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나오는 잡지 중에 `삶이 보이는 창`이라는 게 있다. 이름이 좋다. 뜻도 좋다. 일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을 잡지에 담아보겠다는 의욕을 바탕으로 출발했다. 지금 이 잡지에 관계하는 사람으로 내가 알고 있는 이는 황규관이라는 시인인데, 얼마 전에 새 시집을 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나는 이 잡지를 정기구독하는 사람의 하나가 되었지만 올 때마다 찾아볼 여유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시전문 잡지에 월평을 쓰는 관계로, 이 잡지에도 시는 있을 텐데, 하고 얇은 잡지를 후루룩 훑어보다 이해청이라는 필자가 쓴 글이 눈에 들어왔다. 신학의 관점에서 노동이라는 것을 해석한 것인데, 짧은 지면에도 폭넓은 생각이 담겨 있는 듯하여 반가웠다. 거기 글 중간에 이런 문장이 있다.
“노동이란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 포노스는 슬픔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일을 의미하는 라틴어 라보르 역시 고통이 수반되는 극도의 노력을 가리킨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노동 개념이 기독교 전통과는 달리 노동을 슬프고 힘든 고역의 관점에서만 일면적으로 보았음을 비판했다. 또, 기독교적 전통 속에서 인간의 필수불가결한 삶의 조건으로서 신에게서 부여받은 노동에 관한 생각이, 근대에 접어들면서 단지 의무요 복종에 지나지 않게 되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전혀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적 노동 역시 그리스적, 로마적 노동의 함의에 근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일이라는 것이 노예적인 슬픔에서 벗어나 자기를 실현하는 창조적 도구 노릇을 할 수 있게 될까?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을 유적 노동에서 찾았고, 이 노동의 소외로부터 현대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를 발견한 것으로 믿었다. 엥겔스도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노동이 한 역할을 논의하는 가운데 그것을 인간 삶의 근본적 조건으로, 그것도 유일무이한 원천으로 취급했다.
현대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달랐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크게 셋으로 나누었는데, 그 첫째가 노동이요, 둘째가 작업이요, 셋째는 정치, 곧 공적 의사소통 행위였다. 우리 말로 써 놓으면 노동이나 작업이나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두 가지 행위가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녀의 구별법에서, 노동은 소비, 소모시키기 위해 만드는 행위를 가리키며, 작업은 예술창작 행위처럼 남기고,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미하기 위한 일이다. 앞에서 말한 글쓴이는 그래서 한나 아렌트의 노동 개념이 그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시사한다.
사실, 이런 부류법에 따르면 노동은 작업에 미치지 못하는 하류의, 열등한 생산행위밖에 되지 못하며, 필연적으로 우울하고 무겁고 슬픈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사자가 얼룩말의 목덜미를 깨물려 달려갈 때의 희열, 소가 풀을 뜯기 위해 풀밭을 찾아갈 때의 희열은 인간에게는 어디로 배분되었는가를 묻고 싶다. 사자나 소나 모두 생명 작용을 영위하기 위해, 즉 하루를, 일생을 소비하기 위해 그들의 `일`을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먹이를 찾는 과정은 오로지 고통일 따름이겠는지?
현대에 와서 사자나 소의 `일`이 가진 직접성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먹이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의 욕망을, 먹이를 충족시켜 주고 조달해 주어야 한다. 자신의 생명을 영위해 줄 재화가 오로지 간접적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시대에 노동은 본래의 기쁜 빛을 잃고 잿빛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되기 쉽다.
그래서 말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노동, 즉 인간적인 `일`이 지닌 보람과 기쁨을 되새길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노동의 대가로 돌아오는 돈이 적어서만 슬프고 괴로워지는 게 아니다. 자신의 노동의 의미와 가치가 홀대받고 무시되는데서 사람은 더 큰 고통을 느낀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함께 사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로부터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노동이 내 노동과 어떤 의미에서든 `등가적`일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공생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