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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씨의 `표절 판정과 작품성`에 관하여

등록일 2015-11-12 02:01 게재일 2015-11-1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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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br /><br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사전을 보면 `얼룩`이라는 말은 두 개의 뜻을 가진다. 하나는 “본바탕에 다른 빛깔의 점이나 줄 따위가 뚜렷하게 섞인 자국”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액체 따위가 묻거나 스며들어서 더러워진 자국”을 의미한다. 물론 두 번째 의미는 첫 번째 의미에서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얼룩`이라는 말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이 두 번째 의미 때문에 결코 편치 않다. 누군가에게 얼룩이 묻었다고 하면 그것은 순수하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 저 사람은 얼룩덜룩하다고 하면 참 불투명한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처음에 장정일 씨가 한국일보에 `문학의 `얼룩``이라는 짧은 글을 발표했을 때, 그는 “문학에 표절이라는 얼룩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믿는 글쓰기의 순수주의자들”을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그 글 뒤에서도 그는 김영하 씨의 소설 `옥수수와 나`를 들어 “창작이 먼저고 표절이 그 뒤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표절이 먼저고 창작이 그 뒤를 따른다”고 씀으로써, 모든 창작은 “표절이라는 얼룩”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고, 문학을 그렇게 순수한 것으로 보지 말 것을 주장했다.

한겨레신문에 쓴 `표절 판정과 작품성`에서는 입장이 달라졌다. 아마도 여러 사정상 예의 그 `얼룩`론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글쓰기는 표층과 심층을 갖는다”고 하였고, “글쓰기의 심층은 `문학의 얼룩`”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표층은 표절에 관계하는 것으로 분리시켰다. 자신의 논리적 허점을 고육지계로 넘어서려 한 것이다.

앞서의 “표절이라는 얼룩”이라는 등식을 해체함으로써 그는 마치 자신이 먼저 쓴 글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사실은 그렇지 못함을, 그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새로운 글에서 “문학의 얼룩은 얼룩송아지의 얼룩처럼 더러운 것도 아니요,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얼룩이 얼룩송아지의 고유성이듯 문학의 얼룩 역시 그러하며, 창작은 거기서 시작된다.”라고 쓰고 있다. 이는 그가 처음의 글에서 사용한 `얼룩`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 범주에서 첫 번째 의미 범주로 슬그머니 이동해 버린 것이다. 그가 비판한 사람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말이다. 처음 쓴 글에서 그는 분명 `얼룩`을 더러운 것으로 보는 용법으로 말했다. 이제 얼룩은 얼룩송아지의 얼룩처럼 순결한 것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을 나는 심하게 탓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이란, 문학하는 사람도 언제나 자기모순이 있게 마련이고 나 또한 그런 논리의 허점을 무수히 지나쳐 오늘에 이르렀다. 비록 논쟁적 글에서는 흔쾌히 인정하지 않게 되더라도 입장이 달라지면 그것대로 진척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자신이 그런대로 무난하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수정한 바탕 위에서 방민호의 `연인 심청`에 대한 비판을 새로운 언어로 계속한다.

“이 작품은 빌려온 얼룩과 고투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의 글에서도 그는 이 작품을 “원본에 대한 작가의 투혼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고 했는데 이 점에서만은 그래도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그를 김소월, 서정주, 김수영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는데, 이번에는 이 작품이 “자발적으로 효 이데올로기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더욱 조악하고 시대착오적이다”라고 혹평을 가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아직도 소설가 장정일 씨가 감각을 갖춘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비평가로 성장하기에는 아직 먼 것 같다. 어떤 책에 비평을 가하려면 일단 그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이라도 읽어 보아야 하는 것을. 내가 알기로 여러 `보통` 독자들은 그 작품을 가리켜 효를 반복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장정일 씨는 그렇게 볼 수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처럼, 그도 와인이 좋은지 안 좋은지는 한 모금만 마시고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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