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일이다. 최동호 시인께서 화희 오페라단의 작은 음악회에 가자고 하셨다.
워낙 음악 쪽에 문외한인지라 오페라단 이름도 잘 모르지만 두 말 않고 갔다.
서울의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성악가 몇 분을 모시고 가곡을 청해 듣는 자리였다. 가곡 듣기가 뜻밖에 재미가 있었지만, 더 재미있는 사건이 끝에 일어났다. 몇 달 후에 8월에 평화음악회라는 게 열리는데, 한 사람만 초대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날 한 열다섯 명쯤 참석해 있었는데 제비뽑기 당첨자가 뜻밖에 나였다. 당첨이라고는 어렸을 때 외할머니댁 가는 버스 안에서 카메라 파는 사람한테 번호를 불린 거 말고는 인연이 없던 나였다. 그때 카메라 살 돈이 있었을 리 없지만 이번에는 공짜 초대권을 준다니, 행운이라면 좋은 행운이었다.
그러고는 잊었다. 하룻밤의 기분좋은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전화가 왔다. 초대권을 보낼텐데, 참석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음악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잊지 않고 확인해 주는 것이 고마워 참석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8월 16일이 왔다. 서울에는 비까지 내렸고 가곡회에 가는 심사는 썩 좋지 않았다. 외국의 유수한 성악가들이 내한하여 우리 가곡을 우리 가사 그대로 부른다는 것밖에, 그 평화음악회에 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광화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을 그 안에까지 들어가 보는 것도 실로 아주 오랜만이었다. 안쪽 홀에 강윤수 단장의 아름다운 자태가 보였지만 앞에 나서서 인사를 드리지는 못했다. 그날의 내 옷차림은 음악회에 온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탓이다. 며칠이라도 지나 전화나 문자로 고마움을 표현하기로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객석에 자리를 잡으니 비로소 마음이 음악회에 온 사람답게 되었다. 둘러보니 내가 앉은 VIP석에만 빈 자리가 조금 보일 뿐 1층 객석이 꽉 찬 성황이다. 나는 초대권 당첨 덕에 VIP 대우를 받게 된 것을 즐거워 하며 가곡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날 비로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장용이라는 사회자 분이 말씀하시기를, 남성 성악가가 노래를 잘 불렀을 때는 부라보를, 여성 가수일 때는 부라바를, 혼성에 대해서는 부라비를 외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처음에는 해주지 않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박수만 친 나였다. 그건 그렇고.
처음 등장한 성악가는 스나가와 료코라는 일본 여자인데, 첫곡은 푸치니의`나비부인` 중의 노래 `어느 개인 날`이었다. 외국에서 초청한 가수라서 먼저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곡을 부르게 하고 우리 가곡을 이어 부르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날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가곡회의 막이 올랐다. 스나가와 씨의 맑고 절제된 연기는 남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가련한 일본 여인의 슬픔을 깊이 있게 표현해 주었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선구자`의 감동으로 연결되었다. 스나가와 씨가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은 가곡을 우리말 그대로 부르는데 나도 모르게 눈에서 짠 물이 흘렀다. 요즘 감상적이 되어서 그런지, 남성 호르몬이 격감해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목소리와 곡조의 아름다움이 선사한 감동 때문이었는지, 아무튼 나는 어두운 객석 조명 덕분에 창피함을 겨우 면할 수 있었다.
나의 철부지 감동은 나중에 어느 외국 성악가가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는 때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우리 가곡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느끼며 8월 광복절의 기쁨을 눈물 속에서 음미할 수 있었다.
가곡회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오자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우산은 없었다. 하지만 훌륭한 노래들을 들은 뒤다. 요즘 비는 건강에 좋지 않다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