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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과 3·11의 기억

등록일 2016-09-22 02:01 게재일 2016-09-2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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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미국에 9.11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3.11이 있었다. 미국의 9.11은 빈 라덴이 주도한 테러와 관련된 것으로, 우리 모두 그 끔찍한 장면을 텔레비전 생중계로 시청하다시피 했다. 그때 이슬람 테러주의자들은 쌍둥이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미국무성 빌딩을 비행기로 돌진시켜 무너뜨림으로써 새로운 세기가 희망과 평화의 시대가 될 수 없을 것임을 예고했다. 2001년 9월 11일이었다.

그로부터 근 10년 지난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쪽 바다 밑에서 진도 9.0의 기록적인 지진이 발생했고 이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해일이 해안으로 밀려들었다. 이 해일의 전개 장면들을 역시 우리는 유튜브로 바라볼 수 있었다. 자연은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일깨워 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르침이라기보다 저주 어린 앙갚음에 가까워 보였다.

해안 항구와 마을들로 밀려든 바닷물은 멀리서 보면 한갓 평화로운 조류 같았지만 막상 해안에 정박한 배들과 줄줄이 늘어선 목조 건축물들에는 험상궂기 짝이 없는 사신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물은 배들을 박살내고 떠밀어내고 건물들을 땅에서 떼어내 조류에 밀려 논두렁 들판으로 떠다니게 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파도가 잡아챌세라 바퀴를 바쁘게 놀려 달아나고자 했지만 끝내 집채만한 물결에 장난감 나무배처럼 휩쓸려 버렸다. 하지만 더 큰 비극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이 해일, 쓰나미가 해안가에 늘어서 있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 밀려들자 훌륭한 내진 설계까지 갖추고 있던 원자력 발전소들을 `무너뜨려` 버렸다.

발전소의 핵 원자로들이 폭발을 일으키고 방사능이 외부로 누출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미 해일로 2만5천명이나 되는 희생자를 냈지만 지진과 해일은 인간이 쌓아올린 기술의 총화라고나 할 원자력발전소에 구멍을 냄으로써 후쿠시마 일대를 사람이 주거할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변질시켰다. 현대판 남부여대 피난민들이 줄줄이 고향을 떠나 피신하고 기르던 가축들이 주인을 잃고 방치된 채 굶어 죽어가는 시체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는 죽음의 땅. 일본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일본 열도의 중심 혼슈의 허리에 구멍이 뚫리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고 이 사태는 여전히 지금도 진행 중이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 부모를 잃은 아이들, 오염된 들과 바다는 근본적 해결책 없는 원자력발전소가 얼마나 심각한 병소인가를 깨닫게 했다.

이로부터 `3.11의 사상`이라는 것이 배태되었다. 그러니까 미국에 `9.11의 사상`이라는 게 성립 가능하다면 일본에서는 `3.11의 사상`이라는 사건이 사상을 낳는 초유의 가능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벌어진 이슬람 테러의 세계무역센터, 펜타곤 공격은 종교간 충돌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야기하는가를 시연해 주고 그럼으로써 21세기의 인간이 상호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짜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의 `3.11`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이나 지배라는 환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면서 자기 확신, 독단에 근거한 자연의 개발과 훼손이 초래할 수 있는 파멸의 위험을 알려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조심스럽고 겸허하게 살아가는 길을 찾을 것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9.11이든, 3.11이든 미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전체로서의 국체나 정부는 이 두 사태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했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짓밟은 것으로, 증오 어린 복수로 자신들이 입은 피해의 심리적 보상을 꾀했고, 일본 정부는 `원발`(原發)의 근원적인 문제점을 외면한 채, 사태의 진행을 쉬쉬하면서 국민들을 안심시키는데 골몰하고 있다.

그러면 한국인들, 우리는 어떤가.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미증유의 사태들로부터 아무 가르침도 얻지 못한 것 같다. 귀머거리요 눈먼 사람들이다. 우리 앞에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 과연 우리는 피해갈 수 있을까. 우리가 바라는 건 단지 요행뿐 아닐까. 끔찍하게 무서운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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