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그런 시대가 있었다. 대학은 자율화라고 하는데, 그 말뜻을 알 수 없었다. 자유가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던 스무 살 젊은 아이에게 자율화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대학 캠퍼스 내에 경찰 등이 진주하지 않게 된 것, 그것이 자율화를 단적으로 상징한다는 것은 선생님들이 아니라 선배들이 가르쳐 주었다.
그 시대에 대학은 4월에서 5월로 넘어가며 더욱 소란스러워지고 위기감이 돌았다. 고교의 꽉 짜인 시간표에서 벗어난 것은 좋았는데, 그렇다고 강의, 수업이 아예 없어지다시피 한 것 같은 봄은 무료하기도 했고 괴롭기도 했다.
나는 무엇하러 대학에 왔던가? 3월에서 4월로 가는 사이에 내가 어떤 사람이며 뭘 하려는 사람인지가 진공 상태가 되었다. 기숙사에서 느지막이 나와 캠퍼스 잔디밭이나 도서관에 혼자 앉아 사르트르나 까뮈를 읽고, 소설책, 시집을 들고다니며 강의실 밖으로만 돌았다.
공식적인 제도들로부터 거의 완전히 유리된 채 신입생들은 선배들과의 만남에 자기 정신의 발육을 전적으로 의지하다시피 했다. 정신적으로 어린 학생들이 교수를 비롯한 성숙한 정신들과의 만남을 기피하거나 부정하고 짧은 공부와 전망에 내맡겨진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캠퍼스는 그렇게 움직였다. 각종 향우회, 동문회, 오픈 서클(단과대 서클과 이른바 본부 서클), 언더 서클(그것은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칡넝쿨처럼 가지를 쳐 나갔다), 학도호국단, 학생회 준비위원회, 학과 학생회) 같은 것들이 신입생들을 이리저리 끌어당기는 상황이 일 년 내내 지속되었다.
그래도 시국이나 정치에서 떨어져 자기 자신만의 자유를 향유하고 싶은 마음은 컸다. 겨우 여름방학을 맞이하자 혼자 배낭을 매고 기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가 홍도로 배를 타고 건너갔다 왔다. 히치하이킹으로 술을 가득 실은 트럭을 얻어타고 옥곡 역이라는 곳까지 가서는 진주를 찍고 대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2학기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냥 무위한 나날이었을 것이다. 강의실에 들어간다는 것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도, 모두 의미없이 느꼈다. 불행하다면 불행한, 의식 몽롱한 나날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향우회에서 만난 독문과 선배를 따라 들어간 연극회에서 워크숍 공연 준비 같은 것으로 시간을 메울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사회에 나간 연극회 선배들이 공연을 마친 후배들을 이박삼일 술을 사주었다.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려서 좋았다. 대학에 처음 원서를 들고 찾아갔던 겨울처럼 이듬해 겨울도 눈이 발목을 덮도록, 종아리까지 빠지는 날도 있도록 눈들이 내렸다. 몇몇 아주 친해진 친구들끼리 고시공부 한다는 친구 방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늦게 일어나 걸어서 캠퍼스로 들어가 눈맞이를 하고 희희낙락거리며 현실이 어떤 모양인지 알려 하지 않았다.
또 봄이 오고 사월이 되었다. 지난해와 똑같이 사월혁명 기념식이 치러지고 학교 안에서 집회를 마친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최루탄이 쏟아지고 돌을 던지고 했다. 나는 돌을 던지면 전경들이 맞을 텐데 왜 던져야 하느냐고 생각하며 우울해 했다. 더 큰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라 했지만, 그런 선배들의 논리에는 분명 어떤 결함이 있었다.
이제 오월이 되었다. 학생회에서 주관하여 학생회관에서 광주 학살 관련 영상물을 보여준다고 했다. 독일 기자가 찍어간 것이 역으로 국내로 몰래 반입된 것이라 했다. 광주에서 시민과 학생이 이천 명은 희생되었을 거라는 소문이 횡행할 때였다. 이 숫자는 실제 숫자보다는 너무 많이 상상된 것이기는 했다.
그는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 1937년 7월 6일~2016년 1월 25일), 푸른 눈의 목격자였다. 그가 찍은 필름 안에 그 크다는 폭력의 실체가 들어 있었다. 충격이 컸다. 시위가 용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이후의 나날들은 아마도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무척 불행한, 어두운, 청춘의 나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