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는 사회주의를 부정했을 것 같다. 예술지상주의자니까, 사회주의는 예술에 적대적이라고 알고 있는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 그가 사회주의를 지지했을 것이라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사람들의 재산의 소유 정도가 각인의 개성의 발현을 제약하는 제도는 불완전한 것이라며 부의 사회적 소유를 긍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회주의라는 것이 진정한 개인주의로 가는 길목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는 개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의 경로를 머리속에 그렸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이 사회주의가 만약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고 예술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그것은 한갓 야만에 떨어지게 되고 말 뿐이라고. 그리고 역사는 그가 예견한 것처럼 되었다. 개인과 언론과 예술을 억압한 소련 소비에트 체제와 동구 사회주의는 둔중한 공룡처럼 퇴화한 끝에 사멸해 버렸고, 그후 역사는 끝났으며 이제 우리는 인류 `최후`의 양식인 자본주의 속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이론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 사건이 무려 25년전, 그러니까 1990년 전후에 일어났다. 돌이켜 보면 까마득히 오래된 일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한 세대를 보통 30년 잡으면 온전히 한 세대가 교체될 지경이요, 대학의 한 세대는 4년 주기로 바뀌어 가니, 그렇게 따지면 물경 여섯 세대에 걸친 교체가 일어났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는`현재`를 수긍하고 미래로 통하는 출구를 막아놓고 살아왔다. 왜냐 하면 우리는 사회주의를 지향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맞다. 우리는 야만으로 귀착된 딱딱하게 굳어버린 흑빵을 먹을 수는 없고, 그보다 더 잔혹한 체제라면 절대 용인,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한다. 과연 우리의 지난 30년 가까운 시간은 좋은 결과를 산출한 과정이었을 뿐인가 하고. 그리고 그에 대한 부정적 판단으로부터 나는 공상에 대해, 공상의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현실성이 없는 꿈을, 이상을 공상이라 한다. 완전한 남녀평등은 공상일 것이다.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동등한 자격을 갖는것은 공상일 것이다. 공해가 없는 세상, 생물종들이 멸종하지 않고 저마다 풍요롭게 조화를 이루며 사는 세상도 공상일 것이다. 완전한 고용은 공상일 것이다.
공상은 과연 무기력하고 터무니없는 두뇌 조작에 불과한 것일까?
내가 생각해 보기에 공상은 힘이 세다. 공상을 공상답게 한껏 꿈을 꾸어 보면 우리의 삶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우리는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평화롭게,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공상에 비추어 우리의 현재를 비추어 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상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요? 하고 누군가 내게 물을 때가 있다. 당신은 좌요, 우요, 이도저도 아니면 그 무엇이요? 진보도, 보수도 너나없이 선명함을 주장하고 나서는 때에 당신은 너무 흐릿하지 않느냐, 불분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내가 짐짓 나는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그런 이름으로 말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아니, 나는 이 시대에 그런 것이 명료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틀림없이 피곤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내 공상에는 섣부른 이름을 짓고 싶지 않다. 이름, 곧 레테르를 붙이는 순간 복잡하고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모든 것이 헝클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또는 때로 희화화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붙여야 한다면 내 이념의 이름은 공상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