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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수업

등록일 2015-09-03 02:01 게재일 2015-09-0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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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br /><br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문단에서 아직 표절 문제가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창비의 백낙청 선생이 의견을 표명했지만 석연찮다고도 하고 문학동네는 편집위원과 대표가 물러난다고도 한다.

누가 어떤 작품을 어떻게 표절했느냐, 베껴 쓰고도 감췄느냐 하는 문제는 창조성의 진정성 여부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작가적 양식에 관한 물음이기도 해서 절대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표절 문제가 표면으로 부상되는 순간, 즉각적으로 현대 작가의 자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냐가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한국의 현대문학에 대한 여러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현대작가는 결코 황무지 위에 서 있는 존재도 아니고, 백지 위에 처음으로 인생의 형상을 그리는 존재도 아니다. 그는 너무 많이, 오랫동안 그려온 종이 위에 그 자신의 그림을 그리게 되며, 따라서 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자기보다 앞서 그린 사람들의 작품을 참조하게 된다.

현대작가가 주장할 수 있는 새로움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새로움이 아니요, 유 위에 그 유를 포함하거나 참고한 새로운 유를 만드는 새로움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표절 문제는 단순히 남의 것을 베껴썼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가 아니요, 유에서 또 다른 새로운 유를 창조해 나감에 있어 얼마나 진정한 자기 몫을 깊이 있게 만들어냈느냐 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의 것을 참조하고 들여온 것,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는 가운데 그 남의 것에 없던 것이 얼마나 값있게 만들어졌느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지금의 표절을 이런저런 형태로 변론해 주고 있는 이들과 나의 입장은 같지 않다. 이 참조와 창조의 긴장 면에서 지난 15년 넘는 문학사의 시간은 결코 그 화려함만큼 심오하지는 못했으며 지성 대신에 감각을 주장하며 문학만이 제공할 수 있는 통찰이나 성찰 능력을 퇴행적으로 이끈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과정의 주역들이 문학적 진정성과 권위까지 아울러 독점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지난 시간의 부조리이자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한국의 작가들과 출판사들이 단 시간 내에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앞에 놓고 나는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왜냐? 문학사든, 다른 일반적인 역사든 시간은 인간들에게 공평한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이 500년마다 하나 날까 말까 한 인물이 아니요, 50년이나 백년마다 자꾸 나는 인물이라면 우리에게 왜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이 닥쳤겠는가? 문학에서 최인훈이나 박완서나 이청준이 10년마다 자꾸 두 사람씩, 세 사람씩 난다면 오늘날과 같은 표절 논란 같은 것이 중차대한 곤란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상황은 전혀 그럴 수가 없다. 빈곤이 풍부로 주장되고 얕음 속에서 심오함을 애써 찾아야 하는 곤란한 시대에 진짜는 주변부로 밀려나고 한촌의 고독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지금 우리 문학의 상황이고, 이에 생각이 미치면 나는 이상과 고흐의 고독과 가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모두 무관심과 냉대와 오해 속에서 미친듯이 자기 예술을 추구하다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가치는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이상은 한국문학의 현대성을 가리키는 영원한 표지로 남을 것이며, 고흐의 그림은 인상파의 최량의 작품이자 가장 값비싼 그림으로 네덜란드의 이름을 빛내줄 것이다.

작가 수업, 지금은 진정한 작가 수업이 시작될 수 있는 때다. 진짜 작가를 위한 시련의 빛이 대낮처럼 비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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