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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을 하나로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삶이 덧없이 흐르는 듯해서 일기도 가끔 써보지만 그때뿐이요, 곧 쉽게 쓰고 흘려보내는 나날이다. 어느 것 하나에 집중만 할 수 있다면, 자기의 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하루 24시간. 그러나 나이 들수록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하듯, 하루 종일 뭐 했는지 모르는 시간이 이어진다.어제? 아침 일찍 두통을 안고 학교로 향했다. 집을 나와 차를 둔 곳이라고 생각한 쪽으로 가보았으나 없다. 어딨지? 하다가 지하 3층 주차장이 아니라 지상이었음을 문득 깨닫는다.운전석에 안고 보니, 커피를 또 뽑아놓고 맨손으로, 머리맡에 한강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를 3장까지 읽다 만 것도 그냥 두고 나왔다.하는 수 없이 다 포기하고 학교로 향하다 동생에게 집안 일과 관련 상의할 것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마침 차는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치는 중, 일찍 출근하는 동생 얼굴을 잠깐 본다.차가 밀려선지 학교까지 근 한 시간. 요즘에는 가자마자 컴퓨터 인터넷부터 열고 서류 처리부터 해야 한다. 며칠 전부터 도쿄에 가 있는 학생과 미국에서 연구년으로 와 있는 영문학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보낸다 하고는 그대로다. 급한 결재부터 하고, 오늘은 기어코 한강론을 진척을 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그 문젠 어떻게 되었더라? 하고 생각이 옆으로 흐른다. 한 달을 두고 골치 아프게 만드는 일이 있다.전화 한 통 하고 옆방에 계신 선생님과 만나 이것저것 상의하고 나자 바로 열한 시면 회의다. 무슨 자료 목록을 조사하고 관련된 책도 내고 학술대회도 만드는 일인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이 세 가지를 다 해치워야 한다.회의는 꼬박 한 시간 걸렸다. 혼자 같으면 그냥 연구실로 돌아가 책상 앞에 앉겠는데, 회의를 함께 한 학생이 있다.`하는 수 없이` 식당으로 간다.이제 네 시면 수업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서 `동물 되기`에 관한 장을 확인해야 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나무 되기`, 즉 `식물 되기`인데, 이것을 분석해 보이려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그 책이 필요하다.갈 길이 멀다. 시간은 없다. 내 생각에,`채식주의자`는 `나무 되기`만 아니라 `새 되기`도 숨어 있고, 이는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한 적 있는 작가의 이력과 관련되어 있다. `새 되기`는 이상 소설 `날개`의 변신 모티프이고 이에 관해서 논의한 것도 있다. 많은 것을 짜맞추어야 하건만 시간은 바쁘게 흐르고 수업 시간이 닥친다. 마침 이상의 `날개`를 말해야 하는 시간이다. 수업이 끝나고나자 오후가 다 가버렸다. `천 개의 고원`에 밑줄 긋는 사이에, 오늘 밤에 있을 콘서트 일이 떠오른다. 강윤수 단장 화희오페라단의 제4회 평화음악회가 롯데 콘서트홀에서 있게 된다. 작년에 아주 좋았었기 때문에 올해도 꼭 가고 싶지만 밀린 일들로 마음이 부산스럽다. 최동호 선생님의 시 `문득 생각나는 사람`에 곡을 붙여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는데.잠실의 새 롯데월드는 멀다. 한 시간 걸려 가는 사이에 나는 한강 소설 생각에, 연구 프로젝트에 학과 일까지, 그리고 소설을 쓰려는 것에 은행에 대출한 것, 다음날 있을 학교 수업 준비에 낭독회 준비까지, 어지럽게 뒤얽힌 일들을 가닥가닥 짚어본다. 두통이다. 그러고 보니 5년 넘게 매일 먹어야 할 고혈압 약을 오늘도 놓쳤다. 벌써 사흘째. 먹어야 한다고 생각만 하고 매번 잊는 약이다.어렸을 때는 집중력이 좋았다. 일단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복잡하지도 않았다. 하고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안 되어서 그런지 하루 종일 그 일만 생각하고 신경을 썼다.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마음이 흐트러지는 단계를 넘어 흩어져버릴 것 같다. 어제는 뭘 했더라? 하고 생각하면 크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마음을 하나로.오늘을 살며 생각하는 한 가지 목표다.

2016-10-13

숨은 벽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두어 주 전에, 오래간만에 북한산에 갔던 일을 생각한다. 그날 백석파 시인들과 함께 몇 달만에 북한산으로 향했던 것이다. 백석파라니 이 무슨 조직이란 말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우연히 최동호 시인 제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다들 백석의 시를 좋아하고 연구까지 한 것을 알게 됐다.즉석에서 우리, 백석파를 결성하자, 자격 요건은 백석에 관한 것을 뭐라도 쓴 사람이면 되고, 산을 좋아해야 하고, 그 표식으로 주머니 속에 흰 돌 하나씩 넣어 가지고 다니기로 하자, 하고 농담을 한 것이 백석파가 된 것이다.이렇게 인스턴트식으로 만들었으니 조직원이 몇 될 리 없고 지속적으로 유지될 리도 없다. 필운동에서 `백석 흰 당나귀`라는 카페를 가진 시인 박미산, 백석과 정지용의 기행시에 관한 연구 논문이 곧 출산 직전인 정수연 선생, 러시아문학 박사면서도 한국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백석 시와 샤머니즘의 관계를 고려대학교 박사논문으로 쓴 라리사 피사레바 중앙대학교 교수, 그리고 나.이게 그 화려한 멤버의 전부이다보니 매번 회원난을 겪게 마련. 그래서 산에 갈 때마다 이 사람도 초청하고 저 사람도 초청하는 구걸 행각을 벌이는데, 지난번에는 김수영 연구 뜻을 가진 홍승진 군을 초청했다 모모한 관계의 사람이 영국에서 귀국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뒤늦은 통보를 `당했다.`결국 네 사람이서 서울 안쪽 아닌 바깥쪽 북한산 쪽을 올라가기로 한다. 늘 가는 구기터널 앞 북한산, 승가사 방향 말고, 연신내 구파발 바깥으로 나가 국사당, 사기막골 쪽으로 해서 이른바 `숨은 벽` 능선까지 가보기로 한 것이다.오후 한 시에 만나니, 국사당 앞까지 차를 달려오기는 왔지만 벌써 두 시. 가을해만 해도 여름해에 비하면 확실히 짧다. 나도 모르게 랜턴을 찾았지만 역시, 뭣도 찾을 때는 없더라도 등산가방에서 사라지고 없다. 어쨌든 해 떨어지기 전에 내려와야 한다.국사당 쪽으로 해서 산을 찾아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발놀림이 편한지 모른다. 경사가 완만하기 그지없어 북한산이 맞나 할 정도인데, 벌써 밤나무에 밤이 익어 떨어져 툭툭, 데굴데굴 굴러 떨어진다. 누가 가을 산에 밤나무 있는데 가면 밤송이 맞는 것 조심해야 한다더니 여기 저기 툭툭 떨어지는 소리는 확실히 밤이 익어 떨어지는 소리다. 발밑에는 이미 알이 터져 사람들이 가져나고 남은 빈 송이들이 흩어져 있다. 가을이다. 확실히. 완연히.사기막골이라는 이름도 정감이 가는데, 어디가 거긴지 모르게 벌써 지나가 버리고 갈림길 이정표를 보니 드디어 저쪽으로 갈라서면 숨은 벽 가는 곳이란다. 대체 숨은 벽이 뭔가 하면 일요일마다 북한산만 한 오 년 타고 다니는 정기복 시인 친구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인수봉과 백운대 사이에 가로 놓인 능선으로 두 봉우리 사이에 들어 있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고 산속으로 꽤 들어가고 나서야 보인다 해서 숨은 벽이라 한다고 했다던가.과연 바야흐로 숨은 벽이라는 게 나타난다. 숨기는 숨었는데 왜 벽이라고 했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과연 벽처럼 턱 하고 막아서는 느낌을 줄 것 같은 불쑥 솟은 암반의 벽이 길게 백운대 쪽으로 늘어서 있다. 그 좁은 능선 위로 사람들이 걷는 게 보이는데 그렇게 아슬아슬 할 수 없다. 과연 우리도 저 위를 저렇게 걸어갈 수 있을까.그러나 숨은 벽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산길을 잘못 들어 아래 쪽으로 향했다 다시 올라가게 된 탓에 숨이 턱에 받치는 오르막길을 쉬다 걷다 하면서, 자기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다녀오라는 사람까지 억지로 끌어당겨서야 드디어 숨은 벽에 당도했다.숨은 벽을 넘어 그 위에 오르니 과연 벽 아래 세상이 보이는 것도 같다. 사실, 그날 내가 백석파들을 이끌어 숨은 벽으로 향한 것은 생각이 따로 있었으니, 숨은 벽을 타고 숨은 벽 능선 위에 오르니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벽, 그것도 숨은 벽, 이것이 인생의 문제인 까닭이다.

2016-10-06

땅속 나라 구상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요즘 우리나라가 난리다. 영영 안 일어날 것만 같은 지진이 규모 5.8이나 되게 나는가 하면, 또 그 지진 때문에 원자력핵발전소가 타격이라도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우려들이 급증했다.사실 규모 5.8 정도라면 일본에서는 별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번에 일본 오키나와에서도, 홋카이도에서도 5.7이니 5.5니 하는 지진들이 났지만 별 피해라는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도쿄에 갔을 때 건물이 널뛰기하듯 흔들리는 경험을 한 번 하기는 했지만 무척 놀란 것치고는 별 이상들이 없어 의외라고 생각한 적도 한 번 있다.이런 것들을 보면 이제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고, 더구나 원자력 발전소가 활성 단층인지, 활동성 단층인지 주변에 있다고도 하니, 겁이 나는 것도 당연한 것 같다. 경주에서 난 지진이 서울까지 흔들리는 걸 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작은지 알 만하고 그렇다면 원전에서 무슨 일이라도 나면 그건 재앙도 이런 재앙은 없다고 할 것이다.이렇게 나라가 괴로운데, 단골 골칫거리 북한은 그 와중에 무슨 미사일인가를 쏘았다고 하고, 그럴 뿐만 아니라 이미 핵폭탄을 몇 개씩 만들어 놓았다고까지 하고, 평양을 지도에서 없애겠다거나 서울을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말까지 오가는 걸 보니, 살아도 산목숨 아닌 것 같은 위태로움이 느껴진다.핵폭탄이라는 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북한에 그게 있느니, 미국까지 날아 보낸다느니, 남쪽을 향해서도 그걸 쏠 수 있으니 하는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네 삶은 그것으로 종막을 고하고 말 것이다. 인터넷에서 핵폭탄의 위력을 묻는 질문에 `펭귄` 님이 답한 것을 보니, 일본에서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번쩍 하는 한순간에 반경 1.6㎞ 안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반경 11㎞ 안의 모든 것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또한 25만 명 넘는 인구 중 7만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고도 한다.그야말로 큰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서울에 살든, 남쪽 어디에 살든 그런 것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살아날 방도가 과연 있겠느냐는 것이다. 설상가상 남쪽에는 지진이며, 원전 같은 것도 있으니 이런 것도 다 걱정 아닐 수 없다.내 대안은 이렇게 될 바에야 아무래도 땅속에 공화국을 새로 세우는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다. 땅 위에서 과연 제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땅속으로 들어가 어떤 가공할 위력의 폭탄에도 견딜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들어앉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내 특출난 아이디어인 것이다.이것은 역시 인터넷 `펭귄` 님의 고견 때문인데, 이에 따르면 원자폭탄이 공중이나 지표면에서 폭발할 때 그 폭풍효과로 인해 “반경 1~5km 이내의 목조건물, 300m 이내의 콘크리트건물, 150~220m 이내의 지하 구조물이 파괴”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하 221m보다 깊은 곳에 집을 짓고 나라를 일구어 살 수 있는 방도만 찾으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다는 계산이 섬을 알 수 있다.문제는 간단하다. 그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는 굴착 시설, 그 안에서 한반도에서는 규모 7.0 이상의 지진은 안 일어날 것이라는 통설을 감안한 내진 설계, 그리고 적당한 환기 시설만 갖추면 모든 준비는 끝나는 것이라 해야 한다. 물론 또 다른 난점이 없지는 않다. 그것은 이런 것들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하찮은` 돈이다.사실, 사람들은 어떤 대단한 명분 없이는 돈은 잘 내지 않으려 하는 속성이 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인데, 정말 따지고 보면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땅속만이 살길이라고 잘 설득만 하면 어떻게든 모금은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작년에 터키에 갔더니 기독교 믿는 사람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땅속으로 들어가 평생을 보냈다고 했다. 감동적이었다. 지금 이 나의 공상 또한 하나 새로울 것 없다. 다 선인들이 이루어 놓으신 것.

2016-09-29

9·11과 3·11의 기억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미국에 9.11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3.11이 있었다. 미국의 9.11은 빈 라덴이 주도한 테러와 관련된 것으로, 우리 모두 그 끔찍한 장면을 텔레비전 생중계로 시청하다시피 했다. 그때 이슬람 테러주의자들은 쌍둥이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미국무성 빌딩을 비행기로 돌진시켜 무너뜨림으로써 새로운 세기가 희망과 평화의 시대가 될 수 없을 것임을 예고했다. 2001년 9월 11일이었다.그로부터 근 10년 지난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쪽 바다 밑에서 진도 9.0의 기록적인 지진이 발생했고 이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해일이 해안으로 밀려들었다. 이 해일의 전개 장면들을 역시 우리는 유튜브로 바라볼 수 있었다. 자연은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일깨워 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르침이라기보다 저주 어린 앙갚음에 가까워 보였다.해안 항구와 마을들로 밀려든 바닷물은 멀리서 보면 한갓 평화로운 조류 같았지만 막상 해안에 정박한 배들과 줄줄이 늘어선 목조 건축물들에는 험상궂기 짝이 없는 사신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물은 배들을 박살내고 떠밀어내고 건물들을 땅에서 떼어내 조류에 밀려 논두렁 들판으로 떠다니게 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파도가 잡아챌세라 바퀴를 바쁘게 놀려 달아나고자 했지만 끝내 집채만한 물결에 장난감 나무배처럼 휩쓸려 버렸다. 하지만 더 큰 비극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이 해일, 쓰나미가 해안가에 늘어서 있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 밀려들자 훌륭한 내진 설계까지 갖추고 있던 원자력 발전소들을 `무너뜨려` 버렸다.발전소의 핵 원자로들이 폭발을 일으키고 방사능이 외부로 누출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미 해일로 2만5천명이나 되는 희생자를 냈지만 지진과 해일은 인간이 쌓아올린 기술의 총화라고나 할 원자력발전소에 구멍을 냄으로써 후쿠시마 일대를 사람이 주거할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변질시켰다. 현대판 남부여대 피난민들이 줄줄이 고향을 떠나 피신하고 기르던 가축들이 주인을 잃고 방치된 채 굶어 죽어가는 시체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는 죽음의 땅. 일본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일본 열도의 중심 혼슈의 허리에 구멍이 뚫리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고 이 사태는 여전히 지금도 진행 중이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 부모를 잃은 아이들, 오염된 들과 바다는 근본적 해결책 없는 원자력발전소가 얼마나 심각한 병소인가를 깨닫게 했다.이로부터 `3.11의 사상`이라는 것이 배태되었다. 그러니까 미국에 `9.11의 사상`이라는 게 성립 가능하다면 일본에서는 `3.11의 사상`이라는 사건이 사상을 낳는 초유의 가능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벌어진 이슬람 테러의 세계무역센터, 펜타곤 공격은 종교간 충돌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야기하는가를 시연해 주고 그럼으로써 21세기의 인간이 상호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짜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그렇다면 일본에서의 `3.11`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이나 지배라는 환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면서 자기 확신, 독단에 근거한 자연의 개발과 훼손이 초래할 수 있는 파멸의 위험을 알려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조심스럽고 겸허하게 살아가는 길을 찾을 것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9.11이든, 3.11이든 미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전체로서의 국체나 정부는 이 두 사태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했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짓밟은 것으로, 증오 어린 복수로 자신들이 입은 피해의 심리적 보상을 꾀했고, 일본 정부는 `원발`(原發)의 근원적인 문제점을 외면한 채, 사태의 진행을 쉬쉬하면서 국민들을 안심시키는데 골몰하고 있다.그러면 한국인들, 우리는 어떤가.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미증유의 사태들로부터 아무 가르침도 얻지 못한 것 같다. 귀머거리요 눈먼 사람들이다. 우리 앞에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 과연 우리는 피해갈 수 있을까. 우리가 바라는 건 단지 요행뿐 아닐까. 끔찍하게 무서운 우리의 현실이다.

2016-09-22

작가 이호철 선생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무슨 일인가로 한국문학번역원에 갔더니 김성곤 원장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이호철 선생이 몹시 편찮으시다고 한다.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2년간 이런저런 일로 이호철 선생께 자주 연락을 드리고 찾아뵙기도 했다. 오래되지 않은 이호철 선생 인터뷰는 지금 이렇게 아프시다고 하니 선생 말년의 귀한 말씀으로 남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물론 선생의 쾌유를 빌고 있지만 세상 일은 알 수 없으니 마음이 괴롭다.이호철 선생은 1932년생, 지금은 갈 수 없는 원산 출신이시다. 원산은 옛날에 덕원이라고 하여 원산 사람들이 자신을 덕원 사람이라고 할 때는 그 특유의 자긍심을 담고 있는 것이라 했다.원산중학교와 원산고등학교가 일제 때부터의 명문이라고도 했다. 그때는 조선 전국의 3대 명문이었다고도 하는데, 학교 관계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그냥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선생이 원산고등학교 3학년 때, 아뿔싸, 6·25전쟁이 터졌다. 그때 학제로는 7월이 졸업이었다는데, 그래서 선생으로서는 졸업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맞아 학도병으로 전선에 끌려갔다고 했다.전쟁이 전쟁이다 보니 선생은 전선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고, 특히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을 받고 퇴패할 때는 대오를 잃고 이리저리 흩어져 북상하다 끝내 포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사람은 때로, 아니 자주 운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그때 극적으로 매형을 만났다고 했다. 포로를 관리하는 사람이 바로 국군에 소속되어 있던 매형이었고 때문에 간신히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강릉 근처에서 풀려난 선생이 고향인 원산으로 돌아가자 그곳은 이미 국군이 점령한 상태, 선생이 거기서 한 달인가를 지낼 때 저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을 만나 퇴각하게 된다. 전쟁사로 보면 바로 1·4 후퇴다. 서울을 버리고 퇴각한 때가 1월 4일이고 원산에서 국군이 철수한 때는 그보다 앞선 12월 초순경이다.그때 원산에 미군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선생은 아버지와 함께 미군 함정이 정박해 있는 항구를 향해 떠났지만 도중에 아버지는 친구를 잠깐 만나고 가시겠다고 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선생 혼자 부두에 정박한 미군 LST 함정에 홀로 오르니, 역사적으로는 그것이 원산철수, 곧 흥남철수의 서막이었다.그때 원산에서 떠난 또 한 사람의 미래작가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작가 최인훈, 1936년생이다. 함정은 두 사람을 부산에 내려 놓았고, 그로부터 두 원산고등학생의 남한 생활이 펼쳐진다. 특히, 혈혈단신 월남한 이호철 선생은 일가족이 함께 내려온 최인훈 선생보다 더욱 외로운 상황이었을 것이다.부산에 문자 그대로 `낙지` 한 이호철 선생이 우여곡절 끝에 잡은 직장이 바로 국수 뽑는 제면소, 이것이 나중에 장편소설 “소시민”을 쓰는 밑거름이 된다. 나는 이 소설을, 이른바 `월남작가``월남문학`을 공부하는 중에 읽었는데, 소설 속 주인공의 원초적인 생기와 소설 전체에 흐르는 유머와 페이소스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또, 선생은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장편소설을 쓰시기도 했는데, 이것은 부산 임시수도로부터의 환도 후 1950년대부터 1960년대의 서울에 관한 가장 풍요로운 풍속지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이 소설에는 저 남쪽 바닷가 태생 길자라는 여인이 월남 청년을 정 깊이 사랑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또한 사랑, 정이 몹시 고팠던 선생 아니고는 쉽게 쓸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얼마 전에 근황을 들은 즉, “월간문학”에 산문을 연재하고 계셨고, 이 글들을 모아 책을 내시겠다고도 하셨다. 그런데, 여름 지나면서 뜻하지 않은 병이 발견되어 치료를 받으셨고 지금도 상태가 썩 좋지 않으시다는 것이다.사람의 운은 모르는 일이지만 툭 털고 일어나 그 소탈한 웃음을 다시 보여주시기를 고대한다. 귀한 작가시다.

2016-09-08

우리 동네 구둣방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며칠 째 벼르고 벼르던 일을 하러 구둣방에 들렀다. 닳고 닳은 구두 뒤축을 수리하자는 것이다.한 일 년 구두를 묵혀 두었다. 신기 싫어 신발장에 그냥 넣어둔 것이 아니다. 구두 뒤축이 닳아 구멍이 뻥 하고 뚫려 거기로 돌멩이 하나가 들어가 앉았다. 그 느낌이 성가셔 한 동안 쳐다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날씨가 제법 선선해져 그런지 다시 구두 생각이 났다. 이런 날에는 이런 신발, 저런 날에는 저런 신발 하고 정해 놓고 신는 규칙성은 내게 없다. 격식을 갖추는 행사장에는 될 수만 있으면 가지 말자는 주의고, 한 번 운동화든 뭐든 신기 시작하면 한 달도 좋고 두 달도 좋다. 또 구두가 단 한 켤레만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 구두의 차례가 오기까지 한참이 걸렸다.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서 신다보니 돌멩이는 어디로 빠져 달아나 버렸다. 며칠 그대로 신고 다니기는 다녔지만 그 뻥 뚫린 신발 뒤축 구멍의 느낌이 발밑에 그대로 전해졌다.아무래도 구둣방을 찾아야겠다. 그런데 뭣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눈에 잘 띄던 구둣방이 학교 갈 때도 없고 광화문에 서점 나갈 때도 없고 사당동에 약속 때문에 나갈 때도 없다.물론 우리 동네 구둣방이야 가장 먼저 생각이 나기는 났다. 이따금은 거기 가서 구두를 닦고 수선도 했다. 하지만 요즘 아침 일찍 나가 못 들르고 밤에 늦게 들어와 못 들렀다. 그러던 것이 이제 기회가 닿은 것이다.나갈 때는 구둣방을 향해 나갔는데 걷다 보니 이미 지하철 역 앞까지 다 와 버렸다. 어떻게 할까 하다 물경 백오십 미터나 되는 거리를 되돌아가기로 한다. 구둣방 아저씨가 공원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서 있다 반색을 하신다.구두 뒤축을 갈 수 있는지 봐달라고 말씀 드리니 어떤 구두든 못 가는 구두는 없단다. 내가 구둣방 의자에 앉아 슬리퍼로 갈아 신고 구두를 내밀자 아주 좋은 구두란다. 자그마치 송아지 가죽이라는 것이다. 그냥 소가죽하고 송아지 가죽하고 다른 것이냐 여쭸더니, 달라도 많이 다르단다. 소가죽에 비해 송아지 가죽은 부드럽기도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질기다고 한다. 어느 가게에서인가 세일할 때 산 기억은 있지만 송아지 가죽 구두라고 의식한 것 같지는 않다. 별일도 아닌데 기분이 좋아진다.앉은 김에 지나다니며 궁금하던 것을 여쭤본다. 놀이터 옆에 상가 건물을 헐어내고 한동안 주차장 공터로 썼는데 얼마 전부터 거기를 다시 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호텔을 짓는단다. 그러면서 구둣방 경기도 나빠졌다 좋아졌다 경기를 탄단다. 바로 앞에 강화도 가는 버스 터미널이 있을 때 경기가 좋았단다. 그게 없어지자 구둣방 장사가 아주 좋지 않았단다. 더구나 요즘엔 열이면 여덟, 운동화나 신지 여간해서는 구두를 사 신지 않는단다.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도 그렇단다. 이제 호텔을 지으면 구둣방 경기가 지금보다 나아질 것 같단다.내가 짐짓 아저씨도 이 동네 빌딩 하나는 갖고 계실 것 같다고 하자, 36년 한 자리에서 구두 수선만 했는데, 집 한 채 겨우 장만했다고 한다. 돈 벌려면 열심히 일하면 안 된다고 했다. 부동산 투기를 하든 다른 뭔가를 해야지 밤낮 구두 수선만 해서는 소용없다는 것이다.그런데, 구둣방에 들르는 사람들은 열이면 아홉 좋은 일이 있어서 찾아오는 것이란다. 결혼식에 가든, 잔칫집에 가든, 행사장에 가든, 사람을 만나러 가든, 좋은 일 아니고서 구두 닦고 고치러 오는 사람들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구둣방은 늘 기분 좋은 곳이고 자신도 손님들을 더 기쁘게 해 주려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하신단다.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구두도 더 씽씽하게 닦아 주신단다.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 말씀 듣다 보니 재미도 있고 나는 무슨 좋은 일이 있어 온 것도 아닌데 기분이 좋아졌다.구두를 건네 받으며 얼마냐고 여쭈어보니 만원이다. 나는 단돈 만원에 뒤축을 새로 댄 구두를 신고 너무도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갔다.

2016-09-01

무서운 밤 이야기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뜨거운 여름의 막바지 하루를 즐기러 가서 밤늦게 무서운 얘기들을 한다.소설도 쓰고 평전도 쓰는 선배, 바로 어제 한밤에 어느 기차역에 내렸다고 한다. 친구가 외국 여행을 떠나면서 집을 한번 봐달라고 했다나.역에서 그 집까지 꽤 먼데 차는 이미 끊겼다. 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국도길을, 마주오는 차들 불빛을 쏘이며 걸어갔다고 한다.밤에 음주운전에 졸음운전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본 한밤의 뺑소니 사고들을 떠올린다.위험을 느낀 나머지 도로 아래 농로를 택했다고 한다. 농로라면 나는 또 `살인의 추억`이 생각난다. 시신이 발견된 농수로가 떠오른다. 경기도 화성에서는 1980년대 말고 2000년대 초반에도 연쇄 살인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여성이라면 절대로 `호의동승`에 응하지 말 일이다.걷다보니 농로가 끊긴 데가 나오고 개울이 나왔다. 다시 도로로 올라와 차들을 향해 태워달라는 신호를 보내봤지만 무정하게 다들 지나쳐갔다.한밤에, 열두시도 넘었는데, 국도에서 갑자기 손을 흔드는 사내라. 놀라지 않을 운전자가 없으리라.천신만고 끝에 세 시간이나 걸어서야 겨우 친구의 아파트에 도착했고. 우편함에 쌓여 있는 우편물들을 안고 계단을 올라갔고.한밤의 계단이라면 나는 또 누군가 갑자기 튀어나올 것 같다. 칼이라도 휘두를 것 같은 위기를 느낀다.막다른 골목, 어두침침한 계단, 비어 있는 집은 무섭다.내가 사는 동네에 구두집이 있다. 거기서 몇 십년을 일했다는 아저씨, 바로 저기가 유영철이 살았던 곳이라고, 구두약 묻은 손가락으로 가리킨 적이 있다.드디어 텅빈 아파트 문을 열어젖히자 안으로부터 훅, 하고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단다. 맙소사.이렇게 며칠 째 밤낮없는 폭염이라면 어떤 시신도 심하게 부패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다.다행히, 오랫동안 굳게 닫아놓은 아파트 안은 그냥 뜨거울 뿐이다. 한밤인데도 에어콘의 온도 표시는 37도를 가리켰다. 선배는 창문을 열고 에어콘을 켜고 잤는데, 일어나보니 온도는 26도까지 내려가 있었다.이에, 이야기를 듣던 여성이 신정동 엽기토끼 이야기를 꺼냈다. 서울 신정동에, 십 년 전쯤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여자들은 한밤도 아닌 대낮에 지하철역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던 길에 납치되어 어느 곳인가로 끌려갔다. 살아남은 여성의 기억에 의하면 다세대 주택의 반지하방 같은 곳에 노끈들이 흩어져 있고, 자기를 납치해간 남자 말고 또다른 사람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녀를 죽이겠다고 했다. 여자는 그들이 잠깐 한눈 판 사이에 방을 도망쳐 나와 2층 계단으로 향한 곳에 숨었다. 이미 한밤중이었다. 남자들이 욕설을 하며 대문 바깥으로 나가 그녀를 찾아댔지만 그녀는 용케 발각되지 않았고, 한참 있다 도망쳐 살아났다.서울의 어떤 동네들은 격자형 골목이 연속되어 있다. 어디가 어딘지, 처음 가는 사람은 분간하기 어렵다. 살아남으려고 죽으라고 달아난 여자는 덕분에 기억을 상실하다시피 했다. 다만 하나. 그녀가 몸을 숨긴 신발장에 엽기토끼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나도 서울 서교동 경남예식장 뒷골목에 살 때 무서운 일을 당한 적이 있다. 그 길은 가로등이 없고 인적도 드물다. 나는 한밤에 집에 돌아가려고 그 뒷골목을 걷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남자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무심결에 그들을 보는 순간, 그들 중 하나가 들고 있던 맥주캔을 내 얼굴을 향해 집어던졌다. 캔은 아직 따지 않은 것이었고 안경을 끼고 있던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내가 저만치 떨어진 편의점에 들어간 그들을 쫓아 들어갔을 때,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말했다.너 오늘 운 좋은 거야. 저 친구가 어떤 앤지 알아?그리고 그들은 편의점을 나가 유유히 사라졌다. 뒤늦게 경찰이 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밤이 되면 무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특히 서울 같은 곳에서는. 여름에는. 그리고 이런 어두운 욕망의 시대에는.

2016-08-25

불가근 불가원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세상을 살아가는 일, 쉽지 않다. 나이를 먹을수록, 일이 늘어갈수록 숨을 쉬는 일조차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이것은 동생에게 직접 들은 말이다. 몇 십년에 걸쳐 학자들이 바통을 이어가며, 도대체 삶을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요건이 무엇인지를 연구했단다. 이걸 네번째 이어받은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은 돈이 많은 사람도, 사회적으로 높이 올라간 사람도 아니란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잘 풀어가는 사람, 잘 맺어가는 사람이 삶을 가장 행복하게 여긴단다.동생에게 이 말을 듣고 여러가지 생각이 났다. 그중에서도 과연 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했다.아집이 세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원하는 것에 대해서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애써, 무리를 해서라도 의미를 둔 일은 해내려고 한다.그러다보니 세상과 리듬을 맞추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세상은 반 발만 앞서가거나 뒤서가야지 한발, 두발을 먼저, 늦게 뛰면 탈이 나기 쉽다. 고립되고 빈축을 사기 쉽다.남들이 좌향좌 할 때 우향우 한 적도 많고 우향우 할 때 좌향좌 한 적도 많다. 다 세상의 흐름이나 경향을 모르고, 또 알고도 어긋내서 벌인 일들이다.하지만 또 다른 유형의 잘못도 무척 많이 범해 오기도 했다. 어차피 한 사람으로서 내가 완전할 수 없을 바에야, 그 사람 관계라는 것도 다 좋을 수 없고,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도 없다. 그러니 그런 기대일랑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부류는 불가근해야 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사람이다. 자기 보기에 옳지 않은 사람, 섞여 봤자 좋을 게 없는 사람, 실속없는 사람, 출세에 눈 먼 사람, 인색한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 수시로 변하는 사람,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는 사람. 이런 사람은 가까이 하면 안 된다.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사람만 피할 수 있어도 세상살이는 꽤나 편한 것이 된다.둘째 부류가 있다. 불가원해야 하는 사람이다. 즉 멀리 하면 안되고 늘 가까이 해야 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일까? 무엇보다 정 깊은 사람, 따뜻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 관심을 가질 줄 알고 불쌍한 사람, 부족한 사람, 괴로운 사람을 보면 도와주지 못해 스스로를 힘들어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가까이 할수록 좋다. 또,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고 싶은 일, 원하는 것이 있어도 생각해 봐서 도리에 어긋나면 삼갈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큰 잘못을 범하지 않으니 큰 화를 입지 않을 수 있다.그럼 세번째 부류는? 불가근도 해야 하지만 불가원도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가까이 해서도 안되지만 멀리 해서도 안된다는 말씀이다.살아가다 보면 꼭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이 있다. 안 만나면 좋은데 피할 수 없이 관계를 맺게 되고 지속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때 이런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불가근하되 불가원도 해야 한다.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만 하면 원한을 품고 앙갚음을 하고 가끼이만 하고 멀리 하지 않으면 그의 나쁜 성정에 휘둘러 자기도 같은 부류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면 자기도 남을 괴롭히고 남의 불행을 도모하고 즐기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어떤 사람인가? 냉혹한 사람, 잔인한 사람, 선악의 판단 없이 분노에 사로잡히는 사람, 남의 불행을 기쁨으로 아는 사람, 남의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자기가 돌을 던지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 자기보다 약한 자를 골라서 괴롭힐 줄 아는 사람, 자기보다 강한 자에 야비할 정도로 고개 숙이는 사람, 겉으로 말 않고 숨어 말하며 목적을 도모하는 사람. 레슬링 식으로 말하면 상처 입은 곳을 골라 가격하며 즐거워 하는 사람.옛날에는 옳은 사람을 가리는데 힘썼다. 하지만 내 판단을 내 스스로 신뢰할 수 없게 되자, 가까이 할 수 있고 가까이 해야 하는 사람의 기준이 달라졌다.그리고 더 교묘해져야 함을 절감한다. 멀리 하는지 가까이 하는지도 모르게 해야 한다는. 슬프고 슬퍼서 슬프기 짝이 없는.동생 말대로 사람의 행복은 관계에 달린 것을. 좋은 관계란 것이 이렇게도 힘들다니.

2016-08-18

건물주가 되고 싶은 아이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누구와 얘기를 하다 이 말이 나왔는지 분명히 기억나지 않는다. 최근에는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탓에 어디에 기록이라도 해놓지 않으면 누구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도 기억 못 하는 때가 많다. 그런데 그가 어느 신문에선가 봤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더니 건물주가 되고 싶다는 답이 많이 나왔더라는 것이다. 나는 건물주라는 게 언제부터 직업으로 취급되거나 인식되었는지 모르는데, 아이들은 지금, 벌써, 그것을 장래 희망으로 꼽고 있다는 것이다.아이들은 역시 무섭다. 아이들은 확실히 어른의 거울이다. 아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보면 어른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아이들은 눈치가 빤하다. 어른들이 말하지 않아도 지금 이 어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느껴서 안다. 그것은 지각 있는 생각으로 아는 게 아니요, 논리가 아니라 느낌으로, 감성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서울 수도 있다.오죽하면 아이들이 건물주가 장래 되고 싶은 직업이라고 말할까. 그것은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실상을 아이들이 이미 눈치껏 `때려잡았음`을 의미한다. 열심히 일해서, 노력으로 돈을 버는 게 능사가 아닐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이미 알아차렸음이다. 공부 잘 하면 잘해야 고시해서 고급 공무원 되고 결혼이라도 잘 해서 어떻게 성공한다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어느 하세월에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이냐. 또 그러려면 밤잠 못자고 아래위 눈치 다 보고 온갖 자기 기준에 안 맞는 일까지 서슴없이 감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긴 시간이 소년적, 청년적 이상을 갉아먹어 사람을 버리게 만들기 일쑤다.그런 어려운 길 대신 가만 보니 건물이나 땅 같은 것 제대로 된 것 하나라도 갖고 있으면 제때 돈 들어오니 아무 근심 걱정 있으려야 있을 게 없다. 평소에 쓱 하고 하면 돌아보고 은행 입출금 상태나 보고 때 되면 놀러가고 좋은 것 찾아 먹고 그래도 남는 시간에는 좋은 생각을 하면 된다.아이들이 이미 이런 삶이 좋다는 걸 알아버렸다는 말씀이다. 이 아이들이, 그러면 모르는 게 뭘까.눈 딱 감고 한 번 얘기해 보면, 대저, 하늘이며, 바다며, 공기며, 물이며, 땅 같은 것은 자연 그대로 주어진 것이니 처음에는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숨을 쉴 때 숨 쉬는 삯을 매번 내야 한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가 하늘의 별과 달을 바라볼 때, 그때마다 관람료를 내야 하면 어떻게 살 수 있나. 그런데 하필 땅만은 내 것이고, 네 것이고, 우리들 것이고, 저희들이 것이니 하니 이게 웬 일일까. 하늘이며, 바다며, 공기며, 하는 것은 아무리 써도, 누가 써도 닳아 없어지지 않지만 땅은 뻔한 면적이 있고, 그 유용성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서 필히 누구에겐가 귀속되고 그것을 위한 싸움이 그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단 말일까. 바다도 좋은 어류가 서식하고 그 밑에 중요 자원이 깔리면 네것, 내것 다투듯이 땅은 원래부터 그런 속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는 법일까.많은 아이들은 지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땅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자기 소유고, 자기 소유인 한 빌려주면 당연히 돈을 받아야 하고, 그걸 막거나 그게 아니라고 하면 법도 모르고 권리도 모르는 불한당들이다.맞다! 맞다? 이 아이들에게, 톨스토이처럼, 사람에게는 과연 땅이 얼마나 필요한지 가르쳐 주어야 할까? 땅에 대한 지나친 소유가 사람살이의 근본을 얼마나 뒤틀리게 하는지도 가르쳐 주어야 할까? 내가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소유를 향해가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어야 할까?예스든, 노우든, 우리 사회는 전체적으로 그런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것 같다. 우리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

2016-08-11

터널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일본 가나자와에서 교토 쪽으로 넘어오려면 쓰루가라는 곳에 닿기 전에 아주 긴 터널이 있다. 이 길을 다니는 기차 특급 이름은 썬더버드. 번개처럼 빠르게 달려도 캄캄한 굴 속을 한참을 달려야 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다.굴속을 달리는 기차의 굉음은 대단하다. 쇠붙이가 쇠붙이 위를 달려가며 레일에 바퀴가 무서운 속도로 굴러갈 테니 소리가 큰 것도 당연하다. 이 소리가 굴 속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회오리를 친다.끼이끽 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익휘익 하는 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들으며 굴속을 달리노라면 스마트폰에 인터넷 연결을 할 수 없다는 표시가 뜬다. 한동안 어디에도 연결할 수 없는 질주가 계속된다. 이 어둠속에 앉아 나는 마치 이 어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을 느낀 적이 있다.생각해 보면 내 삶에도 그런 터널 같은 암흑 속을 달리던 때가 있었다. 때는 아마도 스물일곱 즈음부터 서른일곱 즈음이었을 것이다. 인생의 앞에 아무 것도 펼쳐져 있지 않고 어둠만이 막아서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둠 속 행군의 시간이 있었다. 그때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누구의 탓도, 나만의 탓도 아니었다. 나와 타인들의 의지를 뛰어넘은 곳에 나를 둘러싼 암흑같은 상황이 놓여 있었다. 그게 누구라도 그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강렬한 절망감 속에서 그래도 견뎌야 한다고 입술을 깨물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갔다. 그 캄캄한 굴속에서 나는 빠져 나왔다. 나 자신도, 타인도 미워하고 용서할 것이 없다.시인 임화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1930년에 그는 볼세비키가 되고 싶은 시인이었다. 볼세비키처럼 시를 쓰고 예술가 단체를 볼세비키 조직처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또 가당찮은 짓인지 몰랐던 그는 그런 자신의 신념이 만든 어두운 터널 속을 폐결핵을 안고 나아갔다. 친구 김남천이 차라리 감옥에 갇혀 혁명적 투사로서의 빛에 감싸여 있을 때 그는 잡혀가 오래 수감되지도 못하는 몸으로 세인들의 의혹의 눈초리를 받으며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도 그는 병든 몸으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은 쉽다, 삶을 훌륭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한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사회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1940년부터1945년까지를 문학사는 암흑기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 암흑을 벗어났다고 상정되는 위치에 서서 뒤를 돌아보며 하는 소리다. 일제 암흑기에 우리는 하마터면 우리의 말과 글을 잃어버리고 정지용이 시 `백록담`에서 말했듯 우리 새끼들을 털빛깔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수도 있었다.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우리는 빛을 온전히 되찾지 못했다. 시대를 구가하는 사람들은 벌건 대낮을 살고 있다고 느낄지라도 그 대낮에 등불을 들고 어둡다, 어둡다 탄식을 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과연 우리의 지나간 시대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어떤 곳일까? 긴 터널의 끄트머리일까? 한복판일까? 어둠을 벗어난 들판일까?분명 나는 옛날의 그 어둡기 짝이 없던 터널은 나와 있는 것 같은데, 자꾸 무엇인가 얼굴을 휘감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떼어내려고 애쓰듯 헛손질을 계속한다.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자꾸 벗어버리고 싶은 터널의 거미줄이 얼굴에 휘감겨 있는 듯 느껴지는 것은 착각에 불과한 것일까? 아직도 내가 어둠 속을 헤매고 있기 때문인 것일까?하늘 바깥에 하늘이 있다고 어둠 바깥에 더 깊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어두운 터널 속 행군이 사람의 운명이라면 누구를 원망할 것도 탓할 것도 없다.우리가 어떤 질곡 속에 놓여 있다 해도 그것은 그 누구의 탓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그렇게 살도록 생겨난 족속인 때문일 것이다. 과연 터널의 어둠은 숙명인 것일까.

2016-08-04

장항선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지금은 기찻길도 케이티엑스 시대다. 얼마전에 여수를 가는데 역이름은 여수 엑스포역이요 불과 세 시간 안쪽 거리였다. 마산도, 포항도 케이티엑스가 가는데 영영 그런 빠른 기차는 가지 않을 것 같은 곳이 있다. 장항선 길이다.장항, 하고 발음하면 아주 느린 기차가 멀리 갈 때까지 가서 멈추는 느낌이 난다. 천안에서 충남 내륙을 가로질러 서해안 아래쪽으로 내려간 끝에 바로 장항이라는 마지막 행선지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대로 끝이 아니다. 장항에서 전북 익산으로 통하는 기찻길이 열린지 오래, 지금은 `g-트레인`이라는 관광열차가 이 길을 따라 장항, 익산, 서대전역을 간다. 장항은 오랜세월 장항선 기찻길의 마지막 종착지였다.서울에서 이 장항선은 호남선과 함께 용산에서 출발한다. 오로지 무궁화호, 새마을호만 다니는 오래된 철길은 천안역까지 가서야 경부선과 갈라져 서쪽으로 향한다. 아는 분들은 다 아시지만 천안역은 케이티엑스 역인 천안아산역과는 다르다. 옛날부터 있던 경부선 철길 천안역이요, 여기서 갈라져 아산역 지나 온양온천역과 도고온천역을 차례로 지나간다.이 장항선 역들이 있는 곳은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 자신의 어릴 적 삶과 관련이 깊다. 예산 결혼식장에서 결혼하신 아버지, 어머니는 지금 같으면 기차로 20분밖에 안 걸릴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다.도고온천역에서 기차는 실례원역을 지나 예산역으로 가는데, 여기는 역보다 예산 차부가 기억 난다. 내가 공주 살고 대전 살 때 덕산 북문리 외갓집 가려면 버스가 꼭 예산 차부에 섰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냥 계셔도 좋으련만 꼭 어디를 나가시고 나는 아버지 없이 차가 떠날까 한번도 조마조마 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래도 아버지는 어떻게 아셨는지 꼭 버스가 떠나기 전에 돌아오곤 하셨다.예산역 지나면 삽교역이다. 이상한 역이다. 옛날 이 삽교역에는 수덕사역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고 나는 바로 이 근처에 그 절이 있으려니 했건만 전혀 아니었다. 수덕사는 삽교 지나 덕산 `읍내`(사실은 면소재지였다)도 한참 지난 곳에 있었다. 또 삽교역은 늘 서운케 지나는 역이기도 했다. 옛날에 대전에서 덕산 가는 길은 두 가지. 하나는 기차로 천안 가서 장항선 타고 삽교역까지 가고 여기서 완행버스를 타는 것, 다른 하나는 줄창 버스 타고 예산 지나 삽교 지나 가는 것이다. 기차를 타고 싶은데 어머니, 아버지는 좀처럼 안 타고 버스를 주로 이용하신다. 삽교역 다음은 홍성역이다. 흥선대원군이 손수 썼다는 조양문이 있는 홍성, 만해 한용운의 고향이고 내 절친 최병수의 고향이고 또다른 절친 정연기가 변호사 일을 하는 곳. 며칠 전에도 셋이서 역시 막걸리는 홍성 것이 좋다고 내포 막걸리, 홍주 막걸리를 마시며 요즘 세상 어떻더라고 이야기들을 했다.이제부터는 조금 더 속도를 내야겠다. 홍성역 지나면 광천역, 여기에는 광천 이모가 살았고, 청소역 지나 대천역에는 대천 이모가 살고 웅천, 판교, 서천 지나 장항역에는 지금 세상에 안 계신 장항 큰이모가 사셨다. 어머니 형제들은 5녀 1남, 그중에 어머니는 넷째, 위로 이모 세분 외삼촌 한 분, 아래로 이모 한 분. 일찍 윤봉길 의사 집안 사람 되어 서울 가 사신 서울 이모 말고는 모두 다 이 장항선에 사셨다.어렸을 적에 이 장항은 그러므로 세상의 또 다른 끝이었다. 개펄이 넓게 펼쳤고, 까만 게들이 마구 기어다니고, 흙탕 금강 하구 너머로 또 다른 세상이 있었지만 언젠가 딱 한 번 배로 그곳을 구경할 수 있었을 뿐. 이 장항선 끝이 익산역이 되어 호남선에 연결된 때 언제던가? 기차가 금강 드넓은 하구를 거침없이 넘어 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자 내 유년의 신화도 끝났다.그렇건만 아직도 나는 장항선만 타면 가슴이 뛴다. 정든 세상이 이 기찻길 위에 있다.

2016-07-28

동묘에 가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서울 동대문 바깥 청량리 가는 길에 지하철 몇 호선이던가, 동묘역이라고 있다. 동묘역은 동묘가 있는 곳이라 하여 이름이 그렇다. 이 사당은 삼국지 영웅 관운장 관우를 모시는 곳이다. 때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 진인이 이 관우를 숭배한 것이 싹이 되어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선조 35년인 1602년 봄에 이곳에 이 사당이 세워졌다 한다. 명나라 황제 신종이 사신을 보내 관운장의 혼이 이 나라를 도왔으니 묘, 곧 사당을 세워 공을 갚으라 했다는 것이다.역사의 사연이야 어떠하든 그렇게 해서 관운장의 거처가 마련되었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 대부분은 옛 사연에는 무심해 보인다.무엇보다, 이곳은 현재 온갖 날 것 그대로의 생활이 흘러넘치는 곳이다. 백화점 같은 곳에서 파는 물건은 별로 없고 있다 해야 `제 값` 받을 생각 말아야 한다.새 것도 헌 것 같고 헌 것도 새 것 같은 이곳에서 모든 것은 터무니 없이 싸고 그런가 하면 엉뚱한 것이 비싸다.예를 들면, 미니 랜턴. 서울대 규장각에서 어느 노 지식인을 뵌 적이 있는데, 그 분이 무슨 글자를 보시려고 주머니에서 쬐그만 물건을 하나 꺼내셨다. 이름하여 미니 랜턴. 그 자리에서 척 하고 켜서 작은 한문 글씨를 읽어 가시기에 하도 신기해서 여쭈어 보니 미제라 하셨다.과연 미제 같이 작고 성능도 뛰어나 보였으니, 아기자기한 것에 끌리기 잘 하는 내가 예사롭게 지나칠 리 없다. 하여, 동묘 헌책방 `시찰`을 나가는데 전철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웬 행상 리어커에서 바로 그 미니 랜턴을 판다.-이거, 얼마죠?아저씨, 내 얼굴을 쓱 보시더니,-천원요.천원? 나는 내 귀를 약간 의심했다. 저 미제 뺨치게 생긴, 하지만 중국제일 것 같은, 그러면서도 성능 나빠보이지 않는 미니 랜턴이 단 돈 천원?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몇 개 사버린다.이런 식이다. 터무니없이 싼 이곳에서 나는 한번은 수도 호스 분무기도 7미터나 되는 것을 삼천원에 사서는 아직도 자동차 뒷트렁크에 모셔두고 다닌다. `기술`에 어두운 나머지 그 쉬운 설치를 하지 못해서다.그런가 하면 터무니없이 비쌀 때는 또 어떤가. 지금은 많이 깨끗해졌지만 헌책방에는 예나 지금이나 관리 안된 책들이 넘쳐나게 마련이다. 햇볕 뒤집어 쓰고 물에 한번 젖었다 말리운, 먼지 투성이, 지질 바삭거리는 헌책들을 뒤지다 보면 꼭 내 전공 것 아닌데도 갖고 싶은 책, 아니, 차라리 구제해 주고 싶은 책이 눈에 띄게 마련이다.하지만 책장 모퉁이에 다른 책들에 섞여 아무렇게나 꽂혀 있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큰코 다치는 수가 있다.-이거, 얼마예요?아저씨, 내 얼굴 한 번 힐끗 보고는,-삼십만 원요.값은 삼십 만원을 선언하시는데 이건 무슨 삼천원 짜리 수도 호스 값을 말하시는 분위기다. 사면 사고 말면 말고, 알아서 하쇼?잡지 `실천문학`이 살아나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보문역 쪽으로 이사를 간 까닭에 일 삼아 갔다 다시 이 동묘라는 데를 갔다.오늘은 아무 책도 사지 않을 냉정한 심사다.리어커에서 물건을 파는데 십이지를 각기 조각한 나무 도장 원목이다. 한 아저씨가 이것들을 유심히 보고 계신데, 또아리 튼 뱀을 새긴 나무도장감이라, 구미가 당긴다.-이거, 얼마죠?-만원요.행상 아저씨, 아무렇게나 부르는 눈치다.-조금만 깍아 주세요.-얼마나?-칠천원만 하시면.-냅둬요. 내가 이 불경기에 그래도 동묘 문활 지키려고 아침부터 나왔구만.동묘문화? 헐.-뭘 그렇게 거창하게 말씀하세요.나는 웃으면서, 투덜거리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지폐를 내민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맞다. 이 서민냄새 풀풀 나는 동묘, 이것도 분명 문화임에 틀림없다. 재미있고, 정겹고, 눈물날만큼 서글프기도 한.

2016-07-21

김태형 시인 실종 사건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오전부터 수원 사는 김선향 시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김태형 시인이 그저께부터 행방불명이라네요. 어쩌죠?-이성혁 씨는 뭐라고 하던데요?-자기도 모르겠다고, 지금 식구들이 찾고 난리래요.-그래요?가만 있자, 그저께라면?김태형 시인을 우리가 만난 게 지난 수요일 저녁이었다. 그때 합정동에 있는 어느 출판사 지하, 라디오가가라는 작은 홀에서 김선향 시인의 시집 “여자의 정면”(실천문학사) 출간 기념 시낭송회가 열렸다. 김태형 시인도, 이성혁도, 그리고 사월 동인 중에 임지연 씨도, 금은돌 씨도, 강신애 시인도 왔고, 황규관 씨도, 문동만 씨도, 김대현 씨 커플도 왔다.그 밤에 김태형 시인은 그가 운영하는 출판사 `청색종이`를 통해서 만든 플래카드도 달아 주었고 직접 김선향 시인의 시도 낭송했다. 시를 여유있고도 부드럽게 감정의 강약을 조절하며 낭송하는 솜씨가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낭송회장에서 와인 한두 잔은 했을 테고 뒤풀이 가서도 나쁘지 않게 어울리는 것 같았고, 그 다음날 아무 특이한 일 없었고, 금요일날에도 문래동 있는 청색종이 출판사겸 헌책방에 간다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나갔다고 한다. 아내는 예전에 이런 일이 전혀 없었노라고, 휴대폰도 끊겨 있는데다 아무 연락도 없으니 무슨 큰일이 난 것 같다고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아무 말 못했지만, 나 또한 낙관만큼이나 비관하기 즐겨하는 성격인지라, 그것이 알고 싶다, 궁금한 이야기 y, CSI, 탐정 몽크 같은 프로에서 본 온갖 사건들이 다 생각나면서 제발 그런 일이 안 일어났기를 바랐지만, 그렇기는 해도 사태를 좋은 쪽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우선, 그는 요즘 자기가 애지중지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밑천 삼아 문래동 예술인 집합처에 헌책방을 내는 대담한 발상전환을 감행했는데, 이것은 경제적인 형편이 그리 좋지 않다는 징표도 되었다. 오죽하면 책을 내놓겠는가, 하는 것이 책에 대해 유난히 고루한 나의 생각이었다.또 하나. 1992년에 20대 초반의 나이로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하여 벌써 25년을 시인으로 동치서주하건마는 다른 어설픈 시인들이 행세 꽤나 하는 동안 그의 이름은 아직 대중의 귀에 충분히 익지 못했다. 작년에 나는 그의 시집 “고백이라는 장르”(장롱)를 인상 깊게 읽은 적 있고 그 몇 년 전에는 창비라는,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출판사에서, 무려 7년만에 “코끼리 증후군”이라는 흥미로운 시집까지 냈건만 대중들에게 그의 이름은 아직 낯선 편이다. 그렇다면 무명의 서러움으로 인한 비관? 정말 큰 일이다.마지막으로 하나 더. 그는 요즘 들어 부쩍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일로 인한 실망감이 깊었다고 했다. 오래 같이 가려니 했던 사람들이 이해관계나 기회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신의며 의리 따위를 고민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동기는 충분하다면 충분하다. 아,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하지 말자. 그 친구는 꽤나 낭만적인 사람이던데, 우리 모르는 사이에 감쪽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천리만리 사랑의 도피행각이라도 떠났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그 친구를 흠씬 때려주기로 하자.아무튼 이 중대 시점에 나라도 한 번 더 전화를 해보는 수밖에 없다. 연락두절이라지만 지금의 나로서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어렵쇼? 그런데 이게 웬일? 신호가 간다. 그럼 또 큰일이다. 범인들은 가끔 실수로 자기가 해친 사람의 핸드폰을 켜보기도 한다는데.-여보세요?이건 분명 김태형 시인의 목소리 그대로다.-김형? 전화가 안 된다던데?-아. 배터리가 나갔어요. 요즘 자주 그래요.-그래요? 목소리가 반갑네. 내일 이성혁 선생 청색종이에서 인문강좌 해요?-그럼요.-아, 내가 시간 되면 놀러 갈게요.전화 뚝.헐. 이게 무슨 극적 반전?그러나, 반갑다. 살아 있다는 게. 무사하다는 게. 그런 산소 같은 시인은 오래 살아야 하느니.

2016-07-14

비평의 고독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바로 며칠 전, 권성우 교수의 평론집을 받았다. 마침 전화를 드릴 시간이 없었다. 시간 여유라기보다는 마음의 여유였을 것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데, 자동차를 끌고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며 하루종일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오늘 비로소 그 여유란 것이 생겼다. 오늘도 무슨 물건도 사고, 사람도 실어나르고, 밥도 사고, 일도 하는데, 권선배 생각이 났다. 전화를 했다. 처음에 받지 않으시기에 문자를 남겼다. 훌륭한 평론집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교토에 있노라고 하셨다. 내가 일들에 지쳐 마음 속은 쓰러져버릴 지경임에도 계속 일을 하는데 전화가 왔다.마음에 준비되지 않은 말들이 그냥 흘러나왔다. 언제 서울에 오시느냐, 서울 돌아오시면 제가 후배들과 함께 조촐한 저녁 자리라도 만들어 드리겠다고 했다. 전화는 분위기 좋게 끝났다. 나는 마저 일을 하면서도 계속 그 평론집의 이미지를 생각했다. 두껍게 엮은 “비평의 고독”, 그 속에 자리잡은 그의 비평가적 인격에 관해 생각했다.평론가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일까? 세상의 비난을 한몸에 받고 있는 종합 편성 채널의 정치 평론가는 정말 백해무익할까? 발레에서, 미술에서 평론가들은 귀하게 모셔지고 글값도 높다는데, 꼭 그것만큼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일까.문학의 평론가는 도대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을 할까? 소설집, 시집 뒤에 발문을 쓰는 해설가는, 모모한 문학 출판사에 전속된 것처럼 보이는 평론가는 주례사만을 쓰다 천한 삶을 마치는 것일까?평론가들을 비난하는 이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평론가는 삼류라고 한다. 시도 못 쓰고 소설도 못 쓰니 평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말씀을 듣다보면 그 사람이 다시 보여진다.세상의 일들은 다 같이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또 귀하다고 생각한다. 늦가을에 저 길가의 가로수의 낙엽을 쓰는 사람도 오늘의 가치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남의 집 담을 넘어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조차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하물며 애를 써 남의 이론과 표현을 읽고 그것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평론가는, 의미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학교 사물함에 책들이 두껍게 쌓일 때가 많다. 어느 때는 그 책들을 보며 한숨이 날 때도 많다.책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미다. 어떤 동료는 연구실 하나 분량의 소장 가치 있는 책 말고는 소유하지 않으려 한다고 한다. 또 어떤 후배는 하루에 책 한 권을 버리는 것으로 목표를 삼고 책의 양을 조절하겠다고 한다. 나는 그 책을 버리기 힘들다. 그 한 권 한 권에 보낸 사람의 정성과 노력이 담겨 있음을 생각하면 내 책장, 책상 위, 돗자리 위, 문 앞에 쌓이는 어지러운 책들을 버릴 수가 없다.정성과 노력의 편에 서면 책들의 경중을 따지기 어렵다.하지만 책이 무겁고 가볍게, 각기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실, 책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책을 보면 내가 아는 사람일수록 그 내용과 그 사람의 인격을 함께 생각해 보며 여러가지 감정을 맞이하게 된다.권성우라는 한 평론가는 비평의 언어가 시나 소설의 언어와 견주어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입증하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을 경주한다. 누가 말했던가. 비평은 영혼의 직접적 표현의 형식이라고. 시와 소설이 장르적 규칙과 문법 속에서 움직이는 목소리의 집합체라면, 비평은 비평을 쓴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이 곧 그의 비평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독특한 글쓰기다.그의 “비평의 고독”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와 내가, 이렇게 두 사람을 `and`로 묶어 놓을 수도 있다면, 지난 이십 년 동안 견디며 헤쳐온 나날들을 돌아다보았다.그와 나는 언젠가는 저 유성호 씨와 함께 “문학수첩”이라는 잡지를 냈다. 그 무렵 그와 나와 유는 어디선가로부터 각각 다르게 흘러왔다 거기서 만났고 또 각기 다른 곳으로 가면서도 드문드문,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다.“비평의 고독”이 무척 반가웠다. 그가 쓴 것들을 잘게잘게 저작해보겠다. 고독을 그도 나도 함께 나눴으므로.

2016-07-07

만두로 빚은 산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다섯 사람이 함께 산에 가기로 했다.네 사람은 전에도 더러 같이 산에 가던 사람들, 다른 한 사람은 이번에 처음 산에 가게 되었다. 네 사람 중에는 내가 끼어 있고, 다들 시인 백석의 시를 좋아한다고 해서 이른바 백석파라고 별명을 붙였다.한 사람은 늘 혼자서 산에 가시는 모양인데, 주로 포항에서요 서울 북한산 산행은 처음인 것 같았다. 포항 쪽에는 흙산뿐인지 바위산이 싫다고 처음부터 불평이다.탈은 네 사람 속에서 나와, 그중 한 사람 컨디션이 그날 따라 좋지 않고, 그러다 보니 자주 쉬고 대신에 이야기가 많게 됐다. 백석 시인의 일본 이즈반도 시모다 시 가키사키 기행시 해석 얘기도 했지만, 화제가 궁했던가, 점포세 얘기가 나왔다.돈이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빌딩을 하나 구입하자 했다 한다. 그러면 그 빌딩 가게마다 세를 주면 보증금으로 팔천만 원을 받고 한 달 월세를 500만원인가 4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말했단다. 그 편의점 같은 가게에서 월세 오백만원 주면 점포 주인은 무얼 먹고 사나, 우리 그런 짓은 벌이지 말자.그러면서, 요즘 개헌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헌법에 점포세 많이 못 받게 하는 법안도 만들 수 있게 하는 조항이라도 넣어야 한다고 했다.글쎄다. 우리 헌법은 좋다고 소문이라도 났다는데, 그게 어디 헌법에 없어서 그런 것일까.몇 년 전에 서교동 홍대입구역 9번 출구에서 나와 몇 걸음 걸어가면 만방 당구장이라고 있었는데, 그집 주인 말씀, 이 골목에 자기 집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 몇이나 될 것 같으냐.단 두 집뿐이라고 했다. 집 안 판 토박이가 단 두 집뿐이었다는 게다. 이 외지 주인들이 점포세를 물리는데, 평당 얼마 정해서 에누리 일절 없고, 또 해마다 장사가 잘 되든 못 되든 몇 프로씩 틀림없이 올려받는다 했다.내가 말한다. 그런데 그 건물주들도 은행에 빚 안진 집들이 거의 없으니, 세든 자영업자들의 피땀 어린 돈은 그 상당수가 은행으로 가느니라고. 그러니 주인들도 할 말이 많다. 은행빚 쌓이지 않으려면 집세 꼬박꼬박 비싸게 물리지 않을 수 없노라고.산에서의 이야기가 그 다음 회의의 여담으로까지 번지자, 이번에는 멤버가 바뀌어,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의 김왕배 교수가 한 말씀 하셨다.연희동 쪽에 자그마한 만두집 하는 주인한테 월세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신 적 있으시다고 한다. 만두집 사장이 월에 400만원을 낸다고 대답했다고, 그 작은 점포에서 400만원을 내면 도대체 뭘 먹고 살겠냐고 하셨다.점포세 제한 헌법 개정론을 주장하신 분이 한 번 더 개탄하며 권력구조를 의원내각제니 대통령 중임제니 할 게 아니라고, 자영업자들 살릴 수 있는 방안 같은 것, 사람들 살리는 법안을 만들어야 한단다.나는 이 설왕설래 속에서 만두가게 주인이 만두를 400만 원어치를 빚어 쪄서 그것을 몽땅 세든 점포 주인에게 바치는 장면을 상상해야 했다.사람을 하나둘 쓰는지 안 쓰는지 모르지만 자기도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사람이 새벽부터 재료를 범벅을 해서 빚고 또 빚고 찌고 또 찌고 하기를, 400만원 어치를 만들어야 그때부터 자기의 수입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그러니 이제부터 자기 수입이 생겨날 때까지 집 주인한테 바칠 400만원 어치 밀가루 반죽, 만두 속 반죽을 다 빚어내고 그것을 또 다 팔고, 거기에 사람이라도 고용했다면 그 사람 월급 몫까지 다 팔아야 그때부터 드디어 자기 몫이 생겨난다.나는 집채만한, 400만원 어치 만두 산을 떠올리며 그 산이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는, 그 입을 거쳐 또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우리 삶의 메커니즘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 악연쇄의 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어려운 것 같다. 이 고리를 끊기 전에 이 산더미 같은 만두에 만두가게 주인이 깔려죽든, 그것을 모조리 삼켜버린 누군가의 배가 탈이 나든, 무슨 일이 날 것 같다.이런 일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좀더 지혜로워야 한다.

2016-06-30

고마운 의사님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식구 중에 갑자기 아픈 사람이 있어 병원에 갔다 썩 유쾌하지 못한 일을 겪었다. 우선 응급실을 찾았더니 담당 의사, 마스크도 벗지 않고 이마에 주름을 잡고 눈살을 찌푸리며 마구잡이로 앉을 곳도, 누울 곳도 없다고 짜증을 냈다.뭔가 소리가 잘 안 들려 다시 물었더니 옆에 있던 간호사, 나이가 적지는 않은데 왜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느냐고 핀잔을 준다. 마스크 쓴 그분, 교수시라면서. 응급실에 그 시간에 환자 맞고 있는 젊은 사람이 교수 신분인지 아닌지 알 바 아니지만, 교수면 다냐?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지경이다.다음에는 진료실. 다시 수속을 밟아 한참을 기다리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의사 분 환자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몇 마디 툭툭 던지듯 묻는다. 말을 어찌나 아끼시는 분인지 몇 분 앉아 있는 동안에 서너 마디 앞뒤 짤린 말씀을 얼마나 귀하게 얻어들었는지 눈물이 쏙 빠질 지경인데 입도 가리지 않고 하품을 쩍쩍 하신다. 참, 훌륭한 의사분이셨다.몸보다 마음이 몹시 더 지쳐 씁쓸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오는데, 가만 있자, 어느 좋은 의사 분 만났던 일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난다. 어디, 누가 있었던가?제일 먼저 생각나는 의사 분은 공교롭게도 집 근처에서 오랫동안 병원을 열어놓고 계신 한의사 분이다. 이 한의원은 일단 붐비지 않아 좋다. 언제 가도 환자 손님이 한 사람이나 기다리고 있을까. 병원 설비도 구식이고 의사까지 연세가 여간 많지 않아 그런지 환자들도 새로운 곳으로 몰려가고 없다.덕분에 이 연만한 의사님은 아주 느긋하게 문진도 하고 진맥도 하고 침도 놓아 주신다. 뭣보다 한약 지어 먹으라는 소리를 일절 하지 않으신다. 늘 침만 맞으러 가도 얼굴 한 번 찌푸리는 법 없는데, 그 침이 어찌나 센지 맞을 땐 정신없고 맞고 나면 확실히 효과가 크다. 첫날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왔느냐고 물으시기에 이만저만 하다고 말씀 드렸다.“저런, 많이 힘드시겠네. 어서 나아야지. 젊은 사람이.” 하고 추임새를 넣으시는데, 그 말씀이 정말 아픈 사람 심정을 알아주는 듯했다.다음으로 생각나는 의사 분은? 서울 바로 밑 분당에 있는 모모한 병원의 외과 수술의 김 아무개 선생이시다. 그 분은 내 경험에 따르면 정말 명의라 해야 한다. 지금부터 벌써 7,8년 전에 아버지가 아프셨다. 세상에, 위와 신장에 암이 발병하셨는데, 벌써 2기 하고도 반이 넘었다 했다. 무조건 일단 대학로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언제 예약 순번이 돌아올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고민 끝에 선배 교수께 상의 말씀을 드렸다. 그 분 어머니께서 역시 암에 걸리셨는데 어디서 어느 분한테 수술을 받고 완치 되셨다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났다.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곳이 그 분당의 병원이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알려지지 않아서 사람도 별로 없고 진료실에 들어갔더니 흰 네 벽 한쪽을 철제 책상이 덜렁 차지하고 있는데, 거기 키 큰 의사 분이 환자 맞이를 했다. 친절함도 없지만 업신여김도 없고 그냥 평상심으로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런데 그분이 바로 명의 선생이셨다. 선배 선생님의 어머니도 그분께 받아서 완치, 나의 아버지도 지금까지 재발이 없으니 좋고, 무엇보다 바로 그 1년 후에 내 첫째 동생이 대장암에 걸린 것을, 바로 그 똑같은 코스를 밟아 지금 멀쩡한 것이다.고마운 의사분이 또 계셨나 생각해 본다. 한 분 더 생각났다. 내가 거의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분인데, 언제나 늘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신다. 항상 내 해당 차트를 살펴보고 무슨 변화가 있는지 찬찬히 묻고 더도 덜도 아닌 처방을 내려준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처방을 조금씩 바꾸며 환자의 몸 상태를 고려하는 그분께 나는 의사로서의 본분을 정확히 지키고자 하는 인생관을 느낀다.

2016-06-23

헌책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학교에서 서울대 입구역 쪽으로 방향 돌리면 산언덕 넘을 때까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다 가게들이 나타나는데, 그것도 다 그렇고 그런 가게들, 은행, 야구연습장 같은 것이다.서울대 입구역 사거리 건너면 아직 촌티 못 벗은 동네. 내가 갈 곳이라곤 몇십년 된 신부산횟집, 그 옆에 막걸리 파는 만복국수집뿐.그런데, 얼마 전에 변화가 생겼다. 모퉁이 인근 빌딩 2층 자리에 제법 큰 헌책방이 생긴 것이다.가로수에 가려 있어 처음엔 무심코 지났는데 자꾸 지나치다 보니 서점임을 알겠다. 약속 시간 바쁜데도 그냥 못 지나치고 기어이 들어가 본다. `옛날` 버릇을 아직 못 고친 것이다.10년전, 아니 5년 전만 해도 가끔 고정적으로 들르는 헌책방이 몇 곳 있었다. 옛날에 다 떨어진 딱지본 40여권을 물경 60만원에 사던 시간강사 시절, 그때는 돈 없을 망정 기개가 있었다. 넓지도 않은 헌책방을 이중 서가의 슬라이드를 앞뒤 다 훑어보며 책 호사를 하던 여유가 있었다.지금은 그렇지 못한 때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뻔히 지나치면서도 그렇고 그러려니 한다. 책 한 권 손안에 들이는 것도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 없다. 무엇 때문일까.우선, 나이 탓일 것이다. 어렸을 때는 옛날 이야기책, 소설책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여자도 나이 들면 얘기책 보는 시간이 그렇게 아깝고 초조할 수 없는 이치 같다. 그러고서도 티비 드라마는 안 놓치려고 드는. 인생의 시간이 적게 남을수록 책이라는 `좁은` 세계에 시선을 뺏기는 게 두려워지는 것이다.다음엔 돈이다. 취미도 비용이 너무 많이 들면 조심하게 된다. 아무리 재미 있는 일도 한번에 드는 돈이 크면 마냥 즐길 수 없는 까닭에.그리고 자제하다 보면 자연히 흥미도 덜 당기게 된다. 관심이 적어지다 못해 아예 외면하게 될 수도 있다. 헌책 찾는 것도 그런 취미 활동의 하나라면 하나다.헌 책이 그런대로 싸던 시절에는 그나마 `횡재`하는 재미도 있었다. 눈 먼 헌책장사님께는 죄송스럽지만 좋은 책, 값진 책을 싼 값에 사는 도둑 취미랄까. 하지만 지금은 없다. 인터넷 세상에 경매 세상, 어지간히 희귀한 책도 전부 온라인 상에 가격이 매겨지고, 사는 사람들끼리 경쟁을 붙여 고가를 만든다. 웬만한 좋은 책은 불렀다 하면 삼십만원이요, 그보다 더 나은 책은 아예 서점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다들 경매쪽에 몰리는 까닭이다.헌책이 무서운 시절을 실감하며 지냈건만 오늘은 어쩌자고 또 헌책방을 찾아 올라갔더란 말인가.들어가고 보니 책들이 참 가지런히 꽂혔다. 예전에 햇볕에 비바람 맞으며 창밖에 널려 있던 신세는 면했다. 종류대로, 크기별, 시대별로 제법 상당히 분류도 되어 있고, 좀더 가치가 있는 책은 안쪽에 따로 들어 눈 좋은 사람들을 기다린다.또, 얼추 정가제 가깝도록 책 값도 붙어 있고 붙여 놓는 작업도 하고 있다. 컴퓨터로 갓 들어온 책들을 등록시키고 가격을 매겨놓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보자. 내가 훔친 여름이라. 김승옥 소설집 초판인데, 2만 5천원이다. 싸다. 그런데 이건 1960년대 것이 아니라 1980년에 다시 나온 것 같다. 박경리의 장편소설도 보이는데 8천원이다. 역시 싸다. 판권란을 보니 중판이다. 이문열 소설집도, 장편소설도 보인다. 구로아리랑이라면 그때는 흔하디흔했는데, 지금 보니 그래도 값지게 보인다. 더구나 초판이다. 또, 보자. 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도 있다. 이건 12만원을 붙였다. 아직, 이렇게 매길 때는 안된것도 같지만 판형도 특이하고, 책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오늘의 수확은, 함북대관이라는 책이다. 함경북도에 관한 책인데, 청진도 나오고 결빙기의 웅기 항 사진도 나오고 주을 온천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이런 책이 많이 팔렸을 리 만무하니 당연히 초판. 1만 8천원이면 아주 잘 산 것 같다.결국 나는 이런저런 헌 책들을 10만원어치나 사들고 나왔다. 안 먹어도 벌써 배부른 짜장면 같은 책들. 아뿔싸, 제 버릇 남 주기 참으로 어렵다.

2016-06-16

서울 낙타산에서 한 생각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낙산이라… 오늘 내가 찾아가야 할 산은 낙산이다. 낙산이라 하면 옛날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 산 중의 하나. 그 위치는 쉽게 말하면 대학로 동숭동 뒤라고 하면 쉽게 알 수 있을까. 달리 말하면 동대문을 종로 쪽에서 청량리 쪽으로 바라보고 왼편에 있는 언덕 쪽, 언덕이라 하지만 기실 다 올라가고 보면 산인 곳이 그곳이다.동대문 왼편으로 숭인동, 이화동, 동숭동, 효제동 같은 옛날 이름 동들이 많은데 그 뒤에 병풍처럼, 낙타 등허리처럼, 길고도 그 가운데가 잘록하게 들어간 것 같은 산이 바로 낙타산, 줄여서 낙산이다.이 산은 웬만한 서울 사람들도 눈여겨 보지 않으면 아는 사람 많지 않지만 최근에 그쪽 낙산공원이 되어 있는 곳이 이른바 보통집 담벼락에 벽화를 많이 그려 놓았다고 해서 명소가 되어 있다고도 한다.이 낙타산이 내게 걸어온 것은 이 산밑 어딘가가 임화가 세상에 난 곳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그냥 낙산이려니 했던 것이, 몇 년전 한성대에 무슨 발표할 일이 있어 갔다 우연히 학교 뒤로 산책이라도 하러 나가니 그곳이 곧 낙산이었다. 그러니까 이 산은 동대문부터 한성대 인근까지 길기도 길게 늘어선 산인 것이다.시인이자 평론가이고 문학사가이기도 한 임화, 그는 1920년대 후반에는 무성영화 배우였고, “유랑”이나 “혼가”같은 작품에 주연을 했으며, 얼굴이 서양 청년처럼 희고 날카롭게 생겨 당대의 만문만화가이자 영화 감독이기도 한 안석영이 그를 가리켜 조선의 발렌티노라 불렀다. 발렌티노는 그 시대의 이탈리아 명 무성배우다. 그 임화는 1908년생, 낙산 밑 오두막집에서 났다고 했는데, 최근에 그가 1931년에 치안유지법으로 종로서에 잡혀가 사진을 두 장 찍었던 바, 각기 본적이 하나는 당주동, 하나는 숭인동으로 나와 있다. 창원대의 임화 전공하신 박정선 교수에게 어느 쪽이 맞는지 여쭈어 봐야할 일이다.그는 보성고보 출신이다. 완전히 졸업을 한 것은 아니고 학제가 바뀌는 과도기에 학교를 5년급에 때려치우고 집에서도 나와 그로부터 영영 거리의 시인으로 떠돌며 상징파도 하고 다다이즘, 미래파도 되고, 그러다가 마침내 마르크시스트가 되었다.이 모든 사조들을, 다 마샬 버만 식으로 보면 이른바 모더니즘이다. 사회적 모더니티, 즉 사회가 현대성을 향해 나아갈 때 예술은 그 현대성에 대응하는, 즉 현대성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그것에 미학적으로 반응하는 다양한 미학적 경향들을 산출하게 된다. 상징주의, 데카당티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인상파, 표현주의, 또 그것들과 겹치는 아방가르드, 이탈리아와 러시아의 미래파 같은 것들을 통칭해서 모더니즘이라 할 수 있고, 서구 예술은 그 모든 것을 꽤 오랜 시간에 걸쳐 겪어나갔다.반면 한국에서 이 모든 사조는 마치 양동이에 든 잡동사니가 엎어지듯이 한꺼번에 문학판에 쏟아져 버린다. 이것은 물론 서구에 이 모든 것들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문학이 그 모든 가능성들을 힘껏 시험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임화는, 김윤식 교수가 일찍이 말씀하셨듯 특이한 존재다. 그는 그 많은 사조들을 1920년대 중후반기의 짧은 몇 년 동안에 `다` 거치고 마르크시즘까지 나아갔다.그 많은 `모더니즘` 사조들 가운데 마르크시즘 문학은 특별한데, 다른 사조들이 자본주의적 현대성에 미학적 반응을 보이는데 불과했다면 마르크시즘 문학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현대 자체를 뛰어넘을 것을 목표로 하는 전체 운동의 일부가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임화는 거기에까지 이르렀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해방 후 좌우익이 대립하는 가운데 월북한 그는 6.25 전쟁 직후 북한 당국에 의해 처형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오늘 나는 그의 고향인 낙산에 올라 대학로 밑으로 펼쳐진 종로 서울 세상을 내려다보며, 역사를 살아가며 지혜로울 수 있는 존재는 과연 몇 사람이나 될지 생각해 본다. 그는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보고자 했으나 그의 귀결점은 그 베일을 완전히 벗기지 못한 채 끝난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발 아래로 그가 폐결핵 요양을 떠나며 찾아갔던 종로 세상이 보인다. 아무리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려 해도 그 사랑이 결실을 맺기는 너무나 어렵다.

2016-06-02

이광수 산장에서 탕춘대성으로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자하문터널을 통과해 나가면 서울 풍경은 완연히 산에 가까워진다.그렇잖아도 사방에 둘러친 땅에 도읍을 정했던 서울이다. 남산, 낙산, 인왕산, 백악산 등 경복궁에 자리잡은 조선 왕의 터전은 남동서북산을 거느리고 평온하고도 평정한 마음세계를 표상하고 있다.여기서 한 걸음 성큼 더 산에 가까워진 것 같은 자하문 바깥. 경복궁 서쪽 서촌에서 시작된 옛 서울 자취가 더 은근히 지속되고 있는 것 같은 홍지동 이광수 산장을 찾아가는 길이다.이 산장의 옛날은 서울 바깥 홍지리, 나중에 일본식 홍지정이 되었다가 해방 후에 비로소 홍지동이 되었다. 옛날에 이광수가 조선일보 촉탁 부사장이던 무렵, 이곳은 풍광 좋은 별장터였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경치 찾아 별장을 지었으되 법화경 대승 불교 행자됨을 표방하고 도닦는 나날을 보냈다.상명대학교 올라가는 언덕길에서 오른쪽 샛길로 살짝 빠져 좁고 가파른 언덕길 이십여 미터 올라가면 왼쪽 어느 대문 옆에 산장터 표지판이 나오고 높으막한 담장 위로 향나무, 이광수 시대에도 있었다는 나무가 보인다.나는 여기 잠시 서서 명성과 오욕이 교차하는 삶을 바람처럼 살다간 한 사내를 추억했다. 1892년생, 6·25전쟁 나던 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환갑을 만나지 못한 짧은 생이었다. 그는 결혼을 두 번 했고, 일본에 유학도 두 번을 했고, 2·8 유학생 독립선언을 기초하고 상하이로 나아갔지만 곧 돌아와 `현실`속에 머무르면서도 그렇지 않은 삶을 동경하는 포즈를 버리려 하지 않았다.1933년에서 1934년으로 넘어가는 때는 이광수에게는 마음의 시련이 컸던 해였다. 이 무렵에 이광수는 오래 몸담고 있던 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면서 세간의 비난을 다시 한 번 샀고 사랑하는 아들 봉근의 죽음을 겪었으며, 모윤숙과의`사랑`문제로 밖으로 드러내지 못할 번민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불과 몇 달 만에 조선일보 부사장 직을 사임하고 금강산으로 갔다 돌아와 1934년 8월 무렵 홍지동 산기슭에 산장을 짓고 행자 생활을 만들어 나갔다.이 홍지동 산장 시대는 그가 장편소설`사랑`을 끝내고 별장을 판 이야기를 쓴`육장기`(`문장`, 1939년 9월)가 발표되는 해까지 계속되었다. 그 1939년 5월 그의 산장은 육천 원에 팔리었고 그는 효자정으로 거처를 옮겼다.이 5년 시간 동안에 이광수의 문학적 산물은 뜻밖에 부진해 보인다. 산장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그는 가장 아름다운 소설 중 하나인`유정`을 썼다. 그러나 `그 여자의 일생`, `이차돈의 사`, `애욕의 피안`, `그의 자서전`등으로 이어진 작품들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해 보이고 문학성의 정체를 맛보게 하는 듯하다. 그러다 마침내`사랑`상하편이 나온다. 그게 1938년 8월과 1939년 상반기다. 나는`유정`과 더불어`사랑`을 이광수 문학의 최고봉으로 본다.이광수의 홍지동 산장을 뒤로 하고 내려온 길에 나는 문득 이곳이 연산군의 사연이 얽혀 있는 탕춘대가 있던 부근임을 깨닫는다. 지금 탕춘대는 사라지고 사적 표지문만 남아 있고 홍지문을 새로 만든 자리에 탕춘대성의 성곽만 일부 남아 있다.홍지문은 숙종 때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해 지었다는 문으로 왕이 친히 편액을 하사했다고 한다. 탕춘대는 1506년에 연산군이 좋은 풍광을 즐기기 위해 지었다는 누대로, 한자 그대로 봄을 탕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여기서 탕(蕩)은 쓸어버리는 것이고 흐르게 하는 것이다.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난 것이 바로 그 1506년이다. 현재 신영동 136번지, 그곳에 연산군은 냇가에 수각(물에 지은 정자)을 짓고 미희들을 희롱하며 놀았다.지금 봄이 얼추 끝나가고 있다. 연산군도, 이광수도 모두 인생을 다사다난하게 보냈지만 결국은 일장춘몽처럼 내주고 스러졌다. 이광수 산장을, 홍지문을 뒤로 하고 나는 연산군의 탕춘대가 탕춘대성 이어진 어디쯤에 있는가 가늠해 보며 또 한 번의 봄이 끝나가고 있음을 의식하며 서울 풍진 속으로 돌아간다.

2016-05-26

임을 위한 행진곡 시대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돌이켜 보면 그런 시대가 있었다. 대학은 자율화라고 하는데, 그 말뜻을 알 수 없었다. 자유가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던 스무 살 젊은 아이에게 자율화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대학 캠퍼스 내에 경찰 등이 진주하지 않게 된 것, 그것이 자율화를 단적으로 상징한다는 것은 선생님들이 아니라 선배들이 가르쳐 주었다.그 시대에 대학은 4월에서 5월로 넘어가며 더욱 소란스러워지고 위기감이 돌았다. 고교의 꽉 짜인 시간표에서 벗어난 것은 좋았는데, 그렇다고 강의, 수업이 아예 없어지다시피 한 것 같은 봄은 무료하기도 했고 괴롭기도 했다.나는 무엇하러 대학에 왔던가? 3월에서 4월로 가는 사이에 내가 어떤 사람이며 뭘 하려는 사람인지가 진공 상태가 되었다. 기숙사에서 느지막이 나와 캠퍼스 잔디밭이나 도서관에 혼자 앉아 사르트르나 까뮈를 읽고, 소설책, 시집을 들고다니며 강의실 밖으로만 돌았다.공식적인 제도들로부터 거의 완전히 유리된 채 신입생들은 선배들과의 만남에 자기 정신의 발육을 전적으로 의지하다시피 했다. 정신적으로 어린 학생들이 교수를 비롯한 성숙한 정신들과의 만남을 기피하거나 부정하고 짧은 공부와 전망에 내맡겨진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캠퍼스는 그렇게 움직였다. 각종 향우회, 동문회, 오픈 서클(단과대 서클과 이른바 본부 서클), 언더 서클(그것은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칡넝쿨처럼 가지를 쳐 나갔다), 학도호국단, 학생회 준비위원회, 학과 학생회) 같은 것들이 신입생들을 이리저리 끌어당기는 상황이 일 년 내내 지속되었다.그래도 시국이나 정치에서 떨어져 자기 자신만의 자유를 향유하고 싶은 마음은 컸다. 겨우 여름방학을 맞이하자 혼자 배낭을 매고 기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가 홍도로 배를 타고 건너갔다 왔다. 히치하이킹으로 술을 가득 실은 트럭을 얻어타고 옥곡 역이라는 곳까지 가서는 진주를 찍고 대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2학기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냥 무위한 나날이었을 것이다. 강의실에 들어간다는 것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도, 모두 의미없이 느꼈다. 불행하다면 불행한, 의식 몽롱한 나날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향우회에서 만난 독문과 선배를 따라 들어간 연극회에서 워크숍 공연 준비 같은 것으로 시간을 메울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사회에 나간 연극회 선배들이 공연을 마친 후배들을 이박삼일 술을 사주었다.겨울은 눈이 많이 내려서 좋았다. 대학에 처음 원서를 들고 찾아갔던 겨울처럼 이듬해 겨울도 눈이 발목을 덮도록, 종아리까지 빠지는 날도 있도록 눈들이 내렸다. 몇몇 아주 친해진 친구들끼리 고시공부 한다는 친구 방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늦게 일어나 걸어서 캠퍼스로 들어가 눈맞이를 하고 희희낙락거리며 현실이 어떤 모양인지 알려 하지 않았다.또 봄이 오고 사월이 되었다. 지난해와 똑같이 사월혁명 기념식이 치러지고 학교 안에서 집회를 마친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최루탄이 쏟아지고 돌을 던지고 했다. 나는 돌을 던지면 전경들이 맞을 텐데 왜 던져야 하느냐고 생각하며 우울해 했다. 더 큰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라 했지만, 그런 선배들의 논리에는 분명 어떤 결함이 있었다.이제 오월이 되었다. 학생회에서 주관하여 학생회관에서 광주 학살 관련 영상물을 보여준다고 했다. 독일 기자가 찍어간 것이 역으로 국내로 몰래 반입된 것이라 했다. 광주에서 시민과 학생이 이천 명은 희생되었을 거라는 소문이 횡행할 때였다. 이 숫자는 실제 숫자보다는 너무 많이 상상된 것이기는 했다.그는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 1937년 7월 6일~2016년 1월 25일), 푸른 눈의 목격자였다. 그가 찍은 필름 안에 그 크다는 폭력의 실체가 들어 있었다. 충격이 컸다. 시위가 용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이후의 나날들은 아마도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무척 불행한, 어두운, 청춘의 나날이었다.

2016-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