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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낙타산에서 한 생각

등록일 2016-06-02 02:01 게재일 2016-06-0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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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낙산이라… 오늘 내가 찾아가야 할 산은 낙산이다. 낙산이라 하면 옛날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 산 중의 하나. 그 위치는 쉽게 말하면 대학로 동숭동 뒤라고 하면 쉽게 알 수 있을까. 달리 말하면 동대문을 종로 쪽에서 청량리 쪽으로 바라보고 왼편에 있는 언덕 쪽, 언덕이라 하지만 기실 다 올라가고 보면 산인 곳이 그곳이다.

동대문 왼편으로 숭인동, 이화동, 동숭동, 효제동 같은 옛날 이름 동들이 많은데 그 뒤에 병풍처럼, 낙타 등허리처럼, 길고도 그 가운데가 잘록하게 들어간 것 같은 산이 바로 낙타산, 줄여서 낙산이다.

이 산은 웬만한 서울 사람들도 눈여겨 보지 않으면 아는 사람 많지 않지만 최근에 그쪽 낙산공원이 되어 있는 곳이 이른바 보통집 담벼락에 벽화를 많이 그려 놓았다고 해서 명소가 되어 있다고도 한다.

이 낙타산이 내게 걸어온 것은 이 산밑 어딘가가 임화가 세상에 난 곳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그냥 낙산이려니 했던 것이, 몇 년전 한성대에 무슨 발표할 일이 있어 갔다 우연히 학교 뒤로 산책이라도 하러 나가니 그곳이 곧 낙산이었다. 그러니까 이 산은 동대문부터 한성대 인근까지 길기도 길게 늘어선 산인 것이다.

시인이자 평론가이고 문학사가이기도 한 임화, 그는 1920년대 후반에는 무성영화 배우였고, “유랑”이나 “혼가”같은 작품에 주연을 했으며, 얼굴이 서양 청년처럼 희고 날카롭게 생겨 당대의 만문만화가이자 영화 감독이기도 한 안석영이 그를 가리켜 조선의 발렌티노라 불렀다. 발렌티노는 그 시대의 이탈리아 명 무성배우다. 그 임화는 1908년생, 낙산 밑 오두막집에서 났다고 했는데, 최근에 그가 1931년에 치안유지법으로 종로서에 잡혀가 사진을 두 장 찍었던 바, 각기 본적이 하나는 당주동, 하나는 숭인동으로 나와 있다. 창원대의 임화 전공하신 박정선 교수에게 어느 쪽이 맞는지 여쭈어 봐야할 일이다.

그는 보성고보 출신이다. 완전히 졸업을 한 것은 아니고 학제가 바뀌는 과도기에 학교를 5년급에 때려치우고 집에서도 나와 그로부터 영영 거리의 시인으로 떠돌며 상징파도 하고 다다이즘, 미래파도 되고, 그러다가 마침내 마르크시스트가 되었다.

이 모든 사조들을, 다 마샬 버만 식으로 보면 이른바 모더니즘이다. 사회적 모더니티, 즉 사회가 현대성을 향해 나아갈 때 예술은 그 현대성에 대응하는, 즉 현대성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그것에 미학적으로 반응하는 다양한 미학적 경향들을 산출하게 된다. 상징주의, 데카당티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인상파, 표현주의, 또 그것들과 겹치는 아방가르드, 이탈리아와 러시아의 미래파 같은 것들을 통칭해서 모더니즘이라 할 수 있고, 서구 예술은 그 모든 것을 꽤 오랜 시간에 걸쳐 겪어나갔다.

반면 한국에서 이 모든 사조는 마치 양동이에 든 잡동사니가 엎어지듯이 한꺼번에 문학판에 쏟아져 버린다. 이것은 물론 서구에 이 모든 것들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문학이 그 모든 가능성들을 힘껏 시험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임화는, 김윤식 교수가 일찍이 말씀하셨듯 특이한 존재다. 그는 그 많은 사조들을 1920년대 중후반기의 짧은 몇 년 동안에 `다` 거치고 마르크시즘까지 나아갔다.

그 많은 `모더니즘` 사조들 가운데 마르크시즘 문학은 특별한데, 다른 사조들이 자본주의적 현대성에 미학적 반응을 보이는데 불과했다면 마르크시즘 문학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현대 자체를 뛰어넘을 것을 목표로 하는 전체 운동의 일부가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임화는 거기에까지 이르렀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해방 후 좌우익이 대립하는 가운데 월북한 그는 6.25 전쟁 직후 북한 당국에 의해 처형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그의 고향인 낙산에 올라 대학로 밑으로 펼쳐진 종로 서울 세상을 내려다보며, 역사를 살아가며 지혜로울 수 있는 존재는 과연 몇 사람이나 될지 생각해 본다. 그는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보고자 했으나 그의 귀결점은 그 베일을 완전히 벗기지 못한 채 끝난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발 아래로 그가 폐결핵 요양을 떠나며 찾아갔던 종로 세상이 보인다. 아무리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려 해도 그 사랑이 결실을 맺기는 너무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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