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트램을 5번이나 1번을 타면 리젝 뮤지엄, 반 고흐 뮤지엄 앞에서 세워 준다.
어제 늦게 시간에 쫓기며 서둘러 본 미술관을 오늘은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볼 작정이다. 줄이 길어 30분이나 기다렸지만 힘들지 않다.
오늘도 어제 본 것처럼 그렇게 충격적일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가슴이 뛰고 아리고 벅찼을까? 고흐의 생몰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37세의 나이로 스스로 세상을 떠난 그다.
충분하다. 충분하다고, 나는 직각했다. 무슨 일을 이루려는 사람이라면 37년은 얼마든지 길고 여유 있는 시간인 것이다. 나는 이상을 탐구하고도 그것을 몰랐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루쉰 기념관에 가서도 충분히, 그러니까 나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상조차도, 연구서에서 분명 앞선 작가와 작품을 하나의 살아 있는 현재로, 현실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문학다운 문학을 할 수 있다고 써놓고도, 책을 내고나서는 잊어버렸던 것이다. 기억의 어딘가에 편리하게 쳐박아두고 외유를 다닌 것이다.
드디어 다시 들어왔다. 멀티미디어 설명을 들으며 가도 좋겠지만 생략이다. 눈과 가슴으로만 받아들이자.
1층. 그는 단 10년 동안, 1880-1990, 수백 점의 그림을 그렸다. 존 피터 러셀이 그린 반 고흐의 초상화, 눈에 충혈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 1986. 같은 연도에 그린 고흐 자신의 초상화. 지극히 어둡다.`화가로서의 초상화`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맹인 같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허공을 보고 있다. 정말 맹인의 눈동자로. 그러나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팔레트를 든 채로. 어둠 속에서 혹시 캔버스 건너편에 있는 대상을 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보이는 것 저편의 대상을. 하지만 고흐는 보이는 것을 결코 외면하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는 어둠에, 혼돈에, 부질없는 시도들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는 곧 화려해졌다. 그 안의 생명이 환하게 피어오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는 꽃나무들을 그렸다. 그리고 아이리스가 피어난 들판을 그렸다, 그는. 아, 그리고 그는, 일본 에도 시대의 판화들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자포니즘이라는 게 그의 시대에는 있었다. 그는 강렬한 색채, 디자인의 새로운 구도에 영감을 받았다.
일본 사람들이 그것에 열광한다. 화란에, 고흐에, 그의 자포니즘에. 마치 오페라 `나비부인`에 열광하듯이. 그러면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고려의 불화, 조선의 자기? 민화? 조충도? 서양은 한국의 무엇에 열광할 수 있을까? 고독하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에서, 나는 얼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해바라기는 어디 있지? 4층이었던가? 난간을 붙들고 겨우 올라간다. 사실은, 여기 오던 날부터 목디스크가 도졌던 것이다. 오늘은 어제 많이 걸은 탓에 허리까지 통증투성이다.
2층. 그러면 그렇지. 멋진 그림. 한번 자세히 읽어볼까? 화병에 꽂힌 해바라기 꽃송이들. 만발한 것, 이미 시든 것, 고개를 쳐든 것, 숙인 것. 노란 탁자 위에, 노란 꽃병에, 노란 해바라기, 노란 벽을 배경으로.
백낙청이 로렌스의 리얼리즘을 말하면서, 그가 쓴, 고흐의 해바라기에 대한 분석을 인용했었지. 그때만 해도 나는 그 보이지 않는, 존재의 리얼리즘을, 보이는 것 안에 든 존재하면서 움직여가는, Being, 있음, 존재함을 그리는 언어의 힘을 믿었었다.
오묘한 그림. 노란 꽃잎들은 누가 휘적여 놓았나? 너는 해바라기처럼 타오르고 있다. 노랗게. 정물인데도, 살아서 움직이는 해바라기. 이런 그림은 아무리 고흐라 해도 누군가, 그의 안에 있든, 바깥에 있든, 그 아닌 누군가가 도와 주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집중력을 불꽃을 온전히 잡아채는데 썼다.”
이런 정물화는 다시 없을 것이다. 꽂병까지도 살아있는, 화면 전체가 여백마저도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흐르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