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비평의 고독

등록일 2016-07-07 02:01 게재일 2016-07-07 19면
스크랩버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바로 며칠 전, 권성우 교수의 평론집을 받았다. 마침 전화를 드릴 시간이 없었다. 시간 여유라기보다는 마음의 여유였을 것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데, 자동차를 끌고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며 하루종일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

오늘 비로소 그 여유란 것이 생겼다. 오늘도 무슨 물건도 사고, 사람도 실어나르고, 밥도 사고, 일도 하는데, 권선배 생각이 났다. 전화를 했다. 처음에 받지 않으시기에 문자를 남겼다. 훌륭한 평론집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교토에 있노라고 하셨다. 내가 일들에 지쳐 마음 속은 쓰러져버릴 지경임에도 계속 일을 하는데 전화가 왔다.

마음에 준비되지 않은 말들이 그냥 흘러나왔다. 언제 서울에 오시느냐, 서울 돌아오시면 제가 후배들과 함께 조촐한 저녁 자리라도 만들어 드리겠다고 했다. 전화는 분위기 좋게 끝났다. 나는 마저 일을 하면서도 계속 그 평론집의 이미지를 생각했다. 두껍게 엮은 “비평의 고독”, 그 속에 자리잡은 그의 비평가적 인격에 관해 생각했다.

평론가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일까? 세상의 비난을 한몸에 받고 있는 종합 편성 채널의 정치 평론가는 정말 백해무익할까? 발레에서, 미술에서 평론가들은 귀하게 모셔지고 글값도 높다는데, 꼭 그것만큼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일까.

문학의 평론가는 도대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을 할까? 소설집, 시집 뒤에 발문을 쓰는 해설가는, 모모한 문학 출판사에 전속된 것처럼 보이는 평론가는 주례사만을 쓰다 천한 삶을 마치는 것일까?

평론가들을 비난하는 이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평론가는 삼류라고 한다. 시도 못 쓰고 소설도 못 쓰니 평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말씀을 듣다보면 그 사람이 다시 보여진다.

세상의 일들은 다 같이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또 귀하다고 생각한다. 늦가을에 저 길가의 가로수의 낙엽을 쓰는 사람도 오늘의 가치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남의 집 담을 넘어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조차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하물며 애를 써 남의 이론과 표현을 읽고 그것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평론가는, 의미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학교 사물함에 책들이 두껍게 쌓일 때가 많다. 어느 때는 그 책들을 보며 한숨이 날 때도 많다.

책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미다. 어떤 동료는 연구실 하나 분량의 소장 가치 있는 책 말고는 소유하지 않으려 한다고 한다. 또 어떤 후배는 하루에 책 한 권을 버리는 것으로 목표를 삼고 책의 양을 조절하겠다고 한다. 나는 그 책을 버리기 힘들다. 그 한 권 한 권에 보낸 사람의 정성과 노력이 담겨 있음을 생각하면 내 책장, 책상 위, 돗자리 위, 문 앞에 쌓이는 어지러운 책들을 버릴 수가 없다.

정성과 노력의 편에 서면 책들의 경중을 따지기 어렵다.

하지만 책이 무겁고 가볍게, 각기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실, 책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책을 보면 내가 아는 사람일수록 그 내용과 그 사람의 인격을 함께 생각해 보며 여러가지 감정을 맞이하게 된다.

권성우라는 한 평론가는 비평의 언어가 시나 소설의 언어와 견주어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입증하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을 경주한다. 누가 말했던가. 비평은 영혼의 직접적 표현의 형식이라고. 시와 소설이 장르적 규칙과 문법 속에서 움직이는 목소리의 집합체라면, 비평은 비평을 쓴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이 곧 그의 비평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독특한 글쓰기다.

그의 “비평의 고독”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와 내가, 이렇게 두 사람을 `and`로 묶어 놓을 수도 있다면, 지난 이십 년 동안 견디며 헤쳐온 나날들을 돌아다보았다.

그와 나는 언젠가는 저 유성호 씨와 함께 “문학수첩”이라는 잡지를 냈다. 그 무렵 그와 나와 유는 어디선가로부터 각각 다르게 흘러왔다 거기서 만났고 또 각기 다른 곳으로 가면서도 드문드문,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다.

“비평의 고독”이 무척 반가웠다. 그가 쓴 것들을 잘게잘게 저작해보겠다. 고독을 그도 나도 함께 나눴으므로.

방민호칼럼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