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관에서 보았던 그의 마지막 사진이 인상 깊다. 상하이에서였을 것이고, 그의 임종 사진이었다. 그는 아주 마른 얼굴의 병인이 되어 막 숨을 거둔 상태였다. 육십 세도 안 된 많지 않은 나이에, 숱한 일을 하다 말고, 그렇게 세상을 떠난 그의 모습은 몹시 숭고해 보였다. 그 앞에서 인생이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 년 전에 나는 루쉰과 소세키를 비교한 저술을 하나 접했었다. 두 사람 문학의 상위점을 각 나라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부터 설명하고 있는 책이었다. 그에 따르면 소세키는 서구를 수용하고 모방하는데 급급했던 당대 일본문학인, 지식인들의 체질에 대한 거리두기로서 일본적 전통을 의식하는 글쓰기로 나아갔다. 반면, 루쉰은 근대적으로 뒤떨어졌음에도 완고한 자기 중심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중국적 상황을 깨뜨리기 위해 강렬한 자기 부정 의식에 기반한 문학으로 나아갔다.
탁견은 탁견이다. 오늘 다시 루쉰의 `아큐정전`을 가지고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된다.
무엇보다, 루쉰은 중국적인 전통을 강렬히 의식하면서도 그 태내로부터 `완전히`새로운 소설 양식을 끌어낸 혁명적 실험의식의 소유자였다. 그가 아큐 이야기를 정전으로 부르고자 하면서 열거하는 전기의 종류들, 열전, 자전, 내전, 외전, 별전, 가전, 소전 등과 그 예거들은 그가 자국의 문학적 전통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낡은 것, 오래된 것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했음을 깊이 깨닫게 한다.
한편으로, 그는 독특한 유형의 계몽가였다. 일본의 소세키에 있어 계몽은 부차적 효과일지언정 소설적 목표는 아니었다. 루쉰은 계몽적 소설임에 틀림없으나 속류적 계몽과는 거리가 있어, 계몽되어야 할 자에 대한 근원적 연민을 품고 있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작중 아큐의 운명에 대해서도 냉정한 거리를 둔 것처럼 가장할 수 있었다.
`아큐정전`은 과연 무엇에 관한 소설이었을까? 작중에 “하지만 우리의 아큐는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영원히 득의만만했다. 이것은 어쩌면 중국의 정신문명이 전세계 으뜸이라는 증거인지도 모르겠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은 이른바 중국인의 `정신승리법`에 관한 알레고리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자신이 경험한 시대적 격변, 즉 1911년 신해혁명부터 1919년 5·4운동까지의 민중의 의식 현실을 그리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시대가 근저로부터 뒤흔들리고 있는데도 이를 자각하지 못한 채 혼몽한 정신으로 시대의 수동적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민중의 의식 현실을 그려낸 것이다.
어떤 계기로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며 나는 2005년부터 최근에 이르는 한국 현실의 전개와 그 시대에 처한 민중들의 의식 현실을 생각했다. 세상에는 참으로 아큐들이 많다. 세상의 고통은 하늘을 찌르고 땅을 요동치게 하건만 아큐는 태평하다. 정신승리법으로 현실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므로. 지옥도 천국이 되는 것이 바로 아큐식 정신승리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