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서울, 2015년 겨울

등록일 2015-12-10 02:01 게재일 2015-12-10 19면
스크랩버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요즘 방송이나 신문들은 서민들, 일반 백성들, 아랫동네 사는 사람들 일을 얼마나 알려주고 있나? `응답하라 1988`같은 데 말고 뉴스나 다큐멘터리나 르포 같은 것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 말이다.

종합편성 채널이 그렇게 많아도 다양한 계층, 지역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려줄 수 있는 것은 못되는 것도 같다. 그것은 수량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과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난 5일 우연찮게 종각 쪽에 서 있다 사람들이 열을 지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과연 장관이었다. 나는 길디긴 행렬에 놀라 도대체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한 마디로 말해 한도 끝도 없이 길었다. 5만명이라는 숫자가 이렇게 많은 건가 생각하며, 그러면 옛날에 10만 양병설이니 20만 대군이니 하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많았던 거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중국이랑 맺은 FTA 협정이라는 게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농민들이 서울로 잔뜩 올라와서 꽹과리에 북에 장구를 치고, 농민가를 부르며 행렬을 만들고 있었다. 역사 교과서라는 게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나는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어떤 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없었는데, 사람들은 국정 교과서는 안된다는 피켓을 들고 있기도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높은 건물 전광판 위에 올라가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달라고 한 것이 하루이틀의 일은 아니지만, 노동자니 노동조합이니 하는 이름을 단 단체는 또 왜 이렇게 깃발이 많은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또 있다. 웬 이상하고 기괴하고 웃기기도 하고 앙증맞기도 한 가면들을 복면이랍시고 쓰고 나온 일군의 광대놀음하는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포즈를 취해주며 지나갔는데, 그들은 무슨 피켓을 들고 있는지 보니, 예술 검열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밤에도 노란 색은 잘 보이기 때문일까. 아니, 배가 바다에 빠져 학생들이 희생된 게 언제인데 지금도 사람들 행렬 안에 진상이 어떻느니, 해결이 어떻느니 하는 글귀도 보이기도 했다.

대학원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논문을 써 와서 발표를 하는데, 뭐라고 썼느냐면, 1970년대는 아픔과 격동의 시대였다고 써 놓았다. 학생이 발표문을 다 읽고 나서 내가 말했다. 세상에 아프지 않던 시대가, 격동하지 않던 시대가 있더냐고. 감정과 감각의 어휘, 문장을 누르고 논리적으로, 분석적으로 써나가야 한다고. 공부하는 글에서 파토스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분명히 1970년대는 서민들,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오늘도 다를 바 없다. 오늘 인터넷 다음 포털에 가계부채가 170조가 늘었다는 뉴스가 난 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역시 신문방송이 이런 사실은 전해주는구나 했다.

단,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백억, 천억, 하고 나면 조단위가 시작되나? 아무튼 큰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 인구가 자그마치 5천141만명이 넘는다. 국민들이 조금씩 나눠 짊어지면 못 감당할 것도 없을 테다. 하지만 이 길디긴 사람들 행렬을 보면 세상 살아가는 일이 편치만은 않은 것 같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춥고 배고프고 피로들 한 것 같다. 윗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이 사람들이 이렇게 추운 날에 나와서 뭔가를 얘기하고 싶어 한다면 누군가 이 소리를 듣고 전해주고 또는 원하는 것에 십분지일이라도 되도록 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보는 사이에도 사람들은 끝없이 흘러간다.

그 숱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많이 보던 사람이 튀어나와 인사를 한다. 누군가? 허, 대학 후배다. 여러 해 못 보던 친군데, 행색도 멀쩡한데, 뭘 여기까지? 대학 때 세상 일에 별 관심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랬거나 말았거나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때 옛 사람을 만나는 일은 좋다. 반갑다. 웃으며 악수를 하고 그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또 행렬 속으로 들어간다.

서울의 어두운 저녁이다. 12월 5일이다.

방민호칼럼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