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정일씨에게 절대로 대꾸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나쁜 종류의 비평가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비평하려는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아주 잘 판단한 듯이 말하며, 어떤 작품이든 미리 자신이 의도한 바를 위해 어떻게라도 써먹을 태세가 되어 있다. 또 그런 비평가는 자신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아무 근거도 없이 말해도 독자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그런 나쁜 비평가들은 작가가 작품의 앞이나 뒤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 겸양의 뜻을 표하거나 무지를 가장한 문장을 써놓은 것을 근거로 잡아 그 작가를 무참히 구석으로 몬다. 설마 대작가 장정일씨가 그런 비평가일 리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무슨 반박이며 대꾸가 필요하겠는가. 나는 단지 그가 고맙게도 작가로 인정해 준 방민호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문학의 얼룩이라고 이야기한 문제에 관해서만 내 생각을 표명해 보려 한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그가 불러내 준 작가 방민호는, 그가 예상한 그대로, 근거 없는 비난을 견디는 데는 충분히 강해서 그다지 상처받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새로울 게 없다. 말하자면 그는 하늘 아래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쓴다. “문학은 자기 자신 안에 얼룩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가 문학의 상호텍스트성이라고 부르면 될 것을 굳이 `얼룩`이라 했는지 궁금하다. 그는 아마도 “문학은 백짓장에 그리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려진 것 위에 덧그리는 것이고, 그렇게 자꾸 얼룩을 내는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싶었는가 보다. 그러나 그렇게 뉘앙스를 주어 말하기는 했지만, 그 얼룩이 뭔가 하고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그것은 `영향·모방·패러디·패스티시·인용·인유 등의 심급이나 기법`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남들이 상호텍스트성이라 부른 것을 마치 대단한 발견인 양 `얼룩`이라는 말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포장에는 의도가 있다. 문학이란 원래 그렇게 더러운 것이 묻어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이 더러운 마당에서 누가 특별히 표절했다고 소리칠 것도 없고, 그냥 서로의 얼룩이나 보고 있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설마, 대비평가 장정일씨가 그렇게 말했을 리 있을까? 나도 그가 그런 결론을 내고 싶어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남 비난하는데 몰두하지 말고 문학의 존재 조건을 한번 더 성찰해 보자는 뜻으로, 그렇게 먼 길을 돌아 표현했을 수도 있다. 오로지 신출나기 작가 방민호에게 대해서만은 아주 예외적으로, 직접적인 비난을 서슴치 않으면서 말이다. 누가 뭐라고 했던가요? 문학은 예로부터 앞선 것을 의식하고 앞선 것을 전범으로 삼거나 뛰어넘으려 한다는 것을 누가 부정한 적이 감히 있었던가요? `아무도`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 것을 마치 전부들 순백색을 치장하고 있는 듯 비난함으로써 장정일씨는 무슨 효과를 얻으려, 의도했던 걸까? 한국일보라는 문제적 신문에 실린 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열쪽짜리 글을 보며 나는 이 글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지 생각하다, 아하, 하고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그럼으로써 장정일씨는 신경숙씨와 창비에게 그 자신이 발명한 `얼룩`표 면죄부를 발부한 것이다. 나 또한 그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표절 자체가 문제라고는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한국문학, 아니 자기 자신의 문학만이라도, 과연 무엇을 말하고 써야 하는지가, 도대체가 불분명한 이 상황, 그런데도 아무 것도 새롭게 생각할 것도 없는 것 같은 이 상황,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얼룩일 것이라고, 그에 의해 얼룩이 많이 묻은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