체 저버리느냐 말이다. 가이드라인이라는 말은 왜 엉뚱한 곳, 나쁜 일을 하는 데서나 사용되느냐 말이다.

2016-11-24

일구팔칠과 이공일륙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29년, 얼추 30년 세월이다. 그때 나는 대학 4학년이었다. 학교는 그해 초겨울부터 황량했다. 1986년의 학생운동과 잇따른 검거로 인한 살풍경이었다. 1986년 학교에서는 자민투와 민민투 같은 운동체가 생겨 분신자살 같은 극한적 투쟁으로 나아갔고 당국은 그 표면 아래 있는 구학련 같은 조직 구성원들을 계속해서 검거했다. 운동권 학생들 상당수가 두 계열의 조직에 들어 있었으므로 선배와 같은 학년 학생들이 모두 잡혀가다시피 한 학교는 폐허가 된 것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나는 그런 조직에 가담치 `못한` 괴로움을 안고 학교를 떠돌고 있었다.1월 10일 조금 넘었을 때다. 신림동 289 종점 맞은편 골목 위쪽 다세대주택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나는 학교로 향하다 체육복 차림으로 길가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들고 올라오는 박종철 군을 만났다. 그는 나와 같은 학번이고 그 무렵 나는 국문과의 과대표를 맡고 있었기에 언어학과 과대표였던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학생회에서만 일하는 것 같지 않았고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그의 하숙집에 인문대학 학과 대표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거나 전단지를 나누어 받곤 했다.1월 16일에 박종철 군이 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 숨졌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그는 하숙집에서 대공분실로 연행된 지 30분만에, 책상을 탁, 하고 치자 억, 하고 죽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온몸에는 수십 군데 멍자국이 나 있었다.신문을 몇 개씩 훑어보면서 나는 그날 아침 아홉 시 반쯤이었나 만난 종철 군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날짜를 대충 셈해 보면 그는 그날 또는 그 다음날 연행되었다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학년의, 나이만 나보다 한 살 많은 친구였다.당시 부검을 맡은 황적준 교수가 용기 있게 의혹을 말했고,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그 엄혹한 시대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4월 13일에는 전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5월 18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박종철의 고문 치사 사실을 은폐하고 조작한 사실을 폭로했다. 당국에서는 시위에 나선 학생, 시민들을 가혹하게 다루고 연행해 갔지만 시국은 이미 뜨거워지고 있었다.6월 10일이 되었다. 나의 양력 생일이 바로 6월 10일이었다. 일요일이었고 서울시청 앞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모인다고 했다. 나는 그날도 한 20분, 30분쯤 모였다 최루탄,`지랄탄`을 쏘는 전경들, 사복경찰들에 쫓겨 흩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벌써 몇 달째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 흔한 풍경이 달라질 것 같은 예감 같은 것은 없었다.그날은 달랐다. 시청 앞에서 신세계백화점 쪽까지 사람들의 물결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큰 길 옆에 서 있는 빌딩의 창문들에서는 크리넥스 티슈와 두루마리 화장지가 마치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빌딩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무직 직원들이 시위하는 학생들, 시민들을 향해 내려주는 것이었다. 거리에는 최루탄 연기와 냄새가 자욱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시위를 진압해야 할 전경들, 경찰버스들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사람들 천지였다. 사람들은 최루탄 총과 방패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전경들을 버스로 돌아가게 했다. 그로부터 20일에 걸쳐 시위가 계속되었다. 물론 그것은 이른바 6·29선언으로 변곡점에 다다랐지만 그 다음에는 노동자들이 7월, 8월에 걸쳐 권리 회복을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지난 11월 2일, 서울 시청, 광화문, 종로에는 1백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없고, 명동성당의 김수환 추기경도 안 계시고, 조계사에서도 목탁 소리만 나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마음의 구심점조차 없이 거리로 향했다. 모두들 신나 하는 것 같았지만 안쓰럽고 슬픈 풍경이었다.

2016-11-17

트럼프가 온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9일 오후 한 시에 규장각에서 외국 손님을 맞아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행사가 있었다. 독일에서 온 그 분은 25년이나 독일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에서 관장 일을 해 왔고, 이번에 정년 퇴직했다고 했다.정조대왕이 세운 규장각은 요즘 들어 귀중한 고서들의 보존 처리 기술을 높이고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오랜 경험을 축적해온 외국 도서관, 박물관과 활발한 접촉을 갖고 있다.규장각 고서 열람을 마치고 교수회관에서 가진 점심 식사 자리에 앉았는데, 무심코 휴대폰을 보니 속보가 떴다. 오늘 대통령 선거를 치른 미국에서 어제까지의 예상과 달리 트럼프가 우세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며칠 전에 미국 수사기관에서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을 재조사하겠다고 했을 때 미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정치 개입을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는데 그 다음에 다시 무혐의 처리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 번 한 수사를 다시 한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이를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재차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는 것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으로 힐러리는 곤혹스러운 사태에서 벗어나 승리의 여건을 마련했다는 것이 한국 내 여론의 방향이었다.한국 문제가 워낙 복잡하고 급속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라 사실 미국 대통령 문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트럼프가 이런 정도로 선전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주 의외라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론조사며 뉴스 같은 것이 힐러리 쪽을 점치고 있었기 때문에 별 급작스러운 변동이야 있으려나 했다.한 시 넘어서자 트럼프의 승률이 힐러리에 비해 훨씬 높고 곧이어 87%나 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점심식사 좌중의 진지한 분위기도 조금 돌릴 겸 미국 대통령 선거 속보를 독일에서 온 관장님 부부, 그리고 규장각 원장님께 전해 드렸다. 누구보다 놀란 것은 독일인 부부보다도 그 자리에 초청 주역이자 통역 역할까지 겸해서 앉아 계시던 전영애 교수였다. 너무 놀라신 나머지 통역을 이어가시는 일조차 잊으시는 것을 보니 트럼프 소식이 놀라운 일이기는 한 모양이었다.독일에서도 한국처럼 대체로 트럼프보다는 힐러리를 선호했던 모양이었다. 독일 관장님은 유럽인들이 미국에 가서 대통령을 뽑을 수도 없으니 큰일이라고 농담을 하셨고, 매우 놀라운 일이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함께 식사를 하시던 관장 사모님도 부군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지 않은지 당황해 하시는 표정이 역력하기는 마찬가지.식사가 끝나고 그 분은 강연을 하시러 가고 나는 수업을 하러 강의실로 갔다. 강의실에서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생각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수업 직전에 보니 트럼프가 승리할 가능성이 95%나 된다고 했고 수업 끝나고 나와서 보니 드디어 트럼프가 승리했고 수락연설을 한다는 뉴스까지 떠 있었다.트럼프가 온다. 온다? 온다! 내게는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힐러리를 특별히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최초의 흑인 대통령 다음으로 미국에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보겠다는 기대 심리도 없지 않았고 트럼프가 대통령 되면 한반도에서 미군을 빼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컸다. 더구나 한국에 알려진 트럼프는 인종차별주의에 종교차별주의, 거기에 온갖 추문까지 얽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쪽으로 이미지화 되어 있었다. 화면을 통해 보이는 그는 얼굴이 붉고 흥분 잘하고 독설과 즉언을 일삼는 사람 같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의 백인 저학력자들, 남성들이 그런 그에게 대거 몰려 갔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의 좌절감이 크다고도 했다. 미국 소식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고도 했다.힐러리에 대한 막연한 동정심과 기대 심리를 버리고 냉정하자고 생각한다. 세상이 또 한 번 이렇게 배를 뒤집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것 같다. 우리는, 한반도는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2016-11-10

시험 잘 보는 재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무슨 얘긴가 끝에, 그 사람이 시험 잘 보는 재주가 있어, 그 시절에 고등학교를 거기를 들어갔다는 말이 나왔다. `시험 잘 보는 재주`라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아 유심히 듣고 생각하게 됐다. 사람을 말할 때 그렇게 평하는 방법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런 식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시험 잘 보는 재주`라. 보통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공부를 잘해서`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지 않고` 시험 잘 보는 재주가 있어서`라고 말한다면, 공부 잘하는 것과 시험 잘 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뜻이 된다.생각할수록 과연 그렇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시험 날 이상하게 시험 못 보는 사람이 있다. 심장이 약해서 그럴 수도 있고 운이 나빠서 그럴 수도 있다. 평소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시험만 보면 망치는 바람에 인생길이 잘 풀리지 않게 된 경우도 여러 번 본다. `심청전`의 심봉사 같은 사람도 워낙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건만 과거만 보면 낙방을 했다고 하지 않던가.그러나 `시험 잘 보는 재주`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만 생각할 것만은 아니다. 시험은 잘 볼지 모르지만 공부까지 잘한 것은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시험 잘 보는 재주`가 있었다 함은 얼마든지 그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뜻을 함축할 수 있는 말이다.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시험 보는 것과는 꼭 같지 않을 것이고, 시험에서 묻는 범위와 수준을 넘어서 공부라는 것이 이루고 있는 학문적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고 있음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시험 잘 보는 것과 별개로 알아야 할 것을 넓고 깊게 아는 사람이다.그러면 여기서 한 번 더 나아가 본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대개 시험을 잘 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말도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공부 잘 하는 재주`가 있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또는 고시에 합격에서 이렇게, 저렇게 되었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이 말은 또 어떤 의미를 담는가.`공부 잘 하는 재주`라는 말은 `공부 잘 하는` 것이 `재주`가 될 수 있음을 전제하는 말이다. 이때 그럼 재주란 무엇이냐. 그것은 타고나는 개성의 하나로 무엇인가를 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니까 `공부 잘 하는 재주`란 사람이 타고날 수 있는 많은 재주 가운데 유독 공부를 잘하는 재주를 타고 났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별 것 아니다. 공부 잘 하는 재주 안 가진 어떤 사람은 일 잘 하는 재주를 타고날 수 있고 사람 보는 재주를 타고날 수 있고 공 잘 다루는 재주를 타고날 수 있다. 심지어는 남 잘 속이는 재주도 타고날 수 있다.공부가 한갓 재주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공부 잘 하는 사람이 더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에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공부 잘 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그다지 대단할 게 못 된다. 아니, 물론 그것도 대단하기는 하다. 그러나 대단한 것이 다 훌륭한 것은 아니다. 공부 잘 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그것 이상의 덕성이 더욱 더 필요하다.요즈음 이 `공부 잘 하는 재주`에 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라를 망치고 사회를 괴롭히고 사람들을 못 살게 구는 이들 중 상당수가 이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 재주를 좋은데 안 쓰고 자기와 자기가 친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쓰는 사람들이다. 공부 잘 하는 재주를 가진 것이 곧 훌륭한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하고 그 재주를 가졌기 때문에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공부 잘 하는 재주`를 갖지 못한 보통 사람들, 그러나 다른 영역에서나 삶을 살아가는 태도 면에서는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이 보면 자다가 웃을 일이다. 아니, 기가 막혀 웃음도 안 나올 재주라 할 것이다.

2016-11-03

해남 땅에도 영일만이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전라남도 해남이라, 언제 가봤던가? 대학원 석사 때쯤, 1990년이나 1991년? 아니 박사과정때인 1994년쯤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기억은 십 년 단위, 이십 년 단위다.시인 황지우가 해남 앞바다가 고향이라고 해서, 해남 대흥사 앞 민박촌에서 발표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사람들이 진도 홍주라는 술을 어지간히 비웠다.그리고는, `공식`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디 가다 들른 적은 있어도 해남 땅을 목적지 삼아 가본적 없었다.고산 윤선도를 기리는 문학상에 이지엽 시조 시인과 송경동 시인이 올해의 수상자, 인문학 콘서트라는 것의 사회를 본다고 갔다.오후에 사회 보고 토속음식점에 가서 저녁 먹고 버스 두 대들이 축하객 모두 대흥사 쪽으로 실려 갔다.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다. 또 대흥사라. 좋은 절인 것 알지만 밤에 절구경 할 수도 없고.문학평론하고 시도 쓰는 권성훈 선생 대동하고 무작정 도로 해남으로 차를 얻어타고 나온다. 나오며 시장을 찾으니 해남매일시장이라는 게 인터넷에 뜬다.막걸리는 역시 장터가 제격, 둘이 의기투합해서 장터 주변 막걸리집을 찾기 시작한다.헌데, 분명 해남 땅인데, 쓱 하고 눈앞에 나서는 간판,`영일만`이라니. 어라, 포항? 하면 역시 포항은 아니고. 궁금증 안고 문을 쓱 열고 들어가기는 갔는데. 자리가 꽉찼다. 홀에도 손님들, 방들 앞에도 신발이 즐비.아쉬움 안고 다른 집을 찾는데, 그중엔 또 `고래사냥`도 있고, 그밖에도 이런 이름, 저런 이름 술집들이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영일만` 쪽이 아쉽다.매일시장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아 도로 `영일만`으로 돌아가나, 자리가 그렇게 급히 생겼을 리 있나. 아주머니가 성미 급한 나를 단념시키느라 자리가 비어도 먼저 와 연락 기다리는 팀까지 있단다.- 어떻게 안될까요? 그냥 맨바닥에 앉아서라도 먹게 해주세요.이건 숫제 동냥 다니는 심봉사처럼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이 애소를 드리는데,- 어이, 그럼 이짝에 와 앉아 먹소.하고,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있다. 보니, 꽤 넓은 탁자를 차지하고 식사에 반주를 하고 계시던 선배님들 두 분. 소주가 네 병이나 비었으니 술 실력 알 만하다.어쨌거나 반가운 마음에 염치불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드리며 모퉁이 자리에 착석 성공이다.이런 경우도, 살다 보면 있다. 헌데 아뿔싸. `영일만`에는 막걸리가 없단다. 어떻게 하나. 하지만 분명 이집이 맛집은 맛집일 텐데 물러설 수 없다. 소주 끊은 지 삼 년만에 작심하고 마시기로 작정하고,- 이 분들 드시는 거 주세요.한다. 그리고는, 선배님들 향해 무슨 물고기냐 물으니, 삼치란다. 고등어회는 봤어도 삼치회 먹어본 기억은 없는 듯도 하고.드디어 우리가 시킨 삼치회에 소주 두 병 나왔고, 감사의 표시로 소주 한 병은 이 분들께 드리고.시키는 대로, 넓적하게 썬, 김 구워 나온 것에, 삼치회를 한 점 올리고, 오모리 김치 짠 것을 적당히 올리고, 된장에 마늘 다진 것도 얹고, 또 시키는 대로 뚝배기 쌀밥 지어온 것도 쬐금 얹고, 마침내 입안으로 쓱, 가져가니.호남 사투리로, 옴마, 이게 무슨 맛이당가.입안에서 살살 녹기로는 이만한 걸 먹어본 적 없었다는 거다. 짠 김치가 삼치회와 이팝에 어울리니 아무렇지도 않고, 비리지도 않고, 달지도 않고, 맵지도 않고. 한 점, 두 점, 자꾸 입으로 들어간다.고향이 영덕인 권성훈 선생, 호남 `적지`에 들어온 긴장감 풀지 못했건만, 삼치회 자꾸 들어가니 저절로 입이 풀리고 술을 권하고 전화번호까지 따버리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야말로 가관!아무리 농담이라도 `적지`라 한 것은 지나치고, 아무튼, 그분들은 쌀농사 짓는 분들. 요즘 내려가는 건 쌀값밖에 없다면서도, 전화만 주면 `봉황미`(이게 엄청 좋은 쌀이란다) 10㎏는 부쳐들 주시겠단다, 공.짜.로.뭐냐시렸다? 해남 `영일만`도 포항 영일만처럼 좋디 좋더란 말씀.

2016-10-27

배 나라 만들기

▲ 방민호서울대 교수·국문학과신문을 보니 석기시대에도 배를 만들었단다. 그 사연이 한 신문에 실렸다. 경남 창녕군 비봉리, 그곳이 불과 8천년 전만 해도 바다였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6천년 전에 만든 배가 진흙 속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발견되었다는 신석기 시대 나무배. 길이 310cm, 너비 62cm. 멋지다. 뭣보다 원시시대 같은 인상을 풍기는 신석기시대라는 것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8천년 전에도 유지되고 있었다는 놀라움에, 돌을 다듬어 도구를 만들어 쓰던 그 시대에도 배를 만들 줄 알았다는 사실까지! 그것은 별다른 현대적 기구없이도 배를 만들어 바다에 떠 있을 수 있음을 말해주지 않나.그렇잖아도 조만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 말이다. 학교 선생도 청렴해져야 한다는데 토를 달 생각없다. 강의를 하든, 발표를 하든 얼마까지만 받아야 한다는 것도 수긍할 수 있다. 적게 받아라 하는 것은 그렇다 치는데 이건 무슨 무시무시한 신고제란 말이냐.사람이 몸을 움직이면 돈도 나오게 마련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돈이 나오지 않는 곳에 가도 전부 서식에 맞춰 신고하라는 것이다. 학교에 있으면서 바깥에 나가게 되니 신고하라 한다면 거기까지는 또 그렇다고 하자. 오늘 들으니 뿐만 아니라 기고한 것도 액수에 상관없이 신고해야 한단다.경북매일신문에 기고하든, 경향신문, 문화일보에 기고하든, 어떻게 하는지 얼마나 받는지 `육가원칙`에 맞춰 보고 드려야 한단다. 이게 무슨 법이었나 고개 갸우뚱해진다. 나는 그것이 `김영란`이라는 여자분에 관한 법인 것은 알았고 인터넷을 통해 본명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라는 길다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았다.하지만 이제 보니 이 법은 내게 이동의 자유 제한법이요, 언론 문필 활동 자유 제한법이나 다름 없음을 알았다. 시 행사든 강연, 강의든 바깥 출입 안 하면 좋겠고, 신문이든, 어디든 안 쓰면 좋겠는데, 글쟁이, 문필업자가 그게 쉬운 일일까. 차라리 밥 먹지 말라는 것과 같다.다니고, 쓰고, 그러면서 신고하면 그만 아니냐는 반론도 있겠다. 하지만 신고라니? 허가보다 나은 신고란 말인가? 글 쓰고 강의하는데 반드시 신고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를 위해서라고 한다.내가 이 못난 문필업에 들어선 것은 대학 선생이 되기 전이었다. 강단에 시간 단위로도 서기 전에 비평이라는 것을 시작했었다. 하지만 이제 대학 선생이니 내가 하는 모든 글이며 말이 전부 기관에 신고해야 할 것이 되었단다.이런 부자유는 이제껏 살아 겪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제껏 편히 산 줄이나 알라는 뜻이렸다?생각해 보니 최근 근 십 년 간 자유는 위축되기만 한 것 같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지고한 가치로 여기는 자유건만. 부정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이처럼 사사건건 신고하고 다녀야 하는 부자유는 감수해도 좋다는 말인가? 과연 이런 법이 사회를 깨끗하게 한다? 우리 사회의 부정이 과연 이런 그물로 잡힐 수 있는 것일까?바다가 좋다. 경계도 없고, 금지도 없고. 소금물을 물삼아 먹을 수 있다면 물 위에 떠 바람을 쏘이며 물고기를 잡아 먹고 돌고래, 거북이랑 장난스레 사귀며, 바다에는 정말 금지라곤 없노라고, 하늘 달 별 해 구름 보며 즐거워나 할 일이다.조금 큰 배를 만들고 싶다. 배 안에 좀 작은 나라를 짓고 싶다. 우선 신고하고 산에 나무를 베어오고 신고하고 나무를 바닷가로 실어나르고 신고하고 배 만들기에 착수하고 신고하고 배를 띄워 바다로 나가자. 그리고, 신고하고 나라를 하나 더 세우자.거기까지 꽤나 골치 아플 것 같다. 번거롭고 귀찮은 일 투성이일 것 같다. 신고해야 할 일이 한둘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일단 나가기만 하면, 그러면 자유다. 자유 만세!

2016-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