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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나무

등록일 2015-06-18 02:01 게재일 2015-06-1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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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노스님 지금 어디 계신가 했더니 하안거 들어가 금족 중이시란다.

며칠 전에 시인겸 평론가 권모 선생을 만나서 그분 얘기를 했다. 박사학위 하고도 교수직 채 못 구해 일주일 시간강사를 스무 시간씩 하는 사람이다. 고생 중에서도 마음 고생이니 쉽지 않은 인생길을 통과하고 있을 터다.

노스님이 만나셔서 저 산의 구부러진 나무 얘길 하셨단다.

저 산의 나무를 보아라. 쭉 뻗은 나무, 잘 자란 나무는 사람들이 다 베어가고 없고, 저 산 지키는 나무는 하나 같이 구부러지고 기울어진 나무들이 아니더냐. 그러니 실망, 낙망하지 말고 힘을 내라. 용기를 갖고 살아라.

권 선생한테 이 말을 듣다 속으로 혀를 찬다. 옛날에는 이 버전이 아니었는데, 어느 사이에 이렇게 바뀌었단 말이냐. 그럼 옛날에는 어땠느냐는 말씀?

그때는 권모 선생이 아니라 박모 선생이셨다. 그는 성품이 곧아 그른 일을 참지 않고 나서 손해도 보고 사람도 잃고 했다. 어느날 노스님이 박모 선생을 만났다.

저 산의 나무를 보아라. 오래된 나무, 산 지키고 섰는 나무들 다들 구부러지고 비틀리지 않았더냐. 오래 지키고 있으려다 보면 곧게만 있지 못하느니. 그런 나무는 다 베어지고 꺽이고 없어지지 않았더냐.

노스님, 그러니 성품 굽히고 타협하고 변절하라는 말씀 아닌 것은 귀밝은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말씀 듣고 노스님 가리키시는 산을 바라보는데, 과연 깨닫기는 게 있더라 한다. 그 박선생, 난타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말이다.

보기에 옛날 불경이며 성경 말씀들은 비유담이 많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유는 법화경 약초유품에 등장하는 풀꽃들의 비유다. 저 들판에 나가보면 풀들이 수없이 피어있다. 저마다 빛깔 다르고 키가 다르고 이름도 다르다. 그런데 이 들판에 내리는 비는 어느 풀에는 내리고 어느 풀에는 내리지 않는 그런 비가 아니다. 들판에 한번 비가 내리면 이 비는 어느 풀 하나 구별 짓지 않고 고루고루 내린다. 그리고 저마다 다른 이 풀들이 비를 맞아들여 저마다 자기 성질에 맞는 꽃과 열매를 맺는다.

나는 왜 이 이야기가 있는 곳을 약초유품이라 했는지 생각해 본다. 약초라 함은 약에 쓰는 풀을 말하지 않던가. 들판에 피어나는 모든 풀들을 약초로 쓸 수 없을 텐데 왜 법화경은 약초유품이라 했던 걸까.

여기에 이 비유의 역설적인 깊이가 있으리라. 사람네가 약초라 하지 않아도 기실 그 풀들은 그 본성과 쓰임에서 실상 약초라 해야 마땅한 것이니, 저마다 이 세상을 이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이 약초의 비유로써 경전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이 세상 모든 중생이 약초와 같이, 한 사람도 가치 없는 이는 없다는 것이니, 비유의 깊은 뜻이 더하다 할 것이다.

노스님이 구부러진 나무를 말하셨을 때, 그것이 어찌 곧은 나무를 탓한 것이 될까. 비유는 비유의 문법 속에서 통하는 것이니, 이는 구부러진 나무와 곧은 나무가 다 이 세상에 쓰일 곳이 있음이다.

요즘에 세상에 그럴듯한 비유가 사라져 감을 한탄한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정계 같은 곳에 일방통행식 직설법이 우세를 점하면서 갈등과 다툼은 더 커지는 듯하다.

산에 올라오니 오랜 가뭄에도 풀꽃들, 나무들은 깊은 생명력을 발하고 있다. 웅덩이도 아직 마르기는커녕 일급수에서 사는 물고기가 한가롭게 노닌다. 정희성 시인이 시에서 썼듯 숲에서는 각자이면서 좋은 숲을 이루고 있다. 구부러진 나무든 곧은 나무든 좋은 숲의 일원이 되는, 모든 나무를 다 약초처럼 여기는 세상은 만들기 힘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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