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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범야권 연대론의 계층론적 근거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한국이 IT강국으로 부상한 게 한 십여 년 되었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십 년은 권력이 못 견뎌 낼 만큼 긴 시간이다. 무엇보다 이 기간 동안에 철강, 기계, 자동차 같은 무거운 산업 비중 `대신에` 가벼운 산업이 부상하게 되었다. 대공장과 중장비, 대규모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시대 대신에 분산적인 작업장, 컴퓨터와 인터넷, 곳곳에 흩어져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는 다중들의 시대가 도래했다. 여기에 고용시장을 탄력적으로 만든다는 이유로 추진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증대는 조직되고 편입된 사람들보다 불안정하게 자유로운 사람들의 숫자를 자꾸만 늘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이러한 인구 구성상의 변화, 계급·계층상의 구성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이번에 야당인 민주당에서 대통령 후보 경선을 치르면서 2030세대의 민심까지 수렴할 목적으로 모바일 투표를 도입했다. 결과적으로 모바일투표는 많은 논란을 빚었다. 문재인 후보를 제외한 다른 후보들은 모바일 투표가 당내의 지지도를 반영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모바일 투표는 비밀선거의 원칙에 정면 위배되며, 상대 당 지지자의 참여(역선택)도 막을 수 없다는 제도적 허점도 있다. 관리자의 오류 가능성 등으로 안전성도 객관적으로 담보되기 어렵다는 비판 역시 무시할 수 없다.물론 그렇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현재의 민주당이 그들의 잠재적 지지자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조직적 탄력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사회에는 지금 새롭게 부상하는 `비조직적인` 다수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무정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기존의 정당조직 같은 딱딱한 조직형태로는 수렴, 포용할 수가 없다. 이것은 새누리당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는 진보당에서도 마찬가지다.이 비조직적인 다수, 안철수 보수파 또는 진보적 비민주당 세력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없다. 또 그들이 자기 정치적 의사를 왜곡 없이 표현할 수 있는 구조가 없다.민주당의 모바일 투표는 딱딱한 조직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잠재적 지지층을 당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 힘은 아이러니하게도 `친노`지지자들을 결집시켜 정치적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발휘되었다.야권에서 안철수 원장이 부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어쩌면 명실상부, 지난 십 년 동안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계급, 계층의 취향이나 가치 지향을 자신도 모르게 대변하고 있는지 모른다.그동안 뜸만 들이던 안 원장도 마침내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나섰다. 이제부터 민주당에서는 본격적으로 그와 함께 연대해서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와 맞서겠다는 전략을 구사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국민들이 안 원장의 민주당 입당이나 문재인 후보 지지를 그대로 받아들일까?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지난 십 년 사이에 국민들 사이에서 지역주의도 꽤 약화됐지만 일련의 정치과정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은 민주당이다. 이 당은 그들이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국민 계급, 계층의 큰 부분이 그 존재방식이나 가치지향 면에서 완연하게 달라졌는데도 이들을 아우를 효율적인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복지 공약 같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여권에서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공을 들이고 있다.그러니 범야권 연대 및 통합론, 간단히 말해 안철수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통합론이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 민주당 바깥에 너무 많은 `야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너무 많은 야당적인 국민들 때문에 민주당은 홀로 선거를 치를 수 없을 만큼 취약해 진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이같은 전략적 제휴에서 대표주자로 나서서 `얼굴`역할을 할 사람은 과연 누가 될까. 안철수냐 문재인이냐. 당분간 국민들은 이 문제에 촉각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2-09-20

절간에 선승이 없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지난 토요일, 일요일에는 진해에서 김달진 문학제가 열렸다. 일요일 아침에 김달진 생가에서 시낭송을 하기로 되어 있어, 토요일 오후에 진해에 가 행사에 참여하고 일요일 늦게 올라왔다. 월요일 아침에는 불교방송 아침 프로에 무슨 토론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돼 있어 여섯시 반부터 서울 마포에 있는 방송국에 나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 중에 토요일 오전 김포에서 김해 가는 비행기 안에서 김윤식 선생을 뵈었다는 사람이 있었다. 정치평론가였다.김윤식 선생은 1936년생, 지금 일흔일곱, 여덟을 헤아리는 분이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학과에서 오랫동안 학문 활동을 펼치다 퇴직하신지 벌써 오래되셨다. 경상남도 진영이 고향이신데, 김달진 문학제와는 무슨 인연이 있는지 매년 빠지지 않고 참가하고 계신다.그 날도 이 분은 김해를 통해 진해로 가셨던 모양이다. 이 정치평론가가 김윤식 선생을 알아보았다고 했다. 무슨 일본어 책을 보고 계셨는데, 체구가 있는 사람은 비행기 좌석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말을 걸어주셨다고 했다.어른이 어른인지라 무척 조심스럽지만 이 정치평론가는 그래도 이 분께 시나가와에는 언제 가셨더냐고 여쭈어 보았단다. 일제시대 비평가 임화가 시인이기도 해서 일본 비평가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의 시`비내리는 시나가와 역`에 화답 해`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라는 시를 지은 것이 두고두고 연구 주제의 하나가 되어 있기도 하다.이 느닷없는 질문에 이 분은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정치평론가를 쳐다보셨노라고 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학교에서도 퇴직하시고 방송 같은 데는 좀처럼 출연도 하지 않는데, 그래도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일이었을 것이다.그날 당신은 김달진 문학제에 잠깐 참석해서 당신의 소임을 마치고는 식장을 빠져나가셨다고 한다. 내가 진해 구민회관에 갔을 때 그 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정치평론가와 두 시간 되는 생방송 토론을 마치고 학교로 가는데, 김윤식 선생과 관련해 이런저런 생각이 났다. 그 많은 생각 가운데 가장 정확한 표현을 어제서야 찾았다. `지금 절간에 선승이 없다`는 것이다.필자가 지금 몸담고 있는 곳을 절간이라 비유해 본다면 과연 이 절간에 선승이 없는 것 같은 적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모든 세월을 학문 연구에 다 바쳐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려는 고독한 투쟁 대신에 행사에 참여하고 토론에 참여하는 필자가 과연 제대로 된 자격을 갖춘 연구자일까?필자는 선생이 학교에 재직하고 계실 때 그 단단하던 어깨를 잊지 못한다. 선생은 양복을 세련되게 입을 줄 아는 분이셨다. 필자의 뇌리에는 푸른색 와이셔츠에 멋진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학교 캠퍼스 자하연 옆을 걸어가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도 그 분이 50대 중반쯤이나 후반쯤이셨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선생은 몸과 마음에 지침이 없었고, 매일 학문세계를 열어나가는 뜨거움이 계셨다.내가 진해 구민회관에 가자 선생을 뵈었다는 사람들이 참 기운이 빠져 보이신다는 말들을 했다. 눈에 띄게 쇠약해지신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사실 쇠약해지신 것이 아니다. 지금도 선생은 몇 달 전에 새로운 저서를 냈고, `문학사상`에는 월평을 연재하고 계신다. 선승이 절간을 떠나 다른 곳에 가 있을 뿐, 선생을 닮은 선승이 그 절간에 없을 뿐이다. 선승 없는 절간에 이판인지 사판인지 불분명한 사람 하나가 선승의 자태를 그리워할 뿐이다.

2012-09-13

안티고네는 왜 죽음을 택했나?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더불어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리스 비극 가운데 하나다. 둘 다 소포클레스가 썼다. 소포클레스는 예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오이디푸스 가문의 이야기를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재창조하여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창조했다. 이 비극들 속에서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해서 스스로 두 눈을 멀게 한 후 두 아들에 의해 추방되었는가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테바이의 왕손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비를 죽일 운명을 타고났다는 신탁을 두려워한 아버지에 의해 낯선 곳에 버려지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웃나라 왕의 손에 길러지게 된다. 성년이 된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엿듣고 아비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정든 나라를 떠난다. 그러나 그는 테바이로 오게 되고, 길에서 노인을 만나 시비 끝에 살해하기에 이르니 그가 바로 오디디푸스의 친아버지인 테바이의 왕이다.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는 나라에 흉년이 들자 신에게 이유를 묻고, 천륜을 어긴 범인을 찾아내서 징벌해야 한다고 한다. 자신이 범인일 리 없다는 믿음 속에서…. 설령 자신이 범인이라 해도 진실을 캐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오이디푸스는 점점 더 사건의 실체를 찾아 들어가게 되고, 마침내 자신이 범인임이 밝혀진다.`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가 국외로 추방된 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머니 이오카스테가 자살하고, 아버지 오이디푸스가 먼 곳으로 떠나버린 후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오빠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권력투쟁을 벌이다 모두 죽고 만다. 그러자 테바이의 왕권은 크레온에게 돌아가고, 그는 에테오클레스의 죽음은 기려주는 반면에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을 금지해 버린다.이로부터 안티고네의 고뇌에 찬 행동이 시작된다. 그녀는 외삼촌이 국명으로 금지한 일을 거행한다. 비록 크레온이 왕으로서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들판에 방치하도록 명령했지만, 누이인 자신은 그것을 따를 수 없다. 크레온의 명령은 국가의 이름, 왕권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지만 자신과 오빠의 관계는 이 국가 또는 왕권의 이름으로 갈라놓을 수 없는 천륜이다. 오빠는 죽음의 신인 하데스가 통치하는 영원한 세계 속으로 들어갔고, 자신은 세속적인 명령 때문에 영원한 원리를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은 살아 있는 동안 세계를 지배하는 세속적인 원리 때문에 죽은 오빠를 매장해서 하데스의 영지로 돌려보내야 하는 신성한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결국 안티고네는 바로 그 신념에 찬 행동 때문에 크레온에 의해 죽음에 내몰린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안티고네를 사랑했던 크레온의 막내아들 하이몬이 안티고네를 따라 죽음을 택하고,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버린 것을 알게 된 하이몬의 어머니, 즉 크레온의 아내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크레온은 자신의 왕권에 대한 맹신으로 인해 천리를 어기고, 그 자신마저 처참한 상황에 빠져버리게 된다.오늘 나는 소포클레스가`안티고네`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을 되새겨 본다. 우리를 이 땅 위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게 한 것은 자연이며, 세속적 법과 권력에 의해 한정될 수 없는 원리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자 주민등록번호를 받아 국가의 소유물이 된다. 우리는 평생 국민으로 살아가며, 국적을 바꾼다 해도 또 다른 어느 나라의 국민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국가의 규칙에 따라 의무를 지키는 평생을 보낸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강력해 보이는 순간에조차 우리를 이 땅에 존재케 한 자연의 원리보다 우월하지 않다. 국가, 그리고 국권은 국민인 이들을 영원히 지배하거나 구속할 수 없음을, 국민의 생명과 가치가 국가와 국권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이 우리가 이 세속적 삶의 질서를 만들어 가는 토대가 돼야 한다.

2012-09-06

맛없는 한국 술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요즘 들어 우리 술이 맛없다는 느낌이 부쩍 커졌다. 빛깔로 표현하면 술에서 노란 맛이 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개나리 샛노랑 빛이 아니라 짐짐하고 멩멩한 빛, 알코올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시기는 마시지만 뭐 그리 탐탁할 것 없어 억지로 마시는 것 같은 술맛이다.`참이슬`도, `처음처럼`도 다 마찬가지다. 언젠가 나는 `처음처럼파`가 되었는데, 두세 주 전부턴가는 이 `처음처럼`이 처음과 같지 않은 것 같아 적잖이 당황했다. 술에서 뭔가 냄새가 나는 것 같고, 개운치 못한 단 맛이 나는 것 같아서 목으로 넘기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옛날에 `참이슬`이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처음처럼`이 그런 것 같았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이 이번에는 다시`참이슬`로 주종을 바꿔보았지만 맛이 깨끗하게 느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 그래서 요즘에는 꼭 빨간 딱지가 있는 `참이슬`을 달라고 한다. 그게 알코올 도수가 조금 더 높지만 그나마 맛이 낫게 여겨졌기 때문이다.어떤 때는 폭탄주를 마시기도 한다. 폭탄주가 남자들 주탁(酒卓)의 필수 복용 주류가 된 지는 벌써 오래지만 설마 이 폭탄주에서까지 노란 맛이 날 줄이야. 소주에 맥주를 타 마시는 소주 폭탄주는 노란 맛이 두 배나 되는 것처럼 느끼해서 입을 대기가 싫다. 왜 그럴까? 나는 한국 맥주 맛이 별로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라거, 카스, 하이트…. 이런 것들이 어째 진짜 맥주 같지가 않고 밍밍하거나 젬젬하다. 그러니 여기에 소주를 타본들 독한 맛은 조금 늘지만 단 맛이 같이 늘어나니 어떻게 감당해 볼 수가 없다.유럽에 가서 맥주 맛을 봐서가 아니라, 요즘 유럽에서 수입해 들어오는 맥주들은 맛이 그 나름대로 독특하다. 일찍이 많은 사람들이 맛본, 약맛 나는 `기네스`는 맥주의 진한 맛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주지 않던가. 나는 요즘 독일 맥주인 `에딩거 헤페`를 좋아하는데, 맛이 깊고도 강렬하지만 값이 이만저만 비싼 게 아니다. 한때는 밀러나 버드와이저를 좋아한 때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왠지 이것들이 싸구려 맥주의 대명사가 된 것 같다. 아마도 우리 맥주나 소주 단 맛이 이 맥주들과 어딘가 통한다는 생각이다.일본에 더러 여행가면 고장마다 술이 제각각이어서 감탄스러울 때가 많다. 쌀로 빚었든 고구마로 빚었든 제각각 맛이 다르니 골라 맛보는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진짜 술을 마신다는 느낌이 좋다. 화학주가 아니라 발효주인 까닭에, 일본 사람들은 요즘 우리 막걸리를 좋아한다지만 나는 진짜 곡물로 빚은 일본 술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다 못해`다테야마`같은 대중주도 그런대로 맛이 없지 않고, 언젠가 마셔본 오키나와 술 아와모리 같은 것은 알코올 도수가 몇십 도씩 되는데도 마시는 맛은 일품이다.중국은 또 어떤가? 언젠가부터 `수정방`에 맛을 들여, 어쩌다 가끔 겨우 마실 수 있는 비싼 술이지만, 입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그 맛은 생각만 해도 짜릿해서 잊을 수 없다. `마오타이`같은 술은 같은 중국술인데도 왜 그렇게 달착지근한지? 술 하면 역시 `수정방`처럼 투명하게 빛나면서 폭죽처럼 확산되는 맛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다.그럼 우리 소주는 좋은 게 없나? 물론 있다. 다들 알고 있듯이 안동소주도 좋고, 이강주도 좋고, 한산 소곡주도 좋다. 안동소주는 독해도 독하지 않고, 이강주는 냄새가 나도 냄새가 나지 않으며, 소곡주는 달아도 단 맛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소주 중엔 제주도나 가야 맛볼 수 있는 `한라산`이 최고다. 그 투명하게 비치는 병에 한라산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소주를 한 모금 목에 넘기면 제주 애월리 바닷물을 소금기 빼서 마시는 것 같은 근사한 기분이 난다. 옛날에 투박한 쓴 맛을 주는 경월이 그런대로 괜찮았고, 지금은 마산에 가면 마실 수 있는 참소주도 괜찮다. 그래도 한국 소주는 어딘가 진짜 맛을 잃어버린 것 같다. 사람들이 달게 되고 노래져서 그런 걸까? 아니면 술을 술답게 만들지 않기 때문인 걸까?

2012-08-30

출판불황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경제가 안 좋다는 말들을 많이 하지만 출판 불황만큼 심각한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경제 여러 곳에 주름살이 생기면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필요한 책은 사주려고 애쓴다. 어쩌다 자기에게 필요한 책을 구입하기는 하는데, 주로 자기계발서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를 궁리하는 것이다. 인문이나 사회과학 계통의 교양서적, 문학에 관련된 책들은 찬밥 신세다. 두 주 전쯤이었나? 학원이라는 도매상이 폐업을 했다. 35년 전통을 가졌다는 국내 4위 규모 회사였다. 내가 아는 1인 출판사 사장이 이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울상을 지었다. 결제 받아야 할 잔고가 500만원 넘게 깔려 있었다고 했다. 아무 언질도 없이 그렇게 문을 닫아버릴 수 있느냐고 했다. 그런데 잘 나간다 하는 출판사들 몇 개는 어떻게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일찌감치 돈을 받아 챙겼더라는 것이었다. 학원도매 같은 회사가 무너지면 1인출판사나 사원 두셋 놓고 책 만드는 회사들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연합뉴스를 보면, 지난 1월에는 국내 최대 규모 총판인 수송사라는 회사가 무너졌고, 4월에는 인천공항에 입점한 체인형 서점 GS북이 부도를 냈다. 확실히 심각한 출판 불황이다.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하나? 불황은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들과 도태되는 자들을 골라내고 이것이 새로운 경제 환경을 만들어 간다. 그러나 경쟁만능주의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배려하지 않는다. 인본적이지 않고, 야만적이다.나라가 출판 불황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보태줄 수 있다. 나라가 출판산업을 육성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책을 만드는 작은 회사들을 격려해 주어야 한다. 특히 학술이나 문학 같은 분야의 책을 만드는 회사들을 위한 정책이 절실하다.그러나, 현재 사정은 정반대다. 매년 우수 학술 도서를 선정해서 책을 구입해 주는 학술원에서 올해 선정된 도서 한 권당 800만원을 지원해준다고 한다. 작년에는 1천500만원 선이었으니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예산이 부족해서라고 하는데, 예년에 책정했던 돈은 지금 어디에 쓰고 있나?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지만 차라리 말하지 않으려 한다.우리나라에서 학술적인 책을 내는 출판사들은 500부를 바라보고 책을 만든다. 저자에게 인세를 주고, 종이값을 대고, 인쇄·제본·배본 등을 하고, 사무실을 유지하고, 한두 사람 월급을 주는데 들어가는 돈을 따져본다. 책 한 권 만드는데 약 1천만원 정도는 든다고 봐야 한다. 그럼 책값은 얼마나 하나? 한 권에 2만원이라고 하면 500부를 찍어 다 팔아야 본전이다. 이것도 한 번에 다 팔리는 게 아니라 1년을 두고, 2년을 두고 팔아야 바닥을 볼 수 있다.대중적인 감각을 갖춘 저자의 책은 사정이 낫다. 그러나 웬만한 학술 서적의 국내 수요는 약 300부를 넘지 못한다. 그만큼 시장이 작고 영세하다. 인터넷이다, 모바일폰이다, e북이다 하고, 경제가 어느 때보다 안 좋다고 하고, 국민들의 경제주의적 사고는 훨씬 더 강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작은이`들의 출판산업에는 비상구가 없다.바야흐로 사양산업이 되어버린 출판업이다. 마치 우리 농촌을 닮았다. 언제 사정이 좋아지려는지 기약이 없다. 그런데 이 농촌에는 농협도 없다. 추곡가를 수매해 줘야 할 정부도 무성의하다.책 만드는 산업이 귀한 것은 그것이 문화를 양성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향상시켜 주기 때문이다. 책은 마음에 양식이 되는 것이라 한다. 책을 읽는 사람들 스스로 이 뜻을 깊이 새겨봐야 한다.지하철을 타면 양쪽 문 사이 한 칸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 일곱 명이다. 나는 종종 이 분들을 관찰해 본다. 일곱 명 중에 평균 네 명은 모바일폰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책을 가진 사람은 아예 없거나, 몇 번 세어볼 때 한 명 있을까 말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잘 안 읽는 사람들이다. 책 읽는 한 명이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12-08-23

내가 제일 힘 쎄!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박현수 경북대 교수, 서안나 시인,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이 행사의 한 부분인 백일장 심사를 마친 참이었다. 한 3년 전부터 이곳을 알았었다. 만해마을은 백담사에 딸린 공간, 해마다 만해축전이라는 큰 행사를 열고 있었다.일을 끝낸 뒤라, 어디선가 맛있는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만해마을은 원통에서도 속초 쪽으로 한 20분 달려가야 하는 곳. 커피전문점 같은 곳이 아주 귀하다. 우리는 만해마을 근처에 있는`오래된 시계`라는 나무집으로 갔다. 근방에서 진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고는 이곳뿐이었기 때문이다.나는 한 3년 전에 만해마을 근처를 배회하다 이런 집이 있다는 걸 알았다. 원목으로 지은 2층집이고, 간판은 영어로 `Old Clock`(올드 클락)이라고 되어 있었다. 갔더니 1층 문이 잠겨 있고, 휴대폰 번호가 남겨져 있었다. 혹시라도 찾아올 손님을 위한 것이었다.잠시 후 까페 주인이 왔다. 우리는 2층으로 안내되었다. 바깥에서 곧장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돼있었다. 1층은 이 분의 주거공간이라고 했다. 2층은 넓었고, 어둠침침했다. 그래도 창은 꽤 넓었는데, 바로 옆에서 흐르고 있는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돼있었다.주인아저씨는 어딘가 모르게 괴짜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그것은 2층 홀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오래된 레코드 판들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손님은 그때도 달랑 우리 일행뿐. 우리는 그 분과 어떤 이야기들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 분은 이 집을 직접 지었다고 했다.아마도 이 분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백 번도 넘게 받았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집을 갖게 되었느냐? 어디서 뭘 하셨느냐? 레코드 판은 다 진짜냐? 얼마나 모은 것이냐? 사람들은 상대방이 그 질문을 반가워할지 어떨지 생각하지도 않고 지겨운 질문을 던져내는 경우가 많다.그 분은 이곳에 집을 짓기 전에 신촌에서 수십 년 동안 다방 같은 것을 했다고 했다. 아마 다방이 아니라 그 비슷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팝송에 미쳐 있었고, 이 레코드판들은 모두 팝송이고, 우리 음반은 하나도 없다고 했었다. 그때는 겨울이었던가.지금은 여름이다. 우리는 또 우리밖에 없는 2층 홀에 널부러지듯 앉아서 주인 양반에게 커피를, 나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말했다. 빌리 홀리데이를,`I`m a fool to want you`(누군가 이 노래 제목을 `당신을 무지 원하는 나는 바보`라고 번역해 놓은 것을 보았다)를 듣고 싶습니다. `빠담 빠담(padam padam)`도요.왜냐하면 이곳은 내가 듣고 싶은 팝송이나 샹송이라면 어떤 곡도 이미 준비되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내 지식 범위, 감상의 범위가 미치는 한도쯤은 이곳에서는 애송이 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일찍이 알았다.우리는 3년 사이에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 분도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나와 성이 같기도 한 그 분의 괴짜다운 성품이 진즉부터 좋아져 있었다.“여기서는 내가 제일 힘 쎕니다. 어떤 가수도 내가 나오라면 나와야지. 들어가라면 들어가고. 용서 없어. 크크크. 하하하.”우리는 이 분의 말씀이 너무 재밌어서 웃어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내가 제일 힘쎄. 왜냐. 나는 내가 평생을 들여 모아온 음반들로 내 왕국을 만들어 놓았으니까.“손님도 없는데 어떻게 하세요?”“돈 벌면 뭐해요? 버는데 맞춰서 덜 쓰고 살면 되지.”웃어대면서 나는, 나도 내가 제일 힘쎈 왕국을 하나쯤은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2-08-16

올림픽 관람기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한국 축구가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다. 옛날 축구가 아니다. 중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는 미식축구가 유명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매번 졌다. 그러면 감독이신 체육 선생님이 팔짝팔짝 뛰면서 선수들을 혼냈다. 전교생이 응원을 하던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나는 미식축구 아니라 축구도 선수가 되는 과정은 그런 것이려니 했다. 그래서 한국 축구는 창의성이 부족한 게 아닌가 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선수들이 마치 남미 선수들처럼 상대 선수를 둘씩, 셋씩 젖혀내고 요리저리 공을 몰아 앞으로 내달렸다. 상대 선수가 공을 잡으면 두 사람, 세 사람이 압박을 해서 꼼짝 못하게 했다. 심판이 내리는 판정에 대해서는 주장 구자철이 얼마나 말이 많은지, 마치 펜싱 사브르에서 우리 남자팀에 패하고 만 이탈리아 선수들 입을 방불케 했다.섬세하고 자유로워 보였다고나 할까. 잘하는 축구를 보면 예술 같은데, 우리 축구가 그런 것에 가까워진 것이 영국팀을 이긴 것보다 더 기쁜 일이었다.그런데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났나? 내가 늘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에 이승은이라는 출판사 편집자가 있다. 축구며, 펜싱이며, 이번에 참 잘들 한다는 얘기를 나누는데, 문득 이 사람이, 자신은 올림픽 경기들을 보는 게 너무 마음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왜냐? 대화를 나누던 나를 포함한 두 사람이 다소 의아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이기려고, 앞서려고 안간힘을 쓰며 경쟁하는 모습이 보기 싫다는 것이다. 올림픽이 사람들을 비정상적인 생존 싸움으로 내몬다는 것이다.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다. 특히 유도니, 레슬링이니, 배구니, 탁구니, 축구니 하는 경기종목을 보면 서로 이기려고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달리기나 수영이나 양궁 같은 종목은 그렇지도 않다. 그런 종목들은 인간의 심신에 내장된 가능성을 극한에까지 밀어붙여 발견해 보려는 진정한 실험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100m 달리기를 9초 몇에 끊어내는 우사인 볼트나 한층 성숙된 인간미를 보여준 박태환 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칭송 받아도 나쁘지 않은 게 아닐까? 그렇다. 그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펼쳐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과연 이 최고의 인간들은 과연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이 문제는 간단치 않다.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 꼭 눈이 매처럼 밝아 매번 과녁의 10점에 맞출 수 있는 양궁 선수일 것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보면 도저히 들 수 없을 것 같은 바벨을 거뜬히 들어 올리는 역도선수가 이상적인 체형을 가지고 있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도대체 그 100m 달리기는 왜 150m 달리기는 될 수 없었던 것인가? 또는 그것이 3천m 달리기였다면 우사인 볼트의 이름도 그렇게 높지 못했을 수도 있다. 즉, 우리가 칭송해 마지않는 경기 능력이라는 것도 사실은 다 인위적으로 설정된 규칙에 따른 훌륭함일 뿐이라는 것이다.나는 올림픽을, 우리 훌륭한 선수들을 깍아 내리고 싶지 않다. 다만 그 모든 최고를 향한 노력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달성한 심신의 높이가 곧 우리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심신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리라는 것이다.늦은 밤부터 동이 터올 때까지 전후반 90분, 연장 전후반 30분, 승부차기까지 전부 소화해내고도 그날은 밤을 새워 축구를 본 보람과 기쁨이 있는 날이었다. 우리 축구에서 체육이 예술이 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행운일 것이다. 하지만 올림픽의 모든 훌륭함을 인정하고 난 후에도 우리는 저 이승은씨가 말한 경쟁의 무위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조화가 늘 최상을 지향하는 행위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2012-08-09

영덕에서 전복 비빔밥을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이 뜨거운 여름에 하루쯤은 일을 잊고, 놓고, 포항 바닷가 쪽에 나가보는 건 어떻겠소? 포항 바닷가도 불꽃 축제 벌어지는 시끄러운 곳은 말고. 그런 곳에는 식구들하고나 가고. 그댈랑은 따로 혼자 되어 저 북부 해안도로 외로 돌아 포항을 빠져 나가는 길목 같은데 앉아.혼자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겨 보오. 내가 어찌 어찌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말요.그런 한적한 곳은 그러니까 아리랑 횟집 같은 곳이겠소. 포항 본고장 물회 맛이 일품인 곳. 회 무침에 얼음 김치 국물을 적당히 붓고, 국수에, 밥에, 참 시원도 스러웠소. 창밖으로는 물결이 일고 바다 건너편에는 포스코가 길게 누워 있고.그러면 더 한적한 바다로 나가고 싶지 않겠소?그러면 영덕 가는 쪽으로 권할 만하오.불국사 말사라는, 보경사 돌아드는 곳 그냥 지나쳐 조금만 더 가면 다리가 하나 보이는데.그 짧디 짧은 다리가 영덕과 포항을 경계 짓는다 하더이다.그 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돌아드니, 공기 냄새도, 물 냄새도 벌써 포항하고는 많이도 다르고. 내 마음 저절로 한적해 지더이다.바다는 해변횟집 바로 앞에 방파제까지 밀려와 일렁이고 있었소.그 집은 벌써 몇 십 년째 한집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하더이다.전복이 비빔밥 재료가 될 수도 있음을 그때서야 알았소.전복이라는 두 글자 말로는 결코 실감 나게 표현 못 할 향미. 바다를 얇게 썰어, 물에 헹궈, 짭조름한 맛은 덜어내고, 송이버섯같이 향긋하고 유순한 맛만 우려 내 놓은 것 같은 맛.벼를 모른다고 한 김해경 이상처럼 벼를 잊은 지 너무 오래 된 내게 바다는 또 무슨 호강이오? 서울에서 비린내 없는 전복 구경은 어찌나 어렵던지? 나는 으레 날전복은 비린내 나는 것이려니 했었소.2층 방에 올라가자 오래된 화분들이 정갈하게 앉고 섰다 우릴 맞아 주고. 자리를 잡고 앉자, 파도가 내 친한 벗이라도 되는 듯 장난질을 쳤소.문득 백석이 동해를 친구삼아 건네던 말을 떠올렸소.`이것은 그대와 나밖에 모르는 것이지만, 공미리는 아랫주둥이가 길고 꽁치는 윗주둥이가 길지.`공미리는 학꽁치의 다른 이름이오.서북 사람인 백석이는 동해가 좋았던 모양이오. 충청도 평야에서 난 나도 왜 이렇게 동해, 이 친구가 좋아지는지 모르겠소.동해야. 나도 나와 그대밖에 모르는 비밀을 하나쯤 갖고 싶으이.숟가락 뜨다 말고 친구를 바라보고, `참`소주병을 기울여 팔꿈치 무릎에 얹어 놓고 한참을 뜸들이다 한 모금 넘기고, 넘기고.이것은 내가 혼자 그곳에 간다면 그렇겠다는 것이오. 그때는 바로 해가 저물어도 좋소. 바다에 그늘이, 어둠이 내리는 것, 뜨거운 낮이 차차 열이 가시는 것이 얼마나 좋이 느껴지겠소? 그러면 해풍은 또 얼마나 시원켔소?이렇게 폭염이 몇 날 며칠째 계속되는 나날이면, 바로 엊그제 갔다 오고도 벌써 저 멀리 웅크려 앉은 호랑이 꼬리뼈 언저리로 또 가보고 싶은 생각. 맛난 전복비빔밥에 바닷바람까지 비벼 넣고 소주 한잔 기울이고 싶어지는 마음.이런 마음으로도 나는 벌써 서울에 있어도 서늘해 지오. 그날이 그날 같은 나날에 그런 맛있는 날은 또 없을 것 같소.

2012-08-02

나는 외야수가 좋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나는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축구가 가진 활력에 비해 야구는 너무 정적인 느낌을 준다. 휴지(休止)가 많고, 멈춰 있는 시간이 긴 것은 스포츠든 게임이든 진력이 난다. 한 번은 경마장에 가본 적이 있는데, 이건 무슨 게임이 이런지, 한 번 경주를 하고는 삼십 분이나 기다렸다 또 한 경주를 하고, 이런 식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것이었다. 게임에 열중한 사람들은 그 시간 동안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말들을 관찰하고, 무엇인가 기록도 해 가며 삼십 분이 부족하게 빠듯이 쓰는데, 나는 그 사람들 관찰하는 것도 한두번이지 이건 도무지 싫증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원래 자신이 열중하고 있는 것에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는 것이다. 야구 팬들도 보면 투수가 교체될 때나 공수가 전환될 때와 같은 멈춤의 시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보내면서 이것저것 생각도 하고, 기록도 체크하고, 치어리더들도 보면서 재밌게 보낸다.하지만 나는 불행히도 야구에 빠지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OB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싸우는 걸 재밌게 본 이후로 야구 경기를 한두 번이나 관람했을까. 그러니까 나는 낚시나 바둑에 빠지지 못한 사람들처럼 야구에 빠지지 못한 사람이다.이렇게 빠지지 못하다 보니 야구에 대한 불만도 생겨났다. 야구는 이상하게 다이아몬드 안에만 반짝이는 것 같다. 투수와 포수와 타자의 게임 같다. 결코 소수만을 위한 스포츠가 아닌데도 왠지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조연에 불과한 것 같다.어렸을 때 평범하지 않은 것은 열등한 것이라는 명제에 심취하기도 했던 나는 주연과 주역만 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조연이 좋고, 조역이 좋다. 그래서 나는 야구에서 외야수만은 좋아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나는 외야수의 고독을 좋아한다. 외야수는 있어도 없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투수와 타자가 승부를 겨루는 순간 외야수는 관중들의 관심권 바깥에 있다. 외야수는 언제나 다이아몬드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야구장 사람들은 그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로지 공이 외야를 향해 날아갈 때만 관중의 시야에 들어간다. 그러면 그는 혼자 덩그러니 서 있다 죽어라 하고 공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공을 놓치면 안된다. 버젓이 잡을 수 있는 공을 놓쳐버리면 그때 관중들에게서 쏟아질 야유는 또 얼마나 크겠는가? 그런 치욕적인 순간에 부닥치지 않으려면 그는 사력을 다해야 한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공을 그가 멋지게 잡았을 때 관중이 보내주는 칭찬도 잠깐이다. 그는 다시 적막한 자기만의 공간을 감당해야 한다. 또 외야수는 공수가 바뀔 때마다 얼마나 멀리 이동해야 하던가. 그는 멀리 갔다 멀리 돌아오는 사람이다. 그는 야구장에서 가장 고단한 사람이다. 자기팀이 삼진아웃 세번으로 허망하게 공격을 끝내버리면 그는 돌아오자마자 다시 먼 곳으로 뛰어나가야 한다.나는 그런 외야수가 좋다. 더불어 외야수같은 사람들이 좋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이아몬드 안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보다 외야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외야수들이 다이아몬드 안의 사람들마저 그들답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안다.지금 사람들은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이아몬드 안에서 열띤 게임을 벌이는 정치인들을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다이아몬드 안의 정치인들을 그들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외야수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관중석의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게임의 필수 불가결한 일부이며, 그들 없이는 게임이 성립될 수 없는 존재들이다.조정환이라는 진보이론가는 “진짜 대권은 사람들 각자가 쥐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바야흐로 외야수들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이 외야수들이 덜 힘든 세상을 맞이하고 싶다. 외야수들이 자기가 누군지 알아야 하는 시간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2012-07-26

타인은 나보다 크고 복잡하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면 생활이 꽤나 번잡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일주일 사이에 나는 백태웅 교수와 두 번이나 우연히 마주쳤다. 지난봄에 하와이 갔을 때 처음 만나 놓고는 연락 한 번 주고받은 일 없는데, 서울에서 이렇게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은 강남에서, 다른 한 번은 여의도에서. 오늘 여의도역 앞에 있는 투썸플레이스라는 커피숍에서 백태웅 선생을 만나자 나는 내 가방 속에 든 책,`안철수냐 문재인이냐`의 존재를 바로 떠올렸다. 이 책은 바로 어제 세상에 나왔고, 이 책의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정환 선생은 저 1990년 전후의 격변기에 백태웅 교수의 동지였다.그때 두 사람은 급진적인 진보 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다. 한 사람은 긴 수배생활을 거쳐 지금은 `진보 지성의 정원`이라는 다중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긴 수감 생활 끝에 사면을 받아 미국 노틀담 대학에 유학해 지금은 하와이대학의 법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과연 진보란 무엇일까? 사실 이 문제는 인생이란 무엇일까? 하는 문제보다 여러 수준 아래 문제다. 우리는 먼저 인생에 대해 묻고 그 다음에 다시 진보라든가 보수라든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물어야 한다. 이 물음의 순서가 바뀌면 그 사람은 필시`겉넘게` 된다.`겉넘다`라는 말은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충 푸는 것을 뜻한다. 돌이켜 보면 20대와 30대 초반에 나는 이렇게 `겉넘는`사람이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인생과 우주에 관해 따져 생각한다는 것인데, 변증법적 논리학을 외우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삶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은 나와 타인과 공동체 또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사유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저 사회를 바꾸면 모든 것이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니,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결핍된 사유 형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음을 날카롭게 인식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쪽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 자신 안에서 철학적 사유를 회복시켜 세계와 우주에 대한, 삶 자체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구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다.올해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렸다. 과거에 내가 읽어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하루키의 문장을 찾아 그의 소설들을 이리저리 뒤져 보았지만 정작 그 대목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나`는 공적인 문제를 위해 내 노력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다. 왜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투하는 동안 숱한 문제들이 새로 생겨날 텐데, 왜`내` 귀중한 삶의 시간들을 그런 덧없는 일에 바친단 말인가?”나는 그렇게 덧없이 인생을 허비했던 백태웅 교수가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것이 내 인생의 질문에 어떤 중요한 작용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하와이에서 만난 백태웅과 오늘 여의도에서 만난 백태웅. 이상하게도 정채가 감도는 그의 까만 눈동자와 함께 며칠 전 내게, 몇 년 동안의 자신의 연구 결과를 집약한 두툼한 연구서를 건네주고 돌아간 선배 교수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생각해 본다. 나는 나 자신의 복잡, 번다한 생활 속에서 숱한 일들을 만들어 가면서 내 자신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하고 있다고 믿곤 한다. 하지만 내 삶의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에 타인은 나와는 다른 종류의 삶의 시간을 그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나는 내 스마트폰 메모장에 한 문장을 천천히 새겨 기록해 놓는다.`타인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크고 복잡하다.`

2012-07-19

뤼순감옥에서 단동으로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련에서 내려 뤼순감옥으로 직행했다. 뤼순감옥은 우리 선열들의 피가 배어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같은 분들이 사형을 당하고, 또 옥사했다. 뤼순 감옥에는 물론 난방장치가 없다. 교화시설이 아니라 형벌 시설이라는 것을 보여주듯 감방은 좁고 남루했다. 죄수들은 노역을 해야 했는데, 일을 하러 갈 때는 무거운 쇠공이를 발목에 차고 끌고 다녀야 했다. 죄수들은 형틀에서 고문을 받기도 했다. 매일 죄수들이 죽어 나갔다. 사형을 받은 죄수들의 시신은 나무통에 통조림처럼 담겨 같은 죄수들에 의해 매장됐다.나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당한 시간을 기억하기로 했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은 그때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너무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는 죽음 앞에서 의연했다.안중근의 죽음을 기리면서 생각했다. 진리나 이상은 그것을 품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진리나 이상은 미래에 실현된다. 지금 우리는 안중근이 염원하던 독립된 나라에 살고 있다. 아직 통일되지 않았지만 안중근이 우리나라에 대해 품고 있던 이상은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진리나 이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존중받고 존경받아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진리와 이상을 품은 사람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하기를 즐긴다. 꿈이나 꾼다는 것이다. 자기 꿈에 빠져, 사서 고생을 한다거나 그 사람 옆에 있으면 자기까지 불행해진다고도 한다.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속물이라고 한다는 것을 당사자는 알지 못한다. 이 속물들의 인생조차 진리나 이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빛을 쏘이고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속물들은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행복만을 추구할 수 있다.단동은 옛날 이름이 안동이다. 중국에서 동쪽을 평안하게 한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대련에서 버스로 네다섯 시간 거리. 이곳이 어디냐 하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땅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일 년 전에도 뤼순을 거쳐 단동에 왔었건만, 올해 다시 어떤 견학단의 일원이 되어 똑같은 코스를 밟아온 것이다. 단동에는 지금 신도시 건설이 한창이다. 신의주 접경에 북한과 중국이 합작해서 무슨 단지인가를 조성하려 하고 있는데, 이런 흐름을 타고 부동산 경기가 뜨겁다고 한다. 심지어 서울 강남 아줌마들이 단동의 압록강변 쪽 전망 좋은 아파트들을 사들이고 있다고 한다.나는 일제말기 몇 년을 단동과 남신의주에서 살았던 백석의 자취를 더듬었다. 함경북도 삼수라는 첩첩산중에 가서 몇 십 년을 살아내야 했던 백석. 그는 왜 북한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그는 영문학을 공부하고 그렇게 여행과 방랑을 즐겼음에도 어째서 사회주의 이념의 땅에 남아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그가 참으로 많이 후회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원치 않는 시를 쓰느니 차라리 돼지치기, 양치기로 평생을 보내려 했을 백석의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삶을 생각해 본다.지금 백석의 도시 단동은 남북한 관계가 경색된 때를 틈타 북한 경제를 좌우해 나가는 중국의 정책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남북한이 멀어지니 자연히 북한은 중국 영향권 내로 점점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중국 기업가가 북한 쪽에 `오더`를 주면 북한 여러 지역의 공장들이 그 주문을 소화해서 가동된다. 북한은 공장 지을 돈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서 공장을 지어주고 광물자원 같은 현물로 갚도록 한다고 한다.통일은 쉽게 실현되지 못할 진리요, 이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길게 살릴 단 하나의 길이다. 이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다.

2012-07-12

일제시대 문학하던 생각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그 시대에는 한국어로 문학을 하는 것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일제가 `국어`, 즉 일본어로 문학을 할 것을 장려 또는 강요했기 때문이다.`문장`이나`인문평론`같은 잡지가 폐간되고 대신에`國民文學`이라는 것이 생겨나 일본어로 소설이나 시, 평론을 발표하는 일이 생겨났다. 이것은 새로운`문학장`의 출현을 의미했다. 일찍이 이광수는 조선문으로 쓴 문학만이 조선문학이라고 해서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에서만은 제국적인 지배로부터 자율적인 거리를 확보하려고 했다. 언어 자체가 일종의 상징 자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광수의 이 생각은 아주 중요하다. 이광수는`조선문단`이라는 잡지를 펴내 작가들을 등단시켜 작품을 발표하도록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도향, 현진건, 채만식 같은 중요한 작가들이 나타나 `조선문학`이 활성화 되었다.1940년을 전후해서 일제가 학교에서의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이광수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감금하고 한글 잡지들을 폐간시키고 조선어학회 사건을 오늘날의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치안유지법 사건으로 다룬 것은 이 문학장의 재편을 노린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문단에 일본어를 도입하는 것이었으며 이광수 이래 형성된 조선문학의 전통을 폐지하려는 것이었다.이 새로운`장`의 출현에 조선 문학인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반응했다. 그 첫 번째 유형은 일본어로 문학하라는 권력의`명령`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문학인들 중 상당수가 이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기존의 문학장에서 별다른 재능을 나타내지 못한 사람들이 이`명령`을 높이 받들었다.두 번째 유형은 여전히 조선어로 문학을 해나간 사람들이었다. 이태준이나 박태원, 채만식 같은 중요한 문학인들이 여전히 거의 모든 문학 작품을 조선어로 창작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른 나이에 일본에 유학했던 이광수마저 자신의 일본어 문학이 절망적이었다고 보았던 만큼 문학에서 모국어의 의미와 역할은 절대적이며 이들은 이 가치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세 번째 유형은 침묵을 선택한 이들이다. 한글로 문학을 하는 것이 여의치 않고 그 문학에 대일협력적인 색채를 부조하지 않고는 작품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심화되어 감에 따라 작가와 시인들은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길을 선택해 나갔다. “묵하는 정신”을 주장한 백석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문학장`이란 다소 생소한 말이다.`장`이라는 것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그것은“입장들의 구조화된 공간”이다. 서로 적대적이거나 차이 나는 입장들이 뒤얽혀 있는 힘들의 충돌 공간이 바로`장`이다. 따라서`문학장`이라는 것도 문학적 입장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가치 지향을 가지고 함께 뒤얽혀 혼거하는 `공간`을 의미한다.그러나 이 `문학장`이 단순히 공간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포함하는 시간의 장이기도 하다. 우리의 역사가 불운했다면 백석의 의지는 일본어가 주도하는 문학장에 가려 햇빛을 쏘이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나 역사는 한글을 지킨 문학인들, 침묵을 선택한 문학인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지금 `문학장`은 그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 주도하고 있다. 만약 그 시기에 백석 같이 한글문학의 정신을 지키고자 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어떠했겠는가? 백석에게 있어 진정한 `문학장`은 일본어와 한국어가 혼거하고 있는 시대의`단면`이 아니라 저 멀리서부터 다른 저 미래로 연결되는 기억의 장이었던 것이다.

2012-07-05

침묵하는 정신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백석은 우리에게 이제는 아주 잘 알려진 시인이다. 나는 그가 쓴 시들을 언젠가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도 남들에게 나도 백석을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다들 좋다고 하는데 나까지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백석을 참 좋아했기에 그의 시를 외우려고까지 했던 적도 있다. 그중에서도 그가 통영에 대해서 쓴 시들 가운데 하나는 내가 가끔 사람들 앞에서 읊어 보이기도 할 정도다. 그 시를 여기 한 번 옮겨 본다.“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 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 한 마당에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백석은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는 바람에 일본 유학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시를 쓰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아는 주옥같은 시들을 써냈다.나는 위에 인용한 시 중에서도 특히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두 번째 행을 너무나 아낀다. 천희라는, 처녀를 뜻하는, 흔한, 이름다운 이름을 갖지 못한 여인의 절실한 사랑의 태도를 이렇듯 아름답게 표현해 놓을 수 있을까?그런 백석이 1940년경에는 훌쩍 만주로 떠났다. 만주라면 그 시대에는 만주국이라 해서 일본의 괴뢰국가의 영토였으니까 일본 천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곳에서 백석은 이른바 북방을 지향하는 시라는 것을 몇 편 남겼다. 아름다운 시들인데, 그것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저 시베리아, 만주, 중앙아시아를 이루는 대륙적인 풍정에서 찾는 것들이었다.그렇잖아도 1940년대 들어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은 백석이지만 그런 그의 시와 산문이 1942년 하반기가 되면 뚝 끊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대체 왜 그는`갑자기` 말문을 닫아버린 것일까. 이유를 찾던 내게 한 산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산문의 구절이 한 없이 무겁게 느껴졌다.민족의 경중을 무엇으로 달 것인가. 그 혼의 심천(深淺)을, 나아가서 존멸의 운명까지도 무엇으로 재고 점칠 것인가. 생각이 이곳에 미칠 때, 우리는 놀라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동양과 서양을 가려 본다. 그리고 서양보다 동양이 그 혼이 무겁고 깁은 것을 예찬하고 이것에 심취한다. (그러나) 동양은 무엇을 가졌는가. 동양에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가. 조선은, 동양의 하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다.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을 잃고도 통탄할 줄 몰라 한다. 무엇인가 침묵하는 정신을 잃은 것이다. 잃고도 모르는 것이다.그때는 `내지` 일본이고, 조선반도이고, 만주이고, 어디든 가리지 않고 대동아주의니, 동양주의가 횡행했다. 백석은 그런 시끄러운 소리가 정말 듣기 괴로웠던 모양이다. 그는 말한다. 동양의 혼이 서양의 혼보다 무겁고 깊다고 깝치지 말라. 동양에 그런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 엄혹한 시대를 견디는 가장 슬기로운 태도는 바로 “묵(默)”하는 것임을 알라.요즘 사방을 둘러보면 정말 흥성스러운 말잔치가 많다. 그러나 값이 없다. 고민한다. 과연 문학은 잘 말하고 있는 것일까? 깊은 `묵(默)`의 시간 속에서만 진짜 말이 솟아오르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것이 어찌 문학에서만의 일일까. 정치도, 교육도 그런 것이다.

2012-06-28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어느 날 보니 왼쪽 팔뚝의 살갗 밑에 아주 작게 손에 잡히는 것이 생겨 볼록 튀어나온 모양이 되었다. 여름이면 반팔 옷을 많이 입게 되니 이 작은 티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더구나 왼손잡이이다시피 한 내게 왼팔은 어떤 미묘한 심리적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 수 없었다. 하루는 라식 수술하던 생각을 했다. 예전에 대학 동창이 베이징 특파원으로 갔다 돌아왔는데 안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대학 때부터 항상 도수 높은 안경을 썼던 친구라서 이유를 물었더니 너무 힘들어 라식수술을 해버렸다는 것이었다. 수술하기 전에는 참 망설이고 주저했는데 하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보고도 그렇게 쓰고 다니지 말고 단 일 년을 살더라도 안경 없이 살아보도록 수술을 해보라는 것이었다.다음날 생각하니 그도 그럴 듯했다. 다짜고짜 이름 난 병원에 전화를 해서 찾아가 검사를 하고 수술 날짜까지 예약했다. 수술을 하고 나니 과연 시원했다. 라면 먹을 때 안경을 벗어 서린 김을 닦아내지 않아도 되고, 안경을 쓰고 자다 구부러뜨리고 부러뜨리고 하지 않아도 되고, 아침에 일어날 때 안경 어디 뒀더라 더듬거리며 찾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았던가.그래, 이 작은 잡티도 병원에 가서 쉽게 없애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집 근처에 병원이 하나 있는데, 건물에 커다랗게 써붙인 플래카드에 `당일입원 당일수술 당일퇴원`이라고 써 있었다. 평소에는 저런 병원이 어떻게 사람을 고치랴 하고 흘겨보며 지나다니던 내가 이 잡티를 없애겠다는 생각에 불쑥 그 병원 피부과를 찾아들었다.레이저 시술이라고 했다. 시술을 받고 2주쯤 거즈를 붙이고 있으면 감쪽같이 잡티 이전 팔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내게는 왼팔이 중요했기 때문에 나는 그 의사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레이저 시술은 전신마취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단백질 타는 내가 나는 것도 참으면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꿈을 꿨다.그런데 아니었다. 레이저 시술을 받은 자리에 화상 입은 흉터가 생기더니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살갗 안에 자리잡은 잡티는 2mm 짜리인데, 이 흉터는 1cm나 되었다. 의사를 찾아가 따지지는 못하고 물어는 보니 피부가 무슨 체질이라서 그렇다며 다시 시술을 받으면 원래대로 회복되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여러 고민 끝에 결국 나는 1cm나 되는 흉터를 왼쪽 팔뚝의 흉터를 안고 새로운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이리저리 마음은 갈등이 생기지만 참고 견뎌보자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 라식 수술 한 것도 감쪽같은 것만은 아니어서 눈에 건조증이 생겨 인공눈물을 쓸 때도 있고 밤에는 유난히 눈이 침침해지는 것 같은 문제도 있다. 더구나 이제는 본격적으로 가까운 것이 안 보일 나이가 되기까지 하니 눈이 곧 생명인 내게 불안감이 없지 않을 수 없다.봄에 학생들과 함께 경상북도 봉화, 영양 쪽으로 여행을 가서 어느 산 밑 음식점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벽에 세로로 경계문을 써 놓은 게 있어 자연히 눈이 갔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요점은 병을 나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병이 나으면 또 망념이 생겨 제 몸을 더 나쁜 곳으로 끌고가니 병이 낫기를 원하지 말고 병과 함께 살아가라는 것이었다.생각해 보니 원래대로 깨끗이 돌아가는 법은 없다. 내 몸도, 내 마음도 어찌 한 번 파헤쳐진 것이 원래대로 고스란히 깨끗해지랴. 모든 것이 완전한 세상으로 돌아가려 하지 말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이나마 잘 보수해서 시간과 더불어 천천히 견뎌나갈 수밖에 없으리라.

2012-06-21

사람됨이 공부보다 먼저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며칠 전 일이다. 전공진입 심사라는 것이 있어서 학생 몇 명 을 면접하게 되었다. 요즘 대학에서는 대개 학교에 들어올 때는 세부 전공이나 학과를 선택하지 않고 계열별 정도로 입학을 하고, 2학년쯤이 될 때 자기 전공을 택하게 된다. 그러니까 전공진입 심사라는 것은 국문학과를 택하겠다고 지원한 학생들을 심사하는 행정적 절차인 것이다. 1차 심사가 끝난 뒤 2차 심사기 때문에 남은 여석이 둘밖에 없는데 학생은 넷이 지원을 해서 두 사람은 다시 3차 심사를 기다려야 하는 까다로움이 있었다. 학과 사무실에서 심사를 하는데 한 학생이 들어와서 앉는데, 그 태도나 행동거지가 이상하게도 거칠었다. 눈빛도 뭔가에 증오를 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지원서를 보니 써넣은 내용도 자기 과시로 받아들여지기 쉽게, 성의 없이, 그러면서도 거만하게 느껴졌다. 면접을 하는 자리에 가 앉았는데, 앉아 있는 태도도 단정하지 않고 물어보는 말을 끊다시피 하면서 대답을 하는데,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대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질문과 응답이 오가고 사무실을 빠져 나가는데, 필자는 서류를 쳐다보느라 미처 보지 못했지만, 옆에 벗어두었던 모자를 낚아채듯이 확 집어 들고는 나가버렸다는 것이었다.학생이 나가고 나자 같이 합석해 있던 선생님이 저 학생을 마침 화장실에서 만났었다고 했다. 자신이 손을 씻고 있어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드럽게 말했는데, 아무 응답도 없이 차갑게 서 있었다고 했다. 그때도 왜 이렇게 느낌이 안 좋지, 하고 생각만 하고 지나쳤는데, 바로 이 사무실에서 마주치게 됐다는 것이었다.지금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학교로 오게 되면서 생각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학부 학생들과 잘 지내야겠다는 것이었다. 옛날에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 지도교수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학교 다녔던 기억이 절절해서 나만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지도학생들도 만나고 학과의 학부 학생들도 만나고 인문대 학생들도 자주 만나자. 그래서 그 친구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내 정성을 바쳐보자.처음에 와서 세 학기는 문학의 현장들을 찾아다니고 글도 써서 발표회를 가져봤다.시간도 돈도 많이 들었지만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차차 연구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기 시작하면서 학생들과의 만남은 빈도수도 줄어들고 질적인 면에서도 부실해졌던 것 같다.연구년이라고 해서 겨우 책 한 권을 펴내고 나서 학교로 돌아오자 다시 정신이 나는 것 같았다. 학부 학생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겠다는 생각이 다시 든 것이다. 학교의 교육 프로그램이 다양해져서 최근에는 `신입생 세미나'라는 자율 수업 말고도 `고전 원전 읽기'라는 것이 생겼기에, 이번 학기에 개설을 해서 스무 명 가까운 학생들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저녁 여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 만나왔다.학생들을 만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복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다들 젊고 순수하다. 이 맑은 기운을 날마다 접함으로써 나 자신도 덜 낡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면접 때 만난 학생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일까? 집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학교에서 무슨 기분 나쁜 일을 당했던 것일까? 중요한 것은 사람됨이 공부보다 먼저라는 것이다. 공부만 앞세우는 풍토 속에서는 좋은 인격을 갖춘 사람이 많이 배출되기는 어려울 것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2-06-14

진보와 안철수씨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오늘 아침에 신문을 보니 문재인씨 지지율이 한 자리수로 떨어졌다는 말이 나온다. 지금 민주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당대표 선출 행사의 여파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문재인씨와 이해찬씨가 이른바 `친노'로 연합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한길 의원이 부상하는 데 따른 영향이라는 것이다.오늘은 다중 네트워크라는 곳에 가서 조정환씨를 만났다. 왜냐. 앞으로 있을 큰 선거를 앞두고 `진보' 쪽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셈이었다. 특히 이`진보'라는 것과 관련해서 안철수씨는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를 물었다. 그것은 지금 기획중인 어떤 책과 관련된 것이었다.조정환이라면 지금 들뢰즈, 가타리 사상을 활발하게 소개,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사회 메커니즘을 창안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다. 약 두 시간 반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국 자본주의를 보는 시각이 근본적이면서도 새로워서 귀담아 들을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안철수씨에 대해서 물었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첫째 기부라는 것을 통해서 그가 이전의 정치인들과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지 않나? 스스로 부를 쌓아올린 사람들 가운데 안철수는 큰 기부를 스스로 실행해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둘째, 그는 기존의 정당정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치 실험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묻는다. 당신은 진보인가? 그렇다면 민주당에 들어와야 하지 않나? 아니면 진보당에라도? 그러나 이 또한 기성 정당정치 틀이기 때문에 그 기성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그곳에 섣불리 들어가지 않는 안철수에게 오히려 호감을 느낀다.조정환씨는 시뮬라크르적인 가상에 얽매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필자의 생각에 자신의 날카로운 시각을 비교해 보여 주었다.그에 따르면 안철수씨의 기부는 유럽이나 미국의 자본가들이라면 수백년 전부터 쌓아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해 보인 것이다. 안철수씨가 진정으로 새로운 게 아니라 한국의 자본가 계급이 너무 천민적이었던 것이라 해야 한다. 그러나 기부는 사회를, 사회의 심각한 모순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대개 진보주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전철에서 적선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적선이 사회적 모순을 다만 완화시키거나 연장할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런 까다로운 진보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둘째, 기존 정당정치는 일종의 대의제다. 그런데 대의제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부장적 대의제, 다른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적 대의제, 마지막 하나는 구속적 대의제다. 첫 번째 것은 가족 내에서 아버지가 선거에 의하지 않고도 대표성을 갖는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고 마지막 것은 앞으로 와야 할 것이다.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우리에 의해 구속될 수 있는 대의제를 만들어야 한다. 안철수씨의 정치는 우리 대의제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그런데 조정환씨와 필자가 공유한 문제 하나가 있다. 이른바 진보라는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가 바로 북한 정권 문제라는 것. 지금 우리 사회는 과연 진보가 종북과 분리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진보당과 진보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필자는 안철수씨가 탈북자들을 위한 지원활동이 정당하다는 인식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진보와 종북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러자 조정환씨는 그들을 제명하자고 하는 것은 우리의 대의제를 위협하는 사고가 아니냐고 되묻는다. 역시 이른바 진보에게 북한정권 문제는 뜨거운 감자임에 틀림없다.

2012-06-07

1980년대에 사랑은 무엇이었나?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며칠 전에 대학동창생을 만났다. 여성이다. 어떤 심사 하는 곳에 갔는데, 마침 이 사람이 와 있었다. 여성이니, 이 사람이니 말했지만, 사실 잘 아는 사이고, 옛날 대학 다닐 때 1학년 때부터 알았고, 이런 저런 인간적 관계들로 뒤얽혀 있어 차라리 애증마저 없지 않다고 해야 할 사이였다. 살던 사람과 헤어졌다는 것이, 내가 그녀에게 들은 뒤늦은 사연이었다. 그러자 나는 단박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심정이 되어 우리 세대, 80년대의 사랑의 방식들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때, 내가 대학 다닐 무렵에 어떤 신문에 기사 하나가 조그맣게 난 게 있었다. 한 남학생이 한 여학생을 찾아가 그 앞에서 자살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두 사람은 미팅으로 만난 사이였고 다 만났다고 해야 손가락 몇 개를 헤아릴 정도였다. 그러나 남학생은 처음 본 여학생을 사랑했고, 여학생이 그를 만나주지 않자, 간청하고 매달리던 끝에 집에 찾아가 일을 벌이고 만 것이었다.지금도 사랑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많고 애증 끝에 상대방을 해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때처럼 단 한 번 만난 사람을 오매불망 쫓아다니다 제 감정의 열도를 못 이겨 죽어버리는 일은 찾기 힘들 것 같다. 그러니까 그때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는 환각이었다.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환각을 사랑해서 쫓아다니는 것이 그 시대의 사랑이라면 사랑이었던 것이다.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환각이었기 때문에, 서로들 자신의 환각을 쫓아 엇갈리는 사랑을 하다 쓰디쓴 실패를 맛보았다. A는 동창생 B를 좋아했는데, B는 다른 동창생 C를 사랑했다. C는 B를 사랑하지 않고 후배인 D를 사랑했고, D는 자기 동창생 E를 사랑했다. A는 남자였는데, 이 A를 사랑한 여자도 있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X였고, 이 X에게도 그녀를 사랑한 후배 남자 Y가 있었다. 그 Y를 더 후배인 Z가 사랑했다는 것도 그때 친구들 사이에 잘 알려진 얘기였다.그러나 이렇게 엇갈린 사랑에 목을 매고 가슴 아파 하면서도 정작 사랑을 다른 무엇의 대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때 젊은 사람들은 사랑을 다른 귀한 것과 바꾸려 하지 않았다.사랑은 무엇의 대가가 될 수 있나? 이광수의 단편소설 `윤광호`를 보면 남자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세 가지 조건이 등장한다. 첫째는 용모요, 둘째는 금력이요, 셋째는 학식이다.내가 젊은 시절을 보내던 1980년대에도 그런 조건들이 작용하고 있었을까? 분명 어디선가는 그러했을 것이다. 금력, 권력이 작용하지 않는 시대는 없고 욕망이 없는 시대도 없다. 하지만 그때 젊은이들은 많은 경우 그런 것들 때문에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바꿔 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같은 이상을 가진 일을 하다가, 서로 좁은 울타리에서 오랜 시간을 부대끼다가, 정이 들어서, 상대방이 안쓰러워서,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지언정 하루아침에 그 세 가지 조건을 따라 관계를 바꾸고 끊고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좌우한다고 생각하던 철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그 사람들의 사랑의 방식과 태도는 꽤나 비물질적이었다고 해야겠다. 그런 사랑의 환각이 너무 오랫동안 힘을 발휘한 까닭에 우리 세대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겨우 이제야 세상을 다스리는 힘들을 깨닫고 서둘러 철이 들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뒤늦게 속물의 대열에 합류하려는 것이겠다.1980년대에는 모든 것이 과격했다. 그러나 사랑이 과격해서 다른 가치를 돌보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저 1980년대가 우리에게 남겨준, 많지 않은 비물질주의적인 자산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2012-05-31

1980년대에 철학이란 무엇이었나?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그때 나는 대학교에 갓 들어가 철학 강의라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캠퍼스에서 만나는 선배들이며 친구들은 `입만 벌리면' 정반합이 어떻고,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이 어떻고 `양질 전화'가 어떻고 `부정의 부정'이 어떻고 하는 얘기만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헤겔 변증법이나 마르크시즘적 변증법을 아주 속화시킨 논리들을 마치 교과서라도 되는 양 이렇게도 배우고 저렇게도 배우는 것이다.고등학교 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같은 것을 읽고,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지만 고등학생이 그게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었다. 그 시절에 그래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라곤 까뮈의 `이방인'이나 `시지프스의 신화' 같은 것이었다. 이 철학적 조류는 그래도 `존재의 부조리'니,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느니' 하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알 것도 같은 소리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에 가면 삶과 죽음을 논한 이 부류의 철학 책이라도 한껏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대학에 들어가 철학이라는 걸 접해보려니, 도대체 이건 내가 생각하던 철학이 도무지 아니었다. 그것은 무슨 도식 같은 것이고, 그 도식 같은 `법칙'들을 가지고 자본가며 노동자며, 봉건제며 자본제며, 잉여가치며 물신성이며 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나도 3학년이 되었는데, 그해 봄에 어디선가 `강철서신'이라는 게 돌아다녔다. 내 선배들이나 가까운 어떤 친구들이 그런 것을 보고 있었고, 나도 분명히 그 가운데 한 편 정도는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첫 머리인지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박헌영은 왜 미제의 프락치가 되었는가' 하는 소제목을 달고 무슨 이야기를 펼쳐 나갔던 게, 지금도 그 구절만큼은 머릿속에 분명히 남아 있다.박헌영이라면 일제하에서 1950년 한국전쟁기까지의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미치광이 행세까지 해서 감옥에서 요시찰 인물로 풀려나와 해외로 망명했고, 나중에 다시 국내에 잠입해서 해방 될 때까지 대구니, 광주니 잠행하면서 끈질긴 투쟁을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박헌영이 왜 미제의 프락치가 되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답은 그가 종파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헌영은 그렇게 해서 김일성 일파에 의해 숙청당했다. 문학인 임화 같은 사람도 남로당 계열인지라 엇비슷한 죄목으로 사형을 당했다.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연달아 치러지고 나서 주체사상이니,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니 하는 것이 만들어졌다. `강철서신'은 바로 그 주체사상을 설파하는 문서였다.그런 것을 철학일지도 모른다고, 사상인지도 모른다고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면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는 철학적으로 볼 때 불행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486세대 상당수는 철학이 삶과 죽음을 묻는 근본적인 질문의 형식이 되어야 한다는 자명한 진실에서 멀리 벗어나, 도식 같은 `법칙'을 철학인 것처럼 착각하고, 주체사상 같이 조야한 사이비 사상까지 철학의 한 경향이나 될 수 있는 것처럼 좌고우면했었다. 그런 비철학적, 철학 미달적 사고로 어떻게 그 시대를 풍요롭게 헤쳐나올 수 있었겠는지? 사태가 그런데도 그나마 민주화운동들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길을 택하기도 하고 속류와 절연하는 길을 실험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지금 그 `강철서신'을 쓴 김영환 씨가 탈북자들을 돕다가 중국에 억류된 지 수십 일이라고 한다. 그는 그래도 자신이 벌여놓은 일들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다. 젊은 날 한때의 생각이 낳은 부조리를 씻어내기 위해 그렇게 애쓰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왜 그로 대표되는 486 세대의 어떤 부분은 그러한 경로로밖에는 1980년대를 고민할 수 없었는지, 가슴에 통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012-05-24

당신에게 못다 한 말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내가 사는 곳은 서울에서도 신촌. 신촌에서도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서강대교 방향으로 500m 정도 걸어가야 하는 곳이다. 나의 아침 행선지는 주로 학교, 집을 나서서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시간을 나는 즐긴다. 맑으면 맑은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걷는 것이 좋다. 그러면서 이것저것 살펴보는 게 또한 좋다. 아침 일찍 나오면 어느 때는 오전 7시 넘어서까지 밤새 일한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짐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내가 가끔 혼자 찾아가는 곳인데, 대여섯 군데 포장마차가 늘어선 중에 이 아주머니 집이 제일 늦게까지 연다.보통 때는 이 포장마차들이 밤을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어물 좌판이 벌여져 있다. 갈치며, 고등어며, 낙지며, 자못 싱싱한 어족들이 얼음 덩어리들과 함께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저 어족들이 하루를 싱싱하게 견딜 수 있을지 걱정하는 때가 많다.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날마다 아침마다 나와 앉아 채소를 다듬고 앉아 있는 할머니가 있는 곳이다. 이 분도 행상인데, 내가 보기에 보통 사람은 아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맑으나, 비가 오나 항상 나와서 한 번도 한 눈 파는 법 없이 부절히 손을 놀리는 모습은 마치 무슨 도를 닦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하루는 어떤 손님과 얘기를 나누는 것을 목격한 일이 있는데, 연세가 많이 돼 그런지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단다. 긴 세월 햇볕을 쐬어 온 흔적이 얼굴에 역력해서 피부빛은 새까맣다고 해야 할 정도이고, 주름살이 그 얼굴에 가득 담겨 있지만, 표정만은 참 안온한 것을 느낄 수 있다.또 조금 더 걸어가면 파출소 가기 전에 공원 있는 곳 앞에 포장마차가 하나 나와 있다. 아침이면 밥을 거르고 나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빵이 있고 우유가 있고 오뎅이 있는 포장마차인데, 이 집 역시 아침이고 낮이고 저녁이면 늘 그 자리에 그대로 붙박이처럼 가게를 열고 있다. 그 바로 옆에 공원 벤치에서 바둑 두는 할아버지들이 간식을 들 때도 꼭 이 집을 이용하는 모양이다.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아침에 어디론가 나갔다 밤에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것이 내 생활인데, 그러다 나는 시 한 편을 나도 모르게 지어내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당신에게 못다 한 말 / 미안하다는 말 / 내가 살아오면서 / 함께 숨쉰 당신 / 이렇게 힘들게 버려두고 / 나 어디까지 멀리 헤매었는지 / 내가 웃을 수 있는 것 / 비행기 타고 멀리 떠날 수 있는 것 / 적상추에 밥을 싸서 / 한 끼 먹을 수 있는 것 / 다 당신 때문인데 / 왜 이렇게 내겐 / 나만 중요했는지 / 미안하다는 말 / 이 말 하나 떠올리는데 / 내 걸어온 나날 전부를 걸도록 / 왜 그렇게 미련했는지 / 미안해 당신에게 /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 나와 함께 사는 당신 / 세상에서 가장 / 소중한 당신”시는 본래 이렇게 인용해 놓으면 맛이 떨어지는데, 더구나 잘 쓰지도 못한 것을 옮겨다 놓으니 열적은 느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최근에 내가 열심히 새롭게 만나고자 하는`당신`에 관해 쓴 것이다. 나는 이 `당신`을 내가 걸어가고, 차를 타고, 머물러 있는 곳 어디서나 만나게 된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도 `당신`이 걸어 나오는 것을 자꾸만 경험하게 된다.내 삶이 나 하나 있어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나날. 나는 작은 `나`에 머무르지 않고 `나`를 확장해서 큰 `나`에 이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이것은 나처럼 마음이 분명치 못한 사람에게는 힘든 과업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어떻게 하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이렇게 생각하려고 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2012-05-17

하회마을 생각

▲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봄 여행은 멋스럽다. 우리 산야는 하와이처럼 원색적이지 않지만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빛을 낸다. 겉으로만 보면 모르는 게 우리네 산야다. 가만 보아야 진정 아름답다는 걸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우리네 산야. 소박한 것 같으면서도 그 아름다움이 어떤 극치에 달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이 참 좋은 봄 여행이다. 병산서원 앞에 펼쳐진 강과 산과 모래밭의 절경은 여행 다녀온 지 몇 날이 되어서도 눈에서 사라지지 않고 영화 장면처럼 아련하게 머물러 있다. 포장 안 된 시골길을 산모롱이 돌아 들어가면 문득 펼쳐지는 고즈넉한 풍경. 그때 선비들은 마치 승려들처럼 산과 강을 바라보며 정신에 윤을 냈으리라.참으로 아름다운 여행길은 어느새 안동 하회마을로 이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나의 아름다운 감상은 방패연의 실이 끊어지듯이 허무하게 끊어져 버렸다. 하회마을을 본 까닭이다.사진에 나오는 하회마을 전경이 하도 아름다워 그만큼 바라지는 않았더라도 내심 기대를 품고 마을에 들어간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마을에 들어서니 동구 내 골목길들이 다 시멘트 콘크리트 포장이다. 옛 사람들이 그렇게 포장 치고 살았을 리 없건만 목조 건물들이 대부분인 마을에 어떻게 어울리지도 못하는 콘크리트 포장이란 말인가. 내 마음 한 구석이 무너져 내렸다.집들은 토담을 해놓기도 하고 돌담을 해놓기도 했는데 이 담과 대문 사이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공사를 하다 만 것 같은 살풍경을 노출하고 있기도 했다. 나는 충청도 예산군 덕산면 북문리의 시골 외갓집을 보아 왔기 때문에 옛날식 담장과 대문이 서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는 모습을 잘 알고 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서투른 장난을 해놓았단 말인가.한옥들은 새로 개축들을 했는데 기와를 올린 것이 꼼꼼한 마감 처리를 한 것 같지 않아서 마음이 그렇게 서운할 수 없었다. 선인들도 기와가 처마 끝으로 이어져 끝날 때 그렇게 하얀 회칠을 해서 대충 막아놓았었는지? 좋은 기와를 잘 써나가다 끄트머리에 써야 할 막새기와는 왜 꼭 빠뜨려 놓았는지 그 심사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좋은 기와 빛깔의 분위기를 `최종적으로` 망쳐놓고 마는 것이다.놀이를 하라고 그네를 만들어 놓기도 했는데, 그 그네 모양이 참 가관이었다. 동네에 튼실하고 훤칠한 나무라도 있어서 거기에 춘향이, 이도령 그네를 타도 될 듯이 매 놓은 그네라기는커녕 전기톱으로 살풍경하게 툭툭 잘라놓은 것 같은 목재를 가져다 그네 시늉을 내 놓았던 것이다.동네 전체가 무슨 원주민 모형 마을 같은 인상을 주는데 너무나 실망해서, 도대체 이렇게 돈을 들여 문화유산을 망쳐놓는 분들은 어떤 분들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 기묘한 문화유산에 영국 여왕이 다녀갔다는데 설마 이렇게 된 모양을 보고 간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 `단장`을 하기 전에 다녀간 거겠지,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까지 이니, 이것은 감상이 아니라 한탄이 되고 만 하회마을 유람.옛날에 외국 사람을 데리고 절 정취를 보여주겠노라고 덕산 수덕사에 갔다가 부끄러워 혼난 적이 있다. 중흥불사를 한다고 옛날 소박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어찌나 망쳐 놓았는지 돈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님을 절감했던 것이다. 하회마을도 그와 같아서 돈보다 정신이 먼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한 사람의 국외자로서 당부하고 싶다. 다시 지금 들어간 돈의 몇 배를 더 들이더라도 골목길의 시멘트 포장 걷어내고, 조야하게 시늉만 내 놓은 한옥들, 기와며, 대문이며, 담장들을 다 옛 멋이 살아나도록 바꾸어 주었으면 한다.안동, 영양. 참 굽이굽이 산야도 아름답고 동네도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하지만 하회마을만큼은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자연에 감겨 안긴 하회마을이 이토록 조잡하게 변질되었을 줄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2012-05-10