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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팟캐스트로 보는 세상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오늘도 나는 팟캐스트를 듣는다. 스마트폰에 팟빵이라는 앱(애플리케이션)을 깔면 언제, 어디서나 독립방송국 같은 팟캐스트 프로그램들을 청취할 수 있다. 보기도 해야 하는 텔레비전보다 팟캐스트가 낫게 여겨지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징표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랴. 듣는 것은 애쓰지 않아도 들리는 일인 것을. 오늘도 팟캐스트 1위는 `노유진의 정치까페`. 노해찬, 유시민, 진중권 등 3인이 운영하는데 정의당의 대중접촉 매체 역할을 한다. 2위는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흘러간 현대사 이야기나 인물 분석인데, 경상도 사투리로 욕설도 난무하지만 인기가 있다. 3위는 `김용민 브리핑`으로 지난번 총선에서 막말 파동으로 낙선한 그가 아침, 저녁으로 뉴스를 분석, 전달하고 요즘에는 속류 기독교 비판도 시작했다. 4위는 트위터 매거진 `새가 날아든다`. 일명 `새날`이다. 네 사람이 시작한 것인데 나무, 신비, 송작가도 다들 한몫을 하지만 그중 황진미라는 의학 전공 영화평론가의 식견은 여느 사람이 못 따라갈 수준이다. 5위는`정봉주의 전국구`로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수 없는 그가 시사 문제를 다루는 프로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1, 2, 3위권이었지만 요즘엔 5, 6위권이다. 6위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으로 오늘의 프로는`티벳 사자의 서`에 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제목으로 봐서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데 요즘 급부상했다. 7위는 `정윤선의 팟짱`이라는 것인데, 오마이뉴스에서 만든 것이며 시사적인 문제를 주로 야당 국회의원이나 시사분석가와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끌어간다. 8위는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이다.10위권 안에 늘 머무는데, 스님의 통찰력으로 인생을 보는 법을 넓혀준다. 9위는 `나는 잉여다`라는 것인데, 여기 가면 스피노자니, 벤야민이니, 랑시에르니 하는 서양 철학자, 비평가 이름을 들을 수 있다. 지적이고 젊다. 10위는 `시사통 김종배입니다`다. 끌어가는 사람의 목소리가 묵직한데, 최근에 조금 처졌다가 오늘 보니 10위에 턱걸이를 했다. 여기까지 소개했으니 충분한 셈이지만 11위를 보니 `일빵빵 입에 달고 사는 기초영어`다. 팟캐스트에 이런 외국어교육 프로가 이 정도 성적 거두기는 참 힘들다. 쉽고 재미있는 게 강점이다.10위까지의 프로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팟캐스트 세상은 일종의 대체 언론이고 야당, 재야, 잉여 세력 집합처다.들이는 돈 `없이` 노력만으로 청취자를 끌어모을 수 있는 게 이런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특히, 정치나 시사를 다루는 프로들은 한결같이 비판 논조 일색이다. 일종의`분노`처리장이라고나 할까?최근 1, 2주 사이에 이 시사 프로들에 이상 징후가 생겼다. 모든 시사 프로가 야당 중에서도 안철수씨 때리기에 팔걷고 나선 것이다. 정의당 프로가 남의 당 일에 감 내라 콩 내라 하는 것도 그렇고, 젊은 팟캐스트들도 야당 문제만 나오면 안철수씨를 정신이상자 수준으로 내몬다. 입장이 다른 사람 눈으로 보면 전부 새정치민주연합의 친노파들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야당내 다수파를 위해 소수파에 뭇매를 가하는 것처럼 보인다.요즘 우리 사회 어디를 봐도 약자, 못 가진 자, 못 배운 자를 위한 목소리는 듣기 힘들다. 소위 약자 편이라는 집단들, 사람들도 그 내부를 보면 다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두드리고 조롱하는데 대한 자기 성찰이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진보임에 틀림없다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다. 우리 현실의 고민들,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 참된 자유를 찾는 사람들 문제는 이들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가 생각될 정도다. 진짜로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자는 누구인가?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작가 최인훈은 한 소설에서 문화민족의 척도를 말했다. 그것은 함께 지혜를 구할 수 있는가? 힘을 모을 수 있는가? 였다. 비단 민족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남을 때리기 전에 안고 보듬어주는 것,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이 아니겠는지?

2015-12-17

서울, 2015년 겨울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요즘 방송이나 신문들은 서민들, 일반 백성들, 아랫동네 사는 사람들 일을 얼마나 알려주고 있나? `응답하라 1988`같은 데 말고 뉴스나 다큐멘터리나 르포 같은 것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 말이다. 종합편성 채널이 그렇게 많아도 다양한 계층, 지역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려줄 수 있는 것은 못되는 것도 같다. 그것은 수량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과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난 5일 우연찮게 종각 쪽에 서 있다 사람들이 열을 지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과연 장관이었다. 나는 길디긴 행렬에 놀라 도대체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한 마디로 말해 한도 끝도 없이 길었다. 5만명이라는 숫자가 이렇게 많은 건가 생각하며, 그러면 옛날에 10만 양병설이니 20만 대군이니 하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많았던 거냐고 물어보기도 했다.중국이랑 맺은 FTA 협정이라는 게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농민들이 서울로 잔뜩 올라와서 꽹과리에 북에 장구를 치고, 농민가를 부르며 행렬을 만들고 있었다. 역사 교과서라는 게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나는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어떤 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없었는데, 사람들은 국정 교과서는 안된다는 피켓을 들고 있기도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높은 건물 전광판 위에 올라가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달라고 한 것이 하루이틀의 일은 아니지만, 노동자니 노동조합이니 하는 이름을 단 단체는 또 왜 이렇게 깃발이 많은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또 있다. 웬 이상하고 기괴하고 웃기기도 하고 앙증맞기도 한 가면들을 복면이랍시고 쓰고 나온 일군의 광대놀음하는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포즈를 취해주며 지나갔는데, 그들은 무슨 피켓을 들고 있는지 보니, 예술 검열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밤에도 노란 색은 잘 보이기 때문일까. 아니, 배가 바다에 빠져 학생들이 희생된 게 언제인데 지금도 사람들 행렬 안에 진상이 어떻느니, 해결이 어떻느니 하는 글귀도 보이기도 했다.대학원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논문을 써 와서 발표를 하는데, 뭐라고 썼느냐면, 1970년대는 아픔과 격동의 시대였다고 써 놓았다. 학생이 발표문을 다 읽고 나서 내가 말했다. 세상에 아프지 않던 시대가, 격동하지 않던 시대가 있더냐고. 감정과 감각의 어휘, 문장을 누르고 논리적으로, 분석적으로 써나가야 한다고. 공부하는 글에서 파토스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분명히 1970년대는 서민들,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오늘도 다를 바 없다. 오늘 인터넷 다음 포털에 가계부채가 170조가 늘었다는 뉴스가 난 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역시 신문방송이 이런 사실은 전해주는구나 했다.단,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백억, 천억, 하고 나면 조단위가 시작되나? 아무튼 큰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 인구가 자그마치 5천141만명이 넘는다. 국민들이 조금씩 나눠 짊어지면 못 감당할 것도 없을 테다. 하지만 이 길디긴 사람들 행렬을 보면 세상 살아가는 일이 편치만은 않은 것 같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춥고 배고프고 피로들 한 것 같다. 윗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이 사람들이 이렇게 추운 날에 나와서 뭔가를 얘기하고 싶어 한다면 누군가 이 소리를 듣고 전해주고 또는 원하는 것에 십분지일이라도 되도록 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보는 사이에도 사람들은 끝없이 흘러간다.그 숱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많이 보던 사람이 튀어나와 인사를 한다. 누군가? 허, 대학 후배다. 여러 해 못 보던 친군데, 행색도 멀쩡한데, 뭘 여기까지? 대학 때 세상 일에 별 관심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랬거나 말았거나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때 옛 사람을 만나는 일은 좋다. 반갑다. 웃으며 악수를 하고 그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또 행렬 속으로 들어간다.서울의 어두운 저녁이다. 12월 5일이다.

2015-12-10

도쿄역 신칸센 풍경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도쿄역에서 신칸센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섰던 청소부들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은 마치 군대의 병사들처럼 청소도구를 들고 차렷 자세로 서 있다가 문이 열리고 손님들이 내리자마자 차량안으로 쇄도하듯 밀려 들어갔다. 그들은 마치 전투를 치르듯 승객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를 걷어내고 탁자를 올리고 팔걸이를 닦고 곧이어 뛰듯이 다음 좌석으로 옮겨가곤 했다.일분 일초라도 과업을 빨리 완수해야 할 피할 수 없는 사정이라도 있는 듯 그들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서둘러대는 그들에게서 일하는 이의 자부심이나 단순한 노동이 주는 평화로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다음 출발 시각에 맞추어 일해야 하고 승객들이 탈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분명 그들의 행동에는 어떤 외부로부터 오는 강제적인 힘의 작용이 느껴졌다. 그것은 인사고과에 반영된다고 선언된 숫자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그들마다 하나씩 달려 있는 리시버 같은 것으로 시시각각 전달되는 진짜 명령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그것은 혹시 차량 바깥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승객들을 의식한 분주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들은 결코 시민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차라리 현대판 노예라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에 등장하는 끈적끈적한 끈에 얽매여 꼭두각시처럼 일해야 하는 노예 같은 느낌을 주는 바가 있었다.신칸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일본은 어디나 그런 진지하고도 초조한 표정을 가진, 일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기차 안에서 커피나 과자 등을 파는 직원은 이쪽 차량에서 저쪽 차량으로 건너갈 때마다 인사를 하고 무엇무엇을 파는지를 똑같은 방식으로 알려주며 나아간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점원은 돈을 받을 때 얼마를 받았는지 손님에게 꼭 알려주고 거스름돈을 줄 때도 얼마를 주고 있는지 알려주며 비닐 봉지는 검은 봉지를 쓰고 싶은지 흰 봉지를 쓰고 싶은지 묻는다. 서점에서도 이것은 똑같다. 돈을 주고 받을 때 모든 것을 알려주고 책을 포장할 것인지 그냥 가져갈 것인지를 묻는 그들의 변함없는 방법을 보다 보면 이들은 어쩌면 규율과 복종에 익숙할 수밖에 없는 인종들은 아닌지 생각될 때가 있다. 음식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문이 열릴 때마다 “이라샤이마세(어서 오세요)”를 끝없이 반복해도 질릴 줄 모르고 커피점에서 주문을 받고 음료를 내주는 사람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호텔 프론트에서 일하는 사람도 똑같은 말을 묻고 답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왜 `호텔 일본어` 같은 책이 나올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오차없이, 그리고 친절하게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일본의 서비스 노동의 일반적 복무 규율이다.그들은 과연 현대판 노예들인 것일까? 아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알면 그분들 모두 크게 화를 낼지 모른다. 그리고 그분들 또한 입장을 바꾸어 소비하는 시민으로 돌아가면,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의 일관되고도 극진한 서비스를 받는 자유 시민으로 서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역에서든, 서점에서든, 커피 전문점에서든, 그 어디에나 자유시민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맘껏 시간과 공간의 자유를 누리며 손님으로서의 자격을 향유하는 것처럼 보인다.그럼에도 나의 눈에는 이 자유시민들조차도 `완전히` 자유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완전히, 라는 말은 적절치 않다. 그들은 적어도 충분히 자유롭지 못한 듯한 인상을 풍긴다. 대접을 받고 향유하는 것조차 특정한 매뉴얼을 따르고 있는 듯하다. 하기는 어느 사회에 자유방임형의 제멋대로 자유가 흔할까 보냐. 일본은 언제나 한국의 한발 앞선 미래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도, 그래서 직업의 안정성이 떨어지고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져버린 것도 먼저 일본이었다. 과연 이 일본이 한국의 미래형이 되어야 하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일까?

2015-12-03

아침의 사고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전철역 앞에 맥도날드가 하나 있어 거기 잘 들리곤 한다. 원두커피 한 잔에 천원이면 비싸다고는 할 수 없다. 맛도 그런대로 괜찮다. 더 가깝기로는 롯데리아가 있지만 한 잔에 2천200원이다. 200m 걸어서 1천200원이나 아끼는 턱이니 안갈 수도 없다.그래도 가끔 롯데리아에도 가는 것은 영 바쁠 때가 있다는 것 말고 거기 아주 오래 아침 출근하시는 연세든 아주머니가 계신 까닭도 있다. 몇 년씩 왔다갔다 하며 보니 처음에는 본척 만척 했던 것도 다음에는 인사를 하게 되고 또 그 다음에는 안부도 묻게 된다. 아예 안 가기 어렵게 되어 몇 번에 한번은 롯데리아행. 오늘은 다행히 커피 값을 아낄 수 있는 날. 맥도날드 쪽으로 간다. 전철역 옆 횡단보도 지나서 오른쪽으로 몇m 가서 다시 홍익문고 앞으로 건너가면 바로 맥도날드, 그런데 그때 구급차가 사이렌 소리 유난히 크게 이쪽으로 달려온다.어디 급한 환자라도 생겼나 하고 무심히 쳐다보는데 구급차는 맥도날드 앞에 와 멈춘다. 그럼 환자가 여기서 생겼나? 누군가 길을 가다 심장마비라도 왔나, 아니면 조금 전에 무슨 교통사고라도 났나?구급차가 와서 선 곳을 보니, 빌딩 바로 밑에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는데 심상치가 않다. 빌딩에는 줄이 여러가닥 까마득한 위로부터 아래로 늘어져 있는데, 보니 이것은 유리창 닦을 때 쓰는 안전줄 같다. 그때서야 나는 사태를 알아챘다. 고공에서 유리창을 닦던 분이 추락해 버린 것이다.사고는 좀 전에 발생한 듯한데 구급차 소리 덕분에 사람들이 그제야 구경꾼들처럼 여럿 몰려든다. 맥도날드는 그 빌딩 바로 옆이고 문이 쓰러져 계신 분 옆으로 나 있다. 사람들 틈으로 보니 쓰러진 분은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한쪽 다리가 차라리 앞뒤가 돌아가 버렸다고 해야 할 정도이고, 피가 흐르지 않는 게 오히려 섬뜩한 느낌을 준다. 차마 오래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 빌딩을 다시 올려다보니 십여층은 훨씬 넘어 보인다. 어디에서, 몇 층에서 떨어진 것일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몸서리가 쳐지며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들것에 막 태우고 있는 것을 본다. 환자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고, 구급대원들은 상한 한쪽 다리를 들것에 올리느라 조심조심 움직인다. 더 볼 수가 없어 차마 외면하고 맥도날드 안으로 들어가니 안에서도 바깥 동정을 알고 있는지 어떻게 되었느냐는 착잡한 표정들이다. 커피를 주문하고도 영 아침 기분이 나지 않는다.사실은, 은근히,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세트를 팔 때 끼워 파는 인형을 살까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침 며칠 전에 보아둔 게 있었고, 그 이름이 상디라고 했는데, 참 재미있게 생겨서 사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키덜트라고, 영어로 키드와 어덜트를 합쳐, 어른이 다 되지 못한 어른 또는 어른이 되고도 아이 세계를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내 자신이 일종의 키덜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형을 눈여겨 볼 마음도, 주문할 마음도 싹 사라져 버렸다. 방금 전에 본 끔찍한 장면, 상한 사람에 대한 걱정이 인형 같은 것을 아예 생각조차 못하게 만든 것이다.사람이 산다는 것은 뭐냐? 우리들의 삶은 마치 허공 줄에 매달린 유리창 닦는 사람의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줄을 놓으면 곧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서 저마다 줄 하나를 부여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는 형국, 이것이 우리네 삶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삶을 어떻게 살아가든, 직업이 어떻거나, 돈이 많거나 적거나, 어디 살거나, 다들 안쓰럽고 딱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니, 줄을 부여잡고 있는 사이에, 그 삶의 시간에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를 안타깝게 여기고 연민스러운 눈빛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아무리 누군가가 밉고 나쁘게 여겨져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여지를 남겨두고, 그 또한 나와 함께 같은 허공에 떠 있음을 의식하도록 하자.

2015-11-26

파리테러를 생각한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파리에서 일어난 잔인한 살상을 옹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난민을 가장해 유럽으로 숨어든 테러범들과 유럽 내부의 동업자들은 바타클랑 극장에서의 조준 학살을 포함해 파리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인 살상을 감행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을 따지기 전 중동에서 벌어진 일들에 관한 나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려 한다. 2001년 9월 11일의 테러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1991년 12월 8일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됨으로써 세계는 하나로 통합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9·11 사태는 세계가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분리돼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소비에트 해체를 앞뒤로 두 번에 걸친 걸프전쟁은 그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걸프전쟁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촉발돼 1990년 8월 2일부터 1991년 2월 28일 사이에, 미국 주도의 34개국 다국적 연합군과 이라크 사이에 벌어졌다. 이때부터 전쟁은 싸움이라기보다 살상, 살육 또는 잔혹게임 비슷한 것이 됐다. 한쪽은 일방적으로 때리고 다른 한쪽은 그냥 맞기만 하며, 이런 것들이 다 비디오 게임처럼 미군 비행기로부터 지상으로 실시간 중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3년 3월 20일부터 4월 14일에 걸쳐 벌어진 제2차 걸프전쟁은 더욱 심했다. 미국의 부시정권은 이라크에 화학무기가 은닉돼 있다고 했지만 막상 쳐들어가보니 이렇다 할 것은 없었다. 9·11의 분노를 어딘가로 돌려야 할 필요성, 그 복수심을 중동에서의 질서 재편을 위해 화학무기설을 이용했을 뿐이다.나는 그때 전황을 기억한다. 이라크군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못했다. 겉으론 호언장담했지만 실질적인 군사력 면에서 형편없었던 이라크군은 미군의 무차별 공격에 고양이 앞의 쥐처럼 찢길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아무리 정확한 최첨단 무기로도 민간인과 군인을 정확히 갈라 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아프가니스탄에서도 전쟁이 있었다. 9·11 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알 카에다의 오사마 빈 라덴을 찾아 미국은 2001년 10월 7일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집권 탈레반을 향한 전쟁을 시작했다. 오사마는 아프가니스탄 깊은 협곡 속으로 숨어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51km 떨어진 아보타바드라는 작은 도시에 3년간 은신하다 사살됐다. 그게 2011년 5월 2일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그러고도 끝이 보이지 않다가 2014년 12월 18일이 돼서야 미국의 활동 종료선언으로 끝을 맺었다.지난 15년 동안 우리는 서방언론을 통해 생중계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만행을 목도해 왔다. 그들은 이민족, 타종교의 고대 유적지를 파괴하고, 여행객들을 살해하고, 자신의 영향권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을 향해 무자비한 이슬람식 통치를 행했다. 이걸 교정하기 위해 서방이 그들을 향해 무기를 드는 것은 언제나 정당해 보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수한 양민들이 희생된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거대한 악을 퇴치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해 줄 수 있는 일일까? 무수한 인명이 살상당하는 전쟁이 없이는 그들의 세력을 견제할 방법이 없는 것일까? 혹시 그런 `세계전쟁`의 와중에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버는 세력이 이 전쟁을 부추기고 지속시킨 면은 없는 것일까?프랑스가 파리 테러에 대한 보복 공격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이슬람 국가라는 IS는 어디서 자금과 무기를 조달받는지 꽤나 세력을 잘 유지하는 모양인데, 이번엔 얼마나 버틸지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테러 세력과 반테러 국가가 정면으로 맞붙는 사이에 무고한 민간인들은 살 집과 고향을 잃고 유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이념도, 종교도, 그것이 현실화 되기 전에 먼저 인류가 절멸되고 이 지구가 무너질 것 같다고. 인간은 원래 지혜를 모르는 생물종인 것 같다.

2015-11-19

장정일 씨의 `표절 판정과 작품성`에 관하여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사전을 보면 `얼룩`이라는 말은 두 개의 뜻을 가진다. 하나는 “본바탕에 다른 빛깔의 점이나 줄 따위가 뚜렷하게 섞인 자국”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액체 따위가 묻거나 스며들어서 더러워진 자국”을 의미한다. 물론 두 번째 의미는 첫 번째 의미에서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얼룩`이라는 말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이 두 번째 의미 때문에 결코 편치 않다. 누군가에게 얼룩이 묻었다고 하면 그것은 순수하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 저 사람은 얼룩덜룩하다고 하면 참 불투명한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처음에 장정일 씨가 한국일보에 `문학의 `얼룩``이라는 짧은 글을 발표했을 때, 그는 “문학에 표절이라는 얼룩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믿는 글쓰기의 순수주의자들”을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그 글 뒤에서도 그는 김영하 씨의 소설 `옥수수와 나`를 들어 “창작이 먼저고 표절이 그 뒤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표절이 먼저고 창작이 그 뒤를 따른다”고 씀으로써, 모든 창작은 “표절이라는 얼룩”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고, 문학을 그렇게 순수한 것으로 보지 말 것을 주장했다.한겨레신문에 쓴 `표절 판정과 작품성`에서는 입장이 달라졌다. 아마도 여러 사정상 예의 그 `얼룩`론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그는 “글쓰기는 표층과 심층을 갖는다”고 하였고, “글쓰기의 심층은 `문학의 얼룩`”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표층은 표절에 관계하는 것으로 분리시켰다. 자신의 논리적 허점을 고육지계로 넘어서려 한 것이다.앞서의 “표절이라는 얼룩”이라는 등식을 해체함으로써 그는 마치 자신이 먼저 쓴 글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사실은 그렇지 못함을, 그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뿐만 아니라 그는 이 새로운 글에서 “문학의 얼룩은 얼룩송아지의 얼룩처럼 더러운 것도 아니요,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얼룩이 얼룩송아지의 고유성이듯 문학의 얼룩 역시 그러하며, 창작은 거기서 시작된다.”라고 쓰고 있다. 이는 그가 처음의 글에서 사용한 `얼룩`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 범주에서 첫 번째 의미 범주로 슬그머니 이동해 버린 것이다. 그가 비판한 사람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말이다. 처음 쓴 글에서 그는 분명 `얼룩`을 더러운 것으로 보는 용법으로 말했다. 이제 얼룩은 얼룩송아지의 얼룩처럼 순결한 것이 되었다.이 모든 것을 나는 심하게 탓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이란, 문학하는 사람도 언제나 자기모순이 있게 마련이고 나 또한 그런 논리의 허점을 무수히 지나쳐 오늘에 이르렀다. 비록 논쟁적 글에서는 흔쾌히 인정하지 않게 되더라도 입장이 달라지면 그것대로 진척이 있다고 할 수 있다.이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자신이 그런대로 무난하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수정한 바탕 위에서 방민호의 `연인 심청`에 대한 비판을 새로운 언어로 계속한다.“이 작품은 빌려온 얼룩과 고투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의 글에서도 그는 이 작품을 “원본에 대한 작가의 투혼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고 했는데 이 점에서만은 그래도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그를 김소월, 서정주, 김수영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는데, 이번에는 이 작품이 “자발적으로 효 이데올로기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더욱 조악하고 시대착오적이다”라고 혹평을 가하기를 서슴지 않았다.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아직도 소설가 장정일 씨가 감각을 갖춘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비평가로 성장하기에는 아직 먼 것 같다. 어떤 책에 비평을 가하려면 일단 그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이라도 읽어 보아야 하는 것을. 내가 알기로 여러 `보통` 독자들은 그 작품을 가리켜 효를 반복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장정일 씨는 그렇게 볼 수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처럼, 그도 와인이 좋은지 안 좋은지는 한 모금만 마시고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5-11-12

루쉰, `아큐정전`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얼마 전에 베이징과 상하이에 있는 루쉰의 기념관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소설전집을 이미 접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감상을 얻게 된 계기였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던 내용에 따르면 그는 청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중국적 전통을 깊이 흡수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산해경 같은 `그림책`을 좋아했고, 나중에는 케테 콜비츠의 그림에 매료되기도 했다. 그는 숱한 문학 관련 책과 잡지를 내면서, 스스로 제자를 하고 도안도 했으니, 단순한 문학인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있어 소설은 많은 문필행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소설가 이전에 총체적 문필가였고, 그것을 가능케 한 근대적 사유인이었다.기념관에서 보았던 그의 마지막 사진이 인상 깊다. 상하이에서였을 것이고, 그의 임종 사진이었다. 그는 아주 마른 얼굴의 병인이 되어 막 숨을 거둔 상태였다. 육십 세도 안 된 많지 않은 나이에, 숱한 일을 하다 말고, 그렇게 세상을 떠난 그의 모습은 몹시 숭고해 보였다. 그 앞에서 인생이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십 년 전에 나는 루쉰과 소세키를 비교한 저술을 하나 접했었다. 두 사람 문학의 상위점을 각 나라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부터 설명하고 있는 책이었다. 그에 따르면 소세키는 서구를 수용하고 모방하는데 급급했던 당대 일본문학인, 지식인들의 체질에 대한 거리두기로서 일본적 전통을 의식하는 글쓰기로 나아갔다. 반면, 루쉰은 근대적으로 뒤떨어졌음에도 완고한 자기 중심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중국적 상황을 깨뜨리기 위해 강렬한 자기 부정 의식에 기반한 문학으로 나아갔다.탁견은 탁견이다. 오늘 다시 루쉰의 `아큐정전`을 가지고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된다.무엇보다, 루쉰은 중국적인 전통을 강렬히 의식하면서도 그 태내로부터 `완전히`새로운 소설 양식을 끌어낸 혁명적 실험의식의 소유자였다. 그가 아큐 이야기를 정전으로 부르고자 하면서 열거하는 전기의 종류들, 열전, 자전, 내전, 외전, 별전, 가전, 소전 등과 그 예거들은 그가 자국의 문학적 전통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낡은 것, 오래된 것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했음을 깊이 깨닫게 한다.한편으로, 그는 독특한 유형의 계몽가였다. 일본의 소세키에 있어 계몽은 부차적 효과일지언정 소설적 목표는 아니었다. 루쉰은 계몽적 소설임에 틀림없으나 속류적 계몽과는 거리가 있어, 계몽되어야 할 자에 대한 근원적 연민을 품고 있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작중 아큐의 운명에 대해서도 냉정한 거리를 둔 것처럼 가장할 수 있었다.`아큐정전`은 과연 무엇에 관한 소설이었을까? 작중에 “하지만 우리의 아큐는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영원히 득의만만했다. 이것은 어쩌면 중국의 정신문명이 전세계 으뜸이라는 증거인지도 모르겠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은 이른바 중국인의 `정신승리법`에 관한 알레고리로 이해될 수 있다.그러나 나는 그가 자신이 경험한 시대적 격변, 즉 1911년 신해혁명부터 1919년 5·4운동까지의 민중의 의식 현실을 그리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시대가 근저로부터 뒤흔들리고 있는데도 이를 자각하지 못한 채 혼몽한 정신으로 시대의 수동적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민중의 의식 현실을 그려낸 것이다.어떤 계기로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며 나는 2005년부터 최근에 이르는 한국 현실의 전개와 그 시대에 처한 민중들의 의식 현실을 생각했다. 세상에는 참으로 아큐들이 많다. 세상의 고통은 하늘을 찌르고 땅을 요동치게 하건만 아큐는 태평하다. 정신승리법으로 현실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므로. 지옥도 천국이 되는 것이 바로 아큐식 정신승리법이다.

2015-11-05

한국문학이 사회성과 함께 잃어버린 것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문학에서 사회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문학이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번에도 나는 역시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약 20년 동안 한국문학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한국문학이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어 왔기 때문에 문학적인 문학이 되지 못했다는, 1990년대 이후 문학인들의 반쪽짜리 진단은 앞을 다투어 반사회적인 문학을 향해 `돌진`하도록 했다.때문에 좋은 의미에서 사회파 작가가 될 만한 작가들도 자신의 컬러를 사회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도록 `포장`하도록 했다.예를 들어 김영하 같은 작가는 장편소설 `검은 꽃`이나 `빛의 제국` 같은 소설의 소재나 주제는 지극히 사회사적인 것이지만 그는 이것을 냉소적 포즈로`문학화`시켰으며, 정이현 같은 작가도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같은 문제성 있는 소설집의 주제를 여성 인물의 욕망의 문제로 더 많이 `내면화`시켰다.이러한 `문학화`의 가장 단적인 예의 하나가 사상의 공백을 `감상`으로 보충하는 것이다. `외딴방`이후 신경숙의 대부분의 장편소설들은 울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암시적 작가의 존재를 상기하지 않고는 읽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고, 공지영 같은 작가의 `극단적인` 사회적 소설도 예를 들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보여주듯이 죄없는 자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독자들의 감상에 의지해서나 사형제 비판이라는 주제를 지탱할 수 있었다.최근 들어 한국 문단에서는 문학은 곧 정치라는, 젊은 작가들의 반항 어린 목소리가 급증했으며, 이러한 주장들은 랑시에르라는 프랑스 학자의 견해에 대부분 기초를 두고 있다.그들은 말하자면 문학은 감성의, 감각의 재분배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같은 1970년대의 소설이 문제적인 것은 그것이 부르주아 쪽으로 쏠려 있는 대중의 미학적 취향을 프롤레타리아 쪽으로, 성공적으로 재분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런데 문학은 곧 정치라는 선언의 위험성은, 따라서 어떤 작품도 정치적인 것이고, 따라서 불온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선언 아래 드디어 아주 작은 포즈만으로도 그 작가는 사회적으로 문제성이 있고 그 작품은 사회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사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극히 둔감하고도 게으른 숱한 작가들이 `자동적으로`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았다. 작품을 아주 잘 읽는, 그래서 가장 작은 징후만 가지고도 거대한 의미를 찾아낼 줄 아는 `문학파` 비평가들에 의해서 말이다.도대체 무엇이 사회적 문학을 떠나 문학적인 문학이 될 수 있는가?사실은, 지극히 사회적인 문학이야말로 지극히 문학적인 문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회가 하나의 사물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의 외부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때 이런 문학은 지극히 얄팍한 사회적 문학밖에 될 수 없다.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이번에는 그 외부적 사회를 제거한 내부의, `내면성`의 문학을 구축하겠노라 한다. 하지만 이 내면은 텅 비어 있거나 오로지 빈약한 내면만을 지닐 뿐이다.왜냐하면 진짜 내면이란, 인간 개체가 타자들 또는 타자들의 집합과 관계하는 과정을 치열하게 겪어내는 인간들에게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부화 한 내면성 아닌, 외부 배제의 내면 추구로 말미암아, 지금의 한국문학은 지극히 단조롭고 재미없는 소설로 변질되고 말았다. 누가 타인, 타자와 그것들의 집합체로서의 사회를 강도 높게 다루지 않는 소설을 재미 있어 하겠는가?

2015-10-29

슬픈 노동 기쁜 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서울에서 나오는 잡지 중에 `삶이 보이는 창`이라는 게 있다. 이름이 좋다. 뜻도 좋다. 일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을 잡지에 담아보겠다는 의욕을 바탕으로 출발했다. 지금 이 잡지에 관계하는 사람으로 내가 알고 있는 이는 황규관이라는 시인인데, 얼마 전에 새 시집을 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나는 이 잡지를 정기구독하는 사람의 하나가 되었지만 올 때마다 찾아볼 여유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시전문 잡지에 월평을 쓰는 관계로, 이 잡지에도 시는 있을 텐데, 하고 얇은 잡지를 후루룩 훑어보다 이해청이라는 필자가 쓴 글이 눈에 들어왔다. 신학의 관점에서 노동이라는 것을 해석한 것인데, 짧은 지면에도 폭넓은 생각이 담겨 있는 듯하여 반가웠다. 거기 글 중간에 이런 문장이 있다.“노동이란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 포노스는 슬픔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일을 의미하는 라틴어 라보르 역시 고통이 수반되는 극도의 노력을 가리킨다.”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노동 개념이 기독교 전통과는 달리 노동을 슬프고 힘든 고역의 관점에서만 일면적으로 보았음을 비판했다. 또, 기독교적 전통 속에서 인간의 필수불가결한 삶의 조건으로서 신에게서 부여받은 노동에 관한 생각이, 근대에 접어들면서 단지 의무요 복종에 지나지 않게 되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전혀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적 노동 역시 그리스적, 로마적 노동의 함의에 근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일이라는 것이 노예적인 슬픔에서 벗어나 자기를 실현하는 창조적 도구 노릇을 할 수 있게 될까?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을 유적 노동에서 찾았고, 이 노동의 소외로부터 현대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를 발견한 것으로 믿었다. 엥겔스도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노동이 한 역할을 논의하는 가운데 그것을 인간 삶의 근본적 조건으로, 그것도 유일무이한 원천으로 취급했다.현대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달랐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크게 셋으로 나누었는데, 그 첫째가 노동이요, 둘째가 작업이요, 셋째는 정치, 곧 공적 의사소통 행위였다. 우리 말로 써 놓으면 노동이나 작업이나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두 가지 행위가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그녀의 구별법에서, 노동은 소비, 소모시키기 위해 만드는 행위를 가리키며, 작업은 예술창작 행위처럼 남기고,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미하기 위한 일이다. 앞에서 말한 글쓴이는 그래서 한나 아렌트의 노동 개념이 그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시사한다.사실, 이런 부류법에 따르면 노동은 작업에 미치지 못하는 하류의, 열등한 생산행위밖에 되지 못하며, 필연적으로 우울하고 무겁고 슬픈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사자가 얼룩말의 목덜미를 깨물려 달려갈 때의 희열, 소가 풀을 뜯기 위해 풀밭을 찾아갈 때의 희열은 인간에게는 어디로 배분되었는가를 묻고 싶다. 사자나 소나 모두 생명 작용을 영위하기 위해, 즉 하루를, 일생을 소비하기 위해 그들의 `일`을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먹이를 찾는 과정은 오로지 고통일 따름이겠는지?현대에 와서 사자나 소의 `일`이 가진 직접성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먹이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의 욕망을, 먹이를 충족시켜 주고 조달해 주어야 한다. 자신의 생명을 영위해 줄 재화가 오로지 간접적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시대에 노동은 본래의 기쁜 빛을 잃고 잿빛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되기 쉽다.그래서 말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노동, 즉 인간적인 `일`이 지닌 보람과 기쁨을 되새길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노동의 대가로 돌아오는 돈이 적어서만 슬프고 괴로워지는 게 아니다. 자신의 노동의 의미와 가치가 홀대받고 무시되는데서 사람은 더 큰 고통을 느낀다.우리가 이 땅에서 함께 사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로부터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노동이 내 노동과 어떤 의미에서든 `등가적`일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공생의 출발점이다.

2015-10-22

이 시대 문학은 사회를 어떻게 추방했나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독자들은 눈이 밝지만은 않다. 그들은 소설을 여러가지 이유로 선택한다. 때로 거기 적혀 있는 이상 때문에 좋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그 이야기가 재미있고 새롭기 때문에 좋아한다. 또 반대로 그들은 이야기가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앎에 기대고 있어서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떤 소설가가 독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작가의 의미나 가치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변덕스러운 대중적 독자들의 힘은 작지 않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다야마 가타이가 `이불`이라는 짧은 장편소설을 쓰던 때를 생각해 본다. 문학사에서 이 소설은 일본 문단의 구도를 단숨에 바꾸어 놓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나카무라 미쓰오라는 비평가는 이 작품이 일본 문학에 새 바람을 가져온 이유는 작품이 심오해서도 아니고 문체나 묘사 따위가 전작들과 달리 대단히 좋아서도 아니다. 작가는 오스트리아 극작가 하우프트만이 쓴 희곡 `외로운 사람들`의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기도 그런 감동적인 얘기를 쓰자고 생각하며 소재를 궁리했다. 그러다 자기 얘기를 떠올렸다. 자기에게 소설을 배우러 온 여학생을 그는 짝사랑했고 다른 남학생을 사귀는 것을 질투하다 파문해 버렸다. 자기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 고백적인 태도에 독자들은 열광했고,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이야기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상적으로 더 심오하게 써도 독자들은 시큰둥해 하며 더 부끄럽고 추악한 이야기를, 따라서 더 `진실`해 보이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한국의 1990년대 중반경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문제적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 또는 사회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소설은 대중의 관심사 뒤로 밀려났다. 그러한 주제에 가까운 것으로서 단 하나 살아남은 것은 운동권 후일담 소설이나 시,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질문을 멈추고 그러한 질문 속에서 살고 있던 자기를 회고적으로 되돌아보는 소설뿐이었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장편소설 `외딴방`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유형의 작품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세계 또는 사회의 복잡다단한 전개는 작중의 흐릿한 배경으로 물러나고 전면에 나서는 것은 작중 주인공의 상실감, 고통, 외로움 같은, 남은 감정이다. 이 감정이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이들 작품이 말하고 있듯이 이제 세계는 출구가 없이, 부조리한 현재가 계속될 것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 무렵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이 대규모로 꾸준히 팔리며 큰 인기를 끌고 그 스타일을 흉내내는 작가들도 급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아주 좋은 경우에나 사상가에 가까워질 뿐 많은 경우에는 그것을 팔아 생계를 잇고 재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자연인`이기 때문이다.이렇게 일단 사회성을 뒤로 물린 작품들이 득세하는 물고가 풀리게 되자 그 다음에는 쉬웠다. 이제는 이상을 품고 고투하는, 상처투성이 인간을 연기하지 않아도 독자들은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소설적 주인공은 자기 아픔이나 비밀에 절어 있어도 되었고, 심지어는 감각이나 정서만 새롭게 보여도 좋았다. 그런 흐릿한 흔적이나 편린만 있어도 머리 좋은 비평가들이 떠들썩하게 그 의미를 해석, 제공해 드렸기 때문이다. 비평은 바야흐로 창작의 시녀로 전락했다.2000년대는 그러니까 사회성을 안 가진 것처럼 꾸미고, 사회적인 문제 같은 것은 차라리 경원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가 세련된 것처럼 간주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사회성은 공지영처럼 사회적 문제를 소재적으로, 그리고 멜로물의 플롯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전담물이 되었다. 사회를 매개로 한 인간 탐구가 매개적일수록, 흐릿할수록, 암시만 하고 넘어갈수록 문학적인 작품으로 간주되는 풍토가 지배하면서 문학판은 마침내 세련된 장식들의 진열장처럼 변했다. 사회를 본격적으로,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이들은 문단에서 사라졌다. 아주 당연한 일인듯이 말이다.

2015-10-15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과 내면성의 변질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1990년대가 되자 한국문학의 환경은 급격하게 변모했다. 여전히 계속되는 반체제적, 저항적 문학의 몫은 김영현에 의해 대변되었다. 그의 창작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가 세인들의 관심을 샀다. 다른 한편으로 놀라운 속도로 전개되는 자본주의 적 축적을 배경으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범주화 할 수 있는 작가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경마장 가는 길`의 하일지, `아담이 눈뜰 때`의 장정일, `영원한 제국`의 이인화 등이 그들이다. 이 두 문학적 경향은 모두 정치이념적, 사회경제적 배경에 비교적 직접적인 빚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했으며, 특히 김영현이나 하일지, 또는 장정일도 모두 내성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에서 같았다.현대소설에서 이 내성 또는 내면성의 지위는 독보적이다. 잘 팔리는 소설도 주인공이 이 점을 결여하고 있을 때는 훌륭한 작가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불문율이 우리 문학에서는 통용되는 감이 있다. 내성 또는 내면성을 갖춘 인물은 외부세계와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자신이 품고 있는 가치에 관한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이 인물이 리얼하게 그려질 때 독자들도 함께 고민하게 된다. 한편 현대소설의 가치가 이 자기의식적 존재를 얼마나 잘 그려내는가 여부에 의해서 판정될 수 있다면, 이후의 한국 사회는 대체로 소설의 가치 구현을 위해서는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의 힘과 문학 사이에 어떤 함수 관계를 설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하지만 시장과 교환가치 힘이 긍정될수록 작가들이 내면적 인물을 잘 그려내기는 쉽지 않아진다고 말할 수 있다. 현실에 그런 인물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작아지고, 작가 스스로도 외면적 가치를 추종하는 독자들의 압력을 쉽게 뿌리치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일본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몇 년 전 쓴 글에서 현재를 내면성의 문학이 자기 역할을 다한 시대로 규정했다.그는 이를 합리화 하기 위해 근대문학의 시대라 해서 내면성의 문학만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며 일본문학을 예로 들면서, 사람들이 외면성에 치우치는 시대이고 따라서 내면성의 문학은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고, 자못 비판적, 냉소적으로 진단했다. 그 글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의 말이 맞아서 지금 내면성의 문학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면, 나는 이 시대의 마지막을 장려하게 장식하며 그와 함께 나 또한 사라지리라.그때 나는 이 시대에 새로운 시대를 먼저 맞이하려는 사람은 너무 많고 지나가는 시대와 함께 자기 삶을 마감하려는 사람은 너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가라타니 고진을 믿지 않았다. 내면성은 이 시대가 아무리 인간의 외모와 욕망에 점수를 준다 해도 그것대로 가치에 대한 인식을 이어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인간은 건망증이 심하고 귀한 것도 쉽게 내던지곤 한다. 그러나 또 문학은 인간이 발견한 가치들을 자못 끈기있게 보존해 왔다. 내면성도 그런 가치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생각했다.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한 내면성 문학의 종언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한국문학사의 전개 상황에 비추어 보아도 어디까지는 통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면성이란 무엇인가?그것은 자기와 타자, 또는 자기를 둘러싼 사회와의 관계를 성숙하게 사유할 수 있는,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더 깊은 의식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자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던가?이런 내면성의 원리에 비추어보면 지난 20년의 한국문학은, 적어도 표면상 주류문학을 중심으로 보면 내면성의 약화 또는 변질을 보여 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시대의 우울, 시대의 병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유래하는 우울증을 앓는 개인은 문학에서 `무척` 사라지고 개인적 관계에 국한된 얇디얇은 깊은 슬픔이 우울증의 전부처럼 전면에 등장했다. 시대의 우울 따위는 가짜이며 진짜는 한 소녀가 안고 있는 깊은 슬픔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슬픔의 자리에 짜증, 냉소 같은 말을 넣어도 논리는 성립한다. 이러한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2015-10-08

지금 문학의 문제를 생각하는 법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표절이다, 문학권력이 문제다, 문학계가 아직도 조용하지 않다. 한 작가의 비판적 `고발`에서 출발한 사건이 문학 권력 문제로 비화되어 문학에 카르텔 메커니즘이 있다든가, 문학상 등 문학 제도 자체가 소수의 문학주체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말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이를 둘러싼 토론과 공방이 간헐적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런 논란들에 대해 내가 아예 무관심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특히 문학권력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문학인 가운데 전혀 힘이 없는 사람, 즉 발표지면을 전혀 가질 수 없는 사람은 적기 때문에 문단의 권력 집중이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적 관건은 되지 못한다고 썼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만의 태도가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전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이 벌어졌을 때 이미 공표한 것이기도 하다. 그때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나와 문학 경향 면에서나 개인적 관계 면에서 비교적 가깝다고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입장이 그들과 나의 관계를 다소 소원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문제에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본질에는 권력 문제와는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지금 우리 문학의 지배적 구조는 적어도 1990년대 전반기로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91년에는 아직도 소련 체제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한국의 지식계에는 이 거대국가 역시 제국주의 국가임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며, 특히 이른바 진보파 가운데에서는 그런 사람은 희귀종이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지식계의 구조는 물론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적 개혁이나 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문학인들은 일부에서 깊은 연대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소련, 중국, 북한 등을 일종의 진보적 국가로 착각하는 현상이 만연되어 있었고, 지금도 이는 불식되지 않았다. 1991년 사태는 그런 한국문학의 인식 구조를 붕괴시켰다. 소련의 붕괴는 자본주의 이후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마르크스의 잘 알려진 도식을 `파산시켰으며`, 이 경험적 `진실`은 이 땅에서 진정한 문학은 더 이상 현실 사회주의의 존재 가능성에 미련을 두는 방식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공리가 단기간 내에 자리를 잡았다. 자본주의 다음의 미래는 없다는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론이 문학에 대입되면, 그것은, 이제부터 문학은 미래로의 출구가 닫힌 세계 안에서 본질적으로`유희`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투쟁 대신에 유희, 혁명 대신에 허무, 진정성 대신에 포즈가, 거대담론 대신에 미시적 일상성 담론이 이제 문학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또 문학은 미래로 향하는 비전을 제시하는 대신에 닫힌 세계를 사는 사람들을 위한 위안이 되어야 했다.이러한 시대의 정치경제학적 담론 표현이 신자유주의이며, 문학동네, 문지, 창비의 카르텔 구조는 바로 이 체제의 문학적 상부구조였다. 미래가 의심받고, 진실이나 진리란 단지 권력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고하는 새로운 시대에 이 카르텔 구조는 성공적으로 장착되었다. 창비나 문지는 이전 시대에 형성된 권위를 가졌지만 새로운 동력을 확보한 문학동네와 협동함으로써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 삼자 결탁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이 `1990년 체제`의 정치경제학적 기초가 장기지속적으로 공고했던 때문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메커니즘에 합류하지 않았거나 못한 문학인들이 꽤나 무능했기 때문이다.그렇게 해서 지속된 20여년 동안 한국문학은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우리 문학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문학은 무엇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이 문제를 숙고하고 싶다. 표절이니 권력이니 하는 문제는 그 표면의 일일 뿐, 문학의 본질적 측면이 될 수 없다. 생각의 방향을 돌릴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문학이 직면한 상황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2015-10-01

보스포루스 해협, 지하교회, 올리브 나무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가을이 시작되고 터키에 갔다. 한국과 터키, 경주와 이스탄불을 하나로 연결하는 교류 행사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동리목월문학관의 후의를 입은 것으로, 대륙과 대륙을 잇는 나라를 참관하는 귀한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첫 도착지는 이스탄불,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도시다. 인구는 2천만 명이나 되고 면적만 해도 서울의 9배나 되며, 기독교 중심지에서 이슬람 중심 도시로 변화해 온 유서 깊은 도시.이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면 유럽이요, 이쪽은 아시아, 그래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배경이 된 유럽 종착역이 있었지만 지금은 폐쇄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스탄불은 왠지 전혀 쇠퇴하지 않는 것 같다. 너무 넓고 복잡하고, 그러면서도 평화롭고 조용한 도시. 술을 마시지 않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살기 때문일까. 이슬람 도시가 이토록 평화로운 것은 시리아 난민이 30만명이나 들어와 있다는 소식 때문에 더욱 놀랍게 느껴졌다. 적어도 이 나라는 난민을 30만명 정도는 아무 잡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인 것이다. 터키에 갈 때부터 난 무거운 등짐을 진 사람처럼 힘들어 했다. 남이 부과해준 과제가 아닌 스스로 짊어진 것이기에 남탓을 할 수도, 내려 놓을 수도 없는 등짐, 그것은 시인 백석의 말년에 관해 쓰겠다는 것이었다. 그간 취재도 하고 궁리도 했지만 결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많지 않은 경험의 결과로 내가 얻은 교훈 하나는 소설은 결말을 알아야 차착없이 전개시킬 수 있다는 것. 그러면 백석의 말년 이야기는 무엇으로 결말을 지어야 할까? 흔해빠진 엔딩도 아니어야 할 것이며, 그를 죽여서 끝내기는 이미 세상을 떠난 그를 위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 까닭에, 결론은 잘 나지를 않았다. 한국·터키 학술행사를 마치고 사흘간 터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게 되었을 때다. 카파도키아에서 말로만 듣던 지하교회엘 가게 됐다. 지하 85m까지, 그러니까 지하 8층 깊이까지 터널을 뚫고 파내려간 사람들의 도시, 그곳은 로마 병정들로부터 종교적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의지로 이룩된 성소였다. 그들은 박해자들이 오면 동굴 입구나 중간을 돌로 막고 암흑과 같은 어둠 속을 견뎠다. 때로 200년씩 지속된 은신 생활을 이어갈 때 그들의 평균 연령은 겨우 30세 정도. 여성들과 아이들은 땅 위로 올라가지도 못했다.이것은 모두 사실일까? 그러나 내게 디테일 전부까지 사실이었는가는 중요치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이란 정신적 동물이며, 그런 한에서 신념을 쉽사리 억압할 만한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곳에서 백석을 다시 만났다. 1959년에 양강도 삼수에 내려가 살게된 후 모든 공식적 글쓰기를 멈추고 완전한 침묵 속에서 생애를 마친 그는, 상상컨대, 거짓된 언어 대신 첩첩산중의 고독을 선택할 줄 알았던 의지의 인간이었다. 캄캄한 동굴 속 행렬을 따라 다니며 오로지 시인 백석만을 생각했다. 바깥으로 올라오자 햇살이 그렇게 눈부실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날 때 눈이 멀지 말자고 생각했다. 버스는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를 달렸다.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지평선이 보이는 길을 달려 나무 한 그루 없는 산과 구릉이 잇닿은 곳을 끼고 달려가기도 했다. 그때 그 황야와 산기슭 같은 곳에 이따금씩 나무 한 그루가 홀로 서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물었다. 저것은 무슨 나무냐고. 올리브 나무라고 했다. 그 순간, 내 머리를 치는 것이 있었다. 백석은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어느 시에서,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말했었다. 바로 그 나무를 통해서 그는 지금 저 올리브 나무처럼 황야를 견디는 의지에 관해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터키에서 나는 백석을 다시 발견한 셈이다.

2015-09-24

비평가 장정일 씨와 한국문학의 얼룩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나는 장정일씨에게 절대로 대꾸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나쁜 종류의 비평가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비평하려는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아주 잘 판단한 듯이 말하며, 어떤 작품이든 미리 자신이 의도한 바를 위해 어떻게라도 써먹을 태세가 되어 있다. 또 그런 비평가는 자신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아무 근거도 없이 말해도 독자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그런 나쁜 비평가들은 작가가 작품의 앞이나 뒤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 겸양의 뜻을 표하거나 무지를 가장한 문장을 써놓은 것을 근거로 잡아 그 작가를 무참히 구석으로 몬다. 설마 대작가 장정일씨가 그런 비평가일 리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무슨 반박이며 대꾸가 필요하겠는가. 나는 단지 그가 고맙게도 작가로 인정해 준 방민호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문학의 얼룩이라고 이야기한 문제에 관해서만 내 생각을 표명해 보려 한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그가 불러내 준 작가 방민호는, 그가 예상한 그대로, 근거 없는 비난을 견디는 데는 충분히 강해서 그다지 상처받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새로울 게 없다. 말하자면 그는 하늘 아래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쓴다. “문학은 자기 자신 안에 얼룩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가 문학의 상호텍스트성이라고 부르면 될 것을 굳이 `얼룩`이라 했는지 궁금하다. 그는 아마도 “문학은 백짓장에 그리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려진 것 위에 덧그리는 것이고, 그렇게 자꾸 얼룩을 내는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싶었는가 보다. 그러나 그렇게 뉘앙스를 주어 말하기는 했지만, 그 얼룩이 뭔가 하고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그것은 `영향·모방·패러디·패스티시·인용·인유 등의 심급이나 기법`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남들이 상호텍스트성이라 부른 것을 마치 대단한 발견인 양 `얼룩`이라는 말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포장에는 의도가 있다. 문학이란 원래 그렇게 더러운 것이 묻어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이 더러운 마당에서 누가 특별히 표절했다고 소리칠 것도 없고, 그냥 서로의 얼룩이나 보고 있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설마, 대비평가 장정일씨가 그렇게 말했을 리 있을까? 나도 그가 그런 결론을 내고 싶어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남 비난하는데 몰두하지 말고 문학의 존재 조건을 한번 더 성찰해 보자는 뜻으로, 그렇게 먼 길을 돌아 표현했을 수도 있다. 오로지 신출나기 작가 방민호에게 대해서만은 아주 예외적으로, 직접적인 비난을 서슴치 않으면서 말이다. 누가 뭐라고 했던가요? 문학은 예로부터 앞선 것을 의식하고 앞선 것을 전범으로 삼거나 뛰어넘으려 한다는 것을 누가 부정한 적이 감히 있었던가요? `아무도`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 것을 마치 전부들 순백색을 치장하고 있는 듯 비난함으로써 장정일씨는 무슨 효과를 얻으려, 의도했던 걸까? 한국일보라는 문제적 신문에 실린 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열쪽짜리 글을 보며 나는 이 글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지 생각하다, 아하, 하고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그럼으로써 장정일씨는 신경숙씨와 창비에게 그 자신이 발명한 `얼룩`표 면죄부를 발부한 것이다. 나 또한 그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표절 자체가 문제라고는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한국문학, 아니 자기 자신의 문학만이라도, 과연 무엇을 말하고 써야 하는지가, 도대체가 불분명한 이 상황, 그런데도 아무 것도 새롭게 생각할 것도 없는 것 같은 이 상황,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얼룩일 것이라고, 그에 의해 얼룩이 많이 묻은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2015-09-17

문막도서관, 이효석 문학관

화요일 새벽, 용케 눈이 떠졌다. 아홉시까지 문막 읍사무소, 서둘러야 한다.새벽길은 가을의 초입답게 서늘하다. 고속버스 터미널까지는 하는 수 없이 택시로. 조금이라도 빠른 시각 버스를 타고 가 한적하고 여유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 여섯 시 십오 분 출발, 버스 안 승객은 많지 않다. 버스는 고속도로 진입로부터 서울 톨게이트까지는 막히는가 싶더니 금방 싱싱 달린다. 일찍 서두른 덕을 보는 것 같다.원주 가는 고속버스는 문막 간이 정류장에 선다. 제 시간에 문막 톨게이트까지 잘 도착한 버스, 그런데 차단기 앞에 멈춰선 버스가 50㎝쯤 슬며시 후진, 그 순간 뒤꽁무니가 무엇엔가 부딪히는 느낌이다. 버스 기사가 일어나 뒷차에 부딪혔다고, 잠시 이야기를 하고 오겠다고 나간다. 십 분이 넘었다. 모처럼 여유 있게 나온 길이언만. 문막 읍사무소가 여기서 먼가?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다.`김기사`로 문막 읍사무소를 치니, 혹시나 한 게 1.1㎞ 밖에 안 된단다. 그 정도 거리면 정류소에 내려서 가는 것보다 빠를 것 같다.가방 챙겨들고 `김기사`가 가라는 대로 가본다. 아마 `김기사`가 만난, 가장 느린 자동차일 것이다. 하지만 이 느린 걸음도 걸음은 걸음, 어느덧 나는 읍사무소 방향으로 꺽어지는 곳까지 왔다. 단정한 붉은 벽돌 건물이 맞은 편 모퉁이에 서 있다. 문막 성당이라고 써 있다.사진 한 장 찍고, 읍사무소로 향하다 문득 사람들에게 사탕이라도 하나씩 나눠드리고 싶다. 사탕은 안 비쌌다. 한 봉지 2천원, 도합 6천원. 편의점에서 나오니 읍사무소 앞마당에 관광버스 한대가 들어온다. 오늘 우리 일행을 실어나를 주역이다. 버스에 오르니 이미 많은 이들이 와 있다. 9시 출발, 날씨도 좋고, 길은 한적하고, 산은 아름답다. 천천히 달려서도 겨우 한 시간만에 우리는 이효석 문학관에 당도했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 문막 교육도서관의 문학 프로그램 수강생 분들과 함께 문화제가 한창인 평창 이효석의 고장에 온 것이다.이렇게 아늑했던가. 몇 번 와보기는 했지만 정작 이맘 때는 오지 못했던 곳. 이효석이`메밀꽃 필 무렵`에서 달밤에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다고 써 놓았던 메밀밭 메밀꽃이 구릉을 타고 부드럽게 피어 있는 곳, 산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도 험하거나 답답해 보이지 않는 곳, 마음을 툭 하고 놓아버리게 된다.나도 사람들을 따라 자연에 안긴 기쁨을 안고 메밀꽃밭 속으로 들어간다. 화요일에 이런 기쁨을 맛볼 수 있다니. 사람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우스개 소리들도 주고받는 틈에, 이게 무슨 냄새?나는 메밀꽃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본다. 과연, 시금털털한, 역하다고 할 만한 거름 냄새 꽃, 이 꽃송이가 수천 수만 송이가 모여 거름밭 냄새를 피워내고 있었다.그렇다. 이효석 소설을 그렇게 여러번 읽고도 정작 메밀꽃 냄새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효석은 자신의 작품에 이 냄새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밤의 서정적인 분위기, 아쉬운 하룻밤 사랑의 이야기 속에 이런 냄새를 풀어놓기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탐미주의자다운 취사선택이다. 드디어 점심, 부드럽고 따뜻하신 도서관장님과, 실무 역할을 멋지게 해주시는 남녀 두분과 같이 메밀국수에 메밀전을 먹는다. 순하고 구수한 맛이 이 고장 바깥에서는 먹어볼 수 없는 일품이다. 가을에 이효석과 메밀꽃과 메밀국수와, 사랑과 열의를 함께 갖춘 사람들과, 또 자연의 순례길을 위해 하루낮을 기꺼이 할애하는 문막의 사람들.이효석은 그 어려운 시대에 원두커피를 마시고 버터에 빵을 먹고 쇼팽을 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미래의 사람이었고, 이제 우리는 그의 미래를 현재에 산다.좋은 하루다. 자연이, 문학이 내게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깊이 음미해 보는 날. 하늘은 더 없이 맑고 들은 싱그럽다.

2015-09-10

작가 수업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문단에서 아직 표절 문제가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창비의 백낙청 선생이 의견을 표명했지만 석연찮다고도 하고 문학동네는 편집위원과 대표가 물러난다고도 한다. 누가 어떤 작품을 어떻게 표절했느냐, 베껴 쓰고도 감췄느냐 하는 문제는 창조성의 진정성 여부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작가적 양식에 관한 물음이기도 해서 절대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표절 문제가 표면으로 부상되는 순간, 즉각적으로 현대 작가의 자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냐가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한국의 현대문학에 대한 여러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현대작가는 결코 황무지 위에 서 있는 존재도 아니고, 백지 위에 처음으로 인생의 형상을 그리는 존재도 아니다. 그는 너무 많이, 오랫동안 그려온 종이 위에 그 자신의 그림을 그리게 되며, 따라서 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자기보다 앞서 그린 사람들의 작품을 참조하게 된다.현대작가가 주장할 수 있는 새로움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새로움이 아니요, 유 위에 그 유를 포함하거나 참고한 새로운 유를 만드는 새로움이다.이렇게 볼 때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표절 문제는 단순히 남의 것을 베껴썼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가 아니요, 유에서 또 다른 새로운 유를 창조해 나감에 있어 얼마나 진정한 자기 몫을 깊이 있게 만들어냈느냐 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의 것을 참조하고 들여온 것,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는 가운데 그 남의 것에 없던 것이 얼마나 값있게 만들어졌느냐가 문제라는 것이다.이 점에서 지금의 표절을 이런저런 형태로 변론해 주고 있는 이들과 나의 입장은 같지 않다. 이 참조와 창조의 긴장 면에서 지난 15년 넘는 문학사의 시간은 결코 그 화려함만큼 심오하지는 못했으며 지성 대신에 감각을 주장하며 문학만이 제공할 수 있는 통찰이나 성찰 능력을 퇴행적으로 이끈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과정의 주역들이 문학적 진정성과 권위까지 아울러 독점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지난 시간의 부조리이자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한국의 작가들과 출판사들이 단 시간 내에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앞에 놓고 나는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그러면, 왜냐? 문학사든, 다른 일반적인 역사든 시간은 인간들에게 공평한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이 500년마다 하나 날까 말까 한 인물이 아니요, 50년이나 백년마다 자꾸 나는 인물이라면 우리에게 왜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이 닥쳤겠는가? 문학에서 최인훈이나 박완서나 이청준이 10년마다 자꾸 두 사람씩, 세 사람씩 난다면 오늘날과 같은 표절 논란 같은 것이 중차대한 곤란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상황은 전혀 그럴 수가 없다. 빈곤이 풍부로 주장되고 얕음 속에서 심오함을 애써 찾아야 하는 곤란한 시대에 진짜는 주변부로 밀려나고 한촌의 고독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된다.이것이 지금 우리 문학의 상황이고, 이에 생각이 미치면 나는 이상과 고흐의 고독과 가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모두 무관심과 냉대와 오해 속에서 미친듯이 자기 예술을 추구하다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었다.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가치는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이상은 한국문학의 현대성을 가리키는 영원한 표지로 남을 것이며, 고흐의 그림은 인상파의 최량의 작품이자 가장 값비싼 그림으로 네덜란드의 이름을 빛내줄 것이다.작가 수업, 지금은 진정한 작가 수업이 시작될 수 있는 때다. 진짜 작가를 위한 시련의 빛이 대낮처럼 비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015-09-03

새 가을맞이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막바지 여름은 뜨거웠다. 위도는 변하지 않았건만 기후는 확실히 달라졌다. 장마철에 비 한 방울 보이지 않다 여름철 막바지 염천이 사람을 태웠다. 하지만 하루 비가 더위를 씻어간 오늘 아침, 갑자기 여름 가고 가을이 와 버렸다. 국회 도서관 가는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하늘은 맑고, 몇 점 구름은 사뿐하고, 여의도 빌딩들은 성큼 앞으로 다가서 있다. 여름 내내 나의 마음은 말 못 할 고통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쪽으로 흘러가고, 사람들은 비틀린 구조의 압력에 짓눌려 괴로워 했다. 밤이 길고 잠은 불안했다.어젯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불현듯 내 삶이 끝나는 순간이 떠올랐다. 사람이 숨이 멈추면 이 세상의 일들은 내가 어떻게 관여할 수 없게 된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요, 아무리 미련을 품어도 나는 죽은 자로, 과거의 사람으로 치부되고, 나 또한 아무런 생각도, 행위도 없는 적멸 세계로 돌아가고 만다.이렇게 생각하자 불 꺼진 방안이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벌떡 일어나 형광등 스위치를 눌러 방안을 환하게 밝혀놓고 보니, 아무 일도 없다.여전히 나는 이 세계의 일부분으로 존재하고, 그러면서도 그로부터 이탈되어 있는 듯한 밤의 적요. 여름의 뜨거움과 밤의 허무를 뒤로 하고 일주일만 지나면 생활의 리듬이 급박해질 것을, 당장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며 한강 다리를 건너 국회로 들어간다. 원고를 끝낼 자료를 찾으러다.얼마만이던가. 벌써 오래 이곳을 찾지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차로 오분 거리 지척인 것을, 근 일 년씩 여기 오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 분주한 나날들, 마음이 외부 세계를 향해 있던 나날들이었다.앗. 국회도서관 현관 앞에 커피 판매점이 생겼다. 열람 카드를 빼서 들어가려고 하니, 출입 제한 인물이 되었단다. 아뿔싸. 다시 한번 아이디, 비밀번호를 눌러도 역시 출입제한이다. 하는 수 없이 담당직원을 찾아가니, 지난번에 와서 열람카드를 반납을 안했단다. 낭패다. 그런데 고맙게도 열람카드 제작 비용 2천원만 내면 된단다. 이렇게 좋을 수가.드디어, 안으로 들어가자 정간물실은 4층이었던가, 5층이었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복사카드를 1층에서 사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다시 내려가 복사실을 찾자 이제는 열람카드만으로 어느 층에서든 복사비용을 충전해 넣을 수 있다 한다. 변했다. 오지 않던 사이에 편해졌다. 정간물실로 올라가 검색어로 자료를 찾고 열람카드로 출력을 하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다.국회를 빠져 나와 학교로 향하는데 아직도 오전이 많이 남아 있다. 좋다. 학교가 있고, 공부할 것이 있고, 학생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살아있고 세상의 희망도 끝난 게 아니다. 규장각 위에 차를 세우고 자하연 길 따라 올라오는데 철 모르는 매미는 따갑게 울고 여름을 견딘 나무는 녹음을 더욱 짙게 드리웠다.무엇을 할까, 천천히 걸어 오르며 생각한다. 어떻게 살까, 연구실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며 생각한다. 여름을, 지난 봄을 통과해 나오며 막막한 심정을 미처 다 끊어내지 못했다.지난 며칠 사이에 계속해서 마음 속에 맴도는 문제가 사실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 세계의 정치적인 일들로부터 한 단계 더 멀어져 보자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 세계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을 버리자는 게 아니요, 더 근본적으로, 깊이 생각하기 위해 현안들의 잡다한 움직임에 잠시 귀와 눈을 막고 내 안의 세계에 머물러 보자는 것이다.연구실 문을 열면서 나는 지금 이 문제를 생각한다. 이 세계의 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있는 것처럼 살아도 안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렇다면 나는 아무 것도 버린 것이 없을 테다. 이것이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다.

2015-08-27

평화음악회에 가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몇 달 전 일이다. 최동호 시인께서 화희 오페라단의 작은 음악회에 가자고 하셨다. 워낙 음악 쪽에 문외한인지라 오페라단 이름도 잘 모르지만 두 말 않고 갔다.서울의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성악가 몇 분을 모시고 가곡을 청해 듣는 자리였다. 가곡 듣기가 뜻밖에 재미가 있었지만, 더 재미있는 사건이 끝에 일어났다. 몇 달 후에 8월에 평화음악회라는 게 열리는데, 한 사람만 초대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날 한 열다섯 명쯤 참석해 있었는데 제비뽑기 당첨자가 뜻밖에 나였다. 당첨이라고는 어렸을 때 외할머니댁 가는 버스 안에서 카메라 파는 사람한테 번호를 불린 거 말고는 인연이 없던 나였다. 그때 카메라 살 돈이 있었을 리 없지만 이번에는 공짜 초대권을 준다니, 행운이라면 좋은 행운이었다.그러고는 잊었다. 하룻밤의 기분좋은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전화가 왔다. 초대권을 보낼텐데, 참석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음악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잊지 않고 확인해 주는 것이 고마워 참석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8월 16일이 왔다. 서울에는 비까지 내렸고 가곡회에 가는 심사는 썩 좋지 않았다. 외국의 유수한 성악가들이 내한하여 우리 가곡을 우리 가사 그대로 부른다는 것밖에, 그 평화음악회에 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광화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을 그 안에까지 들어가 보는 것도 실로 아주 오랜만이었다. 안쪽 홀에 강윤수 단장의 아름다운 자태가 보였지만 앞에 나서서 인사를 드리지는 못했다. 그날의 내 옷차림은 음악회에 온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탓이다. 며칠이라도 지나 전화나 문자로 고마움을 표현하기로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객석에 자리를 잡으니 비로소 마음이 음악회에 온 사람답게 되었다. 둘러보니 내가 앉은 VIP석에만 빈 자리가 조금 보일 뿐 1층 객석이 꽉 찬 성황이다. 나는 초대권 당첨 덕에 VIP 대우를 받게 된 것을 즐거워 하며 가곡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그런데, 이날 비로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장용이라는 사회자 분이 말씀하시기를, 남성 성악가가 노래를 잘 불렀을 때는 부라보를, 여성 가수일 때는 부라바를, 혼성에 대해서는 부라비를 외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처음에는 해주지 않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박수만 친 나였다. 그건 그렇고.처음 등장한 성악가는 스나가와 료코라는 일본 여자인데, 첫곡은 푸치니의`나비부인` 중의 노래 `어느 개인 날`이었다. 외국에서 초청한 가수라서 먼저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곡을 부르게 하고 우리 가곡을 이어 부르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날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가곡회의 막이 올랐다. 스나가와 씨의 맑고 절제된 연기는 남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가련한 일본 여인의 슬픔을 깊이 있게 표현해 주었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선구자`의 감동으로 연결되었다. 스나가와 씨가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은 가곡을 우리말 그대로 부르는데 나도 모르게 눈에서 짠 물이 흘렀다. 요즘 감상적이 되어서 그런지, 남성 호르몬이 격감해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목소리와 곡조의 아름다움이 선사한 감동 때문이었는지, 아무튼 나는 어두운 객석 조명 덕분에 창피함을 겨우 면할 수 있었다.나의 철부지 감동은 나중에 어느 외국 성악가가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는 때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우리 가곡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느끼며 8월 광복절의 기쁨을 눈물 속에서 음미할 수 있었다.가곡회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오자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우산은 없었다. 하지만 훌륭한 노래들을 들은 뒤다. 요즘 비는 건강에 좋지 않다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2015-08-20

비 오는 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비 오는 밤이다. 비 내리는 밤에 혼자서 이렇게 눈 뜨고 있으면 수많은 생각도 함께 내린다. 하늘을 긋고 떨어지는 유성우처럼 이 생각, 저 생각이 의식의 지평선에 떨어져 내린다. 며칠 전에는 대학 동창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친구는 암이 재발해서 5년 동안 투병을 했고, 처음 발병한 것은 서른여섯 살 때였다고 했다. 같은 고장에서 자라나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왔는데, 그토록 무심했던 것은 무슨 차가움이었을까. 친구는 큰 병을 앓는 중에도 모든 일을 꿋꿋이 치러냈다. 아이를 키우고 논문을 쓰고 취직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그 모든 삶의 과정을 지켜내려 했다.밤에 장례식장에서 선배와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대전 집으로 가려다 말고 대전역으로 향했다. 시간을 못 맞추는 바람에 포장마차에서 두 시간 넘게 기차를 기다렸다. 이 역을 돌아간 친구도 수없이 다녔을 것이었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대전역 앞 광장.친구야. 너무 서운해 하지 말아라. 나도, 다른 친구들도 다들 친구처럼 떠나게 될 테니. 걸어온 길이 멀다 보니 이제 더 갈 길은 멀지 않았구나.넓은 유리창을 때리는 밤의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삶의 근원에 다다르고 싶은 갈증을 느낀다. 하지만 지금껏 그러했듯이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그 근원이라는 것에는 영영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삶의 본질이 정치적인 것에 있다고, 또 예술은 곧 정치와 같은 것이라고들 누가 말했던가. 이런 단견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는 사람들은 철부지 젊은이이거나, 도가나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거나, 서양 이론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편견적 인간일 것이다.내 삶의 시작으로 돌아가보면 거기에는 정치가 없다. 나는 어머니의 탯줄로부터 떨어져 나와 앙앙 울면서 젖을 찾았을 것이다. 거기에 무슨 정치가 있었겠나. 오로지 이 지상의 시간을 지켜내야 한다는, 무목적적 목적만 존재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삶의 존재론적 차원일 것이다.태어나 보니, 본디 환상이나 환각일 수밖에 없는 세상이 나 자신을 맞아들여 그 환상, 환각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나라는 것을 만들고 나 아닌 것도 만들고, 가족이라는 것, 학교라는 것, 정치라는 것에도 관여해 나가지만 이 모든 것은 지어진 것, 구축된 것,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에는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빗방울이 유리창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 속에서 인터넷 다음에 뜬 연재 소설을 보다 한밤에 들어온 소식들을 본다.전방에서 지뢰가 터져 젊은 군인들이 몸이 상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매설한 목함지뢰가 터졌다고 한다. 팟캐스트 방송들에서는 무어라고들 하나. 폭발 영상을 놓고 의견들이 분분하다.의례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 정치 세계의 일들은 차라리 그 불확실성이 본질이라고 할 만하다. 진리값 대신에 세력의 강약과 형세의 유불리와 이용을 위한 효용을 따지는 영역에서 자명한 것은 없다. 다만, 그렇게 주장될 뿐이다.정치가 그런 것이 아닐 때가 있었을까. 역사를 더듬어 보니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조선시대에도, 신라 때도 방략은 진실을 이겨냈다. 사태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진실은 절실히 원해도 얻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일 뿐이다.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떤 삶을 만들어갈 것인가.제약된 삶의 시간의 틀 속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비가 내리는 밤에는 삶이 근원에 가까워진다. 한번쯤은 한밤의 빗소리 속에 잠겨볼 일이다.

2015-08-13

아름다운 학교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이번에도 결국 하자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가서 시 짓고 산문 쓰는 것을 도와준다는 일이, 내 처지에 바람직한가 생각하면서도 겨울에 본 아이들 얼굴이 눈에 밟혀 안 갈 수 없다고, 체념한 것이다. 말이 체념이지, 정작 길을 떠나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서울에서 장수, 몇 킬로나 되던가? 새벽 여섯 시에 출발해서 두 곳에 들러 함께 일할 사람들을 태우고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일곱시다.그런데, 계산에 넣지 못한 휴가철 차량 행렬. 보통 경부고속도로는 오산 정도까지 막히고, 좀 심하면 안성 정도인데, 천안 지나 대전 다 갈 때까지 차량 행렬이 거북이보다 빠른 정도. 결국 한 시가 넘어서야 장수에 당도했고, 아침, 점심밥이라고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핫바와 찐 감자가 고작, 시간을 아끼느라 허덕거린 때문이다.하지만 눈망울 또렷한 아이들을 보니 피로는 싹 가시고 의욕이 솟는다. 나이가 들수록 나태와 타락에 가까워지고, 젊을수록 순수에 가까우니, 역시 젊음은 노쇠를 가르친다. 잘 가꾼 운동장, 잔디밭, 육상 트랙, 교정 건너편에 늘어선 미류나무, 조회대 옆에 포도 넝쿨을 드리우고 있는 포도나무.좋다. 마음이 가뿐해지고 비워지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글이란 뭔지 얘기를 하고 시간 나는 사이에 교실 밖으로 나와 현관에 걸려 있는 것들을 무심코 구경하는데, 학교를 소개하는 간단한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느림보, 깔끔이, 겁쟁이, 다 함께 자라는 장수고! 잠시 이 표어에 시선을 고정시켜 본다. 멋진 표어다.지난 해 여름에도 나는 2, 3일씩 이 학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장수는 중심도로가 하나뿐인 작은 도시이고, 군청 같은 기관들이 있는 곳도 차량이 뜸하다. 잠시 시간이 비는 사이에 시내 구경을 하는데, 남자애와 여자애가 서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것이었다. 한눈에도 아이들은 학교에 잘 적응 못한 비적응, 비등교 학생들 같았다. 마치 어른들과는 어떤 교섭도 없이 자기들만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아이들.그런데, 저녁에 학교 선생님이 저녁 식사를 사주신다고 해서 따라나섰다 또 그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아주 스스럼없이 선생님 앞으로 와 인사를 하고 말을 붙였다. 선생님을 아주 살갑게 대하는, 머리에 물들인 아이들은 어쩐지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대하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나는 깊은 자애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밥집에서도 나는 이 학교 아이를 하나 만날 수 있었는데, 바로 그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과 아이가 즐겁게 인사를 주고받는 것을, 나는 속으로 신기하게 여겼다. 서울 같은 곳에서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를 학교 선생님이 만날 기회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 학교의 비결이 바로 이 표어에 담겨 있는 것 같다. 느림보, 깔끔이, 겁쟁이. 다들 학교에서 왕따 되기 쉽고 겉돌기 쉬운 유형의 아이들이다. 그런데, 다 함께 자라난다는 것이다.나는 새삼스럽게 이 표어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는 현관 벽들에 붙여 놓은 노란 페이퍼들을 돌아본다. 학교 백일장에 출품한 듯한 아이들의 작품들로 시도 있고, 산문도 있다. 이번에 나와 함께 글을 공부하는 아이들의 것도 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보고 사진도 찍는다. 슬픈 사건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정녕 어른들보다 깊다.나는 다시 교실로 돌아가 뒤 게시판에 붙여놓은 아이들의 생일 달력이며, 운동복 셔츠 널어놓은 것이며, 이것저것 버려놓은 쓰레기통이며 비뚤비뚤한 책상들을 본다. 그리고 지금 공강일 강사의 재미난 이야기에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본다.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간다. 하지만 다 같이 흘러가는 것 같다.

2015-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