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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어두운 때도 삶은 빛난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밤에 잠 못 드는 것은 체질이 바뀌어선가 디스크 때문인가 또 다른 외부적 요인 때문인가. 요즘 며칠 밤마다 영화를 본다. 영화도 지금 영화가 아니요, 옛날 옛적 한참 시간이 흘러간 영화다.아주 어렸을 때, 1970년 언저리 즈음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본 아역배우 김정훈이 나오는 영화는 무엇이었던가.공주극장 `비 내리는` 화면 속에서 본 교통사고 당한 아이를 보며 서럽게도 울었는데, 도대체 무슨 영화였던가.`미워도 다시 한번`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찾아서 끈기있게 본다.유부남 신영균의 아이를 갖게 된 문희와 아버지 없는 아이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는 김정훈의 이야기는 내 폐부를 찌른다. 한밤에 나는 신파 영화를 신파로만 볼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고교 얄개`도 본다. 이 얄개 시리즈의 하나를 나는 고등학교 때도 본 것 같은데, 이 영화는 그 원조격으로 이승현, 김정훈, 강주희 등을 청년들의 우상으로 만들었다.1970년대는 역사적으로 보면 결코 밝은 시대였다고만 생각할 수 없는데, 그럼에도 얄개에게는 꺽일 수 없는 개성과 장난기와 순정이 있었다.교복이 자율화 된 게 언제였던가? 내가 고3 되던 1983년이다.교복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일제식 검정교복을 착용해야 했던 시절에도 자라나는 아이들의 생명력은 풋풋하고도 푸르렀다.내친 김에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도 본다.이 영화가 기법적으로 이렇게 새로웠던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작고해 버린 원작의 작가 최인호의 감각과 감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서 무엇보다 오경아 분 안인숙의 끼가 넘치는 호스티스 연기에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끝내 경아는 세상을 떠나야 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누를 수 없는 생명욕을 품고 굳세게 삶의 편에 서고자 했던 여인이었다.그리고 이틀 동안 최인훈 장편소설 `광장`을 뜯어보고 있다.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즘 들어 자꾸 흘러간 것, 지나간 것들에 관심이 가고, 그 어렵던 시절을 살아간 영화 속,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에 `주책 없는` 감동을 받는다.어쩌자고 이명준은 북으로 갔더란 말이냐. 또 중립국을 향해 타고르 호를 탔더란 말이냐.그가 회색빛에 둘러싸인 삶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데올로기 대신 사랑을 갈구해 마지 않았던 자의 역설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선택이 아니었던가.나는 길 가는 중에도, 차안에서도, 자다 깨어서도 세로로 인쇄된 정향사판 1961년의 `광장`의 고색창연한 문자들을 본다.이명준의 생생한 추구는 그가 세상에 나온지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아니던가.영화를 자주 보는 때를 타서 그런지 오늘은 독립영화 만드는 사람들께 우리 소설을 설명을 드리러 갔다.김유정의 `동백꽃`이며,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며,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같은 작품들을 위해 크로포트킨이 어떻고, 톨스토이가 어떻고 하는 장황한 이야기를 내놓고, 그 사이에 좌석에 앉은 젊은이들의 명민한 눈빛을 산다.이들은 이 어둡고 험한 시대에 저렇듯 푸르른 게 아니냐고 생각한다. 이 경쟁과 부자유의 시대에 영화, 그것도 독립영화라니. 이들은 어쩌자고 예술의 길을 걷고자 하느냐 말이다.하지만 어두운 때도 삶은 그 자체로서 발광체임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이네들이 내게 말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젊음은 노쇠를 가르친다.

2015-07-30

반 고흐 뮤지엄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트램을 5번이나 1번을 타면 리젝 뮤지엄, 반 고흐 뮤지엄 앞에서 세워 준다. 어제 늦게 시간에 쫓기며 서둘러 본 미술관을 오늘은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볼 작정이다. 줄이 길어 30분이나 기다렸지만 힘들지 않다.오늘도 어제 본 것처럼 그렇게 충격적일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가슴이 뛰고 아리고 벅찼을까? 고흐의 생몰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37세의 나이로 스스로 세상을 떠난 그다.충분하다. 충분하다고, 나는 직각했다. 무슨 일을 이루려는 사람이라면 37년은 얼마든지 길고 여유 있는 시간인 것이다. 나는 이상을 탐구하고도 그것을 몰랐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루쉰 기념관에 가서도 충분히, 그러니까 나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상조차도, 연구서에서 분명 앞선 작가와 작품을 하나의 살아 있는 현재로, 현실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문학다운 문학을 할 수 있다고 써놓고도, 책을 내고나서는 잊어버렸던 것이다. 기억의 어딘가에 편리하게 쳐박아두고 외유를 다닌 것이다.드디어 다시 들어왔다. 멀티미디어 설명을 들으며 가도 좋겠지만 생략이다. 눈과 가슴으로만 받아들이자.1층. 그는 단 10년 동안, 1880-1990, 수백 점의 그림을 그렸다. 존 피터 러셀이 그린 반 고흐의 초상화, 눈에 충혈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 1986. 같은 연도에 그린 고흐 자신의 초상화. 지극히 어둡다.`화가로서의 초상화`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그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맹인 같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허공을 보고 있다. 정말 맹인의 눈동자로. 그러나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팔레트를 든 채로. 어둠 속에서 혹시 캔버스 건너편에 있는 대상을 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보이는 것 저편의 대상을. 하지만 고흐는 보이는 것을 결코 외면하지 않은 인간이었다.그는 어둠에, 혼돈에, 부질없는 시도들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는 곧 화려해졌다. 그 안의 생명이 환하게 피어오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는 꽃나무들을 그렸다. 그리고 아이리스가 피어난 들판을 그렸다, 그는. 아, 그리고 그는, 일본 에도 시대의 판화들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자포니즘이라는 게 그의 시대에는 있었다. 그는 강렬한 색채, 디자인의 새로운 구도에 영감을 받았다.일본 사람들이 그것에 열광한다. 화란에, 고흐에, 그의 자포니즘에. 마치 오페라 `나비부인`에 열광하듯이. 그러면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고려의 불화, 조선의 자기? 민화? 조충도? 서양은 한국의 무엇에 열광할 수 있을까? 고독하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에서, 나는 얼굴 없는 사람이다.그런데, 해바라기는 어디 있지? 4층이었던가? 난간을 붙들고 겨우 올라간다. 사실은, 여기 오던 날부터 목디스크가 도졌던 것이다. 오늘은 어제 많이 걸은 탓에 허리까지 통증투성이다.2층. 그러면 그렇지. 멋진 그림. 한번 자세히 읽어볼까? 화병에 꽂힌 해바라기 꽃송이들. 만발한 것, 이미 시든 것, 고개를 쳐든 것, 숙인 것. 노란 탁자 위에, 노란 꽃병에, 노란 해바라기, 노란 벽을 배경으로.백낙청이 로렌스의 리얼리즘을 말하면서, 그가 쓴, 고흐의 해바라기에 대한 분석을 인용했었지. 그때만 해도 나는 그 보이지 않는, 존재의 리얼리즘을, 보이는 것 안에 든 존재하면서 움직여가는, Being, 있음, 존재함을 그리는 언어의 힘을 믿었었다.오묘한 그림. 노란 꽃잎들은 누가 휘적여 놓았나? 너는 해바라기처럼 타오르고 있다. 노랗게. 정물인데도, 살아서 움직이는 해바라기. 이런 그림은 아무리 고흐라 해도 누군가, 그의 안에 있든, 바깥에 있든, 그 아닌 누군가가 도와 주어야 한다.“그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집중력을 불꽃을 온전히 잡아채는데 썼다.”이런 정물화는 다시 없을 것이다. 꽂병까지도 살아있는, 화면 전체가 여백마저도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흐르고 있는.

2015-07-23

공상주의

오스카 와일드는 사회주의를 부정했을 것 같다. 예술지상주의자니까, 사회주의는 예술에 적대적이라고 알고 있는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 그가 사회주의를 지지했을 것이라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사람들의 재산의 소유 정도가 각인의 개성의 발현을 제약하는 제도는 불완전한 것이라며 부의 사회적 소유를 긍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하지 않았다.그는 이 사회주의라는 것이 진정한 개인주의로 가는 길목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는 개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의 경로를 머리속에 그렸던 것이다.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이 사회주의가 만약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고 예술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그것은 한갓 야만에 떨어지게 되고 말 뿐이라고. 그리고 역사는 그가 예견한 것처럼 되었다. 개인과 언론과 예술을 억압한 소련 소비에트 체제와 동구 사회주의는 둔중한 공룡처럼 퇴화한 끝에 사멸해 버렸고, 그후 역사는 끝났으며 이제 우리는 인류 `최후`의 양식인 자본주의 속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이론이 큰 영향을 미쳤다.그런 사건이 무려 25년전, 그러니까 1990년 전후에 일어났다. 돌이켜 보면 까마득히 오래된 일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한 세대를 보통 30년 잡으면 온전히 한 세대가 교체될 지경이요, 대학의 한 세대는 4년 주기로 바뀌어 가니, 그렇게 따지면 물경 여섯 세대에 걸친 교체가 일어났다.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는`현재`를 수긍하고 미래로 통하는 출구를 막아놓고 살아왔다. 왜냐 하면 우리는 사회주의를 지향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맞다. 우리는 야만으로 귀착된 딱딱하게 굳어버린 흑빵을 먹을 수는 없고, 그보다 더 잔혹한 체제라면 절대 용인, 용납할 수 없다.그러나 생각한다. 과연 우리의 지난 30년 가까운 시간은 좋은 결과를 산출한 과정이었을 뿐인가 하고. 그리고 그에 대한 부정적 판단으로부터 나는 공상에 대해, 공상의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현실성이 없는 꿈을, 이상을 공상이라 한다. 완전한 남녀평등은 공상일 것이다.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동등한 자격을 갖는것은 공상일 것이다. 공해가 없는 세상, 생물종들이 멸종하지 않고 저마다 풍요롭게 조화를 이루며 사는 세상도 공상일 것이다. 완전한 고용은 공상일 것이다.공상은 과연 무기력하고 터무니없는 두뇌 조작에 불과한 것일까?내가 생각해 보기에 공상은 힘이 세다. 공상을 공상답게 한껏 꿈을 꾸어 보면 우리의 삶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우리는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평화롭게,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공상에 비추어 우리의 현재를 비추어 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상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요? 하고 누군가 내게 물을 때가 있다. 당신은 좌요, 우요, 이도저도 아니면 그 무엇이요? 진보도, 보수도 너나없이 선명함을 주장하고 나서는 때에 당신은 너무 흐릿하지 않느냐, 불분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내가 짐짓 나는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그런 이름으로 말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아니, 나는 이 시대에 그런 것이 명료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틀림없이 피곤한 표정을 짓는다.그러나 내 공상에는 섣부른 이름을 짓고 싶지 않다. 이름, 곧 레테르를 붙이는 순간 복잡하고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모든 것이 헝클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또는 때로 희화화 되고 말기 때문이다.그래도 굳이 붙여야 한다면 내 이념의 이름은 공상주의다.

2015-07-16

신의를 생각함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고양이는, 내가 아는 고양이들은 좀처럼 믿을 수가 없다. 배 고플 때 밥주는 이가 나라면, 그 날이 며칠이고 계속되면 반드시 내 옆에 와서 아양을 부리곤 한다. 슬며시 가까이 와서 제 얼굴을 부비기도 하고 바짓자락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친밀감을 표현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고양이가 몇 년 전에 몹시 할퀴어 팔에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낸 적도 있고, 머리나 등허리 쓸어주는 것을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손을 꽉 무는 것도 여러 번씩 경험했기 때문에 이 녀석을 근본부터 믿어줄 생각이 없다.이런 고양이 생리를 생각하면 개는 얼마나 충직한 짐승인가. 나 어릴 적 암캐 페이지는 먼 데로 팔려가서 몇 날 며칠 흐른 뒤에도 목에 나일론 끈이 매달린 채 돌아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저를 팔아버린 주인을 원망했다. 하지만 팔아버린 엄마도, 그것을 막지 못한 나도 꽉 물어 응징을 가하려 하지는 않았다.나는 남자 의리보다 여성들의 신의를 훨씬 귀하게 보고 높이 인정하기를 또한 즐겨 한다. 대체로 그렇게 본다는 것이지 늘, 어느 경우에도 그러함은 아니니 크게 탓하지는 마시라 하고 싶다.이것이 어찌 흔한 남녀 역차별이 될 것이냐. 대저 남자들 세상을 보면, 바로 나 자신까지 포함해서, 권력과 기회를 따라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일들 벌이기를 손바닥 뒤집듯 한다. 참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 하면 그것이 그 남자의 유전자에 찍힌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이 모양으로 생긴 세상에 나서 살아 보려고, 더불어 아내와 자식까지 책임져 보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벌어지는 현상들에 불과한 까닭이다.그러나, 참으로 교활하면서도 단순한 것이 남자여서, 반드시 그런 낌새를 상대방이나 남이 알아차리게 만드니, 교묘히, 끝까지 잘 속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가다가다 끝내 자신을 들키고야 마는 게 또 남자들의 한계다.나 혼자 생각하기에, 남자들의 의리가 가진 한계는 무엇보다 그것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대상을 향한 의리인 데서 오는 것 같다. 때문에 자신이 의리를 지켜야 할 대상이 힘을 잃어버리거나, 돈이 없어지거나, 혹은 자신이 그보다 더 낫게 되는 순간 지극하던 마음은 스르르 녹기 시작하고 귀하던 순간은 잊혀지게 되고 어려운 시절의 도움은 별 것 아닌 것이 된다.여성의 신의는 그와 다르다. 여성에게 주어진 기회는 상대적으로 남자보다 작거나 드물어서 많은 경우의 여성들은 무한대의 욕망을 추구해 가기보다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끼리 정을 나누고 돕고 잊지 않으며 살아가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여성들은 작은 이해 관계에 골몰하는 듯 보여도 사실은 큰 신의에 강한 지속성을 보여준다.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여성 같은 남자가 얼마든지 있고 남자 같은 여성도 아주 많다. 그러니 내 사소한 견해는 남자를 공격함이 아니요, 여성을 쓸데없이 찬미함도 아니다. 대저 이해득실 덜 따지고 사람을 만나고 지켜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아무리 친하던 벗도 1, 2년을 안 만나면 불통이 쌓이고 그 빈 자리를 소문과 말전주가 채우고, 불필요한 오해와 기억의 착란이 서로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 요즘 세상의 괴로운 생리다.어젯밤 나는 고등학교 동창 둘과 정든 `고향`의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야기가 진진할수록 소설 속 이야깃감이 많아질 것 같은 욕심을 채우느라 벗들을 오랫동안 거리에 붙들어 두었다. 셋이 앉아 있으니 안정감 있어 좋고, 셋 사이에 아무 이해도 없으니 괴로울 것도 없고, 옛날부터 친했으니 감출 것도 없었다.그래서 서울서 만났다 헤어지는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려니, 우리는 다들 여성인 것이리니. 여성다운 신의여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015-07-09

아래에서 올려본 자칭 일류 세상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문단에서 이십 년쯤 지내다 보니 이런저런 일 많이 겪게 된다. 신인상에 당선되어 복도에 일제히 형광등이 켜지는 것 같은 환희도 맛보았고, 당선 인사를 갔다 양은 주전자에 물이나 떠오라는 신인 대접도 받아 보았다. 작가 창작집에 해설 원고를 써갔다 이런 원고는 절대 못 실어 준다며 내일 저녁까지 다시 써오라는 편집자 말도 들었다.그때 이번이 이 출판사와의 인연도 끝이라고 생각했다. 밤을 새워 원고를 다시 써서 갖다주고 뒤로 돌아섰다.가난하다는 것은 문단에서도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가난한 출판사의 잡지 편집위원이 되면 격도 그만큼 떨어지고 만다. 작가들, 시인들에게 원고료를 제대로 못주니 낯은 그만큼 깎이게 마련이다.잡지 편집위원 그만 두고는 출판사 기획일도 해보았다. 말이 기획이지 출판사와 작가가 계약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사장이 인품이 있으면 견딜 만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영락없는 심부름꾼 신세다.그동안 맺은 인연들을 밑천 삼아 계약들을 성사시키고 나면 활용 가치 떨어진 계륵 신세가 된다.이렇게 몇몇 곳을 전전하다 보면 이름은 닳고 신세는 처량해진다. 처음 등단할 때 굳은 마음은 점차 물러지고 일년, 한달, 하루 버티는 일이 힘겨워지는 나날이다.그런 때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김동인의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이다.김동인은 재능은 대단했지만 붓을 치밀하게 놀리는 작가는 못 되었다. 그의 단편들은 `약한 자의 슬픔`이며 `마음이 옅은 자여`며 `광화사`, `광염 소나타`같은 명작들로 남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정련이 충분히 안된 듯한 인상을 남긴다. 장편소설도 유사한 면이 있다.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그의 `대수양`을 함께 놓고 보면 그가 얼마나 허술한지 알 수 있다.그러나 `운현궁의 봄`만은 대단하다. 갓끈 떨어진 상갓집 개 흥선대원군의 비애와 야심과 기상을 이 작품만큼 잘 보여준 작품도 없다. 김동인은 인간의 나약함에 괴로워하면서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는 자를 멋지게 그려내고 싶어 했고 마침내 이 작품에서 그는 승리를 거두었다.비록 권력의 일이지만 흥선대원군의 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누구나 업신여기는 삶을 이어간 끝에 자기의 꿈을 이루고야 말았으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다.문단에 나가보면 흥선대원군 시절의 대갓집 상가 같은 곳이 제법 많다. 자신을 재상쯤 되는 착각하는 이도 많고, 곧 있으면 판서가 되렸다고 호기를 부리는 이도 많다. 권세 있는 집에서는 마름이나 하인들도 다들 헛기침을 하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짯짯이 쳐다보며 못마땅해 하곤 한다.권세든 권력이든 힘에 관한 것은 그렇다 치고 그런 문단집에서 가장 목불인견인 것은 자신들이 일류임을 믿어의심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름하여 자칭 일류들이 어찌나 많은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추켜주며 일류 놀이 즐기기에 여념들이 없다.그러나 세상에, 아니 이 비좁은 한국 땅에 그것도 문학 동네에 일류가 그렇게들 많다면 어째서 한국문학의 오늘이 지금 이런 모습을 하겠으며, 또 잊을 만하면 솟아나는 표절 논란은 왜들 일어나겠는가?최근에 문단에 일고 있는 자칭 일류들의 소동을 보면서 지금 생각하는 것은 지난 15년 동안의 작품들 가운데 좋았던 장편소설, 창작집들을 전면 재검토해야겠다는 것이다.표절 작가 것은 더욱 엄격히 보고 자칭 일류들에 밀려난 진짜 일류는 없었는지 그야말로 짯짯이 살펴봐야겠다는 것이다.그렇지 않고는 이 자칭 일류들의 자화자찬 놀이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2015-07-02

표절문학 사회의 이면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아주 오래된 일이다.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였는지 다른 문학행사 끝나고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그때 나는 어느 여성 작가의 창작집에 해설을 쓴 후였고, 그녀를 포함한 몇몇 사람이 따로 떨어져 나와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여성작가는 예나 지금이나 이렇다할 소설은 쓰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확고한 주류 집단의 일원임을 확신하고 있을 것 같다.그 무렵 그녀는 자신의 살 길을 위해 이른바 주류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작가가 큰 작품을 잘 쓰는 작가는 아니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한두번 만날 때 그런 뜻의 의사를 표명했었다.그 말이 몹시 고까웠던 모양이다. 필시 내게 해설을 써달라고 한 것도 아주 후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문단 주류와 꽤나 거리가 먼 사람임을 책을 내고야 알아챘던 것이다.그 뒤풀이 자리에서도 나는 눈치없이 그녀에게, 물론 호의를 품고, 노력하면 더 잘 쓸 수 있을 것이라 말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그녀는 대뜸, 형이 날 키워줄 수도 없으면서, 왜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 앞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하고 일격을 가해 왔다.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물론 나는 항상 내가 있는 곳이 내 삶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지만, 그녀가 내게 신경질을 내고 있고, 말하자면 그것이 일종의 절교 선언이나 다름없으며, 내가 그녀에 대해 어떻게 화를 내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을 정신적 태세가 되어 있음을, 용케 알아차렸다. 그 정도 눈치는 다행히 볼 줄 알았던 것이다.그런 일이 아주 불쾌한 경험임은, 문단 아닌 다른 세상에서라도 비슷한 일을 겪은 분이라면 쉽게 알아챌 수 있으실 것이다.문제는 그래도 문학을 한다는 집단에서 이런 일이, 한두번도 아니고 늘 있는 일처럼, 작가들 모이는 자리마다 벌어진다는 사실이고, 더 슬픈 것은 그런 작가들이 젊은 층에서 자꾸 출현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이해한다. 젊을수록 미래가 불안한 시대라는 것이다.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안달 난 젊은이들처럼 작가들도 문단에 올라서자마자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적응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갈급해 마지 않는다.어쩌다 그런 여성작가들, 젊은 작가들이 모여앉은 모임에 우연히 나갔다 치밀어오르는 구토를 차마 참아내지 못하고 나와버린 일도 있다.참으로 씁쓸한 것은 그렇게 비주류를 쫓아버렸다고 만족해 한 이들이, 평소에는 그렇게 여유롭고 이성적인 것처럼, 사려 깊은 자의 포즈를 취하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금방 나가버린 사람의 험담을 분이 풀릴 때까지 두고두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수위를 가리지 않고 해댄다는 것이다.그런 민낯을 내놓고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자신들은 주류이고, 그 안에서 자신들끼리 인정해주고 서로 만족해 마지 않는 자칭 일류들이기 때문이다.안습.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닌가 한다.더욱 한심한 것은 나 자신은 주류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무슨 어이없는 망상이란 말이냐.문단 시스템 문제가 나올 때마다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 `내` 스스로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 한 누구도 그 사람을 완전히 소외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표절 사태로 시끄러운 문단이다. 그러나 비주류 작가들이여. 다들 힘을 내자. `나` 자신을 믿는 한 구조 따위는 한갓 허상에 지나지 않을 테니. 아무리 그 힘이 커보여도 말이다.

2015-06-25

구부러진 나무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노스님 지금 어디 계신가 했더니 하안거 들어가 금족 중이시란다. 며칠 전에 시인겸 평론가 권모 선생을 만나서 그분 얘기를 했다. 박사학위 하고도 교수직 채 못 구해 일주일 시간강사를 스무 시간씩 하는 사람이다. 고생 중에서도 마음 고생이니 쉽지 않은 인생길을 통과하고 있을 터다.노스님이 만나셔서 저 산의 구부러진 나무 얘길 하셨단다.저 산의 나무를 보아라. 쭉 뻗은 나무, 잘 자란 나무는 사람들이 다 베어가고 없고, 저 산 지키는 나무는 하나 같이 구부러지고 기울어진 나무들이 아니더냐. 그러니 실망, 낙망하지 말고 힘을 내라. 용기를 갖고 살아라.권 선생한테 이 말을 듣다 속으로 혀를 찬다. 옛날에는 이 버전이 아니었는데, 어느 사이에 이렇게 바뀌었단 말이냐. 그럼 옛날에는 어땠느냐는 말씀?그때는 권모 선생이 아니라 박모 선생이셨다. 그는 성품이 곧아 그른 일을 참지 않고 나서 손해도 보고 사람도 잃고 했다. 어느날 노스님이 박모 선생을 만났다.저 산의 나무를 보아라. 오래된 나무, 산 지키고 섰는 나무들 다들 구부러지고 비틀리지 않았더냐. 오래 지키고 있으려다 보면 곧게만 있지 못하느니. 그런 나무는 다 베어지고 꺽이고 없어지지 않았더냐.노스님, 그러니 성품 굽히고 타협하고 변절하라는 말씀 아닌 것은 귀밝은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말씀 듣고 노스님 가리키시는 산을 바라보는데, 과연 깨닫기는 게 있더라 한다. 그 박선생, 난타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말이다.보기에 옛날 불경이며 성경 말씀들은 비유담이 많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유는 법화경 약초유품에 등장하는 풀꽃들의 비유다. 저 들판에 나가보면 풀들이 수없이 피어있다. 저마다 빛깔 다르고 키가 다르고 이름도 다르다. 그런데 이 들판에 내리는 비는 어느 풀에는 내리고 어느 풀에는 내리지 않는 그런 비가 아니다. 들판에 한번 비가 내리면 이 비는 어느 풀 하나 구별 짓지 않고 고루고루 내린다. 그리고 저마다 다른 이 풀들이 비를 맞아들여 저마다 자기 성질에 맞는 꽃과 열매를 맺는다.나는 왜 이 이야기가 있는 곳을 약초유품이라 했는지 생각해 본다. 약초라 함은 약에 쓰는 풀을 말하지 않던가. 들판에 피어나는 모든 풀들을 약초로 쓸 수 없을 텐데 왜 법화경은 약초유품이라 했던 걸까.여기에 이 비유의 역설적인 깊이가 있으리라. 사람네가 약초라 하지 않아도 기실 그 풀들은 그 본성과 쓰임에서 실상 약초라 해야 마땅한 것이니, 저마다 이 세상을 이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이 약초의 비유로써 경전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이 세상 모든 중생이 약초와 같이, 한 사람도 가치 없는 이는 없다는 것이니, 비유의 깊은 뜻이 더하다 할 것이다.노스님이 구부러진 나무를 말하셨을 때, 그것이 어찌 곧은 나무를 탓한 것이 될까. 비유는 비유의 문법 속에서 통하는 것이니, 이는 구부러진 나무와 곧은 나무가 다 이 세상에 쓰일 곳이 있음이다.요즘에 세상에 그럴듯한 비유가 사라져 감을 한탄한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정계 같은 곳에 일방통행식 직설법이 우세를 점하면서 갈등과 다툼은 더 커지는 듯하다.산에 올라오니 오랜 가뭄에도 풀꽃들, 나무들은 깊은 생명력을 발하고 있다. 웅덩이도 아직 마르기는커녕 일급수에서 사는 물고기가 한가롭게 노닌다. 정희성 시인이 시에서 썼듯 숲에서는 각자이면서 좋은 숲을 이루고 있다. 구부러진 나무든 곧은 나무든 좋은 숲의 일원이 되는, 모든 나무를 다 약초처럼 여기는 세상은 만들기 힘든 것일까.

2015-06-18

메르스 시대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큰일 났다 싶었다. 거절 못하는 이 천하의 악습을 언제 끊어낼 수 있나. 인문학 강연을 하라는 것도 한다 하고 도서관에서 `심청전`가지고 말해 달라 한 것도 한다 하고 작가론 써달라 한 것도 한다 하니, 이 모든 게 지난 주에 집중해서 밀려들었다. 네덜란드 소년 손으로, 팔로 바닷물을 막아내는 재주를 부릴 수도 없고, 인정 사정 없이 밀려드는 일감들, 이게 다 원고를 써야 하는 것들인데, 이미 지칠 대로지친 심신으로 막아낼 수 없을 것 같다.글빚처럼 세상에 무서운 것도 없다. 일들이 밀려와 목밑까지 물이 차오른 것처럼 숨이 막히는데, 이번만큼은 무슨 잔재주를 부려도 파탄을 면치 못할 것 같은 절박감에 빠졌다.구효서론이 이 위기감의 절정이다. 오죽 많이 쓴 작가고 오죽 세심한 작가인가. 문장 설겅설겅 넘어갈 수도 없는데, 하나 읽으면 이것도 있고, 그걸 읽으면 저것도 있다. 죽을 힘을 다해 작가론 원고를 신통치도 못하게 써보내고 나니, 다른 일들은 새로 시작할 엄두를 못내겠다.메르스라니. 인터넷에서 메르스, 메르스 하는데, 그게 뭔지 신경도 쓰지 못했다.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니, 아무리 첫 화면에 떠도 실시간 뉴스 상위에 오르지 못하면 뉴스로는 가치가 없는 것이나 같다. 원고 더미에 묻혀 그것만 생각하는데, 대체 메르스가 뭐란 말인가.헌데, 그 낯선 메르스가 조화를 부렸다. 원고 기한에 쫓긴 나를, 천하의 고약한 메르스 씨가 구해준 것이다. 작가론 겨우 쓰고 쉬어지지도 않는 숨을 억지로 고르며 다음 일을 `비극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내게 이게 무슨 가뭄 끝의 단비 같은 소식이냐. 강연이 당분간 연기 됐다는 것이다. 아, 살다 보면 이런 일도 다 보는구나. 뜻하지 않은 낭보에 희희낙락하고 있는 이 못난 중생 앞에 메르스 씨, 또 한번의 단비를 내리신다. 도서관 강연조차 연기라는 것이다. 살았다.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방역이 늦었느니, 정부가, 시장이, 병원이 어떻다고 갑론을박 해도 나는 어찌 됐든 메르스 때문에 살았다고, 씨라는 존칭까지 붙이면서 좋아하긴 했건만 긴장이 풀리니 디스크가 심각한 상태까지 나를 밀어넣는다. 병원비 비싸다는 푸념은 지난 주에 했거니와 방법은 운동, 산에 가는 수밖에 없다고, 북한산에 간 게 더 미련한 짓이었다. 산에 갔다온 다음날 밤에 집에를 가려는데 이 상태로 귀가했다가는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을 지경, 겨우겨우 걸어 집앞 미니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응급실이라도 가보자는 것이다. 진통제라도 주사를 맞자는 것이다.병원 현관문을 밀고 들어갔는데, 아뿔싸, 그제서야 나는 늦게 깨달을 수 있었으니. 평소 같으면 밤에도 어찌나 붐비고 시끄러운 병원인가.텅 비었다. 아무도 없다. 원무과 접수직원 두 사람이 하품만 할 지경이다. 아, 여기서 돌아가야 하나. 허나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 접수 직원 앞에 가서 하나마나한 질문을 던진다.“여기는 메르스 병원 아니지요?”“그럼요. 이미 공개 됐잖아요. 저흰 아니예요.”다행이다. 응급실에 가서 통증 하소연을 하고 주사 맞고 약처방 받고 약국에 가서 약까지 제조 받고, 집에 가서 씻고 닦고 비타민에 마늘까지.그리고 며칠 지난 바로 어제다. 저녁에 지인들과 술자리가 있었는데 드셔도 과하게 드신 우리 친구 하나. 자리에서 쓰러진 것 까지도 좋았는데 의자 모서리에 눈자위를 찧었다. 눈동자 안 다친 것은 천만다행, 그런데 눈 자위가 퉁퉁 부어 오른다. 피 흐르는 상처는 없고, 앞도 다 보인다지만 아무래도 병원에 데려가야 안심할 것 같다. 가까운 야간병원에 차를 잡아타고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 메르스. 메르스 씨.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들어가기는 가야 하겠는데, 들어갔다 메르스 감염이면 배보다 더 큰 배꼽. 그렇잖아도 아까 메르스 씨가 바로 인근까지 왔다는 소식들이 술안주감이었다.우리는 눈을 질끈 감고 돌아섰다. 하는 수 없다. 가까운 해장국집 가서 날계란이나 하나 얻어 계란 찜질이나 잔뜩 하는 수밖에.

2015-06-11

병원 가기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목이 아픈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게 바로 오늘이다. 요즘 들어 한 달 가까이 통증 때문에 이리 돌아눕고 저리 돌아 누우며 하룻밤에도 두번, 세번을 깨면서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아침에 무서운 통증 속에서 눈을 뜨자 더 이상 놔두었다가는 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솟았다. 달려 가긴 가봐야겠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겨우 떠올린 것이 한 5년 전 허리 디스크로 옴쭉달싹 못할 때 택시에 실려 갔던 강남의 모 유명 병원이다.그때보다는 그래도 지금은 걸을 수라도 있으니 더 늦기 전에 가봐야겠다고 전철을 두번, 세번 갈아타고 갔다. 가다가 보니 전철도 급행이 있고 완행이 있어, 급행을 잘못 타서 지나치기도 하고, 방향을 잘못 잡아 돌아오기도 하고, 지하철 환승역 통로는 또 어찌나 길고 긴지 아침 여덟 시 반에 출발한 게 병원 앞에 당도하니 열한 시가 코 앞이다.번호표 뽑고 기다리고 접수하고 진료실 앞에 접수증 끼워놓고 또 기다리고 한 끝에 겨우 의사 선생님 앞에 앉을 수 있게 됐다.증상을 이것저것 말씀을 드리니 우선 X-레이, MRI를 찍어서 보자신다. 진찰 마치고 간호사가 적어주는 용지 들고 수납 창구로 향하며 은근히 병원비 걱정을 한다. MRI며 CT 촬영이며 하는 소리만 들어도 비용 올라가는 소리 같아 얼마나 나올지 걱정이 되는 게 병원 출입인 것이다.또 번호표 빼고 기다리다 수납대에 용지를 내고 비용이 얼마나 나오겠느냐고 단도직입 묻는다.글쎄요. 창구 원무과 직원이 컴퓨터 모니터를 보더니 68만 얼마라고 말해준다.많네요. 나는 놀라는 시늉도 못하고 어떻게 할까 잠깐 생각하는데, 지난 겨울에 학교 근방 종합병원에 같은 증세로 들어갔다 무슨 원통형 기계 속을 들락거린 일이 번개처럼 떠올랐다.잠깐만요. 알아볼게 있어서요. 수납 창구를 물러나와 114로 병원 번호를 찾아 대표 안내로 전화를 걸어 영상 촬영 자료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담당 부서로 전화를 돌려 그게 혹시 MRI 자료가 아니냐고 물으니 실망스럽게도 아니란다.그때 30여만원 나왔던 것 같은데, 지금 시급히 필요한 MRI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그때 찍은 자료는 무엇이냐 묻는데 돌아오는 용어가 처음 듣는 것이어서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하다. 찍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쪽이 조금은 더 저렴하려니, 하는 생각에 발길을 돌려 병원을 나선다.지하철을 타고 갈아타고 또 지나쳐서 돌아오고 병원에 전화해서 예약하고 내리고 역 에스컬레이터 타고 바깥으로 나오니 식은땀이 날 정도다.학교로 들어가며 생각한다. 병원비가 그 사이에 그렇게나 올랐나? 허리 디스크 때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도 이렇게 병원비가 무서운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까.세상살이가 갈수록 험해지는 것 같다. 녹록지 않고 팍팍하기만 한 것 같다.택시 운전 하며 시 쓰는 친구가 말 끝마다 자기는 아프면 그냥 죽는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쉬는 날마다 산에 가는 거라고, 같이 가서 몸을 유지하자던 게 생각난다.그런 것 같다. 큰 맘 먹고, 차라리 파스 붙이고 걷는 것으로, 산에 다니는 것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도리 없는 것 같다.그러려니, 다시 돌아올 밤이 무섭기 짝이 없다. 어떻게 이 통증을 견뎌낼 수 있나.맞아. 스트레칭이 최고랬지. 일단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고 씻고 몸을 늘일 대로 늘이고 파스도 붙이고 베개는 베지 않고 자는 것이다.오늘 밤만은 무사할 수 있기를. 하루하루가 무사히 지나기를. 이렇게 속으로 기원해 보는 것이다.

2015-06-04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1880년 11월 7일에 나서 1936년 2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대전에서 나서 중국 뤼순 감옥에서 옥사했다. 나는 뤼순의 파놉티콘식 감옥 고적지에 걸려 있는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는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에 경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민족사를 중시한 그의 시각이나 태도는 일관된 것이었다. 1931년경에 신문에 연재한 `조선상고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 나는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동명왕`에 관한 논문을 보충하는 문제로 `하는 수 없이` `조선상고사`를 펼쳐 들었다. `사랑의 동명왕`에 담긴 이광수의 역사인식, 특히 고조선이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을 살피자면 이 책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꼭 읽어야 할 필요를 느끼기 전까지는 어떤 책도 한갓 물건일 따름이다. 그러나 일단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책은 살아있는 영혼으로 변한다. 두껍고 무거운 `상고사`와 함께 한 지난 며칠이 즐거웠던 것은 그 때문이다.나는 선생의 살아있는 영혼, 그 숨결을 느꼈다. 그는 그 어려운 시대에 일제의 힘과 식민사관에 물든 무리들에 맞서 치열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의 저술은 한번 잡으면 놓기 어려운 매력을 발산하는데, 이는 그 책이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묻고, 따지고, 논박하며, 자신의 견해를 명쾌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말 옳았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다. 역사를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에서 그는 옳았고, 또 가히 존경할 만했다.뿐만 아니라 나는 그의 넓고도 깊은 학문에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한문과 꼭 같지 않은 이두문에 대한 그의 해박한 이해였다.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분들은 신채호의 지리, 인명 인식이나 이두 해석에 오류가 적지 않았다거나, 나아가 그에 바탕한 역사 사실 인식에 문제가 많았다는 반론을 꾀할 수 있다.과거의 책은 그 부분적인 인식 오류를 잡아내는 방식으로는 절대 참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그 책이 기본 인식에서 옳았는가, 가치의식 면에서 본받을 만한가, 그 방향에서 새로운 생산성을 얻을 수 있겠는가 같은 질문이 제기되어야 하고, 거기서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면 그 책은 귀한 고전이 될 수 있다.신채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이두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 있지 못함을, 신라사 기술의 신빙성 문제를 충분히 비판적으로 의식하지 않았음을, 중국 쪽 문헌들의 역사 기술에 과장, 은폐, 변개가 많음에 각별히 유의하지 못한 것을 따져 물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같은 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상고사를 재인식하고자 했다.텍스트들을 연결짓고 갈라치고 분석하고 종합해 가는 그의 모습은 경탄을 자아낸다. 이로써 `조선상고사`를 쓴 그의 여러 덕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이 모습을 드러내는 바, 그것은 바로 영감에 찬 창조적 상상력이다. 학문 연구라는 것도 상상력의 독특함과 탁월성에 의해서만 진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그는 입증한다.책을 읽어가며 나는 또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그는 그토록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갔던가. 왜 그것을 자초, 곧 스스로 불러 들였던가.사람은 누구나 한 평생을 산다. 어느 시인은 한 사람이 세상에 오는 것이 귀한 것은 그의 한 평생이 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채호, 그 대전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역 만리 그 머나먼 곳에 가서 도서관의 역사책들을 뒤지고 비밀 결사에 참여하고 끝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가.세상을 권세 있게, 편하게, 배불리 사는 것보다 미래를 준비하며 찬 자리에 눕는 것을 가치 있고 복된 삶으로 여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대에 그와 같은 사람이 있었음을 눈물겹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다.

2015-05-28

강기훈 씨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강기훈 씨. 내 머릿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이름이다. 이번에 무죄 판결이 나고 신문을 보니 그는 83학번. 나보다 한 살 위다. 그가 김기설 씨 유서 대필 `조작` 사건에 연루된 때는 1991년 5월, 내 나이 27세 때 일, 그때 나는 대학원에 들어간지 2년째, 학교에 적을 붙이고 공부하는 인생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길은 그렇게 빛나 보이지 않았다. 연속되는 분신자살 속에서, 나는 김지하 시인이 죽음의 굿판을 집어 치우라고 쓴 글을 읽지 않았다. 그런 글을 공표하듯 쓰는 일이 옳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릴레이처럼 번지는 자살 릴레이에도 위화감이 아주 컸다.1970년 11월 13일 바보 전태일의 분신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1991년의 그때 나는 어두운 시대 현실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한편, 번져가는 죽음을 통한 저항에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므로 죽음을 통한 저항이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선택으로 남겨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때 김기설 씨의 분신 자살 사건이 났고, 유서 대필 `조작`사건이 이어졌다. 나와 다름없이 어리고 어리숙해 보이는 청년 하나가 하루아침에 오랏줄에 묶여 잡혀갔다.하루도 빠짐없이 가판대에서 몇 개의 신문을 사서 사건 관련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두 사람의 필체는 내가 봐도 명백히 다른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전문가에 따르면 같다고 했다.다른 것을 같다 하면서 그것은 자신의 필적이 아니라고 절규하는 청년을 법원은 신속한 재판 끝에 3년형 중죄인 선고를 내렸다. 그는 그렇게 신문지상에서 사라져 가야 했다.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사 드라마를 자주 보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미스테리 장르를 즐겨 접했다. 그것들 속에서는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사형을 당하기도 한다. 반대로 중죄를 저지른 자도 그 죄를 감추고 대낮의 환한 공기를 마음껏 향유하기도 한다. 영화 속 인물 앤디가 악명 높은 쇼생크 감옥을 탈출하는 과정을 가슴을 졸이며 지켜 보기도 했다.그런 일은 강기훈 씨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 두 눈으로 보기에 죄를 자행하지 않은 자가 3년을 꼬박 채우고 출옥하는 것이었다.공식적으로는 그가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이가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정부나 국가는 얼마든지 그런 일을 벌일 수 있고, 그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힘은 세상에 없는 듯했다.그러나 이윽고 진실은 눈 앞에 드러났다. 적어도 간암에 걸린 그가 생명의 호흡을 계속하고 있는 지금 새로운 판결이 그의 무죄를 추인해 주었다.이 사건을 문자 그대로 유서대필 조작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무섭다고밖에 할 수 없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법도 아니고 법을 집행하고 판결하는 사람이 만들어낸다. 죄가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다.그래서 부모님들은 세상 무섭다는 것이리라. 주먹을 쓰는 이들도 법을 쓰는 이들도 무섭다는 것이리라.강기훈 씨가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진흙 투성이 오욕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나는 다행히 학위도 마치고 그 잘난 글도 쓰고 직업도 얻었다. 기쁨과 보람 같은 것도 몇 번은 있었을 것이다.그와 나는 같은 세대, 나이는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고 그는 나보다 조금 더 세상을 바꾸는 일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부모가 있는 자식이고, 그를 감옥에 보낸 국가의 힘의 실체들처럼, 부모들이 꼭같이 그를 걱정했을 것이다.누가 이 사람에게 무어라고, 한 마디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2015-05-21

더 깊은 세계

▲ 방민호서울대 교수·국문학과생각해 보면 사람의 삶은 참 짧다. 십 년 전만 해도 그렇게 절감은 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확실히 느낀다.최근 들어 생각한 것, 나도 참 번잡하게 산다는 것이다. 평론 하고 논문 써서 직업을 얻었으니 직분의 논리에 충실해야 할 텐데, 만족 없이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 조금 있으면 산문집도 낼테니, 이제 그만 넓히라는 핀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그러나 남의 비난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려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남이 아니라 나다. 나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가 무서운 것이다.연인 심청이라고 장편소설을 써놓고, 내심 그럴듯하게 여기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날 내 책을 내가 다시 읽어보는데, 이게 무슨 짓인가. 장자를 4서3경의 하나라고 써놓지 않았나. 두 눈으로 믿기지가 않았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에 시경, 서경, 역경이라 하는 것을, 내가 무엇에 홀렸기에 이렇게 써놓았냐 말이다.처음에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몹시 초조해졌다. 빨리 책을 바로잡아야 하겠는데, 이 놈의 책이 팔려야 새 판을 찍지 않겠느냐 말이다.옛날에 어느 선생님이 장학사 승진 시험을 보는데, 사군자를 묻는 문제를 틀렸다더니, 마침 내가 그 꼴이다. 편집자에게 서둘러 전화를 걸어 새 판을 찍게 되면 그 문장을 꼭 삭제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해놓고, 책이 없어지기를 기다렸다.그리고 다행히 3판을 찍을 수 있는 날은 왔다.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남의 비웃음 같은 건 웃어넘기면 그만이지만, 정작 내 자신이 왜 문장을 그렇게 써놓았는지, 퇴고할 때도 그것을 발견치 못한 까닭은 무엇인지, 자꾸 생각을 곱씹게 됐다.그러다 겨우 만들어낸 이유가 있다. 현대문학을 한답시고, 또 소설을 쓴답시고, 고전 같은 건 멀리 한 지 오래, 그러니 자동으로 그게 아님을 직각할 수 있는 때를 이미 지나버린 것이 아니더냐, 이 말이다.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다른 것도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된다. 조금 있으면 책이 하나 나오게 된다. 이상을 연구한 것인데, 미진한 점이 많다. 어떻게든 책을, 그것도 연구서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충분히 더 써야 할 부분을 겨우겨우 무마를 하듯 끝내버린 것이다. 옛날 식으로 말하면 막판에 가서 붓을 던져버린 꼴이랄까.문학이라는 것은 연구하는 것도, 쓰는 것도 걸치는 게 워낙 많다. 이상이라면 일제시대도 알아야 하고, 일본문학도, 아쿠타가와는 필수요, 서양 쪽으로는 도스토옙스키, 보들레르는 알아야 한다. 당나라 시인 최국보가 썼다는 `소년행`도 알아야 하고, 철학 쪽으로 뛰어 니체도 알고, 건축쪽으로 가면 바우하우스니, 나즐로 모홀리나기니 하는 유파며 인명도 알아야 한다.직접 쓰는 것도 역시마찬가지, 대전이나 포항을 배경 삼아 무슨 이야기를 쓴다치면, 알아두어야 할 것이며 고려해야 할 것이 어디 한둘인가.그러나 이는 잠시 한번 더 변명해 본 것뿐이다. 요즈음 하는 일이 번잡하다 보니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지 못해 왔다는 자책감을 감출 수는 없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지 않더냐고 이 자리를 빌려 나 자신에게 자문해 본다.다르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어떤 일 하나를 하더라도 충실을 기하고 완벽을 기하자고 생각했었다. 왜 우리는 버젓이 기와집을 지어놓고도 그 기와 지붕 끄트머리에 왜 막새기와를 제대로 안쓰고 회칠이나 해놓느냐하는 것이 나의, 우리 체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던 것을, 왜 벌써 굳은 마음을 잊고 시간에, 비평에 쫓겨 일을 서둘러 끝내버린단 말이냐.오늘 다시 생각한다. 더 깊은 세계 속으로 파고들어 가보자. 시간을, 나이를 잊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더 깊이 파고들자. 그것이 무엇이든 제대로 나아가자. 나머지는 후배들, 또 더 후배들에게 맡기고.

2015-05-14

통영, 남쪽나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통영, 하면 생각 나는 것은 백석, 시인. 그 다음엔 박경리, 작가. 또 그 다음엔 윤이상, 독일에 살아야 했던 작곡가,`심청`을 썼던. 하지만 통영, 하면 생각나는 것은 따뜻한 남쪽나라. 덥지도 춥지도 않고 바람 차지도, 매섭지도 않은, 낮은 산과 언덕, 나오고 들어가는 만과 곶, 자그마한 섬들의, 호수 같은 바다의 땅.밀린 원고를 버스 안에서 메우며 버스를 타고 먼 남쪽 땅으로 간다.엄살이다. 멀기는 뭐가 먼가. 한반도 반쪽은 너무 좁아 버스 타고 여섯 시간 넘게 걸리는 곳은 없다. 그래도 남쪽은 멀고, 머나먼 느낌, 그 남쪽 끝에 통영이 자리잡고 있다.통영 하면 생각나는 음식은 중앙시장 근처 충무김밥집 골목 어디선가 먹어보는 충무 할머니 김밥. 맨밥에 김 말아 놓고 오징어 무침이나 무 무침 정도가 고작인 이 김밥이 뭐가 그리 탐난다고? 그건 진짜를 못 먹어본 분들 얘기다. 맛이라는 것은 예리한 감각적 경험이기 때문에 맛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할 수 없다.겨울이면 단연 굴밥 같은 것을 먹어야겠지만 지금은 벌써 5월, 굴보다는 멍게, 그것도 거짐 끝물이다. 멍게 비빔밥이 좋다. 이 멍게 비빔밥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다. 생멍게를 넣는 방법과 숙성한 멍게를 넣는 방법. 이렇게 쓰다보니 벌써 멍게 향긋한 내음이 입안에 싸르륵 퍼지는 것 같다.술이라면 또 뭐가 있나? 막걸리는 도산, 산양, 광도 막걸리 등 줄잡아 요 정도가 있다. 제일 흔하게 살 수 있는 건 응응 막걸리고, 내 입에 가장 잘 맞는 건 거시기 막걸리, 조금 시다 싶은 건 또 바로 그 막걸리다. 다 가르쳐 주면 재미 없다.그런 것 말고, 또 특색 있는 건 술집의`양식`이다. 술집에 양식이라니? 그러나 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양식이 있다. 통영에서 그건 `다찌`니 `실비`니 하는 속명으로 통한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헛물만 켰다. 배가 아파서 기분을 내지 못하게 한 것이다.아쉽게 다만 상상해 보노니, 그것은 마치 마산의 통술집 같은 것이다. 해물 등 안주는 술에 붙어 계속해서 나온다. 일인당 얼마니, 소주 한 병에 얼마니 해서 내면, 싫도록 먹을 수 있는 술집 양식. 서울이나 충청도에 그런집은 없다.아침에 동피랑에 올랐다. 동쪽 비탈이라는 뜻이란다. 벌써 20년째 철거대상으로 존속해 오고 있는 언덕 길을 벽그림들을 따라 올라간다. 그림들은 동화적이고 또 공상적이다.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소설을 쓰는데 좋겠다.그러니까 소설 제목은 `물고기 두 마리`나 그와 비슷한 이름으로 짓고 싶다. 옛날에 일제시대에 소설가 김남천이 있었는데, 그가 쓴 장편소설 이름이 `사랑의 수족관`, 잘 지었다. 수족관에 사는 젊은이들이라는 설정은 얼마나 멋진가.대전 옛날 중구청 거리를 걷다보면`쌍리`라는 간판 달린 커피숍이 나오는데, 들어가 보면 몹시 고전적이다. 이 쌍리를 우리 말로 쉽게 풀면 바로 물고기 두 마리.동피랑을 걸어올라가며 나는 따뜻한 어항 속에 든 물고기가 된 것 같다. 발 아래 보이는 통영은 호수 같은 바닷물이 아니라도 도시 전체가 물 속에 든 것 같다. 바로 어제만 해도 비 내렸다는데 날이 왜 이렇게 좋은지?날이 좋으니까 더 슬프고 우울하다.사실, 나는 요즘 우울증에 걸려 있다. 아니, 신경쇠약인지도 알 수 없다. 병원에 가서 알프라졸람 성분이 든 약을 처방 받으면 좀 나아질까? 이 두통도? 목디스크도?통영은 나쁘다. 잘못 왔다. 이렇게 세상이 험한데, 이런 남국의 아름다움, 따뜻함, 기쁨이라니. 하지만 통영은 여전히 통영이다. 맛이 있고 멋이 있는. `가슴이 있는 사람에게는 잊혀지기 힘든`.나는 이 글을 지금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옆 `커피티처`라는 곳에서 쓴다.

2015-05-07

이번 선거 관악을

▲ 방민호서울대 교수·국문학과지금 시각 6시 24분. 재보궐선거 투표 시간은 저녁 8시까지니까 두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수도권과 호남의 4개 선거구에서 치러지는 이번 선거에 왜들 이렇게 관심을 갖는 걸까. 세월호 참사 1주기에 무슨 리스트라고 해서 대형 스캔들이 나서 민심이 더욱 날카로워졌기 때문일 것이다.이 4개 선거구 중 하나가 관악을, 바로 서울대학교가 자리잡은 곳이다. 이 대학이 있는 동네의`옛`지명은 신림9동, 워낙 넓은 신림동이라 그걸 여러 개 동으로 숫자를 붙여가며 나눴는데, 지금은 그 각각이 새로운 동 이름을 가졌다. 바로 옆 봉천동과 함께 달동네로 이름이 너무 높아 이미지 나쁘다고 바꿔 버렸다는 풍문을 들었다. 그래서 지금 신림9동의 이름은 대학동, 참 멋없이도 지은 것 같아 기분 씁쓸하다.하지만 시간이 좀더 흐르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모든 게 그러니까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름이야 어디갔든 그곳은 내게 몸의 피부 같이 떨어질 수 없는 곳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대전에서 대학 간다고 서울로 올라와 처음에는 기숙사에 들어가는 행운을 누렸다.`다동 119호`, 가나다라로 이름을 붙인 기숙사의 화재신고 번호방이 나의`룸`이었다.하지만 2학년부터는 규정에 따라 모두 기숙사를 나가야 했다. 그때부터 자취, 하숙 생활의 연속, 참 안 살아본 집 없이 다 살아봤다. 그런데 그게 다 신림동, 봉천동 산동네에서였다. 반지하방이라는 것을 서울에서 그때 처음으로 겪었다. 말 그대로 반만 지하인데, 이게 몸에 물먹은 솜을 씌워놓은 것 같다. 습기차고 어두워서 들어가고 싶지 않다. 산동네 자취방도 들어가서 살았다. 그때 보증금 50만원, 100만원에 월세 5만원, 10만원짜리 방이 넘쳐났다. 잠만 자는 방, 세면시설이 다 합쳐 하나인 방, 낮에는 못 쓰고 밤에만 쓰는 방, 불 못 때는 냉골방, 대문옆에 푸세식 변소가 있고 그 옆으로 담벼락을 타고 돌아 재래식 연탄아궁이 옆에 문이 달린 방, 공동 수도, 펌프에 변소도 하나인 집이 숱하게 많았고, 그 다닥다닥한 집들이 산언덕을 밀고 올라가 첩첩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이게 지금 관악을이다. 한쪽에는 서울대학교라는 버젓한 학교가 있지만, 도림천이라는 내를 따라 행상들, 시장통 같은 거리, 골목이 이어지고 양 옆으로 양옥집들이 얼마간 있고 그 위로는 남루한 집들이 빼곡한 동네, 지난 30년 동안 변해 보려고 무척 애를 썼고 또 좋아지기도 했지만, 지금도 서울에서 가장 덜 변했고, 가장 옛날식인 동네가 바로 그 관악을 선거구인 것이다.이번에 이곳에 정동영 전의원이 출마했다. 투표시간이 아직 남았고 변수도 많았지만 여론 추이를 보니 만만찮은 득표를 할 것 같다. 원래 이곳이 헌법재판소에서 해산 판결을 받은 통합진보당 소속 의원이 있던 지역구였다. 그는 이번에 중도 사퇴했다. 야당에서도 후보를 냈으니 호남 인구가 40퍼센트나 된다는 이곳에서 여당도 승산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들 한다. 과연 어떻게 될까? 오늘밤 10시쯤이면 당락의 윤곽이 드러난다고 하니 내일 이 글이 실릴 즈음에는 어떻게든 결판이 나 있을 것이다.세월호 참사 1주기를 보내며 생각한 게 하나 있다. 어떤 피치 못할 이유로 인해 배가 비록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누군가 있었다면, 해양경찰의 명령 계통 중에, 해군중에, 선원들 중에 정신 바르고, 양심과 양식에 따라 자기 행위를 결정지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분만 있었어도 우리는 이런 결과를 안 만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 바로 이것이다.선거를 또 치르니 나라가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다. 관악을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그러나 애써 시선을 접어둔다. 누군가 이 험하고 혼탁한 세상을 건져올려줄 사람이 있었으면 싶다. 과연 선거로 이런 분을 찾을 수 있는 걸까?

2015-04-30

경영이라는 말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사전에서 경영이라는 말의 뜻을 찾아본다. 1. 기업이나 사업 따위를 관리하고 운영함, 2. 기초를 닦고 계획을 세워 어떤 일을 해나감, 3. 계획을 세워 집을 지음, 4. 궁리하여 일을 마련하여 나감. 뜻이 많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의 중심적인 의미를 경제활동에 관한 것으로 이해한다. 경작이라는 말을 이곳저곳에 두루 쓰기는 해도 그 중심적인 뜻은 농사에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하지만 어떤 말이라도 그 뜻은 멀리까지 확장되어 쓰일 수 있다. 그런 확장적 용어를 대변하는 말 중의 하나로 `공학`이 있다. 공업이 산업중의 산업으로 부상한 이래 이 말은 수많은 다른 말들과 결합, 합성어를 양산하는 어휘로 급부상했다. 물론 인간공학이라는 말도 생겼다. 아니, 이것은 어엿한 분과 학문의 명칭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과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과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학문을 가리킨다.경영이라는 말도 그렇다. 공학이라는 말처럼 이 경영도 오늘날 아주 광범위하게, 탄력적으로 다른 말들과 결합해 나간다. 인간공학처럼 인간경영이라는 말도 아주 빈번히 인구에 회자된다. 대학도 운영한다기보다 경영한다고 하고 병원도 운영한다기보다 경영한다고 한다. 아마 지방자치단체도, 정부도, 기업처럼 경영해야 손해를 내지 않고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경영의 전 부문화, 경영이라는 말의 사람의 삶 전체로의 확산, 우리는 지금 이같은 경영`주의`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경영이라는 말은 물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의미망이 넓다. 하지만 그 중심적 의미는 여전히 기업이나 사업을 움직여 나간다는 첫번째 뜻에 있다. 뭔가를 움직여 이익을 창출하고 그것을 통하여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간다는 뜻이 이 경영이라는 말의 중심적 범주인 것이다.대학은 경영해야 하는 걸까? 병원은 또 경영해야 하나?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경영이라는 말로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는 일들을 포괄하고 있다. 대학의 고유한 역할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데 있고, 이 교육은 경영보다 높거나 넓은 일들을 가진다. 교육은 이익을 남기거나 효율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해야 한다. 심지어 그것은 늘 손해만 보면서도 유지되어야 할, 사회 구성의 핵심적 요소라고 아니할 수 없다.병원도 사설병원은 혹여 입장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근본에서는 같다. 병원 의사의 본질적인 역할은 병든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다. 이 고유성이 경영이라는 말의 힘에 휘둘리어 본말이 전도된 상태에까지 이르면 의학, 의업의 가치는 땅에 떨어진다.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그런 본말전도를 여러 곳에서 보게 된다. 많은 대학의 교수들이 대학의 효율적 경영이라는 요구에 밀려 자신의 가치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리고 있다. 형편이 좋지 않은 대학만 그런 것이 아니요, 좋은 대학은 좋은 대학대로 더 많은 효율성, 생산성, 이익 창출 같은, `절대가치`를 내세우는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 그리고 그 많은 곳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행정가들은 이공계 출신, 기업 출신으로 많은 성과를 내놓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다.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진보란 손실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장이다. 나는 이것을 놀라운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효율, 생산, 이익이 진보라면 그 진보는 손실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손실은 진보를 통하여 얻은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이었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들 삶의 아이러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이에 오히려 우리는 금쪽 같은 과거를 잃어버리고 있다!언젠가부터 나는 진보라는 말을 싫어하게 되었다. 더 많은, 더 나은, 그러나 더 조악하고, 더 품격 없는 진보를 너무 많이 본 탓일 것이다.

2015-04-23

사람이 살고 죽는다는 것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세상이 혼란스럽다.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로 304명이나 되는 귀중한 인명이 희생된 날이다. 꼭 1년이 된다. 이 1주기를 차분하게 맞이할 수 없는 세상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 없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아이들이 희생되어야 했는지, 아무도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사람 하나가 죽어도 큰 사건이고 연유를 정확히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바다에 수장되었는데도, 정부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하다. 하지만 그게 쉽게 마음대로 되나? 그 부모, 형제,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만 해도 1천명이 넘을 테고,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은 한 다리, 두 다리만 건너가면 아는 사람들이다.진실을 덮어두자고 해서 쉽게 덮이지 않을 바에는 진실을 알아내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쪽이 낫다. 4월 들어 정부에서 희생자 유족들에 대해서 보상, 배상을 하겠다고 하고 그 액수가 얼마가 된다고 신문, 방송에 떠들썩하게 오르내렸다. 그러자 유족들이, 어머니들까지 삭발을 했다. 정부가 특별법을 무력화 시킬 만한 시행령을 만든다고 해서 광화문은 또 다시 술렁이고 있다. 그 시한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4월 16일이면 시행령 존폐 또는 개정 여부에 따라 유족들이나 국민들의 판단, 행동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통이 그렇지 않아도 고조되는 지금이다. 이번에는 유력한 경제인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남긴 메모와 비망록이 다시 한 번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20대 때는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져보지 못할 만큼 열정에 차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런 질문을 던졌다 해도 답을 구하려 했다기보다 젊음의 멋에 취해서였을 것이다. 30대에는 세상살이의 차가운 논리에 눈 떠 어떻게든 모진 세상에 적응하려 온힘을 기울였던 것 같다. 서른일곱의 어느 가을날이 생각난다. 그날 젊음이라는 게 이렇게 끝났다는 확실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40대 때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어떻게든 감당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컸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위치의 감각, 인식이 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그 자신을 얽어맸다.이런 시간들이 모두 덧없이 흘러가 버렸다. 이제 그 고개 위에 섰다. 그런데, 가슴 한편으로 늘 찬바람이 분다. 살아간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아슬아슬하기만 하고 위태롭게만 느껴진다. 그런 심정 위로 세상과 시대의 무겁고도 혼란스러운 사건들이 떨어져 내린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녹여내느라 지난 한 해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흘러갔다. 어떻게 작년의 이맘 때를 맞이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이런 식으로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이 모래시계의 모래가 흘러내리듯 빠져나가 버린다면 이 삶은 얼마나 허무하고 허망할 것이냐.우리 삶이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사람이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는 어디에서인가 이곳으로 와서 또 어딘가로 떠나게 마련이다. 다들 알고 있듯이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물다 가는 정류소다. 우리가 영원히 있을 곳에 있지 않고 반드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곳에 머물러 있다는 이 사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자각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그러면 이 정류소에 함께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그 얼마나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인가? 우리는 적과 동침해서는 안 되며 친구이고 애인이고 부모형제 같은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살을 부비며 서로 아껴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도로, 4월 16일.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슬픔과 혼란을 더한 이 날을 맞으며 필자는 생각한다. 죽은 이들이 우리와 꼭 같이 귀중한 생명을 타고난 사람들이었음을 잊지 말자고. 그리고 예의를 지키자고.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고.

2015-04-16

세월호 추모 소설집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학교에 배달되어 오는 신문 중에 한국일보가 있다. 며칠 전 과사무실에서 이 신문 1면에서 놀랍다면 놀라운 기사를 접했다. 세월호를 인양해야 하는지를 묻는 설문에 국민의 77%가 인양해야 한다는 쪽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또한 60%에 가까운 국민들이 세월호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응답했다. 확실히, 나로서는 놀랍다면 놀라운 기사였다. 그만큼 기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사람들은 그 일에 무심해진 듯 보였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차가울까?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냉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우리 사회의 앞길을 더 어둡게 읽어냈다. 그것이 지나간 세월호 참사 1년이었다.한 해가 다 지나 나타난 여론은 달랐다.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었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식 잃은 부모들의 슬픔에 깊고 넓은 동정을 보내고 있었다.며칠 전,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15인 작가들의 공동소설집이 발간되었다.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가 그 제목이었다. 우리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타인의 지극한 불행 속에서도? 국가가 국민을 불행의 나락 속에서 구해주지 못할 때도?나는 이 소설집 제목이 적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즉, 이제는 정말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볼 때가 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 때문에 왔는가. 인생의 목적은, 보람은 무언인가? 우리 각자는 남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나?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이 질문을 던져볼 때가 된 것 같다.이 추모소설집이 처음 작가들의 머리속에 떠오른 것은 작년 12월 초순이다. 나는 그냥은, 글 쓰는 사람들이라면,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상대, 이평재, 이명랑 같은 작가들과 이리저리 얘기를 나누자 서로들 몹시 괴로워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일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12월 27일 저녁에 마음을 맞춘 열세 명의 작가들이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첫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연초가 되자 이 숫자가 조금 더 늘어났다. 나중에 이 작가 모임의 최연장자가 원고를 100매 넘게 쓰다가 포기하는 진통까지 겪었지만 마침내 15인의 작가들 작품이 모아졌다. 모두들 원고료 없이 세월호를 추모하는 한마음 소설집을 만들게 된 것이다.도중에 표지화를 그려주겠다는 화가를 만나는 행운도 따랐다. 그림은 표지화답게 단순한 구도였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충격을 잘 표현해 주고 있었다.그리고 바로 어제 작가들이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자리에서 이 책의 출간을 기념하는 작가들 모임이 있었다. 강의가 있어서 오지 못한 작가, 다른 생업이 있는 작가를 제외한 열 명의 작가들이 제 시각에 모였다.그런데, 다들 표정이 밝지 않다. 얼굴들에 기쁜 빛이 없고, 오히려 우울이 깊어진 표정들이었다. 그럴밖에. 이 책은 발간을`축하`한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책이기 때문일 것이었다.도중에 노경실 작가가 한 말씀 했다. 우리 선배 작가들은 전쟁 같은, 이보다 더 참혹한 일을 겪고도 글을 썼으니, 우리 또한 써야 하고, 쓰는 일을 중단할 수 없다.옳은 말씀이다. 이 공동소설집에서 작가들은 말했다. 기억할 것이다, 증언할 것이다, 남길 것이다, 라고. 이 시대에 사회는 문학을 향해 점점 더 허구의 탈을 벗으라고 요구해 온다. 그러나 언어는 작가들에게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쉽게 다다를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그럼에도 이 행위를 포기할 수 없음은 작가들은 오로지 이 언어를 통해서만 우리가 과연 행복할 수 있는가를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길은 없다.

2015-04-09

만우절 풍속 읽기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대학교 캠퍼스에는 몇년 전부터 눈에 띄는 만우절 풍속이 생겼다.-오늘은 왜 이렇게 고등학생이 많지요? -글쎄요. 요즘 대학교에 견학 오는 학생들이 많아졌지요. -그래도, 설마, 이 학생들이 다 고등학생들일라구요.-가만 있자. 오늘 만우절 아닌가요?-그러면요? -그러고 보니 요즘 재학생들이 만우절이면 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하더라구요.-그래요?-정말예요. 어디 한 번 물어볼까요?교수 일행 중 만우절 설을 주장한 사람이 마침 지나쳐가는 남녀 학생들에게 다가간다.-실례지만 고등학생이시든가요?-저희요? 아뇨.그중 여학생이 손을 살레살레 저으며 웃음을 짓는다. -거봐요.용감한 선생이 일행을 돌아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어, 저는 옛날부터 만우절이 싫었어요. -그래요?우리는 자못 놀란 눈으로 외국인 교수를 쳐다본다. 이 만우절은 에이프럴 풀스 데이, 즉 서양에서 들어온 풍습이 아니던가?-구비문학을 전공하고, 그 중에서도 트릭으로 논문을 썼어도 저는 진지해요.한국말을 너무나 잘 하는 미국에서 온 한국 고전 구비문학 전공 교수!일행은 다들 웃는다. 트릭으로 논문을 쓴, 원조 만우절 사회에서 온 한국 구비문학 교수라.일행 중 지나가는 `고딩` `필` 나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 용감했던 교수는 속으로 이 신풍속에 대해 생각한다.몇 년 전부터 뚜렷해진 이 고딩복 입기는 학교 교육에 대한 조롱과, 자신은 거기서 성공적으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대학교도 그렇게 멋진 곳은 되지 못한다는 냉소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젊은이 풍속이 아닐까 하고.만우절에 대학생이 된 그들은 온몸으로 거짓말을 한다. 우린 아직 고등학생예요. 우린 아직 대학생이 아니예요. 우리는 지금은, 천만다행히도, 고딩이 아니예요. 우린 오늘만은 대학생 아니라 고딩이고 싶어요.언제부터,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대학에 들어와도 여유가 없다. 고시를 해야 하나, 대기업에 들어가나, 공기업을 택하나? 언론사는 또 어떨까? 현재가 결핍된 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생활이 또 시작된다.작은, 애교 섞인 반항. 성난 얼굴로 돌아보기엔 너무 무서운 기성 사회, 기성 세대를 향해 그들은 일 년에 한번 고등학교 교복을 입는다.옛날에 겨울 졸업식 때 어떤 학생들은 교복을 찢었다. 칼로 찢다 등에 심한 상처가 났다는 믿어야 할 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소문이 돌기조차 했다.이제 그런 풍속은 사라지고 만우절이 되면 곱게 넣어 두었던 교복을 빨아 입고 캠퍼스로 등교한다.이것도 어딘지 모르게 무섭다. 과연 정말 고등학교 교복을 버리지 않고 두었나? 후배에게, 동생에게 물려주기 위해 버리지 않은 게 아니라 오로지 한 해 한 번 있을 만우절 풍속을 위해? 설마, 대학교 2년생, 3년생도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아니, 사실, 무섭지는 않다. 그 유머에 박수도 치고 싶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이 기분, 그 풍속도에 깃든 조롱과 냉소, 반감 같은 것들, 젊은이들 세상이 간단치만 않다.하나 더, 그 용감한 교수는 생각한다. 그 고등학교 생활을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 둔 학생들은 만우절 때도 교복을 찾아 입지 않을 것 같다고.중학교, 고등학교 학급마다 학교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5퍼센트 안팎은 된다. 이것이 학교 교육 현실이다. 이 학생들은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들의 진짜 목소리는 여간해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만우절에 교복을 찾는 학생들은 그래도 여유를 되찾은 이들, 나는 그 바깥의 학생들을 더 생각하게 된다.

2015-04-02

무정, 그리고 유정

▲ 방민호서울대 교수·국문과이것은 나 자신의 생각은 아니지만 받아들였으므로 이제 나의 생각이기도 한 것이 되었다. 옛날 1926년경에 어느 사상가가 잡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 사람이고 누군지 다 알만 한 사람이다.세상에는 정이 있는 사회와 정이 없는 사회가 있다. 서양 나라들은 정이 있는 사회요, 우리나라는 정이 없는 사회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유정한 사회는 그러면 어떤 사회냐? 그것은 태양빛을 받고 비와 이슬을 받는 것 같다. 꽃밭에 사는 것과 같아서 그 사회에는 고통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간다. 사람들이 삶에 흥미를 붙이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일을 하고 편안함과 즐거움을 주는 일들이 넘쳐난다.무정한 사회는 그 반대편에 선다. 그것은 가시밭과 같다. 사방에 괴로움이 가득 차 있어 사람은 자기가 사는 사회를 미워하게 된다. 또 비유하면 그것은 차갑디 차가운 바람과 같다. 공포와 우울이 그 사회를 뒤덮고 사람들은 매사에 흥미를 잃고 위축된 삶을 살아간다.두 사회가 이와 같을진대 우리는 우리 세상을 유정한 사회, 정이 흘러넘치는 사회로 응당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나?그 분이 주장한 몇 가지 행동 강령을 이 자리에 소개해 본다. 첫째, 남의 일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허물을 적발하기를 조심하고 각자 스스로의 허물을 살펴 그것을 고치기에 힘써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사회악을 방관하자는 뜻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남의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기 위한 명분을 삼는 행태를 경계함일 것이다.둘째, 남의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는 모진 돌이나 둥근 돌이나 다 그것이 소용되는 장처가 있을 것이라 한다. 다른 사람의 성격이 나와 같지 않음은 당연하며, 그것을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지금 우리에게도 무척이나 절실한 덕목이라고 생각된다.셋째, 남의 자유를 침범치 말아야 한다. 아무리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의 의지를 내 의지대로 결정하고 바꾸려 하지 말아야 한다. 늘 무엇무엇을 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는 서양 사람의 어법처럼 우리 또한 남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넷째, 남에게 물질적으로 의뢰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사이좋은 친구들도 돈 문제로 의가 상하는 일이 많음을 지적한다. 돈을 빌려 달라 해서 뜻대로 안 되면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다섯 째, 정이 깊고 얕음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형제들 사이에도 왜 부모가 형만을 사랑하느냐, 동생만을 사랑하느냐 탓하는 일이 많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왜 저 친구는 아무개만 아끼느냐, 아무개만 찾느냐 하고 비난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화내고 괴로워 할 일이 되지 못한다. 좋은 말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얼마나 많던가.여섯 째, 신의를 지켜야 한다. 서로 간에 약속한 일이 있으면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지킬 수 있을 때 서로 간의 정이 깊어질 수 있으며 지키지 않음으로써 멀리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참 힘든 말이다. 약속처럼 하기 쉽고 지키기 어려운 것이 없다.일곱 째, 예절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의범절을 잘 지키다가도 가까워지면 그때부터 무너진다고 한다. 그 때문에 친애하던 사람들이 멀어진다고 한다. 동창들끼리, 직장에서들 특히 그런 일이 많다.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유정한 사회를 향하여 가나, 무정한 사회를 향하여 가나? 지금 우리는 어느 사회에 살고 있나? 그가 꿈꾸던 서양 같은 사회인가, 그가 비난하던 우리나라 같은 나라인가? 우리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상태는 정확히 진단되어야 한다.

2015-03-26

대리기사로 오신 분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선생님 댁에 다녀오던 밤이다. 그날 따라 모인 사람들이 적어 선생님께도 죄송하고 마음도 울적했다. 분당에서 서울로 올라와 그날 모인 사람들끼리 술을 한 잔 하고 마음을 나누다 헤어지고 나자 대리운전을 요청해야 했다.-신촌 가주세요.-예에.기사분이 얼굴이 울퉁불퉁 언뜻 보면 꽤나 험상궂게 보일만한 데다 말씀도 없으시다. 몇 마디 코스를 묻고는 말문을 닫기에 나도 옆자리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앉았을 수밖에.차가 반포대교로 갓 들어섰을 때다. 이분이 갑자기 무슨 말씀인가를 하시는데 처음에는 그게 혼잣말인 줄 알았다.-여자 때문에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 그 누구죠?-네?-왜, 있잖아요. 그 황진이하고.-아, 지족선사요?-그렇지. 지족선사. 내가 바로 그 꼴이우.-네?나는 이 양반의 뜬금없는 소리에 내심 궁금증이 인다.-도 닦겠다고, 출가한 지 20년만에, 팔자가 바뀌려고 그랬는지 술집엘 갔다우.거기서 이 분은 어떤 이혼녀를 만났단다. 아이가 딸려 있는 여자였다고 한다. 이 분은 20년씩 도만 닦아온 사람이고 여자도 외롭고 힘들게 살아오던 차, 사랑이 불꽃처럼 일어났더란다. 여자에게 빠져 마음공부니 도닦는 일은 팽개쳐 버리고, 어떻게든 사랑에 매달리려 했더란다. 그런데, 아이 딸린 여자는 간단치 않더란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모성애가 무섭더란다. 거기에 술집 나오는 여인은 돈이 필요한 것인데, 도만 닦은 가난한 몸으로 어떻게 여자를 만족시켜 줄 수 있나?결국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여자도, 마음공부도 다 잃어버리고, 산에서 아예 내려올 수밖에 없더란다.-고생하셨겠어요.-괜찮아요. 요즘엔 이 일 해서 돈 벌고, 외로우면 술집 가서 한 잔 하고. 사랑 같은 건 참 어렵디다.나는 유난히 차를 천천히 모는 이 분의 얼굴을 옆으로 슬며시 훔쳐본다. 첫인상으로 험하게 보이던 것은 어디로 사라지고 웬 얼굴 깨끗한 중년의 사내가 앉아있는 것 같다.-도는 어떻게 닦으신 거죠? 절에 계셨나요?-중은 아니었고. 그냥 스승도 없이 혼자 닦았어요. 그러니까 도닦는 방법도 남에게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다만 20년 공부로 마음 비우는 연습은 한 셈이지요.이제 이 분의 말씀은 도 닦는 것, 그러니까 마음 비우는 이야기로 본격적으로 옮겨간다. 마음을 비운다? 어떻게 해야 하나?수행을 해야 한단다. 그냥 되는 건 아니란다. 앉아서도, 누워서도, 길을 가면서도 마음을 비우는 수행을 할 수 있단다.우리는 내 주소지에 도착해서 대리운전비까지 주고받았는데도 서로 헤어지지 못했다. 주차장에서 함께 걸어나와 그 입구에 서서 한참을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있었다.어디서들 자꾸 신호가 오는 것이 이제 이 분이 또 다른 차들을 운전하러 가실 때가 되었다. 우리는 몹시 아쉬운 친구들처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그 분이 허청허청 언덕길을 걸어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밤하늘을 오랜만에 올려다 보았다.한밤. 한 시 반은 족히 된 시간. 지금 이 길을 걸어내려간 사람은 누구신가?내 삶이 몹시 어지럽고 힘든 것을 아시고 홀연히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신 무슨 보살은 아니셨는가?힘을, 기운을 빼고, 마음을 비우고 살고 싶다. 조금만이라도, 순간순간만이라도.

2015-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