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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문학의 문제를 생각하는 법

등록일 2015-10-01 02:01 게재일 2015-10-0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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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표절이다, 문학권력이 문제다, 문학계가 아직도 조용하지 않다. 한 작가의 비판적 `고발`에서 출발한 사건이 문학 권력 문제로 비화되어 문학에 카르텔 메커니즘이 있다든가, 문학상 등 문학 제도 자체가 소수의 문학주체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말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이를 둘러싼 토론과 공방이 간헐적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런 논란들에 대해 내가 아예 무관심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특히 문학권력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문학인 가운데 전혀 힘이 없는 사람, 즉 발표지면을 전혀 가질 수 없는 사람은 적기 때문에 문단의 권력 집중이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적 관건은 되지 못한다고 썼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만의 태도가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전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이 벌어졌을 때 이미 공표한 것이기도 하다. 그때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나와 문학 경향 면에서나 개인적 관계 면에서 비교적 가깝다고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입장이 그들과 나의 관계를 다소 소원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문제에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본질에는 권력 문제와는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지금 우리 문학의 지배적 구조는 적어도 1990년대 전반기로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91년에는 아직도 소련 체제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한국의 지식계에는 이 거대국가 역시 제국주의 국가임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며, 특히 이른바 진보파 가운데에서는 그런 사람은 희귀종이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지식계의 구조는 물론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적 개혁이나 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문학인들은 일부에서 깊은 연대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소련, 중국, 북한 등을 일종의 진보적 국가로 착각하는 현상이 만연되어 있었고, 지금도 이는 불식되지 않았다. 1991년 사태는 그런 한국문학의 인식 구조를 붕괴시켰다. 소련의 붕괴는 자본주의 이후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마르크스의 잘 알려진 도식을 `파산시켰으며`, 이 경험적 `진실`은 이 땅에서 진정한 문학은 더 이상 현실 사회주의의 존재 가능성에 미련을 두는 방식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공리가 단기간 내에 자리를 잡았다. 자본주의 다음의 미래는 없다는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론이 문학에 대입되면, 그것은, 이제부터 문학은 미래로의 출구가 닫힌 세계 안에서 본질적으로`유희`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투쟁 대신에 유희, 혁명 대신에 허무, 진정성 대신에 포즈가, 거대담론 대신에 미시적 일상성 담론이 이제 문학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또 문학은 미래로 향하는 비전을 제시하는 대신에 닫힌 세계를 사는 사람들을 위한 위안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시대의 정치경제학적 담론 표현이 신자유주의이며, 문학동네, 문지, 창비의 카르텔 구조는 바로 이 체제의 문학적 상부구조였다. 미래가 의심받고, 진실이나 진리란 단지 권력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고하는 새로운 시대에 이 카르텔 구조는 성공적으로 장착되었다. 창비나 문지는 이전 시대에 형성된 권위를 가졌지만 새로운 동력을 확보한 문학동네와 협동함으로써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 삼자 결탁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이 `1990년 체제`의 정치경제학적 기초가 장기지속적으로 공고했던 때문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메커니즘에 합류하지 않았거나 못한 문학인들이 꽤나 무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지속된 20여년 동안 한국문학은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우리 문학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문학은 무엇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이 문제를 숙고하고 싶다. 표절이니 권력이니 하는 문제는 그 표면의 일일 뿐, 문학의 본질적 측면이 될 수 없다. 생각의 방향을 돌릴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문학이 직면한 상황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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