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만주는 넓고 푸르렀다. 4박5일 일정. 중국 대련으로 들어가 단동으로 갔다, 통화를 거쳐 유하로 갔다, 심양을 거쳐 다시 대련으로 해서 돌아오는 코스였다. 이 여행 목적은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 그는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만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친 선각자였다. 때문에 여행은 그가 갇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여순 감옥과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곳들을 살펴보는 2100km의 장거리 여행이 되었다. 힘들었다. 그러나 배운 것이 많았다.여순 감옥은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이 투옥되어 있던 곳, 감옥은 파놉티콘의 원형 감시 구조를 살려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볼 수 있도록 돼 있었다.여기서 필자는 처음으로 신채호 선생의 면영을 가까운 곳에서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던 민족사학자라는 투사적 이미지와 달리, 눈이 맑고 의지적이면서도 선비적인 문사 기질이 배어나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이 감옥의 끔찍한 기물 가운데 하나는 교수대였다. 교수대 밑에는 교수형 당한 사람이 떨어지는 원형의 통이 세워져 있었다. 죄수가 그 안으로 떨어져 죽으면 통 뚜껑을 닫아서 죄수들로 하여금 메고 가 통째 파묻도록 했다고 한다.독립운동을 하던 우리의 선인들이 이렇게 참혹하게 죽어 이국땅 감옥 모퉁이에 묻혔을 생각을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1906년경 이회영을 비롯해 안창호, 이갑,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 신채호 등은 신민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울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이들의 운명은 이 신민회와, 이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따라 만주라는 무대를 중심으로 비극적으로 펼쳐져 갔다.만주는 동북 3성, 즉 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 등 3개 성을 이르는 말. 이 가운데 필자가 이번에 여행한 요령성은 어쩌면 그렇게 한반도 산하와 꼭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산세며 들의 모양이며, 전혀 낯설지 않은 풍광에 모두들 우리네 강원도 같다고들 했다. 어떤 이는 바로 이 자연의 공통성이 만주와 우리 민족의 깊은 유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도 했다.한국의 자연을 닮은 이 곳에 조선족 사람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얼마 안 있으면 설립 백 주년을 맞이하게 된다는, 인근 지역에서 유일한 조선족 학교 하나를 방문하게 됐다. 유하에 있는 이 학교의 교장은 여자 선생님, 이 분은 한국과의 교류 이후 조선족 사람들의 공동체가 해체되어 가고 있음을 안타까운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경제를 따라, 먹고 사는 일을 따라 `한국` 사람들이 집합적 공동성을 상실하고 생존을 향한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는 것이었다.생존을 향한 몸부림은 우리를 안내해 준 여자 가이드의 모습에서도 드러났다. 북한에 친척이 있는 중국 국적 조선족인 이 여자는 심양, 대련, 단동 같은 도시를 중심으로 물건을 떼다 북한에 갖다 파는 보따리 행상을 겸하고 있었다.우리 일행은 그녀의 안내를 따라 중국 쪽 국경 도시 단동에 있는 단교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은 6·25전쟁 때 끊어진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지금은 관광 코스의 하나가 돼 있었다.단교 너머로 북한 땅이 보였다. 이 단교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철교를 따라 기차가 북쪽으로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이 기차를 타고 여섯 시간쯤 걸려 평양으로 간다고 했다. 그곳에선 친척이 가게를 하고 있어 사람들이 중국 물건을 찾아 가게를 찾아든다고 한다.그곳 북한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사는 게 너무 어려워 다들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처럼 남자들이 돈 벌러 이집트니 어디니 떠나가기도 하고, 우리처럼 텃밭을 가꿔 채소를 해 먹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농구도 하고 축구도 한단다.넓고 푸른 만주 땅, 곳곳에 흩어져 사는 우리 `혈족`들을 보며, 우리는 언제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까지, 신의주까지, 단동까지 갈 수 있나 생각해 본다. 그때는 기차를 타고 가서 유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선각자들의 생애를 추억해 보리라.
2011-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