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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문학은 사회를 어떻게 추방했나

등록일 2015-10-15 02:01 게재일 2015-10-1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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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br /><br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독자들은 눈이 밝지만은 않다. 그들은 소설을 여러가지 이유로 선택한다. 때로 거기 적혀 있는 이상 때문에 좋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그 이야기가 재미있고 새롭기 때문에 좋아한다. 또 반대로 그들은 이야기가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앎에 기대고 있어서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떤 소설가가 독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작가의 의미나 가치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변덕스러운 대중적 독자들의 힘은 작지 않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다야마 가타이가 `이불`이라는 짧은 장편소설을 쓰던 때를 생각해 본다. 문학사에서 이 소설은 일본 문단의 구도를 단숨에 바꾸어 놓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나카무라 미쓰오라는 비평가는 이 작품이 일본 문학에 새 바람을 가져온 이유는 작품이 심오해서도 아니고 문체나 묘사 따위가 전작들과 달리 대단히 좋아서도 아니다.

작가는 오스트리아 극작가 하우프트만이 쓴 희곡 `외로운 사람들`의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기도 그런 감동적인 얘기를 쓰자고 생각하며 소재를 궁리했다. 그러다 자기 얘기를 떠올렸다. 자기에게 소설을 배우러 온 여학생을 그는 짝사랑했고 다른 남학생을 사귀는 것을 질투하다 파문해 버렸다. 자기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 고백적인 태도에 독자들은 열광했고,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이야기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상적으로 더 심오하게 써도 독자들은 시큰둥해 하며 더 부끄럽고 추악한 이야기를, 따라서 더 `진실`해 보이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1990년대 중반경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문제적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 또는 사회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소설은 대중의 관심사 뒤로 밀려났다. 그러한 주제에 가까운 것으로서 단 하나 살아남은 것은 운동권 후일담 소설이나 시,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질문을 멈추고 그러한 질문 속에서 살고 있던 자기를 회고적으로 되돌아보는 소설뿐이었다.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장편소설 `외딴방`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유형의 작품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세계 또는 사회의 복잡다단한 전개는 작중의 흐릿한 배경으로 물러나고 전면에 나서는 것은 작중 주인공의 상실감, 고통, 외로움 같은, 남은 감정이다. 이 감정이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이들 작품이 말하고 있듯이 이제 세계는 출구가 없이, 부조리한 현재가 계속될 것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 무렵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이 대규모로 꾸준히 팔리며 큰 인기를 끌고 그 스타일을 흉내내는 작가들도 급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아주 좋은 경우에나 사상가에 가까워질 뿐 많은 경우에는 그것을 팔아 생계를 잇고 재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자연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단 사회성을 뒤로 물린 작품들이 득세하는 물고가 풀리게 되자 그 다음에는 쉬웠다. 이제는 이상을 품고 고투하는, 상처투성이 인간을 연기하지 않아도 독자들은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소설적 주인공은 자기 아픔이나 비밀에 절어 있어도 되었고, 심지어는 감각이나 정서만 새롭게 보여도 좋았다. 그런 흐릿한 흔적이나 편린만 있어도 머리 좋은 비평가들이 떠들썩하게 그 의미를 해석, 제공해 드렸기 때문이다. 비평은 바야흐로 창작의 시녀로 전락했다.

2000년대는 그러니까 사회성을 안 가진 것처럼 꾸미고, 사회적인 문제 같은 것은 차라리 경원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가 세련된 것처럼 간주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사회성은 공지영처럼 사회적 문제를 소재적으로, 그리고 멜로물의 플롯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전담물이 되었다. 사회를 매개로 한 인간 탐구가 매개적일수록, 흐릿할수록, 암시만 하고 넘어갈수록 문학적인 작품으로 간주되는 풍토가 지배하면서 문학판은 마침내 세련된 장식들의 진열장처럼 변했다. 사회를 본격적으로,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이들은 문단에서 사라졌다. 아주 당연한 일인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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