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경상북도 쪽으로, 영양과 안동 쪽으로 나들이를 갔다. 학생들과 함께 학술답사 여행을 한 것이다. 세상이 모두 아름답지만 이때만큼은 우리나라도 어느 곳 못지 않게 아름다우려니 생각한다. 금수강산이라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함 아니었겠는지. 지금은 콘크리트, 아스팔트가 너무 많아졌지만 이것 없었을 그 옛날 우리네 향토의 봄을 생각하면 그 녹빛 아름다움에 몸서리가 쳐질 것만 같다.
첫날은 비가 내렸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또 어떠랴. 사월 느지막이 맞이하는 봄비는 보슬비라는 말처럼 부드럽고 다사롭지 않던가. 나는 비를 맞는 것이 좋았다. 영양쯤에 가서 비는 좀더 많아져서 학생들도 나도 우산을 둘러쓰기도 했지만 어느 들길에선가 나는 우산조차 벗다시피 하고 들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저절로 시구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 첫날 빗속에서 찾은 곳은 영양 주실마을의 조지훈 문학관.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문학관을 둘러보며 나는 마음 숙연한 가운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이 세상에 머물렀던 것은 불과 49년. 그는 내 나이보다 한 살을 더 살고 세상을 이르게 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들, 그가 남긴 문장들은 아름답고도 크고 단단하다. 생각이 큰 하나가 되어 복잡다단하지 않아 선명하고 명쾌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가 있다.
도대체 공부가 어떠해서 그는 그러했던가. 둘째 날이 되어 나와 학생들은 이번에는 안동의 이육사 문학관으로 향했다. 이육사 문학관에는 그의 따님 이옥비 여사가 아직 생존해 계셔서 우리를 맞았다. 아하, 이육사라. 그는 1904년에 태어나 1944년에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서 열일곱 번이나 감옥을 드나들었다는 그는 이제 `청포도`와 `광야`와 `절정`의 시인이 되어 우리 곁에 왔다.
여기 이르러 나는 다시 어제에 이어 생각한다. 어찌하여 이 이는 이렇게 뜻이 굳고 매서웠던가. 공부를 많이 해서 그랬던가. 남달리 영특해서 그랬던가. 어제와 달리 날은 화창해서 멀리까지 세상이 드러나 보이건만 이육사가 어려서 살던 곳은 시선이 산을 타고 넘어가지 못하는 시골 좁은 곳이다. 이런 곳에서 태어나 그는 저 중국을 넘나들며 나라를 구하려다 끝내 광복을 못 보고 희생되고 말았다.
영양, 안동 땅을 둘러본다는 것이 조지훈과 이육사, 둘 다 지사다운 풍모를 지닌 문학인들을 공부하는 답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부드럽고 아름다운 봄날에 이렇게 맘이 단단한 사람들을 만난 것이 싫지만은 않은 것이, 아니 오히려 큰 공부한 것 같은 것이, 생각 하나, 어쩌면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다.
그들은 어려서 한학을 하고 신식학교에서 공부를 하기는 했으나 제도에서의 공부 자체가 길었다든가 깊었다든가 할 수 없다. 그들이 공부한 것은 오로지 그들 스스로의 마음 공부를 한 것이려니 한다. 그들은 이른 나이에 벌써 현대인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담대한 글을 쓰고 시를 지었다. 그들의 자연적 생명은 비록 짧았으되 그들이 남긴 문장과 시는 후세 사람들이 두고두고 선생이라 높게 보며 따라야 할 것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복잡다단하고도 세분화, 말류화된 현대식 공부의 폐단에 빠지지 않고, 먼저 마음과 뜻을 세워 자신의 삶에 대한 의식을 명철히 한 후에 공부가 그것을 따르도록 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봄 여행에서 이렇게 선각자들이 살아간 방법에 대해 한 생각이나마 얻을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행복이라면 행복이랴. 학생들과 더불어 나도 배우는 학생이 된 여행. 이 봄날 저 영남 두 고을 여행은 병산서원 앞에 눈부시게 서 있던 산과 흐르던 물처럼 아름답고도 깨끗하고도 기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