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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다시 느낀 조지훈·이육사 선생의 풍모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봄날은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경상북도 쪽으로, 영양과 안동 쪽으로 나들이를 갔다. 학생들과 함께 학술답사 여행을 한 것이다. 세상이 모두 아름답지만 이때만큼은 우리나라도 어느 곳 못지 않게 아름다우려니 생각한다. 금수강산이라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함 아니었겠는지. 지금은 콘크리트, 아스팔트가 너무 많아졌지만 이것 없었을 그 옛날 우리네 향토의 봄을 생각하면 그 녹빛 아름다움에 몸서리가 쳐질 것만 같다. 첫날은 비가 내렸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또 어떠랴. 사월 느지막이 맞이하는 봄비는 보슬비라는 말처럼 부드럽고 다사롭지 않던가. 나는 비를 맞는 것이 좋았다. 영양쯤에 가서 비는 좀더 많아져서 학생들도 나도 우산을 둘러쓰기도 했지만 어느 들길에선가 나는 우산조차 벗다시피 하고 들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저절로 시구가 흘러나올 정도였다.하지만 이 첫날 빗속에서 찾은 곳은 영양 주실마을의 조지훈 문학관.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문학관을 둘러보며 나는 마음 숙연한 가운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이 세상에 머물렀던 것은 불과 49년. 그는 내 나이보다 한 살을 더 살고 세상을 이르게 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들, 그가 남긴 문장들은 아름답고도 크고 단단하다. 생각이 큰 하나가 되어 복잡다단하지 않아 선명하고 명쾌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가 있다.도대체 공부가 어떠해서 그는 그러했던가. 둘째 날이 되어 나와 학생들은 이번에는 안동의 이육사 문학관으로 향했다. 이육사 문학관에는 그의 따님 이옥비 여사가 아직 생존해 계셔서 우리를 맞았다. 아하, 이육사라. 그는 1904년에 태어나 1944년에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서 열일곱 번이나 감옥을 드나들었다는 그는 이제 `청포도`와 `광야`와 `절정`의 시인이 되어 우리 곁에 왔다.여기 이르러 나는 다시 어제에 이어 생각한다. 어찌하여 이 이는 이렇게 뜻이 굳고 매서웠던가. 공부를 많이 해서 그랬던가. 남달리 영특해서 그랬던가. 어제와 달리 날은 화창해서 멀리까지 세상이 드러나 보이건만 이육사가 어려서 살던 곳은 시선이 산을 타고 넘어가지 못하는 시골 좁은 곳이다. 이런 곳에서 태어나 그는 저 중국을 넘나들며 나라를 구하려다 끝내 광복을 못 보고 희생되고 말았다.영양, 안동 땅을 둘러본다는 것이 조지훈과 이육사, 둘 다 지사다운 풍모를 지닌 문학인들을 공부하는 답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부드럽고 아름다운 봄날에 이렇게 맘이 단단한 사람들을 만난 것이 싫지만은 않은 것이, 아니 오히려 큰 공부한 것 같은 것이, 생각 하나, 어쩌면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다.그들은 어려서 한학을 하고 신식학교에서 공부를 하기는 했으나 제도에서의 공부 자체가 길었다든가 깊었다든가 할 수 없다. 그들이 공부한 것은 오로지 그들 스스로의 마음 공부를 한 것이려니 한다. 그들은 이른 나이에 벌써 현대인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담대한 글을 쓰고 시를 지었다. 그들의 자연적 생명은 비록 짧았으되 그들이 남긴 문장과 시는 후세 사람들이 두고두고 선생이라 높게 보며 따라야 할 것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복잡다단하고도 세분화, 말류화된 현대식 공부의 폐단에 빠지지 않고, 먼저 마음과 뜻을 세워 자신의 삶에 대한 의식을 명철히 한 후에 공부가 그것을 따르도록 했기 때문이다.아름다운 봄 여행에서 이렇게 선각자들이 살아간 방법에 대해 한 생각이나마 얻을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행복이라면 행복이랴. 학생들과 더불어 나도 배우는 학생이 된 여행. 이 봄날 저 영남 두 고을 여행은 병산서원 앞에 눈부시게 서 있던 산과 흐르던 물처럼 아름답고도 깨끗하고도 기품이 있었다.

2012-05-03

이효석을 생각한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며칠동안 이효석에 묻혀 살았다. 이효석이 세상을 떠난 것은 1942년 5월25일이다. 얼마 안 있으면 이효석의 기일이 돌아온다. 꼭 이때가 되어 이효석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아니지만`풀잎`이나`일요일`같은 소설과 함께 며칠 지내다 보니 그의 삶과 죽음이 아주 새삼스러워진 것이다, 그가 남긴 소설로는`메밀꽃 필 무렵`이 아주 잘 알려져 있지만`풀잎`이나 `일요일`이야말로 문제작 중의 문제작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에 씌어졌다. 1941년 11월30일과 1941년 12월8일이 이 작품들의 탈고일이다. 그런데 이 1941년 12월7일 또는 8일은 일본이 진주만 공습과 함께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때다. 이로부터 1942년 2월15일에는 싱가포르가 함락되었으니 이 몇 달 간 일본은 파죽지세로 동남아로 진격해 간 것이다.이때 이효석은 전혀 다른 문제에 처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전쟁을 하고 조선인들에게 전쟁 지원을 강요하고 있었지만 이효석은 그때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다가 급기야는 뇌막염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효석의 삶이 참으로 특이하게 보였다. 전쟁은 이상한 것이다. 삶의 활기를 위해, 목적을 위해 타자들의 생명을 해하려 하는 것이 바로 전쟁 아니던가. 바로 그때 이효석은 자기 생명이 사그러드는 운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이 엇갈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풀잎`이라는 소설을 보면, 이효석 자신을 닮은 작가 준보가 역사상 왕수복이라는 기생 출신 가수로 알려진 실이라는 여인과 사랑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전쟁연습을 위한 등화관제가 내려진 평양의 뒷골목을 숨어다니며 사랑을 나눈다. 준보는 생각한다. 자신은 아내를 잃었고 그로써 허물어진 가정을 새로운 사랑으로 쌓아올려야 하고 따라서 아무리 등화관제 중이라 해도 자신에게 이 정도의 특권쯤은 허용되어야 한다.`일요일`에도 이효석의 분신인 준보가 등장한다. 그는 막 소설 원고를 탈고한 기쁨을 안고 거리로, 백화점으로, 찻집으로, 호텔 식당으로 걸음을 옮긴다. 호텔에서 아주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오랜만의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친구의 말 한마디가 그를 괴롭힌다. 도쿄에서 죽은 어떤 음악가의 시신이 오늘 평양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준보는 삶의 활기를 빼앗겨버린 듯한 슬픔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준보는 평화롭게 노는 아이들을 보다 문득 이 아이들의 미래에 행복이 기약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풀잎`과 `일요일`은 이효석이 전쟁의 시대에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여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는 자신의 생명의 소중함과 가치에 대한 인식 속에서 전쟁을 관조하고 평가할 수 있었다.이 이효석을 생각함으로써 나는 많은 현재의 문제들을 보고 평가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은 것도 같다. 우리들 생활에는 숱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 문제들은 어떤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가?만약 어떤 태도, 생각, 행동이 우리들의 생명적 가치를 지키고 고양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옳다. 그러나 어떤 감언이설, 현상적 이익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궁국적으로 우리들 삶과 생명의 원리 바깥에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들 것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사실 지금 나는 안동, 영양, 봉화로 답사를 떠나왔다. 봄 보슬비 속에서 세상이 이렇듯 아름다울 때 이효석은 홀로 세상을 등져야 했다. 그 이태전 초겨울에는 아내가 세상을 떠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오던 그였다. 그는 왕수복 여인을 만나 새로운 생활을 설계하고 싶어했지만 운명은 그를 저버리고 말았다, 나는 기생이면서 레코드 취입을 한 가수가 된 왕수복의 노래`고도의 정한`을 듣는다. 먼 옛날 이효석과 왕수복의 못 다 이룬 사랑의 사연이 가슴 아프다.

2012-04-26

어떤 삶을 살까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하와이에 갔었습니다. 먼 곳이지요. 비행기로 갈 때는 여덟 시간, 올 때는 아홉시간에서 열시간. 가면서 날짜변경선을 지나가게 되는지, 수요일에 떠나도 여전히 수요일. 오면서는 토요일에 떠났는데 일요일이 되어 버리는 곳. 오아후 섬에 머물렀습니다. 호놀룰루 시가 있는 곳이지요. 하와이대학이 있구요. 화산이 있는 빅 아일랜드 같은 곳은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첫 날은 낮에는 한국학 센터에 들러 자료를 보고 저녁에는 하와이 대학 학생회관의 볼룸에서 열린 무라카미 하루키 낭독회에 참석했습니다. 둘째 날에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낮에는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열람해 보고 저녁이 되니 이곳에 교수로 와 있다는 선생님들을 만났던 거지요. 이상협이라는 경제학과 교수와 백태웅이라는 법과 대학 교수였습니다. 셋째 날에는 다시 해밀턴 도서관이라는 곳에 가서 한국학 자료들이 어떻게 모여 있는지 살펴보고 저녁에는 또 사람을 만났습니다. 안종철이라는 국사학을 공부하고도 그곳에 가 다시 로스쿨에 다니는 연구자를 만났습니다.하루는 또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녁에 와이키키 해변에 가서 앉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내일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 새삼스러워 도대체 왜 사람은 이렇게 태어나 무엇인가를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를 보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습니다.제가 그곳에 간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답을 구하러 갔습니다. 옛날에 1990년대 전반기쯤 되었을 때지요. 그때 이상하게 무라카미 하루키 열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한국 출판계에 불현듯 나타난 이 사내는 젊은이들의 영혼을 많이도 사로잡았습니다.지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고 다시 생각하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지금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를 직접 만나서 그가 말하는 것을 듣다 보면 뭔가 저만의 해답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왕년의 이정로, 즉 백태웅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이제까지처럼 세계는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되어야 한다고 믿는 마르크시스트였습니다. 세상에는 살아가는 법이 적어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마르크스가 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살아가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법, 즉 효인이가 살아가는 법입니다. 이 효인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지상에서의 삶은 의미가 없다. 우리들은 창조주에게서 나와 창조주에게로 돌아간다. 가장 행복한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그 다음 행복한 것은 나자마자 죽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롭힘을 당하면서 이 지상에서의 덧없는 삶을 어떻게든 영위하려 애쓰며 살다 죽는다. 하지만 삶은 본래부터 텅 비어 있는 것이어서 무엇을 하더라도 의미 없는 것이다.저는 마르크스가 되어야 하는지, 무라카미 하루키가 되어야 하는지, 효인이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했습니다. 해답을 구하러 갔지만 정작 이런 문제에 정답은 없습니다.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조지 클루니가 주연하는 하와이 나오는 영화 `디센던트`를 봤습니다.답은 제대로 구하지 못했는데, 그 영화의 여운이 길게 남았습니다. 한국에 왔더니 이곳에서는 진흙같은 싸움 끝에 여권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진흙에서도 꽃은 필 거라고 생각해 마지 않습니다.

2012-04-19

양자택일 강요하는 사회 되지 말아야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이번 선거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느냐는 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를 것이다. 나는 쉬운 양비론적 태도를 표명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더 옳고 누군가는 더 틀렸을 수도 있다. 그렇게 길지 않은 선거 기간 내내 사람들은 서로 여러 패로 나뉘어 치열한 논전을 벌이고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싸웠다. 이 결과가 앞으로 몇 년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선거 기간 동안 나는 어떤 정치인 한 사람 때문에 무척 마음을 썼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젊은이 때부터 나라와 사회를 위해 열심히, 사심 없이 일해 온 것처럼 보였는데도, 현실은 그를 위해 움직여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그는 야당의 공천을 받지 못했고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와 지금 어려운 길을 걷고 있다. 아마도 나는 그에게 선거를 며칠 앞두고 어떤 결정적인 조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후보를 사퇴하는 것이 좋겠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나라와 사회가 전체적으로 보아 두 패로 나뉘다시피 해서 싸우는 형국에 무소속으로 나와 힘을 발휘하기란 참 어렵다. 그렇지 않아도 야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진작부터 그에게 왜 `야권 단일 후보`를 위해 사퇴하지 않느냐고 압력을 넣고 있다.나는 이런 문제 때문에 과연 나는 어떤 정치적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더 많이 생각하는 나날을 보냈다.내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앞으로 나는 어떤 특정한 정치적 파당의 편에 서는 일은 하지 않아야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일이 옳고 그른가를 놓고 판단을 중지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입장에 서되 그것이 곧 우리 사회의 어떤 부분들이 아니라 전체를 위한 일이 될 수 있는 방식으로 사고해 보겠다는 것이다.어떻게 해서 그런 추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되물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특정한 파당의 일부가 되어야만, 그 입장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해야만 옳은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결과적으로 나는 정치적 무소속이 되어야겠다. 그러면 사람들은 묻는다. 당신이 투표를 하지 않는 행위 때문에 당신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득을 얻는다면 그것은 당신을 위해서도 나쁜 일이 아니냐고.그러나 서로 맞싸우는 두 집단 중의 한 편을 들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다른 편을 도와주는 일이 된다는 집단 논리는 이 두 집단의 바깥에 제3의 입장이 존립할 수 있다는 사고를 억압한다. 이 제3의 입장은 다른 두 입장과 같은 평면에 놓인 입장이 아니며, 서로 대립하는 그 두 입장의 어느 하나로 용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이 제3의 입장은 정치적인 세력을 가진 제3의 입장일 수도 있고, 어느 개인적 신조로서의 제3의 입장일 수도 있다.선거를 일주일 여 남겨놓은 어느 날 「선운사에서」로 이름 높은 최영미 시인을 만났다. 그는 진보신당으로 출마한 안효상이라는 사람을 위한 지지연설을 하고 왔노라 했다. 선거를 하고 나면 과연 5%나 나올까 한 인물이다. 나는 이 `정치인`의 이름을 학교 때부터 들어왔지만 지금 진보신당은 한국사회의 소수파 중의 소수파다.이 사람을 위해 연설을 했다는 최영미 시인을 바라보며 나는 이 사람이 진짜 시인의 자질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전부들 다수파가 되려고 할 때, 대립하는 양쪽의 어느 일부가 되려고 안달이 나 있는데, 그는 다수가 될 가능성이 없는 어떤 사람을 위해 연설을 해주려고 추운 날 경춘선을 타고 서울에 온 것이었다.진보신당이든 뭐든 나는 소수파가 되려는 시인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소수파보다 더한 무소속이 되어야겠다. 이것이 문학이 이 세계를 만들어가는 방법이다.

2012-04-12

예술가는 어떤 사람?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옛날에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는 메토이코스(metoikos), 또는 메토이코이(metoikoi)라고 부르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거류외인 또는 재류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용어 말고도 이방인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지만, 이 말에는 종교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라는 뜻이 더 첨가되어 있어 조금 구별해서 쓸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유대사회의 이방인이라고 말하면 자연스럽지만 유대사회의 거류외인이라는 말은 어딘가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그리스는 종교적인 맥락에서 다신교 사회였기 때문에 이 거류외인들은 상업이나 학문 등의 목적에서 외부로부터 들어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그럼 그들의 신분적 지위는 어떠했던가? 그들은 그리스 도시국가라는 시민적 공동체의 일원은 아니었다. 그리스에서 시민이라 하면 세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첫째, 그들은 공동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었다. 둘째, 그들은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셋째, 그들은 그 공동체가 신을 섬기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었다.이들 시민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부분 성인 남성이었다. 그렇다고 여성이 전부 시민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일에 참여하지 못하기는 하되 자유로운 시민의 배우자와 딸로서 시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이러한 시민 공동체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은 누군가? 그 첫 번째는 바로 노예다. 전쟁의 전리품이거나 채무 노예거나 노예는 일체의 공적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둘째로 메토이코스들은 시민적 권리와 의무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시민들과 더불어 존재했지만 시민적 권리와 의무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일종의 국외자, 도시국가 내부에 존재하되 시민공동체의 외부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술가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오늘과 같이 치열한 선거가 펼쳐지는 마당에 예술가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예술가는 고대 그리스의 메토이코스처럼 일종의 내부적 외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시민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 대립하거나 경쟁하는 집단들의 어느 한쪽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가 할 일은 어느 편에 서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립하는 구조의 외부에 서서 이 공동체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판단하고 예감하고 제시하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그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상국가의 지도자와 같다고나 할까? 국가는 민중에 의해 이끌어져서는 안 되고 예술가, 시인에 의해 이끌어져야 한다. 지혜가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 오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들으면 무슨 전체주의냐 할 것이다.그러나 조지 오웰이 `1984`를 쓴 것은 그 스스로 사회주의자였으면서도 스페인 내란의 어느 한 쪽 편의 위치에서 벗어나 그가 살아가는 시대를 휩쓸고 있는 전체주의의 병독을 갈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이 작품은 불멸의 고전이 되어 있는데, 그가 만약 어떤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소설을 쓰고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볼 일이다.요즘 예술가들, 소설가들, 시인들이 현실의 어떤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한 발언을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나는 그 발언들이 무위하다고 생각하지만은 않는다. 또 현실 속에서 어느 입장이 우리 사회를 위해 더 바람직한가에 대한 판단도 있다. 어느 면에서 나는 내심 그 사람들 중의 어느 한 쪽 입장에 더 기울어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그러나 예술가가 견지해야 할 더 근본적인 태도는 이 시대의 메토이코스가 되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느 파당에 쉽게 서면 그 예술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2012-04-05

선거 국면과 북한 문제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선거 때가 되면 북한 문제가 단골 메뉴가 되곤 한다. 정부나 여당에서는 북한의 핵무기 위협이나 천안함 사태를 이슈화해서 이득을 보려 하고 야당은 이런 이슈에 휘말려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런 양상은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북한 문제는 항상 여권에게는 득의의 영역이었고 야권에게는 잘해야 본전인 문제였다.그럼 북한 정권은 어떤 심산일까? 북한은 1980년대에 남한 민주화 운운했고, 지금은 현 정부를 반민족적인 정부라 선전하고 있다. 얼핏 보면 이런 북한 논리는 남쪽의 야당 세력을 지원하는 것 같다.하지만 이런 북한 정권의 선전에는 함정이 있다. 과연 그들은 지금의 야당이 집권하기를 원할까? 그럴지도 모른다. 햇볕정책이나 각종 교류정책의 이득에 맛을 들인 북한 정권으로서는 지금 야당이 집권한다고 해서 그렇게 나쁠 게 없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돈은 될 것이다. 그 돈이 평화를 위한 대가인지, 퍼주기인지는 여기서는 일단 따지지 말자.하지만 한국에서 야당이 새로 집권해서 햇볕정책이나 교류정책을 들고 나온다고 해서 북한정권이 이를 아무 생각 없이 환영할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이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게 마련인 개방은 그들의 정권 안보를 위협한다.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정권 안보다. 이를 위협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들은 절대로 개방을 향해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원하는 개방은 자신들의 권력이 유지되는 개방, 이 유지를 위한 비용을 마련해 주는 개방일 뿐이다.지금 그들은 한국의 현 정부와 대결 자세를 취하면서 그들은 특권, 패권 세력이 정권 안보를 열심히 공고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핵은 과연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고집하고, 인공위성인지 미사일인지는 왜 그렇게 열심히 쏘아올리려 하는가? 인민은 굶어죽어도 이런 짓들을 해야 하는 그들의 의식 저층에는 이런 것들이 있어야 정권이 지켜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또 이런 짓을 매개로 정치권력과 군부권력이 결탁해서 서로 이득을 보고 떡고물을 챙길 것이다.그러니까 어느 면에서는 이번 선거든 다음 대통령 선거든 한국에서 야당이 꼭 이기지 않아도 되고 그렇다고 해서 인민 전체가 아닌 그들이 굶어죽는 문제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선거 때마다 북한은 차라리 정부나 여당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일은 많이 벌여왔다. 잊을 만하면 테러를 저지르거나 군사적 긴장을 유발해서 이쪽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이번 선거에서 북한 문제는 그렇게 큰 이슈가 되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또 북한 권력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고, 현 정부와 여당이 북한을 봉쇄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북정책인 것처럼 오불관언하고, 현 야권 쪽에 북한 독재 정권을 현상태로 용인하면서 그들을 믿을 만한 협상 대상자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북한 문제는 언제든지 중대 이슈로 돌변할 수 있다.북쪽에서는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잡혀가고 있다. 이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 북한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고 정치하는 사람도, 시민도 이 동정과 연민에 기초하지 않고는 북한 문제를 진정으로 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결국 세습을 이어가는 북한 현 정권에 있다. 이 야만적인 정권을 그대로 용인하면서 이들을 신뢰할 만한 협상 대상자로 보는 `통일운동`의 주창자들을 필자는 믿을 수 없다. 정부의 정책에는 타협도 필요하겠지만 사회운동, 시민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무슨 전략인가?

2012-03-29

목표가 앞서는 정치 그만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필자는 오늘 아침 진보통합당의 이정희 의원 측에서 범야권 연대를 위한 여론조사 경선을 치르면서 부정한 일을 벌였다는 뉴스를 들었다. 모 신문에 아는 여성 기자분이 있어 전화를 걸어보았다. 이분이 문화부로 오시기 전에 정치 분야에서 취재를 했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김근태 의원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대뜸 통합진보당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짐짓 무관심한 것처럼 경선을 다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래 필자가 재경선 갖고는 어림도 없다고 했더니 무슨 얘기냐고 되묻는다. 무조건 사퇴하는 수밖에 답이 없다고 했더니 그때서야 자기 본심을 드러낸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는 보수 집단은 원칙도 없고 오로지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진보 쪽에는 그래도 원칙이나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한 의식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세상 움직이는 것을 보면 원칙이나 절차 같은 것은 안중에 없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기에 급급한 것은 진보도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것이 없더라는 것이었다.어느 쪽이나 양식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 자체를 중시하고 원칙과 절차를 지켜가며 일을 해나가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종종, 아니 자꾸만 이득을 보기 때문에 원리 원칙을 따르는 사람들이 좌절하고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필자는 지금 민주통합당과 진보통합당이 상당한 접근을 이루어 야권 연대를 창출하는 것을 중요한 사건으로 눈여겨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개의 커다란 흐름 아래 잠복되어 있는 야권 주류 세력의 능력에 대해 상당히 회의하고 있기도 하다.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 때 FTA 논의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또 이때 전국 부동산 가격이 치솟았고, 빈부격차가 나날이 심화되었으며, 그로 인해 서민들이 박탈감에 사로잡혔다.지금 정부는 부유층 위주의 조세정책을 시행하고, FTA를 밀어붙이고,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을 서두르고, 4대강 사업을 완결 지으려 하면서 국민들의 반감에 직면해 있다. 그 상당 부분은 현 정부가 말하고 있듯이 자기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노무현 정부의 실권파들이 시작한 일이다.필자는 지금 민주통합당과 진보통합당이 이렇게 쉽게 접근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양쪽 모두에 과거의 `친노` 그룹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분들이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들은 북한 세습 정권을 상대로 인권 상태 개선을 요구하는 방법도 모르고, 한반도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를 세련되게 조정하는 법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 정부도 마찬가지여서 북한을 봉쇄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형편이다. 과연 현 야권이 이 상태로 재집권해서 우리 사회의 난제들과 남북한 문제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이정희 의원의 경선 부정 문제는 선거 때 생겨날 수 있는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일까? `친노` 그룹은 이미 집권을 해본 분들이다. 집권을 해 본 경험은 능력을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안이함과 둔감함에 빠지도록 하기도 한다.필자는 현 야권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전면 개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명숙 대표부터 책임져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총선 결과에 상관없이 야권 전체가 다시 수렁에 빠질 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야권이 아무런 원칙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공천을 나누어 갖는 장면을 많이 보았다. 이 안이함과 둔감함을 벗어던지지 않고는 작년 여름부터 야권에 주어진 기회는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 이것은 현 여권의 기회가 될 것이다.

2012-03-22

위험천만 고리원전 정전 사태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지난 주에도 썼지만 서울은 총선거를 앞두고 어수선하다. 다들 선거 때문에 어떤 이슈든 선거로 연결시키고 결과적으로 선거가 모든 이슈를 집어먹다시피 하는 `시즌`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필자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지난 달 9일 오후 8시34분경에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의 전원공급이 12분이나 중단되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보호계전기라는 시설을 시험하는 중에 외부 전원 공급이 중단되고 비상용 디젤 발전기조차 작동되지 않는 상태가 12분간이나 지속되었다고 했다.이런 전원 공급 정지 상태가 어떤 파멸적인 결과로 연결되는가를 우리는 바로 이웃나라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통해 경험한 바 있다. 핵연료봉이 계속 열을 내는 가운데 이를 식혀줄 냉각수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게 되면, 원자로 노심부의 핵연료봉이 녹아 내리는 `멜트 다운`인가 하는 사태가 초래되고 이는 곧 방사능 누출이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낳게 된다.현재 일본 후쿠시마 사태는 사고 발전소 반경 30km 이내에는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하는 쪽으로 전개되어 있는 상태지만 이 조치가 안전을 위해 충분한 조치인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태다. 다른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반경 40km이내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고도 하고, 사태가 불거졌을 당시 미국 정부는 자국민에게 반경 80km 바깥으로 나갈 것을 권고했다고도 한다.만약 고리 원자력 발전소에서 이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이 발전소의 반경 30km 내에는 약 320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또 한 칼럼에 따르면 고리 발전소 20km 안에는 부산이 있고, 울산이 23.75km로 30km 안에 있으며, 경주가 58.14km 떨어져 있다고 한다.이것은 고리원자력 발전소의 경우이고 월성 원자력 발전소에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를 생각해 보면 30km 이내에 경주 대부분이 잡히는 것은 물론 포항과 울산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다는 글도 인터넷에서는 발견된다. 물론 이것도 일본과 유사한 상황을 전제로 삼았을 때일 것이다.고리원자력발전소의 설계 수명은 원래 30년인데 지금 이 정년 기간을 다 채우고 다시 10년을 더 가동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필자는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바로 그런 상태에서 지난 번 사태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은 원자력발전소의 설계모델이 한국에 비해 더 낙후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안전에 대한 의식은 우리에 비해 월등히 높은 나라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이 겪었던 것과 같은 지진이나 원자력발전소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 파괴력이 일본에서 벌어진 것보다 훨씬 심각할 것임은 물론이다.필자는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안전 불감증 때문에 속절없이 희생되는 인명들의 소식을 접해왔다. 대구지하철 참사 같은 것은 그 시발점은 한 사람의 잘못된 생각에서 빚어진 것이었지만 안전시설 미흡으로 인해 대량 참극을 빚은 사건이었다.이번 사건이 그냥 일과성으로 간과된 채 무시되지 않았으면 한다. 고리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수력원자력` 측에서는 이 사건을 제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한국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태 같은 것이 발생해서 반경 30km 또는 80km 이내에 사람이 출입할 수 없게 된다고 하자. 먹거리들에서 방사능 관련 물질이 검출되고 수돗물조차 제대로 안심하고 먹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하자.앞에서도 썼듯이 서울은 총선 때문에 이런 사건쯤은 문제도 안 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이 근방에서 살고 계신 분들이 무서움을 느끼고 이 문제를 따져봐야 한다. 과연 이렇게 계속 운행해도 되는지,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만들 수 있는지 묻고 관찰, 감시해야 한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국토가 작은 나라다. 이 나라의 자연과 소중한 인명을 위해 힘을 써야 할 때다.

2012-03-15

4·11 총선과 486 세대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총선이 바싹 다가왔다. 서울 정치계는 공천 문제로 꽤나 시끄러운 것 같다. 필자는 정치를 할 생각이 전연 없으니, 혹시 이 글이 선거법 위반이 되더라도 양찰해 주시기 바란다. 필자는 이 문제를 요즘 486세대의 문제로 생각하게 되었다. 486세대는 처음에 등장할 때는 386세대였으니, 그 뜻은 다 알고 계시듯 30대이고, 80년대에 대학교에 다녔으며, 6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이 말이 시사평론계에 처음 등장할 무렵 필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 말이 어느덧 세월이 흘러 486이 되었다. 왜냐? 말할 것도 없이 처음 등장할 때 30대이던 사람들이 40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10년 성상이 흘러 명칭마저 바꾸지 않고는 아니 될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이 486세대가 처음 정계에 하나의 주역으로서 등장한 때는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 시대가 아닌가 한다. 노무현 대통령께는 그를 보좌해 주는 젊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이로 보면 대체로 30대 후반 40대 초쯤이었고, 학생운동 맥락에서 보면 NL계였고, 학맥으로 보면 고려대학교나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에 연계되어 있었다.이 그룹은 486세대 전체적으로 보면 테크노그라트들과는 밀접한 연관이 없어 집단이 결코 크다고만은 할 수 없고 특정한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어느 의미에서 편향성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룹은 특유의 정서적 연대감을 바탕으로 삼고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대중적 폭발력을 지닌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종의 `북인` 그룹을 형성하면서 권력을 거머쥐었고, 관계와 국회에 진출했다. 이 분들 중에는 어느 면에서는 `손쉽게` 국회의원이 되고 관료가 되었다고 진단할 수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정치는 모름지기 소통을 추구해야 한다. 세대 내에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같은 세대의 사람들을 참여시킬 수 있어야 하고 세대 간에는 윗세대에게는 존경을 드리고 가르침을 구하며 아랫세대에게는 친애의 감정으로 다독거리고 북돋워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소통이 부재할 때 그러한 정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성공적으로 나라와 국민을 이끌어 가기 어렵다.이번 선거에 나선 분들 가운데 필자와 개인적 인연이 있는 사람은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이었다. 이 분이 어떤 교수 분의 죽마고우이신데 필자는 다시 그 교수 분과 교분이 깊은 때문이었다.몇 년 동안 주로 문학행사장에서 만나 본 이상수 전 장관은 정치인답지 않게 문학을 아주 깊게 이해하는 분이었다. 예를 들어 필자는 이 분이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라는 작품에 대해 줄거리며, 주제며, 거기 나오는 대화를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고, 이 소설의 교훈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삼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정치인 가운데 이런 사람이 몇 분만 더 있어도 우리나라 문학, 문화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인권운동을 하고, 노동자들을 변호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일로 옥고를 치른 과정을 보면 이 분은 신의를 지키고, 책임을 질 줄도 아는 정치적 미덕을 갖추고 있었다.그러나 이 분에게 올해는 또 다른 시련의 해가 되는 것 같다. 언론들은 대체로 한 정치인의 내부 사정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그런 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또 같은 정당 안에서도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기 때문에 남의 약점을 예사로 보아 넘기지 않는다.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에 필자는 486세대가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486세대는 자신이 치른 희생에 비해 `빨리` 기득권층이 되었고, 그것을 질기게 연장해 가려 한다. 윗세대를 밀쳐내고 빨리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 필자는 그 세대의 일부다. 마음이 아프다. 정치세계 소식을 접하며 사는 일이 힘들다.

2012-03-08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나이가 들면 돈 씀씀이가 헤퍼진다. 오늘도 아들이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할 일이 있어 상담을 하고 검사를 했더니 비용이 정말 만만찮게 들었다. 이렇게 돈을 버는 일은 어렵고 쓰는 것은 헤프니 돈이 문제는 문제다. 나는 옛날부터 룸펜 기질이 넘쳐 돈 쓰는 건 많고 버는 일은 별로 하지 않아 생활에 고생이 많았다. 그래도 나이가 어렸을 때는 빚도 적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더 잘 사는 것 같은데 빚은 훨씬 더 많아졌다. 이런 식으로라면 직장이 다 떨어질 때까지 빚을 다 갚지 못하겠다는 공포감까지 생긴다.그러나 이런 말은 다 엄살이다. 대학 선생이 돈을 못 번다고 하면 누가 돈을 번다고 하겠는가. 세상에는 월급이 작은 사람이 참 많아서, 내 친구 하나는 그 작은 돈으로 어떻게 식구들이 살아가나 하는 걱정을 하게 만들곤 한다. 또 어떤 친구 하나는 아예 버는 게 없이 남이 주는 걸로 살아가다시피 한다.나는 그런 친구들 속에서 제법 돈벌이 잘 하는 사람이요, 앞으로도 내가 뭔가 결정적인 잘못을 벌이지 않는 한 그런 대로 생활의 자원을 벌어갈 수 있다고 생각도 한다.그런데 그게 문제다. 어제 밤에 정년퇴직한 선생님이 평론집을 펴내는 자리에 갔다. 이 분이 말씀하신다. 정년퇴직을 하는 게 마치 죽음을 맞는 것과 같다고 누군가 그러던데 당신이 경험해 보니 정말 그렇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의미 안에 월급을 못 받는다는 게 하나의 내용으로 들어 있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하나의 공상이 생겨난다. 옛날보다 빚이 많으니 자꾸 그 빚을 가림 하려고 돈에 대해 걱정을 하게 되는데, 과연 나는 그 옛날보다 가난하게 살아서, 더 부족해서 돈 걱정을 하나?생각해보니 그렇지가 않다. 뭔가 내가 정해놓은 기준에 맞추려고 그 수준에 오르려고 돈 걱정을 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게 나도 모르는 강박관념이 되어 계산을 하게 만들고 전망을 하게 만들고 일을 꾸미게 만드는 것이다.한 번 생각 해보았다. 다른 방법으로 사는 수는 없나? 예를 들어 내가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재화만을 빼놓고 그 나머지는 모두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는 생활을 만들어 갈 수는 없나?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멋있고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그런데 그러자면 참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숱하게 나타날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는 아직도 살아가실 날이 많은데 어떻게 부양하나? 아내나 아이, 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연 나는 어떤 원조를 해줄 수 있나? 아니, 그런 것들보다도 나 자신만 해도 사실 남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데 열중인 사람은 아니던가?내 친한 사람 가운데 유교적인 도덕적 이상을 중시하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에 따르면 가까운 사람은 가깝게 먼 사람은 멀게 대하는 것이 윤리의 기본이라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이 말을 내게 여러 번 했는데, 아직도 나는 이런 `윤리 준칙`을 떳떳하게 받아들이는 게 힘들다. 왠지 모르게 이 유교적 `윤리 준칙`이라는 게 현대인의 이기주의나 협소한 가족주의를 합리화하는 말인 것 같은 불편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또 나 자신을 생각해 보면 남들은 다 온힘을 다해 신경 쓰고 사랑을 바치는 가족을 위해서 무슨 특별한 노력을 얼마나 기울이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니, 이 `윤리 준칙`을 부정하는 것도 남들은 몰라도 나 자신에겐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닌 성 싶기도 하다.돈은 역시 오늘날 사람들의 삶, 생활을 지배하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공상 같은 생각일지언정, 나만을, 내 가족만을, 내 민족만을 위하지 않는 돈을 상상하는 일은 이 험난한 경제난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과연 돈에 관하여 내 삶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는지? 어제 나는 공상 속에서도 내 자신의 앞날을 그려보고, 점치고 싶은 유혹에 시달려야 했다.

2012-02-23

명태? 북어? 코다리? 노가리? 동태? 황태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겨울이면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생태국 생각이 난다. 옛날에는 내가 태어난 충청도 예산에는 아마 생태를 구경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생태국 솜씨는 그 연조가 아주 오래된 것은 아닐 텐데도 생태 몇 토막에 김장 김치를 말갛게 썰어 넣은 생태국은 그 시원스러운 맛이 일품이다.생태국 생각을 하면 다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외할머니께선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 넷째딸 집인 우리 집에 와서 겨울을 나셨다. 그때 아버지가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서 생태를 사오셨고 그러면 어머니가 이 생태를 국으로 끓여 외할머니께 드렸다. 그 덕분에 나도 생태국 맛을 들였는지 알 수 없다.아버지는 어렸을 적에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외할머니를 어머니처럼 가깝게 여기셨던 것 같다. 사위에게 장모님은 어려운 분일 텐데도 아버지는 외할머니를 살갑게 모셨던 것 같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생태국 대신 생태탕이라는 것을 봤는데, 그때면 이 맛있는 음식에 어머니, 아버지, 외할머니 생각이 함께 딸려 올라오곤 했다.시간이 흘러 나중에 채만식이 쓴 `명태`라는 수필을 보게 되었다. 채만식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세상을 날카롭게 보는 시각을 견지하려 했던 작가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가 되면 자기 뜻과 얼마나 상관없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펼치던 생각과 다른 글을 쓰게 됐다. 내가 보기에`명태`는 그런 자신의 처지와 상관이 있어 보였다. `명태`의 일부분을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명천 태가가 비로소 잡아 팔았대서 왈 명태요 본명은 북어요 혹 입이 험한 사람은 원산 말뚝이라고도 칭한다. 수구장신, 피골이 상접, 한 삼년 벽곡이라도 하고 온 친구의 형용이다. 배를 타고 내장을 싹싹 긁어내어 싸리로 목줄띠를 꿰어 쇳소리가 나도록 바싹 말랐다. 눈을 모조리 빼었다. 천하에 이에서 더한 악형도 있을까. 모름지기 명태 신세는 되지 말일이다.”내 감각으로는 이 `명태`는 명태라기보다는 북어다. 살아 있어 동해를 헤엄쳐 다닐 때는 명태라 하고, 잡았어도 살아 있는 듯 싱싱한 것을 생태라 한다. 이 명태를 잡아 말린 것이 북어이고, 반쯤만 말린 것이 코다리이고, 명태 새끼를 말린 것이 노가리다. 또한 이 명태를 얼린 것이 바로 동태이고, 이 명태를 덕장에 널어 겨우내 얼었다 풀었다 하기를 반복해서 건조한 것이 곧 황태다.그런데 이 명태 말린 북어를 보고 채만식은 자신의 신세를 절감했던 것 같다. 내장을 다 긁어내고 싸리로 목줄띠를 매고 바싹 말린 명태. 이 명태에 눈이 빠졌다. 앞을 못 보게 하는 극형을 받아 맹목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신세인가.채만식은 바싹 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나중에는 폐병에 걸려 죽어 버렸다. 일제 말기에 그가 지조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 북어의 바싹 마른 몸채와 빠져나간 눈을 보고 그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리라.나중에 나는 비평을 하면서도 나 자신의 비평이 시원치 못하고 혜안이 없고, 그렇다고 세상에도 내 몸을 맞추지 못해서 괴로워하던 때가 있었다. 그 무렵 겨울이면 저 강원도 인제 백담사 쪽에 다니곤 했는데, 그때 비로소 황태 덕장을 보게 됐다.겨울에 눈 맞으며 허공에 널려 서 있는 황태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했다. 그래도 난 아직 북어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살아서 겨울 동해 흰 바다 물결을 헤엄치는 명태 시절의 나날을 그리워했다.그럼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명태로 돌아가기는 틀렸고 채만식의 북어처럼 바싹 말라 생명의 흔적 찾기 어려워지면 어쩌나? 나, 몸은 비록 세상에 잡혔지만 그 겨울 우리 식구들 입맛을 살려주던 저 생태의 싱싱함을 간직하고 싶다.

2012-02-16

대마도 단상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대마도는 가깝고도 먼 곳이다. 왜 그런가 하니 가는데 시간이 참 많이 걸린다. 새벽 다섯 시 반에 KTX를 타고 서울역을 떠나 부산에서 다시 배를 탔다. 전날 밤 한 숨도 못잔 까닭에 기차 안에서도, 배안에서도 내내 잠이 쏟아졌다.그런 중에도 배 뒤쪽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때도 있었다. 바다는 검고 윤이 나고 바람 때문에 자못 물결이 높았다.이 바다를 건너 윤심덕도, 이광수도, 임화도 일본으로 갔다. 이상은 이 바다를 건너 도쿄로 갔다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바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바다는 꼭 살아 있는 거대한 물고기 같았다.이 물고기는 크고비늘은 파도제가 성난 비늘을 어쩌지 못해저는 잠들어 있을 때도비늘은 늘 제 맘 가는 대로일어섰다 누웠다너울을 만든다나는 이 물고기 비늘이 성나서 뱃전을 사납게 후려치는 나날들을 생각했다. 그런 나날이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늘 운명적이면서도 불행한 일들이 생겨났던 것이다.대마도 민심은 사나웠다. 일본에서 사람을 직접 접촉해서 밀치는 법은 여간해서 없는데, 이곳 통관 안내를 맡은 사람은 말도 없이 한국사람을 밀치곤 했다. 거리에서는 자가용차가 사람들이 건너가는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클랙션을 눌러대곤 했다. 호텔에서 안내를 맡은 여인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호텔 방 다다미엔 먼저 사용한 사람이 남겨놓은 머리칼 같은 것이 치워지지 않은 채 떨어져 있었다.왜 이럴까. 나는 어쩐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대마도는 일본에서 잘 손이 안 가는 등짝 같은 곳이다. 그러니까 평소에 일본 사람들이 이 대마도를 알뜰히 손봐 줄 리는 없다. 도쿄나 오사카에서 대마도에 여행을 가느니 차라리 한국의 서울이나 부산에 쇼핑 관광을 올 것이다. 그만큼 여비가 비싸고 그것을 보상해 줄 만한 재미도 없다.대마도는 지금 한국 관광객들이 먹여 살리는 측면이 강할 것 같다. 많은 돈이 관광객을 매개로 해서 한국에서 대마도로 건너갈 것이다. 주말마다 일반 관광객이나 낚시꾼들이 그곳을 찾아 돈을 남기고 돌아갈 것이다.유사 이래 대마도는 한반도 없이는 잘 살기 어려운 지리적 여건에 처해 있었다. 그곳은 한반도에 노략질을 하거나 한반도에 세워진 조정과 거래를 하거나 일본 본토와 한반도를 중재해서 먹고살 방도를 찾았다.그래서 대마도에는 한국과의 교섭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료들, 유적들이 많다. 이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구한말, 일제시대의 덕혜옹주와 대마도 번주의 아들 소 다케유키가 결혼했다 헤어진 이야기. 덕혜옹주와 시인인 소 다케유키는 정략 결혼의 희생양이었다. 그들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지만 그녀 역시 자살했다고 했다.또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이 하카다로 진격할 때 이곳을 경유해서 갔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는 현소라는 중이 한반도를 몇 년씩 염탐했다고 한다. 왜란 후 국교 정상화 때는 국서위조 문제까지 불거지기도 했다. 대마도 사람들은 한반도의 인삼을 무역 중개해서 먹고 살기도 했다.대마도 사람들은 일본 사람이라는 자존심과 한반도에 기대야만 먹고살 수 있는 존재론적 위치 사이에서 스스로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 사람들은 `정상적인` 일본 사람들 같지가 않았다. 짧은 여행 기간 내내 그런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잠에 취한 채 대마도 북쪽 섬, 남쪽 섬을 내리오르며 이 섬은 참, 고요하기도 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고요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파도 높은 현해탄의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섬은 현해탄을 사이에 둔 두 나라의 사연을 애써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았다.

2012-02-09

안철수냐, 문재인이냐, 박근혜냐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최근 몇 달 일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부를 어떻게 나눠야 하느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고민들을 하는 것 같다. 뭣보다 촉발 지점은 무상급식 문제였다. 아이들한테 가진 사람 안 가진 사람 가리지 않고 다 밥을 먹여준다. 이거 빨갱이 선전 아니냐? 하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고, 서울 시민들 의견이 이리저리 나뉜 듯했다.오세훈 전 시장의 문제제기가 사람들한테 어느 정도 먹혀드는 것 같은 어떤 시점에 갑자기 안철수 교수가 등장했다.그는 지금 문제를 만든 사람들이 다시 서울시 행정을 책임지는 것은 문제라고 하면서 서울시장 출마를 시사했다. 결과는 우리들이 다 알고 있듯이 박원순 변호사가 시장이 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안철수 교수나 박원순 시장이나 배경이 같은 분들은 아니고 살아온 경력도 각기 큰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기부를 통한 사회공헌이라는 논점이다.박원순 시장은 아름다운 재단이다, 아름다운 가게다 하는 것을 중심으로 자신의 활동 반경을 넓혀 온 분이고, 안철수 교수 역시 안철수 바이러스 연구소 주식을 절반이나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을 해 버린 상태다.그런데 이 `기부`라는 것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 분들이 등장하기 전에 우리 세상은 기부에 대해서 비교적 냉정했다.진보파들은 말한다. 잘 사는 사람이 기부한다는 게 뭐 대단한 일이냐. 그보다는 사회가 약자들, 빈자들을 책임지고 구제해 주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냐. 이 분들은 그래선지 지하철에서 껌을 팔거나 구걸을 하는 분들을 만나도 아예 외면해 버리기 일쑤다. 그런 적선은 오히려 사회악, 빈부 격차라는 자본주의적 부조리를 은폐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보수파들은 말한다.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는 근본적으로 건전한 자유경쟁이다. 이 경쟁에서 패배하거나 도태된 사람들을 국가나 시민사회가 일방적으로 구제해 주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 사람들을 심각한 도덕적 해이에 빠뜨릴 수 있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옛날 속담도 있지 않더냐. 빈민 구제니, 부의 재분배니 해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포퓰리즘에 물들면 오히려 나라 망하기 십상이다.그러나 지금 나라는 이 문제, 즉 사회 또는 국가가 부를 재분배하는 방식들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제도를 통한 재분배든, 기부를 통한 부의 사회 환원이든 초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 매커니즘을 어떻게든 보완하지 않고는 지금의 갈등을 결코 완화시킬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다.여기서 드디어 안철수냐, 문재인이냐, 박근혜냐 하는 문제가 새로운 차원에서 문제시될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안철수 교수는 자신의 부를 사회로 환원하는 결단을 통해서 사회의 지도자로서의 덕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노무현 정부를 이끌었던 사령탑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국가가 빈부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례를 이미 보여주었다.박근혜 대표에게도 이 문제는 절박한 현안이 되어 떠오르고 있다. 며칠 전에 이 분은 진보냐 보수냐 하는 게 이미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건 이 분이 현실적 감각을 상당히 잘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러나 무서운 것은 국민들이 행동 또는 실천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우리 사회에서 이제 사회적 부를 처리하는 문제, 자신의 부를 처리하는 문제는 어떤 개인이 자신의 야망이나 이상을 펼쳐나가는 데서 꼭, 그것도 진정성 있게 보여주지 않고는 넘어설 수 없는 난제가 됐다.앞으로 몇 달 간, 올 연말까지, 아니 내년 연초까지 이 문제가 우리 사회를 양분, 삼분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이 내내 이것을 가지고 좌고우면 할 것이다.

2012-02-02

만주는 넓고 푸르렀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만주는 넓고 푸르렀다. 4박5일 일정. 중국 대련으로 들어가 단동으로 갔다, 통화를 거쳐 유하로 갔다, 심양을 거쳐 다시 대련으로 해서 돌아오는 코스였다. 이 여행 목적은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 그는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만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친 선각자였다. 때문에 여행은 그가 갇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여순 감옥과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곳들을 살펴보는 2100km의 장거리 여행이 되었다. 힘들었다. 그러나 배운 것이 많았다.여순 감옥은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이 투옥되어 있던 곳, 감옥은 파놉티콘의 원형 감시 구조를 살려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볼 수 있도록 돼 있었다.여기서 필자는 처음으로 신채호 선생의 면영을 가까운 곳에서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무정부주의에 기울었던 민족사학자라는 투사적 이미지와 달리, 눈이 맑고 의지적이면서도 선비적인 문사 기질이 배어나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이 감옥의 끔찍한 기물 가운데 하나는 교수대였다. 교수대 밑에는 교수형 당한 사람이 떨어지는 원형의 통이 세워져 있었다. 죄수가 그 안으로 떨어져 죽으면 통 뚜껑을 닫아서 죄수들로 하여금 메고 가 통째 파묻도록 했다고 한다.독립운동을 하던 우리의 선인들이 이렇게 참혹하게 죽어 이국땅 감옥 모퉁이에 묻혔을 생각을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1906년경 이회영을 비롯해 안창호, 이갑,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 신채호 등은 신민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울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이들의 운명은 이 신민회와, 이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따라 만주라는 무대를 중심으로 비극적으로 펼쳐져 갔다.만주는 동북 3성, 즉 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 등 3개 성을 이르는 말. 이 가운데 필자가 이번에 여행한 요령성은 어쩌면 그렇게 한반도 산하와 꼭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산세며 들의 모양이며, 전혀 낯설지 않은 풍광에 모두들 우리네 강원도 같다고들 했다. 어떤 이는 바로 이 자연의 공통성이 만주와 우리 민족의 깊은 유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도 했다.한국의 자연을 닮은 이 곳에 조선족 사람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얼마 안 있으면 설립 백 주년을 맞이하게 된다는, 인근 지역에서 유일한 조선족 학교 하나를 방문하게 됐다. 유하에 있는 이 학교의 교장은 여자 선생님, 이 분은 한국과의 교류 이후 조선족 사람들의 공동체가 해체되어 가고 있음을 안타까운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경제를 따라, 먹고 사는 일을 따라 `한국` 사람들이 집합적 공동성을 상실하고 생존을 향한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는 것이었다.생존을 향한 몸부림은 우리를 안내해 준 여자 가이드의 모습에서도 드러났다. 북한에 친척이 있는 중국 국적 조선족인 이 여자는 심양, 대련, 단동 같은 도시를 중심으로 물건을 떼다 북한에 갖다 파는 보따리 행상을 겸하고 있었다.우리 일행은 그녀의 안내를 따라 중국 쪽 국경 도시 단동에 있는 단교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은 6·25전쟁 때 끊어진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지금은 관광 코스의 하나가 돼 있었다.단교 너머로 북한 땅이 보였다. 이 단교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철교를 따라 기차가 북쪽으로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이 기차를 타고 여섯 시간쯤 걸려 평양으로 간다고 했다. 그곳에선 친척이 가게를 하고 있어 사람들이 중국 물건을 찾아 가게를 찾아든다고 한다.그곳 북한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사는 게 너무 어려워 다들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처럼 남자들이 돈 벌러 이집트니 어디니 떠나가기도 하고, 우리처럼 텃밭을 가꿔 채소를 해 먹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농구도 하고 축구도 한단다.넓고 푸른 만주 땅, 곳곳에 흩어져 사는 우리 `혈족`들을 보며, 우리는 언제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까지, 신의주까지, 단동까지 갈 수 있나 생각해 본다. 그때는 기차를 타고 가서 유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선각자들의 생애를 추억해 보리라.

2011-08-11

이 탐스러운 생명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어디서 감을 얻어왔다. 그냥 먹으면 떫고, 며칠 우려 뒀다 단단했던 게 물러지면 먹어야 하는 감이었다. 감을 얻은 집에서 그랬듯이, 나 역시 이 감들을 현관 앞에 하나씩 가지런히 두고는 잠깐 존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며칠 후, 집을 나서는 내 눈에 무심결에 들어온 주황빛 감들! 아름답다 못해 탐스러웠다. 이 탐스러운 감을 보고 생각한 게 있다. 그렇구나. 비록 가지에서 떨어져 나왔어도 아직 생명이 가득 들어 있는 까닭에 이 감들은 이렇듯 탐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구나. 그래서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냈다. 생명은 탐스럽다. 생명은 너무 아름다워서 탐스럽다. 연말이다. 이제 2010년도 남은 날이 얼마 없다. 며칠만 지나면 우리는 2011년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게 된다. 그저께는 서울에 눈이 무척 내렸다. 새벽부터 내린 눈으로 아침이 되자 세상은 흰빛으로 눈이 부셨다. 대구에서 온 후배를 만나니 그곳에도 눈 천지였다고 한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적이 별로 없었단다. 온 세상을 흰빛이 감싸고 있다. 모든 것을 감싸 안은 눈처럼 우리 세상이 서로 이렇게 감싸주는 인정으로 가득한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그런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영국의 작가 D.H. 로렌스는 인류가 구원을 받으려면 그들이 본래 지니고 있던 개인들 사이의 내적인 유대를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개인이란 인류라는 전체의 부분이자 파편일 뿐이라고 했다. 개인이 개별성의 범주 안에 안주해 버리는 것은 삶을 개별자들의 투쟁으로 몰아가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내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의 부분들이며 이 본래적인 유대 관계를 회복해야 투쟁 없는 삶, 사랑의 삶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나`란 무엇인가? `나`와 `너`는 이렇게 `나`라고 부르고 `너`라고 부르듯 단절된 개별적 존재들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려면 숨을 쉬어야 한다. 이 숨을 쉴 때마다 내 바깥의 것이 부단히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되고 있으며, 내 안의 것이 부단히 바깥으로 나가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있다. 내가 살아가려면 먹어야 한다. 내가 먹을 때마다 내 아닌 것이 부단히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되고 있다. 반대로 내 안의 것이 내가 아닌 세계로 배출되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나다. 이 간단한 이치만 생각해 봐도 `나`란 고정된 실체가 아닌 것 같다. `나`라는 존재의 외투는 단단하고 두꺼워서 `나`와 `남`은 쉽게 뒤섞일 수도 없고 상대를 향해 습합해 들어갈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부단히 `나` 아닌 존재가 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나` 아닌 남이 부단히 내가 됨으로써만 내 삶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도 진실일 것이다. 그러니 `나`의 구원이란 일종의 허상과도 같다. 그것은 `나`만의 구원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면적 진실을 살펴보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은 곧 `나` 아닌 `너`마저, 남마저 구원하지 않고는 남김없이 구원될 수 없는 영원한 사업인 것이다. 그러니 `나`를 구원하려면 `나` 아닌 존재들을 함께 구원하라. 이것이 당연한 귀결점 아닐지? `나`와 `너`를, 남을 함께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삶을 나누고, 삶을 함께 하는 삶의 증진법인 때문이다. 저 주황빛 감처럼 살아 있어 탐스러운 생명들을 사랑하라. 그러면 `나`도 구원될 것이다. 눈이 담뿍 내려 세상이 아름답다. 이 탐스러운 하늘과 땅처럼 우리 인간 세상이 내년에는 한 차원 더 탐스럽게 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더 탐스러운 생명의 유희를 펼칠 수 있기를, 고대한다.

2010-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